◈결코 정죄함이 없다 롬8:1 2026.03.08. 로마서 강해(33) 출처
◑도입 : 성경 전체의 최고봉인 로마서 8장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개역개정으로 한번 한 목소리로 같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
오늘부터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라고 불리는 로마서 8장,
또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라고도 했고,
신약의 가장 순수한 복음이라고 마르틴 루터가 말했던 롬8장을 봅니다.
또 다른 표현이 있어요. ‘롬8장은 바울신학의 절정이다. 신약의 에베레스트다.’
제임스 패커는 ‘롬8장은 성경 전체의 최고봉이다!’
로마서 8장에 대한 찬사가 이토록 많습니다.
▲우리가 이제 로마서 8장에 도달했는데,
우리가 롬8장을 보면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롬5장~8장까지의 맥락을 살피는 것이 되게 중요한데,
롬5장부터 시작해서, 특별히 8장에서 하는 말씀은 뭔가 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이 구원이,
얼마나 확실하고, 얼마나 최종적으로 안전한 것인가?” 하는 것을 확증해주는,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확신을 주는 본문입니다.
왜 이게 필요했겠습니까?
첫째는 우리가 구원받은 게, 우리 안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시험을 봐서 합격을 하고, 내가 열심히 해서 그 결과로써 얻은 구원이라면
우리는 나 자신을 보면 구원의 확신이 들겠죠.
그러나 구원을 받았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고 말씀하는데,
나 자신을 보면 여전히...
때로는 로마서 7장 후반부에서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말한 것 같은
그런 갈등과, 내재하는 죄와의 싸움과... 이런 것들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거죠.
자기 자신을 보면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
또 예수를 믿지만 우리 인생이 고단하잖아요. 정말 별의별 일들을 다 겪으면서 살아요.
그런 일이 올 때 ‘왜 하나님이 나한테 이렇게 하시나, 왜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나?’
이런 생각들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그래서 안팎으로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사실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다’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매우 약한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야마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고나서, *4장
5장, 6장, 7장, 8장에서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든든한 것인지,
얼마나 확실한지, 최종적으로도 얼마나 안전한 것인지를 말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 본문의 상황과,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조금 비교하자면,
조금 차이가 있는 건 뭔가 하면, 로마서 수신자인 그들은
당시 사실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고, 때로는 적대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주는 직접적인 불이익과 손해와 고난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확신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었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롬5장, 6장, 7장, 8장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 (구원의 확실성)
그리고 8장도 그 (구원의 확실성) 안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에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어요.
그것은 ‘프뉴마’라고 하는 헬라어인데, 영 또는 성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1번 나와요.
그러니까 로마서 8장이 모두 39절이거든요. 전체 39절에서 21번이나 나와요.
근데 두 번을 제외하면, 19번이 모두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럼 한번 계산해 보세요. 롬8장은 ‘성령’이 거의 두 구절에 한 번 정도 나옵니다.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고린도전서12장에 ‘프뉴마’라는 단어가 또 많이 나와요.
그런데 계산해보면 3절에 한 번 꼴입니다.
게다가 로마서 8:1~17절은, 압도적으로 ‘성령’을 강조하는 본문입니다. ‘성령’이 15번 나오죠.
이게 뭘 말하고 싶은 걸까요?
성령의 사역, 신자들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죠.
▲그러면, 조금 아까 제가 롬5, 6, 7, 8장의 대주제가
‘우리가 받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잖아요.
이것과 성령 안에서의 삶, 성령을 의지하는 삶,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주시는 축복과 특권들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이 축복과 특권의 핵심이 뭔가 하면 “확신”이에요.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리고 ‘내 삶의 자리가 어떻든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게 하는 것’
이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신자 안에서 베푸시는 축복과 특권의 핵심입니다.
존 스토트는 롬8장의 제목을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정하고 나서,
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 큰 주제, 이것 성령 안에서의 삶이라고 하는 큰 주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절대적인 안전이라는 큰 주제와 연결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8장이, 1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로 시작해요.
그리고 39절을 한번 보세요. 39절에 뭐가 없다고 말해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니까 1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
39절에서는 하나님에게서 절대로 끊어짐이 없다라고 말씀해요.
어떤 면에서 이거는 수미 쌍관, 그러니까 머리와 꼬리가 같습니다.
뭘 말씀하는 거죠?
우리가 받은 구원의 확실함을 말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흔들리지 않는 것이며, 뿌리 뽑힐 수 없는 것이며,
제거될 수 없는 것인지... 무슨 일을 만나도, 무슨 일을 내적으로 경험해도,
무슨 일을 외적으로 내가 공격받는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1절에 ‘정죄함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 39절에 ‘끊어짐이 없다’ 하는 사이에
중요한 주제들이 많이 나와요.
성령님, 양자됨,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문제, 피조물의 탄식의 문제,
기도, 섭리, 예정, 칭의, 영화 ... 이 주제들이 이 안에 가득히 들어있습니다.
로마서 8장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는 신자가 누리는
구원의 변할 수 없는 확실성과 최종적 안전함을 보여준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거를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흔들릴 때는 어디로 가라? 로마서 8장으로 가라!
그 ‘구원의 확신’을, 조금 더 자세히 본다면 5, 6, 7장을 함께 보라
▲바울사도는 로마서 7장의 후반부인 7:14~25절에서
‘성숙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얼마나 흔들림이 많은지’를 말씀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목사이고 또는 장로이고 또는 오래 신앙생활한
그래도 리더이고 이렇게 되면
‘나는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자기 스스로 속는 거죠.
바울은 로마서 7장 후반부에서 그런 자신의 투쟁을, 죄와의 싸움을 보여주면서
구원 받은 성도도, 잠깐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아니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은혜를 받은 사람인데, 내가 이런 죄를 짓다니...
아, 나는 안 돼.. 나는 어쩔 수 없는 못난 사람이야‘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런 경험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우리의 안전함을 확신시켜주는 것이 뭘까요?
‘정죄함이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8:1
분명히 죄의 현실이 있고, 그 죄 앞에 나는 넘어졌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그러세요? ‘난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그러세요.
이것만이 아니죠.
외부에서 주어지는 환란의 상황에서 너무나 고난이 깊어지면
그리스도인이 끝내 생각할 수 있는 건 이거죠.
‘하나님이 날 버리셨나? 내가 지금 이 지경인데
벌써 내가 1년, 2년, 3년을 지내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이 지경에서 나를 건져주시지 않는 건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어주는 건 뭘까요?
그거는 로마서 8:39절에서 말씀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너를 끊어낼 수 있는 건 없어!’
‘비록 네가 이런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끊어지지 않아!
심지어 죽음도 너를 끊어낼 수 없어!’ 라고 선언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8장은 안팎으로 믿음의 씨름을 감당하고 살아가야 하는 신자들의 삶에서
얼마나 위안이 되고, 얼마나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해주는 말씀인지요!
◑로마서 8장을 시작하는 8:1~4절은,
‘인간의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8:1절만 우리가 살피겠지만,
로마서를 시작할 때 바울사도가 적어도 3:20절까지
아주 강력하게 계속해서 주장했던 말씀이, 그게 뭔지 여러분 기억하시죠?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예외가 없다. 유대인 헬라인 상관없다.
그것은 인종과 종교와 기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예외가 없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다’
이게 바울이 반복해서 강조했던 주장이었습니다. 1:1~3:20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이렇게 강력하게 반복해서 주장을 했던 바울사도가,
지금 8:1절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말하자면 앞에서 말씀했던 것은 정말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모두가 죄인이다’
너무나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넌 죄로 죽었다.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고,
그 심판을 받고 나면 너는 지옥으로 가야 할 운명이다’
이게 처음에 바울이 강조했던 내용이었습니다. 1~3장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정죄함이 없다’ 8:1
이건 조건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라는 조건이 있지만, 제 말 뜻은
8:1절의 선언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조건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 전에,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영적인 상황은, *1~3장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그 진노가 쏟아져 내릴 것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근데 본문 8:1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죠. 어떤 일이 일어난 겁니까?
그렇게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던 분이,
이제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겁니까?
그것은 ‘율법’이라는 법칙, 죄를 지으면 죽어야죠.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것은 (죄의 삯은 사망은) 율법이 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상관없이,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방식의 믿음의 법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씀을 하는 겁니다.
이게 바울이 그 사이 (4~7장) 에서 했던 이야기들입니다.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죠.
불경건한 데도 불구하고...
정말 불경건하기가 짝이 없고,
‘저런 인간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면 나는 안 믿을 거야’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그런 인간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죄 없는 존재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죠.
▲이런 면에서 우리가 롬7장에서 바울이 말씀했던 것을 돌아보면,
신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모순적 존재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의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언되었지만, 그래서 의인이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죄와 싸우고 죄에게 굴복하기도 하는 ‘죄인’입니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내재하는 죄와의 싸움’이라는 것은
비신자였을 때는 그 싸움을 할 필요가 없어요.
내 안에 죄를 거스르는 성령이 거하시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내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죄와의 싸움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가 경험하는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바울사도는 롬7:14~25절에서, 자신의 현재적인 고백을 통해서 이것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자는 죄의 무게를 아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죄의 무게를 압니다.
여러분들은 죄의 무게를 아십니까?
그러니까 죄라고 하는 실재!
그냥 내가 살면서 잘못하는 일도 있고 등등... 이런 거 말고요.
그리고 때로는 내가 막 차를 밟아가지고 100KM로 가야 되는 도로에서,
130KM로 가다가 걸리는 이런 거 말고요.
‘죄가 내 안에 존재하는 실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걸 모르면 어떻게 죄와 싸우겠어요?
▲교회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설교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는 조지 휫필드가
이 분의 전기를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18세기에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주역이죠.
휫필드가 매우 격정적이고, 아주 그냥 대단한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이렇게 설교를 한 거예요.
「여러분 인생이 짊어지고 가는 짐이 많은데, 그 중에서 제일 무거운 짐이 뭔지 아세요?
그건 죄의 짐입니다. 죄의 짐보다 무거운 건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런 일을 만나고, 저런 일을 만나고,
그것이 힘에 겹도록 우리를 짓누르는 것들을 경험하지만,
죄의 짐보다 무거운 짐은 없습니다.
그러자 용기 있는 사람이 비아냥거리면서
"휫필드 선생님, 저는 죄의 무게를 미안하지만 전혀 느낀 적이 없고,
느끼지도 않고 살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휫필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영혼이 죽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죽은 시체 위에 무거운 바위를 올려놔 보십시오. 꿈틀도 하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는 말씀을 했습니다.
조지 휫필드의 말처럼, 성령 안에서 그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살아난 신자는,
죄의 무게를 느낍니다. 그래서 싸울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죄와 싸우는 겁니다.
▲여러분, 죄의 무게를 처음 느낄 때가 언제일까요?
인생에서 죄의 무게를...
죄의 무게를(심각성을) 처음으로 느꼈을 때, 사람은 최초로 회개를 하게 됩니다.
이게 회심입니다. 회심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죄의 무게를 느끼지도 못한 채, 회개를 할 수는 없잖아요.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회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나는 내 의식과, 내 의지와, 내 생각과, 내 지식을 따라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겠습니까? 네, 문제입니다! (그것도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실재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최초의 회개를 하고, 믿음 안에서 성장해가는 신자라면,
그는 로마서 7장 후반부에서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죄와의 싸움을 경험하고,
때로는 그 패배를 비참하게 여기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신자를 향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게 본문인 롬8:1절, 2절, 3절, 4절이에요.
그리고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신으로 인도하기를 원합니다.
1절의 선언만 오늘 우리가 살펴보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죄에 대한 처방인가 하면, 신자들의 죄에 대한 처방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이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어요.
1) 하나는 정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형벌을 받아야 하는 심판이 없다는 것이고,
2) 두 번째는 정죄를 느끼는 정죄감이 없다는 말씀예요.
▲1. 먼저 ‘형벌을 받는 심판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볼 텐데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재림하셔서,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고’
이렇게 최후의 심판을 믿어요.
‘최후의 심판을 믿는다’는 것은, 많은 함의를 가집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고백을 할 때, 약간 찜찜하거나 두렵지는 않습니까? 어떠세요?
‘심판’이라는 것은, 본질상 두려움을 유발하는 거거든요.
여러분이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지 않더라도, 증인으로 간다고 할지라도,
약간은 가슴이 뛰게 될 것입니다.
애플워치가 ‘당신의 심박수가 빨리 뛰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명히 메시지를 줄 거거든요.
‘심판’은 그런 거예요. 일단 두려운 거예요.
하물며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외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내 내면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전체를 놓고 심판하셔야 하는 그 심판대 앞에,
내가 피고인으로 선다는 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도신경을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입으로 되뇌입니다.
우리는 1년에 1분기만 하지만, (매 달에 첫 주일에만 고백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 사실을, 일주일에 한 번씩 입으로 소리 내서 고백하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는 형벌로서의 심판은 없다.’ *‘징계’는 있지만요.
이게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이게 ‘정죄함이 없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8:1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한 형벌로서의 심판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다 받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속하셨다고 우리는 얘기하죠.
갈3:13절을 제가 읽어드리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를 위해서’ 라고 말씀해요.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셔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려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려고요!
또 고후5: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이렇게 처리하셨습니다.
즉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님을, 죄 자체로 삼으셨습니다.
어디서? 십자가에서. 그리고 예수님이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말이죠.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성경에 일관된 해석입니다.
신자들에게는,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장차 받아야 할 형벌로서의 심판은 없다... 이게 8:1절의 의미입니다.
이게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형벌로서의 심판이 ‘유보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 이럴 수 있잖아요. 우리나라도 사형 언도를 받더라도
사형집행을 안 한 지가 벌써 수십 년 됐다고 그러잖아요.
1절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말씀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 행실을 보고 나서, 집행할 건지, 말 건지를 결정하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형선고는 이미 로마서 1장, 2장, 3장에서 사형선고는 내려졌어요.
‘죄인은 사형에 마땅하다고, 사형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판결이 났어요.
그런데 지금 여기서 말씀하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너를 향한 사형집행이 이미 일어났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에서!’ 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너는 사형이 이미 집행된 사람이야!’ 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롬6:6절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말씀에서
나타난 이야기입니다. 사형집행이 유보된 게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의 사형집행이 일어났다고 말씀합니다.
누구에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요.
정말 그렇다면, 더 이상의 사형집행이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완전히 이 사형집행으로부터, 이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성도는 두려움 따위에 붙잡혀 살아가지 않아도 되겠죠.
두려움이 우리를 짓누르거나, 성도가 두려움에 종노릇하지는 않겠죠.
뿐만 아니라 자유를 누리면서
‘나에게 이런 은혜를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을 향하여
애정과 사랑으로, 기쁨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섬기게’ 됩니다.
비록 자신 안에 내재하는 죄와 여전히 싸워야 하고,
때로는 그 죄와 싸워서 비참한 실패의 자리에 이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내가 범한 죄가, 나를 지옥으로 데려가지 않을 걸 아는 겁니다.
이건 제가 조금 이따가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릴 텐데,
이 의미를 아는 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너무 중요해요.
▲2. 정죄함이 없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1절의 선언은, 형벌로서의 심판이 없다는 게 첫 번째 의미이고,
두 번째 의미는 뭔가 하면 정죄감이 없다는 거예요. *정죄함=정죄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팀 켈러의 말을 좀 인용을 해서 설명 드리죠.
우리가 ‘성도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뒤집어서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이 하나님의 선언이 없다면,
그럼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라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죄의식과 자신의 무가치함에
필요 이상으로 큰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생길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매우 예민하게 되어서 자기를 방어하게 되고,
대인관계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기도와 예배를 통한 기쁨과 확신이 사라지고,
깊은 죄의식과 무가치함에 반작용일 수도 있는 중독 증세까지도 나타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동기부여가 생기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을 통제할 만한 역량이 줄어든다.
‘정죄함이 없나니’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그저 두려운 마음에, 억지로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지 않나요?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많지 않나요?
두려운 마음에...
「만약 그렇다면, 사랑과 감사에서 나오는 강력한 동기부여를 결코 경험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에 담긴 충만한 신비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8:1~13절의 한마디 한마디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 참된 의미를 다 놓치고 말 것이다」
이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해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관계가 있어요.
두려움의 지배를 당하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나 자신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그 사람이 요구하는 거짓된 자아를 만들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줘요.
두려움이 사라지죠. 내가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죠.
그리고 정말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죠. 그건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이죠.
이런 사람이 위선을 하고, 이런 사람이 거짓 자아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No
마틴 로이드존스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어요.
신자의 죄와, 비신자의 죄는 다르다 달라요. 어떻게 다른가 하면,
비신자의 죄는 작은 죄 하나라도 지옥에 가게 하는 죄입니다.
죄송하지만 잘 들으세요.
「비신자의 죄는 작은 죄 하나라도 지옥에 보내는 죄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법에 따른 처벌이 필요한 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죄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 또는 부부 사이에,
즉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그 관계를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한다면,
신자의 죄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거나 끊어내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피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전과 같은 깊은 기도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것입니다. 수치스러워할 것입니다.」
이렇게 비신자의 죄는 지옥으로 데려가는 죄라면,
신자의 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아 괜찮구나. 지옥에 가는 게 아니구나.
그리고 이제는 막 살아도 되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법을 어겨서 처형을 받는 것보다도, 그 관계의 깨어짐을 더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을, 그 관계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지옥에 가는 것보다) 더 싫어하고, 죄를 더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신자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은 8:1
형벌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자유함과 기쁨으로 사랑하는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모든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여러분 죄라는 거는 우리 안에 깊은 자국을 남겨요.
내가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대한 뭐 벌금을 내든지 감옥을 가든지..
그러면 ‘내가 죗값을 치렀다’고 스스로 양심이 가벼워 질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 마음에 자국을 남겨요. 그게 죄책감과 정죄감입니다.
이걸 지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죄책감과 정죄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 죄인이니까요.
이런 죄책감과 정죄감은 어떤 현상을 가져오나 하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를 못하게 해요.
보세요. 집에서 기르는 개도, 죄라는 것의 실제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사고를 치면 주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아시죠?
‘네가 네 죄를 알렸다’ 할 필요도 없어요.
개가, 주인이 외출한 후에 초콜릿을 다 먹어버렸어요.
그러면 보통은 주인이 귀가하면, 막 꼬리치고 기뻐하잖아요?
그런데 개가 숨어요. 꼬리 내리고 저쪽으로 가서 풀이 죽어 있어요.
개도 자기가 한 짓을 아는 거죠.
애기들도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잘못해서 혼날 때는 엄마를 못 쳐다봐요.
엄마 앞에서 눈을 내리깔아요. 죄책감과 정죄감이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이걸 구별한다면 이런 거죠.
죄책감은.. 내가 저지른 특정한 죄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것이고,
정죄감은.. 죄인으로 판결을 받는 나 자신에 대해서 느끼는 스스로의 (양심의) 자책감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이 두 가지로부터 결코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다음에 들어온 두 개의 감정이 뭐예요?
수치심과 두려움이에요.
죄책감과 정죄감이 그 전에는 없었다고요.
죄책감과 정죄감이, 수치심과 두려움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1절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 선언은,
우리가 가진 수치심과 정죄감에 대해서 뭐를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더 이상 수치심과 정죄감에 매여서 살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선언하는 겁니다. 그걸 선언하는 거예요.
△죄책감과 정죄감 아래서, 우리는 또 뭐를 할 수 없나 하면
하나님을 쳐다볼 수가 없어요.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거죠.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고
웨스트민스트 소요리 문답 1문에서 물어보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겁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가 없어요. 무서워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좋아할 수는 없어요.
하나님을 스스로 피하는 거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하나님이 너무 좋아요.’ 이런 말을 못하는 거예요.
그럼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면, ‘목사가 권하고, 주위에서 강권하니까 절반은 억지로’
신앙생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그렇게 기도를 그렇게 오래 할 수 있어요?’
‘저는 하나님이 좋아요.’ 이거보다 더 좋은 대답이 있나요?
하나님은 그걸 원하시는 거죠.
△우리는 또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누구와도 정죄감과 죄책감 아래에 있다면
나는 내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편안한 관계 속에 누구와도 들어갈 수 없어요.
이렇게 이 죄책감과 정죄감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을 짓누르는 죄의 무게와 관계가 있는 겁니다.
바울은 그래서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을 하면서,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될 것이고
또 로마교회 안의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의 갈등도 해결될 수 있는 단초를
여기서 제공해 줄 것이고,
또 그것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도 주겠죠.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삼위 하나님의 하나되심과 같은 하나된 교회를 이루어가는
예수님의 기도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17장
◑적용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예수님 앞에 왔던 여인의 이야기를 여러분은 아십니다. *요8장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어요.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 죽여야 돼요.
그때 무리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거죠. ‘예수님 당신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 말이 찔림이 되었는지,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다 떠나고,
예수님하고 그 여인 둘만 남았습니다. 그때 주님이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8:11
여러분 이 말씀은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해를 하십니까?
오늘 본문 1절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말씀하고 많은 점에서 연결이 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은, 너를 심판에서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너는 더 이상 정죄감 아래서 살지 않아도 돼!’ 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설명한 대로라면 ‘전적인 은혜’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되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시죠.
주님이 누구예요? 하나님이세요.
죽은 자와 산 자를 마지막에 오셔서 심판하실 하나님이세요.
그분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그러세요.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감히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 사건 후 2년이 지났습니다.
이 여인이 살아가는데, 어떤 사람이 이 여인의 과거를 압니다.
이 여인이 그런 전력을 가지고 있는 여인인지 압니다.
그리고 ‘너 그때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서 끌려 나왔던 그 여자잖아?
무슨 낯짝으로 지금 회당에 왔어?’ 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여인은 잠시 괴로움을 경험하겠지만,
그녀는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다시 힘을 얻고, 은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요8:11
주님께서 왜 이 여인에게 정죄하지 않는다고 이렇게 함부로 말하셨을까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해야 되지 않을까요?
“앞으로 내가 두 눈으로 너를 똑똑히 지켜볼 거야.
지켜보는 거는 5년이야. 5년 동안 앞으로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내가 지켜보고
그 다음에 ‘너를 정죄한다, 안 한다’를 판단할 거야” 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즉각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고 하십니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하자면 이 최초의 은혜의 경험이,
그 다음에 죄를 범하지 않고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힘이 된다는 것을
주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열쇠예요.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는 이 구원의 도리는
이 믿음을 내가 이제 너 죽을 때 마지막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들어보고
이걸 전부 추산을 해서 너의 구원을 결정할 거야라고 하지 않고
왜 최초에 ‘내가 믿을 때 하나님은 나를 의롭다고’
그 선언은 마지막 재판정에서나 할 수 있는 건데 왜 여기서 하냐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이 여인도 마찬가지죠. 왜 그럴까요?
우리가 두려움의 종노릇 하며,
마지막 날에 내가 하나님에게서 지옥으로 간다는 판단을 받을지,
천국으로 간다는 판단을 받을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지 않게 하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녀들에게 이런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도록 자녀들을 기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함을 가지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네가 잘하면 내가 은혜를 베푼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게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잊어버릴 수 없는 우리의 과거의 죄가 떠올라서 정죄감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특별한 고난을 겪을 때, 특별한 일이 나에게 터져서 괴로울 때, 감당할 힘이 없을 때
우리는 이런 생각합니다. ‘그때 내가 저지른 죄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벌주시는구나’
자녀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아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구나’
이거는 거의 우리에게는 습관과 같은 것입니다.
가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종 과거의 죄가 소환됩니다.
사탄은 우리의 양심을 향해서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바로 그 죄 때문에
네가 지금 이 꼴을 당하는 거야’ 라고 말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언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이라는 말을 이해하십시오.
회개하는 자에게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입니다.
여러분,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은, 우리의 회개를 조건으로 주어진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입니다. 회개가 우리의 죄 용서의 근거가 아닙니다.
우리가 죄 용서와 받을 수 있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고, 그의 흘리신 보혈 때문입니다.
우리의 회개가 조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졌을 때, 회개함으로 자백함으로,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다시 하나님과의 원래의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 칭의의 선언은 불가역적입니다.
*불가역적(不可逆的) :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거나 고칠 수 없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가, 오늘은 내일은 예수 그리스도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마지막 3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에게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 말은 얼마나 우리에게 안심이 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값싼 은혜, 지적 동의’로 예수 믿은 사람에게는, 이런 은혜가 주어지기 않겠죠.
그걸 사람은 판단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판단하시겠지만요)
중요한 건 이거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까?
이거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우리 인생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이 말을 다시 말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있는가?
그 구주를 따라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 은혜로운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람이 없다’
칼 바르트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8장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실존 전체를 뒤흔드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이 말 그대로 1절의 선언으로부터 시작해서, 8장 전체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이
저와 여러분의 실존 전체를 뒤흔드는 그런 은혜를 우리가 누리기를 기대하고 또 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