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을 생각할 때다 마5:43~48 2012.06.03. 출처
제가 설교문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꽤 오랜 시간을 멍하니 있게 됩니다.
머리 속에 뭔가 있긴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한 두 시간 멍하니 보내는 것은 다반사인데 어제는 그 시간이 좀 길었습니다.
네 시간 정도를 보낸 후에야 첫 줄을 썼습니다.
뭣 때문에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냐고 그러실 텐데,
어떤 생각이 하나 들어오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계속됐습니다.
줄기 하나에 잔가지가 수십 개 달라붙은 겁니다.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말씀을 빌어 요약하자면 이런 얘깁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책망할 일이 있어서 편지를 한 통 보내는데
그 끝에 이런 얘기를 하지요.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앞뒤 맥락으로 볼 때 이 말씀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두 다 죄다”하는 얘기입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제가 주의 이름으로 했던 일들을
모두 다 사랑으로 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순간 보니까 사랑이 빠진 채, 일을 위한 일을 하고 있었고,
의무나 책임감 때문에 하고 있었고, 습관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빠지면, 그건 소리 나는 구리고 울리는 꽹가리 일 뿐,
아무 유익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니라 그랬습니다.
그건 다른 말로는, 뭔가 한다고 했지만
결국은 죄를 짓고 있었던 게 아니냐 하는 생각까지 미쳤습니다.
좀 극단적인 결론 같지만 저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점검해야 될 문제라고 판단했습니다.
십자가, 복음, 교회, 선교 그 모두가 사랑 자체인데,
그게 빠지면 도대체 우리는 뭘 한다는 걸까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과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마침 오래 전에 아내와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결혼하기 전인데 직장인이었던 아내는,
월급날이 되면 학생이었던 제게 책을 몇 권씩 사 줬는데,
그때 제목만 보고 산 책 중에, 잘못 산 책이 있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란 책인데,
연애 기술인 줄 알았더니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당시에 저처럼 잘못 산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겁니다.
에리히 프롬의 얘기는 뭐냐 하면, 사랑이 중요한지 알면서도 그 일을 실패하는 데는
몇 가지 사랑에 대한 오해가 있어서라는 겁니다.
세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1) 첫 번째 오해는 사람들은 사랑을 ‘일’이 아니라
‘사랑 받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사랑의 문제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 받을 것이냐 하는 문제로
고착되어 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자들은 사회적 성공이나 부, 권력 이런 것을 획득함으로서 사랑 받으려고 하고,
여자들은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고 아름다워짐으로써 사랑 받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둘 다 사랑 받으려고 하는 태도이지, 사랑하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2) 사랑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사람들은 사랑이 ‘자신에게 있는 사랑의 능력’이 아니라
‘상대방의 사랑스러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즉 사랑이 어려운 까닭은 사랑스러운 대상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지
일단 그런 대상이 나타나기만 하면 일은 식은 죽 먹기이고,
얼마든지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지요?
사랑의 가능성을 사랑할만한 대상에게 의존한다는 거지요.
3) 세 번째 오해는, 사람들은 사랑을 시작할 때 경험하는 ‘사랑에 빠진 상태’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것의 문제점이 뭡니까?
사랑에 빠진 상태를 사랑이라고 한다면, 만약 그런 상태가 지나가면
사랑의 감정은 싹 사라지고, 더 이상 사랑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사랑은 금새 그쳐버릴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 다른 사랑의 대상을 찾아 나서겠지요.
사랑에 대한 이 세 가지 오해를 종합해 보면 어떤 얘기일까요?
결국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내 문제가 아닌 외부의 조건과 환경의 문제로 돌린다는 겁니다.
즉 외부의 여건에 의존한 사랑을 하려고 할 뿐이지
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봐야 될 이유가 뭘까요?
우리의 본성은 사랑을 갈망하고 있고, 그 사랑이 있어야 사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행복도 사랑 속에서만 존재하는 겁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인생의 궁극적 목적인 사랑에는 정성을 쏟지 않고.
성공하고 돈 벌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만 노력할까요?
◑오늘 본문은 그런 문제에 대한 답을 줍니다.
오늘 예수님은 산상 수훈 중의 가장 중요한 이 말씀을 통해 사랑의 본질이 뭐냐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게 뭘까요?
▲1. 첫째로, 사랑은 쉽지 않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38절 이하를 보면 오늘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데,
'네 원수가 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고, 속 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내 주며,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까지 동행해 주라' 그러십니다.
현실성 없는 말씀이라고 한다 그래도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어떻게 해 보겠는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이르러서는 전혀 실천 불가능한 얘기처럼 들립니다.
뭘 말하는 것이지요? 그만큼 사랑은 쉽지 않다는 겁니다.
▲2. 둘째로, 쉽지는 않지만 꼭 해야 하는 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그러실 때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말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 겁니다.
45절 말씀을 보면 그건 더 확실해 집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즉 그렇게 모습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것은 꼭 실천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은 쉽지 않지만 꼭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3. 셋째로, 사랑을 하되 아버지처럼 온전해야 한다 그러십니다.
쉽지 않지만 꼭 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거지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렇게 끝납니다. 마5:48
첩첩산중이지요? 어떻게 하란 말씀일까요?
쉽지 않지만, 꼭 해야 한다면 해 보기야 하겠지만
어떻게 하나님처럼 완전한 수준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오늘 이 말씀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랑은 쉽지 않다, 그러나 꼭 해야 한다, 그러나 대충이 아니라 완전하게 해야 한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떻게 생각하지요?
“사랑은 쉽다, 쉽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려워지면 언제고 그만 둘 수 있다”
이것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렇게 온전하게 사랑할 방법이 있기는 있는 걸까요?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시키시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할 수 없어 보이는 일도,
막상 우리가 시작하기만 하면 끌어갈 힘은 주님께서 직접 주십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제가 봉헌시간에 항상 드리는 기도를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우리가 복을 받되 영적으로 매일 성장하는 복도 중요하고,
사는 동안 물질의 어려움 없이 사는 복도 중요하지만, 만남의 복도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디 가도 '사람 잘 만나서 모든 일이 형통하는 관계의 축복을 달라'고
10년 넘게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관계' 라는 사랑의 학교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관계’라는 말에 오늘 문제의 답이 들어 있는 것을 아십니까?
관계란 말의 의미는 제가 늘 기도하는 그 정도로 그칠 게 아닙니다.
훨씬 더 넓고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다면
그건 관계라는 학교에서만 가능합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실제적으로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는 곳은 ‘관계’입니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이렇게 저렇게 맺는 모든 종류의 관계야 말로
가장 소중한 사랑학교 라는 겁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그 학교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 학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독특하지요.
우선 선생과 제자가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선생이고 제자입니다.
숙제 안 한다고 야단치거나 배우고 싶지 않다고 퇴학시키는 법도 없습니다.
잘한다고 상 주지도 않고 못 한다고 벌 주지도 않습니다.
입학식도 졸업식도 없지만,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무조건 이 학교에 다녀야 합니다.
만일 배우지 않으려고 한다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지만,
배우려고 맘 먹는다면 끊임없이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사랑을 배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크리스천이라면 이 관계라는 사랑의 학교에서 열심히 배워야만 합니다.
이 학교에서 배우는 대표적인 과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가까운 관계’라는 과목이고, 또 한 가지는 ‘불편한 관계’라는 과목입니다.
오늘 이 두 가지 과목에 대한 내용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어느 정도 사랑에 대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의 인도 하심 가운데 은혜 받고 깨닫는 시간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먼저 가까운 관계를 통해서 배우는 사랑에 대해서
가까운 관계란 누굴 말할까요?
두말할 것 없이 부모와 배우자, 그리고 자녀들을 말하겠지요?
그런데 이 가장 가까운 관계가 사랑하기 쉽지 않다는 게 아이러니입니다.
즉 가장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에 자주 실패하는 관계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원수를 사랑하라’그러면 사람들은 흔히 원한을 가진 원수가 없다 그럽니다.
그러나 사실 원수는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시지요.
“어휴!이 웬수야!”라는 말은 주로 누구에게 하던가요?
남편, 아내, 자식들에게 쓰는 말 아니던가요?
저도 제 어머니께 무척 많이 들었습니다.
이게 농담 같지만 진심이 담긴 말입니다.
가장 사랑해야 하는데 정작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가까운 사람들,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람들을 잘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올해 저희 부부는 결혼28주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요즘은 좋은 때를 보내고 있지만, 저희들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여기 와서도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이곳에 온지 3년쯤 됐을 땐가요?
어느 초겨울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내가 보이질 않는 거예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가족들에게도 얘길 하지 않고, 혼자 무단 외출을 한 겁니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 걱정하면서 별별 생각을 다 했는데,
오후 다섯 시쯤 됐더니 들어 온 거예요. 거의 여덟 시간 만에 돌아온 겁니다.
어딜 갔다 왔냐 그랬더니 그냥 답답해서 기차를 타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왕복을 하고,
이름 모를 역에서 내려서 한 없이 걸어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찻집에서 몇 시간을 앉아 있었대요.
더 어디를 가 보려고 해도 갈 데가 없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는 거예요.
사실 처음 몇 시간은 엄청나게 화가 났었는데,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걱정이 되고
마지막엔 제발 아무 일 없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날은 그냥 지나 갔지만 이 일이 제게는 굉장히 충격이었습니다.
아내의 인생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동안 목회자 아내가 겪는 어려움이야 혼자만 겪는 것은 아닐 테고,
외국에서 사는 것 역시 혼자만 겪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학생들 밖에 없는 교인들 뒤치닥거리 하는 것도 사모로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고국에 가고 싶은 마음도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엄마로서, 아내로서, 사모로서만 생각했지..
본인 개인으로서, 또는 한 여자로서 생각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내의 바람이 무엇인지, 고민이 뭔지, 꿈이 뭔지 이런 건 전혀 살피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제일 먼저 회개한 것이,
내가 아내를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남편, 괜찮은 아빠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들을 모두 내려 놓았습니다.
저는 그 일을 통해서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내려놔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큰 걸림돌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생각보다 너무 모자라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서로에게 너무 무관심하고,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불성실합니다.
익숙해져 버린 관계의 틀이 가장 사람들을 익숙한 무관심 속으로 던져놓게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우리는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못합니다.
가장 먼저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 가까운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과의 사랑을 위해서 할 일은 뭐냐?
우리가 스스로 그어 놓은 ‘적당한 사랑선’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적당한 사랑선’이란 무관심하기엔 미안하고 사랑하기엔 귀찮아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형식적인 사랑의 지대’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우리들 다 그런 라인이 있고 그런 지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자를 사랑하는 척 합니다.
자녀들에게 적당한 관심을 주는 척 하는 것도 이 지점일지 모릅니다.
적당히, 어정쩡하게, 그러나 미안하지는 않게…
이 ‘적당한 사랑선’을 폐지하지 않으면,
가까이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어제 오래 동안 갈등을 한 것도 이 부분입니다.
목사에게 있어서는 가까운 관계라는 건 가족들만 있는 게 아니라, 교회 지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교우들에게도 저는 그런 ‘적당한 사랑선’을 긋고
그 지대 안에서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놈아! 네가 하는 목회가 지금 진짜인 줄 아냐?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너는 가짜를 못 면할 거다. 이놈아!”
제가 어제 주님께 들은 책망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넘어가지만 어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참 죄송합니다.
제가 여러분들과 저 사이에 쳐 놓은 이 적당한 사랑선을 없애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제 의지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여러분 또한 가족이나 목사나 교회 지체들에게 쳐 놓은 이 적당한 사랑선을 없애시기 바랍니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랑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할 일은
그가 정말 하나님이 데려다 주신 사람이라고 믿는 겁니다.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 자녀, 여러분의 교우들을 하나님이 보내 주신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거짓으로 일이나 게으름 또는 불성실은 사라지게 될 겁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고, 또 사랑을 배우고,
더 성숙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어 가는 일은 우리 각 사람의 또 다른 소명일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친히 데려다 주신 이토록 소중한 사람들마저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좀 더 진실하게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써 봅시다.
사랑할 만한 일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이 일에 나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다음은 ‘불편한 관계’를 통해서 배우는 사랑에 대해서
불편한 관계란 어떤 관계일까요?
한 마디로 내가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괴롭히는 원수들 뿐만이 아니라,
나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함께하기 거북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포함합니다.
우리가 이 ‘불편한 관계’라는 과목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는 이 과목을 꼭 배워야 합니다.
▲<언터쳐블>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습니다.
보실 기회가 있으면 꼭 한 번씩 보시기 바랍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드리스라는 사람과 필립이라는 사람이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드리스는 아프리카에서 와서 가진 것이라곤 멀쩡한 몸뚱이와 넉살 밖에 없는 흑인 청년이고,
필립은 프랑스의 1%안에 드는 상류사회 가정의 자녀인데
불행히도 전신마비 장애를 가진 백인 청년입니다.
두 사람은 간호인과 고용인으로 만나게 되지요.
필립은 너무 솔직하고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드리스에게
상류층 사람들에게 느낄 수 없는 매력을 느낍니다.
드리스 역시 초호화 생활의 호기심 때문에 얼떨결에 간호인 생활을 받아들인 터였습니다.
아주 대조적인 두 사람이 만났지요?
드리스는 필립이 장애인이라고 해서 조심스럽게 대하거나 말을 가려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들 대하듯 농담도 서슴없이 던져대지요.
그런 드리스의 모습에 필립은 점점 마음을 열게 되지요.
어느 날은 필립의 친척이 나타나서 드리스의 전과 기록을 거론하면서
더 이상 집에 그를 들여놓지 말라고 충고하는데,
바로 거기서 필립은 오히려 친척에게 화를 내면서 드리스를 변호합니다.
이 두 사람은 그야말로 대조적인 정도가 아니라
충분히 ‘불편한 관계’의 상징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에게 천천히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지,
어떻게 돈독한 신뢰와 우정을 쌓아가는지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 줍니다.
불편한 관계의 전형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통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서로에게 전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불편한 관계 속에서도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랑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랑을 위해서는
먼저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랬는데,
불편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과의 사랑을 위해서는
반대로 결코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을 내려 놔야 합니다.
만약 필립이 처음에 드리스를 보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마음을 닫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저런 사람과는 결코 우정을 나눌 수 없어!”그랬다면
그렇게 멋진 사랑과 우정을 배우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 다음 가까운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과의 사랑을 위해서는
‘적당한 사랑선’을 없애야 된다고 했는데,
불편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려면 반대로 ‘적당한 거리’를 없애야 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사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먼 거리는 적당한 거리가 아닐까요?
결코 다가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다가서도 늘 그 만큼의 거리가 있잖아요?
그래서 불편한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이 ‘적당한 거리’라는 너무나 높은 장벽을 구축해 두는 겁니다.
이 적당한 거리를 없애지 않으면,
우리는 불편한 관계 속에서 사랑에 대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말 겁니다.
사랑엔 아무런 진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불편한 사람들과의 사랑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들도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사람들이라고 믿는 일입니다.
이 믿음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이 믿음이야말로 불편한 관계 속에서도
사랑을 배우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소중하고 유익한 사람들 뿐 아니라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심지어 내게 괴로움을 안겨주는 사람들조차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보내 주신 사람이라고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사실 그들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편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어제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주님!정말 그렇군요. 다 제 선생님들이군요!”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화 얘기를 한 번 더 하자면,
필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성과 펜팔을 하고 있었습니다.
설렘과 소망으로 펜팔을 계속해 갔지만,
자기가 장애인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녀를 만날 엄두를 못 내지요.
이것을 잘 알고 있던 드리스는 몰래 그 여성과 연락해서
마침내 필립과의 만남을 주선해 줍니다.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실제로 필립과 그 여성은 결혼해서 지금도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불편한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고, 거기서 사랑을 배우기 시작하면,
그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천사일지도 모릅니다.
▲마치는 말
오늘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래야만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만약 이 조건대로라면 현재 이 모습으로는
지구상 그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것은 사실 문자의 의미를 넘어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은 사실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모든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우리는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위해 어려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까운 관계와 불편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사랑을 배우고
노력하고 훈련하며 성숙한 사랑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들의 태도인 겁니다.
여러분!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 위해 기울여왔던 인생의 허다한 노력을 이쯤에서 접읍시다.
이제 내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합시다.
예의바르고 사랑스러운 대상만 게 아니라,
거북하고 불편하고 사랑스럽지 않게 보이는 사람에게도 다가갑시다.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더라도 의지를 가지고 더욱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다!
지금은 다시 사랑을 생각할 때입니다.
이제는 사랑을 받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사랑을 하는 쪽에서 뭔가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이만큼 받았으면 됐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사랑을 드려도 되는 때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의 동심원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전엔 그 동심원이 내게로 내게로 오그라들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밖으로 밖으로 퍼져 나가게 해야 할 때입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사랑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이 여러분을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좋고 가슴 벅찬 선물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주변의 관계를 돌아보고, 사랑을 다시 생각하고 실천해서
하늘의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의 한 주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