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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9장 형통, 하나님의 손이 내 삶을 빚어 가신다

LNCK 2026. 3. 29. 08:0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리더쉽, 목회자           출처

 

◈형통, 하나님의 손이 내 삶을 빚어 가신다         창39:1~5       2026-02-27 ]요셉시리즈4]

 

▲스톡데일 패러독스            

미 해군 장교였던 제임스 스톡데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베트남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서, 무려 8년 동안 수영소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혹독한 고문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 사람은 종전이 가까울 무렵에서야 간신히 석방되었어요. 무려 8년간 갇혀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풀려난 뒤에, 많은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혹독한 환경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까?’

 

이때 그의 대답은 굉장히 의외였어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긍정적으로만 생각했던 모든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그 안에서 여러 가지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근거 없는 긍정에 빠진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낙심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번 크리스마스가 되면 석방이 될 수 있겠지..’라는 기대를 가졌는데

그게 안 되면... 스스로 절망하고,

‘내년 부활절이면 반드시 풀려날 거야’ 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막상 부활절이 되어도 그게 안 되면,

또 좌절하고 그렇게 몇 번씩 좌절하다 보면, 스스로 인생을 끝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스톡데일)은, 그 안에서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여전히 똑같은 환경 가운데 있지만, 넉넉히 이겨내는 사람들을 살펴보니깐

이런 마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현실은 지금 갇혀있다. 그렇지만 반드시 풀려날 것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안의 환경에서 오늘을 열심히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온 이론이 무엇이냐면 ‘스톡데일 패러독스’입니다.

어떤 의미냐면,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을 동시에 붙드는 태도입니다.

 

‘결국 나는 승리할 거야’ 라고 하는 절대적인 믿음과 함께

또한 지금의 냉혹한 현실을 직면하는 용기를 갖는 거예요.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이의 균형을 이루었을 때, 주어진 모든 환경을 극복해 나갔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는 요셉이 바로 이러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꿈을 받았어요.

그가 꾸려고 꾼 것이 아니라, 꿈이 꾸어졌습니다.

 

곡식단이 자기에게 절을 하고, 해달별이 절을 하는 꿈을 꾸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죠. 그런데 그의 현실은 어땠습니까?

형들에게 팔립니다. 노예가 됩니다. 억울한 누명을 씁니다. 감옥에 갇힙니다.

약속은 받았지만 현실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그 가운데 요셉은 무너지지 않았어요. 요셉은 대책이 없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곧 풀려나겠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순간을 살아가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도 포기하지 않는 거예요.

‘믿음의 스톡데일 패러독스’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감옥도 인정합니다. 종살이도 인정합니다. 그리고 꿈도 부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을 직면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는 거예요.

‘고난과 하나님 사이의 균형’, 그 인생이 요셉의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편안하게 집안에 계십니까? 구덩이에 빠졌습니까?

종으로 끌려갔습니까?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까? 감옥에 갇혔습니까?

그 환경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셉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현실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 수 있겠습니까?'

그 삶의 도전을, 지금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밤에 우리가 막연한 (믿음의) 낙관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굳건한 말씀과 섭리 위에 설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먼저 본문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우리가 지난번에 잠깐 살펴보았던

유다와 요셉을 한번 비교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오늘 우리가 보려고 하는 장면은 창세기 39장인데

이 본문의 말씀은, 원래 37장과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가운데 38장에 유다의 인생이 들어가 있습니다.

 

창37: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이렇게 37장의 끝절이, 39:1절로 곧바로 연결되는 것이, 문맥이 자연스럽습니다.

창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이렇게 연결되는게 맞습니다.

근데 중간에, 38장에 갑자기 유다 이야기가 들어가 있죠.

창38: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그러니 의도적으로 성경은 요셉의 이야기 속에 유다를 집어넣음으로써 이 둘의 인생을

함께 같이 봐야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는 구성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창37장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은, 야곱의 족보를 언급하고 있어요.

37: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그 야곱의 족보를 언급함에 있어서, 두 명이 중요하기 때문에

두 명의 인생을 골라서 선택해 놓은 것입니다. 그들이 요셉과 유다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인생은 너무나 대비되면서도 너무나 닮아 있어요. 공통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살펴보면 한 일곱 가지 정도가 있는데

 

1) 둘 다 망한 인생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어요.

요셉은 한순간 쫄딱 망한 인생을 대표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품 안에서 하루아침에 채색옷이 벗겨지고 쇠사슬에 묶여 종으로 팔려갑니다.

하루아침에 쫄딱 망했어요.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라는 믿음이 그 안에 있었을까요?

기대하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반면 유다는 서서히 망해가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는 헤브론(야곱의 집)을 떠났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꽤 오랜 시간을 지냅니다. 그곳에서 결혼합니다. 아들 셋을 낳았어요.

그 가운데 아들 둘이 죽고, 아내가 죽고, 또한 며느리와 동침하기까지

그는 서서히 무너지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인생 전부가 서서히 망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2) 둘 다 집을 떠남과 동시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강제적으로 형들에게 팔렸어요. 팔리자마자 고통당합니다.

유다는 자의적으로 집을 떠납니다. 집을 떠나자마자 비참해져요.

그러니 헤브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떠난 두 사람의 동기는 다르지만,

집을 떠나자마자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 둘 다 옷과 염소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염소, 그리고 옷은 빠질 수가 없죠.

형들은 아버지를 속이는 도구로써, 채색옷에 염소의 피를 묻혀 아버지를 속입니다.

 

또한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있었을 때, 그의 옷이 벗겨져

보디발의 아내가 보디발을 속이는 도구로써, 옷이 사용되게 되죠.

 

또한 유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창녀 옷을 입고 있었던 며느리 다말에게 속임을 당하죠.

그러니 이 두 사람은 동일하게 ‘옷’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인생에 큰 속임을 당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죠.

 

4) 둘 다 여인의 유혹을 받았어요.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쉽지 않은 유혹이었어요. 보디발의 아내가 예뻤을까요? 안 예뻤을까요?

엄청 예뻤을 것입니다. 권력자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넘어가지 않았어요.

 

반면 유다는 변장한 며느리의 유혹을 받습니다.

유다는 꼬시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말을 걸고 넘어가 버립니다.

두 사람 다 여인의 유혹을 받게 됐어요.

 

5) 둘 다 이방인과 결혼합니다.
야곱의 족보 가운데 열두 명의 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유다와 요셉 두 사람이, 이방인과 결혼하게 돼요.

 

요셉은 애굽의 제사장 딸과 결혼하게 됩니다.

유다는 가나안의 이름도 모를 여인과 결혼하게 됩니다. 놀라운 사건입니다.

 

6) 둘 다 아들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어요.

유다가 다마를 통해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첫째가 먼저 손을 뻗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뱃속에 있던 둘째가

그 형을 잡아당기더니만, 역전을 시켜 뱃속에서 둘째 베레스가 터트리고 나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의 할아버지 되었던 야곱이 못다 이룬 꿈을

뱃속에서 그의 손주 베레스가 이루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베레스야말로 야곱의 피를 제대로 전수받은 아들이라 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 집안의 장자의 흐름이 둘째 베레스에게 흘러가게 됩니다.

 

요셉 역시 두 아들을 낳았어요. 장자가 므낫세이고, 둘째가 에브라임입니다.

야곱이 죽을 때쯤 되어서, 그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해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때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와서

자신의 아버지 야곱에게 축복기도를 받게 합니다.

 

이때 어떻게 아이들을 앉게 만드냐면, 야곱의 오른손에 장자를, *므낫세

왼손에 차자를 두고 손을 편하게 두고 기도하도록 앉혔어요. *에브라임

 

그 순간에 갑자기 야곱이 손을 X자로 엇갈리더니만

둘째에게 오른손을 얹어서 축복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요셉은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믿음을 따라 그들을 그렇게 축복해 줍니다. *하나님이 어떤 계시를 주셨겠죠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둘째에게 오른손이 올라갔는데

그 에브라임을 통하여 그 집안의 장자 계열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지파가 어떻게 되냐면,

유다의 둘째 아들 되는 베레스를 통하여 다윗이 나오고, 나중에 남유다 나라를 이룹니다.

남유다의 대표는 유다 지파가 되는 거죠. 베레스 지파가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여로보함인데, 그의 지파가 에브라함이에요.

요셉의 차자가 되는 에브라임, 그를 통하여 북이스라엘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니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다와 요셉의 "둘째들을 통하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죠.

 

7) 마지막 공통점은, 둘 다 고난을 통해서 정금같이 변합니다.

둘 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어요.

여러분은 둘 중에서 누가 더 고통을 많이 당했다고 생각이 들으십니까?

 

요셉은 유다에게 팔렸어요. 유다는 요셉을 팔았습니다.

둘 다 집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누명을 쓰게 되고 감옥에 들어가고,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인생을 보내게 되죠.

 

반면 유다는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둘째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어요.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요?

 

더군다나 아내도 죽었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요?

그 가운데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모르는 사이에 며느리와 동침하게 됩니다.

그리고 쌍둥이를 낳게 되죠.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고통을 많이 받았을까요? 가늠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두 사람이 전부 다 고통 가운데 거했지만

하나님이 그 두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찾아가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붙잡으셔서

결국 정금같이 그들을 세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요셉과 유다의 이야기는, 동일한 시간대에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37장의 집을 떠난 동일한 시간대에, 다른 장소에서 벌어졌던 두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하나님은 두 장소에 동일하게 섭리하셨어요. 두 인생을 동일하게 붙잡아 주셨어요.

 

그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는 돌이켜 39장 이후에 집으로 돌아와, 장자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요셉 역시 힘든 인생길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형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것을 믿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이 의도적으로 유다와 요셉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목적은 분명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자의적으로 주님을 떠나든, 아니면 억울하게 팔려나가든

그 사람에게 주어진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이 목적한 그 일들을 우리 가운데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의 관점을 소유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시105:17절 말씀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아멘

 

위 17절 가운데 하나님의 요셉을 향한 관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이냐면,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다’

하나님이 요셉을 앞서 보내신 거예요.

 

거기에 대한 요셉의 형편은 무엇입니까? ‘종으로 팔렸다’

거기에 대한 형들의 형편은 무엇이겠어요? ‘우리가 종으로 팔았다’

 

이 사건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형편은 무엇이겠습니까?

창37:33절을 보니까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동일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관점과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누구는 팔린 거고, 누구는 팔았고, 누군가에게는 악한 짐승이 잡아 먹힌 거예요.

그런데 그 사건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앞서 보내셨어요.’

 

여러분 이 관점의 길을 축복해요. 우리 인생을 향한 다양한 사람들의 해석이 있을 것입니다.

나 역시 내 인생을 향한 해석이 있을 거에요.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해석이 무엇이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은 결국 하나님의 의도대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그 렌즈를, 하나님의 것으로 끼고 볼 수 있기를 축복해요.

 

동일한 어려움 가운데 있어도, 그 시각이 다르면,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숫자 6이 있습니다.

이 6자를 바라볼 때 이쪽에서 바라보는 분들은 어떻게 보입니까?

보는 방향에 따라서 6이 될 수도 있고, 9가 될 수도 있는 거죠. 

 

여러분,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려다볼 수 있기를 축복해요.

땅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내 인생에 무엇을 의도하고 계실까?’

항상 그 관점을 잃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셉의 현실은 쇠사슬에 묶여있어요.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영원한 고통은 아니에요.

조금 전에 보았던 시105:19절 말씀 보니까 다음처럼 되어져 있어요.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언제까지냐면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영원한 고통은 없다는 말이죠. 그 고통이 끝날 때가 있어요. 그것을 믿으십시오

그 고통의 목적이 있어습니다.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105:19b

 

그 고통의 목적은 무엇이냐면 ‘그를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를 단련시키냐면 ‘말씀이’ 그를 단련시킵니다.

 

말씀은 우리를 단련합니다. 환경이 우리를 단련하는 것이 아니에요.

말씀이 우리를 단련하는 거에요. 본문에서 ‘단련하다’ 라는 의미는

‘금속을 불로 재련시키다, 정련시키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불순물을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금만 남겨 가치있는 존재로 만들다,..

이 뜻이 ‘단련하다’ 라고 하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 요셉을 단련하는 것은 배신, 종살이, 감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을 주셨어요. 이제 그 말씀과 함께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그의 인생의, 말씀으로 빚어지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를 지금 단련시키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꿈을 먼저 주시고, 꿈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꿈을 먼저 주세요. 그리고 꿈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꿈의 말씀으로, 그를 고난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그를 단련시키시고,

그를 만져 결국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죠.

 

여러분 대장장이가 언제까지 금속을 불로 태웁니까?

그 안에 모든 불순물이 빠질 때까지 태우는 거예요.

 

여러분 대장장이가 언제까지 금속을 망치로 내려 칩니까?
대장장이가 원하는 모습이 될 때까지, 계속 내려치는 것입니다.

 

대장장이가 언제까지 부싯돌로 그 금속을 갈아냅니까?

언제까지 가냐면 그 금속 가운데 대장장의 얼굴이 비칠 때까지,

깨끗한 존재가 될 때까지 그 금속을 가는 거예요.

 

결국 대장장의 손 안에서 불순물이 제거되고, 그의 인생이 희어지고

그의 인생에서 대장장의 얼굴이 보일 때까지, 끊임없이 단련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대장장이가 칼을 만들 때, 그 금속 날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본다고 하죠)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인생도 단련시키십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현실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현실로 자기를 평가하지 않아요.

우리는 현실이 무너지면,, 내 인생이 무너졌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이 형편없으면.. 내가 형편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현실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나를 동일시켜 나가는 거죠.

 

우리가 계속해서 요셉의 인생을 살펴보는 가운데

정말 요셉처럼 하나님의 관점에 붙들려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요셉의 종살이>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듯이 요셉의 인생은 여러 가지로 정리해볼 수가 있는데

첫 번째는 타양살이, 그 다음에는 종살이, 그 다음에는 옥살이,

그 다음에 총리살이... 결국 모든 것이 섭리살이가 됩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이 종살이 가운데 벌어졌던 에피소드 하나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영적인 비밀을 하나 캐내게 되는데,

그것은 무엇이냐면 ‘형통의 삶’입니다.

 

‘요셉의 인생이 형통하다’ 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인생을 설명하는 형통이라는 단어는, 오늘 본문에만 등장합니다.

창39장에만 ‘요셉이 형통하다’라는 말이 3번 나오고, 다른 장에는 등장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형통을 제대로 보기를 원한다면, 39장을 깊게 묵상해야만 됩니다.

 

우리 39:2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라고 되어 있죠.

 

39:3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또 한번 ‘형통’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형통’은 되는 23절입니다.

 

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러니까 39장은, 처음에 ‘형통’이 2번이 나오고,

가장 끝절에 ‘형통’이 한 번 나옴으로써, 39장 전체가 형통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근데 보십시오 39장의 내용은 요셉이 어디 있었을 때의 상황입니까?

종이 되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였어요.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어둡고 힘들고, 앞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 가운데

‘형통’이라는 단어가 세 번 쓰이게 됩니다.

 

요셉이 인생에서 다른 부분에서 ‘형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형통’이라는 단어가 요셉의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만 쓰였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17살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그리고 30살에 총리가 되죠.

그러니까 이 39장부터 이야기가, 이제 앞으로 13년간의 이야기의 초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13년간 노예살이와 종살이를 감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보통 노예로서 10년 정도 살았다고 보고요.

감옥에 들어가서 3년 정도 살았다라고 계산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본문 창39장 처음 부분 이야기는 (보디발 집의 종살이)

그간 그의 인생이 10년 동안에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

대표하는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39:1~19

 

오늘 우리가 이 요셉의 인생에 벌어졌던 ‘종살이’ 이야기를 함께 살펴 봄으로써,

형통의 의미를 두 가지로 한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형통’은 하나님의 목적이, 나의 인생을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형통이란.. 하나님의 목적이 나의 인생을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요셉이 쇠사슬에 메여서 애굽에 끌려왔습니다.

도단에서부터 애굽까지 거리는 500KM 이상이 됩니다.

굉장히 먼 거리를 그는 쇠사슬에 묶여 끌려왔어요.

 

당시 기후 조건을 볼 때, 3주에서 ~ 한 달 정도 끌려왔을 것입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요셉 안에 어떤 마음이 있었을까요?

큰 고통과 좌절과 억울함과 원망의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그의 인생안에 소망을 발견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애굽이라는 곳에 떨어졌어요.

그 나라에 처음 왔습니다. 피부색이 다릅니다. 언어가 다릅니다. 문화가 다릅니다.

그 가운데 갑자기 물건처럼, 시장의 진열대 가운데 서게 됩니다.

 

이 당시 영화들을 보면, 노예들을 잡아와서 갑자기 진열대 같은 곳에 세워 두게 됩니다.

그러면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값을 부르고 흥정해서, 노예를 사가게 되는 것이죠.

 

요셉 역시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서게 됐을 거예요.

그 노예시장이 열리는 순간에, 애굽의 친위대장 보디발이 노예를 사러 나왔습니다.

여러분 친위대장은 누구입니까? 권력의 핵심의 자리에 있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에요.

(과거 개역에는 ‘시위대장’으로, ‘개역개정’에는 ‘친위대장’으로 나오죠. 39:1)

 

지금으로 말하면 경호실장, 혹은 안기부장 정도 되는 위치에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은 친위대장이에요. 왕을 친위하는 장군이었습니다. 고위 공무원이에요.

더군다나 감옥을 관리했는데, 그 감옥이 그의 집에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감옥이 사설로 운영되는 곳이 많았어요. 법과 제도가 미비했던 시절)

 

창40: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그러니까 보디발인데 집 안에 감옥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보디발은 개인 사저에 살지 않고, 관저에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그의 집은 공적인 영역이에요.

 

그 공적인 영역 안에서 생활하는 노예들은, 보통 노예가 아닙니다.

아무나 그 안에 들어와서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보디발은, 직업상 어떤 성향이 강한 사람이냐면, 의심하는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친위대가 되면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됩니다. 누구든지 왕을 암살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 그의 직업 중에 일부였어요.

더군다나 얼마나 많은 종들을 부렸겠습니까? 그는 척보면, 척일 것입니다.

사람 보는 눈이 훤히 열려있는 사람이 아마 보디발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보디발이 요셉을 선택합니다. 왜 보디발은 요셉을 선택했을까요?

그 많은 노예인 가운데, 왜 요셉을 보디발은 선택했겠습니까?

그의 눈빛이 살아있었던 거예요. 그의 눈빛이 절망이 아니었어요.

그의 태도가 죽을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노예인데 품격이 있었던 거예요. 당당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디발은 요셉을 선택합니다.

 

여러분 지금 요셉이 당당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의 눈빛이 살아있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그는 보디발 눈을 사로잡을 만큼의 매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39:2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애굽사람의 집에 있는 원인을 뭐라고 말하고 있냐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집에 있을 수 있었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여러분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우리와 언약적 관계 속에서만 쓰는 특별한 단어인데

여호와라는 단어가 요셉의 인생 가운데 오직 39장에만 등장합니다.

 

언약에 신신하신 하나님이.. ‘여호와’인데

그 여호와라는 이름은 요셉의 인생 가운데 39장에만 등장하는데, 무려 7번 등장합니다.

다른 데는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요셉의 형통

그런데 요셉이 39장의 가장 힘든 인생길을 보내고 있을 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함께 하셨어요. 무슨 말입니까?

그가 종으로 팔려왔지만,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심령을, 그의 눈빛을, 그의 인생을 붙잡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 가운데 있었지만, 절망하지 않았던 것이죠.

성경은 그를 보고 ‘형통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통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형통’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형통에 대한 국어사전에 대한 해석은 이와 같습니다.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 되어감’입니다.

형통,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의 의미가 되는 것이죠.

내 뜻이 그냥 이루어지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이 ‘형통’의 의미처럼, 모든 사람이 자기 뜻을 다 이루면,

이 세상이 형통할까요? 모든 사람의 뜻이 다 이루어지면, 이 세상이 형통할까요?

모든 수험생이 서울대를 들어가면, 서울대가 서울대 될까요?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면, 부자가 부자 되는 것입니까?

 

더군다나 여러분, 형통한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형통할 수가 없습니다.

형통은 자기 뜻이 다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밑에 있는 사람들을 부려먹겠어요.

그러니까 (세상적 의미의) 형통한 사람 밑에 있으면, 형통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세상 기준으로 볼 때, 가장 형통한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보디발입니다. 그야말로 진짜 형통한 인생 아닙니까? 성공한 사람이에요.

관저에 살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 잘못 들면 그냥 감옥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는 왕을 지키는 사람이고,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형통한 사람’으로 불릴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형통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왕을 지키면 뭐합니까? 나라를 지키면 뭐합니까? 아내를 지키지 못하는데...

 

그의 아내는 정욕에 메어 있었어요. 정욕에 묶여있어서

요셉에게 매일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구걸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보디발의 인생이 행복했겠어요? 그는 세상의 기준에 형통한지 모르겠지만,

성경의 기준에 형통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이라는 단어는 ‘짜라흐’ 인데

어떤 의미가 있냐면 기본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다, 성공하다, 번성하다, 일이 이루어지다’

라는 의미가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앞으로 나아가다’입니다.

 

즉 의역하면 어떤 것이 ‘형통’이냐면,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를) 밀고 나간다’ 그 사람이 형통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셔서,

하나님의 목적이 내 인생을 밀고 나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형통인 것이죠.

 

형통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과정 중에 있는 거예요.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그 삶의 모습을 ‘형통하다’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올해 표 말씀으로 붙잡고 있는 말씀 역시

그 말씀 안에 ‘형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죠. ↙

 

수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동일한 의미의 ‘형통’이라는 단어가 쓰여져 있어요.

성경에서 ‘형통’이라는 단어가 쓰여진 모든 상황은 어떤 상황이냐면,

전쟁 중이거나, 감옥 중에 있거나, 굴속에 있거나, 하인으로 있을 때,

형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상황은 힘들고 어렵지만, 그 가운데서라도 내 인생을,

하나님이 그 사람을 끌고 가고 있다면,

그 영혼을 형통하다 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지금 당한 나의 인생을, 내 인생의 결론으로 보지 않고

과정 중에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내 인생에 초청하여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긴 모든 사람을 형통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한순간도 그 상황 가운데 주저앉지 않았어요. 그는 형들에게 팔렸습니다.

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종으로 팔려왔어요. 그런데 그 순간에도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간미수범이 되어서 감옥에 갇혔어요. 그 순간에도 주저앉지 않았어요.

언제 풀려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을 향하여서 성경은 '형통하다'라고 말을 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보면, 요셉의 인생은 답이 없습니다. 답이 없어요. 노답 인생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그를 보고 형통하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요셉같은 인생의 고난을 겪으면, 현재를 믿음으로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보통 어려운 일을 만나면, 두 군데 상황에 우리가 매이게 돼요.

 

첫 번째, 과거의 일입니다. 그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그 마음이, 그 생각이,

그의 인생의 시제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은 과거에 묶여 있어요.

억울합니다. 화가 납니다.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매여 살아가요.

 

또 하나, 미래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을 바라보니까 답이 없어요.

현재 답이 없는데, 어떻게 미래를 위한 도전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내 인생은 지금 노예인데, 감옥에 갇혀있는데,

쇠사슬에 묶여있는데, 뭘 더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요셉의 인생은 누가 봐도 과거에 묶여 있거나, 미래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인생은 어떠합니까? 그는 날마다 현재를 살아갑니다.

끌려가면, 끌려가는 동안에 최선을 다합니다. 종이 되면 종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간수가 되면 간수로 최선을 다합니다. 총리가 되면 총리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죠.

 

우리는 그의 인생이 총리가 되어서 형통하다?’ 아니에요. 그는 원래 형통했어요.

그는 원래 형통한 인생이었고,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총리의 자리로 인도하셨을 뿐입니다.

 

여러분, 모든 순간에 형통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현재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간에, 여러분의 미래가 얼마나 불안하든지 간에,

현재를 살아가십시오. 현재를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형통’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같이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절 말씀도 보니까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의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형통’ 앞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가 붙어 있습니다.

 

23절 말씀도 우리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성경에서 ‘형통’이라는 단어가 쓰일 때마다, 공식적으로 나오는 것은 무엇이냐면

‘여호와께서 함께하셨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기를 축복해요.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요.

하나님은 늘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우리가 늘 함께 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분을 믿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형통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 하나님, 그분께 고개를 흘려 그분을 바라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요셉의 입장에서 보디발 집의 노예가 된 것은, 절망적인 상황일 수도 있어요.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그의 집에 관저 안에 감옥이 있는데,

어떻게 도망치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요셉이 그 집의 노예가 된 것이 우연입니까? 섭리예요.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를 만나기 위해서 왔어요.

 

요셉은 애굽에 노예가 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에요. 총리가 되기 위하여 왔어요.

그런데 히브리 사람이 어떻게 하면 애굽의 왕을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가능성 자체가 없어요.

 

그러니 보디발은 어떤 존재냐면, 바로를 만나기 위한 사다리 한 칸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 사다리 한 칸에 올라 탄 거예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계속해서 올라가다가, 바로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칸, 한 칸 그렇게 전진해 나아가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지금 요셉의 (총리가 된) 인생을 보기 때문에, 우리가 요셉을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가 지금의 우리 인생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시겠어요?

 

우리가 요셉의 인생의 전체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의 인생을 보듯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듯, 우리를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환경이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우리 인생을 향한 목적이 우리를 끌고 가는 줄 믿습니다.

 

◑2. 두 번째 형통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형통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꼐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아멘

 

여러분, 보디발은 계속해서 보게 되는 것이죠. 요셉을 보게 되는 거예요.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의 눈빛이, 그의 행동이

다른 종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습니다.

 

요셉은 아마도 종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애굽 언어를 배웠겠죠. 문화를 익혔겠죠.

주인의 말을 잘 준행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이해해야 되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를 빠르게 습득했을 것입니다.

 

그의 언행이, 그의 품행이 다른 종들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그리고 보디발은 그 순간에 느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신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을 보았더라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요셉은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아요.

자기가 말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보디발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요셉의 종의 생활은, 그의 주인마저 감동받게 만드는 생활이었어요.

그는 종으로 살아가되, 최고로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의 주인을 감동시키는 인생을 살아갔어요.

그래서 그의 인생에 대한 최고의 평가를 받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 이 말을 들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 사람이 형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칭찬할 수 있잖아요.

그 사람 안에 있는 어떤 면을 칭찬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칭찬이 최고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다!’

그거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을, 어떻게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보디발 역시 요셉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를 대할 때 파트너로 대해요.

 

39: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여러분 그럴 수 있겠어요? 여러분, 땅 문서를 누구한테 맡길 수 있겠어요?

여러분의 통장, 잔고 맡길 수 있겠어요?

 

여러분 보디발의 직업은, 의심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은 의심해요.

그래야 그 자리를 지킬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의심하는 사람이, 요셉에게 자신의 모든 소유를 맡깁니다.

종으로 그를 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파트너로 대했다는 거예요.

그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걸 관리해 줘’ 라고 의존했다는 것이죠.

 

▲이 모습은 아브라함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아브라함은 창21장에서 아비멜렉을 만나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이죠.

 

그때 아비멜렉이 다음처럼 말을 합니다.

창21: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아비멜렉이 가만히 바라보니까, 이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러니까 제발 나와 계약을 맺어줘.. 내가 너 덕분에 복 받기를 원해’ 라고

지금 아비밀렉이 먼저 찾아와 아브라함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일이 지금 요셉의 인생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

‘보디발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긴지라’

 

▲여러분, 형통한 사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사람은 바닥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주변 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상황은 어쩔 수 없이 어렵다 할지라도

그 사람과 함께하는 하나님이 보여지기 때문에, 그 사람을 무시할 수가 없는 거죠.

 

하나님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이 존중받을 수 있기를 축복해요.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이, 주변 사람들한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노예였는데, 노예의 인생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이 보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보디발은, 사람 보는 눈이 대단했어요.

그 선택을 따라, 그는 큰 복을 받습니다.

 

39: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보디발이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기자, 그의 집에 복이 내렸어요.

엄청난 축복을 보디발이 받게 됩니다. 이것이 형통한 자의 모습입니다.

 

형통한 자는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과 함께한 자는 복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그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은 복을 받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 주변이 복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이 상황 가운데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복이, 요셉에게 흘러가고 있는 거에요.

 

우리 창 12: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작년에 우리 교회가 붙잡았던 표어 말씀이죠.

‘너는 복이 될지라!’ 다른 말로 ‘형통한 자가 될지라’입니다.

 

복이 되어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복이

주변으로 흘러가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최고로 복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을 만났기 때문에!

여러분이 형통한 자이니, 제가 여러분께 붙어있으면 제가 복받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정말 복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멘!

 

◑3.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가운데 강조점 중의 하나는 무엇이냐면 “손”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 가운데 “손”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등장해요.

우리 한번 살펴볼까요?

 

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요셉이 형들의 손에서, 이스마엘 장사꾼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 사람들이 요셉의 인생을 주관하는 것처럼

그의 손에서 보디발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4절을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39: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보디발은 요셉을 종으로 샀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손이 요셉에게 할 일을 정해주고,

요셉은 그 명령을 따라서 그의 재산을 관리하게 되는 것이죠.

이제 요셉의 모든 인생은, 보디발의 손 안에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우리 12절 말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39: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보디발이 집이 없으면, 요셉의 인생은 보디바리 아내의 손에 있었어요.

그 손이 그를 유혹합니다.

마치 요셉의 온 인생이 그 여인의 손 안에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 손을 뿌리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마지막 손이 등장합니다.

 

39: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요셉은 이제 간수장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어요.

그 간수장은 요셉에게, 그 감옥 안에 있는 모든 일을 맡깁니다.

이제 요셉의 인생은 간수장의 손 안에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손>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등장하고 있어요.

요셉의 인생 가운데 여러 사람의 <손>이 묻어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입혀주었던 손 때가 있어요.

채색옷 형들이 벗겨내고 팔아버렸던 형들의 손 때, 상처의 손 때가 묻어있습니다.

 

보디발의 손에서 이끌림 받았던 종된 손 때가 묻어있는 것이죠.

또한 감옥에 들어갔을 때, 종된 감옥의 죄수로 있는 인생의 손 때가

그 가운데에 묻어져 있는 거예요.

 

요셉의 인생 전쟁 가운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이 본문 가운데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그 모든 사람들의 손을 통하여 그의 인생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로, 그 모든 사람의 손을 통하여, 그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사람들의 손은, 또한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손길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 사람이 형통한 사람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없지만,

그 하나님의 손에 인도를 받는 그 사람, 그 사람이 진짜 형통한 사람이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하나님의 손때가 많이 묻어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형통한 사람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셉의 인생 가운데 형통이라는 단어가 쓰였던 모든 장면은,

아버지 집에 있을 때가 아니었어요. 왕궁에서 총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어둡고 가장 춥고, 가장 외롭고, 가장 고된 시간 가운데,

요셉의 인생을 평가할 때 ‘형통’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어요.

 

우리 역시 우리가 형통한 자가 되기를 원하는데,

그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언제 증명해낼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뭔가 잘 나갔을 때, 우리가 원하는 옷을 입었을 때, 원하는 자리에 올라갔을 때,

그때 ‘형통하다’ 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요셉처럼,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좌절 가운데 있지만

‘나는 지금 형통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 인생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과정 중에 있습니다. 나는 오늘을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나는 형통한 자가 되기로 결단합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