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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8장 증인의 자리

LNCK 2026. 4. 1. 11:0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고난주간>     출처

 

◈증인의 자리                   요18:12-27                2026.03.30.

 

※성경 통독할 때 겉핥기로 넘어가는데, 본문을 자세히 보니, 내용이 피부에 와 닿습니다.

 

◑안나스에게 심문 받으심                    

 

▲요18: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누구에게로 끌고 가냐 하면, 안나스에게로 끌고 갑니다.

안나스는 원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로마 정부에 밉보여서 해임이 됩니다.

(원래 성경적으로는 종신직이나, 로마 정권이 해임시킵니다)

 

그런 보기 드문 과정을 겪은 인물이에요.

그런데 해임된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왜 예수님이 끌려갔을까요? *유대는 제정일치 사회

 

이 사람은 해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더 막강한 배후 세력으로서

여전히 유대 종교의 최고 정점에 있었던 실세입니다.

그 아들도 세습으로 대제사장이 됐고, 또 사위 가야바도 대제사장이 됩니다.

 

이렇게 유대 종교가 타락하니까, 유대교 최고 수장이 '패밀리 비즈니스'가 된 거죠.

가족이 돌아가면서 합니다. *대제사장 직

 

이렇게 예수님은 먼저 안나스에게 끌려갔다가,

그 해(18:13)의 실질적인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사위 가야바에게로 넘겨지죠. 18:24

 

가야바도 심문 끝에 최종적으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기게 됩니다.

이렇게 굉장히 그 과정 하나하나가 조밀하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장면을 보다 보면, 마치 영화의 긴박한 장면처럼 이렇게 구성이 돼있어요.

한 인물에 포커스를 맞췄다가, 갑자기 다른 인물에 포커스가 모아지고,

카메라 렌즈가 왔다 갔다 하는 교차가 이루어지는 걸 봅니다.

 

특별히 예수님에게 조명되었던 렌즈가, 갑자기 베드로에게 모아지고,

베드로에게 조명되었던 렌즈가, 갑자기 예수님에게로 모아지고 하면서,

이 교차 과정을 통해서, 성경은 어떤 긴박함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싶은가를, 여러분들이 깊이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18: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이고, 현직 대제사장입니다.

 

요18: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라'

 

앞에 어떤 스토리가 있었냐면,

요11:49~50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사실 이 가야바의 예수님을 향한 발언은, 굉장히 정치적인 발언입니다.

'저 한 사람(예수님)이 시끄럽게 구는데, 저 사람 하나만 제거되면 온 세상이 조용할 텐데...

그리고 로마 정부와 우리의 관계도 별 문제가 없을 텐데...

저 한 사람 때문에 왜 이렇게 세상이 불안하고, 소요가 일어나고, 시끄럽게 되느냐?'

해서 대제사장인 지도자 입장에서 한 얘기입니다.

 

(*유대자치권이 왕과 대제사장에게 있었죠. 왕은 정치, 자체 군사적 권한.

대제사장은 종교, 사법적 권한을 가졌죠. 유대 전통을 인정해 준 거죠.

그들은 로마 총독의 통제를 받고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벌써 발언했던 가야바의 발언입니다.

자기가 이 발언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한 거예요.

자기는 자기의 시선에서, 자기의 철학에서, 자기의 판단에서 한 얘기예요.

 

요11:51~52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멋모르고) 미리 말함이러라'

 

가야바는 열심히 자기 일을 해요. 그렇죠? 세상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자기는 열심히 나름 자기 꾀를 내서, 자기의 판단을 통해서, 열심히 살아요.

못된 짓도 하면서 열심히 살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악인의 열심마저도,

하나님의 구속의 완성을 위해서 이루어가시고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18: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앞서 나왔던 요11:49~52절 말씀을 언급한 거죠.

이 가야바는, 자기 나름 유대 민족을 생각했겠고, 조국 이스라엘을 생각했겠고,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해서 한 이야기인데,

 

예수라는 사람, 시끄럽게 구는 사람 한 사람만 제거되면 좋겠다.. 하고

이런 단순 애국의 논리에서 이해를 했을 겁니다.

 

가야바의 이 발언이 예수를 죽이는 게 아니에요.

예수에 대한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갈 뿐입니다. 믿습니까?

 

▲요14: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이제 예수님에게 조명되었던 렌즈가, 갑자기 다른 인물로 초점을 맞추는데

예수님의 가장 애제자였던 베드로에게 시선이 모아집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지금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여기(대제사장 관저, 법정)까지 따라왔어요.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신학자들은 이 제자를 요한으로 추정합니다.

 

'다른 한 제자', 즉 요한은, 대제사장하고 어떤 인연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요한은 그 친분 덕분에, 예수이 잡혀 오신 대제사장 관저 뜰에 들어갈 수 있었고,

베드로는 요한의 옷자락을 붙잡고 뒤따라 들어간 것입니다.      주1)

 

▲요14: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요한)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요한이 대제사장과 직접 안면은 없다 하더라도,

대제사장 수하의 사람들과는, 안면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주1)

 

그래서 자기가 먼저 대제사장 관저(예수님이 지금 거기 계시죠)에 들어가고,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도 대제사장의 관저 뜰로 데리고 들어옵니다.

'저랑 같이 온 사람인데, 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한 거죠.

 

자 그런데 이런 미세한 사연 하나까지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소용되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놀라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미세한 발자국 한 걸음, 동작 하나,

하루 속에 벌어지는 사소한 만남 하나까지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쓰십니다.

 

그러니까 온통 인생의 시간은, 하나님의 미션을 이루어가는 현장입니다.

오늘 새벽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한 이 하루가, 하나님 나라의 엄청난 하루가 될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 머리카락 하나 하나까지도 세고 계십니다. 믿습니까?

 

자 그래서, 이제 그 대제사장 관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한번 보실까요?

 

▲요18: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런데 이렇게 요한의 연줄로, 대제사장의 관저 뜰에 들어가게 된 베드로,

이게 어떤 사연의 실마리가 됩니다. 즉 '베드로의 배신'의 배경이 됩니다.

 

네, 차라리 그런 인연조차 없어서, 베드로가 그 뜰 안에 들어가지 못했더라면

이런 슬픈 (그의 배신)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겠죠.

 

그런데 요한이 대제사장 (직원들)을 잘 알고 있는 바람에,

베드로도 뜰 안에 들어갔다가, 그 여종의 지적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종의 지적이 굉장히 재미있어요.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여종이 굉장히 의심이 돼서 물은 게 아닙니다. 그냥 '당연히 아니겠지' 하고 물은 겁니다.

즉 이것은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고 물었던 겁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이렇게 물은 거예요.

'설마 당신이 이 사람(예수)의 제자는 아니지요?'

 

그러니까 문지기 여종은 무슨 대답을 기대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아마 이런 대답을 기대한 거예요.

 

그런데 그 여자의 말투에,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덜커덩 넘어갑니다.

'설마 당신은 그의 제자가 아니죠?'

'저 아닙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자, 베드로가 악해서 그랬을까요? 약해서 그랬을까요? (부인했을까요)

정답은 둘 다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첫 번째, 자기도 모르게 얼떨결에 무너집니다.

너무나 기습적인 질문을 받고, 순간적으로 여종이 원하는 대답을 해 준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자기도 모르게 무너지는 것은,

저 밑바닥에 깊은 어떤 성향이 뿌리 박혀있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태도예요.

 

예수님을 여기까지 따라 다녔지만, 수없이 예수님의 말씀도 많이 들었지만,

예수님의 그 정서가, 제자들의 정서 사이에 녹아지고, 섞여지고, 버무려진...

깊은 사랑의 관계가 아직 올바르게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랑했던 스승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저는 제자 아닌데요?" 이럴 수 있어요?

절대 이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제자들을 위해서 죽으려 하세요.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약하고, 또한 악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그 어떠한 악의 본성이 밑바닥에 깔려있었다는 얘기예요.

 

우리도 정신 안 차리면, 이렇게 된다는 거죠.

결정적인 순간에, 아주 찰나의 순간에,

자기 행위로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18: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여기서 재밌는 표현을 쓰죠.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자 여기 '서서 쬐더다'는 말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앞서 18:5절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근데 그들과 함께 지금 누가 서 있습니까?

유다가 함께 섰던 자리에 (동산에서 성전 경비대 체포조가 서 있는 자리에),

지금 베드로가 함께 (대제사장 관저에서 성전 경비대와 함께) 서 있어요.

 

"함께"가 중요합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그분 예수님을 모릅니다' 라고 부인하는 동시에

자기의 서 있는 위치가 어느새 옮겨져 있는 것을, 자기도 스스로 눈치 못해요.

자기가 (동산에서의 유다처럼) 지금 관저에서 성전경비대와 함께 서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그렇습니다. 자기도 눈치 못해요.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추운 새벽에 곁불을 쬐기 위해서 서 있는데,

 

그 자리는, 대제사장의 측근들, 예수를 붙잡아 온 무리들과 함께,

거기서 곁불을 쬐면서 누가 서 있어요? 베드로가 서 있어요.

 

불과 몇 시간 전에 18:5절에서, 가룟 유다가 그들과 함께 서있던 똑같은 모양으로,

지금은 그 자리에 베드로가 서 있어요.

 

베드로는 이 직전까지도 누구와 함께 있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같은 겟세마네의 기도 속으로 들어가서, 처절하게 기도하시던 그 밤에,

베드로는 함께 깨어있지 못하고, 깊은 잠에 떨어진 결과가...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그의 위치가 지금 옮겨져 있어요.

문제는 본인도 그 사실을 지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의 필체와 기록의 구성을 보면,

너무너무 심리적인 날카로운 것들을 다 폭로시킵니다...

 

▲요18: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지금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에게서, 예수님이 심문을 받으십니다.

유대 자치권의 사법권은 대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 구약부터 내려온 전통이죠.

안나스가 대제사장 그룹의 우두머리 실세라서, 그에게 제일 먼저 예수님을 연행해 온 거죠.

 

이제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이 되는데, 예수님이 받으셨던 첫 번째 심문이죠.

그런데 두 가지를 물었어요. 

 

-먼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관해서 물었고

-두 번째는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19

 

여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것들이 폭로가 됩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조심해서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요18: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대제사장이 물었던 질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특별히 그 제자들에 대해서' 였습니다.

'당신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요? 당신은 뭘 가르쳤습니까?'하고 물은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신 거예요.

'나는 몰래 숨어서 말한 적도 없고, 은밀하게 가르친 적이 없다.

공중장소에서 공개적인 석상에서, 성전에서, 회당에서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하나님의 나라와 교훈을 설명했고 가르쳤다'

 

그러면 이 얘기를 지금 누구도 듣고 있죠?

그 곁불을 쬐고 있는 제자 베드로도, 그 증언을 듣고 있을 거에요.  *관저 뜰

 

그러면 자기 스승이 지금 끌려와서 그런 얘기를 했을 때,

베드로가 옳은 위치에 서 있었다면, 어떻게 해야 맞는 겁니까?

'아 맞습니다. 우리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고, 또 우리들에게 직접 가르쳤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끌려와서 심문을 받을 만한 어떤 언사도, 행동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이 대답 속에서, 뭘 요구하시는 겁니까?

증인으로 나설 것을 요구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에 대해서!

 

지금 예수님의 이 증언을 듣고 있는 베드로에게,

지금 증인으로 부르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미 (관저 입구를 지키는 여종에게)

그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나는 모른다'고 부인해 버렸습니다.

 

증인의 자리에서 실패가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먼저 관저 입구에서 부인해 버렸으니, 지금 관저 뜰에서 증언도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요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예수님은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지금 베드로를 넌지시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이 자리(관저 재판정)에도 증인이 있다. 그 증인이 말할 수 있다'

아 이게 가슴이 막 쿵쾅거리는 느낌이 들어오지 않으세요?

 

이건 베드로와 요한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에요.  

지금 그 자리엔, 주로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어요.

갈릴리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 뿐이었을 겁니다.

물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가르치셨지만, 주로 갈릴리에서 가르치신 거거든요.

 

더욱이 이들이 누구입니까?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애제자들이었어요.

한 번 '이 때를 위함이 아니니이까?' 하고, 나설 타이밍이었습니다. 에4:14참조

 

▲요18: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영원한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모형에 불과한 인간 대제사장이 모욕을 겪었다고,

그의 아랫사람이 예수님을 칩니다. 예수님이 얻어맞았어요.

 

하나님의 아드님이, 피조물에게 수치와 모독을 겪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을 설명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을 박히시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셨다'는 물리적인 고통에만 집중하지만,

 

그러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사람이 가장 감내하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모욕감이에요. 그리고 수치입니다.

이것만큼 큰 고통이 없어요.

 

육체적인 고통은 얼마 지나면 회복이 돼요.

그렇지만 사람이 모욕을 겪고, 수치를 당하면... 그건 오래 가는 정신적 고통입니다.

 

그 영화에도 보면, 어린 시절 모욕을 겪은 것 때문에,

복수하느라고, 큰 범죄를 저지르는 영화들이 많죠.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지금 린치를 당하고 수치를 겪으면서, 모독을 겪고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얼떨결에, 관저 입구에서,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이,

약한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악하다고 제가 표현을 하는가 하면,

그 악함이 우리의 속에도 깊이 뿌리내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스승이요 주님이, 수치와 모독을 겪고 있는데도, 지금 베드로의 태도를 보세요.

베드로가 어떻게 했어요?

 

▲요18: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예수님의 입에서 결국 본론이 나옵니다. '증언하라!'

이 말은 또 다른 말로 '여기에도 나를 증언해야 될 사람이 있다'하는 그 부르심이에요.

 

▲요18: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이제 안나스는, 재판의 요식적 절차를 갖추기 위해서,

그 해의 공식적 대제사징인 사위 가야바에게로 보내버립니다. 넘겨버립니다.

결정은 안나스에게서 이미 난 거죠.

 

그래서 이제 24절부터는, 안나스의 재판에서 가야바에게로 재판이 넘어갑니다.

 

◑가야바의 법정에서 심문 받으심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서 안나스와 가야바의 법정(가옥)은 같은 건물은 아니었으나,

매우 가까운 곳에 붙어 있거나, 하나의 큰 단지 Complex 내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당시 대제사장 가문의 구조는 거대한 뜰 court을 중심으로

여러 채의 건물이 연결된 형태였으며,

안나스의 집과 가야바의 집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거나, 한 울타리 안에 있어 뜰을 공유했죠.

 

▲요18: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베드로의 두 번째 부인

 

여러분 여기서 ‘불’이 등장을 해요.

아까 18절의 불 쬐던 장소와 동일한 곳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마당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 거죠.

 

그런데 ‘불’ 이라는 단어가, 요21장에도 딱 등장을 합니다. *안트라키아

갈릴리로 낙향한 베드로가 허탈한 새벽을 맞으며 빈 그물을 끌어올릴 때

예수님께서 해변가에 찾아오셔서 숯불을 피워 놓으시죠. 요21:9

 

거기에 떡과 생선을 구워놓으시고, 허기진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 먹자’ 바로 그 숯불과 같은 단어를 씁니다. *안트라키야

 

베드로가 그 새벽에 그 해변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는데, 하필 숯불이 피워져 있어요.

약 1~2주 전에, 자기가 예수님을 배반하던 현장에 피워져 있던 숯불이,

해변가에 다시 재현되고 있어요. 베드로는 그 숯불을 보자, 움찔 했을 거예요.

 

그래서 혹자는 ‘예수님은 놀라운 심리학자’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를 골탕 먹이려고 그랬을까요? No

‘너 이거 기억나지? 뭐 찔리는 거 없어?’ 이렇게 한번 떠보려고 숯불을 피워놨을까요?

 

심리학에는 이런 회복의 방법이 있죠.

어떤 상처는, 그 상처당한 그곳으로 가서 회복을 해야 돼요.

그걸 자꾸 연고나 바르고 싸매고 덮어서.. 상처가 회복되질 않아요.

오히려 정면 돌파가 상처 회복에 확실한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실 이 베드로를, 온전히 증인의 자리로 다시 부르기 위한 그림이었습니다.

 

△여기 본문 25절을 다시 보면,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나는 그의 제자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 불쬐는 베드로 옆에, 붙잡혀 와서 서 계신 상황입니다.

 

이 얘기를 스승이신 예수님이 곁에서 들으셨을 때, 얼마나 마음에 우울한 비가 내렸겠어요?

제자 중에 수제자이잖아요.

 

오늘날 우리가 간사, 목자하다가.. 또 목사로 살면서 좌절이 오고 실망이 일어나고 할 때,

그렇게 좌절하고 실망할 거 없어요. 우리가 예수님보다 나아요?

예수님도 이런 배반의 시간을 겪었는데... 우리라고 덜 하겠습니까?

많은 가슴 앓이를 하잖아요. 근데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요18: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참 희한한 인연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몇 시간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른 적이 있었는데,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하필 그 사람 말고의 친척이에요.

 

‘네가, 예수와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그 친척이 거기까지 왔던 사람이에요.

아마 말고가 귀잘리는 것까지 봤을 가능성이 큽니다...

 

▲요18: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그러면 정확하게 요한복음에는, 베드로의 부인을 모두 몇 번 소개합니까?

세 번 소개합니다.

 

1차 부인 (18:17) 문 지키는 여종이 물을 때 부인

2차 부인 (18:25) 숯불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물을 때 부인

3차 부인 (18:26-27) 대제사장의 종(베드로가 귀를 벤 사람의 친척)이 물을 때 부인함.

 

그러자 곧 닭이 울어요. 그러니까 닭이 울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 ‘닭이 운다’는 표현은, 앞서 예수님께서 예언했던 말이었습니다.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인간은 못된 짓도, 악한 짓도, 부인도

자기 의지를 가지고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다 알고 계셔요. (베드로가 부인하도록 작정하신 게 아니죠)

 

슬프게도 우리의 무너질 것도 아시고, 우리의 약함도 아시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대신해서 죗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자 이 이후에 요21:9에 보면,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그리고 나서 세 번 그 유명한 질문을 하십니다.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세 번 다 뭘 물으셨어요? 사랑을 물었어요.

결국 우리는 믿음의 문제도 아니에요. 믿음이 곧 사랑인 거죠!

믿음보다 더 큰 개념이.. ‘얼마나 우리가 주님과 사랑하는지’

긴밀한 교제 속에 그분을 정말 사랑하는가? 사랑의 문제였어요.

 

베드로를 회복시키는 예수님의 타겟은 딱 하나예요.

'예수님을 정말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가?'

그래서 베드로가 세 번 다 ‘주님이 아십니다. 내가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이젠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자 그는 제대로 된 증인의 자리로 되돌려집니다.

 

사도행전 3장을 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행3:15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하고 베드로의 설교와 전도가 선포되죠!

 

수천명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만든 이 베드로의 사자후가 담겨진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선포입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는 이방 선교의 문을 연 선봉자였습니다. 바울보다 빨랐어요.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방문했어요.

예수의 증인으로서, 이방선교의 포문을 연 인물이 베드로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마무리를 해야 되는데,

그러면 전부 다 직장 그만두고 다 뛰쳐나가서

뭐 라오스 가고, 선교지 가라는 얘기일까요?

 

두 가지를 정리해봤어요.

여러분들이 오늘 또 붙잡아야 될 기도 제목이기도 하겠죠.

 

1) 첫째는 우리가 교회 밖에 나가면, 우리도 증인의 자리에 설 기회가 오면,

‘내가 저 서클 원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이렇게 망설이며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2) 또 하나는, 삶의 어떤 순간순간 신앙적 결정과 결단이 필요한 일들이...

살다 보면 오늘도 수없이 벌어집니다.

 

그때 베드로처럼 슬그머니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해 버리든지,

아니면 내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증인의 자리에 서서 담대하게 증거할 것인지?

이걸 깊이 물어야 돼요. 믿습니까?

 

오늘도 여러분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로 떠날 때 (예배당 문을 나설 때)

나로 증인으로 부르시는 그 하나님의 요청에,

그 증인의 자리에, 내 자리가 비어있지 않는지를 돌아보고,

사도행전 3:15절의 회복이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의 삶의 자리에 온전히 회복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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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사도 요한이 갈릴리 출신의 어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 가야바와 친분이 있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의 상업적 배경: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는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단순한 어부가 아니라,

일꾼들을 부리는 제법 규모 있는 어업을 운영했던 부유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루살렘 물류 공급 (특산물 거래): 당시 갈릴리 호수의 고급 물고기는

예루살렘의 고위 제사장 가문(안나스/가야바 가문)과 긴밀한 물류 공급 계약을 맺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한의 가족은 제사장 가문에 물고기를 납품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친분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친분 덕분에 예수님이 체포된 후

요한은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갈 수 있었고, 베드로까지 들여보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