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무모한 의리 막14:43~52 2020.04.07.
※원래 설교에 제목이 명시되지 않아서, 내용에 맞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고난주간 둘째 날입니다.
어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혹독이 기도하던 주님과는 달리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던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가 봤죠.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그 처절한 기도의 소리와 내용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던 지근거리에서
제자들이 있었지만, 어떻게 잠이 들 수 있었을까’
제가 ‘무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주님이 왜 이 밤에 그 처절한 기도를 드리는지,
특별히 그 기도의 내용이 담고 있는 인류의 구원사적인 깊고도 높고도 어마어마한 내용이
무슨 얘긴지...' 아마도 제자들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들은 그 영적인 무지의 결과로, 육신의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깊이 떨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기도에 실패한 제자들이, 여지없이 사역에도 실패하는 모습을 만날 수가 있어요.
▲막14: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마가복음은 가룟 유다가 어디 외부에서 있다가 온 것으로 묘사를 했지만,
사복음서 전체를 종합해보면, 유다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자리를 비웠죠.
그리고 동산의 예수님이 늘 가시는 기도의 처소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군병들을 데리고, 이 깊은 밤에 그곳까지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열 둘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모든 표현을, 8차례에 걸쳐서 유다를 향해서만 씁니다. :43
이 유다는 굉장히 똑똑한 인물입니다.
회계를 담당할 만큼 머리도 명석했고,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아주 비상한 머리를 가진 제자 중에 하나로 학자들은 보고 있어요.
자 근데 가룟 유다가 누구를 데리고 왔는가 하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곤봉 같은 몽둥이)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3
근데 이 모습을, 예수님은 뒤에 뭐라고 설명을 하시는가 하면
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여기서 예수님은 그 무리들에게, 또 유다에게, 어떤 묘사를 표현하시는가 하면
'너희가 나를 강도 취급하는구나'
48절에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여러분들 그냥 무심히 흘려버려서는 안 되고,
예수님은 왜 자신이 이 무리들에 의해서 강도 취급을 받고 있는가를
일부러 드러내고 싶었던 겁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 체포와 이 불법의 현장이, 이 무리들에 의해서 벌어지고 있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당시 횡행했던 정치범들로 취급을 받고 있다라는 암시를
이 안에 담고 있는 거예요.
'강도'라는 표현을 통해서 볼 때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편 강도,
또 예수님을 대신해 놓아주기를 백성들이 연호했던 바라바, 이게 전부 뭘로 표현되고 있죠?
'강도'로 표현되고 있어요.
그러면 당시 '강도'는, 유대사회의 보편적인 통념 속에 어떤 존재인가 하면,
유대의 독립운동가들을 뜻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종교 당국과 로마 당국의 기준과 시선에서는, '정치범'들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 정치범들을 모두 싸잡아서 '강도'라고 표현을 하는 거죠.
(이들이 때로는 당시 기득권, 사회지도층들을 대상으로 간혹 강도 행위도 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사실상 이 무리들의 의도를 드러내고 싶었고, 그래서 '강도'를 언급하신 거죠. :48
특별히 자신이 지금 무슨 취급당하고 있는가를 드러내고 싶었던 겁니다...
▲막14: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예수를 파는 자(유다)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짰어요.
'군호'란 영어로 signal 인데, 군사작전을 위해서 서로 미리 정해놓은
비밀스러운 암호를 뜻합니다. 그건 ‘입맞춤’이었죠.
그러니까 지금 이들이 예수를 이 깊은 밤에 체포하러 온 의도와 목적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이 무리를 향해서, 자기가 무슨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죠.
강도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어요.
'강도'라는 것은, 칼 들고 남의 것 뺏고 못된 짓 하고 이런 사람들을
당시에 강도라고 말하지 않고, 정확하게 정치범들입니다.
이런 열심당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정부 당국의 기준에선 전부 '강도들'이에요. *과거에 유다 마카비 같은 인물
바라바 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편 강도,
다 같은 아류(강도)로 취급을 당하는 거죠.
우리가 요즘 생각하는 그런 잡범에 해당하는 강도들은,
십자가에 그냥 매달지 않아요. 그냥 벌 주고 말죠.
적어도 십자가라는 끔찍한 형틀에 처형을 하려면,
최소한 로마 당국에 대한 반역죄가 성립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강도'는 정치범, 또는 독립투사 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선하다는 뜻은 아니죠)
'군호'라는 표현도 그것을 잘 의도하고 있죠.
예수님을 독립투사(강도) 쯤으로 여기고, 체포하러 군사 작전을 전개한 것입니다. 주1)
▲막14: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여러분 여기에서 유다의 이 섬뜩한 장면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거죠.
그 유명한 ‘배반의 입맞춤’입니다.
입맞춤 자체는 당시 흔한 유대 인사법이에요. 이게 특별할 것은 없는데,
중요한 것은, 그 입맞춤이 예수를 체포하는 싸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왜 군호를 짰을까요?
이 사람들이 예수의 얼굴을 몰랐을 리도 없고,
예수님은 종종 성전에 나가셔서 대중들 앞에 서서 가르치신 적도 여러 번 있기 때문에
이 정도 유명한 인물이면, 또 소문난 분이면, 얼굴을 모를 리는 없어요.
근데 군호를 짜고 왔어요. 그 이유는 그 주변에 예수님과 함께하는 제자 공동체와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혹시 모를 마찰이 일어날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아마 싸인을 맞추어서 왔던 것 같아요. 소요 없이 순식간에 체포하기를 원했던 거죠.
자, 여기에 우리는 커다란 섭리에서, 예수님의 깊은 의도와 배려를 엿볼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세요.
‘너희들이 내가 누군지 알고, 나를 체포하려는 목적이 이루어졌다면,
이 제자들,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는 일절 해가 되지 않도록 돌아가도록 해라’ 요18:8
이런 뉘앙스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런 것 같아요. 악한 사람들은 자기의 멸망의 순간을 위해서
열심히 자기의 일을 하지만, 결국 그마저도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를 이루는데 쓰여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잘 모르죠.
심지어는 악한 사람들은 자기의 꾀를 도모해서, 함정을 파놓고 예수님을 체포해요.
그런데 이런 불법한 체포, 불법한 심문이 계속 이루어지는데
이 모든 하나하나가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도구로 쓰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인은 악한 날에 용도가 따로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너무 악한 사람들의 그 악한 행위와 방식에 대해서 붕기탱천할 이유가 없어요.
‘아 저 사람은 악한 날에 악하게 쓰여지고 있구나’
그러니까 마음에 긍휼을 가져야지,
그 사람에 대해서 불필요한 감정을 과잉 폭발시킬 필요는 없다는 말씀이죠.
성경에 보면 곳곳에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뿐입니까?
인류의 역사를 보면 ‘마치 돼지가 자기 도살당할 날을 위해 살찌움을 받듯이’
그런 일들의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원수 갚는 것을 누구에게 맡기라고 그랬죠?
하나님께 맡기라고 그랬어요.
악한 자들의 도모는, 결국 악한 날을 위해서 쓰여질 불쏘시개 또는 도구밖에 안 되는 거예요.
어쨌든 이렇게 점점점 예수님의 체포로, 밤은 깊어가는데,
이게 유심히 들여다볼 뜻밖의 사고 하나가 벌어집니다.
▲막14:47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마가나 또 누가는 이 부분을 대충 썼어요.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자세하게 나와 있죠.
그걸 참고해서 본문을 보면,
‘곁에 서 있는 자 중에 한 사람이 칼을 빼들었다’ .. 베드로입니다.
‘대제사장의 종’ .. 다른 복음서에는 ‘말고’라고 밝히죠.
요한복음에 보면 그의 ‘오른쪽 귀’라고 명시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사실이, 우리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가를
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어제 새벽에 살펴본 바대로
특별히 예수님께서 따로 구분하여 예수님의 그 처절한 기도에 동역을 구하기 위해서
지근거리까지 같이 데리고 올라갔던 제자 중에 제자입니다.
근데 예수님이 기도하다 중간에, 중간 점검하러 내려왔더니
세 제자가 다 쿨쿨 잠에 빠져 있었어요.
아까도 서두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제자들은 지금 이게 뭔지를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자기들이 지금 무슨 일에 동원되어 있고, 무슨 일을 위해서 쓰여져야 되는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영적인 무지죠.
결국 그 무지는.. 육체의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지는 결과를 빚었고,
그 결과는 오늘 예수님이 체포되는 현장에서 혈기로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 보통 헷갈릴 때가 뭔가 하면, 신앙생활을 하다가 성경적 가치와
휴머니즘적인 신의, 의리와 충돌을 할 때,
‘어느 것을 택해야 맞는가’라는 갈등을 일으킬 때가 참 많아요.
제가 담임목회를 하다 보면 그 갈등이 첨예하게 부딪힐 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저분의 인간적인 측면을 좀 더 배려를 해야 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서 어떤 질서와 원칙을 우선해야 되는가?’
이것을 고민해야 되는 경우들이 종종 벌어집니다.
오늘 베드로와 예수님의 이 관계는, 신의적인 측면에서는, 저도 이런 생각을 해봤네요.
저 같아도 뭔가 행동을 했을 것 같아요.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3년 가까운 세월이면 짧은 시간이 아니에요. 동고동락했던 스승님이,
지금 야심한 밤에 강도 취급을 당하면서 체포되고 있는 걸 뻔히 보면서
‘저거 어떡하지? 저러면 안 되는데...’
아마 여기 앉아계신 모두들도, 그러고 넋놓고 구경만 하실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진 않죠.
칼이 없으면, 돌이라도 들고 행동을 취하는 게 신의(의리)상 맞을 것 같아요.
저 같아도 뭔가 액션을 취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막14: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이 말씀만 남겼는데, 사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고, 칼을 집에 꽂으라’고 했어요.
항상 우리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면, 그걸 쓰게 돼 있어요.
이게 참 조심해야 될 대목인데,
그래서 사람이 뭘 준비하느냐는 참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인간적인 신의와 혈기를 우선했어요.
그리고 칼을 빼어들어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습니다. 뭘 먼저 우선한 걸까요?
인간적인 신의와, 또는 자기의 그 신의(의리)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우선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ᄁᆞ 주님은 지금 ‘인류의 구속’이라는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큰 하나님의 과제를 가지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길입니다.
이걸 기도에 실패한 제자가, 깨달을 리도 없고
그 성경적 가치를..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지금 진행되고 있고, 성취되고 있고,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알아차릴 리도 없죠.
△자 그러면 귀잘린 말고의 입장에서 한번 보자고요. (중략) 주2)
베드로의 이 어처구니없는 행동은 또한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은 이 무리들에 의해서 강도 취급을 당하고 있어요.
여러분, 무리들만 예수님을 강도 취급한 줄 아십니까?
베드로의 이 행동 또한 뭐예요?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그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구속의 길, 그 현장에서, 자기 무력으로 뭔가를 하려고 했어요.
무력으로, 힘으로, 혈기로...
그것은 자기가 따르던 예수님을 뭘 만들어버린 거예요?
똑같은 정치범(강도)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이런 베드로의 저항을 보고서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던 자들이
‘우리가 검과 몽치로 무장해서,
군호를 짜서 마치 군사작전처럼 들이닥친 것이 옳았다’고 판단했을 거예요.
‘거봐, 이 무리들은 (싸잡아서) 유혈 폭동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맞잖아?’ 했을 거예요.
예수님이 꿈꾸던 나라는 이런 나라가 아니었어요.
베드로가 칼을 빼어들고 뭔가를 시도하려던... 그런 세속 나라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반대로, 자기가 죽어야 하고, 져야만 사는 나라였어요.
그런데 영적인 무지에 잠긴 이 제자들은 (대표로 베드로는)
스승이 걸어가시는 이 길의 의미를, 끝까지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막14:51~52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여기에 ’한 청년‘이 본문에 무명으로 나오네요.
그래서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마가복음을 쓴 마가일 것이다.. 이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자, 그렇 몇 가지 질문이 자연히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은 이 밤에 왜 홑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을까?'
'새벽이라, 야심한 밤이라서 기온이 떨어져서 이불을 두르고 나온 것일까?'
근데 홑이불을 벗어버리니까 그의 알몸이 나왔어요. 본문에 '벗은 몸'으로 표현되어 있죠.
(당시는 요즘처럼 속옷이 발달되어 있지 않고,
얇은 통옷을 속옷으로 입고, 그 위에 겉옷을 입었죠)
아마도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한데,
이 사람은 (마가는) 자다가 이 소식을 들었던 것 같아요. *마가요한의 다락방의 그 마가
자다가 그래서 황급한 열정에, 옷도 미처 챙겨입지 못하고, 여기까지 일단 왔어요.
지금 예수님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가는 그 따르던 신의와 열정에 북받쳐서 아마 이 현장까지 달려왔던 것 같아요.
밤에 홑이불을 뒤집어 쓰고... (뭐 속옷을 빨래했나 봅니다)
뭐 좀 어떻게 해보려고... 베드로의 의도나, 마가의 의도나 크게 다르지 않아요.
문제는 사태가 기울었어요.
(사태가 기울기 전에는) 뭔가 그래도 우리도 힘을 보탤 수 있는데...
스승님이 저항을 좀 한다면, 어떻게 좀 우리도 같이 하겠는데... (그럴 마음으로 달려온 거죠)
그런데 예수님이 의외로 너무도 무기력하게 스스로 마치 체포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순순히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당황하는 것입니다.
이미 사태가 기울었던 것 같아요.
'내가 지금까지 그 신의(의리)로 믿고 따르던 스승이,
지금 무슨 죄목을 씌워서 끌려가고 있나?'
정치범, 강도 취급을 당하고 있단 말이에요.
여러분, 정치범이 왜 무섭습니까? 제자들이 왜 도망갔는지 아세요?
정치범은 몽땅 잡아가는 겁니다.
그와 함께했던.. 그와 철학과 가치관을 같이 했던 모든 일당들이 다 붙잡혀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은 혼비백산하고 한 명도 남지 않았고,
여기 대표격으로 이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도,
그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도망을 갈 정도로, 마음이 다급하게 바뀌어 버린 거예요.
자 여기서 우리는 조그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어요.
유대사회에 알몸으로 뛰었다는 것은 낮이든 밤이든 부끄러운 일이에요.
그런데 진짜 수치는 벌거벗은 몸이 아니라 뭡니까?
십자가의 길을 피하는 것이 진짜 수치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피하는 것이 진짜 수치예요.
그 수치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까지, 이들은 이 이후에 수많은 우여곡절을 또 겪게 됩니다.
이 한 주간,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우리는
상대방보다 조금 못 살아도 부끄러워하고.. 또 학벌이 딸려도 부끄러워하고..
그런 건 수치가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명예는, 십자가를 피하고,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는 것이
진짜 부끄러움입니다. 믿습니까?
오늘 하루도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최고의 영광과 명예로 고백하며 따르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 벌거벗긴 채, 인류의 모든 수치를 다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잖아요.
우리는 그 길을, 이 땅에서 세상 것들로 부끄러움을 당하는 건 부끄러움이 아니에요.
우리의 진짜 부끄러움은 주님이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방식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것,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인들의 수치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또 하루를 살아내는데 깊은 묵상이 되고
기도의 제목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붙들고 두 가지 제목을 나누면 좋겠어요.
첫째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혈기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나 신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기꺼이 십자가의 길로 세상 사람들의 조롱소리가 가득이 메워진다 할지라도
내 평생 앞으로 걸어가는 길에 십자가의 방식,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지 않는
은혜를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오늘 화요일 새날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이 땅에 범람하고 있는
이 바이러스라는 질병 앞에 인류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2020년 설교
죽음의 권세를 넘어 사흘만에 부활하신 새로운 생명이신 예수를 소망하는
복되고 가난한 심령이 되게 하여 주시고
우리 속에 진정한 인류의 죄에 대한 애통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한번 주여 부른 다음에 소리내어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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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한 무리들은 모두 몇 명쯤 되었을까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가룟 유다가 이끌고 온 무리의 정확한 인원수는
성경에 구체적인 숫자로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의 묘사를 통해
상당한 규모의 인원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마26:47, 막14:43, 눅22:47에 따르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무리는 로마 군인들(요새의 군대)과 대제사장 및 바리새인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성경이 '군대' 혹은 '큰 무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단순히 몇 명 수준이 아니라
최소 수십 명에서 백여 명 이상 규모의 무장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12명으로 보아서, 상당한 규모를 이끌고 왔을 것입니다.
주2) 그러면 귀잘린 말고의 입장에서 한번 보자고요.
이 말코스 Μάλχος Malchos 라는 말은, *마가는 마르코스 Μᾶρκος Markos
왕 king 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사실 왕같은 존재예요.
그 이름 자체로만 볼 때 첫사람 아담이 에덴에 누구였습니까? 왕이었어요.
아담은, 에덴의 통치를 하나님이 위탁한 왕같은 존재였어요.
이게 우리 인류의 첫사람 아담의 위치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그 왕은, 죄의 종살이가 일상이 되고 말았죠.
오늘 본몬의 말고(말코스)라는 존재도, 결국은 그 이름이 왕이에요.
그런데 지금 불법한 대제사장의 불법의 종노릇을 하고 있어요.
이 사람의 상징성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