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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던 십자가의 참된 의미

LNCK 2026. 4. 2. 20:2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고난주간>             출처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던 십자가의 참된 의미        막15:22, 눅22:44      

 

막15: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 에 이르러'

 

오늘은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난을 기리는 고난주일입니다.

사람들은 해마다 오늘이 되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예수님의 고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그날 고난 당하신 분은

예수님만이셨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도 같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식이 불량배에게 뭇매를 맞을 때,

그 자식이 부모를 향해서 살려달라고 절규할 때,

그 광경을 보고서도 가만히 서 있는 부모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식이 불량배에게 매를 맞아 죽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자기 자식은 아랑곳하지 않고, 옆집 자식만을 걱정하는 부모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에게 불량배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든지 없든지,

도리어 자기도 자식과 함께 불량배들에게 몰매를 맞든지에 상관없이,

사랑하는 자식을 구하기 위해 불량배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부모의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자식의 아픔과 고통이 곧 부모의 고통이요,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 기도의 핵심은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그 기도는, 단 한 문장, 단 한 마디로 순식간에 끝나버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눅22:44절의 증언입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여러분은 기도하시면서, 땀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 경우에는, 기도하다가 등줄기나 이마에 땀이 배는 것을, 단 몇 번만 경험했을 뿐

평생을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20년 이상 목회자로 살면서도,

삼복더위에 기도할 때도, 이마에서 땀이 흐르긴 해도, 그게 땅바닥으로까지 떨어지는 것은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장소는, 난방시설이 잘 갖추어진 실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밤 중에 야외인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계절적으로 4월초이 예루살렘의 한밤 중은, 한기가 스며드는 쌀쌀한 날씨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은, 실제 날짜와 비슷하게 정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으셨는데, 유월절은 태양력으로 3월말~4월 중순에 해당하거든요.

4월 예루살렘의 밤과 새벽은 평균 12~13도로 꽤 쌀쌀합니다.)

 

그 쌀쌀함 속에서는 웬만큼 운동을 해도, 땀이 줄줄줄 흘러내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쌀쌀함 속에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처절하게 기도하셨으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오랫도록 기도하셨으면,

예수님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졌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토록 처절하게 기도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일체 응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체포당하신 예수님께서 로마 병정들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로마 제국의 채찍은, 유사 이래 인간이 고안해 낸 채찍 가운데에

가장 잔인한 채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채찍 끝에 작은 금속 덩어리나 뼈조각이 달려있어서,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맞는 사람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거나 찢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채찍을 맞으시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찢어지는 가운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셨습니다.

 

그럼에도 성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가시간이 씌워져서, 예수님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혀졌습니다.

 

생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가시가 들어가도 고통스럽다면,

하물며 산 사람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았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끝내 그 고통을 참지 못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것은 죄 많은 인간의 한탄이나 탄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 성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정말 나를 버리셨냐고, 왜 나를 버리셨느냐고?’ 절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절규에 일체 응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독생자의 절규를 들으실 수 없었고,

혹 들으셨더라도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고통에서 구원할 능력이 없으셨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무응답으로 일관하셨겠습니까?

 

도리어 그 반대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독생자의 절규를 분명히 들으셨고,

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해내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셨음에도,

그 어떤 응답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신 분은, 예수님만이 아니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 아들의 절유를 들으시고, 그 아들을 구원해내실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독생자의 고통을 그저 바라만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그 아들과 함께 고난당하시고, 고통당하신 것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채찍질에, 아들 예수님 등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찢어져 피투성이가 될 때

그 광경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으로 절규하실 때,

하나님 역시, 예수님과 똑같은 고통과 고난을 겪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인 동시에

그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고난이기도 했습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독생자와 함께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까?

그 고난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셨음에도.. 왜 감수하셨습니까?

 

당신의 공의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죄의 삯은 사망’으로 규명하고 있습니다. 롬6:23

 

이 세상 그 어떤 죄인도,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그 법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불쌍한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화목 제물로 삼아,

십자가 위에서 인간이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게 하심으로써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죄사함을 얻고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죽음 가운데, 가장 처참하게 죽으신 이유였고,

그 독생자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고난당하신 까닭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져서, 예수님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야만 했습니까?

우리가 머리로 지은 모든 죄의 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의 등과 가슴에 채찍질이 가해지고, 살점이 뜯겨져나가고 찢어지며

피투성이가 되어야 했습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지은 모든 죄의 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의 두 손에 대못이 박혀, 피를 흘리셔야만 했습니까?

우리가 두 손으로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손’은, 손과 팔목을 광범위하게 일컫는 말입니다.     주1)

 

왜 예수님의 두 발에 대못이 박혀 피를 흘리셔야만 했습니까?

우리가 가서는 아니될 곳을 돌아다니므로,

우리의 두 발이 지은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의 허리가 창에 찔려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모두 쏟으셔야만 했습니까?

우리가 썩어 문드러질 이 몸뚱이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품위를 지키시면서 격조 있게 돌아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갈갈이 찢어지며,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우리의 온 사지백체로 지은 모든 죄를

완전 무결하게 씻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를 세우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제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습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골고다를 가리켜서 영어로는 갈보리라고 말하는데,

갈보리 역시 해골을 뜻하는 라틴어 '칼바'에서 파생된 용어입니다.

 

이스라엘의 넓고 넓은 천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필이면 해골이라 불리는 곳 위에 세워졌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향한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해골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그 ‘해골(골고다)’의 정수리에 십자가가 꽂혔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해골 언덕 아래로 흘러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마른 해골이 적셔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흠뻑 적셔진 해골이, 그 피의 생명력을 힘입어 소생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을, 단 하나의 영상으로 표현하면,

바로 이것, ‘해골의 정수리에 꽂혀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덫에 갇혀있는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해골들입니다. *죽은 자들

그러나 그 어떤 해골도, 자신이 해골임을 자각하고,

자기 속에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아,

자기 인생의 정수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우기만 하면,

그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 보혈을 힘입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십자가 위에서 그토록 처참하게 돌아가시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해골인 우리를 온전히 살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위해 함께 고난을 당하셨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모든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하나님의 공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고난을 통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완성시키신 주님의 십자가! ...

바로 이것이 2000년 전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던 십자가의 참된 의미입니다.  중략

 

▲그래서 바울은 갈6:14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일평생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십자가 자랑은, 말이나 노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 자랑은, 그 십자가 위에 자신을 못 박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욕망을 따라 세상을 섬기던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공의를 좇는 삶을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갈2:20절의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이 고백을 한 것은,

그 처절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새 생명을 얻게 된 바울 자신이,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공의하나님의 사랑만을 드러내는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이후 바울이 어느 곳을 가든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시기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지기까지 하나님께 처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뒤에는 ‘나를 왜 버리셨느냐’고 절규하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절규를 들으시고, 아들의 고난을 보시고

그 아들을 십자가 고난에서 건져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셨음에도

끝내 무응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같이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죄인인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공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친히 고난받으신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로...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 십자가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는,

본문의 사도 바울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의 일평생 모든 삶을 책임져 주셨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우리의 미래를 예비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본문의 사도바울처럼,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십자가에 우리 자신을 못 박는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십시다.

 

그때부터 우리의 삶 속엔, 부활의 참된 생명과 능력이 샘솟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가 결실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전도서에서 말하는 '창조주'는 '죽음'이란 뜻        요18:1~3         출처

 

그 유월절 만찬을 가지신 그날 밤에 대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차이는 주님께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셨던 장소의 이름에 대한 차이입니다.

 

공관복음서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그 장소를 ‘겟세마네’라고 표현합니다.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러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오시면, 밤에는 감람산에 매일 가셔서

기도도 하시고, 거기서 주무시기도 하셨다는 얘기죠.

감람산은, 영어로 하면 올리브 산입니다. 올리브 나무가 많이 모여있는 산이었던 거죠.

 

이 감람산 기슭 아래 쪽에, 그 산에서 나는 올리브 열매를 가져다가 짓이겨서

기름을 짜는 곳이 겟세마네입니다.

이 곳은 그 올리브산의 아래쪽 기슭에 있는 얕은 언덕이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마가복음은 ‘겟세마네’로

누가복음은 바로 ‘감람산, 감람원’으로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다른 지역이 아니라,

감람산 안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시는데,

‘올리브 열매를 짓이겨서 기름을 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했다’ 얼마나 상징적인 표현입니까?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땀 흘리실 때 피가 베어날 정도로,

당신의 진액을 짜내시면서 기도하셨거든요.

그날 예수님 그 당신 자체가 '겟세마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다 ‘겟세마네’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만은 전혀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요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요한 사도도 따라갔거든요.

그런데 그는 요한복음에 ‘겟세마네’ 라고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요18:1

 

요18: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동산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은 삼십 냥을 받고 대제사장의 부하(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바로 그 동산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지 않습니까.

 

근데 2절에 ‘그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래요.

여기서 ‘가끔’이 오역입니다. 그 설명을 지금 잠시 드리려고 합니다.

 

눅22:39절은 ‘예수께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다’ 하잖아요.

그럼 눅22:39절과, 본문 요18:2절은 상충됩니다.

 

‘습관을 따라 가신’ 것은.. 자주 거의 매일 가는 것이고,

‘가끔’은 어쩌다가 한 번 가는 것이거든요. 요18:2

 

헬라어 원문을 보면요. 우리말 <가끔>으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가 폴라키스입니다.

‘자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들도 대부분 ‘often - 자주’ 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개역개정의 ‘가끔’은 오역인 거죠. 다행히 새번역은 ‘여러 번’으로 번역했습니다)

 

▲자 여러분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왜 공관복음 기자들은 그곳을 ‘감람산’이라고 기록했는데,

요한복음은 ‘기드론 건너편 동산’이라고 기록했는가요?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보다도 훨씬 더 뒤에 기록되었습니다.

사도요한이 최소 80세 넘어서, 학자에 따라서는 요한이 90세 되어서 썼다는 사람도 있죠.

그러니까 인생에 깊은 통찰력을 가졌을 때입니다. *AD 90~100년경 기록

 

이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동쪽 성벽과 감람산 사이에 있는 깊은 계곡을 의미합니다.

 

근데 이스라엘에는, 겨울을 제외하면, 비가 며칠 밖에 안 오거든요.

그러니까 비가 오는 며칠을 제외하면, 거의 비가 오지 않으니까

다른 땅도 그렇듯이, 기드론 골짜기는 그냥 황무지 계곡이에요.

 

예루살렘은 해발 8백미터 예요.

근데 그 기드론 계곡은, 예루살렘에서 고도가 120~200 M 아래쪽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시내와는 너무 낮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 넓은 계곡을 다른 용도로는 쓸 수가 없으니까,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곳을 옛부터 공동묘지로 사용했습니다.

압살롬의 무덤도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거기 가면, ‘압살롬 무덤’이라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그곳은 이름이 계곡, 시내 valley, brook 이지... 사실은 공동묘지인 거예요.

그러니까 2절에 ‘기드론 계곡을 건는다’ 하는 것은,

실은 무덤의 계곡, 죽음의 계곡을 건너는 겁니다.

 

요한 사도가 예수님께서 그 날 기드론 계곡을 건너서 기도하려 가셨다18:2

이 말씀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는 루트가 그곳이라서, 그곳을 지나신 것이지만,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께서 죽음의 계곡을 지나서 기도하러 가셨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계곡을 ‘무덤의 계곡, 죽음의 계곡’이라 불렀거든요.

공동묘지라고 불렀고, 실제로 공동묘지가 그곳에 옛날부터 조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성 전경을 찍은 사진을 보면, 맨 앞에 무덤이 많이 보이는데,

거기가 기드론 골짜기입니다.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등 무덤이 많이 모여있죠)

 

주님께서 그날 밤에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셨다는 것은

단순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음의 계곡’이라고 부르는 지리적인 장소를 지나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공동묘지를 통과해서 가신 것이긴 한데,

예루살렘 성에서 고도가 120~200M 낮은, 그 즐비한 무덤 속을 주님께서 걸어가시면서,

당신의 죽음을 확인하신 겁니다.

 

‘내가 죽어야 인간들이 살고, 내가 죽어야 하나님 안에서 부활한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재확인하신 것입니다.

죽어야 하는 당신의 죽음을.. 주님께서 수용하신 겁니다.

(아무래도 묘지를 걸어서 통과할 때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겠죠)

 

요18: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여러분 여기에 뭐가 지금 빠져 있습니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요18:1~5절을 읽어보세요)

요한사도가 몰라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로 갈 때, 제자들과 함께 가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곳에 ‘너희들은 여기 앉아서 기다려라’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특별히 데리시고, 더 먼 곳까지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다른 제자에게는 보이시지 않으셨던 주님의 고민과 슬픔을

그 세 사람에게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사 내가 죽게 되었으니 너희들도 여기에서 깨어 기도하라’

요한사도는 다 압니다. 목격자요 증인입니다.

 

그런데 요한사도는 그 겟세마네 기도를 요한복음에서 생략했습니다.

대신에 예수님께서 ‘죽음의 계곡(기드론 시내)을 통과하신 사건을

요한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18:1

 

그래서 사도요한은, ’기드론 시내‘를, 상징적으로 ’죽음의 골짜기‘를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제일 나중에 기록되었는데,

그 중요한 겟세마네 기도를 고의로 누락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8:1절에 그 열쇠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원래 4복음서 중에서 ‘상징’이 제일 많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다가는, 큰 해석적 오류를 범할 수 있죠)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예수님이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신 이유가,

바로 십자가 죽음을 수용하시기 위함임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실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핵심도 뭡니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세요.’

 

이 기도를 반복하시면서, 실은 아버지 뜻대로 그 잔을 마시는 용기를 얻기 위해서

기도하신 거잖아요. 그거 다 알아요. 요한은 그게 필요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 죽음의 기드론 계곡을 지나시면서, 당신의 죽음을 수용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거예요.

내가 죽어야 산다(부활한다)는 걸 확인하신 거예요.

 

그래서 그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자, 나 잡아가라"

여러분, 참 이해하기 힘든 게, 이 계곡의 이름이 '기드론 시내'라고 그랬잖아요.

그게 보통은 일년 내내 시냇물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무지요, 그저 공동묘지만 있습니다.

근데 ‘기드론 시내’라는 히브리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요. ‘백향목의 시내’입니다.

 

그 계곡에는 백향목 한 그루도 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 계곡에 오래전부터 붙여주신 이름은 ‘기드론 시내 - 백향목의 시내’예요.

 

현실적으로는 ‘죽음의 계곡, 무덤의 계곡’인데, 이름만큼은 ‘백향목의 시내’입니다.

무슨 의미겠습니까?

자기 인생의 죽음을 통과한 자는,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확인한 사람은,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 인생은 향기나는 백향목 집이 된다는 거예요.

 

당시 백향목은 집을 짓는 데 가장 비싼 목재였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죽음을 아는 자만이,

주님 안에서 향기로운 자기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압살롬이,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서 구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아무런 준비 없이 구데타를 당했습니다.

황망하게 측근들과 급히 도망가는데, 얼마나 급했으면

다윗이 신발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도망갔습니다.

그날 다윗이 맨발로 도망가면서, 다윗도 이 ‘죽음의 계곡’을 건너서 도망갔습니다.

 

삼하15:23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그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면서, 다윗이 뭘 깨달았겠습니까?

‘내가 남의 여자와 통간하고, 그 여자가 아이를 가지니까

그 남편의 아이인 것처럼 거짓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하다가,

내 뜻대로 안 되니까 그 충신인 그 여자의 남편마저 죽여버리지 않았는가?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야...’

 

그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면서 자기의 실상을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성경에서 다윗은 절대로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죽음의 계곡’을 통과했던 그 다윗은, *다윗 자아의 죽음

 

그 이후에 그의 인생이, 향기 나는 ‘백향목의 집, 진리의 집’으로 일구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그날 밤에 주님께서 ‘죽음의 계곡’을 넘어 가실 때,

그 예수님을 잡기 위한 가룟유다도, 그 죽음의 계곡을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는 그 지리적인 장소만 통과했을 뿐,

자기가 죽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는 천년만년 오래 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고도, 은 삼십 냥으로 주님을 배신하고 팔았는데,

결과는 뭐였습니까? 천년 만년 살았습니까? 결과는 우리가 다 압니다.

 

그는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면서도,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지 못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불현 듯 갑자기, 뜻밖에, 하룻만에, ‘죽음’이 자기 코앞에 닥친 것입니다.

 

▲창4:26절을 보겠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예배했다는 뜻

 

창세기 1:1~4:25절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창4:26절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이 비로소,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바로 그때가 에노스 때였습니다.

 

에노스는 사람의 이름(고유명사)이기도 한데요. 동시에 보통명사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사전에 에노스(보통명사)를 이렇게 뜻을 풀이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창세기 4:26절에 이르러서야, 당시 인간들이 죽음의 계곡을 지난 겁니다.

‘아 인간은 죽는구나..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에노스구나’

그 죽음의 계곡을 통과할 때, 그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여성 작가들과 성경 공부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다 여성들인데, 그 중에 한 분만 남성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북에서 오래전에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붙잡혀서

감옥에서 오랜 기간동안 옥살이 하다가, 전향서를 쓰고 이제 풀려난 분이었습니다.

 

근데 그분이 예수를 믿었어요. 암에 걸려서... 그런 사연이 있기 때문에

‘여성 작가’가 아닌데도, 여성 작가들이 받아줘서, 그도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그만 암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같이 성경 공부하던 회원들이,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또 그분이 치료도 받고, 수술도 받고 했는데,

병원에서 어느 날 ‘더 이상 암을 치료할 게 없다. 발견된 게 없다’고 해서,

이분이 ‘그러면 완치됐다는 증명서를 좀 써주세요’ 그러니까,

‘아니, 증명서를 쓸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치료할 암이 없다고’

 

그래서 이분이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그분이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할 암이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제일 먼저 뭘 하신 줄 아십니까?

 

암에 걸리기 전에 춘천에서 불륜을 저지르던 여자가 있었는데,

암이 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관계를 다 끊었거든요.

더 이상 치료할 암이 없다는 사실, ‘내가 건강해졌구나’를 확인하는 순간에,

그 여자를 만나러 춘천에 갔습니다.

그러고 몇 년 후에 그분은 다시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암’이라는 육체의 ‘죽음의 계곡’을 통과했는데,

육체의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면서도,

그의 영은 자기가 ‘에노스’라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가룟유다의 죽음하고 유사한 점이 있죠.

유다는 그날 밤에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고도, 예수님을 팔아버리지 않습니까?

‘죽음’을 현실적으로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죠. ‘남의 얘기’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여러분 전도서 12:1절 말씀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네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하루라도 빨리 너의 하나님을 의뢰하는 삶을 살라’는 거예요.

근데 히브리인들은요. 여기서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에서

‘창조주’를 ‘무덤’으로 바꿔서 읽기도 합니다.           주2)

 

그래서 바꿔서 읽으면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무덤을 기억하라’가 되죠.

‘메멘토 모리’죠.

 

왜 그렇게 읽는가 하면, 히브리 성경에는, 자음만 있고, 모음이 없습니다.

‘무덤’이라는 단어가, 자음이 ‘창조주’하고 똑같습니다. 

 

물론 모음은 붙이면 발음이 달라지는데, 자음 글자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읽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무덤을 기억하라

이렇게도 읽는다는 것입니다. 창조주나 무덤은... 아주 넓게 보면 같은 의미이지요.

 

‘하루빨리 죽음의 계곡을 통과해라.

그래야 네가 일평생 생명의 주이신 여호와를 의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닙니다.

태어날 땐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지 않습니까?

 

여기에 연세가 제일 많이 드신 분이 계신다고, 그분이 제일 빨리 가는 것 아니고요.

여기에 나이가 제일 작은 청년이 있다고, 그 사람이 제일 늦게 가는 것 아닙니다.

 

오늘 밤엔 누가 갈지 모릅니다.

여러분 오늘 밤에 우리 함께 기드론 계곡, 죽음의 계곡을 건너가십시다.

 

우리 모두 에노스(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확인하십시다.

하루라도 빨리 ‘메멘토 모리’

우리가 관에 드러눕는 우리의 무덤을 생각하십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내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진짜 예수쟁이들이 되십시다.

 

내가 세상에서는 비록 보잘것없고, 내가 가난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영원한 백향목의 집,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향기로운 진리의 집으로, 우뚝 세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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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예수님은 손과 팔목 중에 어디에 못이 박히셨나요?

성경 기록과 당시의 십자가형 관습을 종합해 볼 때,

예수님은 손목(팔목) 부근에 못이 박히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성경의 표현: 성경(복음서)은 구체적인 위치를 기술하기보다는

"손과 발에 못을 박았다"고 표현합니다. 요20:25, 27

 

의학적, 역사적 근거: 당시 로마의 십자가형에서는 사람의 체중을 견디기 위해

손바닥이 아닌 손목(요골과 척골 사이)이나 팔목에 못을 박았습니다.

 

손바닥에 못을 박으면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손가락 사이로 찢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은 손목을 포함하는 손 전체를 의미하며,

실제 형벌 과정에서는, 뼈 사이를 고정하기 위해 팔목(손목) 쪽에 못이 박힌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주2) 무슨 뜻인지, 히브리어가 부족해서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AI에게 물어봐도, 질문이 잘못됐는지, 답변을 못 하더라고요.

가장 가까운 답을 유추하자면,

창조주는 히브리어로 '보레이' 인데,  Borei (בּוֹרֵא)

무덤은 히브리어로 '케베르' Kever (קֶבֶר) 입니다. 케베르에서 '케'만 빼면, 비슷하게 읽힐 수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