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과 옆구리에 상흔이 남은 부활 눅24:36~43 2008.03.23.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변화된 부활체를 가지셨는데,
왜 손과 옆구리에 상처는 아물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계신 것일까요?
◑3에 그 답이 나옵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날을 자세히 소개하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날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기독교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중심으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과 죽음에서 일어나
죄와 사망의 모든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사건입니다.
특별히 첫번째 성탄절과 첫번째 부활절에 대한 성경의 기사를 살펴보면
부활절은 성탄절에 비해 매우 조용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사실, 부활절 새벽이 되면 여의도 광장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부활을 기뻐하고 예배하던
그런 떠들썩한 분위기 때문에, 첫번째 부활절도 그랬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실제는 매우 달랐습니다.
◑1. 조용한 부활절
▲1.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빌라도와 헤롯도 아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도 아닌,
그리고 천사들의 노래도, 동방박사들, 목자들의 경배도 없었던...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던 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박았던 사람들이 모여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성전 앞에 서서 ‘부활했다’고 선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만나러 갈릴리로 가실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마28:10; 막16:7.
예수님은 당대의 정권을 가지고 있던 빌라도와 헤롯에게로 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물론 당신을 고소하고 비난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빌라도의 법정 앞에서 외치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을 찾아가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정말 예수님의 부활이 세상에 온전히 알려지고 예수님을 거절하던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려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셔야 했을텐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생각처럼 하셨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당시의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역사가로서의 양심을 가지고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을 것이고,
당대의 미디어들이 앞다투어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한 마디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지도 않으셨고 조용한 부활절을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그 날 새벽에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던 날 밤 하늘에서 울려퍼지던
천사들의 합창도 들려졌다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서 하늘에 떠올랐던 큰 별도 없었습니다.
물론 동방박사들이 멀리서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고 경배하기 위해서 오지도 않았습니다.
주변에 양치던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시지도 않았습니다. 부활의 아침은 정말 조용했습니다.
▲2. 새벽녁 사람들이 많지 않은 동산의 무덤 눅24:1
부활의 기사를 전하는 네 복음서의 기사들은 동일하게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동산으로 찾아갔던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아직도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니까, 오늘날로 치면 주일 새벽 쯤 되는 것입니다.
주일 새벽에 무덤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새벽녘
동산의 무덤, 그리고 여인들로 첫 부활절의 이야기는 조용하게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마리아: “마리아야” 요20:16
여인들 중 막달라 마리아는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한 것 같고,
또 막달라 마리아는 특별하게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주님을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무덤에 도착한 마리아는 무덤의 돌이 굴리워져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는 몸을 돌려
이제 무덤에 도착하는 여인들을 지나쳐 급히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사건을 전하기 위해서
달리기 시작합니다.
다시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 무덤으로 왔습니다. 이제 제자들도 돌아가고 마리아는
무덤에 여전히 남아서 울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가 도둑질해갔다고 생각한 마리아는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무덤 속을 바라보는 마리아에게 흰옷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이 뉘었던 머리편과
발편에 앉아서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묻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치웠는지 몰라서 운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마리아의 뒤에 서서 또 묻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울면서 쳐다보지도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옮겨갔으면, 어디로 옮겨갔는지 말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조용히 “마리아야”하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주십니다.
아무도 없는 새벽녁에 무덤가에서 마리아를 부르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은,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이시고 말씀을 하시던 그런 큰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첫 부활절 아침 주님이 하신 말씀은 ‘마리아야’라고
당신이 위해서 죽으신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를 그렇게 찾아오셔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듯이,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자기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개인적으로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오셨고 만나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4. 희망을 잃어버린 두 제자의 귀향길에 눅24:13~35, 막16:12~13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기사에서 특별히 전해주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이후에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아마도 그들의 고향이었을지 모르는 엠마오로 낙향하던 두 제자와 동행하신 사건입니다.
이것도 조용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두 제자들과의 사이에서만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 제자들은 무덤에 가서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여자들로부터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신들이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시면서 구약성경에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들을
그들과 동행하는 길에서 가르쳐주십니다.
해가 저물어 여관에 들어가 저녁을 먹으려고 예수님께서 떡으로 축사를 하실 때
비로소 그 두 제자의 눈이 열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 앞에 계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의 눈 앞에서 사라져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못해하는 두 제자에게 조용히 나타나셔서 당신을 보이시고는
다시 사라지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정말 조용한 만남이었습니다.
이 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 오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5. 두려워하는 제자들 눅24:36~43
그리고 다시 장면은 아직도 예수님의 처참한 십자가 죽음의 모습의 잔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이 두려워서 함께 문을 닫고 모여있던 자리입니다.
그들 역시 예수님이 사셨다는 천사의 전한 이야기를 들었을 터이고,
마리아가 전하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 놀라운 사실을 마리아의 증언만 믿고 받아들이기에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에게 찾아왔던 그 죽음이 자기들에게로 미치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모인 그 다락에 오신 것은 정말 홀연히 임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굳게 닫힌 문을 열어달라고 문을 두드리지도 않으셨고
영화로운 몸을 입으신 부활하신 구주께서는 그들 가운데 홀연히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말씀하셨습니다.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인사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완전함의 상태, 의로움이 가득한 상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있는 상태를 말하는 인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렇게 제자들 가운데 조용히 찾아오셨습니다.
▲6. 오백여 형제와 사울에게 고전15:6, 8
자세한 정황을 성경이 소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바울 사도는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고전15:6.
그들은 모두 형제입니다. 주님을 따르던 자들이었고 주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모여있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맨 나중에는 당신을 핍박하던 사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고전15:8.
사울은 주님을 알지 못하던 자였지만, 주님은 그를 창세전에 택정하시고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 사건은 사울을 바울로 변하게 만들었고 교회사 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약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부활절 경험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그분의 나타나심을 믿고 바라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첫 성탄절은 헤롯의 왕궁을 뒤집어놓았고 멀리 동방박사들의 마음까지 들뜨게 하였으며
하늘에서는 천군천사들의 합창 소리가 이어졌던 정말 그렇게 떠들석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부활절은 그토록 대조적으로 “조용한 사건”으로 찾아온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부활의 사건이야말로 세상 역사를 뒤집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모든 사람들에게 멋진 복수를 할 수 있는 사건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자들이 승천을 앞두신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주님은 부활로써 회복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적인 나라가 아니라 영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고,
그 나라는 육체의 복종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영혼의 복종으로 들어가는 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정치적으로 당시 사람들이 메시아에게
기대하던 대로 로마제국을 뒤집고 세우는 이스라엘 왕국이라고 이해하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야 할 이유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죄인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하시는 나라입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세상과 우주의 왕권을 가지고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는 그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첫 부활절은 조용히 믿는 자들 가운데 일어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가족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구원의 약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부활절 경험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그분의 나타나심을 믿고 바라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첫 부활절이 조용하게 찾아온 이유입니다.
◑2. 부활절에 일어난 폭력 히2:14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잡히셔서 모진 폭력과 고문에 시달리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역사 속에서 만든 최고로 잔인한 폭력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기억합니다. 인간의 잔인한 폭력이 하나님의 아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폭력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끝나는 것 같았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에도, 또 하나의 새로운 폭력,
인간이 알았던 적이 없는 폭력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사망이 죽임을 당한 폭력”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씁니다.
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주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사망과 함께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인 마귀를 멸하신 것입니다. 악한 폭력을 멸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에서 일어난 폭력의 종언이며,
죽음의 죽임당함인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죄인이었던 우리들에게 임할 모든 죄와 죄책,
그리고 죄의 저주와 죽음을 다 멸하셨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받아야할 저주와 죄책,
그리고 영원한 죽음은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놀라운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확증되었다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이 없었고 단지 죽으심만 있었다면,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주님이 내어주심이 되었을지라도
어떻게 우리가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영단번의 제사는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하게 만족시켜 드린 제사가 된 것임을
우리는 그분의 부활로써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 부활의 사건이 세상을 뒤집을만큼 소란스럽게 일어나지 않았고
조용하게 당신의 자녀들에게만 나타난 사건이었을지라도 말입니다.
부활절에 일어난 폭력은 죽음을 죽여버린 폭력이었습니다.
◑3. 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가 남아 있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활과 관련한 질문을 더 생각하려고 합니다.
부활 후에 영화로운 몸을 입으신 우리 구주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보고도 믿지 못해 하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은
손과 발의 상처를 보이신 것입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고 말씀하시고,
직접 손과 발을 보이셨습니다. 눅24:39~40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아직도 상처가 남아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손과 발의 상처였으며
창에 찔리신 옆구리의 상처였습니다. 요21:37.
▲1.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십자가에 못박히고 거기서 창에 찔린 흔적이
예수님의 부활하신 영화로운 몸에서 지워지지 않은 까닭은
그 상처가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영원토록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상처로, 훈장처럼 남아있는 거죠.
성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시도록 죄인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못자국난 상처를 바라보는 천국의 성도들의 가슴 속에
영원토록 살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죄인들을 사랑하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상처와 창자국이 선명한 예수님의 몸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으며, 그 죄가 예수님을 죽게 하였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받으신 그 저주와 진노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영원토록 증거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성도들의 자랑이 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자랑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자랑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성 삼위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나타나셨고, 말씀하셨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역사의 한 순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입니다.
부활도 그 영광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2.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나를 살펴보실 때 그분은 내가 딴 학위나 내가 받은 상이 아니라
내가 입은 상처로 판단하실 것이다" William Lane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신학자 William Lane의 말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주님께서 나를 살펴보실 때 그분은 내가 딴 학위나 내가 받은 상이 아니라
내가 입은 상처로 판단하실 것이다"
그의 제자인 마이클 카드 Michael Card는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한 사실 하나를 말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우리 가슴에 달고 싶다면,
우리 역시 우리에게 있는 상처들로 우리 자신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십자가의 흔적을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진정한 표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거둔 성공, 학벌, 소유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왕국은 바로 이렇습니다.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모든 제자들은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이땅에서 자신들만의 상처를 안고, 그들의 주님이 베푸신 사랑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가룟 유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요.”
우리 주님의 부활하신 몸에도 십자가 못자국과 창자국이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있었다면,
하물며 우리들에게는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세상의 기준으로 얻었고 누렸던
영광스러운 성공의 흔적들, 학위, 상, 훈장, 학벌, 소유가
부활 후에도 과연 우리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그분은 우리가 딴 학위나 우리가 받은 상이나 영예나 칭찬이나 유명세나 업적이나 소유나
성공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정절로 말미암아 받은 상처들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그 날에는 영원토록
그 상처가 우리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상처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영원토록 성 삼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3. 겸손과 순종이 우리를 영광의 부활로 인도하는 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하신 부활절을 기념하고 기뻐하면서
이런 생각을 가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삶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신다면,
때로는 굴욕과 같이도 느껴지는 겸손함을 겪을 때가 올 때 그것을 받아들이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이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는 것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주님의 겟세마네로부터 2000년 전에 이삭이 모리아산의 제단에 누워서
칼을 든 아버지에게 순종하였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셔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겠노라고,
내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드리는
순종을 드려야 할 순간이 오게 될 것입니다.
아니, 보다 정직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매일 매순간을 그런 결단을 내리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에도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순종이 우리를 온전하게 속으로부터 변화시키는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겸손과 순종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나아가게 했고 그것이 구주를 영광의 부활로 인도하셨듯이,
우리의 겸손과 순종도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할 것이며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상처와 함께 영광의 부활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겸손과 순종이 우리를 영광의 부활로 인도하는 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