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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5장 부활을 믿으면

LNCK 2026. 4. 6. 17:19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부활               출처

 

◈부활을 믿으면               고전15:29-34             2026.04.05.

 

오늘은 부활 주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무덤의 종교가 아닙니다.

빈 무덤의 종교이고,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현재적 부활

 

그런데 부활은 먼 미래의 사건만이 아닙니다.

단지 죽고 나서 일어날, 먼 미래의 일만이 아닙니다.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오늘 나의 삶과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부활을 진짜로 믿는다면, 현재 이 땅의 삶도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의 삶도 달라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제가 지금 빚에 허덕여서

동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변호사가 찾아와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한 달 뒤에 제 통장으로 100억 원이 입금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서류 절차도 다 끝났다는 확정 통보를 했습니다.

 

제가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한 달 뒤에 일어날 일이지만, 100% 믿었습니다.

그러면 믿기 전과 믿은 후는, 반드시 차이가 있겠죠.

 

믿기 전에는 손님이 제게 무례하게 굴면 화가 치밀었습니다.

‘내 삶은 왜 이 모양인가?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또 컵라면 하나 사 먹는 것도 손이 떨렸습니다.

그런데 변호사의 말을 믿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똑같이 편의점에서 바닥을 쓸고 손님을 대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집니다.

한 달 동안은 알바로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진상 손님이 와도 너그럽게 넘깁니다. 컵라면을 먹어도 손이 떨리지 않습니다.

담대해집니다. 편의점에서 파는 단무지와 김치도 같이 사서 먹습니다. 왜요?

한 달 뒤에 100억이 입금된다는 사실을 믿으니까요.

 

그러니까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믿음은, 미래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늘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꿉니다. 오늘을 대하는 삶을 바꿉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 볼게요. 

제가 군대에 갔었을 때 어떤 믿음이 있었냐면 ‘때가 되면 제대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시간이 안 가는 것 같아도,

‘결국 전역한 날은 온다, 그때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마치 소풍 가기 전 날의 아이처럼, 방학 전에 아이의 마음처럼,

제대하는 날만 생각하면, 저절로 삶에 활력이 돋고, 기뻐지는 거죠.

아직까지 내가 말년 병장으로 지내고 있지만, 그 군대생활이 너무 기쁜 거예요.

그래서 삶이 힘들어도 기쁘고, 억울해도 기쁘고, 몸이 아파도 기쁘고... 이렇게 되었죠.

 

이 미래의 확신이 군 생활을 바꾸었습니다.

군대 물품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제대하면 더 좋은 물건을 가지게 되니까요.

좋은 것 있으면 후임들 나눠주고, 제대할 때는 다 놓고 나왔습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에 대한 미래의 믿음은 현재를 바꿔놓습니다.

만일 우리가 진짜 부활을 믿는다면, 진짜 믿는다면, 그 믿음은 오늘의 삶을 바꿉니다.

오늘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당장의 삶을 바꿉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부활을 믿으면”

참고로 여러분, 작년 부활주일 설교 제목은 “부활이 있다면” 이었습니다.

올해 설교 제목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늙은 사과나무를 보며, 부활의 소망을 가졌던 롱펠로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며 살게 되어있습니다.

 

19세기 최고의 시인 롱펠로는 인생에서 쓰라린 체험을 겪은 사람입니다.

아내가 젊어서 오랫동안 앓다가 죽었고,

재혼한 아내마저 몇 년 안 되어 부엌에서 화상을 입고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롱펠로가 75세가 되어 임종이 가까웠을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두 부인과의 사별뿐 아니라,

인생에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신 것으로 아는데,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시들을 쓸 수 있었습니까?”

 

이에 롱펠로는 마당에 보이는 늙은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대답했습니다.

“저 나무가 내 스승이었습니다.

저 사과나무는 몹시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꽃이 피고 사과열매가 열립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새 가지가 조금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도 그렇습니다.

 

나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새 생명을 계속 공급받아

인생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늙고 어려운 환경이라 할지라도

새 생명의 공급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급하시는 힘만 있으면...

아름다운 인생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늙더라도, 저 늙은 사과나무처럼 말입니다...

 

☞고전15:42-44 현재적 부활신앙 https://rfcdrfcd.tistory.com/15978368

 

◑‘부활이 있다면’ 에서 ‘부활을 믿으면’ 우리 삶은 어떻게 변화되는가요?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부활을 믿는 자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삶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정말 부활을 믿는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고백과 나의 삶이, 혹시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면, 이 시간 조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부활은 없다’ 라고 믿는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바람과 기대를 가지고,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고전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위 구절에 낯선 이상한 얘기가 나옵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 입니다.

 

여러분 혹시 주변에서 ‘죽은 자를 위해 대신 세례를 받는’ 장면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우리 교회만 없는 게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기독교는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베풀었다든지,

아니면 죽은 자를 위하여 대신 세례받는 것을 지지하거나 동의한 적이

기독교 역사상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걸 가르치지 않으니까요.

 

여러분, 교회가 죽은 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질문해 보겠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이미 별세한 분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분의 구원을 위해? ... 없죠.

 

물론 그분이 생전에 구원을 받았다면, 감사기도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본문,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를 받는 자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난해 구절인데요. 그런데 몰몬교라는 이단은, 이걸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몰몬교는 ‘대리 세례’가 있습니다.

내 부모가 안 믿고 돌아가셨다 그러면, ‘내가 대신 세례를 받겠습니다’ 하면,

부모 대신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대리세례를 가르치거나, 지지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여기 ‘죽은 자들을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초대교회의 일부 잘못된 그룹이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정통교회와는 다른, 어떤 그룹이 있었다는 거죠.

이단과 비슷한 그런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당시에 있었습니다.

중요한 건, 이 그룹들이 누구냐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15:29절을 새번역으로 한번 보시겠어요?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 하려고 그런 일을 합니까?

죽은 사람이 정말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습니까?

 

※원래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바울이 권면하고 가르치기 위해
쓴 서신입니다.
그 고린도교회의 문제 중 하나가, 일부 교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바울의 처방은 ‘부활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신의 말미인 15장에, ‘부활’에 대해서 강력하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어떤 문제가 있었냐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어디 안에요? 교회 안에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뭘 했냐면,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니 여러분,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부활이 없다고 믿는다면,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를 왜 받습니까?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죽은 자를 대신해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뭐하러 죽은 자를 대신해서 세례를 받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그건 모순이잖아요.

 

그러니까 바울은 말하는 겁니다.

‘반드시 부활은 있다. 성경대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분을 믿으면 우리의 죽은 몸도 그분처럼 다시 살아날 것이다.

죽은 우리 몸도 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활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입으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으로 보여줍니다.

부활을 믿기 때문에 변화된 삶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진짜 부활을 믿는 자의 삶은 어떠한가?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진짜 부활을 믿는 사람은, 기꺼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습니다.

 

15: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바울은 많은 위험을 받았습니다. 이 위험은 주님을 위한 위험이었습니다.

이 위험의 목록이 고후11장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11:23~26

 

여러분,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위험’이라는 단어이죠.

바울은 온갖 위험을 진짜 당했습니다. 매 순간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라고 말합니다.

바울만 아니라 “우리가” 누구입니까? 바울의 동역자들입니다.     *15:30

바울과 같이 부활의 주님을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특별해서 고난을 받았던 게 아니었습니다.

바울만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고난도 무릅쓰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바울처럼 많은 고난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오늘날 많은 위험을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부활을 진짜 믿는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위한 위험을 무릅쓰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을 무릅쓰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있으니까요. 이 땅이 전부가 아니니까요.

부활의 영광이 있으니까요. 부활의 주님을 만날 부활의 날이 있으니까요!

 

△여러분,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이 땅이 전부라면, 고난은 피해야 할 악일 뿐입니다.

만일 고생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주님을 위한 고난은 그저 무모한 짓일 뿐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신앙 때문에 겪는 고난은, 진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잖아요.

이 땅이 끝이니까요.

 

그러나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바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우리”, 바울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잠시 잠깐의 이 땅에서의 안락함보다,

부활 이후의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을 위한 고난도 기꺼이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바울이 말한 “우리” 안에는, 여러분도 들어가 계십니까?     *15:30

 

여러분도 위험을, 주님을 위한 위험을 무릅쓰고 계십니까?

지난 한 주는 어떠셨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무릅쓰는 삶이 있었습니까?

지난 한 주간, 주님 때문에 내가 감수한 손해나 불편함이 있었습니까?

지난 한 주간, 주님을 위한 희생이 있었습니까?

 

오늘 바울은 말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먼 미래에 일어날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부활을 믿으면, 진짜 부활을 믿기 때문에,

다시 만날 주님을 위해, 이 땅의 안락함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요.

 

이 땅의 안락함보다, 주님을 위한 고난을 택한다고요. 고난도 때론 기뻐한다고요.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고난 받기를 자처했던 의인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 직후로 매우 혼란스럽고 어두운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아펜젤러 선교사는 기도를 통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땅의 묶인 결박을 푸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빛과 자유를 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했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던 '은둔의 나라'에 부활의 소망을 심었던 이들의 믿음이

오늘날 한국 교회 성장과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2. 부활을 믿으면.. 날마다 죽습니다.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말합니다.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은 단순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삶을 말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내가 어떻게 되느냐 보다,

나를 통해 예수님이 당장 어떻게 되시느냐가 더 중요한 삶을 말합니다.

 

나보다는 예수님이 더 중요한 삶, 예수님을 위하여 나를 죽이는 삶을 살았다는 고백입니다.

내 뜻도 죽이고, 내 계획도 죽이고, 내 자아도 죽이고, 내 성질도 죽이고,

내 정욕과 탐심도 죽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성향도 죽이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죽어도 되는 삶, 나는 지워져도 되는 삶,

그 삶이 바로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내가 예수 믿지 않았다면, 더 편안하게 살았을 텐데...’

‘내가 예수만 믿지 않았다면, 좀 더 쉽게 갈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예수만 믿지 않았다면, 나도 내 성질대로 확 받았을 텐데...’

‘내가 예수만 믿지 않았다면, 그냥 대놓고 한바탕 싸울 수도 있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우리 자신을 죽이는 거 있잖아요.

그게 바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반대로 부활을 안 믿으면 어떻게 될까요?

날마다 죽기는커녕, 날마다 자기를 위하여 살아갑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으니까요.

이 땅이 전부라고 믿으니까요.

 

이 땅에서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고, 안전하게 노후를 대비하는 것에

초점이 딱 맞춰져 있습니다.

 

삶의 나침반이 오직 나의 생존과 유익을 향해 있습니다. 더 움켜지려 하고요.

내 가족과 나를 위해 살고요. 내 육신의 안위 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부활을 믿으므로, 다르게 삽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영혼이 있고,

다시 만날 주님을 믿으면, 그 주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날마다 나를 죽이는 삶을 살아갑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이 있고, 부활 뒤에 만날 주님이 있고,

주님께 받을 칭찬과 존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부활을 믿으면 날마다 죽는다고요. 그렇게 살아간다고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15:31

 

▲3. 부활을 믿으면 "싸우는 삶"을 살아갑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딤전6:12

 

15: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여러분 여기 ‘싸웠다’는 단어에 표시해 두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맹수는,

진짜 사자같은 맹수가 아니라, 은유입니다.

 

바울은 이 고린도전서를 지금 에베소에서 쓰고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에베소에서 핍박을 준 사람들을 ‘맹수’라고 표현한 겁니다.

 

마치 진짜 맹수처럼, 바울을 괴롭히고 핍박했던 대적들, 또한 죄의 유혹도 포함이 되겠죠.

중요한 건, 바울이 싸웠다는 것입니다.

 

자기 죄와 싸우고, 영적인 공격과 싸우고,

복음을 대적하는 세상의 가치와도 싸우고, 대적자들과도 싸웠습니다.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웠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32

 

여기 ‘사람의 방법으로’는 인간적인 동기라는 뜻입니다.

‘내가 인간적인 동기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2b

즉 ‘내가 뭐하러 이 고생하며 살아갑니까?

내가 싸우는 이유는, 내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싸우는 이유는,

단 하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내게 상 주실 주님과, 부활의 생명을 바라보고 참고 견뎌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세상을 거스르고,

죄와 싸우고,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고,

깨어 마귀의 유혹을 대적하는 싸우는 삶을...

그야말로 ‘싸우는 삶’을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싸움 있지 않습니까?

아내와 남편과 싸우는 거 말고요. 주님을 위해 싸우는 거요.

죄를 위해 싸우는 거 있지 않습니까?

 

누구도 보는 사람이 없어서 죄를 지어도 될 것 같은데,

주님이 나를 보고 계시니까... 그런 식으로 싸우는 거 있잖아요.

주님 마음을 아프게 안 하려고, 주님을 배신하지 않으려고.. 싸우는 거 있잖아요.

 

또한 내가 예수님 믿는 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가장 좋고 편한 건,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잖아요. 오히려 그들 위에 눈물로 기도해주고,

핍박을 받더라도 주님을 더 잘 믿으려 하고, 이렇게 성도는 영적으로 싸우잖아요. 왜요?

 

이 땅이 끝이 아니니까요. 주님이 죽음에서 다시 사셨으니까요.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니까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이 다시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하니까요.

 

사람들보다 그분의 인정과 칭찬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게 더 영원하니까요.

때로는 나도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싶은 유혹이 들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부끄럽지만 목사이지만

때로는 허파에 바람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잖아요.

왜냐하면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부활이 있으니까요. 더 낫고 영원한 천국이 있으니까요.

주님이 주실 칭찬과 상급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싸우잖아요. 세상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고,

세상에 순응하기보다 세상에서 저항하고,

세상 속에서 하루라도 더 한 순간이라도 더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우리가 싸우잖아요.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으니까요.

 

△반대로 여러분 부활을 믿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32절에 바울이 말한 대로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어젯밤은 토요일 밤이었죠. 대한민국에 있는 술집에서 이 말이 분명히 나왔을 겁니다.

‘죽자. 마시고 죽자!’ 분명 건배사로 나왔을 겁니다.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이죠. 이 세상이 끝이라고 믿으니까요.

 

알고 보니까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닙니다. 라틴어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카르페 디엄’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직역하면 ‘나를 잡으세요’라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순간을 즐기세요’ 라는 말입니다.

 

요즘 ‘욜로’라는 유행어가 있지 않았습니까?

You only live once 앞 글자만 따서 YOLO!

‘욜로, 인생은 오직 한 번뿐이다. 그러니 먹고 마시며 즐기자!’

부활을 믿지 않으니까요. 소망도 없고, 미래도 없으니까요. 다 영적 하루살이를 살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으면 다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은 똑같은데 어디로 가냐면,

‘주님을 위해 살자’로 갑니다.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으니까, 부활을 기다리니까, ‘먹고 마시고 놀자’가 안됩니다.

주님을 다시 만나야 하니까요. 싸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의 유혹과 싸우고, 영적인 유혹과 싸우고, 죄와 싸우고,

믿음을 위해 싸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아니면 싸울 필요가 없죠. 뭐하러 싸웁니까?

흘러가는 대로 사는 거죠. 남들 다 사는 대로 똑같이 사는 거죠.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싸운다고요.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32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래서 부활을 믿는 자답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주님을 위한 위험도, 고난도 무릅쓰고 계십니까? 또 날마다 죽고 계십니까?

또 주님을 위해 날마다 싸우고 계십니까?

 

△링컨 대통령은 아시다시피 정적이 많았습니다.

그가 그 정적들의 공격을 선하게 이겨내고, 끝까지 자기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에이브러햄 링컨은 어릴 적에,

어머니 낸시 행크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 어린 링컨에게 성경을 물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이브러햄, 이 성경은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란다.

내가 죽더라도 낙심하지 마라.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시 만날 약속이 있는 문일 뿐이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이 말씀대로 산다면, 우리는 반드시 부활해서 다시 만날 것이다."

 

링컨은 평생 어머니가 남긴 부활의 소망을 품고 고난을 이겨냈으며,

훗날 "어머니의 기도가 나를 만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문이 닫혔는데도, 문을 지나서 들어가십니다.

 

우리의 몸도 이와 같은 몸으로 부활의 날에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몸에 뭐가 남았었죠?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부활하신 몸을 입었는데,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어떤 상처였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고난당하실 때 생긴 상처입니다.

옆구리에 창 자국, 또 손과 발에 난 대못 자국,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부활의 몸을 입으면, 뭐는 남을까요?

주님을 위해서 받았던 ‘고난의 상처’는 남습니다.

또 날마다 죽기 위해 받았던 상처도 남습니다.

또 주님을 위해 피 흘리기까지 싸웠던, 치열하게 싸웠던 상처는 남습니다.

‘영광의 상처들’입니다.

 

그 모든 상처가, 우리가 부활하면, 영광의 흔적이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죠. ‘상처 scar 가 별 star 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15:33 ‘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악한 동무들’은 누구를 말합니까? 부활이 없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부활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살도록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를 부활의 삶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행실을 더럽히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습니까?

부활의 삶에서 멀어지게 하는 사람들, 그게 나 자신일 수 있고,

또 나를 유혹하는 누군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세상의 유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속지 말라!’

왜요? 부활이 있거든요. 반드시 부활이 있거든요.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5:34 ‘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바울은 강하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여기 ‘너희’는 악한 동무들을 가리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 불행하게도 이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똑같이 예배드리고 똑같이 말씀 듣는데, 정작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

부활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

그래서 속이는 사람들, 다른 성도들도 부활의 삶에서 멀어지게 하는 사람들,

자꾸 세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사람들,

자꾸 교회의 시선을 부활의 삶에서 이 땅의 삶으로 돌리게 만드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굉장히 세게 말하는 거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34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속지 말라’

부활은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몸의 부활이 있고, 주님 다시 만날 날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결산받는 날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상급이 있고 영원한 형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삶이 있고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34

즉 ‘주님을 위해서라면 고난도 무릅쓰라. 또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아가라.

또 주님을 위해서 싸우며 살아가라’ 왜냐하면 부활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을 위해 믿음으로 살았던 우리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부활의 날, 주님을 위해 흘렸던 모든 눈물과 아픔은 깨끗이 씻겨질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눈물과 아픔 또 상처만큼

주님께서 우리를 존귀와 영광으로 옷 입혀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