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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는 길 삼상6:10~15, 눅14:26~27 2007.01.21.
※마지막 부분, 끝까지 읽으시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입
요 며칠 동안 저는 소화불량에 시달렸었습니다.
밥을 먹고 나면 더부룩해져서 다음 끼니가 오는 게 부담이 되는 거예요
석달 전에 운동을 시작한 이래 잔병치레는 물론 피곤함을 전혀 모르고 살았는데,
다시 지난 10월에 된통 앓았던 병을 앓게 된 겁니다.
며칠 동안 지켜보던 집 사람이 “내가 그 이유를 알지” 그러면서
또 제게 비수 같은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욕심을 버리세요. 마음을 비우세요” 그러는 겁니다.
20년 이상을 같이 살다보니, 무슨 일이 생기면, 제 얼굴만 봐도 아는 거예요.
숨길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집 사람으로부터 그 얘기를 들은 후로 다시 생각을 해 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해결해 보려고 애를 썼지요.
▲그러던 중, 길에 지나가던 반려견을 볼 때, 갑자기 과거에 읽었던 책 내용이 떠올랐어요.
군에서 사역하시는 군목님이 쓰신 건데,
그 목사님이 사역하시는 부대의 사단장님은 아주 열심히 믿는 분이셨답니다.
사단장이 얼마나 일이 많고 바쁩니까?
그런데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나오셨대요.
그런데 그 사단장님이 새벽기도에 나올 때는, 꼭 그 집 개도 같이 따라 나오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개는 새벽기도가 끝날 때까지, 교회 문 앞에서
주인을 기다렸다가 같이 돌아가곤 했답니다.
그러니까 그 개도 매일 새벽기도를 한 거지요.
그러다가 그 사단장이 전출을 가게 됐나 봐요.
그런데 새로 부임해 가는 부대는, 개를 기를 형편이 못 되었던지,
개를 그냥 그 부대에 두고 떠났답니다.
그런데 사단장이 떠나고 난 다음 날,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하려고 교회에 와서 보니까
그 개가 교회 문 앞에 와 있더래요.
그리고는 아주 슬픈 얼굴로 목사님을 쳐다 보더랍니다.
'우리 주인 어디 갔냐?' 하는 표정이더랍니다.
혹시 우리 주인이 여기 매일 오니까, 여기 오면 만날 수 있겠지...
하는 그런 모습이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보니까 또 나와 있더래요.
목사님 생각에 ‘며칠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계속 나오더라는 거예요.
그렇게 얼마동안 그 개가 계속했냐 하면, 꼬박 한 달을 나오더라는 겁니다.
▲이렇게 어떤 면에서는 동물이나 짐승이, 사람보다 나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짐승들을 등장시켜서 뭔가를 말씀하시는 경우가 적잖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돈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러 가는 발람 선지자에게 말을 해서
그가 가는 길을 막았던 당나귀가 있고,
또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던 나귀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갑자기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두 마리가 생각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설교 본문을 펴고 읽으면서, 본문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위장병이 다 나아버렸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그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설교를 듣는 가운데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새롭게 결단토록 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시지프스는 신들의 저주를 사서 가장 큰 형벌을 받는데,
그것은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형벌이였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바위를 밀어 올리면, 그 바위는 자기 무게 때문에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그러면 시지프스는 처음부터 다시 그 바위를 굴려서 산 꼭대기까지 밀어 올려야 했습니다.
제우스에게 그런 형벌을 받은 거죠.
그러면 바위는 또 굴러 떨어지고, 시지프스는 또 다시 밀어 올리는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노동이었습니다.
신들은 그런 희망없는 노동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 이야기는, 굴러 떨어진 바위를 또 다시 밀어 올리려고 터덜터덜 산 아래로 내려오는
시지프스의 모습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그 시지프스의 신화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암담함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신앙을 산 정상까지 밀어올리기는 너무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래도 온 힘을 다해서 꼭대기까지 밀어올렸나 싶으면
어느 새 우리 믿음은 금새 바닥까지 굴러떨어진 것을 보는 겁니다.
그래서 또 밀어 올리고, 또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허탈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얘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나 겪는 아픔이고, 갈등이고,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 시지프스의 신화와 우리의 신앙이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습니다.
시지프스가 그렇게 허망한 까닭은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혼자 그 무의미한 일을 반복해야 되지만, 우리의 신앙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비록 시지프스처럼 꼭대기와 산 아래를 왕복하는 것은 비슷할 지 모르지만,
우리는 돕는 이가 있고, 올라가면 올라가는 대로, *성령님, 성령 감화 받은 교우들
내려오면 내려오는 대로... 거기엔 제각기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가, 그렇게 시지프스처럼 세팅 되어 있는 것도 아니죠.
물론 내려올 때도 있지만, up and down 하면서 우상향으로 계속 성숙되어져 가는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얘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참에 다시 한 번 신앙의 본질이 뭔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자칫 시지프스와 똑같은 모습으로
권태와 무의미와 절망을 끌어안고 살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분명히 알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믿음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답하든 틀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히브리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신앙이란 꿈꾸는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라는 말씀을
그 증거로 삼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는 통로라고도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9:23)
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는 말씀을 좋아합니다.
물론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분만을 가리키는 말이지, 충분한 답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훨씬 더 다른 차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만약 기근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의 기갈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야 했던 것처럼,
그 후예들인 우리들 역시 본질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에 대해서 정리하면,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에 구현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신앙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함께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따라해 봅시다)
“신앙이란 하나님 말씀을 우리 삶에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 삶에 구현한다,
하나님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이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 삶에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표현만 다르지 그것은 다 같은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
구원의 즐거움, 하나님 나라의 평안, 장래의 소망, 관계의 회복, 에덴의 회복이 있으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 생활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에 그 해답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해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 설명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을 알아 보십시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 말씀인 십계명을 주셨지요?
그것은 두 개의 돌판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이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겉에 금칠을 한 나무 궤에다 넣고
그것을 지성소 안에 모셔서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습니다.
바로 그 나무 궤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법궤지요?
그래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있는 이 법궤는 곧 이스라엘을 지키는 수호신이었고,
생명과도 같은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어딜 가나 그 법궤를 앞세우고 가면 든든했습니다. 무서울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부터 가나안에 들어설 때까지, 그 법궤는 이스라엘을 지켰던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 법궤에 대한 존엄은
가히 상상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시겠지요?
그런데 그렇게도 소중했던 법궤가 원수나라였던 블레셋에 빼앗기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엘리 제사장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아주 이상스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법궤가 옮겨진 블레셋 땅에서 일어났는데,
블레셋에는7개월 동안이나 아주 지독한 피부병이 돌아서 곤욕을 치뤘고,
누구든 그 법궤를 만지기만 하면 죽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한 마디로 그 법궤가 있는 동안 블레셋은 온통 재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수호신 같은 물건을 뺏었으니 우리가 얼마나 대단하냐?” 했지만,
그러나 그 자부심은 잠시였습니다.
온갖 질병으로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니까
블레셋은 속수무책인 이 법궤에 대해 고민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이리저리 옮겨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심지어 마지막 법궤를 옮겼던 도시에서는 험악한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일이 이쯤되니까 블레셋의 고위 관계자들은 회의를 한 끝에
이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본문 말씀은 이 빼앗긴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 데서 부터 시작이 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은, 꽤 여러 번 들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제 친구 하나는 고등부 때부터 청년 때까지 대표기도할 기회만 있으면
꼭 이 벧세메스로 가는 소 이야기를 집어 넣었었는데,
얼마 전 다른 친구한테 그 친구 요즘도 그 얘길 하냐고 물어보니까
지금 권사인데, 아직까지도 그 기도를 한다는 거예요.
그만큼 익히 알려진 말씀인데, 그럴지라도 우리가 다시 한 번 유심히 봐야 될 면이 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성경엔 점 하나, 획 하나도 의미없이 써진 것이 없습니다.
그 표현방법이나 내용이나 배경, 이런 것들은.. 괜히 늘어놓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때로는 망원경으로 보듯이 크게 봐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현미경을 보듯이 정밀하게 봐야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 법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옮기면서 보여주는 그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지요?
법궤를 수레에다 싣고는, 그 수레를 젖나는 암소 두 마리를 데려다가 끌게 합니다.
그리고 그 수레를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향하도록 하지요?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은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 지나치기 쉽습니다.
드라마로 치면 그저 소품을 하나 장식해 놓은 것 밖에 안 돼 보일 수도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숨은 그림찾기를 하듯 아주 없을 것 같고,
아닐 것 같은 곳에 당신의 진리를 숨겨 놓으시는 분입니다.
먼저 본문에서 상징하는 것들이 뭔가를 말씀드리면,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 즉 오늘날의 성경을 말하는 것이고,
수레에 실린 법궤를 끌고 벧세메스로 향하는 암소 두 마리는
말씀을 갖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는 우리가, 그 말씀대로 따르기 위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와 여정이 어떻해야 하겠나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해답이 분명하고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갖고 사는 성도의 삶의 자세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습니까? ←문제 제기
오늘 저는 본문을 중심으로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 속병을 낫게 해 준 말씀이라니까
뭔가 낙관적이고 기쁘고 소망의 말씀일테지 기대하시는 분도 계실텐데
어쩌면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읽지 않으면 않되는 말씀입니다.
◑1. 첫째는, 법궤를 끌 소를 찾을 때 젖이 나는 암소를 택했다는 점입니다.
삼상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왜 하필 젖 나는 암소를 택했을까요?
힘으로 따지자면 숫소, 즉 황소를 택하는 게 옳쟎아요?
무거운 수레를 끌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힘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 좋은 황소가 제격입니다.
그러나 수레를 끌기 위해 선택된 것은 황소가 아니었습니다.
또 법궤라는 특수성을 감안해서 순결함과 정결함이 필요했다면
아마 흠없고 티없는 어린 송아지를 선택하는 게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송아지도 배제 되었습니다.
뭘 말하려는 것이겠습니까?
굳이 젖나는 암소를 택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픔입니다.
이제 막 새끼를 낳아서 사랑으로 길러야 할 어미 소가 분신과도 같은 새끼와
생 이별을 해야하는 것, 그것은 뭘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아픔이요, 고통이라는 겁니다.
동물학자들에 의하면, 동물 역시 사람만큼 자기 새끼에 대한 사랑이 있답니다.
특히 암컷의 모성애는 사람에 비해 그 정도가 전혀 뒤지지 않는답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동물의 새끼 사랑을 직접 보신 분이 있을 겁니다.
개가 강아지를 보호하는 것을 보신 분 계십니까?
새끼 낳고 며칠은 그 누구도 얼씬 못하게 합니다.
조금 가까이 가 보십시오. 죽어라고 짖습니다.
그리고 혹 자기 새끼가 밖으로 나가면 입으로 물어서 제 집에다 데려다 놓는데,
그 새끼를 얼마나 자상하게 안 아프게 무는 지 볼 때마다 감탄할 정도입니다.
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송아지는 난지 10분도 채 안 돼서 걸어다닙니다.
그러면 어미 소가 그 새끼가 사랑스러워서, 그 긴 혀로 온 몸을 구석구석 핥고 닦아줍니다.
얼마나 예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7절 하반절을 보세요. "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 송아지들을 떼어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랬지요?
또 10절에 보면, 그 송아지들을 어떻게 합니까? "집에다 가뒀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12절 보면, 암소가 벧세메스로 갈 때 어떻게 했다구요?
"어미 소 두 마리가 울었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 소가 왜 울었을까요?
물론 성경에는 새끼와 생이별 하는 게 슬퍼서 울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만,
자기 새끼와 생이별 하는 게 너무 슬퍼서 울었겠지요.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어릴 때 보면, 소는 자기가 도살장에 가는 것을 알더라구요.
이 오늘 본문은 그 암소의 아픔이 얼마나 큰가를 알려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에서 받아야 될 메시지가 뭐겠습니까?
그 법궤, 즉 말씀을 갖고, 말씀을 지키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은
큰 슬픔과 아픔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주제
그렇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은 힘이 듭니다.
외롭습니다. 괴롭습니다.
많은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많은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 모든 괴롬과 희생과 슬픔과 아픔의 강도가 어느 정도여야 한다는 겁니까?
마치 막 낳은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우리가 우리의 신분을 잘 압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싫든 좋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서로간에 믿음의 차이는 혹 있을 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는 말씀을 배제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여러분이나 저나 그 아픔에서 이미 벗어날 수 없는 궤도에 들어섰고,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앞으로 그 아픔은 갈수록 작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커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정말 안타깝게도 그 아픔은,
젖 먹는 새끼와 생이별 하는 것 만큼이나 아프고 고통스러울 거라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가 '축복의 종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2007년 상황
그래서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 말씀들이
갈 바를 알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을 살린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도들 역시 계속해서 그런 말씀들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가 평소 아는 기독교의 상식과 반대가 되는 말씀입니다.
저라고 오늘 이런 말씀 전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게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든, 슬프게 하든, 맥빠지게 하든
거기엔 상관하시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갖고 살아가는 것 (법궤를 메고 가는 길)은 아픔이라는 겁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거예요.
말씀은 아픔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왜 이런 말씀에 용기를 얻고 치유를 받습니까?
내가 아파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가고 있는 증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활을 하면서, 또는 목회를 하면서, 교회 때문에 아파하고 성도들 때문에 아파하는 것은
제가 제 궤도를 제대로 가고 있구나 싶으니까 오히려 위로가 되더라는 겁니다. ★
▲제가 전에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서 한 집사님이, 자기 남편 때문에 속상해 하면서
제게 의논을 해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명색이 집사라는 양반이 주일이 되면 낚시에 빠져서 낙시터에만 가는 겁니다.
그 남편과 저는 우연한 일로 친해지게 됐는데, 그것을 아시는 이 집사님이
자기 남편한테 권해서 제발 주일에 좀 교회에 나오라고 말해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남편 집사님에게 그렇게 권했습니다.
몇 번 권했더니 정말 어느 주부터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간 나온 뒤에 제가 그 집사님께 “이렇게 주일마다 교회 나오시니까 좋으시지요?” 했더니
그 분 대답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전도사님, 낚시터에 있을 때는 교회 생각을 많이 했는데,
막상 교회에 나오니까 낚시터 생각이 더 나던데... 어느 쪽이 좋은 겁니까? 괴롭습니다”
그러시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사실, 이렇게 고민하는 것은, 두 경우 다 좋습니다.
왜냐하면 고민하고 괴로워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생각이 없는 것보다는 좋은 징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이런 갈등과 선택의 괴로움은 그 집사님 뿐 아니라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다 겪는 문제일 겁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결국 우리의 신앙은, 본질적인 것을 위해 비본질적인 것을 포기하는 쪽으로 결판이 납니다.
당연히 갈등이 오고, 그 갈등은 결단으로 가는 시작이기 때문에 좋은 징후입니다.
지나간 날들의 내 신앙생활을 한 번 떠 올려 보세요.
무슨 대단한 것에서 찾을 게 아니라 조그만 문제에서부터 한 번 시작해 보세요.
처음에는 식사기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도 아파한 적이 있을 겁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친구들과 점심을 같이 할 때, 또 복잡한 시내 식당에서 식사 할 때,
기도를 해야 하는 건지 안 해도 되는 것인지를 놓고도 갈등했습니다.
또 주일이 되면 꼭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지, 집에서 좀 쉬어도 되는 것인지를 놓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다가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약간의 주일 헌금으로 때울 것인지를 놓고도 마음을 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이것은 분명히 아픔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이것들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십일조 정도를 뗀다고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이것 보다 더 심한 강도의 아픔들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 순간의 선택들 속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들은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말씀을 지켜 사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남들 다 하는 방법으로 적당히 타협하면 얼마나 일이 잘 진행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것들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말씀과 현실 속에서 오는 끊임없는 갈등들,
그리고 세상의 소리 사이사이로 들리는 십자가의 음성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이것은 고통이고 아픔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사는 한 우리는 도저히 이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아픔이 싫으시다면 말씀을 버려야 합니다.
이 아픔을 거부하고 싶으면 신앙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119:105)”
고백하면서 말씀을 사모한다면, 그로 인한 아픔과 고통도 함께 수용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가는 길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결단을 했습니다.
우리도 떠나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아프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때까지 밥줄이었던 그물을 버렸습니다.
물론 우리 역시 생업을 접고, 공부를 포기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괴로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내가 복음을 위해 (사슬에) 매이는데 까지 고난을 받았다(딤후2:9)”했던 겁니다.
그들은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알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아플수록, 우린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둘째로, 그렇다면 그렇게 산 사람들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거기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답을 주고 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암소들의 최후를 보십시오.
어떻게 됐습니까? (14절을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삼상6: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상급을 받은 것이 아니라, 번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즉 말씀 따라 아픔을 안고 평생을 산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의외로 영광이 아닌 비참한 최후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굳게 잡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아이들과 헤어지는 아픔까지도 참으면서
주를 위해 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대합니까?
이 모든 영광을 한 몸에 받을 것을 생각하는 게 사실입니다.
즉, 말씀을 따르는데서 오는 모든 고통과 희생을 알면서도, 그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얻을 영광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주의 일을 한 후의 결과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영광이 아닌 바로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희생으로 죽임을 당하고, 몸은 조각조각 각이 떠지고,
마지막엔 불에 태워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은 결국, 영광이 아닌 죽는 순간까지 희생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과 함께 사는 우리 삶은 애초부터 영광을 받는 삶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더 썩어지고, 더 희생하고, 그래서 결국은 제물이 되는 순간까지 봉사하는 것,
이것이 말씀을 품고 사는‘올바른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이 주시는 진정한 진리입니다.
여러분!우리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열심히 주의 일을 한 후에는 어떤 형태로든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또 대접 받기를 원하는 게 사실입니다.
이제, 그런 우리의 체질은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변하지 않고는 오늘 말씀은 우리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 희생을 드린 후에,
어느 정도 영광의 자리를 원하는 우리의 생리가 이제는 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에 의한 최후 승리는 얻지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1840년 9월 4일 영국 웨일즈에서 어느 목사님의 가정에 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런던대학 뉴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는
1863년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중국의 선교에 관심이 있었던 이 젊은 목사는
24세 청년으로 신혼의 신부를 데리고 중국 선교사로 건너 가지요.
그러나 본격적인 선교사업을 벌이기도 전에 풍토가 맞지 않아
병에 걸린 부인이 그만 죽고 맙니다.
큰 슬픔과 괴로움이 있었지만 이것을 극복하고 있다가,
마침 조선 땅 황해도 장연에서 건너온 김자평, 최선일이란 사람들을 만나
조선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후원을 받아서 많은 한문 성경을 공급 받고는,
조선 땅 백령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 도서지방에 성경을 나눠줍니다.
그게 1865년9월의 일이었습니다.
이 선교사는 다시 중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1866년 미국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조선으로 오게 되지요.
그런데 강화를 돌아 한강으로 올라가야 할 배가 그만 뱃길을 잘못 들어서,
북상해서 대동강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배가 정박한 곳은 평양의 만경대 일대였는데, 물이 빠지자
그 배는 그만 대동강 모래사장에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평양감사 박규수가 군대를 이끌고 나와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고
선원을 다 잡아 죽이게 되는데, 그때 이 젊은 목사도 체포되어 백사장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끌려 나오는 순간에도 사람들과 군인들에게 성경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바로 그 대동강변에서 참수형으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의 나이27세로, 1866년9월2일 저녁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젊은 목사의 이름은 토마스 선교사(Robert J. Thomas 1840-1866)로서,
선교사로서 첫 순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에게서 성경을 받았던 사람 중 홍신길이란 사람은 후에 강서 교회를 세우게 되고,
최치량이란 사람은 평양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또 성경을 뜯어서 벽지로 발랐던 영문 주사 박영식은
후에 신실한 신자가 되어 그 집이 널다리교회가 됩니다.
또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자른 장본인인 박춘권이란 사람은 평양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 드립니다.
신앙생활은 아픔입니다.
신앙생활은 희생입니다.
내가 복음을 붙들고 죽어야 그 복음은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누가 그 길을 자원해서 갈 수 있겠습니까만은,
예수님의 자원하신 십자가에 감동된 심령들은, 기꺼이 그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본문의 두 암소들처럼, 묵묵히, 울면서, 법궤를 메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의 끝은 멸시와 조롱이었고, 제자들의 끝은 곧 순교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찬란한 부활의 영광이 있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교회가, 정말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교회가 되려면,
더 아파하고 더 슬퍼하고 더 희생해야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픔을 참는 일입니다.
나를 죽이는 일입니다.
이 일을 내가 하지 않을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십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그리고‘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기십시다. 그게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들께 오늘의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가 말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아픔 그 자체요,
그 결과는 풍요보다 오히려 가난이요 죽는 것이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기가 질리는 여정이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쯤에서 신앙생활을 포기해야 겠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정말 아픔과 슬픔 뿐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파할수록, 슬퍼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만족스럽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기쁨의 샘을 숨겨 놓으셨기 때문이고,
그 샘은 우리가 아파할수록, 슬퍼할수록, 희생할수록 더 힘차게 솟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암소처럼 결국엔 죽음으로, 제사로 드려진 모든 우리 선배들은
그렇게 기쁨으로 죽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분들이 한 일이 뭐였습니까?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생명은 거저 살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픔을 당하고 괴롬을 당하고 슬퍼해야만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그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기쁨의 샘물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파하고 슬퍼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럴 때야 우리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아픔의 흔적으로만이 아니라
환희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억을 떠올려 봅시다
여러분은 십가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의 희열을 아십니까?
목이 잘려 죽는 사도 바울의 그 기쁨을 아십니까?
인도의 한 이름모를 땅에서 창에 찔려 죽는 도마의 그 환희를 아십니까?
X자 형 십자가에서 온갖 회유를 마다하며 죽어간 안드레의 그 기쁨을 아십니까?
순교의 자리에서도 감사하는 폴리갑의 그 희열을 아십니까?
이름모를 조선의 한 강변에서 참수형을 당하는 토마스 선교사의 그 환희를 아십니까?
우리 역시 그렇게 장엄한 모습은 아니더라도 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따르면서 아픔을 느끼시면 됩니다.
말씀 때문에 고통이 오고, 그 말씀을 따르느라 내가 점점 없어지면
바로 그 자리에 기쁨의 꽃은 피어날 것입니다.
더 아파하고 슬퍼하십시오.
그럴수록 여러분 영혼의 꽃밭은 기쁨과 희열과 환희로 가득찰 것입니다.
이런 역설의 축복을 선물받아, 그 속에서 퍼져나온 향기로 평생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