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따르는 자 롬8:5-8 2026.03.29. [로마서강해 36] 교정예정
※온전한 로마서 해석입니다. 그동안 반쪽 진리로, 로마서 해석을 해 왔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세대 선배님들한테 배웠는데, 그때 로마서 해석을 반쪽만 배웠을 수 있습니다...
롬8:5-8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바울사도는 로마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그들이 내적으로 어떤 죄와의 싸움과 갈등을 가지고 있든지 상관없이,
그리고 외적으로는 어떤 고난과 핍박과 역경 속에 있든지 상관없이,
그리고 또 그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즉 불안과 두려움과 실패와 이런 것들 없이 좀 잘 살고 있는지,
아니면 그런 것들에 눌려서 살아가고 있던지에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구원을 받았고,
또 그 구원은 변함이 없다... 하는 것을 바울사도는 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롬5장부터 8장을 지금 쓰고 있습니다.
살면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어요.
저의 경험은 ‘내가 진짜 구원 받았나? 내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맞나?’
내가 이렇게 지지부진하고, 헤매고 살고 있고.. 그럴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정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없잖아?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이런 생각들이 들 때가 간혹 있죠. 말하자면 구원이 흔들리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 믿는 사람들한테는 가장 아마 힘든 부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로마교회의 성도들도 당연히 그랬겠죠.
왜냐하면 고난이 많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로마 제국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또 사회로부터 받는 불이익 등 여러 어려움들이 있는데,
그런 속에서 ‘하나님이 정말 나를 돌보시고 계시는 게 맞나?’ 이런 생각들이 들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실 수 있나?’
또는 우리 이웃들, 예수 믿는 우리의 이웃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생각하면,
똑같은 생각이 들 수 있겠죠.
바울사도는 그런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구원이 얼마나 확실히 보장되는 것이고,
우리가 설령 죽음 가운데 처해진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죽음에서 하나님이 나를 건져내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은 보장된 거다’ 라고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구원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게,
롬5장부터 ~ 8장의 큰 주제요, 편지를 쓴 목적입니다.
본문 롬8장은 그 절정에 이르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을 여러 번 강조를 하는데, 그 이유가 있어요.
뭔가 하면, 바울사도의 이 의도를 놓치게 되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바울사도가 내 구원을 흔들고 있나? 날 자꾸 이렇게 넘어지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거든요.
우리의 구원이 흔들릴 수 있죠. 흔들릴 수 있는데,
바울사도는, 그것을 온전하게 흔들리지 않도록 심어주려고 하는 그런 관점으로,
지금 얘기를 하고 있는 건데,
만약 우리가 바울 사도의 의도를 놓치면, 특히 오늘 본문 같은 경우가 그렇죠.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도전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문제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이런 의도를 놓치게 되면,
‘나보고 바울은 가짜라고 얘기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성경을 잘못 읽으면
근데 8:5~8절을 오늘 우리가 살펴보겠는데,
아마 한 주 정도 더 살펴봐야 될 것 같은데,
“참된 신자가 누구고, 거짓된 신자가 누구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8:9절, 10절, 11절에서는.. 로마 성도들에게 그걸 적용해요.
그러니까 이건 굉장히 도전이 되는 말씀이거든요.
△우리가 신앙 생활을 100년까지 하신 분은 없죠.
모태신앙부터 쭉 오면 한 70년, 80년도 해요.
근데 그런 사람에게 대고 ‘당신은 진짜입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기분 좋겠어요?
뭐 기분은 문제가 아니에요. 문제는 뭔가 하면,
여러분은 진짜 그런 생각을 하세요, 안 하세요? ‘내가 진짜 구원받은 성도가 맞나?’
그런 생각.. 그런 건강한 의심은 필요해요.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가 진짜 확신에 이르게 되거든요.
근데 만약에 여러분에게 막 그런 생각이 들어오려고 그러면,
‘아휴, 내가 지금 4대 믿고 있는데... 무슨 내가 교회를 빠진 적이 없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거는 유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확신을 강요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건 성령께서 주시는 거니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믿음과 확신>의 문제를 좀 다루고 있다는 거를 먼저 말씀을 드리고,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본 8:4절을 한번 다시 보실까요?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좀 자세하게 좀 살펴봤어요.
이게 이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어요.
-하나는 칭의의 맥락에서,
-또 하나는 성화의 맥락에서.
-하나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사실이고, *칭의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시려고 하는 것이다... *성화
이미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지만,
더불어 내가, 성령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며, 성화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성경이 내내 강조하는 ‘성숙, 온전,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유교처럼 억지로 자기 의지로 하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왜냐면 거듭나서 새 생명, 새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오늘 본문 롬8:5~8은.. 사실은 후자 쪽에 가까워요.
성화의 맥락에서 이것을 보게 되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이거죠.
8:4절에 ‘누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그럼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잖아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그 은택이 누구에게 임하는가?
그거는 ‘우리 모두에게,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얘기하지 않아요.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에게’ 임한다는 거죠.
우리가 영(내주하시는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거예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그 영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명목상의 신자’라는 말이 있잖아요. ‘무늬만 그리스도인’도 교회를 다녀요.
그렇지만 바울은 이렇게 질문하는 거죠.
‘교회를 열심히 다니시나요?’ 그게 아니고,
‘당신은 성령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육신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또는 오늘 본문을 지나서 9절, 10절로 나아가면 이렇게 얘기하죠.
‘당신 안에 성령이 계십니까?’ 이렇게 얘기하죠.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삽니까?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를 보면
당신이 성령을 따라 사는지. 육신을 따라 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굉장히 도전적이죠.
▲이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성화의 맥락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정리하면 좋겠어요.
1) 칭의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성도들에게는 율법의 요구가 이미 이루어진 거예요.
‘율법의 요구’가 뭐예요? 죄에 대해서 벌을 받아야 된다는 거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으셨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또 뭐예요? 적극적인 면에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의의 수준을 만족시키라’는 거잖아요.
예수님이 그걸 인류의 대표로서 다 만족시키셨어요. 이게 칭의의 측면이에요.
성도가 율법에 순종해야 되죠. 율법을 지켜야 되죠.
근데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완전한 사람이 되셔서,
처음부터 끝까지 죽으시기까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셨어요.
왜요?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을 다 지키셨어요.
왜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요.
믿는 자들에게 그 의를 주시고,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기 위해서요.
위대한 교환이 일어난 거죠.
이게 칭의의 맥락에서 보는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미 법적으로, 법정적으로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그랬죠?
2) 성화의 맥락에서도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는 게 있습니다.
뭐예요? 성령을 통해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신자들의 삶 안에서, 실제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만드시겠다는 거죠.
이것은 그냥 ‘나는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천국 간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거룩한 일을 시작하셨고 그 일을 완성하시겠다’는 것이죠.
이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니’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성화의 측면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그 증거를 가지고 계시나요?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주신 하나님이 주신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서 그 성화를, 율법의 요구를 완성해 가고 계시나요? *already not yet
10년 전에 여러분과 오늘의 여러분의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지난 인생의 시간을 통해서, 그런 변화를,
성령이 내 안에서 이루시는 변화를 알고 계십니까? 그런 변화가 있나요?
그 변화를 바울은 뭐라고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나요?
먼저,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것,
지금 ‘성령 안에서, 성화의 맥락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칭의의 맥락에선 이미 우리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정죄함이 없고
우리에게 그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정죄감이 내게 있다/없다’ 주관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성화의 맥락에서 보자는 거예요. 지금 바울은 어떤 변화를 지금 말하는 겁니까
예를 들어 바울은 7:6절을 여러분 보세요.
‘율법에 대해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이라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거죠.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7:6
말하자면 율법의 요구가 우리한테 이루어진다는 것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
이것이 율법 조문에 ‘도둑질하지 말라’고 그랬지, ‘욕하지 말라’고 그랬지...
‘거짓말하지 말라고 그랬지’ 이런 것들 하나하나에 묶여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고 말씀해요.
그러면 ‘율법이 쓸데없다’ 그런 얘기예요? 그런 얘기는 아니에요.
물론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했어요.
‘율법에 금식하라고 그랬지.. 1년에 한 번 하는 거 가지고 안 되지.. 일주일에 두 번은 하자’
이런 식으로 지켰어요. *일출~일몰 금식
이게 율법 조문(조항)의 묵은(옛) 것으로 섬기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이분은 잘 지키셨나?’
‘저 분은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나?’ 이렇게 판단하게 돼요.
그런 방식이 아니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건 율법주의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지금 바울은 ‘율법이 필요없다, 쓸데없다’ 하는 율법 폐기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율법주의도 아닙니다. 대신에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성경 열심히 읽고, 기도 많이 하고, 열심히 교회 봉사하고...
이렇게 외적으로 충실한 종교적 삶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또 하나는 윤리적 삶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에요.
십계명과 도덕적인 법들을 내가 얼마나 잘 지켰느냐? 그런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율법의 요구가 성령 안에서 내 삶에서 이루어진다’는 건 무슨 뜻이죠?
롬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여기 13:8절에서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라고 말씀하는데, *플레로오 fulfill
이게 8:4의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다'와 같은 단어일 뿐만 아니라, *플레로오 fulfill
13:10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에서, 이 '완성'이라는 단어는,
이룬다는 말의 명사형이에요. *플레로마 fulfilling
말하자면, 롬8:4절의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게 함이라'는 구절과
13:8, 10절에서 말하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게 다 같은 맥락이라는 거죠.
그러므로 8:4절은, 13:8~10절로 해석하는 거죠. 결국 이웃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게, 죄를 하나도 안 짓는 완벽주의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럼 뭐죠?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웃사랑이라고 얘기하죠.
13:8~10에서 '이웃사랑'이라고 하면, 이거는 바울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생각일까요?
천만에요. 예수님께서 한 서기관이 예수님에게 와서 가장 큰 계명이 뭐냐고 물었을 때,
주님이 하신 대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게 율법의 모든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22:37~40
말하자면 이 본질을 놓친 채,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어.. 나는 남보다 성경을 많이 읽었어..'
이웃에 대한 전혀 관심이 없이 '나는 새벽기도 안 빠지고 나왔어'
그런 것은 다 '율법주의, 종교'로 신앙생활 하는 거죠. '율법을 이루는' 게 아닙니다.
▲여기 로마서에서 '율법이 이루어진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라고 말씀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바울은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바울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게도 똑같이 말했어요.
갈5:14~15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성경은 일관되게 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요구가 신자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진짜 여러분이 생각하는 경건은 뭡니까?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정말 믿음이 좋다'는 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여러분은 그려지세요?
저도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죠. 뭔가 고고하게 사람들과 잘 섞이지 않으면서...
즉 사람들하고 괜히 농담 따먹기나 하고, 그냥 히히덕거리지 않으면서,
뭔가 다른 사람들은 같이 모여서 막 얘기하고 있는데,
나 혼자 저쪽에 가서 기도하고 있는 게.. 그게 경건이 아니라는 거죠.
지금 제 얘기하는 거예요. 옛날에 그걸 즐겼거든요.
경건은 '나는 하나님하고 있는 게 제일 좋아.. 이 인간들하고는 아 짜증나' 이런 게 아니라고요.
참된 경건은 짜증나는 인간과 함께 사랑하고, 품고 지내는 거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야고보서는 '착각하지 말라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고보서에 있는 말씀을 한번 또 찾아볼까요?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요한일서에서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어요.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내 안에 없다'고 얘기를 하는 거죠. 요일2:15~17
그럼 그런 세상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누구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사람을, 이웃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던 원리대로, 하나님은 공동체로 창조하셨어요.
관계 맺는 존재로, 관계적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셨어요.
근데 죄는 우리를 다 고립시켰고, 단절시켰고,
'나 혼자가 편해'라고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나 혼자가 편해요.
심지어 사랑해서 결혼해도 불편한 건 있어요.
근데 여기서 지금 '율법의 요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진다' 8:4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거죠. 8:3
지금 로마서의 맥락이 그렇게 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너를 위해서 고난받고 죽으신 것은,
자기밖에 모르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너같은 그런 인간을,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시려고,
'그래서 내 아들을 보냈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 로마서 8장의 맥락이 그래요. 8:3~4
이하 계속 작성 중
근데 우리가 이걸 잘못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이상한 종교인들을 양산하게 되는 거예요.
엄청나게 기도도 많이 하고, 엄청나게 성경도 많이 알고...
근데 사람하고는 잘 못 지내요.
이건 되게 오해된 경건, 오해된 영성, 오해된 신앙의 영향일 거예요.
▲그러면 이제 바울이 설명하고 싶은 건 이런거죠.
어떻게 이게 가능해지지? 여러분 진짜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는 궁금하죠. 왜냐하면 제가 남을 사랑하다니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거든요. 제가 누굴 사랑해요? 제 코가 석자인데...
내 코 추스르기도 힘든데... 무슨 이웃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4절에서 말한 거를 다시 한번 보세요.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
그럼 이 말은 이거죠. ‘내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살도록 만드신다’는 거죠.
여러분이 예배당 의자에 앉아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내가 전에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육신을 따라 살았어’ 이건 명백해요.
‘근데 내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성령을 따라 살고 있나? 정말 성령을 따라 살고 있나?’
여러분, 지난 일주일 동안 성령과 함께 동행하셨습니까?
여러분 오늘 읽은 본문에는 대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5절에 보면 ‘육신을 따르는 것’, ‘영을 따르는 게’ 대조가 되죠.
또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것’,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대조가 됩니다.
6절에서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대조가 됩니다.
또 ‘사망’과 ‘생명’이 대조됩니다.
또 8절과 9절에 보면, ‘육신에 있는 자’와 ‘영에 있는 자’가 대조됩니다.
이 대조들을 통해서,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이 분명히 있었겠죠.
4절에서도 얘기한 거잖아요.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성령)을 따라 행하는...’
그럼 ‘성령을 따르는 자’는 누굽니까?
바울의 묘사에 의하면, 진짜 중요한 게 뭡니까?
어떻게 ‘성령을 따르는 자’와 ‘욕신을 따르는 자’가 구별될 수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차이는 뭘까요? 다시 말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율법 조문에 묵은 것으로...’ 이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걸로 구별할 수 없다는 얘기예요.
먼저 본문 8:5~8절에 있는 이 본문은 명령이 아니에요.
‘이렇게 하세요’ 하는 권면도 아니에요.
이거는 그냥 묘사예요.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겁니다.’
‘이 사람이 진짜 신자입니다. 이 사람은 진짜 신자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얘기를 하는 묘사예요. *성령을 따르는 자, 육신을 따르는 자
▲그리고 8:9, 10, 11절에서 그거를 로마 성도들에게 적용을 해요.
그때 우리들에게도 적용이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을 좀 살펴보죠.
가장 많이 하는 오해가 뭔가 하면, 이 본문과 관련해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이렇게 얘기했는데,
‘육신을 따르는 자’를
‘육신적 그리스도인’이라고 설교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그런 사람은 없다는 거잖아요. *‘육신적’, ‘그리스도인’은 서로 모순인 거죠.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육신적’일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예수님을 믿어요.
그렇지만 그냥 예수님이 제 삶의 주인이 되시는 거는 아직까지는 좀 꺼려지고..
예수님을 구세주로서는 믿지만,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모시는 거는...
그건 조금 나중에... 제가 죽을 때쯤 모시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자기 삶을 살아요.
그 사람의 삶의 중심, 그 사람의 삶의 관심사, 그 사람의 삶에 추구하는 목적은
전부 자기 자신이에요. 그리스도가 상관이 없어요. 그 사람은 육신적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우리는 구주와 주님을 분리시킬 수 없어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구주이실뿐만 아니라, 주님이셔야 돼요.
이 말은 우리가 완전한 삶을 산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틀림없이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간다는...
아주 철저하게, 일관되게, 넘어짐 없이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에요.
우리는 거듭난 후에도 수도 없이 넘어지죠.
그러나 이 고백을 하죠. 로마서 14장에서 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살든지 죽든지 주님밖에 없습니다.’ 롬14:8
이 고백을 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육신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만... 대충대충 믿는, 비실비실하게 믿는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런 건 없어요.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특별히 8:6절을 보면,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사망과 생명’ ... 이 말은 하나는 비신자이고, 하나는 진짜 신자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바울은 여기서 신자와 비신자를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육신과 영을 좀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죠.
육신을 다시 한번 제가 설명드리면, 여기서 얘기하는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 안에 역사하셔서 은혜를 베푸시기 전에 인간,
자연인이라고 그러죠. 그 자연인이 가진 타락한 본성을 얘기하는 게.. 육신이에요.
그거는 뭐예요? 에베스서 2장에서 말한 대로, 한 방향을 향해서 가는 겁니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라서, 자기 욕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일관성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시기 전에 그렇다는 얘기죠.
이것은 자연인의 감각을 지배하는 욕망이고요. 자기 중심적인 죄성입니다.
반면에 영은...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영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타락한 죄성이 아니고,
이제 성령이 내 안에 성령이 들어오셔서, 내 안에서 뭔가 영의 새로운 차원을 따라서 살아간다...
그것이 아니고 성령을 따라서 산다는 얘기에요.
이 말은 내가 아무리 베이비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내가 어저께 예수 믿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내 안에 계셔서, 성령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육신과 영을 이제 분명하게 정의를 하게 되면,
‘육신을 따른다’ ‘영을 따른다’ 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좀 더 명확해질 수 있겠죠.
‘따른다’는 말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따른다’고 지금 4절에서도 얘기했죠.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그리고 5절에서도 ‘육신을 따르는 자, 영을 따르는 자’
그러면 ‘따른다’는 이 말은, 기본적으로 권위를 상정하는 말이거든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따른다고 할 때,
그 사람의 권위 아래에 있다는 의미예요. 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의미예요.
그래서 ‘육신을 따른다’는 것은, 육신의 권위 아래에서 행한다는 말이고
(쉽게 말해서 인간의 자기 지, 정, 의를 따르는 삶. 세상에서는 이게 꼭 '죄'가 아니죠.
합리적인 사람, 이성적인 사람, 마음이 따뜻한 사람, 의지가 굳은 사람으로 칭찬 받죠)
성령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권위 아래에서 행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영향력, 그 지배력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8:2절에서 설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법이 원리, 지배력이라고 했죠?
‘죄와 사망의 법(지배)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성령의 권위 아래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나의 지, 정, 의를 따르지 않는 거예요.
이것은 억지로 하는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가 나보다 힘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냥 머리를 수그리고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가 자발적이고 매우 자연스럽게... 심지어 기쁨으로 이 길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죠.
육신을 따라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성령님을 따라 살고 싶은데, 자꾸 육신을 따라서 살게 되는구나’
‘100번이면 100번 틀림없이 육신을 따라 사는구나’ ... 그렇게 될 수는 없어요.
그렇게 되진 않아요.
바울이 롬7:14~25에서, 자신의 갈등을 설명한 것과 비슷한 것이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그렇게 탄식하는 일은 있겠지만, 완전히 육신을 따라서... 그렇게만 가지는 않아요.
만약에 여러분이 아침에 기도를 해요.
‘성령님 오늘도 성령님께서 제 삶을 인도하셔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하루의 모든 일정들을 소화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하루를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제 삶을 다스려주세요.’
라고 기도를 한다면, 그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령의 권위 아래에 있는 삶이고,
본문의 표현으로는 ‘성령을 따르는’ 삶이겠죠.
당연히 물론 하루 동안에 실패 몇 차례 할 거지만요... 그러나 점점 우상향 성숙해지는 거죠.
▲그 다음에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일’은 뭐고, ‘영의 일’은 뭘까요? 즉 ‘성령의 일’은 뭘까요?
육신의 일은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일들입니다. 자기 지, 정, 의를 따라서 사는 삶입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골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생각’이라는 말은 되게 중요한 말인데요.
‘내 생각이 어디에 가 있느냐?’는 거예요.
내 생각이, 내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거기에 다 들어가 있잖아요.
그러나 정말 내 마음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나 이거예요.
참신자와 비신자를 구별하는 차이로, 사도가 말하는 첫 번째 기준은 생각이거든요.
이게 오늘날 매일 중요한 거예요. 생각, 생각!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의 일을 생각하고..’ 나는 어느 쪽입니까?
그 다음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7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생각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거죠.
내가 참신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번째 차이는,
생각이 ‘육신의 생각’에서 → ‘성령의 생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고,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다가 → 이제 성령의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설명을 해요. 잘 들어보세요.
「우리의 사고방식은 그리스토인으로서, 혹은 비그리스토인으로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본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 이게 내 본성을 나타낸다는 거죠.
내가 누군지를 나타낸다는 겁니다.
비슷하게 갈5장에서는 ‘육신의 소욕’ 이런 표현을 썼잖아요. *본문은 ‘육신의 생각’
오늘날 무엇이 우리 마음을 열중하게 하는가요?
거기에 따라 어떻게 우리 시간과 정력을 사용하는가가 결정되죠.
그러니까 여기서 ‘생각’이라는 것은,
그냥 내가 배가 갑자기 확 고파지면서 ‘짜장면이 먹고 싶은데?’ 이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경향성을 얘기하는 거예요.
내 모든 마음이 돈에 쏠려 있어요. 내 모든 마음이 돈에 쏠려 있거나, 주식에 쏠려 있거나,
오직 돈 버는 일에만 쏠려 있고, 하루 종일 그것만 골몰히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죠.
그러니까 본문이 다루는 ‘생각’은
다른 말로 ‘삶의 근본적 지향성’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을 향하는가?’
아니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죠.
내가 정서적으로 애정하고, 사모하고, 추구하는 성향이고, 지향성입니다.
습관적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상태를 얘기하는 겁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기울어지나요? 하나님께, 성령님께 기울어지나요.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성령님께 나는 순종하나요?
물론 한 번 불순종 할 수 있지만, 즉시 회개하고, 다시 돌이키고 방향성이 회복되는 거죠.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