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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4편 굿 나잇, 굿 나잇!

LNCK 2026. 5. 7. 10:11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예배, 찬양         출처

260325_시편강해(134)_굿 나잇! 굿 나잇! (시 134:1-3)

 

◈굿 나잇! 굿 나잇!               시134:1~3            2026.03.25. 시편강해(134)

 

본문 시134편은, 전체가 3절입니다.

이게 원래 1절, 2절은 백성들이 →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향해 하는 말이고요.

3절은 제사장이 → 백성을 향해서 하는 말인데, 그처럼  지금 우리가 교창해 보겠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먼저 여러분이 1~2절을 낭독하시고, 제가 3절을 낭독합니다)

1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3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오늘로써 우리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는

15편의 시편을 살펴보는 것을 모두 다 마치게 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굿나잇 굿나잇”입니다. 무슨 설교 제목이 이런가 싶으시죠?

설교를 잘 들으시면서 ‘아 본문이 이런 이야기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본문 시134편은 ‘15편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마지막 시편인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15편의 시편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마다 3번의 절기가 있잖아요.

이 세 번의 절기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너희들은 나에게 보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1년에 3번, 어디에 살고 있든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출23:14

 

여러분, 행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 안에만 산 게 아니잖아요.

나라가 망해가지고 이리 끌려가고, 저리 끌려가고 하면서,

정말 너무나 많이 흩어져 있었던 거예요. 디아스포라로.

 

근데 그 사람들이 사방에서 오순절에 예루살렘으로 오잖아요.

여러분 이게 제정신으로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1년에 3번씩이나, 그 먼 길을...

요즘과 같이 무슨 비행기 타고 오는 것도 아니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가는 것도, 보통 3일은 걸렸거든요.

사흘치 양식을 짊어지고, 노숙하면서 걸어서 올라가는 거잖아요.

 

▲지금도 생각해 보십시오, 전 세계의 무슬림들이 그렇게 메카를 향해서

자기 평생에 한 번은 메카를 방문합니다. 신앙으로 자발적으로 하죠.

 

그러니까 이제 무슬림 자녀들이 효도로, 부모를 성지순례를 보내드리거든요.

그래서 메카가 사우디.. 매우 뜨거운 곳이잖아요.

그래서 거기서 성지순례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매년 수백명.. 때로는 천명까지 되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서 부모님이 메가 성지순례를 가서, 거기서 돌아가시면,

천국으로 직행을 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더위나 압사로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죠.

자식이 부모를 비행기 태워서 메카로 성지 순례 보내드리는 것은, 효도 중에 최고의 효도죠.

 

제가 인도네시아 살 때만 하더라도, 신문에 그 순례 철이 되면, *양력 6~7월 경

‘오늘 메카에서 인도네시아 사람이 몇 명이 죽었다’ 계속 그렇게 보도하는 걸 봤어요.

 

근데 여러분, 이게 단순히 무슬림들의 현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들이 어디에 살든지 간에,

 

자기들이... 시온을 향해 하나님이 계시는 곳, 그 성전을 향해서

1년에 3번 그렇게 먼 길을... 멀든 가깝든 그 길을 간다는 것이

참 보통 일은 아니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노정에, 하나둘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뭉쳐서 올라가는 길에

이 15편의 시편을 주로 불렀을 것 같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그러니까 이런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순례자’라고 말하잖아요.

순례자 Pilgrim 라고 말하죠.

 

오래전에 1980년대쯤에 나온 복음성가인데,

「저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그거 아주 많은 분들의 애창곡이었잖아요.

 

그 찬송을 부르면 ‘내가 진짜 순례자구나’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죠.

어쨌든 저도 여러분들도 다 순례자입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면

우린 다 순례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의 이 노래는, ‘오늘날 우리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15편의 시’가 다루는 주제들이, 제가 처음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거주지에 대한 것, 일상에 대한 것, 가족의 중요성에 대한 것,

친척과 친구들에 대한 것 등.. 우리 삶의 일상의 주제들을 다 다루거든요.

 

이런 면에서도 이게 '성도들의 노래'이고,

또 특별히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순례자 공동체인 교회의 노래'입니다.

 

▲여러분,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시120~134편의 총15편인데,

우리가 120편 공부를 시작할 때, 그때 이렇게 말을 했거든요.

 

시120편의 주제는 회개였어요. 이렇게 ‘회개’로 시작해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15편이 모두 마치는, 본문 134편의 주제는 뭘까요?

‘찬송’이에요!

그러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회개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유진 피터슨은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고!’

 

회개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끝난다는 이 말은,

우리가 회심으로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 순례자들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삶의 마지막은 뭘까요? 한숨일까요? No

찬송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며 숨을 거두는 거죠.

 

저도 여러분도, 물론 젊었을 때만큼 찬송을 막 힘차게는 못 부르겠죠.

그러나 마지막 임종의 시간에 ‘여호와를 송축하라 Praise the Lord! 주님을 찬송합니다’

이렇게 대부분 성도는 찬송하며 자기 생을 마감합니다. 그게 성도의 마지막인 것입니다.

(성경 구절은 많이 암송을 못 해도, 찬송은 암기가 쉬운 면도 있을 거예요)

 

또 데렉 키드너는 이런 말을 해요.

시120편(‘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시작)에서는

메섹과 게달이라고 하는 이방 땅의 지명들이 나왔어요. 거기서 시작했어요.

 

멀리서.. 시온에서 아주 멀리 있는 곳에서 시작해서, 시온에 도착을 한 거예요.

그렇지만 오늘 본문 134편은, 시온에 도착해서 모든 예배를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이 점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바라보고, 멀리 이방 땅에서 출발을 했어요.

‘너희가 전에는 외인이었더니’ 엡2:12, 19참조

우리는 전에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 돼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런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도 있겠죠.

 

본문 134편은 시온으로 모여들었던 순례자들이

모든 예배를 마치고 집을 향해 돌아가는 날에, 성전에서 부른 노래인 것 같습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부르는 마지막 찬송인 거죠.

 

그러니까 이거를 ‘순례길이 신자의 일평생 삶’으로 본다면,

언젠가 저와 여러분도 마지막으로 부를 노래가 있겠죠.

 

여러분은 마지막으로 부를 찬송은 뭡니까?

아직 안 정해 놓으신 분은, 미리 정해 놓으시는 게 좋습니다.

찬송가 몇 장? 여러분들은 마지막으로 부를 찬송이, 어떤 찬송일 것 같습니까?

 

제 어머니도 그렇게 심한 치매로 고생을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영원하신 기업’ 그거를 줄기차게 부르셨어요.

1절, 2절, 3절... 저는 다 못 외우는데, 그 치매가 걸린 어머니는, 90세가 넘었는데도

그걸 다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도널드 윌리엄스가 본문 시134편의 주석을 쓰면서 이런 제목을 붙였습니다.

'How to have a good night 어떻게 굿나잇을 누릴 수 있을까?'

‘어떻게 좋은 밤을 가질 수 있을까?’

여기서 오늘 설교 제목을 따왔습니다. 제목은 ‘굿 나잇, 굿 나잇’

 

▲시온산 성전에 올라왔다가, 백성들이 이제 성전을 떠나서 각자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그렇지만 제사장들은 이제 성전에 계속 남아있잖아요.

자기들은 떠나지만 남아있는 제사장들에게 ‘굿 나잇’ 하는 겁니다. 그게 1~2절이에요.

 

‘1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러면 제사장들이 또 화답하는 거죠. 떠나가는 성도들에게 ‘굿 나잇!’ 하는 겁니다.

그게 3절이에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실제로 134편은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귀향하는 성도들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향해서 인사하고, ‘굿 나잇!’

또 제사장들이 화답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굿 나잇!’

*지금 중동지방 풍습에 따라, 여행의 출발을 선선한 밤에 하는 것으로 보고요.

 

▲1절에 보시면 ‘송축하라’ 그렇게 나오죠.

그리고 2절에서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나오죠.

 

그러니까 1, 2절의 주제는 이거예요. 여호와를 송축하는 거예요.

그런데 3절에서는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이 패턴을 보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이야기가 나와요.

 

이게 이제 엡1:3절을 보면 이 패턴이 똑같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드릴게요.

에베소서를 시작을 하면서 바울이 하는 말입니다.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러니까 ‘찬송하리로다’ 라고 찬송을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이'런 패턴을 얘기를 하는 거죠.

 

◑134:1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를 송축하라'

2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이게 뭐라고요?

 

성전을 떠나는 자들이, 남아있는 제사장들에게 복을 비는 말입니다.

유월절이든, 맥추절이든, 장막절이든, 명절에 예배를 다 마치고, 이제 성전을 떠나는 겁니다.

고향으로 떠나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여전히 성전에 남아서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향해서

백성들이 손을 흔들면서, 그 밤에 떠나면서 ‘굿나잇!’ 하는 내용이 1절과 2절이에요.

(*밤에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순례자들이 밤에 인사하며 복을 빌면서 성전을 떠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히브리어 성경의 어순을 따르면 1절이 이렇게 시작을 해요.

‘보라 송축하라 여호와를’

 

1, 2절에서 ‘송축하라’는 말하고

3절에서 ‘복을 주실지어다’ 라는 말이, 사실은 히브리 말은 같은 말인데요.

이게 하나님을 향해서 쓰여질 때는 ‘송축하라 찬양하라’ 라는 의미이고, bless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향해서 하실 때에는 ‘복을 주신다’는 뜻이죠. bless, 바라크

 

그러면 이 말이 원래는 어떤 의미였는가 하면,

이 ‘하나님을 찬송한다’ (바라크)는 말은 어떤 의미가 있냐면

‘무릎을 꿇다’라는 본래 의미가 있어요. kneel

 

'무릎을 꿇다' 이거는 내가 잠자코 따라가고 복종하겠습니다 라는 얘기예요.

근데 이게 물론 '하나님이 너희에게 복을 주실지어다’ 라고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자코 따라오고 복종한다 ... 그런 뜻이 될 수는 없겠죠.

 

근데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송축)한다’고 할 때에는,

‘내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구나’

즉 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데려가시든지

잠자코 순종하여 그 길을 따라가겠다고 하는 얘기구나 ... 이런 생각을 한다면,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하겠습니까? 즉 복이 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찬송한다 bless’는 의미는,

그냥 내가 하나님을 노래를 잘 불러서 찬송한다는 게 아니라,

'주께서 나의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왕 중에 왕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잠자코 주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kneel 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모든 찬송이 얼마나 유익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1절은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라고 얘기합니다.

지금 이 맥락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가리켜서

백성들이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죠.          

 

게다가 여기 ‘밤에’ 라고 하는 말이 있고, 또 ‘성전에 서 있는’ 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1

여기서 ‘서 있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봉사하다’ 또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께서 무슨 명을 하시든지 섬길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의미죠.

성전에서 서서 섬긴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히10:11에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앉아있다’는 것은 일을 안 한다는 뜻이잖아요. ‘서 있다’는 것은 일을 한다는 뜻이에요.

일이 아직 안 끝났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성전에서의 일이 끝날 수가 있나요?

끝날 수가 없죠. 성전에서의 일이 어떻게 끝나겠어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리고, 매일 성소의 등대, 향단을 돌보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죄를 짓고 있어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니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제사를 끝내셨어요. 완성하셨어요.

그래서 하늘 보좌에 앉으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서 있다’ 이 표현은, 지금 제사장들을 향해서 특별히 얘기하는 것이라고

우리 이해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밤에’라는 말이 맨 앞에 나오잖아요. :1

사실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밤에’라는 말은 1절의 끝에 나와요.

그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강조하는 거예요.

 

이런 거죠. ‘당신을 환영합니다!’ 뭐 그런 팻말이 있어요.

근데 이제 이거를 이렇게 쓰는 거예요. 강조를 하면 ‘환영합니다. 당신을!’

이렇게 쓰면 ‘당신’을 강조하는 거예요.

 

근데 '밤에' 라는 표현도 그런 강조하는 표현이에요. 맨 뒤에 쓰여져 있어요.

그러니까 낮도 아니고 ‘밤에 섬기는’ 이런 뉘앙스가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게다가 또 이 '밤'이라는 말이, 우리말로는 잘 표현이 안 됐지만 사실 복수예요.

그러니까 ‘밤들’이라고요.

그러면 어느 날 하루를 가리켜서 하는 말은 아니겠죠. ‘매일 밤’이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제사장들이나 래위인들의 일은 밤낮 없이 수행되는 일들이었거든요.

사실은 유월절 같은 경우, 유월절은 '밤의 절기'라고 불렸어요. 왜 그럴까요?

유월절의 시작을 우리가 알잖아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밤에 나왔어요.

그래서 유월절은 ‘밤의 절기’라고 불렸어요. *그들 문화로 일몰 후는 하루의 시작

 

그리고 다른 절기에서도 일반적으로 그 절기가 시작될 때에는, 밤에 축제를 했습니다.

낮에는 더워서, 다들 모이기가 쉽지 않았겠죠.

본문에 성전을 떠나가는 이들도, 시원한 밤에 출발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제사장이 무슨 일을 했을까요?

깜깜한 밤에 성전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요?

출2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성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밤새 지키라’고 말씀하세요.

누군가는 그걸 지켜봐야 되죠. 지켜야 되죠.

 

뿐만 아니라 놋(번)제단에 있는 불도 꺼져서는 안 됐어요.

그건 레위인들과 함께 일하고, 제사장이 그 일을 감독해야 했을 것입니다.

 

또 성전에 문지기들이 있죠. 성전을 경비합니다. 함부로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것이죠.

그 일도 레위인들이 밤낮 없이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찾아보니까 정말 재미있는 것은요.

찬송을 담당하는 레위인들이 있잖아요.

다윗 시대에 다윗이 찬송을 담당하는 성가대를 엄청나게 조직을 했잖아요.

 

그런데 찬송을 담당하는 레위인들도

역대상 9:33절에 보면 ‘주야로 골방에서 계속 노래를 불러야’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같으면 이런 거예요. 음악을 그냥 틀어놓으면 되잖아요.

그때는 전기가 없어서 음악을 틀어놓을 수가 없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성전에 들어가면, 아마 음악이 들렸을 것 같아요.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편이 주야로... 레위인 성가대가 부르는 거예요. 대단한 일이죠.

 

아마 이런 것들을 의식하고, 이 순례자들이 성전을 떠나가면서, 그들의 노고가 짠 해서

‘여러분, 모든 밤들에 하나님을 찬송하세요. 찬송하세요.’ 라고 작별인사를 했다고 봅니다.

 

어떻든 1절은 성전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순례자들이

성전에 남아서 섬기는 제사장, 또 레위인들을 향해서

‘여호와를 찬송하는 좋은 밤이 되세요!’

 

‘아유, 오늘 밤에 고생하시겠습니다’ 이런 얘기가 아니고요.

‘하나님을 찬송하는 기쁨이 여러분에게 넘치는 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런 얘기예요.

 

◑134:2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히브리어 성경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는 ‘너희 손을 들고’ 이에요.

이게 강조가 된다는 이야기죠.

 

‘손을 드는’ 행위는, 이게 구약 성경에 보면, 손을 드는 것은 이런 거죠.

기도할 때에도 손을 들 수 있고요.

또는 찬양을 찬송을 드릴 때에도 손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호와를 송축하라, 손을 들고 송축하라’ 그렇게 얘기하니까,

이게 찬송과 함께 손을 들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사도도 디모데전서 쓰면서 2:8절에 이런 말을 하거든요. 남자들에게 말하죠.

‘남자들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한다’

이거는 이제 구약적인 백그라운드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이렇게 손을 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소를 향하여’ 라는 말도 나오죠.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시는 그 거룩한 성소, 또는 성전

바로 자기들이 섬기고 있는 그곳이에요.

 

2절에서 레위인,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들고’ 성전에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성전을 떠나는 성도들의 축복(인사)를 받고, 그 들어올린 손을 약간 방향만 바꾸어

이제 길을 떠나는 성도들을 향해 축복하는 겁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 지어다’  :3

 

134:3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이렇게 3절은 성도들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향해서 굿나잇이라고 인사한 것에 대해서

제사장이 화답을 하는 거예요.

 

그들도 역시 ‘굿나잇 투 유!’ 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뭐라고 얘기를 합니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이 구절은 ‘아론의 축복’과 그 앞부분이 똑같아요.

민6:24 ‘여호와는 내게 복을 주시고...’

이게 지금 여기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얘기죠.

 

‘아론의 축복’은 구약 제사장의 특권이었습니다. 민6:24~26

이런 점을 생각하면, 이 3절은 그야말로 제사장의 축복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런데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라고 말하죠. 이건 무슨 말이에요?

이제 이 백성들이 술래길을 떠나서 돌아가는 길이에요.

‘저들이 돌아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지켜주십시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저들이 어느 길을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지금 축복을 하는 거죠.

 

그야말로 이 축복도 시온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얘기하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들도 성도들에게 ‘굿나잇’이라고 인사를 합니다.

 

▲이 3절을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우리 공예배의 마지막 순서인 축도가 생각이 나요.

사실은 보통은 우리가 민수기 6장에 있는 구절보다는

고린도후서 13:13절에 있는 구절로, 축도를 하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근데 이게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잖아요.

근데 미국의 성공회 목사였던 존 클레이플은,

예배를 드리고 예배당을 떠나가는 성도들을 축복할 때, 그분이 쓴 축도가 있어요.

 

근데 이게 너무 인상적이어서 제가 좀 소개를 하고 싶은데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이제 예배를 드리고 떠나가실 때 이렇게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이제 떠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가면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이 하루 종일 이 시간까지 보호받았음을,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충만히 게시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은 지금도 구원받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아멘」 

 

그 분은 이렇게 축도를 스스로 만들어 하신 거예요.

굉장히 인상적이더라고요. 이따가 주기도문 하고 마치고 이거 하고 싶어요. 하하하

 

◑적용

 

말씀을 정리하면서 몇 가지 적용점을 생각할 수 있는데

 

▲1. 첫 번째 이 시편은 <예배의 시편>이라는 걸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120편부터 ~ 134편, 15개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전부가 특별히 그러합니다.

 

넓게 보면 시편 전체가 다 그러하지만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여러분 지금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거예요.

 

예루살렘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러 오고 가는 거예요.

그들이 어디에 살든지 절기가 되면,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시온을 향해서,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1년에 3차례씩 그들이 이렇게 행했다는 것은.. 정말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를 모르겠어요.

기가 막힌 일입니다. 마치 이런 거죠.

그들은 예배를 위해서 태어난 존재들 같아요.

 

우리가 추석, 설날에 고향 한번 가는 것도, 그냥 터치하고 그냥 도망가듯이 돌아가잖아요.

또 명절 오기 전부터 한 달 전부터 한숨 쉬잖아요.

 

그렇지만 유대인 순례자들은, 그렇게 (억지로)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이 사람들이 마치 이 예배를 위해서 자기들은 일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 예배를 축으로 자신들의 삶이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 같고, 또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그리고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점을 생각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보면

우리 시대는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예배가 하찮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배가 쇠퇴한 거죠. 하찮게 여겨집니다.

 

여러분 기억하실 겁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셨던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가 주일을 얼마나, 목숨까지 걸었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었는지...

주일을 건너 뛰고 빠진다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그게 용납되지 않았어요.

 

저도 어렸을 때는 아파도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가 아니면

‘아파도 너는 예배당 가서 예배드리다 죽으라’ 라고 말은 안 했는데,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감사해요. 그렇게 예배를 배운 걸...

그런데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이, 지금은 예배가 쇠퇴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떻게 하다가 우리는 이 예배가 그렇게 중요하게, 목숨같이 중요하게 여겼었는데,

어떻게 하다가 우리는 이렇게 예배가 쇠퇴하는 시대를 맞게 되었을까요?

 

첫째는 미디어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20세기 말에는 TV의 영향이 예배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는 걸 부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TV가 나오면서 예배가 크게 쇠퇴했는데,

 

20세기 후반기부터 오늘날에는

유튜브의 영상이나 쇼츠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생각하는데 20세기 말에 TV가 주었던 영향보다도

더 심각하게 예배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배와 설교의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래 앉아 있기를 힘들어합니다.

 

제가 들은 얘기인데요. 많은 경우에...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설교 시간에 종종 유튜브를 보거나 쇼츠를 보거나 이런 일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20분 넘어가는 설교를 지속적으로 듣고 앉아 있기가 굉장히 힘든 거예요.

그래서 예배의 모든 순서들은 참여자, 관객들을 위해서

더 감각적으로 기획되어야 하는 프로그램이 된 거죠.

 

종종 어떤 좀 규모가 큰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면

거기는 큐시트가 나오는데 몇 분, 몇 초 단위로 다 기획되어 있습니다.

지루할 수 없도록 중간중간에 영상이 올라가고... 굉장히 잘 기획되어 있습니다.

 

또 무대에서는 연기(미스트)까지 뿜어내는 무슨 기계도 있습니다.

그리고 조명도 춤추는 곳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사이키 조명’이 천정에서 막 돌아가죠.

미국에서 하는 것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일부 교회에서. 특별히 젊은이 예배 때.

 

그래서 1948년에 A W Tozer가 미국 교회를 향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진정한 영적 예배가 이토록 저조했던 때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교회의 많은 부분에서 예배의 영성은 완전히 잃어버려졌고

그 자리에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 들어섰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러다 보니 예배는 자연히 인식이,

예배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인데,

예배는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뭔가 기분이 좋아지는...

예배를 드리면 뭔가 귀가 맑아지고, 뭔가 산뜻한 메시지를 통해서 내가 뭔가 refresh가 되고

뭔가 좀 상쾌해지는... 인간 중심적인 그런 예배로 오해되는 것이죠.

이런 오해가 만연하게 되는 겁니다.

 

이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포커스 하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만 보더라도 ‘하나님을 찬송하라, 송축하라,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께서 축복하시리라’ 이게 하나님 중심의 예배예요.

 

성전을 떠나가는 순례자들이 제사장들을 향해서 한 말은 이게 아니에요.

‘우리가 이제 먼 길을 가는데 우리를 축복해 주세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우리가 잘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우리가 사업이 잘 될 수 있게 기도해 주세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아요.

 

밤에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여호와를 송축하세요.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는 이제 떠나지만

우리가 마치 이곳에 있는 것처럼 우리를 대표해서 여호와를 송축해 주세요.

하나님을 찬송해 주세요...’ 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매일 밤마다...

 

△휘튼 칼리지의 교목으로 섬겼던 켄트 휴즈 이분이 이렇게 지적을 해요.

아까 얘기했던 A W 토저보다는 한 40~ 50년 뒤에 켄트 휴즈가 이런 말을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사회에서 점점 더 흔해지고 있는 현상인데,

예배가 주로 우리를 위한 것이며,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런 예배는 오락중심적이며

예배자들은 헌신하지 않은 관객으로서, 조용히 공연을 평가한다.

이런 관점에서 설교는, 청중의 필요에 맞춘 설교,

하나님의 의도가 아닌, 인간의 의식적 계획에 따른 설교가 된다.

 

이런 설교는 항상 주제 중심적이고, 결코 본문 중심적이지 않다.

성경적 정보는 최소화되고, 설교는 짧으며 (흥미를 끄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주변 참석자를 불편하게 만들 것으로 의심되는 모든 것은 예배에서 제거된다.

이런 철학이 극단적으로 적용되면 비극적인 자기 중심성을 심어주게 된다.

 

즉 모든 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서 판단된다.

결국 이게 우리의 신학을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예배를 타락시키게 된 것이다.」

 

△끝으로 저는 예배를 쇠퇴하게 한 또 하나의 이유를 말하고 싶은데, 그것은 무지입니다.

매주일 아침, 예배당에 나와 앉아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모호함...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무지

 

어떻게 ‘알지 못하는 신’을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진리에 대한 무관심을 낳게 하고

이 무지와 무관심은, 감각적인 것으로 결국 우리의 예배를 타락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온 세대의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 세대는 참된 예배의 자리에 앉아서 참된 예배자들을 보며

그 속에서 예배를 배워야 합니다.

 

자기들끼리 떠들면서 뭐 이렇게 하면서 배우는 그거 아니고, 진짜 예배자들을 봐야 합니다.

부모 세대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그들이 어떻게 예배를 준비하는지,

그들이 어떻게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우리가 보여주어야 됩니다.

 

그들이 마치 예배를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렴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그 이상의 예배를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 주일의 공예배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는 부모 세대들이 유념해야 할 말씀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편리를 추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까?

 

그러면서도 자녀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요?

 

▲2. 두 번째로 적용할 것은 ‘모든 밤에’ 부를 노래라는 것입니다.    *1절 ‘밤에’가 복수

이천송 이 시편은 모든 밤, 즉 매일 밤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밤이라는 것은 굉장히 많은 은유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슬픔, 아픔, 고통, 두려움... 다 이게 우리 인생의 밤들입니다.

우리 인생에 밤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이건 밤에 부를 노래입니다.

이건 밤에 부를 노래입니다.

 

여기 1절에서도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의 송축하라’

도널드 윌리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둠이 다가오고 그림자가 들이오며 적이 공격할 때

우리에게는 한 가지 위대한 기회와 한 가지 위대한 대처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 영혼의 기쁨이며, 또한 우리의 영적 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굿나잇을 맞이하는 길입니다. 우리 인생에 밤은 있어요.

근데 그것은 슬프고 어둡고 깜깜하고 두렵고 그런 밤들이에요.

 

우리 인생의 밤들은 그러나 굿나잇이 되게 할 수 있다고,

하나님 때문에 굿나잇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이제는 이제는 더 이상 제사장들을 향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제사장이니까요.

 

우리를 향해서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모든 여호와의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바울사도와 실라가 심한 매질을 당하고 피 흘리면서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 여러분 아시죠? 그들은 찬송을 불렀습니다. 행16:25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죠?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열렸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멀린 캐로더스가 지은 <감옥에서 찬송으로>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삶을 뒤바꾸는 찬송의 강력한 능력! 그 내용이 잊혀지지 않아요.

바로 이 실라와 바울이 감옥에서 찬송했던 그 이야기를 쓴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이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 밤에 여호와를 송축했습니다.

 

스펄전의 말도 우리가 유념해야 할 진리입니다.

‘어둠이 교회에 내려앉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그분의 진리를 지키는 감시자들과 거룩한 자들을 두시는데,

이들은 낙심하지 말고 가장 어두운 시간이 다가올 때에도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러니까 가장 어두운 시대가 교회에도 임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은 있어요. 하나님은 남겨두셨다는 거예요.

그 밤도 좋은 밤이 될 수 있도록!

 

슬픔, 시련, 불안, 두려움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밤의 모습들입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뭐죠?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겁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밤에 부를 노래가 바로 이 시편이다’ 라고 얘기해요.

 

▲마지막으로 이 시편은 우리가 인생에서 부를 마지막 노래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까 제가 그렇게 이야기 했잖아요.

여러분은 인생 마지막에 어떤 노래 부르실 거예요?

 

어떤 걸 하시겠어요? ‘여수밤바다’를 하시겠어요?

우리가 부를 노래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를 송축하라’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봤어요. 이 시편 134편을 보면서

이 1절과 2절은 이제 임종의 자리에 누워있는 저를 향해서

저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저를 아끼는 사람들이, 저에게 마지막으로 해주는 시詩예요.

 

‘지금 당신은 인생의 밤입니다. 새벽이 있었고 아침이 지나고 정오가 지나서

오후를 지나고 저녁을 지나고 이제는 당신 인생의 밤입니다. 여호와를 송축하십시오!’

저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화답하겠죠?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시리로다. 굿나잇 투 유!’ :3

 

우리 인생의 마지막 밤이 이럴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인생의 최고의 목적을 성취하고 산 것이겠죠.

 

왜냐면 그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보는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니까

이거보다 더 아름다운 마무리는 어디 있겠습니까?

이 복된 은혜로 우리가 부른받은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을 그치지 마십시다.

 

여호와를 찬송하십시오!

이렇게 살아갈 때 여러분의 모든 밤이 굿나잇, 좋은 밤이 될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