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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장 가인과 아벨의 제사

LNCK 2026. 5. 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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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5 03 주일 말씀 / 창세기 강해 (14) / 창세기 4:1-14 / 가인과 아벨의 제사

 

◈가인과 아벨의 제사              창4:1-14              2026.05.03.        [창세기14강]

 

오늘 본문은 창세기 4장입니다. 4장부터는 이야기의 배경이 바뀝니다.        

에덴 동산 밖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쫓겨났죠? 네, 동쪽입니다.

 

‘동쪽’에도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편에 정착했습니다.

정착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하나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의 출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가인을 낳고, ‘여인의 후손’을 낳은 줄로 착각했습니다.

창세기는 ‘시작에 관한 책’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첫 시작이 나오는데 ‘첫 출산’이 나옵니다.

창4:1 ‘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아담과 하와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참고로 아담과 하와는 창조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바로 어른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세상에서 처음 보는 아기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감탄을 했을까요? ‘아, 아기는 이렇게 생겼구나..

눈도 두 개, 귀도 두 개, 코는 하나, 입도 하나, 우리하고 똑같이 생겼네...

어쩜 이렇게 조그마한데 다 있을 수 있지? 와, 신기하다’

생명의 탄생 앞에 경외감을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하와는 처음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뭐라고 이름을 지어줬습니까?

‘가인’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의 뜻이, 여러분 가진 성경책에 나옵니다.

 

각주에 보면 얻었다 ... 그러면 뭘 얻었다는 하와의 고백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을 얻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3:15

 

아담과 하와는 이 아이가 하나님이 보내신 여인의 후손인 줄 믿었습니다.

사탄의 머리를 부수고, 우리를 구원할 여인의 후손, 즉 구원자로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결말을 다 알고 있습니다.

 ‘여인의 후손’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은 한참 뒤에 오실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죽고 난 훨씬 뒤에, 예수님이 오실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오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당장 응답이 될 것처럼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응답될 거라는 때와 기한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어떤 생각을 가졌냐면

‘자기들이 낳는 후손들 중에 구원자가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지만,

‘구원자가 하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첫 아이를 낳고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드디어 얻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야, 즉 구원자를 얻었다’라는 의미죠.

 

가인을 얻었고, 그를 구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와가 그 뒤에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했다’고 말합니다. 4:2

 

‘내가 아담으로 말미암아 득남했다’가 아닙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즉 이 아들 가인은 누가 주셨다는 고백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러니까 하와는 이 아이가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반전이 2절에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또 한 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가인의 동생을 낳습니다. 이름을 ‘아벨’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벨은 히브리어로 헤벨입니다. 헤벨은 ‘헛되다’ 라는 뜻입니다.

전도서 1장에 보면 반복되는 단어가 헤벨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거기 ‘헛되다’가 바로 히브리어 헤벨입니다.

또한 ‘숨 breath, 입김, 연기, 안개’ 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입김, 연기가 얼마나 빨리 없어집니까.

 

여러분 너무 비교되지 않습니까? 첫째 아들은 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얻었다’, 구원자를 얻었다고 한껏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헛됨’으로 지었습니다.

그러면 왜 둘째 아들의 이름을 ‘헛됨’이라고 지었을까요?

 

가인이 ‘구원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을, 아담과 하와는 다 지켜볼 것 아닙니까?

보니까 그 심령과 영혼에 죄가 충만하다는 걸 봤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죄를 짓는 가인의 모습들을 봤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났을 때부터 죄가 없으셨습니다. 죄를 짓지 아니셨습니다.

‘구원자’라면 죄 없으신 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을 보니까, 어려서부터 하는 모든 행실을 보니까, 악한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실망했겠죠. 낙심했겠죠.

‘이 아이는 구원자로서의 자격이 없구나.. 우리를 닮았구나..

부패한, 타락한 우리를 닮았구나.. 나와 똑같구나’

 

그래서 둘째 아들을 낳고서, 그들은 자신들의 심정을 거기다 그대로 토로했습니다.

‘헛되다, 허무하다’ 그래서 이름을 아벨로 지은 거죠.

 

▲그리고 어느덧 가인과 아벨이 어른이 되었습니다. 둘 다 직업을 가졌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동생 아벨은 양을 쳤습니다.

 

아벨은 목축업자였고, 가인은 농부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노동하여 얻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곡식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양의 새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4:4~5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기를 거절하셨습니다.

놀랍고도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게 아닙니다.

인류 첫 번째 제사부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었고, 거부하시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면서 몇 번이나 예배를 드리셨습니까?

주일예배만 해도, 셀 수 없는 예배를 드리셨을 것입니다.

그동안 그 많은 예배를, 하나님이 다 받으셨을까요?

몇 번이나 하나님이 내 예배를 받으셨을까요?

 

나중에 천국에 갔는데, 우리는 놀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 너 예배 지금까지 몇 번만 드렸다. 내가 딱 몇 번만 네 예배를 받았다’

그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지 않는 예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왜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나?’

‘대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제물의 종류를 얘기합니다.

가인의 제사는 곡물의 제사인 반면, 아벨은 피흘림이 있는 제사였다고요.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피흘림이 없었겠죠.

이에 반해 아벨이 드린 제물은 양이었습니다. 양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아벨의 제물에는 피흘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꼭 피의 제사만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레위기 2:1절 이하에 보면, 여러 제사 가운데 ‘소제’가 있습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grain offering

하나님은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제물의 종류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곡식이냐, 짐승이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제물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다 히브리어로 '민하'입니다.

4:3~5절까지 보면 '제물'이 히브리어로 다 '민하'입니다.

가인의 제물도 민하였고요. 아벨의 제물도 민하입니다.

민하는 감사의 제물입니다. 죄를 씻는 제사가 아니라, 감사의 제물입니다.

 

죄를 씻는 제사라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짐승의 피를 흘려야 합니다.

피 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민하'는 죄를 씻는 제사가 아니라, 감사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서 드리는 제물입니다. 그러니까 꼭 피의 제물일 필요가 없습니다.

 

곡물을 드려도 되었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레위기로 넘어가면,

 ‘민하’라는 단어가 곡식을 드리는 제사인 ‘소제’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가인의 직업은 농부입니다.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감사의 제물을 뭘로 드리는 게 마땅합니까?

다른 것보다 자신이 1년 동안 땀 흘려 가꾼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게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곡식을 바쳤던 게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을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사람의 문제>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놀라운 디테일이 숨어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들여다보면, 제물만 말하지 않습니다.

제물 이전에 각각 그 사람을 언급합니다. 한번 확인해 볼게요.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우리는 제물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제물 앞에 뭐가 있죠? 아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입니다.

 

그러면 아벨이라는 사람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아벨이 바친 제물이 중요합니까?

여러분 뭐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일까요? 아벨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아벨'이 '제물'보다 앞에 나오니까요.

 

5절도 보겠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그러면 가인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가인이 바친 제물이 중요합니까?

여러분 뭐가 더 중요하죠? 가인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죠. '가인'이 '제물'보다 앞에 나오니까요.

 

하나님은 먼저 아벨이라는 사람을 받으신 겁니다. 그리고 그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가인이라는 사람을 먼저 받지 않으시고, 그의 제물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물 이전에 먼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삶을 받으십니다.

그 사람의 삶이 어땠는지를 보십니다.

 

아벨의 삶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마23:35절에 나오는데요. 예수님은 아벨을 가리켜 의인 아벨’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벨의 평소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의로웠습니다.

 

반대로 가인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삶은 악했습니다.

실제로 그 증거를 7절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가인의 문제는 삶이었습니다.

 

예배하러 오기 전에 삶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인의 삶은 하나님 앞에 악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는, 제물이 곡식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이라는 사람 자체, 즉 그의 평소 삶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 합당한 삶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인의 삶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배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요.

지금 이 한 시간에 달려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난 6일을 통해서도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당에 나올 때, 우린 지난 6일간 삶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예배는 사실 주일 하루가 아니라,

6일 동안의 삶에 달려있다고요. 6일 동안의 삶이 사실 예배를 좌우합니다.

 

우리가 6일 동안 죄를 안 지을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짓기도 하고요. 낙심하기도 하고요.

때로는 원망하기도 하고요. 불평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기도도 안 될 때가 있고요.

때로는 말씀 묵상, 순종을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믿음으로 살려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회개하고요.

낙심되면 하나님께 기도하고요. 기도가 안 될 때는 어떻게든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려고

은혜를 구하고요. 그리고 어떻게든 믿음으로 한 주를 살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죄와 싸우고, 세상에서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렇게 6일의 삶을 보내고 주일에 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떤 주일에는 자리에 앉아서 기도만 해도, 눈물이 흐릅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한 주 동안.. 이 주일을 기다리며 살았거든요. 예배를 드리려고 살았거든요.

한 주 동안 이 믿음을 지키려고 살았거든요. 그리고 주일에 오니까 어떻습니까?

당연히 은혜가 풍성할 수밖에 없죠. 예배 시작도 안 했는데, 눈만 감아도 눈물이 흐릅니다.

 

말씀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있고요. 회복이 있고요. 회개가 있고요.

새로운 결단이 있습니다. ‘아, 말씀으로 다시 한 주간을 살아야겠구나’ 하고 힘을 얻습니다.

예배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내 예배를 받으시는구나’

 

제가 초신자 때 깨달은 게 있습니다.

‘주일 예배는 이 한 시간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6일간의 삶이 예배이 질을 결정하는구나’

‘우리가 주일에 나올 때는, 지난 6일간의 삶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구나’

 

그런데 6일을 반대로 죄로 충만하게 살잖아요.

회개도 안 하고 하나님도 멀리 하잖아요. 그러면 예배가 진짜 힘들어집니다.

죄가 딱 나를 사로잡고 있으면, 가장 먼저 타락하는 게 예배입니다.

예배 드리러 가는 게 그렇게 싫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는, 청년만 만 명이 넘는 교회였습니다.

어떤 청년은 실제로 예배 도중에 나가버립니다. 왜 나가겠어요?

말씀을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죄를 건드리니까요. 표정부터가 다른 거죠.

예배를 드리는 자세부터가, 회개하면 되는데, 회개가 안 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예배를 견디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만약 주일 예배 때 은혜가 없으면,

오랫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예배 때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면,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6일 동안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6일 동안의 삶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는 오늘 이 1시간이 아니라, 6일의 삶이 좌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 이전에 먼저 삶을 보시고,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사람의 차이, 삶의 차이였습니다.

 

▲2. 하나님이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두 번째는 <희생의 문제>였습니다.

 

먼저 가인의 제사를 다시 보겠습니다. 본문 3절인데요.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고 말합니다.

 

반면 아벨의 제사는 이렇게 되어 있네요.

4절에 ‘아벨은 자기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더니’

 

여러분 차이가 보이십니까? 가인의 제사는요. 아무런 형용사가 없습니다.

‘땅의 소산’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땅의 소산인데, 어떤 소산인지 수식어가 없습니다.

 

반면에 아벨의 제사에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다’고 나옵니다.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가인의 제사에는 ‘첫 소출이나 첫 열매’라는 언급이 없습니다.

NLT라는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더라고요. Some of his crops,

농작물의 일부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첫 열매가 아니라, 나중에 딴 열매일 수 있습니다.

또 열매 중 일부는 좋은 것일 수도 있고요. 일부는 좋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요.

그저 그런 중급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하나님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첫 새끼는 가장 좋은 양을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기름은 가장 맛있는 부위를 의미합니다. *지금도 양고기는 ‘기름’이 제일 맛있습니다.

 

아벨은 양들 중에 아무거나가 아니라, some이 아니라

가장 좋은 양을 골라서, 가장 좋은 고기 부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가 확연히 대조됩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자신에게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희생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밭에서 눈에 보이는 some, 아무 것이나 일부를 뽑아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희생이 없었습니다.

 

구약시대 예배를 '제사'라고 부르죠. 제사를 영어로 sacrifice, 즉 희생이라고 부릅니다.

예배자는요. 예배자의 희생을 드리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핵심도 똑같이 여러분 희생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예배를 정말 온전히 드리려면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시간이 희생이 있어야 하죠. 토요일날 되도록 일찍 자고요. 주일날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가 피곤하지 않으니까요. 예배에 잘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또 주일을 지키려면 몇 시간을 희생해야 합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시간을 희생해야 합니다.

시간의 희생이 없이, 어떻게 주일예배를 잘 드릴 수 있습니까?

또 물질의 희생도 있습니다. 헌금하려면 물질의 희생도 필요합니다.

또 다른 여러가지 희생도 있을 수 있습니다. 관계의 희생도 있을 수 있겠죠.

 

예배를 드리려면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 앞에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억나십니까?

안식일은 저항이라고요.

안식일을 지키려면, 주일을 잘 지키려면 저항해야 한다고요.

희생이 필요합니다. 희생이 없으면 온전한 예배가 사실 어렵습니다.

 

안타깝게도 희생 없이 예배를 드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희생보다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을 희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배에 항상 늦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물질을 헌신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희생이 빠진 예배, 희생이 들어가지 않은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으니까요. 여러분 그렇잖아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예배에는 희생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무엇보다 시간에 희생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 10분 전에는 오시길 바랍니다.

노진준 목사님이 쓰신 <예배의 사색>이라는 책에 보니까

한 챕터의 제목이 “예배 전 10분”이었습니다.

이 챕터가 한 예화로 시작하는데요. 제가 그대로 한번 발췌해 봤거든요.

 

「한 번은 S D 고든 목사가 화가인 친구의 전시에 갔습니다.

그 친구는 고든 목사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그곳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는, 10분이 지난 후에 그를 데리러 와서 전시장으로 인도했습니다.

 

고든 목사가 친구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었습니다.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도시의 찬란한 불빛에 눈이 익숙해 있기 때문에, 시선이 타락해 있기 때문에,

잠시 동안 어두운 곳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그림을 감상해야,

그림의 의미가 느껴지고 색채와 형상이 주는 진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일세’」

 

그러면서 그 책에서 저자는 계속 말합니다.

심리학에 ‘노출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답니다.

사람은 많이 노출되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인데,

폭력적인 것에 많이 노출되면, 그만큼 영향을 받고

성적인 것에 많이 노출되면, 그만큼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일주일 동안 살면서

영적인 것보다는 세속적인 것에 더 많이 노출되어 살아갑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주일에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고 해서,

마음과 생각이 갑자기 변신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자는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전 10>이 가장 중요하다고요.

마치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10분 동안 어두운 곳에서 익숙해진

도시의 불빛을 씻는 것처럼, 타락한 시선을 씻는 것처럼,

예배를 위한 10분이 필요하다고요.

 

예배 드리기 전에 10분 동안 세상에 노출된 우리의 눈과 마음을 가라앉히는 시간,

씻는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자 그래서 그분은 감히 말합니다. '예배 전 10분이 예배 전체를 좌우할 수 있다고'요.

 

여러분, 예배에 일찍 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늦게 오면, 사실 늦으면 예배가 안 되잖아요.

여러분의 예배에는 시간의 희생이 있기를 바랍니다. 물질의 희생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한 저항, 희생이 있기를 바랍니다.

가인의 예배가 아니라, 아벨의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셋째는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이 부분은 신약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약이 오늘 본문의 제사를 풀어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근거인데요. 바로 히브리서 11: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본질적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존재 여부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반면에 가인은 믿음 없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가 믿음일까요?

이 믿음은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구원자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아벨은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벨이 예수님을 정확히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라는 이름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부모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약속은 원시 복음, 최초의 복음이라고 불리는 창세기 3:15절이었습니다.

 

사탄의 머리를 부수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할,

사망으로부터 구원할 여인의 후손, 구원의 약속에 대해 들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이 약속의 복음을 어려서부터 함께 배웠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믿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믿었습니다.

 

비록 아벨은, 여자의 후손이 정확히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사탄의 세력을 멸망시킬지는 알지 못했지만,

장차 오실 구원자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실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이렇게 제사를 드렸던 겁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다.

구원자가 아니면 나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구원자 때문에, 오늘도 나는 하나님 앞에 받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겁니다.

 

반대로 가인은 이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의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기 노력, 자기 의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내가 제사를 드리는 것은 내가 드릴만해서.. 하나님이 받을만해서 드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제물을 바쳤으니까 땅에 소산을 드렸으니까

당연히 하나님도 내 예배를 받으셔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노력, 자기 의로 드린 제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도 나는 하나님 앞에 자격이 없다 예배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그분의 십자가 은혜 때문에, 대속의 은혜 때문에 드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 사람의 예배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있습니다.

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예배 드리는 것 자체가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통회하는 마음 없이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 없이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없이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면 내가 예배를 드릴만하다고, 자격이 있다 생각하니까요. 내가 예배를 드려주니까요.

 

내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내가 드릴만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내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예배를 드렸으니까, 하나님께 빚을 지우는 거죠.

‘내가 이렇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물질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마땅히 하나님이 나한테 무언가를 해주셔야 합니다.

내 예배를 마땅히 받아주셔야 합니다.’

 

이 사람의 예배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예배가 노동이고 의무일 뿐입니다.

믿음 없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믿음 없이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믿음 없이 드리는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실패한 가인의 반응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배의 실패는 예배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예배에 실패한 가인의 반응이 5절에 나옵니다.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러분 가인이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제사를 드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나님이 내 제사도 받아주셔야 된다고 생각을 했으니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는 거죠.

 

‘내가 제물을 드렸으니까 하나님도 당연히 받아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제물을 왜 받지 않으시지?’

 

하나님 앞에 몹시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안색이 변했습니다.

안색이 변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얼굴을 떨어뜨렸다’는 뜻입니다.

얼굴을 푹 숙인 겁니다. 반성의 의미로 숙였을까요? 부끄러워서? 아니겠죠.

속에 열불이 나는데, 참지를 못한 겁니다. 숙이면서 씩씩거리고 있었겠죠.

 

여러분 사실 이때 가인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믿음이 없었습니다. 내 노력과 내 의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희생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님 내 삶이 엉망이었습니다.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하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분노합니다.

여러분 예배의 실패는, 예배의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집니다. 깨집니다.

 

그때 하나님이 가인을 찾아가십니다.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으십니다. ‘가인아, 너 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느냐?

왜 얼굴을 푹 숙이면서 화를 내고 있느냐? 뭐 때문에 그렇게 긁혔느냐?

네가 선을 행했다면, 내가 네 제사를 왜 안 받겠느냐? 그러면서 말씀을 하십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왜냐하면 예배에 실패하면 반드시 죄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죄가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말 표현으로는 ‘코앞에 있다’고 하는데요. 히브리어는 ‘문앞에 엎드려 있다’고 말합니다.

 

죄가 코앞에 있다. 죄가 너를 더 원하고 있다. 그러니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예배에 실패한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했냐면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성경에 ‘돌로 쳤다’는 말은 안 나오지만, 쳐 죽였다고 했으니, 돌로 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칼로 쳐죽일 때도, 이 표현을 씁니다. 창34:25)

 

아벨을 들로 불러내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나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여러분 연쇄 반응이 보이십니까? 가인은 예배에 실패했습니다.

예배가 깨지니까,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으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그 다음으로 옮겨간 게, 예배가 깨지니까, 죄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아벨을 죽였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깨집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벌을 받습니다. 두 가지 벌을 받는데요.

첫 번째 벌은 땅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1b

 

12절에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내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가인은 동생 아벨의 피로 땅을 적셨습니다. 살인의 피로 땅을 더럽혔습니다.

그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됩니다.

 

가인은 농부였죠. 그러나 아무리 경작해도, 땅이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아담보다 더 심한 벌입니다.

 

아담은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경우는, 이제 땀을 흘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거둘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벌은 12절 끝에 나옵니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도망하며)’

여러분, 이건요. 회개가 아닙니다. 끝까지 피해다니지 회개하지 못합니다.

 

지금 가인은 ‘내 죄가 너무 무겁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죄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내 벌  punishment 이 너무 무겁다’고 합니다.  :13

자기 죄를 회개하기는 커녕, 도리어 벌이 무겁다고 불평합니다.

회개하는 대신에, 계속 자기 처지만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4절인데요. 우리 14절도 같이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죽을 것을 걱정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떠났기 때문이죠.

또 사람들이 보면, 자기를 손가락질하고, 또 가인에게 복수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누군지 나를 보면 죽일 수 있겠구나’

 

자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 ‘나를 만나는 자마다’는 누구일까요?

여태까지 나온 사람들은 총 4명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총 4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아벨은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면 3명만 남은 거죠.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나를 만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 이후에 자녀를 낳았을까요? 낳지 않았을까요?

네, 낳았습니다. 아들도 낳고, 딸도 낳고, 쌍둥이도 낳았겠죠.

 

고맙게도 창4:25절에 그 단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살해당한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습니다. 위로해 주시는 거죠.

바로 셋이라는 아들이었습니다. 셋 등 다른 자녀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창5:3절에 보니까, 이때 아담의 나이가 몇 세였냐면 130세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셋을 낳은 나이가 130세입니다. 유추해 봅시다.

제가 이거 설명해 드리려고 준비하느라 골머리를 앓았거든요.

 

아벨이 죽고 나서 얻은 아들이 셋이었습니다. 그때 아담의 나이가 130세였어요.

그러면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는, 아담이 130세가 좀 못된 나이였겠죠.

 

물론 이제 아담과 하와는 만들어졌을 때부터 성인이지만

그냥 아담과 하와가 30세 되었을 때, 가인과 아벨을 출산했다고 가정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2년에 한 번 걸러 아이를 낳았다고 계산해봤습니다.

 

2년에 한 번 낳았다고 치면, 30세부터 낳기 시작해서 130세에 셋을 낳을 때까지

인구가 어떻게 되냐면, 자녀만 52명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장성해서 결혼하겠죠. 30살이 되었을 때 결혼해서

아기를 낳을 경우 761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건 아담과 하와가 30살이 돼서 출산을 시작했을 때 얘기입니다.

그때는 더 일찍 결혼했겠죠.

만약에 가인과 아벨을 낳은 나이가 20살이라면 계산은 달라집니다.

결론만 말하면요.  5,810명이 나옵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 수백 명에서 ~ 수천 명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한 건, 포인트는, 가인은 공동체로부터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연쇄적인 반응이 보이십니까? 가인은 예배에 실패했습니다.

예배의 실패는 예배의 실패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습니다.

그리고 죄를 다스리지 못하다 보니까, 사람과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또 형벌을 받았습니다.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공허한 삶이 된거죠.

또 공동체로부터 쫓겨나서, 떠도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삶도 다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가인 자신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인은 천국에 갔을까요?

아니면 지옥에 갔을까요? 오늘 본문 어디에도, 또 성경 어디에도

가인이 회개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인은 자기 죄의 벌이 무겁다고 불평했습니다.

 

이 말은 가인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에서 실패한 사람이 되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도 잃어버리게 되고,

사람과의 관계도 잃어버리고, 자신의 삶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마치는 말

이 모든 가인의 실패한 삶에는, 실패한 예배가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왜 성경은 에덴 동산 동편으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가운데

예배를 먼저 다루고 있을까요?

왜 제사를 가장 먼저 다룰까요?

 

가인과 아벨의 많고 많은 이야기 중에, 얼마나 다룰 사건이 많았겠어요?

그런데 왜 그들의 제사만 딱 다루고 있을까요?

인간은 이제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반대로 예배가 서면, 다른 것들도 세워집니다.

 

여러분의 삶에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것들 있습니까?

그때 여러분, 다른 것이 아니라, 진짜 예배부터 한번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인생의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예배를 잘 드립시다. 먼저 주일 예배를 회복합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첫째, 6일을 잘 살아갑시다. 주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6일을 살아갑시다.

 

둘째, 우리의 예배에는 희생이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시간의 희생이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우리의 예배에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의와 노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참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예배에는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가인은 예배에 실패했습니다.

그 결과 가인은 예배를 드려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예배를 드리고 나서 더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에는 참된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다른 무엇보다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모든 인생의 매듭들이 풀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