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린 자의 복, 배부름 마5:6 2025.09.09.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오’
근원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이, 모든 인간 속에 있음을 전제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마음에는 텅 빈 공백이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 자신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공백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 사이즈의 공백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이 발생하면서,
근원적인 욕구가 형성됩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워 만족하려는 욕구지요.
이 마음 채움의 욕구가 지속성을 띄고 드러나는 현상을
우리는 희망, 소원, 야망, 욕망 등등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이 ‘마음 채움’의 욕구가 일시적으로 나타나면, 모든 크고 작은 바람 wish들이 됩니다.
지속적인 희망이든, 일시적인 바람이든,
결국은 모두가 각자 속에 자리 잡은 근원적인 굶주림과 목마름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인류의 치명적인 오해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돈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을 품습니다.
그래서 지속성을 띠고 돈을 배고파하고 목말라 하잖아요? 이게 착각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어서 생긴 배고픔과 목마름을,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평생을 오해합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배부름을 느낀다면 어떨까요?
돈 벌고 싶다는 희망이나 소원 따위는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사정은 모든 다른 것을 향한 욕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마음속 배고픔의 이유가, 하나님이 없음으로 생긴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무지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으로 배불러 보세요.
그러면 그 어떤 사람도 이 세상 그 어떤 것을 향해서도
희망이나 소원이나 욕구나 야망 따위를 품지 않습니다.
또는 점심때 내가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바람을 가집니다. 정말 일시적인 바람이지요.
이럴 때도 우리는 역시 육체의 배고픔 때문에
짜장면이라는 구체적인 음식을 먹고 싶은 거라고 오해합니다.
물론 사람은 육체가 살기 위해서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해요.
그러나 하나님으로 마음이 충만히 배부르잖아요.
그러면 육체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특정한 음식을 마음에 소원하면서 먹고싶어 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배부르면, 어떤 메뉴든지 감사하며 먹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 인생은 정말 착각 그 자체였어요.
마음의 만족함을 얻겠다고... 열심히 이 세상 것들만을 소유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더는 안 되지요. 이제는 하나님을 벌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돈을 벌려고 했던 열심의 크기가 얼마만큼입니까?
그 열심으로 하나님을 벌어야 합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먹어야만 마음의 배가 부르고 만족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면 의문이 생겨요. 하나님을 도대체 어떻게 벌고, 가지고 먹어서
내 마음의 공백을 배부를 수 있게 할 것인가?
하나님은 이 세상 다른 대상들과는 다르지 않는가? 그냥 가지면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벌고, 가지고 먹어서 배부르려면,
의를 목말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공백이 생긴 마음을 채우고 싶잖아요.
엉뚱한 대상에 욕구를 적용하지 말고, 오직 의를 목말라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의는 또 뭡니까? 의는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상태예요.
좀 더 인격적인 말로 표현해보자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보시면서
‘너는 참 내 마음에 든다’ 라고 하시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마음 안으로 나를 기뻐하시며 들여놓으시는 상태가, 바로 의라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이 의를 마음채움의 욕구를 총동원하여, 굶주림을 느끼며 목말라 하면,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까?
그러면 거꾸로 내 마음도 하나님으로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배부르게 되리라'는 말씀을, 다시 써보면 이렇게 돼요.
‘하나님 마음에 들려고 하라, 그러면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지리라’
예를 들어볼까요? 한 학생이 서울대 입학을 하고 싶습니다. 만족을 위해서지요.
그러려면 서울대학이 제시하는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서울대가 ‘너는 내 마음에 든다’ 라고 해야 해요.
이렇게 학생이 서울대의 마음에 들면,
비로소 서울대가 또한 그 학생 마음을 채워 배부르게 해준다(합격시켜 준다)는 겁니다.
하나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이 텅 빈 허전함이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배부름을 느끼고 싶어요. 내가 하나님 마음에 들면 됩니다.
▲그러면 실제로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의를 이룰 수 있을까요?
출생한 인간 중에서 죄와 저주에 찌들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다만 한 사람만 예외이지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80억 인구 중에 오직 예수님을 향해서만 '너 내 마음에 든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하나님 마음에 드는 방법은 하나뿐인 거예요.
우리 마음이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향해서 ‘너 내 마음에 든다’라고 하실 때
예수님 안에 숨은 우리 마음도 덩달아서 하나님 마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의를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의의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고 부활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시는 연쇄 과정을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기억합시다 의를 위한 우리의 줄임과 목마름은
이러한 예수님과의 연합을 유지하려는 간절한 몸부림으로만 실제로 표현될 수 있고
응답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 마5:7 2025.09.11.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나를 향한 긍휼은, 발생의 진원지가 있을까요? 바로 낙차에서 발생합니다.
좋음과 나쁨의 낙차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실제로 인간에게 유일한 좋음이시며 최절정의 좋음이십니다.
천국은 이러한 하나님의 좋음이, 충만한 공기처럼 호흡하는 곳이지요.
반면에 이 땅은 오직 ‘가짜 좋음’만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결코 오지도 않을 진짜로 좋은 날을 애타게 기다리며
평생을 낭비하고 맙니다.
세상 것이 좋다 라고 속삭이는 마귀에게 속은 탓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좋음과 나쁨에 있어서
천국과 세상,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큰 낙차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낙차가 하나님을 자극하여,
사람을 향한 무차별적인 긍휼하심이 발생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진짜 좋음이신 당신 자신과
최절정의 좋음인 천국을 사람에게 주시고자, 예수님까지 땅에 보내시게 된 거죠.
▲그래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완성한 최종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 과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연쇄 과정은 일종의 길이지요.
땅에서 천국으로 이어지는 하늘길입니다.
이 길을 내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놓인
하늘과 땅의 낙차가 누구에게서나 극복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가짜 좋음만이 판치는 땅을 떠나
진짜 좋음으로 가득 찬 천국으로, 당장이라도 올라오도록 하신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복 들어오는 날 문 닫는다’라는 속담이 있지요.
이런 낭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대해서 내가 문을 닫아버린다는 겁니다.
이미 긍휼이 여기심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연쇄과정’이 이루어짐으로써 완성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늘과 땅의 낙차를, 독생자를 통해 극복하시면서까지 주시려는
하나님 자신과 천국을.. 사람들이 당장 받아들이지를 않는 겁니다.
‘웬 떡이냐’ 하며 반기지를 않아요.
이렇게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뭘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 자신과 천국의 진짜 좋음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에요.
‘평양 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다’ 라는 속담과 같은거죠.
당장이라도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며 반겨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니에요. 내 처지가 하도 불쌍해서 주시려는 겁니다.
그것도 최절정의 좋은 것으로 말입니다.
이제 내게 주시려는 것을, 그냥 진짜로 나는 좋아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천국은 내 것이 됩니다.
그런데 좋아하지 않아서, 지금 당장 받지를 않습니다.
이러면 많은 사람이 이의를 제기할지 몰라요.
‘아니다. 무슨 말이냐? 나는 하나님 자신과 천국을 좋아한다’ 라고 말이죠.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랬다면 이미 하나님 자신과 천국을 내 마음은 누리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증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천국을 내가 진짜로 좋아한다면, 증거가 있다는 거예요.
이 증거가 바로 긍휼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천국의 좋음을 확신한다면, 나는 반드시 사람을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긍휼은 좋음과 나쁨의 낙차에서 발생합니다.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은, 유일한 진짜 좋음이십니다.
예수님의 전생애가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제대로 믿을수록,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진짜 좋음이
내게 믿어지고 확신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유일하신 좋음에 대한 철옹성같은 확신이 있으면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내 안에서 낙차가 생기고. 긍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진짜 유일한 좋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오직 세상에 있는 가짜 좋음만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불쌍해집니다.
이 불쌍히 여김은 무차별적이에요. 악인, 선인, 건강한 자, 병약한 자, 높은 자, 낮은 자,
부자, 가난한 자, 유식한 자, 무식한 자, 남자, 여자...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김이 바로 증거예요.
내가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이 진짜 유일한, 최절정의 좋음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는
증거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진짜 좋음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
그래서 그 증거로써 이런 엄연한 사실을 모르는 다른 사람이 불쌍한 사람으로
바로 이런 사람에게는 받아들여진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주시려는 하나님 자신과 천국이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과 천국을 너무 좋아하면
나 자신에게도 역시 증명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진짜 좋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쌍하십니까?
그러면 이제 나는 하나님 자신과 천국을 누릴 준비가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본문을 다시 쓰면 이렇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비로소 저희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주시려는 하나님 자신과 천국을
이제라도 받아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꼭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진짜 좋음을 진짜로 확신한다면 반드시 증거가 나타납니다.
그 진짜 좋음을 모르는 모든 사람이 무차별적으로 불쌍한 겁니다.
이러한 증거가 내게서 나타나면, 이제부터 내 생의 한가운데는 무한히 은혜를 뿜어내는
옹달샘이 하나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베풀어주시는 끝없는 긍휼의 옹달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