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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원하는 세상 골3:1~11 2008.11.23.
지난 주간에 저는 어떤 기독교신문의 기사를 보고 두 번 놀랐습니다.
먼저는 비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놀랐고,
다음으로는 그 결과를 놓고 벌인 토론회의 결론을 보고 또 놀랬습니다. 주1)
한국 교회가 놀라운 성장을 보인 70년대에 한국교회의 모판이라 할 수 있는 미국교회는
쇠퇴일로에 놓였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기독교 사상이 뿌리가 되어서 발전한 나라입니다.
헌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가치관이 성경에 기초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겨우 몇 천 개였을 때
미국교회는 40만개가 넘어섰던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2020년 미국 종교 센서스(US Religion Census)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전국의 개신교 교회 수는 약 29만 3천개였습니다.
2010년경이 최고점으로 교회가 많았다고 추정되는데,
그때 남침례회가 약 5만여 개, 초교파 교회가 약 3만 5,000개 이상으로 보고되는 등,
2010년대 초반이 교회 수의 정점기에 가까운 것으로 파악됩니다.
최근 추세로는, 2019년에는 약 3,000개의 교회가 개척되었으나
4,500개의 교회가 문을 닫아 순감소했습니다.
전체적인 교회 수는 줄어드는 반면,
특정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초교파(Non-denominational) 교회는
지난 10년간 약 9,000개 급증하여 2020년 기준 약 4만 4,000개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한편, 2020년 기준 미국 교회의 절반 이상은 주간 예배 참석 인원이
65명 미만인 소규모 형태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자, 교인들이 썰물처럼 교회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놓고 로버트 핑크라는 학자가 그 이유를 조사하고 결과를 책으로 써냈습니다.
결론은 너무나 간단하고 엉뚱했습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너무 적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교회가 쇠퇴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씀 드리면 교인들이 세상에 나가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질감을 주지 않도록 가르쳤다는 겁니다.
거부감을 주지 않는 기독교인,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기독교인,
신사적 이미지를 주는 기독교인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자니 적게 요구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면 교회의 문턱은 낮아져서
사람들이 많이 들어올 줄 알았던 겁니다.
그런데 결과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적게 요구해서 성도들의 색깔이 세상 사람들과 비슷해지니까
성도들이 먼저 교회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고,
세상 사람들도 교회에 대해서 매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현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지금도 그 현상이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반면에 90년대에 미국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교회 수백 개를 조사해 보니,
그런 교회들은 성도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강하게 훈련시키고 많은 것을 요구했더니.. 교회가 부흥하더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거부 반응을 일으킬지 모르지만,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도록 가르치고,
믿는 사람답게 살도록 성도를 바로 세우는데 온 교회가 집중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한 것이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감동을 주었고,
그런 감동이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만들더라는 겁니다.
▲이런 역사를 볼 때, 한국교회의 문제는 미미한 사회기여도나 영향력이나
타 종교와의 소통부재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슷해져 버린 점과
그렇게 되도록 적은 것을 요구한 교회에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채 다른 해답을 내려 놓는 우리 교계의 탁상공론에
저는 충격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1)
여러분!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 또한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르냐에 달려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갈데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시고,
이방인인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셨을까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거룩한 사람이 되라’ 하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면 ‘다른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거룩’이란 뜻은 ‘다르다’ ‘구별되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여름과 겨울이 다르듯, 빛과 어둠이 다르듯이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철저하게 다릅니다.
만일 교회가 세상과 비슷하거나 같게 되면,
그날부터 교회는 죽음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성도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그가 믿음의 후배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싶었던 게 뭐겠습니까? *가택연금, 셋집
믿는 사람이라면, 안 믿는 사람과 확실히 달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확실히 달라야 하는 게 뭐냐?
네 가지인데, 오늘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입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있기 때문에 다릅니다.
4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다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 끝에 저와 여러분이 깨달아야 할 것은,
“아! 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분명 세상 사람이 아니야. 나는 확실히 달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야 그게 우리 생각을 통제하고,
말을 지배하고, 행동을 좌우하게 됩니다.
▲1.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3절에 ‘이는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에는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전체적인 문맥을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2,000년 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시에는 살지도 않았던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 모두가 교회를 조금이라도 다니신 분들이라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다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죄를 용서하신 것일까요?
예수님 당시에 저질렀던 죄일까요, 아니면 그 이전에 저질렀던 죄일까요,
또는 미래에 저지를 죄까지인가요?
정답은 셋 다 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온 인류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죄 뿐 아니라
미래에 우리가 저지를 죄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2000년 후에 있을 우리 죄의 대속(代贖)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완하는 말씀이 로마서6:6 인데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을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즉 그 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죄 짓고 하나님을 거역했던 우리 역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죽었다는 의미는 끝났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양의 죄라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우리 죄는 그것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죽으심 속에 우리 죄 역시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그 죄의 굴레에 허덕일 필요 없는 완전 자유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곡이 비발디의 ‘사계’ 라는 얘기를 들어보셨나요?
그 아름다운 곡이 왜 가장 듣기 싫은 곡이 되었을까요?
너무나 좋으니까 너무나 많이 방송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식상해지고 어느 순간엔가는 식상함을 넘어서
지겹고 짜증나는 곡이 된 것입니다.
우리 집에도 그런 곡이 있습니다.
아이들 초등학교 때 3년 정도를 계속 틀어 놨더니 지금까지도 듣기 싫어하는데,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주 들으면 싫어지는 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시면서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짜증내거나 실증 내서는 안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또 그 얘기야? 하실 수 있겠지만 이것만큼은 절대로 잊어서도 안 되고 못 믿어서도 안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이 사실을 믿지 못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주님의 십자가를 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죽으실 때 혼자 죽으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하던 내 자신과 함께 그 분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갈5:24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라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욕정과 욕심으로 살던 옛 자아,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끝이 났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그 자아가 살아서 내 안에서 주인 노릇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 사는 것이 얼마나 다릅니까?
세상 사람들은 죄 짓는 자아가 여태껏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옛 사람이 살아있고, 옛 사람으로 숨쉬고, 옛 사람으로 한 생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절대 같을 수 없는 겁니다.
5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그랬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런 것을 행하면서 살 수 있겠어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을 좋아하던 내 자아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십자가에 장사 지낸 지 오래기 때문입니다 .
내가 예수님을 내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나의 모든 옛 자아는 십자가에서 다 처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생활 못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른 것입니다.
▲2.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 났습니다.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분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그가 부활하실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던 내 자신이, 새 생명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어 내가 살아났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4) 말씀처럼
그 분의 부활과 함께 우리 또한 새 생명을 부여 받았고,
그 생명을 소유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육신은 다음에 부활하겠지만 우리 영혼은 이미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게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고, 그 고백은 바로 우리들의 고백이기도 한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이런 모습이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릅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주신 새 생명이 없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지금까지 근 십 수년 동안 우리나라는
사형수들에 대한 사형집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실질적인 사형 폐지국가로 분류되고 있는데,
그 전에 사형집행이 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사형수들은 죽음이 임박하면 거의가 다 신앙을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악명 높은 사형수들이
죽을 때는 반 성자가 돼서 죽는다고 하지요.
그런 사형수들만 선교하는 선교단체도 있는데, 그 분들의 얘기가 그렇습니다.
개중에 끝끝내 신앙을 거부하고 믿음을 받아 들이지 않는 죄수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죽는 순간이 너무나 처절하다는 거예요.
형장으로 데리고 가는 것부터가 너무나 힘들다는 겁니다..
어떨 때는 장정 대여섯이 끌어도 꼼짝도 안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까지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저주하면서, 욕하면서
그렇게 죽어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믿음을 갖고 하늘에 갈 것을 믿는 사형수들은 형장으로 가면서
교도관들에게 가벼운 농담까지 한다고 합니다.
“곧 다시 뵙겠습니다. 짐 다 털어 버리고 몸만 오세요” 그런다는 거지요.
△이런 현상은 병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친구 중에 의사가 있는데, 예수를 안 믿는 친군데도 얘기가 뭐냐 하면,
예수 믿는 환자와 안 믿는 환자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믿는 환자들은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 들이지만,
안 믿는 환자들은 끝까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좀 전에 말씀 드렸던 사형수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죽는다는 겁니다.
예수 때문에 새 생명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본문 골3:10절 말씀을 보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새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아서 계속 예수님처럼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경에서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해간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겉사람은 후패 해 가지만 속 사람은 예수의 생명 때문에 날마다 새로워지는 겁니다.
바로 이게 우리의 모습인데 그러니 어떻게 세상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저는 우리가 세상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완료형으로 말씀 드렸지만,
사실 아직 진행형인 분도 있을 것입니다.(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진행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순간 그 모든 것은 완료됐음을 선포하시고 믿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선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 믿음 때문에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사람들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3. 셋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골3: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3차원의 신앙생활과 4차원의 신앙생활
지금은 이런 격차가 많이 좁혀졌습니다만,
약 20년 전에, 한국 목사님들의 설교와, 미국 목사님들의 설교가 차원이 달랐던 적이 있었죠.
아시다시피, 국내선 비행기가 나는 고도와, 국제선 비행기가 나는 고도는 다릅니다.
국내선은 약2만5천 피트 상공에서 날고,
국제선은 약3만5천 피트 상공에서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 만날 리가 없는 거죠.
마찬가지로, 한국 목사님들의 설교와, 미국 목사님들의 설교가 차원이 달라서
서로 만나지가 않는 것입니다.
한국 목회자들의 설교가, 데이빗 윌커슨, 존 파이퍼, 폴 워셔, 데이비드 플랫 등
미국 목사님들의 설교와 그 주제, 방향성, 강조점 등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같은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는데, 꼭 서로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유를 차츰 깨닫게 되었는데,
‘한국 목회자 설교가 너무 현실 지향적’ 이라는 것입니다.
성경과 예수님은 ‘천국 지향적’으로 가르치는데,
당시 한국교회 설교는 ‘현실 지향적’으로 주로 가르쳤습니다.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은 좋은 말인데, 그게 엉뚱한 방향으로 적용되고 말았습니다.
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현실 지향적 신앙’을 .. 3차원(현실) 신앙
‘천국 지향적 신앙’을 .. 4차원(천국) 신앙
으로 이름지어 보겠습니다.
일례로 산상수훈을 읽어보면,
그게 죄다 ‘천국에 맞는, 4차원에 적용되는’ 신앙입니다.
그 말씀 그대로 현실에서 살기에는... 대단히 ‘현실 부적응’하게 됩니다.
성경 전체가 다 그렇고, 특히 신약이 더욱 그렇습니다.
성경은 ‘천국의 4차원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는 그걸 ‘현실 3차원 신앙’으로 약간 변형시켜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구원론의 오해 때문입니다.
‘값싼 구원, 값싼 은혜’의 복음으로, 교인 대다수가 구원은 이미 받은, 따놓은 당상으로 보고
이제 현실을 지혜롭게, 잘 적응해서,
현실에서 최대한 성공과 형통의 결과를 이끌어내려는 거죠.
여러분, 혹시 기회가 되시면, 새벽에 ‘불교방송’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거기 설법을 들어보면, 기가 막힙니다. 현실 세상에 딱딱 맞아 떨어집니다.
-지혜롭게 고부간 갈등 해결
-현명하게 부모-자녀간 대립 해결
-요령있게 직장 생활, 사회 생활 하는 법등.. 기가 막히게 딱딱 맞는 말만 합니다.
요즘 카톡에 돌아다니는 여러 잠언들, 격언들도... 같은 부류에 속하죠.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렇게 ‘현실 적응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씀합니다. 골3:2
소형 선박, 2~3명 타는 유람선이 방향을 선회하는 것은, 금방, 쉽게 방향이 바뀝니다.
그러나 초대형 선박, 대형 유조선이나 크루즈 선이 방향을 선회하는 데는
천천히 시간이 걸리고, 또한 회전 반경도 매우 큽니다.
지나치게 경도된 ‘3차원적 기독교’에서
성경적인 ‘4차원적 기독교, 천국 지향적 기독교’로 방향을 선회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회전 반경도 클 것입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 사필귀정, 반드시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이란 우주적 권세를 가진 상징적인 자리입니다.
재림하실 때까지 예수님은 그 우편에 앉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그 우편에 앉으시는 그 시간에
우리도 함께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말씀이 엡2:6에 나와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자가 되게 하실 뿐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 보좌 우편에 앉을 때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에 앉히셨다(다스리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믿고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잘 생각해 보면 하늘에 앉아서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한 번 따라 해 볼까요?
“우리는 하늘에 앉아서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 믿고, 예수님과 함께 살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고
말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것도 아니고, 갑자기 인품이 좋아진 것도 아니고,
갑자기 김희선처럼 예뻐진 것도 아니고, 피부색이나 국적이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겉보기로는 믿기 전의 모습이나 믿은 후의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진짜 생명이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서
지금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서 세상 사람이 볼 수 있는 우리 모습은 감추어진 생명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줄곧 나사렛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들 눈엔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인 목수 이상으로는 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 믿을 때 그들은 믿지 못했고, 다른 동네 사람들이
그 베푸신 은혜때문에 기뻐 춤출 때 그들은 어떤 기적도 체험하질 못했던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별 볼 일 없이 하찮은 사람으로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진짜 모습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해서 우리가 죽게 되면 우리는 아무 것도 놀랄 게 없고,
오히려 그 천국의 아름다움과 완전함 때문에 새로운 우주적 삶이 시작되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죽어 보면 몹시 당황할 겁니다.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겁니다.
이게 우리와 세상 사람들의 가장 다른 모습인 겁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것을 믿으면 나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탓하지 않습니다.
나의 초라한 신분이나 열악한 조건을 탄식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진짜 모습은 따로 있거든요.
지금 보이는 게 다가 아니거든요.
세상에서는 가난하게 살기도 하고 병약하게 살기도 하고 일찍 죽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늘의 부요를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진짜 모습은 보좌 우편에 앉아있는, 너무나 당당하고 영광스런 모습인 겁니다.
그렇게 진짜 생명을 비밀리에 갖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세상 사람과 같을 수 있겠어요?
세상 사람들은 그런 진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즉 보이는 이생이 전부기 때문에 거기에 목을 매는 겁니다.
해서 때로는 싸우고 짓밟아서라도 짜내고 이겨야 하고, 목숨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같을 수 없습니다. 다릅니다.
이 진리를 얼마나 잘 간직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이것을 얼마나 가슴 속에 잘 간직해서
이것이 우리 생각을 좌우하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사는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부디 이 사실을 모르는 세상 사람처럼 목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비밀스런 하늘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넷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골3:4절을 보니까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랬습니다.
지금은 감추어진 생명이 예수님의 재림 때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환하게 나타나리라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때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텐데 생각만 해도 설레지 않습니까?
그때는 우리의 진짜 모습이 나타날 겁니다.
아름답게 변한 우리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변한 모습을 보고 “아! 우리 진짜 모습이 이런 거구나!” 스스로가 놀랄 것입니다.
그런 영원한 것에 온 마음을 쏟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인데,
어떻게 세상 사람들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미래가 없는 사람과 미래가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그 사는 모습이 갈려 버립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과 세상과 함께 사는 사람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왕의 아들과 종의 아들처럼, 신분 자체가 극명하게 차이 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다!
과거에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현재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은 이것을 한꺼번에 결론짓는 말씀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3:2
바로 이것이 우리의 가치관이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믿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니고 사라질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땅의 것도 아니고 일시적이거나 잠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변치 않는 것이고, 영원한 것이고 위엣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변증가인 C.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영원히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저는 사진을 잘 못 찍지만, 사진을 조금이라도 찍는 사람이라면 늘 햇살을 염두에 둡니다.
왜냐하면 햇살이 어떻게 비추느냐에 따라 피사체가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 생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이고 ‘위엣 것’이고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거기에 따라 모든 게 달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명예나 즐기는 것도 다르고
심지어는 우리에게 오는 실패와 고통까지도 달라 보이는 겁니다.
그런 우리들이니만큼 결국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결론적으로 생각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거룩’입니다.
그것을 통해 더 궁극적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할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만 합니다.
서두에 말씀 드린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교회나 성도들에게 감동받기를 바라고
그것을 통해서만 교회 울타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는 확고한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있습니다.
한 마디로 달라야 하는데 그 내용은 네 가지로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감추어져 있고,
-장차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존재들입니다.
이 비밀을 한시도 잊지 않도록
각자의 심장에 날카로운 정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행여 세상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세상 사람들과 비슷해져야 하고
소통해야 하고, 공유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려 오면,
즉 세상 사람과 비슷하게 하자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건 마귀의 소리인 줄 아시고 단호히 거부하시기 바랍니다.
서두에 말씀 드린 것처럼 지금 한국교회는 10명 중 8명 정도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습니다.
아마 이 통계는 비엔나 한인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어쩌면 이것은 교인들 사이에서도 맞아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여러분 옆에 있는 교인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뭔가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게 있습니까?
확실히 구별되는 게 있습니까?
물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진짜 모습이 감추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 속 사람의 모습이 겉으로도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감동받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젊은이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게 뭐냐?” 라는 질문에
그 대답은 “자동차요, 집이요, 나만의 사무실이요!” 가 아니라
“감동을 받고 싶습니다”였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 만큼 지금 세상 사람들은 감동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아마 비엔나에 있는 한인들의 마음도 비슷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의 갈 길도 분명해 집니다.
감동이 있는 교회를 만드십시다!
누구든 우리 교회 오면 감동 받도록 모두들 감동의 전도사가 되십시다!
그 길은 오늘 드린 말씀처럼 세상 사람과 다른 게 있어야 합니다.
위엣 것, 영원한 것, 그리스도 예수만 추구하는 그 탄탄한 기본기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좀 힘들어도 많은 것을 추구하십시다.
저도 이제는 여러분께 적은 것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많은 것을 요구하고, 힘든 것을 요구하겠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보여지면 사람들은 반응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 문턱을 넘어 올 것입니다.
그러면 한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은
그것 때문에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 가슴 벅찬 축복이 이 아침에 저와 여러분에게 용솟음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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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지난 주간에 저는 어떤 기독교신문의 기사를 보고 두 번 놀랐습니다.
먼저는 비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놀랐고,
다음으로는 그 결과를 놓고 벌인 토론회의 결론을 보고 또 놀랬습니다.
설문조사의 내용은 “한국교회를 신뢰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1천 명에게 무작위로 전화를 했는데,
그 중 18.2 %만이 신뢰한다고 대답했고, 48.3 %는 불신한다고 했고,
나머지 33.3 %는 믿지도 안 믿지도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2명 만이 교회를 신뢰한다는 결론인 겁니다.
뒤집어 말하면 10명 중 8명은 교회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그 정도가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결과를 토대로 “그러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는 토론회가 바로 열렸습니다.
말하자면 진단 후의 처방을 내리는 자리였던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내린 결론이 또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 토론회에서 오간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한국교회가 외부세계로 다리 놓기를 효과적으로 잘 하지 못했다.
타 종교와 연대하여 서로 향상할 수 있는 인식이 너무 얕다.
윤리 의식이 낮고 재정 투명도와 사회 기여도가 수준 이하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다원주의 사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또 교회의 거품도 빼고 지도자의 부도덕성도 일신해야 한다.”
제가 이런 결론을 접하면서 놀랐다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물론 그 토론회에서 오간 얘기들 중에는 분명히 귀담아 들을 내용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 분위기를 보면 핵심적인 내용은 빠져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빠뜨린 채, 겉도는 얘기만 했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물론 그 자리에 모인 분들 대부분이 학자였기 때문에 이론에 치우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분들은 지난 수십 년 사이에 벌어진 교회사를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알 걸 알지 못하면 결론은 언제나 엉뚱하게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