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419_복음이 낳은 선교적 회심(행 10:34-35)_
◈복음이 낳은 선교적 회심 행10:34~35 2026.04.19.
‘복음이 낳은 선교적 회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부제를 말한다면 ‘나를 선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0장의 구조를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0:1~8절은 ‘고넬료가 본 환상’입니다.
10:9~16절은 ‘베드로가 본 환상’입니다.
10:17절 이하에는 고넬료가 환상을 보고, 자신의 하인들과 경건한 사람을 보내고,
베드로가 그들을 영접한 이후에,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방문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설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선교’라는 단어는, 낯선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어떤 대상이 낯설지 않으면, 그 본질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단어와 대상이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하여 가볍게 여기거나 무관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미셔널 처치’라는 말을 씁니다. '선교적 교회'라는 뜻이죠.
'교회'는 ‘~로부터 부름 받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부름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교회’인데, 이 교회라는 단어 자체가 ‘보냄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41년 전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 땅에 옴으로써
한국에는 개신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의 태생적 DNA는, 선교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그 발걸음에 의하여, 우리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인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삶의 본질로서 선교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때문에,
사전에도 없는 ‘미셔널 Missional’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습니다. *선교적
그래서 '선교적 교회, 선교적 성도다' 이런 표현은
‘여자적 여자다’ 이런 이상한 표현과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셔널’이라는 있지도 않은 단어를 만들어서,
‘하나님’이라는 용어에 붙여보면 ‘Missional God'
여러분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하나님이 선교적이시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좀 생소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미셔널‘ 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이해해보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선교의 엔진이며 연료이다‘
삼위 하나님은 선교를 보내시는 분일 뿐 아니라, 존재 자체가 선교적이다라고
마이클 리브스는 말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과 제가 섬기는 하나님이 선교하시는 분이라면,
그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과 저는, 선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습니까?
성경 그러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몇 구절에서 선교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많은 성경신학자들은
'창세기부터 게시록까지 모든 책들이 선교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성경은 사도와 선지자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그들은 선교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경을 썼던 모든 배경은, 선교적인 컨텍스트 안에서 쓰여졌습니다.
선교사에 의해 쓰여졌고, 선교적인 상황 속에서 쓰여졌고, 선교를 위해 쓰여진 것이 성경이고,
선교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 성경은 선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 신학자가 이러한 내용을 설명해서 그림으로 만든 것인데,

「우리의 선교적 상황이라는 것은,
그리고 선교적 상황을 형성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우주와 세상은,
하나님의 신적인 드라마를 상연하는 무대다... 이렇게 볼 수 있다면,
하나님은 존재와 행함에 있어서 선교하시는 분이시며,
그분의 생각과 그분의 성품을 설명하고 있는 성경 역시도 선교적일 수밖에 없고,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은, 선교하는 백성일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이 이 학자의 주장이고, 저는 격하게 공감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설명드립니다.
‘제1의 종교개혁이 만인 제사장론을 이야기했다면,
제2의 종교개혁이 우리 가운데 필요하다면 그것은 만인 선교인론일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제사장적 존재이지만, 모두가 제사장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모두가 저처럼 풀타임으로 고유한 직임과 소명으로서 선교사로 파송받는 것은 아니지만
더 큰 의미는 ‘선교인’입니다.
그러니까 저 역시도 선교인이고,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선교를 통해 태어났고,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즉 ‘우리 모두가 보냄 받기 위하여 부른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되지만,
우리의 주된 무대는.. ‘흩어지기 위해 오늘 모인 것이고,
우리는 오늘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파송받는 선교인이다’ 라는 그 정체성이
우리 가운데 분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설교가 조금 더 여러분들에게, 깊은 공감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부름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보냄을 위한 부름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그리고 사랑하셨다,
그 진리는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니’
참 놀라운 바울의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개시를 통하여,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성과, 그 완전성을 인해 감동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왜 나를 선택하셨을까?’ 그것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무엇을 위해 선택받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음이 놀라운 특권이지만,
불순종하는 세상에서, 고뇌 속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책임과,
선교는 동떨어질 수 없는 우리의 선택임을 다시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레슬리 뉴비긴 은 ‘선택은 구원의 확신을 위한 교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보냄을 받고자 부름받은 교회가
선교적 공동체이며, 선교적 교회라는 것을 함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창세전에 선택하신 그 하나님의 그 부름의 그 소원 안에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꿈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책을 남기지 않으시고, 열두 제자를 남기셨다.’
이 말은 굉장히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왜 이 시대에 성경을 번역해서 성경만 보내면 되지,
왜 이 시대에 여전히 선교사를 보내야 하는가요?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구현되어지는 실제적인 그 공동체를
우리 가운데 보여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증인
그렇기 때문에 단지 성경을 보내는 것으로, 재정을 보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사람이 가야 하고, 그 사람이 가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선하심을 증거하면서,
그것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저는 [선교훈련원]에서 훈련을 하고 있잖아요.
저희는 낮12시가 넘으면, ‘세계를 품는 기도’를 합니다. 한 시간 동안!
그 시간에, 그동안 졸업한 2천여 명의 선교사를 위해 기도합니다.
들려오는 긴급 기도 제목들은
‘과연 하나님은 지금도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쉬지 않고 정말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신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슬프고 아픈 이야기들이 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한 열정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가 붙들고 기도할 때,
impossible처럼 느껴졌던 여러 상황들이,
여전히 하나님은 I'm possible 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word play
우리 가운데 공명되어 들리는 것 같은 그런 경험들을 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책을 쓴 분이 있습니다.
<선교사의 회심 : 사도행전10장에 관한 선교학적 연구>
최근에 번역된 책인데, 이 책에서 '두 가지의 회심'을 이야기 합니다.
사도행대 10장을 성경적으로 그는 연구하면서
생명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영적인 회심,
여러분과 제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회심’이라는 것은 나의 죄인됨에 대한 깊은 확신,
인류는 불의와 불경건함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 라는
분명한 확신 속에서, 이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믿음... 그래서 ‘회개와 믿음’을 회심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서, ‘문화적 자민족 중심적 편견에서 벗어나는 선교적 회심이 필요하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두 번째 회심이죠.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요나와, 신약의 사도 베드로의 선교적 회심에 대하여’ 살펴보면,
대럴 화이트먼 저자가, 위 책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제 9시’ 오후 3시죠.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말은, 고넬료가 경건한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기도와 구제를 하는 사람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이르러 너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다’고
말하면서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일컬어지는 시몬을 청하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보면, 고넬료가 공식적으로 개종했거나,
개종을 하지 않았더라도, 회당 예배를 드리며
유대인의 풍습을 따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서 고넬료는, 자신의 사람들 3명을
집에서 50킬로가 떨어져 있는, 욥바라는 곳으로 보냅니다.
그때 시간은 다음 날 제6시 오후 12시였습니다.
고넬류와 같이 베드로도 유대인의 습관을 따라 기도하고 있는데,
그가 매우 배고픔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그는 무아지경에 빠집니다.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이, 땅으로 내려오는데
그 배고픈 베드로에게 ‘잡아먹으라’라는 반가운 음성이 들립니다.
그런데 너무나 황당한 것은, 유대인이 부정하게 여기는,
14절에 보면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그런 음식들,
즉 네 발 달린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과 같은 음식을
‘잡아먹으라’는 황당한 경험을 합니다.
그때 강력하게 베드로는, 자신이 평생 동안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서,
이 부정한 음식을 먹은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결코 먹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더럽다고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듣고, 세 번에 걸쳐서 실랑이를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그릇이 하늘로 올라가는 가운데,
지금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막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도착합니다.
무두장이는 가죽을 만지고, 동물의 피를 만질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인데,
어떻게 베드로가 레위기에 금지한 이러한 사람과 교제하며,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렀는지는.. 성경이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베드로라는 시몬이 있는가?’ 라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지금 이러한 장면은, 표면적으로 행10장의 말씀은 ‘고넬료와 이방인의 구원 이야기’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지만, 사실은 최초의 이방인 회심의 스토리이기도 하지만,
유대 중심적 세계관에 갇혀 있었던 베드로의 자기중심적인, 자기우월적인 감옥으로부터
자유케하는 ‘선교적 회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설교의 주제
고넬료의 회심 이야기인 동시에, 베드로의 세계관의 회심이요,
선교적 회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을 한 주제로 이야기한다면,
‘모든 성도는 선교적 회심을 해야 합니다’ 라는 주장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성도가 선교인으로 부름을 받아, 보냄받기 위하여 부름받았다면,
우리에게 있는 영적 회심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아울러 선교적 회심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그 <선교적 회심>이 무엇인가를 3가지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1. 첫 번째는 <우월주의로부터 자유케하는 회심>입니다.
감사의 뿌리가 겸손이라면, 그리고 겸손의 열매가 감사라면,
우월주의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교만의 열매 중 하나가 우월주의입니다.
아마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 교만함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이 베드로에게 오셔서,
자민족 중심주의와 '자민족 우월주의'에 빠져있는,
'부성애적 우월주의'에 빠져있는 베드로의 마음을 터치하고 계십니다.
서구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선교를 돌아보면서,
깊이 반성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부성애적 우월주의입니다.
부성애적 온정주의라고도 말합니다. *부권적 간섭 : Paternalism
오늘 베드로는 요나처럼 베타주역인 유대주의 신념에 빠져있었습니다.
왜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세 번에 걸쳐서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너가 부정하다 하느냐’
라는 이 음성을 계속적으로 들려주셨을까요?
‘유대인은 정결하고 이방인은 부정하다’는
베드로가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 그 견고한 가치에 대하여,
주님은 그 심장부를 겨누시고, 그의 생각을 균열, 해체시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행10:17절에 보면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제가 여기에서 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시몬’이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욥바에서는 요나 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처럼,
신약의 욥바에서는 오늘 ‘바요나 시몬 베드로’, 요나의 아들 시몬 베드로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선지자와, *요나
신약의 대표적 사도였던 베드로는 ‘요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일하게 구약의 욥바와, 신약의 욥바에서,
구약의 요나와 신약의 요나의 아들을 통해
지금 하나님께서는 선교적 회심을 일으키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요1:42절에 ‘내가 장차 너를 게바가 되게 하리라’
게바는.. 아람어로 ‘반석’이라는 뜻이죠.
베드로(페트로스)는, 헬라어로 동일하게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수장으로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이 베드로를
시몬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행10장 상황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이 ‘베드로’가 아닌 ‘시몬’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지금 고넬료에게 나타나시고,
베드로가 기도하고 있는데 그 환상 가운데 이제 비몽사몽 간에,
그가 정신이 돌아올 때쯤, 집 밖에 밑에서 들리는 말은
그 세 명의 그 하인과 경건한 사람이 ‘혹시 베드로라는 시몬이라는 사람이 여기에 사는가?’
묻고 있습니다. *저자가 혹은 성령님이 의도적으로, '시몬'을 거론했다는 거죠.
저는 의도적인 이 ‘시몬’이라는 이름의 등장이,
‘너의 베드로 됨은 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너는 원래 시몬이었다’는 사실을...
‘너는 원래 반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했으며...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는 경책을 받아야 했던
영적인 소경과 같았던 자임을 다시 기억해 하시는 하나님의 장치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본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의심했다’라는 이 단어는, 10:17
사면초가의 상태이며, 매우 어리둥절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환상을 보았지만, 그가 여전히 어떤 의미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 그 가치, 그 견고한 틀에 균열이 생긴 것이고,
하나님은 그 베드로의 선교적 회심을 위하여,
그의 세계관 안으로 침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와 있었고,
낯선 이방인들은 이 시몬을 찾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또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하룻 밤을 다같이 머물고, 다음날 그는 가이사랴로 올라갑니다.
50킬로나 되는 가이사랴, 열 시간 동안 계속 걸어가는 동안,
베드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이 말씀 앞에, 그가 지금 가이사랴로, 그 이방인의 집으로 가고 있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이 행동이, 자신에게도 너무나 낯선 행동인 것을...
그리고 이 이방인을 어떻게 내가 만나야 되며,
그는 굉장히 머리가 복잡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유대인 베드로에게, 로마 백부장 고넬료는 가능하면 멀리 하고 싶은 대상이었고,
유대인 열심당원을 친한 친구로 두었던 이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로마의 백부장은 유대를 점령하고 억압하는 가운데
무거운 세금으로 유대인을 괴롭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그 시대의 문화를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의 자리에 있었던 로마 백부장을 생각한다면,
지금 베드로의 마음은 너무나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드디어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자기 친척과 가까운 사람들을 이미 다 모아놓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마치 하나님을 뵌 것처럼
그는 엎드려서 베드로 앞에 절을 합니다.
그때 너무 놀란 베드로의 반응이 있습니다. ‘나도 사람이라’
유대인인 그가 이방인의 몸을 잡아 일으키고 있습니다.
율법의 가르침대로라면, 지금 대표 사도가, 초대교회의 수장이던 베드로가,
그를 이렇게 이방인을 붙잡고, 그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가 28절에 이야기하는 것이죠.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은 위법인 줄을 내가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그냥 본능적으로 이 만남 자체가 위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셨기에 부름을 사양하지 않고 왔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세 차례의 환상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그 설득 앞에
순종하고 있는 베드로는.. 선교적인 회심의 자리로 가고 있습니다.
아까 제가 소개한 책은, 문화인류학자이며 또 선교사인 그가
40년 이상을 선교사들을 훈련하면서, 다문화권에서 살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선교사의 회심 : 사도행전10장에 관한 선교학적 연구> 대럴 화이트만 저.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르시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적인 삶을
추구했을 때, 나와 다른 그 선교지 원주민들과의 관계 안에서 다른 정체성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만 내 삶에 남는 것을 경험했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와 나는 급이 달라’ 라는 영적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베드로가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차이점을 늘 인지하고 살았던 그가
‘나도 사람이라’ :26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지금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적 존재, 여러분들과 제가 그리고 선교인으로서 부름을 받아 보냄 받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넘어야 하는,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우월감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지금 이 본문에서는 민족주의적 우월감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우리에겐 어떤 월주의가 있을까요?
여러분이 선교지에 가면, 여기 권사님이 인도네시아에 오셨죠.
그때 권사님의 연세가 한 60대 초반 이셨죠.
그런데 권사님을 바라보는 인도네시아 사람은 40대로 보았을 것입니다. 보통 그렇게 봅니다.
한국인은 이렇게 피부가 하얗고.. 그쪽은 이제 피부가 늘 햇빛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검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혈통적 우월주의’라는 것도 존재합니다.
어쩌면 ‘한국 사람만큼 흑인에 대한 선입관을 가진 나라가 드물다’는 이야기를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치적 우월주의’도 있지 않겠습니까?
코스타리카에 주강순이라는 철학과 교수가 1년간 가서 지낼 때,
한국 선교사님들이 코스타리카 사람들을 그렇게 좀 약간 무시하더라는 거예요.
경제적으로 저희가 더 나으니까요.
그런데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유럽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혈통적으로 자신들은 스페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도 한국 사람을, 아시아 사람이라서 무시하니까
서로 무시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외 어떤 우월주의가 여러분 안에는 있습니까? ‘외모 우월주의’
거울 보면서 엄청 은혜 받으시는 분들 있죠?
거울이 막 말을 걸잖아요.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니? 보고 있으면서도 누군지 모르겠니?’
우리 안에는 진짜 바늘구멍만 있으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우월주의를 느낍니다.
일본 선교사님들은, 보통 일본에 가면 경제적으로 우월감을 느끼기가 좀 어렵습니다.
다 자신들보다 잘 살거든요. 그런데 이분들 안에 ‘영적 우월주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왔거든.. 너희는 그리스도인이 별로 없잖아? 우리 한국은 기도하는 나라야’
이렇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런 우월주의 속에 있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초청의 말씀, 선교적 회심을 요청하고 있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선교적 존재라면, 선교적 존재는 누구인가?
1)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마중물이다’ *위 사진 왼쪽에서 첫번째
한 바가지의 물을 부으면, 끊임없는 생수가 그 안에서 나오죠.
2) 선교적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디딤돌과 같은 존재다.
단순한 통로가 되어지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디딤돌...
3) 그리고 그 다음 사진은 잘 표현할 수가 없어서 이 사진을 가져왔는데
‘소리’입니다. 소리는 있다가 곧 사라집니다.
내가 실체가 아니어도 괜찮은 겁니다.
4) 그리고 그 다음 사진은 ‘스페어 타이어’죠.
한 신학자는 스페어 타이어를 가져와서,
‘사도 바울이 18개월 동안 고린도 교회를 섬겼지만, 그는 운전대를 잡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스페어 타이어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스페어 타이어인 자신이, 그것마저도 사용되지 않기를 원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고린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편지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바울 자신이 없어도,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세워져 가기를 원했다는 뜻인 듯)
5) 그 다음은 놋뱀 사건이죠?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존재라는 뜻이죠.
6) 마지막 사진은 비계입니다.
모든 건물을 건축할 때는, 비계가 먼저 세워집니다.
그러나 외벽이 다 완성되면, 비계는 바로 사라집니다.
선교는 그런 것이라는 거죠. 결국 철수되는 존재입니다.
어떤 선교사는 그래서 ‘선교사의 안락사’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처음 들어갈 때부터 우리는 어떻게 빠져나올지를 고민해야 한다’
저는 선교적 존재인 우리들의 삶의 태도,
복음의 잇대어 ‘선교적 존재인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이러한 그림들로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죠.
‘선교는 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어디에서 빵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김철수 선교사님은 ‘선교는, 타인의 삶에 겸손하게 방문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적 존재는 누구이냐?
저는 우리 선교사님들에게 늘 이야기합니다.
「선교사는 학생입니다.
선교사는 환자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는 질문하는 사람으로 선교지에 갑니다.
선교사는 손님으로 가서 겸손하게 행동하지,
남의 집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선교사는 그리고 수혜자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주러 give 선교하러 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선교사는 엄청난 수혜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최근에 삿포로로 단기 선교를 가는 분들에게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일본으로 가기 때문에 일본어로 익살스럽게 말씀해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인가를 이렇게 그들에게 전할 때,
‘이 어깨에 후까시뽕 잇빠이 잇빠이 데스네’ ..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죠.
우리가 무엇인가를 전할 때 힘이 들어가잖아요.
받는 사람의 마음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 안에 있는 바늘구멍만 있어도 찾아 들어오는 뭔가 모르는 그 우월감...
저는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 앞에서는 좀 겸손해집니다.
그런데 왠지 동남아에 가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여러분은 안 그러신 것 같고, 저만 그런 것 같은데...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주님은 선교적 존재인 여러분들을 초청하시면서,
‘이 복음은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의 경계를 건너 이 땅에 오심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He made himself nothing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전 삶을 통하여,
우리의 삶 속에 우월주의가 자리할 틈을 주어서 안 되는 분명한 이유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선교인으로서 여러분들과 저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우월주의로부터의 회심'을 다시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지속적인 성찰로의 회심>입니다.
베드로는 ‘사람을 외모로 하나님은 편벽되이 취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며,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다’ 라고 말합니다. 행10:34~35
베드로는 지금 무엇인가를 깨닫고 있습니다.
여기서 ‘깨닫다’라는 단어의 원어의 의미는
‘위로부터 아래로’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어를 붙여서 *kata
‘하늘로부터 빛을 비추다, 이해하고 파악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카타람바노, perceive
그런데 '깨달았다'는 단어는 현재형입니다. 계속 진행되고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욥바에서 가이사라로 건너가기 전부터,
그가 9시(오후 3시)에 지붕에서 기도하였을 때 들었던 보았던 환상과, 주님의 음성과 함께,
그는 계속적으로 그 안에 어떠한 성찰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빛이 베드로의 그 지성 가운데 지금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신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 복음의 영광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어쩌면 그는 영적인 회심은 이미 경험했지만,
선교적으로 (회심하지 못하여) 맹인과 같은 그의 심령 속에,
주님이 지금 찾아오셔서 깨닫게 하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외모로 주님이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받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이거나, 공로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10:34~35
이방인을 속되다고 여겼던 ‘자기 확신’의 그 오류를 성찰하는 데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복음은 한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고백이기도 하고,
마치 무슬림 권에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얀 십자가, 빨간 십자가(의 환상을 보고),
그러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들이, 종종 저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발생함을 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고,
썩지 아니하는 이 말씀을 통하여 회심에 이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찾아가시고,
‘선행하시는 그 은혜’에 대하여 지금 35절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속적인 성찰로의 회심’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시고 우리를 대하지 않으신다라는 이 말씀은
너무나도 놀라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미리 아시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 두시고
미리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이 놀라운 복음을 다시 그는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그 확신들이 깨어지면서,
‘나도 너와 같은 사람이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모든 사람들을 보게 되어지는...
불교인이든, 힌두인이든, 아니면 구도자이든, 불신자이든...
그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그는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20세기에 한국에 왔던 제임스 게일 선교사는
‘상놈’이라고 일컬어졌던 그들을 보석으로 여겼고, 그들을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혼한 여성들이 가슴을 다 드러내고 다녀서
한 선교사는 천을 가지고 나눠주면서 그것들을 가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애 젖 먹임
그러한 여성들을 보면서 그는 ‘극동의 가장 품위 있는 여인’으로 고백했습니다.
만신전과 같이 온 땅에 있는 것들을 신적 대상으로 여기고 두려움에 사는 그들(조선인)을,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했던 이런 선교사들의 이 시선은
영적 우월주의로부터의 자유함뿐 아니라
복음이 가져다 준 새롭게 된 시선을 가지고 한 사람을 바라보았던,
그러한 고백이었음을... 우리는 여러 책들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모든 사람을 받으신다’는 이 의미는, 10:35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이들을
받으실 준비를 하고 계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바울은 자신이 선교지 가이사랴에 발을 내딛기 전부터,
하나님은 이미 일하고 계셨고, 유대인 가운데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온 열방 가운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인도네시아 남부 수마트라 팔렘방에서 지냈는데,
제가 그곳에 가서 정말로 깊이 확신하였던 것은
‘하나님은 제가 가기 전부터, 그 땅에서 쉬지 않고 일하고 계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스카위 라는 지역으로 한 4시간 운전하며 가면서,
‘하나님, 한 번도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린 적이 없는 이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런 땅이 되게 해달라고’ 혼자 막 기도하면서 갔는데,
어느 날 문득 저는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온 만물이 하나님이 영원하신 신성과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제가 가기 이전부터, 그 땅 사람들을 보시고,
그 땅을 위해 기도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부분에서 우리가 아주 주목해야 될 한 단어가 있습니다.
한 단어가 계속적으로 반복되는데, ‘판타’라는 헬라어인데, ‘모든, 전부’라는 뜻입니다.
3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두 받으시는 줄 알았다’
36절에 ‘만유의 주, 모든 이들의 주이시다’
39절에 ‘자신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모든 일의 증인이다’
43절에 ‘모두가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44절에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의도적으로 ‘판타 (모두)’라는 이 헬라어가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가 지금 ‘깨달았다’라는 이 단어가,
하늘로부터 아래로 내려온다라는 그 접두어를 붙임으로써,
어두운 우리에게 위로부터 빛이 임함으로, 계속적으로 성찰이 일어났다는 의미와 더불어서,
이 단어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베드로가 지속적으로 복음 앞에서,
이전에 이해했던 복음과 다른 차원의 광대한 복음, *판타
‘내가 예전에 알았던 그 하나님은 얼마나 작은 하나님이었던가’를 다시 깨우치면서,
‘만유의 주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신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그가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깊이 알아간다는 것은, 이러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를...
내가 과거에 알았던 하나님은 너무나 작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그래서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계를 넘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 수 있다면,
우린 그것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찰은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런 단어를 간혹 쓰거든요. ‘성찰하는 실천가’
원래 교육학에서 나온 표현인데, 여러분 성찰이 없는 실천, 실천이 없는 성찰은,
어떤 결과를 갖고 올까요?
우리가 실천을 하는데, 굉장히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하는데,
복음으로 인한 성찰이 없다면, 우린 굉장히 맹목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반대로 우리가 성찰은 하는데, 복음을 듣긴 하는데,
우리의 손과 발로 한 번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복음은 굉장히 공허한 복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런 선교학적인 반성과 성찰은, 복음으로 인한 성찰은,
여러분과 제가 선교적 존재로서 순종하는 여정 속에서
우리의 삶과 사역을 순전하게 하고, 정화시키고,
그리고 건강하게 강화시킬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복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 *성찰
오늘 베드로가 경험했던 것처럼, 지속적으로 깨닫는 것,
하늘로부터 우리의 어두움을 비추시는 이 복음의 진리가 그의 지성 가운데에 임했을 때,
그는 이 진리로 말미암아, 자신이 굳게 지키고 있던 전통과,
자신이 메여있던 그 좁디좁은 인식의 세계 속에서 자유케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 여호와의 빛이 그의 의지 가운데 임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발걸음을 직접 옮기게 되어집니다.
▲3. 또 여호와의 빛이 그의 감정 가운데 깊이 임했을 때, 그는 어떠한 일들을 경험할까요?
그것은 세 번째, <경계를 넘어 환대로의 회심>을 그는 경험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빛이, 그 영광이, CS 루이스가
'지적인 영역과, 감정적인 영역과, 의지적인 영역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을 때,
우리의 인식의 변화뿐 아니라, 우리의 윤리와 실천의 변화들을 어떻게 가져오는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저는 여호와의 빛과 이 진리가, 오늘 베드로에게 임했을 때,
그가 자민족 중심주의라는 그 좁디좁은 세계관으로부터
그 '진리가 자기를 자유케 하는' 것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그는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의 의지에 임할 때,
박약했던 우리의 순종 의지가 강건하게 되어서,
기꺼이 그 말씀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게 되어지는...
고넬류의 집으로 그의 발걸음을 옮기게 되어지는, 그러한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말씀 안에 보면 환대의 장면은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베드로가 잠을 잡니다. 거기에 유숙했습니다.
저는 '무두장이 시몬의 환대'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넬료의 하인과 경건한 사람이 와서, 하룻밤을 또 그 집에서 묵었습니다. 이것도 환대죠.
고넬료를 향한 베드로의 환대 hospitality뿐 아니라,
베드로를 환대 hospitality 하는 고넬료의 환대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특별히 행10:44~48절에 보면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성령님의 환대’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경계를 넘는 삶 속에 수반되어야 하는 환대에 대하여,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환대라는 단어 hospitality는, 이게 hospital 병원이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그래서 환대는 치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환대는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과 사역의 가장 큰 목적이자 원천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환대 hospitality입니다.
환대는 하나님의 사랑에 잇되어 있고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은 환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이자 제자의 가장 큰 증거 중에 하나는, 환대입니다.
환대는 세상을 향한 복음의 가시적인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게 하는 하나의 통로가
성도의 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성경에서는 ‘부지 중에 성도들이 천사와 예수님을 대접(환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히13:2
마25장에서는 '환대'는 양과 염소를 나누는
구원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처럼 비추어지기도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제가 매일 하나님의 환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환대 없이는, 오늘의 새 하루가 우리에게 없었을 것이고,
그 환대가 아니면, 이 자리에 여러분과 제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단 한 순간도 그 환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자라는 사실과,
이 환대를 깊이 받아본 사람들만이, 다른 사람을 환대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 자체의 환대에 대한 선포이자 외침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전생애를 한번 보십시오.
삭개오에게, 혈류병 환자에게, 눈먼 자에게, 병든 자에게, 거라사의 광인에게,
어린아이에게 찾아가셨던 예수님의 그 한 땀, 한 땀 배어있는
그 예수님의 말과 행동 속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 따뜻한 환대가... 그 사람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성경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대는 회심의 증거입니다.
영적 회심의 증거일 뿐 아니라, 선교적 회심의 증거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오늘 누군가를 극진한 마음으로 만나고 대접하는 삶,
그리고 내가 오늘 만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 직장과, 그 학교와, 가정에서 우리의 삶 환대의 보여주는 것,
그것은 내가 선교적, 성육신적 회심을 경험하고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환대가 나를 치유하고, 여러분과 저를 온정케 한 것처럼
우리의 환대는 치유와 회복을 불러옵니다.
베드로의 환대는,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그리스도의 환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닐까요?
세 번에 걸쳐서 설득하시고, 직접 말씀하시고, *요21장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할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던 그 환대가,
베드로로 하여금 반석과 같은 존재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환대의 사람으로 만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 환대 속에서 그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야 했고, 고넬료의 집에 가야만 했습니다.
엄격한 유대인의 정결규례에 어긋나는 것을 감수해야만 했고,
어쩌면 그는 그곳에서 머물면서, 주인이 주는 것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아가서,
‘너는 나의 메시지가 필요하다’는 주도권을 내려놓으시고,
반대로 도움을 받는 수혜자의 위치에 서서,
자신의 피곤함과 목마름을 그에게 부탁했고, 그에게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제가 선교적 존재로서 ‘무엇인가를 돕고 준다’라는
어떤 영적인 우월감 속에서가 아니라, 정말 겸손하게...
사실은 그들이 존재함으로써, 이 땅에 많은 이주민들이 옴으로써,
한국교회의 본질인 선교적 사명을 일깨우는 존재로서,
어쩌면 여러분들이 직장과 또 학교에서, 또 동네에서 만나는 그 어려움을 통하여,
‘내가 선교적 존재로서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다시 깨닫고,
주님 앞에 도움을 구하게 되고,
그 가운데서 나의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케 하시는 그런 수혜자...
그래서 저는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너무나 많은 복을 받고 있고, 누리고 있다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베드로와 요나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지금까지도 계속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신약까지... 진짜 선교의 장애는 누구였을까요?
경계를 강력하게 형성했던 사람들은 누굴까요?
앞서 말한 선지자 요나이며, 사도 베드로이고,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복음의 장애물은... 어쩌면 세상이 아니라,
선교사를 포함한 선교인, 교회일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경계’라는 주제를 생각하면서,
외적인 경계, 물리적인 경계뿐 아니라,
선교적 존재로 부른받은 성도인 우리 자신 자체가,
‘그 경계 자체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러한 표가 있더라고요.
베드로와 요나에게는 ‘자민족 우월주의’ 라는 우상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리고 성도들, 선교인이라고 부르는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우상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고전3장에서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흔들릴 수는 없지만, 빼앗기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의 모든 이 땅에서의 사역은 불로 시험을 당할 것인데,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이 타지 않을 것들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아닌,
인간적 기초 안에서, 우리가 추구했던 모든 일들은,
나무와 풀과 지푸라기처럼 타서 없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손해를 입힐 것이다’ 라고
바울은 의도적으로 강조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메신저로서, 중간적 선교인으로서, 우리가 텍스트의 문제가 아니라,
이 텍스트가 메신저인 여러분과 저를,
(세월이) 지나면서 왜곡되고 비틀어지는 일들이 너무나 자주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메신저인 요나와 베드로의 우상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메시지가 왜곡되고 있는 것이죠.
‘나는 너와 다른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거죠.
요나의 첫 번째 정체성은 무엇이었습니까?
‘너는 누구냐?’ 라는 선원들의 질문에,
‘나는 유대인이다’ 그의 제1정체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정체성이었던 것이죠.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해야 하며, 자신의 정의관이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자기 통제’라는
우상을 갖고 있었고, 이방인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그 박넝쿨 앞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보다도,
자신의 편안함과 안락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우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베드로는 공동체 내에서의 인정,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지켜온 종교적 정결함을 잃지 않으려는...
그런 두려움 속에 있었고, 자신의 우월적 위치를 소중하게 여겼던...
그래서 실제로 이러한 선교적 회심에도 불구하고,
갈2:11에 보면,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고 있는데,
야고보가 보낸 할례파 사람들이 방문하자,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해버리죠.
그렇게 지독한 것이죠. 이런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우상들은,
우리가 가진 이 아름답고 선한 메시지를 왜곡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런 우상의 문제와, 우리가 계속적으로 싸워가고
이것들을 극복하지 못할 때
선교적인 복음으로 인한, 선교적 회심이 일어나지 못할 때,
우리는 남보다 낫다고 인정될 때 나의 가치를 느끼는
그런 ‘인정받음의 우상’과 ‘성취를 통해 타인을 내려다보는’ 교만을 추구하고 싶은
그러한 성공과...
타인을 내 기준에 맞게 변화시키려고 굴복시키려고 하는 힘의 욕망과...
타자를 환대하고 경계를 넘을 때마다 경험하는 불편함과 낯섦을 견디지 못한 채
경계를 넘지 않는 편안함에 주저앉아 버리는 (내 마음의) 우상들...
그리고 내 맘대로, 내 멋대로 하고 싶은 ‘통제의 우상’들을,
우리가 일상에서 복음으로 인한, 이러한 선교적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여러분과 저에게 맡겨주신 선교적 존재로서의 이 메시지는,
여러분이 받아들이기에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는 세 가지 회심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첫 번째는 우월주의로부터의 회심이고
두 번째는 지속적인 복음이 낳은 성찰로의 회심이며
세 번째는 경계를 넘어 환대로의 회심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선교적 회심의 뿌리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셨던 그의 전 삶은,
우리로하여금 ‘우월주의로부터의 회심’으로의 초청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열망하게 합니다.
주님은 외모로 우리를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미리 아시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두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한 그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지속적인 복음의 그 깨달음으로
‘우리가 한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그 회심으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르고 건너오신 주님이, 우리와 한몸을 이루셔서,
우리의 슬픔과 기쁨을 같이 하셨던 그 주님의 전 삶은,
경계를 넘는 삶이셨고, 경계를 넘을 때마다, 그는 환대로 우리 가운데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론으로, 우리가 주님을 깊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이 땅을 사시면서 ‘어떻게 살아오셨는가?’
주님은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로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은 이 땅에 오시는 그 순간부터
끝까지 선교사의 삶으로 이 땅을 사셨습니다.
그의 삶이 우리에게 선교적 회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삶을...
우월주의로부터, 그리고 많은 우상으로부터,
그리고 경계를 넘을 때마다 우리가 감수해야 되는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또 좌절하고 절망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했던 말씀을, 여러분이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혹시 ‘펠릭스 쿨파’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행복한 허물, 행복한 타락, 행복한 취약함’이란 뜻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경계를 넘으려고 한다면, 선교인으로서의 삶을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이 연약함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경계를 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 나의 연약함을 직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선교인으로 부름받아, 보냄받기하여 부름받은 존재로서
오늘 세상의 한복판에 빛과 소금으로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 가운데 경험하는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과,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기억하기를 원하실 것 같습니다. ‘펠릭스 쿨파’
그 연약함이, 그 연약함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더 의지하게 하고,
그 연약한 가운데, 또 우리가 감내해야 되는 그 고통 가운데,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악의 문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사랑이 없는 존재인지를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인가를,
그 어려움 속에서 경험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이라는 사람의 한 문장을 읽고 같이 기도하기 원하는데요.
‘우리가 양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늑대 1천 마리에 에워싸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정복하고 승리한다.
그러나 우리가 늑대가 되는 즉시, 우리는 패배한다.
우리는 늑대를 기르지 않고, 양을 기르는 목자의 지지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가 세상이 누구나 이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 그 우상의 방식대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인정과, 성공과, 편안함과, 그 통제라는 이 세상의 방식과 다르게,
어린 양이신 주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것처럼, 주님의 어린 양으로 남아있는 한,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는 한... 우린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영광이, 그 하나님의 진리가,
베드로의 지성을 새롭게 함으로 그를 자유케 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그의 의지를 새롭게 함으로, 그가 선행과 순종으로 그들에게 나아갔던 것처럼,
그리고 그 여호와의 빛이, 베드로의 마음을 어린아이의 살과 같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만들어
그를 따뜻한 환대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행하신 일들, 그리고 이 땅에서 보여주신 그 일들을
이 시간 좀 생각하면서, 주님께 감사하고
또 우리의 선교 여정 가운데
나를 빚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하나님, 우리가 이 선교적 회심으로의 초청의 자리에서
제가 순종하며 주님 의지하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한번 기도하고 싶습니다. 기도합시다!
남경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