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21 – 두 감람나무 (2021.03.07 주일예배)
◈두 감람나무 슥4:11~14, 계11:3~6 2021.03.07. [스가랴21강]
*좀 길지만, 중요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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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스가랴서 4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스가랴서 4장은 스가랴가 보았던 8개의 환상 중에 5 번째 환상입니다.
‘금촛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을 보죠.
금촛대는 메노라라는 이스라엘의 상징인데,
금촛대를 보는데 금촛대에 불이 켜져 있고,
금촛대 양옆에 두 감람나무가 서 있습니다.
원래 금촛대를 밝히는 기름은, 감람유를 가지고 밝힙니다.
원래 성전에서 쓰는 기름이 감람유인데,
그 감람열매를 사람이 따서, 기름을 짜서, 매일 매일 기름을 공급해서
성소 안에 등잔대에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요.
그런데 이 환상에 보면, 사람의 힘으로 짜서 갖다 놓는 기름이 아니라,
아예 감람나무 두 그루가 옆에 서 있고, 거기서부터 금으로 된 관이 연결돼서,
끊임없이 기름이 공급되는 그 환상을 봅니다.
▲이 다섯 번째 환상의 내용은 ‘우리의 힘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능력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사람에게는,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그 진리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힘이 없어요. 무기력하고, 우리는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며,
또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근원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라는 것이
이 환상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4:6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환상의 의미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계속 교회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촛대’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했죠. 계1:20
교회 또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거라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또 신약에서는 교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끊임없이 능력이 공급되고,
끊임없이 생명과 능력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는 것이.. 이 환상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 교회를 살아있게 하고, 교회를 깨어있게 하고,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은,
사람의 힘도 아니고, 사람의 능력도 아니고, 사람의 지혜도 아니고, 사람의 전략도 아닙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교회를 살아있게 하는 것은,
끊임없이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는 거예요.
끊임없이 일하시는 성령의 능력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성령님이 함께 하셔야 돼요. 교회는 반드시 성령님이 함께 하셔야 돼요.
그럴 때 교회(의 촛대)에 불이 켜지게 됩니다. *구약은 '등(잔)대', 신약은 '촛대', 같은 말
그럴 때 교회가 생명을 가지게 되고, 그럴 때 교회가 능력을 행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이 성령의 일하심이 그쳐서, 인간의 힘으로 계속 교회를 유지하고,
인간의 지혜로 계속 무언가를... 그건 불 꺼진 교회예요. 교회인데 교회가 아니라는 거예요.
교회의 본질인 생명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교회 가운데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인 줄 믿습니다.
교회 가운데 정말 있어야 될 요소를 딱 하나만 꼽는다면,
딱 하나만 선택해야 될 것이 있다면... 저는 이것이라고 믿습니다.
성령님의 역사!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임재예요.
다른 건 좀 부족할 수 있어요. 전략이 부족할 수도 있고, 지혜가 부족할 수도 있고...
부족할 수 있지만, 생명을 있게 하는 것은, 생명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함께 계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함께 계시면... 다른 건 좀 부족할 수 있더라도, 생명이 살아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하시면... 다른 건 좀 어설플 수 있어도,
우리 안에 생명이 살아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교회가 정말로 딱 하나,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다른 건 다 놓칠 수 있어도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것 하나가 있다면,
성령께서 일하시는 성령의 임재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이기를 힘쓰는 것 아닙니까?
물론 뭐 교회가 감당해야 될 사명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도 돼야 되고, 또 세상에 영향력도 미쳐야 되고,
세상의 질서도 의롭게 바로잡아야 되고... 분명히 우리에게 사명이 있어요.
그러나 사명은, 생명이 있을 때,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생명이 없는데 무슨 사명을 이루겠습니까?
생명이 없을 때, 열심히 교회 일 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지,
성령께서 일하시는 그 내적인 힘이 없이 열심히 교회 일만 하는 것은..
그게 인간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일은 철저히 무기력한 인간 가운데...
무기력한 인간이라는 것은, 죄를 행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봤듯이, 인간은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어요.
인간은 죄를 행할 수 있는 능력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 인간이 열심히 일한다고 하는 것은,
계속 죄를 쌓아가는 것뿐이에요.
자기 의를 만들어가는 것이고, 자기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사명을 감당하기 원한다면,
1차적으로 우리 안에 생명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코로나 바이러스에도 불구하고 *2021년 설교
어떻게 하든지 모이려고 힘쓰는 것은,
모일 때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우리 안에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함께 모여 기도할 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그들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함께 거룩한 성회로 모여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걸 우리가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의 생명은요, 사실은 예배로부터 옵니다. 사실은 예배로부터 와요.
그 예배가 얼마나 살아있는 예배인가? 거기서부터 교회의 생명이 결정되는 거예요.
예배는 그냥 단순히 모이는 요식행위가 아닙니다.
그 예배 가운데 생명이 풀어지기 때문에,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는 거예요.
그 예배 가운데에 성령께서 우리를 터치하시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말씀하시고,
예배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하시기 때문에, 그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예배 가운데 우리 안에 생명이 풀어질 때,
생명의 불이 붙을 때, 그 힘을 가지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거죠.
불이 꺼졌는데 무슨 세상을 밝히겠습니까? 밝힐 빛이 있어야, 세상을 밝히는 거 아닙니까?
우리 안에 불이 켜져 있도록 힘쓰는, 올 한 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4장의 제일 후반부, 다섯 번째 환상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두 감람나무’에 대한 것입니다. 슥4:11~14
그렇다면 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어디서부터 올까요?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가 묻습니다.
‘금촛대에 기름을 흘려주는 이 두 감람나무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불이 들어오게 하는 그 기름을 공급하는 이 두 감람나무,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죠.
슥4:11 ‘내가 그에게 물어 이르되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12 다시 그에게 물어 이르되, 금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니’
여기서 ‘기름’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불이 켜져있게 하는, 생명을 살아있게 하는 성령님의 역사예요.
그렇다면 두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성령님의 역사)이 계속 흘러들어오는데,
그렇다면 그 성령의 역사를 있게 하는 근원,
성령의 역사가 흘러들어오게 하는 두 감람나무와 가지는 뭐냐고 물어보죠. 4:12
즉 성령의 역사가 교회 가운데로 흘러들어오게 하는 통로, 그게 뭐냐는 거예요.
이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4:13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는지라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14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그래서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두 감람나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두 감람나무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이 두 감람나무는 앞서 언급했듯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게 되는 어떤 통로이며,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시작된 어떤 시작점이죠.
그것이 두 감람나무인데, 학자들에 의하면 이 두 감람나무는
적어도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고, 상징될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스가랴 당시에 이 두 감람나무가 무슨 의미를 갖느냐?
스가랴에게 주어진 환상은.. 먼 미래와, 마지막 때만을 상정하는 환상이 아니라,
그 당시에 주는 메시지가 있거든요.
그러면 그 당대에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게, ‘두 감람나무’는 무엇을 의미하고 상징하는가?
그 당시에, 스가랴 당시에 대한 해석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상징한다는 거예요. :14
4:14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스룹바벨은 왕(총독)으로서 기름부음 받았고,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죠. *왕, 제사장, 선지자는 기름부어 세우죠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그래서 이 하나님의 백성을 살아있게 하고
또 하나님의 백성인 사명인 성전재건을 완수하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두 기둥,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이 두 사람을 두 감람나무라고 말합니다.
두 감람나무가 이 두 사람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어요.
▲2. 두 번째,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교회에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생명을 주고 능력을 공급하시는 분은 누구신가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왕인 스룹바벨, 이 둘을 합쳐놓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죠.
왕이시며 제사장이신 분,
제사장인 여호수아와 왕적 사역을 감당하는 총독 스룹바벨을 통해 기름부으심이 흘러온다면,
이 두 개를 한몸에 지니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시죠. 제사장이시면서 왕이신 분!
그래서 이 두 감람나무가 원론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교회에게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름부으심이 교회 가운데로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거기서부터 생명과 능력이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그 말씀을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요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거기서부터 힘을 얻게 되고,
거기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거예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너희 안에는 하나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어.
너희는 그냥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만 남아있는 타락한 존재야.
그래서 나에게 접붙어 있을 때, 나에게 붙어 있을 때,
나로부터 생명이 흘러가서 너희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거야’
이 말씀을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스가랴서의 메시지랑 동일한 메시지라는 거예요.
스가랴서에 등장하는 두 감람나무도.. 예수 그리스도 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그분께 우리가 붙어 있을 때, 거기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예수께 붙어 있을 때 거기서부터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아서
교회(촛대)에 불이 들어오게 되는, 교회에 생명이 공급되게 되는... 그것을 얘기합니다.
▲3.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세 번째 해석이 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중에 하나를 골라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다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거예요.
예언이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 그렇죠. 예언은 항상 다중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예언을 받는 당대에 의미하는 바가 있고,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후대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고,
-또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오기 직전에 해당하는 메시지가 있고,
이런 식으로 다중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해석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중에 하나가 옳고 나머지는 틀리다..
이런 말이 아니라, 이렇게 세 가지를 다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해석은, 계시록에 보면, 두 감람나무가 다시 한 번 등장합니다. 계11:3~6
그런데 이 계시록 말씀을 보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아닌 것은 분명하고요.
계시록 말씀에 나타나는 두 감람나무를 ‘예수 그리스도’ 라고 해석하기도 애매합니다.
계시록 11:3~6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이 계시록 말씀은,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때’는, 꼭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 얘기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전체 기간을 의미한다고 했죠.
즉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신약시대 교회시대가, 마지막 때라는 거예요.
계시록은 그때 주는 메시지입니다. 신약시대에 주는 메시지인데,
이 기간 동안에 두 감람나무가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두 감람나무는 스가랴에서 얘기한 두 감람나무인 게 거의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표현도 거의 같아요.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라고 그랬어요.
스가랴서에서도 ‘두 감람나무는 주 앞에 서 있는 자이니라’ 이렇게 얘기하죠. 4:14
스가랴서의 말씀을, 계시록이 그대로 인용해서 따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계시록에 두 감람나무가 무엇인가 보면,
이 계시록에서 사용하는 숫자들은 묵시문학이라고 해서,
그 당시에 많은 그런 종류의 문학들이 있었는데, 거기에 숫자에 다 의미들이 있습니다.
3은 하나님의 숫자고, 4는 세상 (동서남북 땅의 사방) 이런 식으로 다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2가 무슨 숫자냐면 공동체의 숫자예요.
2는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그래서 공동체의 숫자라서,
항상 2는 묵시문학에서는 ‘공동체 또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두 증인’이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의 백성', 계11:3
그러니까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공동체’ 이런 뜻이죠.
그래서 ‘두 증인’이라고 했을 때는 교회를 얘기하는 거예요.
자 그런데 두 증인이 뭐라 그래요?
‘이는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래요. 그리고 두 촛대래요. 계11:4
‘둘’이라는 것도 교회에 대한 상징이고,
‘증인’이라는 것도 역시 교회에 대한 표현이고,
뿐만 아니라 ‘촛대’가 뭐라고 그랬어요? 역시 교회에 대한 상징이라고 그랬어요. 계1:20
그러니까 여기서 ‘두 증인’은 누구냐?
‘이는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고 두 금촛대니라’
이 얘기는 전부 다 교회에 대한 얘기라는 거예요.
둘이라는 것도 교회고,
증인이라는 것도 교회고,
촛대도 교회고... 전부 다 교회에 대한 얘기죠.
그러니까 이 감람나무도 뭐라는 거예요?
두 감람나무도 교회에 대한 얘기라는 거예요. *이게 세 번째 해석
두 감람나무도 교회에 대한 얘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11:3~6절까지 문맥을 보면, 이건 분명히 교회가 하는 일이에요.
세상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또 그곳에서 증언하기 위해서...
계속 하나님의 일에 힘쓰는 그게, 교회가 하는 일 아닙니까?
묘사하는 전체 흐름을 보면, 이건 뭐 교회에 대한 얘기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자 그래서 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가운데
두 감람나무가 의미하는 세 번째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그건 뭐냐면 원론적으로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두 감람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특정한 속성이 더 강하게 투영되어 있는 교회 공동체,
즉 성도들을 얘기하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맞아요.
두 감람나무는 원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두 감람나무라고 비유해서 불렀던 어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뜬금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나무야’ 이렇게 얘기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뭔가 ‘예수 그리스도를 두 감람나무’라고 얘기하려고 했던, 그 어떤 속성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시고, 교회가 몸이기 때문에,
그 동일한 속성이 교회 가운데 투영됐을 때,
그 속성을 갖고 있는 교회, 즉 사람들을,
동일하게 ‘마지막 때 두 감람나무’라고 불렀다는 거예요.
그래서 두 감람나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게 누구야? 그게 어떤 존재야?'
하는 것이 아니고, '도대체 어떤 속성 때문에 두 감람나무라고 부른 거야?'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게 핵심이에요.
‘왜 두 감람나무라고 불렀는가?’ 하는 그 어떤 속성,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떤 특정한 속성인데,
-그 속성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 감람나무라고 불렀고,
-그 속성 때문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두 감람나무라고 얘기했는데,
-그 특정한 속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신약시대 때 교회의 어떠한 면을 가지고 두 감람나무라고 얘기했는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결론적으로 세 번째 해석은 뭐냐 하면
두 감람나무는 이 교회 시대를 가리키며,
신약시대 때는 누구나 두 감람나무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교회에 속한 자이면, 누구나 두 감람나무가 될 수 있는데,
특별한 어떤 속성, 앞서 말씀드렸던 예수 그리스도를 두 감람나무라고 불렀고,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두 감람나무라고 지칭했던 그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교회의 불을 밝히는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누구든지 교회의 불을 밝히는.. 생명을 주고, 능력을 주는
그런 통로가 될 수 있는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는, 두 감람나무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세 번째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감람나무의 속성이 도대체 뭔가?
왜 스가랴는, 또 사도요한은 ‘두 감람나무’라는 상징을 사용해서
교회를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려고 했는가? 하는 그것들을 살펴볼 때,
저와 여러분 가운데도, 우리도 두 감람나무의 역할을 행하면서,
우리 안에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하고,
또 교회 안에 꺼지지 않는 생명을 계속 흘려보내는 귀한 통로가 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외적인 속성이고, 하나는 내적인 속성입니다.
◑1. <두 감람나무의 외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외적인 속성이라는 것은 뭐냐면, 왜 두 감람나무에 비유했는가요?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겉으로 드러나는 직분의 속성이 있다는 건데,
그건 뭐냐면 제사장과 왕이에요.
그래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거기에 해당됐던 거죠.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 또 그 당시에 이스라엘은 왕이라는 호칭을 쓸 수 없었으니까
왕에 해당하는 총독, 스룹바벨,
그 두 사람을 세워서 두 감람나무라고 얘기했는데,
하여간 신약 성도에게는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이 있다는 거예요.
제사장 직분... 교회의 불을 밝히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흘러오는데,
그것은 이 제사장적인 면과, 왕적인 면이, 교회 안에서 균형을 이룰 때,
그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흘러온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하나만 가지고는 불이 안 켜진다는 거예요.
감람나무 하나만 있었으면 불이 안 켜진다는 거예요. 두 개가 있어야 불이 켜지는데,
그 두 개는 제사장이며, 왕인 성도...
왜 그러냐면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그분이 우리의 머리세요.
그래서 교회는, 세상 가운데 예수님이 어떤 존재인가를 그대로 드러내야 되는 존재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냐면, 제사장이면서 왕이세요.
그러니까 제사장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존재,
구원을 주는 존재임과 동시에,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질서를 세워가는 다스리고 통치하는 왕이신,
영원한 왕이신 그분이 예수님이세요.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돼야 생명이 있는 교회겠어요?
동일하게 예수님의 제사장이고, 왕이신 것을 세상에 드러냈을 때.. 교회가 생명이 있는 거죠.
그래서 교회 안에 언제 생명이 들어오고, 언제 교회 안에 촛대의 불이 켜지는가?
교회가 제사장이며, 왕적인 사명을 균형 있게 감당할 때,
그때 교회에 불이 켜 진다는 거예요.
물론 이 두 가지 중에 아무것도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는 생명이 없는 교회겠죠.
그러나 하나만 감당한다고 해서, 불이 들어올 수 있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렇죠.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된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1. 먼저 제사장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제사장적인 속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계속 연결해 주는 게 제사장이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말씀, 기도, 예배, 거룩한 순종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계속 살아가는 것이 제사장적인 삶이죠.
그래서 이 제사장은, 성전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신약시대로 얘기하면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나 기도나 말씀이나
그런 좁은 의미의 신앙생활,
또 신앙생활을, 교회 안에서만 행하는 것이 아니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가고 빛을 발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건데,
좁은 의미의 신앙생활은 뭐예요?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를 터전으로 행해지는 거죠.
그래서 교회안에서는 순수하게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강조되고 있는 그것이
교회를 중심으로 한 어떤 좁은 의미의 신앙생활인데,
제사장적인 측면이라는 것은 바로 그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훨씬 더 강력하게 포커스를 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주 앞에 기도하고, 주 앞에 예배하고, 주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거룩함을 위해서 싸우고 하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좁은 의미의 신앙생활이
제사장적인 측면이에요. 근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2. 왕적인 측면이 있어요.
왕적인 측면은 뭐냐면, 세상 속에서 (교회 밖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장의 터전이 성전이라면, 왕의 터전은 세상이에요.
그냥 그래서 왕들은, 세상을 터전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그 질서대로 다시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그 선한 싸움을 싸워가고 다스려가는... 그런 왕적인 삶을 삽니다.
그것이 두 번째 측면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참된 교회의 기름 부으심은, 이 두 가지가 함께 갖춰졌을 때 온다는 거예요.
제사장적인.. 정말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와 정말 부르짖는 기도와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과 더불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세상의 질서를 세워가는 그 일을 균형있게 감당해 갈 때,
거기서 기름 부으심이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두 감람나무의 외적인 모습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공동체적으로도 마찬가지예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에게 제사장적인 면이 있고, 왕적인 면이 있어요.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대면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제사장적인 면이
분명히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잖아요.
왕이면서 제사장이에요.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우리 안에 균형을 이룰 때, 우리 안에 (촛대)불이 켜진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생명의 불이 들어오고, 우리 안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계속 임하게 된다는 거죠.
공동체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물론 공동체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이, 각 개인이,
이 두 가지 면을 다 갖고 있어야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는 은사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강조점을 다르게 두셨죠.
교회 안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일을 섬기도록 하신 게 아니잖아요.
각각의 은사가 있어서, 이런 제사장적인 직분으로 더 중요하게 부른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에도 보면 레위지파는 좀 달랐잖아요. 12지파 중에 레위지파는 따로 떼어내셔서
그 지파에겐 하나님께서 땅을 유업으로 주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이들의 유업은 뭐였냐면, 하나님 자신이었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성전이었고, 그것이 이 레위지파가 감당해야 될 몫이었죠.
그리고 나머지 지파들에게는 땅을 다 분배해서,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했어요.
예,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 안에도 비중이 조금씩 다르다는 거예요.
특별히 하나님께서 풀타임 사역자들로, 전임 사역자들로 부른 사람들이 있어요.
저같이 목사라거나 이런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은 세상에서 하는 일의 비중을, 훨씬 더 덜 갖게 됩니다.
반면에 왕적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서 소위 평신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인데, 저는 이 말에는 굉장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평신도’는 평범한 신도라는 뜻이잖아요. 이건 내용도 틀렸고요.
표현도 진짜 자존심 상하고 이런 표현인데,
그래도 교회 안에 지금 널리 통용되는 말이니까, 할 수 없이 그냥 그 표현을 빌려 씁니다.
그러니까 전임 사역자 말고, 평신도들이 있는데,
그분들의 터전은 교회 안이라기보다는, 교회 바깥인 거예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우리가 제사장적인 예배를 통해서,
그 안에서 충분한 하나님의 은혜와 기름부으심을 경험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는 데 모든 시간을 사용하지는 않죠.
그것은 그냥 레위지파가 준비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는 레위지파가 준비한 것을 함께 누리는 거죠.
레위지파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지파도 이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왕적인 사역을 하시는 분들이 헌금해서... 그런 경제적인 것들을 함께 누리는 거죠.
그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런 교회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 됩니다.
그래서 왕적인 부르심이 있는 분들은, 세상에서 그 선한 싸움들을 계속 싸워나가셔야 되고
제사장적인 사역에 레위지파가 준비한 그 재료를 가지고, 충분히 은혜를 누리면서도,
그 힘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세워가고, 세상 속에서 빛이 되고...
이 역할들을 감당해 가는 것, 그것이 교회 안에서 균형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계속 흘러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사실은 전임 사역자나 평신도는, 교회의 불을 밝히는 두 개의 축입니다.
전임 사역자가 평신도보다 더 우월하다? 아니요. 성경은 그렇게 얘기한 적 없어요.
그냥 직분이 다른 것뿐이지, 더 우월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나 반대로 ‘전임 사역자나 평신도나 아무 구분 없어’ 그렇게 얘기하신 적도 없어요.
분명히 다르긴 달라요. 그러나 그게 우열을 가르는, 어떤 서열을 가르는 일은 아니라는 거죠.
▲사실 교회 안에서의 어떤 서열이 있다면, 그것은 ‘영빨’에 의해서 결정돼야 돼요.
직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고, ‘영빨’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영적으로 존중하고, 영적으로 존경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직분이 목사이기 때문에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목사는 목사로서 존중해야 되는 면이 있지만,
그를 리더로서 존중한다고 하는 것은, 영발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 얘기는 평신도 가운데서 영적으로 탁월하신 분이 있으면,
당연히 그는 리더십이 되고, 당연히 그는 존중을 받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자, 어쨌거나 서열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나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존중은 필요합니다. 그건 반드시 필요해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 두 직분이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그래서 레위인들은 어떻게든지 영적인 것들을 더 많이 성도들에게 먹이려고
정말 밤낮으로 눈물로 기도하고,
또 왕적인 사격을 감당하시는 분들은, 이런 레위 지파가 굶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도록...
부자로 사는 것은 아니라도, 비참하게 살지 않도록,
그것을 책임지려고 하는 마음들이 함께 있고...
그 때 결국 교회가 기름 부으심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자, 이것이 외적인 모습입니다.
▲자, 근데 중요한 것은 두 감람나무라는 거예요.
하나만 가지고는 교회에 불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보면 교회적으로도 약간 치우친 것들을 보게 될 때가 있어요.
완벽한 균형을 갖춘 교회라는 건 사실 찾아보기 힘들죠.
보통은 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거나, (왕, 제사장 역할)두 개 다 없거나 하죠.
그런데 이 제사장적인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는 교회들 같은 경우에는, 예배가 뜨거워요.
또 그 안에 보면 기도도 열정적입니다. 교회에 에너지가 넘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은혜를 받고, 그 교회 안에서 헌신도 일어나고,
또 열정도 살아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에너지가 제사장직을 수행하는데 다 소진되는 거예요.
그래서 왕직을 수행하는데 사용할 여력이 없어요.
세상의 불을 밝힐 여력이 없어요.
이 모습은 뭐냐면, 스가랴서 본문에 비유하자면
‘여호수아’만 있고, ‘스룹바벨’은 없는 거예요.
만약에 여호수아만 있고, 스룹바벨이 없었다면 성전이 완공됐을까요?
성전을 완공하고자 하는 열정은 충만했을 거예요.
그 비전은 누가 준 거예요? 제사장 여호수아가 준 거예요.
‘성전을 재건해야 된다’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강조했겠죠.
근데 하여간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열정은 막 차고 넘쳤겠지만,
그 일을 진짜로 조직하고, 일이 되게 하는 일들은 아마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건 스룹바벨이라는 왕적인 사약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건축을) 쫙 끌고 나가서, 그 일이 되도록 한 거죠.
그래서 제사장적인 측면이 강한 교회는, 열정은 있고, 뜨겁고, 비전도 있고 다 좋은데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해요.
그러다 보면 어떻게 되냐면, 장기적으로는 불이 꺼지게 됩니다.
장기적으로는 불이 꺼지게 돼요. 왜냐하면 확장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확장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세상으로 뻗어나가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런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건강하게 이것이 계속 일어나게 되는데,
계속 내적인데만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결국엔 불이 꺼지게 됩니다.
저도 이런 경험들을 다 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제가 젊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경험했던
여러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 내적으로는 굉장한 에너지가 있고 굉장한 열정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모든 사람은 ‘다 우리 장래에 목사가 됩시다’ 이런 비전을 가지고,
학생선교단체처럼 ‘오케이, 그럽시다!’
그런데 교회가 만약 그렇게만 나아간다면,
그러면 짧은 시간 동안은 굉장히 부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런데 길게 보면 결국 그것은 붕괴되더라고요. 결국 붕괴돼요.
각자의 부르심에 맞게 우리가 삶을 살아야 돼요.
레위인(제사장)으로 부르신 사람들은, 레위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왕으로 부른 사람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된다는 거죠.
반면 스룹바벨(왕)만 있고 여호수아(제사장)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삶의 현장에선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애쓰고,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착하게 살고 선행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제사장적인 기름부으심이 없어요.
예배도 밋밋하고, 기도도 그저 그렇고... 이건 뭐예요? 인본주의 기독교죠.
이건 결국 인본주의, 사람의 종교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커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은 힘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사람의 힘으로, 인간의 의로 그렇게 움직이면서,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게 되는... 그냥 인본주의 기독교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이게 뭐예요? 불 꺼진 기독교죠. 불 꺼진 기독교!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어디서부터 옵니까?
제사장적인 직분과 왕적인 직분이 건강하게 균형을 이룰 때에
그곳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부어집니다.
이게 두 감람나무가 무엇인지를 뜻하는 외적인 요소입니다.
◑2. 반면에 <두 감람나무의 내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훨씬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데,
외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보다도 어떻게 보면 좀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인데,
그것은 내적인 속성이에요.
두 감람나무의 내적인 속성은 도대체 뭔가요? 왜 두 감람나무라고 불렀는가요?
하는 이유에 대해서 14절에 보면 이렇게 천사가 설명합니다.
슥4:14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자, 이 두 감람나무의 내적인 속성을 뭐냐면
-‘기름 부흥받은 자 둘’이고,
-‘주 앞에 서 있는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들이 두 감람나무가 됐다는 거예요.
▲1. 두 감람나무의 내적인 속성 첫 번째는, 기름부음 받은 자래요.
두 감람나무가 지칭하는 첫 번째 내적인 속성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기름부음이라는 것은 뭐냐면, 우리 안에 불이 켜져 있게 하는,
즉 내적인 영적 생명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고,
동시에 외적으로 능력이 나타나는 어떤 통로입니다. 그게 기름부으심이죠.
계11:6절은 감람나무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이 말씀은, 두 감람나무가 기적과 능력을 행했다는 거예요.
초자연적인 어떤 역사들을 행했다는 거예요.
이 땅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어떤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그것이 두 감람나무고, 그것이 있을 때, 교회 안에 생명이 돌아왔다는 거예요.
교회는 여러분 언제 생명이 살아있는 줄 아십니까?
이런 초월적인 역사가 있을 때, 교회에 생명이 살아있어요.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삶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초월적인 역사가 일어난 적이 없어요.
모든게 다 이 땅에서 설명 가능한 얘기고, 모든 게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일이에요.
그런 것만 교회 내에서 5년, 10년 일어나고 있다면,
그 교회가 여러분 영적인 불이 켜져 있을 것 같으세요?
아니요. 절대 그럴 수가 없어요.
물론 그 가운데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조금 뜸은 들 수 있게 하겠지만, 교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보니까, 교회가 영적인 생명이 살아있고, 영적으로 깨어있고
그러려면 그 안에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들이 계속 흐르고 있어요.
초월적인 역사들이 계속 흐르고 있어요. 그것이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살아있게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계시록에서 마지막 때 두 감람나무가 무슨 역할을 감당하나 보세요.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역할이잖아요.
‘두 감람나무가,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 그래서 세상의 모범이 됐더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아요.
아무리 이리 살펴보고 저리 살펴보고, 이렇게 해석하고 저렇게 해석하려고 해도,
그렇게 해석이 안 되잖아요.
이 계11:3, 4, 5, 6절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이거는 아무리 우리가 점프를 해서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려고 해도, 그렇게는 안 읽히잖아요.
이건 분명히 어떻게 읽히는 거예요?
그냥 세상 가운데 선하게 살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증인 역할을 했더라... 이렇게는 도저히 읽히지 않습니다.
이건 어떻게 읽히냐면 ‘세상을 초월한 어떤 일들을 했더라’ 이렇게 읽히죠.
그 일이 구체적으로 뭐였는지 성경에 안 나타나지만,
하여간 ‘세상은 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을 했다’는 거예요. 초자연적인 일들!
그래서 ‘두 감람나무’의 특징은 뭐냐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는 것인데,
그 기름부으심은, 세상이 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을 하게 하는 기름부으심이라는 거예요.
세상이 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을 하게 하는 기름부으심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교회는, 이 초월적...
초월적이라는 게,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뜻인데,
이 초월적인 것 중에 하나가 능력이죠. 기적을 행하거나, 병을 고치거나, 예언을 하거나...
이런 성령의 은사들이 초월적인 건데, 그것만 초월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여간 세상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것이 초월적인 거예요.
그런데 교회는 여러분 세상이 할 수 없는 초월적인 일들을 행할 때,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 그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에 생명이 들어오는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교회 안에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라도
‘와 정말 저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이 행하셨구나!’
이런 간증이 교회 가운데 보여지고 들려지고... 그 사람들이 (초월의) 통로가 될 때,
교회 전체가 힘을 얻게 되는 거죠.
‘맞아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지, 맞아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는 분이시지...’
이렇게 교회가 다시 한번 불이 붙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교회에 생명을 공급하는, 교회 전체의 생명과 기름 부으심을 공급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냐면, 두 감람나무인데,
두 감람나무의 내적인 속성은 뭐냐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예요.
그래서 그 가운데 세상에서 초월적인 일들을 감당하는 거예요.
또는 세상을 초월하는 일들을 감당하는 거예요.
세상을 초월하는 일이라는 것은, 꼭 기적에 한정된 의미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거,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할 수 없는 일이죠.
어떻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해요?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죽인 자들을 양자 삼았을 때,
세상에서 이런 일 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세상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예요.
초월적인 일을 행하신 거죠.
죽음 앞에서의 담대함과 기쁨..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요.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요. 두려워요.
그래서 모두 다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두려워하지만,
믿는 자들이 죽음 앞에서 담대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초월적인 거죠.
또 바랄 수 없는 중에 소망하고, 인내할 수 없는 중에 인내하고,
이런 것들이 다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 거고,
병을 고치고 예언하고 하는 것과 합쳐져서, 세상이 할 수 없는 초월적인 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이 할 수 없는 초월적인 일을 할 때, 교회는 촛대에 불이 켜지게 되는 거죠.
교회에 불이 들어오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기독교에는 초월적인 면이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다 설명할 수 없고, 다 이해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돼요.
인간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를 여러분 인간의 종교로 다운그레이드 하지 마세요.
인간의 종교로 다운그레이드 하지 마세요.
기독교는 반드시 신비의 요소가 있어요. 초월적인 면이 있어요.
다 설명할 수 없고, 다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면이 있어요.
그저 선행을 더 많이 하고, 그저 더 착하게 살고... 그건 뭐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하지 말자는 건 아닌데,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결국 어떻게 되냐면... 불이 꺼져버려요.
결국 불이 꺼져버려요.
저는 이것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이 있기 때문에, 200% 이 말씀에 동의합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정말 뜨거웠어요.
처음에 성령 받고 정말 뜨거운 불이 제 안에 있었는데,
대학교 3학년, 4학년 올라가면서 제 신앙의 칼라가 바뀌었는데,
어떻게 바뀌었냐면.. 기독교적인 가치관, 기독교적인 세계관, 삶을 통한 영향을 줘야 된다...
그쪽으로 확 기울어졌어요. 그것도 필요한 일이었어요. 불필요한 일은 아닌데,
그쪽으로 확 기울어지면서.. (그쪽으로만 치우치니까)
정말 불이 한 2년 만에 확 꺼져버리더라고요.
완전 물을 끼얹은 것 같이 확 꺼져버리면서 싸늘해졌어요.
머리로는 알아요. 머리로는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알고,
머리로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아는데... 가슴에 불은 없어요.
그냥 싸늘해져버린 제가, 그 경험을 통해서 ‘우리 안에 불이 꺼지는 게 뭐구나’ 하는 걸,
제가 알았어요.
‘인간적, 인본주의적 기독교’를 지향하는 순간, 불은 꺼져요.
물론 우리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착하게 살아야 되고, 선행해야 되고...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게 생명을 주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선행으로 드러나는 것 뿐이지,
그게 생명을 주지는 않아요.
생명은.. 우리 안에 기름 부으심이 있을 때 오는 거에요.
생명은..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오는 거에요.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 설명할 수 없지만, 살아계신 그 분이 내 안에 역사하시고,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살아계신 그 분이 교회 가운데 일하시고,
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 안에 불이 계속 붙어 있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그러잖아요.
살전5:19~20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멸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멸시하지 말고, 소멸하지 말고
예언을 통한 그런 초월적인 일들을 멸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 교회 안에 이 초월적인 일들을 멸시하는 분위기가 너무 팽배하지 않습니까?
물론 신비한 것만 쫓아가는 것을 제가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신비의 요소를 다 빼고 나면 뭐가 남습니까?
신비한 것만 좇아다니면서 추구하자는 얘기는 절대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 신비의 요소를 다 빼버리면 뭐가 남아요?
인간의 종교만 남는 거에요.
착하게 살고 윤리적으로 살고, 철학... 이것만 남지 뭐가 남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시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분명히 있어요.
제가 간증에서 여러 번 나눴지만, 하나님을 내가 다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내가 만든 하나님’이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실 수가 없어요.
내가 다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보다 크거나 같다는 건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야 진짜 창조주 하나님이시죠.
그런데 교회에서 초월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다 빼내고 나면 뭐가 남아요?
인간의 철학과 도덕과 내가 만든 신만 남는 거죠. 그럼 불이 꺼지는 거예요. *은사중지론
교회는 여러분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이 돼야 돼요.
초월적인 하나님,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이 돼야 돼요.
그래야 그 안에 불이 들어오게 돼 있어요. 그 안에 불이 꺼지지 않게 돼 있어요.
기억합시다. 여러분, 교회는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곳이 (첫 번째 사명이) 아닙니다.
왜 여러분 세상이 왜 교회에 불이 꺼지는지 아십니까?
교회의 불이 꺼진다는 것은, 더 이상 사람들이 교회를 주목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밤에 여러분 불이 꺼진 걸 생각해보세요. 거기 뭐가 있는지 모르죠.
불이 꺼졌다고 하는 것은, 세상이 더 이상 주목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세상이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교회의 불이 꺼지는지 아십니까?
세상은 교회에게서 뭘 보고 싶어 하냐면, 좋은 일 많이 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니에요.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거죠. 그게 세상이 보고자 하는 거예요.
세상이 보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을, 교회가 더 잘하는 걸 보고 싶어하는 게
아니에요.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걸 보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 교회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 아닙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옛날 얘기인데, 아주 똑똑한 교수님을 만나서
전도를 한 적이 있대요. 아주 똑똑하신 분인데 ‘이분을 만나서 어떻게 전도를 하지?’
‘이분은 그냥 이성의 끝판왕인데, 이걸 내가 말로 설명해도 분명히 나보다 말을 잘하실 거고,
뭘로 설명한다고 한들 이분을 어떻게 전도할 수 있을까?’
고민 고민하다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번개같이 이 말씀을 주셨어요.
‘그 사람이 갈망하는 것은, 말이 되는 설명이 아니다.
영적인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기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가서 설명(변증)이고 뭐고 하나도 안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하고 기도했대요. 그런데 이분이 정말 예수를 믿게 됐어요.
그 이야기를 저한테 전해주는데... 이게 뭐예요?
세상이 보기 원하는 것은, 세상이 갈망하는 것은 합리적인 설명이 아니에요.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설명(변증)을 해드릴 수 있지만,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을 교회가 하는 걸, 그들은 보기 원하는 게 아니에요.
착한 일하고, 선행도 많이 하고, 구제도 많이 하고... 그건 세상도 다 해요.
구제도 하고, 착한 일도 하고, 다 한단 말이에요.
그것 때문에 교회에 매력을 느끼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교회에 대한 갈망을 느끼게 되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어떻게 하느냐는 거예요.
죽음 앞에서의 이 좌절과 두려움과 낙담을, 어떻게 넘어서냐는 거예요.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 이 원수를, 어떻게 하냐는 거예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이 내 안에 있는 분노를, 어떻게 해결하냐는 거예요.
또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이 불치병을, 어떻게 우리가 뚫고 나갈 수 있냐는 거예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감당하는가... 그걸 보기 원하는 거예요.
그때 교회에 등잔대에 불이 들어와요.
교회에 불이 꺼지는 것은 여러분 명백합니다.
세상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교회도 따라하려고 그럴 때, 교회에 불이 꺼지는 거예요.
교회는 여러분 세상에 할 수 있는 일들을 따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불을 보기 원하는 것은,
세상에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교회, 성령께서 일하시는 교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교회,
그래서 사람의 힘도 아니고, 사람의 능력도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살아있는 교회와 성도...
그걸 보기 원하는 거예요.
▲2. 두 감람나무의 <두 번째 내적인 속성은, 주 앞에 서 있는> 거예요.
스가랴서뿐만 아니라 계시록도 똑같이 얘기합니다.
슥4:14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계11:4 ‘그들은 이 땅에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두 감람나무의 중요한 속성은 뭐냐면 ‘주 앞에 서 있는 자’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라는 거예요.
‘주 앞에 서 있는 자’라는 표현은 뭐냐면, 제사장들의 삶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제사장들은 뭐라고 그러냐면 ‘주 앞에 서 있는 자들’이라고 불렀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뭐 하냐면,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계속 성전을 바라보면서, 성전에서 서서 섬기는 사람이에요.
잠시도 성전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것 이외에 다른 역할은 없어요.
끊임없이 성전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죠.
시134:1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그냥 우두커니 서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서서 섬기고 일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밤에도 할 일이 있었어요.
번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게 돌보고, 성소의 등잔불(메노라)과 향단의 향이
꺼지지 않고 올라가도록 관리했어요. 또 성전을 지키는 경비업무도 있었죠.
성전이 상징하는 게 뭐예요? 하나님의 임재죠.
그래서 ‘주 앞에 서 있는 자’라는 표현은, 제사장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성전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듯이,
그렇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자들을 묘사하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가는 라이프스타일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 앞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이들의 삶은, ‘주 앞에 서 있는 자들’의 삶은,
사람에게 보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여지는 삶이었어요.
이들이 살아가는 삶은, 사람을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었어요.
‘주 앞에 서 있는 자들’의 삶은, 사람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 삶이고,
이들의 삶은 사람에게 판단받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판단받는 삶이었어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법궤나 성물을 잘못 만지면요. 하늘의 진노를 받아 죽었어요.
또 ‘다른 불’을 가지고 성전을 분향(향을 태움)하다가,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죽었어요.
제사장들이 이 삶을 살았을 때,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해보세요.
두려워하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그만큼 실제적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 삶에 이만큼 실제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들 안에는 여러분 사람의 판단, 이건 다 두 번째, 세 번째였어요.
‘사람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는가?’ 그건 다 두 번째, 세 번째였고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일할 때는
땀을 삐질삐질 흘릴 정도로 뭐를 신경 쓴 거예요?
‘하나님이 지금 뭐라고 하시는가? 하나님이 받으시는가?’ 이거 신경 쓴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 다른 불을 가지고, 향을 사르며 제사하면 죽는 건데,
율법에 어긋난 대로 섬기다가는, 그냥 진노하셔서 (나답과 아비후처럼) 거기서 끝나는 건데,
‘사람이 뭐 어쩌고 저쩌고... 너는 왜 그렇게 하냐?’
그런 사람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하나님의 실제가 지금 내 앞에 있는데, 하나님이 지금 내 앞에서 판단하시는 분이신데,
‘주 앞에 서 있는 자’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이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 라는 뜻이에요.
이 마음과 태도, 제사장들이 가졌던 그 마음과 태도,
제사장들의 마음 가운데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란 개념이 있었어요.
왜요? 잘못하면 죽으니까.
철저하게 하나님의 판단을 신경 썼던 사람들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판단하느냐?
나를 인정하느냐, 바보라고 하느냐?’ 이건 다 두번째 세번째 였어요.
가장 그들이 신경쓰이는 건 뭐예요?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내가 지금 이 성소에 분향하고 있는 것을 거룩하다 말씀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내가 지금 이 성물를 만지며 섬기고 있는 것을 옳다 라고 말씀하시는가?’
이게요. 모든 마음의 관심의 전부였어요.
정말 땀을 삐질비질 흘리면서, 그거 신경 쓰고 있었잖아요.
이 제사장들의 삶이 ‘주 앞에 서 있는 자’라는 그 표현 가운데 함축되어 있는 거예요.
△자 마지막 때 누가 두 감람나무가 될 수 있는가?
이 마음을 가진 자들이 두 감람나무가 되는 거예요.
주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 주 앞에 서 있는 자들,
‘나의 모든 판단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이십니다.
사람이 나를 옳다고 하느냐, 사람이 나를 칭찬하느냐... 이런 건 다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옳다고 하시는가,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는가?
그것이 나의 모든 관심사입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열정은.. 사람들이 주는, 세상이 주는 보수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돈에 의해서도 아니고, 직분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열정이고 비전입니다.
나를 판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인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는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 마음과 고백이 있는 자들이 누구예요? 두 감람나무예요. 아멘!
여러분은 누구 앞에서 서 있는 자십니까? 사람 앞에 서 계십니까?
아니면 주 앞에 서 계십니까?
여러분은 누구에게 보여지는 삶을 사십니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사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사십니까?
여러분을 움직이게 하고 여러분이 무언가를 선택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입니까? 사람의 인정입니까?
또한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판단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판단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누구 앞에 서 계십니까?
이것이 우리 안의 내부, 내면을 결정하는 거예요.
이게 분명한 사람이 ‘두 감람나무’인 거죠.
교회는 여러분 주 앞에서, 주 앞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때, 불이 켜집니다.
등불(메노라)이 켜져요. 꺼지지 않아요.
교회의 생명과 능력을 불어넣는 기름부으심은, 바로 여기서부터 나오는 거예요.
주 앞에 서 있는 자들!
왜 여러분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두 감람나무로 표현했는지 아십니까?
‘주 앞에 살아가는’ 제사장과 왕이었거든요.
왜 예수님을 두 감람나무로 해석하는지 아십니까?
주 앞에 살아가는 분이셨죠.
그리고 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 가운데, 누가 두 감람나무가 되는가?
누가 교회의 불을 밝히는 두 감람나무가 되는가? 누구나 될 수 있어요.
누구나 될 수 있는데, 요구되는 속성이 있어요. 그것은 주 앞에 살아가는 자예요.
주 앞에 살아가는 것으로 인하여, 하늘로부터 기름 부으심을 받는 자들이에요. 슥4:14, 계11:4
하늘로부터 오는 기름 부으심은, 주 앞에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주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 안에 기름 부으심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불을 밝히는 ‘두 감람나무’입니다.
올 2021년 한 해는 ‘두 감람나무’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2021년 한 해는, 두 감람나무에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 앞에서 살아가기를 결단할 때, 그때 여러분 영혼의 먼저 개인적인 불이 켜질 거예요.
우리 안에 영혼이 살아날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저는 예배가 정말 중요하다고 믿어요.
어떤 분들은 예배가 중요한 게 아니라, 흩어져서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삶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 말에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돼겠지요. 결과적으로는 우리 흩어져서
각자의 삶 가운데 역할을 감당하는 자들이 돼야 되지만, 그 근원적인 힘이 어디서 올까요?
그 힘은 주 앞에 서 있을 때 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배가 무엇일까요? 예배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 앞에 서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한다고 하는 그 마음과 감각이 없을 때, 우리는 그 불이 꺼져요.
예배는 뭐냐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는 그 마음을 표현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예배 때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우리의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을까요?
저는 여기에 큰 미싱 포인트가 있다고 믿는데, 사람은 그럴만한 대단한 의지가 없어요.
우리는 사실은 예배에서, 그 예배의 자리에 나가서,
서로 서로의 모습 가운데, 또 나의 고백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는
이 절절한 고백들이 함께 공유될 때, 그랬을 때 우리 안에 불이 켜지고, 힘을 얻고,
그래서 각자의 자리에서 싸워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모의기를 폐하지 말라’고 그랬지요. 히10:25
정말 여러분 삶 가운데 불이 들어오기를 원하신다면,
또 우리 교회 가운데에 불이 켜지기를 원한다면,
우리 주 앞에서 살아가는(서 있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어하는 그 마음...
잠시도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 않는...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이 주 앞에 서 있는 자의 삶, 그것이 올 한 해 동안 우리의 예배이고,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믿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같이 일어나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