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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장 우리 아버지 하나님

LNCK 2026. 5. 15. 10:4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양자>

260503_로마서 강해(40)_우리 아버지 하나님(8:14-17)

 

◈우리 아버지 하나님          롬8:14-17, 갈4:5      2026.05.03. 로마서 강해(40)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가 지난 주일에 이 본문으로 “영적 친자 확인”이라는 주제를 살펴봤습니다.

바울사도는, 우리가 잘 가고 있는데, ‘내가 진짜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

의심하게 하려고, 이 말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주려고 이 말씀을 쓰고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같은 본문을 다루고 있는데, 이 본문에서 오늘 ‘양자됨’이라는 신학 용어를

얘기를 해요. *‘그리스도와 함께 된 상속자’ co-heir

 

오늘 이 주제를 다루게 되는데, 이 주제를 보면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더 깊이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근데 이 ‘양자됨’이라는 말을 우리가 그렇게 많이 흔하게 들어보는 말씀은 아닐 거예요.

‘양자가 된다’는 그 말 뜻을 모른다는 게 아니에요.

성경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나?’

왜냐하면 신약성경에 단 5번 나오거든요.

 

갈라디아서의 한 번, 에베소서의 한 번, 그리고 로마서 8장에 두 번, 롬9장의 한 번

그렇게 5번 나오고, 전부 다 바울사도가 이 말을 쓰고 있습니다.

롬8:15, 23, 9:4, 갈4:5 ‘아들의 명분을 이음’, 엡3:6에 ‘상속자’

 

하지만 이 ‘양자됨’은 너무나 중요한,

우리의 구원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너무나 중요한 것임에 비하면

오늘날 너무나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임스 패커는 이런 말을 해요.

양자됨의 진리가 기독교 역사에서 거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는 것은 참 이상한 사실이다.

양자됨에 대해 첫 번째로 살펴볼 사항은, 그것이 복음이 제시하는 최고의 특권이라는 것이다

 

‘양자됨 adoption’이 최고의 특권이라고요.

우리는 ‘칭의’에 대해서 너무나 많이 들어보죠. ‘성화’에 대해서도요.

그리고 뭐 ‘중생’에 대해서도 우리가 들어본 말들은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비한다면 '양자됨'이라는 말은, 그렇게 흔하게 들어보지 않는 것이죠.

제임스 패커는 이게 '최고의 특권'이라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지는 최고의 특권이라고 얘기를 해요.

 

심지어 이렇게 말합니다. 양자됨은 심지어 의롭다함, 칭의보다 더 높은 것이다!’

놀라운 말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설교를 들으시면서, 제임스 패커의 이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 모두가 같이 잘 이해할 수 있으면 참 좋겠어요.

 

▲바울사도는 당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들이

‘내 안에 구원의 확신이 없다 보니,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을 잘 받아서 구원받은 거면,

내(자기) 안에 근거가 있으니까, 내가 받은 점수에 대해서 의심할 이유가 없겠지만,

나하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선물로 주신 은혜잖아요.

선물로 얻은 구원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이게 과연 확실한가?’

이런 생각들을 당연히 하지 않겠어요?

 

근데 바울은 그렇게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그리고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확실함에 대해서,

그리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구원’이라는...

하나님이 취소할 수도 없고, 철회하지도 않으시며,

그 확실한 구원의 종국적인 확실성을 심어주고 싶어서... (롬8장을 써내려가고 있는 거죠)

 

이런 확신을 우리가 가지고 살아간다면 뭐가 두렵겠어요?

그래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양자됨'이라는 이 말은 '휘오테시아'라는 헬라어에요.

'휘오스'라고 하는 건 '아들'이거든요.

 

근데 '휘오테시아'는 '아들됨', '양자됨', 영어로는 'adoption'인데,

우리가 '입양' 이런 말을 씁니다.

 

‘양자삼는다’는 것이, 우리 한국 문화권에서는, 그렇게 익숙한, 흔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양자됨’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오해를 가질 가능성이 있고요.

 

그렇지만 서구 사회는 오래 전부터 ‘입양’이 문화적으로 더 많이 있었고,

그렇지만 그런 ‘입양’이, 또 본문의 ‘양자됨’ 하고는 약간 다른 제도죠.

 

왜냐하면 1세기의 로마 제국 안에서 일어나던 일들,

로마의 성도들에게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이,

그러나 정확히 로마의 문화 속에서 1세기 당시에 입양이라는 양자가 된다는 것,

그것과 성경이 가르치는 바, 바울이 말하고 싶어하는 그 ‘양자됨’이 똑같은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1세기 로마 문화권에서 ‘양자를 삼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로마의 성도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로마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바울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아마 로마의 문화 속에서

‘입양’(양자 삼음)이라는 그 개념을 빌려와서, 그 그릇에 삼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풍성하고 깊은 의미를

그 그릇에 담아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을 잘 이해하려면, 1세기로 돌아가보는 건 굉장히 필요하죠.

오늘 본문을 보면, 롬8:14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왔고,

15절에는 ‘양자의 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또 16절과 17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양자,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이 휘오테시아라고 하는 이 말은, 한 번 쓰였어요.

양자의 영’ 할 때.

 

그러나 8:14~17절 전부가,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 됨’에 대해서, ‘양자 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양자의 영, 하나님의 자녀’ 이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거죠.

다 양자됨을 설명하는 표현들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는 1세기 로마 사회에서 ‘양자됨’이 어떤 의미인지를 잠시 살펴보고,

그것이 모든 시대에, 그리고 또 21세기를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하나님이 왜 이 말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인지...

좀 이해할 수 있고, 또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학자들 간에는 바울 사도가, 이 양자됨이라는 개념을,

구약성경에서, 유대 전통에서 가지고 왔는지,

로마법에서 가지고 왔는지... 뭐 이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를 딱 선택할 것은 아니고, (로마법이나 문화에서 가져왔다고)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한국 사람들이 알아듣는 어떤 개념을 가지고 얘기를 할 것 아니에요?

 

바울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 ‘입양’이라는 게, 유대인, 아니 로마에 사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선명한 그림이 있었던 것이죠. 그걸 잠깐 설명을 먼저 드릴게요.

 

로마 황제가 자기 자식이 꼭 없어서만은 아니에요.

자식이 있어도 ‘얘한테 나라를 물려줬다가는 제국이 망하겠다. 이게 깜이 아니다’ 싶으면,

양자를 입양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제국을 물려줘도 될 만한’ 그런 인물을 찾아서,

그래서 그렇게 성인이 된 사람들을 입양을 해서, 자기 아들이 있어도,

자기 왕위나, 자기 가문을 물려 줘요. *<벤허> 영화에서 벤허가 로마장군의 양자가 돼죠.

 

이게 트라야누스 라든지 하드리아누스 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에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5현제 시대'의 황제들(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을 비롯하여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등 여러 황제가 양자 입양을 통해 제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이렇게 여러 황제들이 있었지만, 1세기의 로마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인물이 있었어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예요.

로마 역사의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통치자라고 여겨지는 사람,

 

그러니까 로마가 처음에 공화정으로 가다가,

옥타비아누스가 결국은 공화정의 로마를 끝내고, 스스로 황제로 등극을 하면서,

이때부터 제정 로마가 되는 겁니다.

 

근데 그 아버지가 카이사르(시저)가 되겠습니다.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카이사르 혹은 시저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왕위를 물려줬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시저의 친아들이 아니었죠. 그는 입양된, 양자이었습니다.

 

그런데 입양을 희한하게 했어요. 18살 된 청년을 보면서 ‘이게 인물이구나’ 생각하고,

카이사르는 유언장을 작성합니다.

내가 죽으면 옥타비아누스에게 내 자리를 물려줄 거다.

그리고 내 재산에 4분지 3을 줄 거다’ 등등, 그리고 카이사르가 암살을 당했잖아요.

 

암살을 당하고 유언장을 딱 열어보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란 거죠.

카이사르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유언대로 옥타비아누스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죠.

 

그런데 그 자리는 대단한 자리였습니다.

아직 황제는 없었지만,   *황제 : Imperator, Emperor *참고로 왕은 Rex

황제가 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그의 양아버지인 카이사르가 만들어 놓고 죽었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이제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의 추대를 받고,

주전 27년에 아우구스투스라고 하는 칭호를 받게 되죠.

이거는 ‘존엄한, 신성한’이란 뜻인데, 이게 신격화되는 겁니다. 황제로서.

 

그래서 이 사람이 로마의 첫 번째 황제가 되는데,

카이사르의 친아들이 아니라, 바로 입양된 양자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로마 문화권에서 양자는, 친자와 권리가 똑같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양자됨을 받았다는 것은, 친자인 예수님과 권리가 똑같다는 거죠.

그만큼 대단한 것임을, 지금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자로 들어가서 왕(황제)직을 물려받은,

그런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경우를 사람들은 잊을 수가 없는 것이죠.

당시 사람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로마서가 쓰여진 게 주후 57년경이거든요.

이게 성경의 양자됨을 이해는 시켜주지만, 온전하게 설명해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이 로마의 ‘양자됨’이라는 개념을 가져왔을 거예요.

 

◑양자됨의 특권

 

만약에 양자됨이라는 것을, ‘그래도 양자보다는 친아들이 더 낫지’

이렇게 생각하는 문화권이라면, 성경에 있는 이 개념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몇 가지만 제가 설명을 드리면, 유사한 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입양에 의해서 완전한 법적 신분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새 이름이 주어집니다. 좀 아까 설명한 것처럼 새로운 정체성이 주어집니다.

입양된 사람은, 양부의 성명과 혈통을 자신의 이름에 반영하는 엄격한 규칙을 따랐습니다. 주1)

입양되는 순간에, 새로운 아버지에게 속한, 법적 인격이 탄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혹은 내 아버지와 내 집안에서 가지고 있던

나에게까지 대물림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부채가 소멸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법적 효력이 있다는 얘기죠.

 

굉장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분과 정체성을 얻었다는 걸 설명하는 데 있어서

유사한 점들이 많습니다.

 

▲2. 뿐만 아니라 입양된 아들은, 양아버지의 친자가 있을지라도,

법적으로 차등한 어떤 열등한 지위를 얻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친아들과 동등합니다. 동일한 지위를 얻습니다.

 

▲3. 세 번째로 입양된 아들은 양부의 법적 상속인이 됩니다.

롬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라고 말씀하잖아요.

 

로마 사람들은 이 구절을 다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이 ‘자녀’라는 말은, 입양된 자녀를 지금 얘기하는 거죠.

‘양자의 영’이라고 15절에서 얘기를 했으니까요.

 

▲4. 일단 완료된 입양자는, 양아버지가 돌아가신다고 할지라도,

원칙적으로 취소가 불가능했습니다.

 

이게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경우였던 겁니다.

이렇게 로마제국에서의 입양은, 성경의 양자됨 혹은 성경의 구원과

상당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게 맞아요.

 

이런 배경을 가지고 로마의 성도들은, 바울이 ‘양자의 영’이라고 했을 때,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이해를 했을 거라는 말이죠.

 

‘아, 이거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법적인 의미에서 취소될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너무나 확실한 구원이구나.. 내 신분, 내가 양자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취소될 수 없는 완전한 신분의 전환이 일어난 거구나.

내가 죄인에게서, 의인으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바뀐 것이

얼마나 취소 불가능한 일인가!' 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그들은 이해를 했을 것입니다.

 

◑성경의 양자됨이 이런 의미들을 가지는 것인데,

사실 바울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럼 바울 사도가 말하는 양자됨이 어떤 것인지를 좀 더 살펴보려고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이거예요. 차이죠.

 

예를 들어서 황제나 어떤 로마의 귀족이나, 이런 사람들이 주로 입양을 하지,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들이 입양을 하지는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황제나 귀족이 입양을 하려고 할 때, 그 입양은

’이 사람이 쓸만한 사람인지 증명이 됐다‘는 조건에서 입양을 하는 겁니다.

탁월함을 증명해야 입양이 된다는 얘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입양하시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 조건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증명서를 요구하지도 않아요.

죄인을 불러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그 탁월함을 그 안에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란 말이에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증명받아서 양자로 입양된다고, 로마의 성도들이 생각했다면,

그것은 전혀 바울의 의도와는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1. 그래서 탁월함을 증명하고 입양되는 것이 로마법이었다면,

하나님의 입양은, () 안에 없는 탁월함을 만들어 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칭의를 지금까지 바울이 로마서에서 쭉 말해왔던 것이에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근데 그 이유는, 롬5장 이후에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이

이렇게 안전하고,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흔들림이 없고,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 얘기를 지금까지도 쭉 해왔습니다.

근데 이제 ’칭의‘에 이어서 ’양자됨‘을 살짝 얘기를 하는 거예요.

 

‘칭의’에 대한 책은 찾아보면 아마 100권도 넘을 거예요.

그런데 ‘양자됨’에 대한 책을 한번 찾아보세요. 별로 없어요. 놀라운 일이죠.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책에서,

양자됨에 대해서 한 챕터를 할애해서 쓰고 있는데,

잠깐 설명을 드릴게요. 칭의와 비교해서 이해하는 게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칭의는 1차적인 복이고, 근본적인 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양자됨을 포함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모든 것들은

칭의 덕택에, 칭의의 근거에서 우리가 누리는 복들이에요.

 

그러나 이 말은 ‘칭의’가 복음이 주는 최고의 복이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난 칭의만 있으면 돼. 더 이상 시비 걸지 마. 나는 이걸로 충분해.

충분히 은혜를 누리고 있어’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얘기예요.

 

▲2. 제임스 패커가 양자됨은 더 높은 축복이라고 했잖아요.

양자됨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풍성함을 누리게 하기 때문에 그래요.

 

감이 오시죠? 칭의가 율법의 관점에서, 재판정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나를 ‘죄 없다’ 하시는 선언이 칭의예요.

 

양자됨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아버지하고 내가 관계가 깨졌었는데, 아버지하고 관계가 회복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끌어안는 거예요. 이 장면을 생각하실 수 있어요.

 

탕자가 집을 나갔을 때, 아버지와의 관계가 사실은 영원히 깨지는 건 아니지만,

그 관계가 깨어지는 거잖아요. 돌아왔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그를 안아줍니다.

회복이 되는 거죠. 이런 그림을 여러분들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심판자, 재판장으로 보는 관점, 그것이 칭의의 관점이라면,

양자됨의 관점은 하나님을 사랑이 많은 무한히 은혜로운 아버지로 보는 관점이라는 얘기예요.

많이 다르죠. 친밀함, 애정, 자애로움이.. 이 양자됨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칭의에서 재판장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는 거.. 어마어마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받고 보살핌을 받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는 거,

이거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거예요.

 

▲3.  이런 면에서 양자됨은 지속되는 복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가정 안에서 절대적인 안정과 견고함을 제공해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점에서 양자됨은 그 자체로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하잖아요.

‘하나님이 내가 받은 구원을 끝까지 인내로 이루실 것이다. 완성하실 것이다.

절대로 실패하는 일이 없다. 내 구원이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탈락하는 일이 없다.

하나님이 나를 끝까지 붙드시고, 인내하고 견디게 하시며, 내 구원을 이루신다’

이게 성도의 견인이에요. 양자됨은 성도의 견인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들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잖아요.

종종 우리가 칭의의 은혜는, 값싼 은혜로 전락한다는 오해를 받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끝까지 가봐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는 끝까지 정말 열심히 살아야 될 거예요.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가 아니고, 진짜 열심히 살아야 돼요.

내 구원이 취소되지 않도록 하려면, 정말 내 몸을 불살라야 돼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내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모든 것들이 나 하기에 달렸다고 성경은 얘기하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내 구원의 근거라고 성경은 얘기를 하잖아요.

 

그러면 이 칭의를 우리는 잘못 오해하게 되면, 늘 율법폐기론에 빠지게 돼죠.

난 아무것도 할 게 없어.. 안 해도 돼..’

이런 식으로 우리를 방종의 자리로 데리고 가는 경우들이 종종 있잖아요.

값싼 은혜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럴 수 없다고 바울은 말하는 거예요.

왜요? ‘양자의 영이신 성령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 안에 계셔서,

그분이 아버지를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고,

그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싶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 싶은 거룩한 열망을 아들들에게

주시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값싼 은혜?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이런 의미에서 양자됨은, 그 은혜를 알고,

그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사랑하게 만든다니까요.

불효자식이 되게 만드는 게 아니고, 진짜 효성이 갸륵한 효자가 되게 만든다는 거에요.

 

누가? ‘양자의 영’이신 성령님이 그 안에 내주하셔서,

그래서 이것도 율법주의로 흐르게 하지 않아요. (그래서 칭의와 아울러 양자됨이 꼭 필요하죠)

율법의 조문을 하나하나 지키면서 ‘사람들 앞에서 나 이렇게 했지?’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게 만들지 않아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내가 율법,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 있는 율법을 지키고 살아야겠다...’

이런 마음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이건(양자됨) 율법주의로 가지 않아요.

성령께서 내 안에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게 15절에서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

이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점 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나를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깊이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들어가게 만드신다고 말씀하는 거예요.

 

▲판사의 판결(칭의)과, 아버지의 포옹(양자됨)의 차이

그래서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성령님의 사역이 우리 삶에서 눈에 보이게 되는 때가 언젠지 아세요?

그거는 감정과 체험을 찾아서, ‘내가 막 뭔가 감정적으로 뒤집어져야 돼’

‘뭐 체험을 해야 돼’ .. 이런 게 성령님이 나타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의지하고,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교제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마음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게 될 때,

그게 사실은 성령의 나타남이에요.

 

바울이 말하는 칭의와 비교해서, 양자됨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칭의는 죄책을 해결해주는 것과 관계가 있어요.

‘더 이상 내가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래서 우리가 가벼워지죠. 자유를 얻게 되죠.

 

그러나 양자됨은 단절된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과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비교를 해보세요.

 

판사가 무죄라고 선언하는 거는,

정말 만약에 내가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면 정말 큰 은혜죠. *칭의

 

근데 나를 용서할 것 같지 않았던 아버지가,

나를 포옹하고 끌어안아 주는 것이 양자됨이에요.

 

판사의 판결과 아버지의 포옹... 그 차이예요.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칭의의 은혜를 알게 되고, 죄책감에서 해방된 신자가 있어요.

‘내가 더 이상 정죄감 아래에 있지 않아도 되는구나’

정죄감이 없다고 했으니까요! 롬8:1~2

 

근데 만약 이 사람이 칭의 외에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양자됨에 대해서 알지를 못해요.

그러면 칭의가 이 사람의 신앙의 전부가 되겠죠. 그것도 감사한 일이에요.

 

근데 양자됨의 교리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내가 경험하지 못하게 되면,

죄책감에서 해방된 사람이라고 하고, 죄책에서 내가 자유를 얻었다 할지라도,

깊고 풍성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하지 못하는 자리에 머무르게 될 때,

이 사람이 그것은 칭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양자됨으로 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많은 경우에 그래요. 양자됨의 실체를 붙잡지 못하는 거죠.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거죠.

여러분이 혹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한번 생각을 해보시라는 얘기예요.

 

이게 바울사도가 ‘양자됨, 양자의 영’이라고 언급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갈4장이 설명하는 양자됨

 

그럼 제가 다음 주일에, 이 본문을 가지고 좀 더 깊이 생각해보겠지만,

갈라디아서 4장에서도 바울이 이 말을 해요.

 

갈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아들의 명분’이라고 번역된 말이, 아까 얘기한

‘양자 (휘오테시아)’라고 하는 말이에요. 롬8:15, 19, 23, 9:4

 

우리로 양자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서 여자에게서 나신 것,

즉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신 것은,

그 목적은.. 우리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기 위해서 오셨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갈4:5

 

로마서와 같은 맥락에서 지금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근데 그 이유가 뭐예요?

갈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장에 있는 맥락하고 똑같아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는 거예요.

 

단순히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는 것에서 나아가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회복하기 위해서,

여기 ‘아들의 영’이라고 갈라디아서에서 얘기한 것이, 갈4:6

‘양자의 영’이라고 얘기한 것과 같은 거예요. 롬8:15

 

‘성령께서는, 내 영혼과 함께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언하신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롬8:16

 

▲잭 밀러는 <양자됨의 신학>에 대해서, 두 문장으로 설명을 해요.

 

1) 첫째,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사람이다.’

죄에 대한 철저한 인식, 그리고 자기 의를 무너뜨리는 것에 관해서,

이 문장으로 잭 밀러는 설명했습니다.

 

2) 두 번째, ‘당신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게 양자됨의 핵심이에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요.’ 좋은 소식이죠.

 

양자됨의 확신, 아버지의 사랑의 실제를.. 잭 밀러는 이 문장 속에 담았습니다.

양자의 영이신 성령께서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즐기고, 그 관계 안에서 기뻐함 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사람이 양자됨의 은혜 아래 있지 못할 때,

자기를 종으로 생각하거나 고아로 생각하거나... 이런 일들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그러나 ‘영적 고아의 심리’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어요?

-혹시 내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내 힘으로 살아 남아야 된다는 부담,

-자기 증명을 끝없이 추구해야 하는 피곤함, 두려움,

-그 두려움으로부터 하게 되는 복종, 이런 것들이죠.

 

여러분은 예수를 그렇게 믿으십니까? No

이런 것들이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를 설명하는 겁니까? No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려고,

아들의 명분을 주시려고, 양자 삼으시려고 하나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심리 상태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율법주의에 쩔어있는 종이요, 종교인인 거예요. 그런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아침에도 얼마나 많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겠어요. 차고도 넘쳐요.

그런 사람들과 양자됨, 아들됨의 심리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양자의 심리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죠. 그게 아들이잖아요.

내가 잘났든 못났든 ‘아버지가 내 아버지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있잖아요.

 

그리고 ‘저분이 나를 받아줄래나, 안 받아줄래나?’ 이게 아니고,

‘내가 이미 받아들여졌다’는 확신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을 드릴 힘도 있죠.

바울사도가 15절에서 말하는 ‘양자의 영, 성령님’은

하나님을 대하는 참된 성도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이렇게 자유함으로 바꿔주는 거예요.

 

그리고 말로 할 수 없는 큰 확신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하나님 앞에 마음을 완전히 열고 나아가게 합니다.

이때 기도는, 봉사는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말씀을 맺기 전에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어요.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이 그리는 이미지는 어떤 이미지입니까?

 

재판관입니까? 만약 '칭의'만을 생각한다면 재판관이시죠.

또 내 안에 거룩한 마음을 새 마음을 주시는 새 마음을 창조하시는 것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창조주일 거예요.

 

그러나 양자됨을 여러분들이 이해한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진짜 아버지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양자됨의 교리가 주는 특권이고 은혜입니다.

 

양자됨의 교리는 수많은 구속받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성경에서 표현하기를 맏형이라고 부르는) 예수님과 함께,

큰 가족 모임을 하는.. 가족의 대잔치를 벌이는... 그런 그림을 우리에게 꿈꾸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요17장에서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실 때,

24절에 이렇게 기도를 하셨어요.

 

요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런 꿈이 있는 거예요.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죠.

그리고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하라고,

주님은 당신과 우리를 묶으셨습니다.  *‘우리’안에 예수님도 포함, 같은 아들됨

 

여러분이 거듭난 신자이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사실을

얼마나 알고 확신하고, 그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십니까?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양자됨의 진리를, 여러분들은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귀중히 여기나요?

날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가 가지는 특권을 상기하시나요?

나의 양자됨을 완전하게 더 깊이 확신하기를, 하나님 앞에 구하시나요?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곰곰이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시나요? 아빠라고 부르시나요?

 

인간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이 나를 사랑하는 거죠.

자녀가 부모를 존중하고 순종하고, 부모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죠. 무엇을 더 바라겠어요?

 

자녀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어요?

나의 자녀들이 양자됨,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비추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견인’과 확신을 모두 얻게 됩니다.

 

자기 자녀에게 ‘네가 제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너를 내쫓아버릴 거야’ 라고 말하는 아버지는

그건 이상한 아버지죠. 정상적이지 않죠.

 

여러분이 이 ‘양자됨의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아버지 하나님께, 더 깊은 친밀함을 가지고 나아가게 될 것이고,

아들(양자)로서 기도하게 될 거예요.

 

여러분은 마음을 활짝 열고, 그리고 여러분은 더 깊은 안정감을 가지게 될 거예요.

왜요? 전능하신 주권자가 나의 아버지니까!

 

그리고 확신하게 될 거예요.

내가 무슨 일을 만나도 아버지가 나를 버리는 일이 없고,

아버지의 사랑에서 나를 끊어낼 게 없다는 사실을 알면,

확신을 가지고 모든 환경 속에서, 여러분들은 흔들리지 않으며 걸어갈 수 있을 거예요.

 

이게 로마 성도들에게 바울이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나의 친형제로 여기게 되겠죠.

 

이게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데,

이분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보고 ‘아 우리는 안지가 몇 년밖에 안 됐는데, 내 형제구나’

 

그리고 그와 함께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고 그 보좌 앞에 함께 나아갈 겁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나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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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로마의 귀족 남성들은 주로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름(삼명법, tria nomina)을 사용했죠.

프라이노멘 (Praenomen): 개인 이름 (예: 가이우스, 마르쿠스)

노멘 (Nomen): 가문 이름 (클란·Gens)

코그노멘 (Cognomen): 분파 또는 개인 별명2.

 

입양 시 이름이 바뀌는 방식입양이 완료되면,

양부의 가문 이름으로 교체되며,

기존 가문 이름의 어미를 변형(~ianus)하여

마지막에 추가하는 방식으로 원래 가문을 기억했습니다.

 

예를 들면 율리우스 가문의 '옥타비우스'가 카이사르(율리우스 가문)에게 입양된 경우

본래 자기 이름: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입양 후 이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양부의 이름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그대로 물려받고,

자신의 원래 가문명(옥타비우스)에 '~아누스'를 붙여 성(Cognomen)으로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