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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장 마음 청결자의 복, 하나님을 봄

LNCK 2026. 5. 17.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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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6-11 마음 청결자의 복, 하나님을 봄

 

◈마음 청결자의 복, 하나님을 봄         마5:8              2025.09.16. 교정예정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지금까지 믿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본 걸까요, 아직 못 본 걸까요?

어차피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마음으로 본다는 뜻인데, 도대체 실제로 내 마음이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어떤 상황을 의미할까요?

 

예를 들어봅니다. 어머니가 늘 집에 머물러 움직이시면서 종일토록 살림을 사십니다.

모든 가족이 이런 상황을 당연시하며 무심코 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시골 친정에 가셔서, 한 사흘을 지내시게 되었어요.

그러면 매일 저녁 집에 들어온 가족들은, 어머니를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죠.

 

이럴 때 비로소 온 가족이 눈에 안 보이는 어머니 자리를 허전하게 느끼면서,

마음으로 어머니를 바라봅니다(생각합니다).

 

이렇게 눈으로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마음이 보는 상태를, 우리는 그리움이라고 하지요.

바로 이러한 그리움이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마음으로 보잖아요.

그러면 그 대상은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게 됩니다.

 

눈으로 어머니를 보는 동안 마음을 쓰지 않았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자,

어머니는 드디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와 계시게 됩니다.

 

이제 이런 상태에서 어머니가 실제로 집에 돌아오셔서,

다시 보게 되면, 새삼스럽게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이처럼 어떤 대상이든... 마음으로 보며 그리워하면,

그 대상은 반드시 마음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마음의 청결과 불결’이 문제가 됩니다.

 

청결이란,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상태입니다.

불결은, 없어야 할 것이 없어야 할 곳에 있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금방 지은 밥을 밥솥에서 퍼서 밥그릇에 담으면 청결입니다.

그러나 그 밥을 아주 깨끗한 목욕탕 바닥에 퍼 놓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밥도 깨끗하지요. 목욕탕 바닥도 깨끗하지요. 그렇지만 불결함이 발생합니다.

 

마음의 청결도 마찬가지예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잖아요.

이런 사랑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자신만, 우리 마음에 계셔야 함을 전제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하다는 뜻은, 마음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그리워함으로써,

하나님만이 마음 안으로 들어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드디어 실제로 하나님 자신을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땅에 있는 것들... 예를 들어 가족, 친구, 건강, 돈, 명품 등등

하여간 땅에 있는 것 전부를 어떤 것이든지 그리워하면,

그 자체로 이미 내 마음은 그것들이 들어옴으로써,

하나님만 계셔야 될 자리를 불결하게 만듭니다.

 

이런 불결한 상태로는, 아무리 하나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찾아도,

절대로 하나님 자신을 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어떻게 우리 마음에서 발생하는 모든 그리움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향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만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와 계시는 청결함을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각자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서, 우리 각자는 세상 것을 향한

모든 그리움이 죽었음을, 나 스스로 확정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은,

우리 마음의 그리움이 이 땅을 향하려는 경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죠.

 

혹시 부지 중에 그리움이 이미 세상 것을 향하고 있습니까?

이런 상황을 알아챘다면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곧바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함께 나는 이토록 그리운 이 세상 대상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이지요.

이를 통해서 그리움을 세상으로 풀어놓지 말고,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움이 하늘로 향하도록,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의식하여 따라갑니다.

내 마음의 모든 그리움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이 연쇄 과정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에게만 보내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그리움이 하나님에게 집중되면 마음이 청결한 상태이고,

드디어 실제로 하나님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 왜 복이 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봄으로써,

비로소 실제로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 세상 것을 아무 거리낌 없이 그리워했어요.

그래서 불결해진 마음으로, 단지 하나님을 입으로 부르기만 해도, 신앙이라 여겼던 겁니다.

그래서 실제 하나님 자신이 어떤지를 발견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눈에는 보이지 않아서 마음으로 그리워함이 하나님에게만 집중되면,

드디어 하나님이 비로소 우리 마음이 직면하는 대상이 되십니다.

 

그러면 이제 비로소 하나님 자신의 그 최절정의 좋음과, 황홀한 아름다움과,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을.. 실제로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오’ 라는 말씀은

다시 쓰면 이렇습니다.

‘마음의 그리움이 하나님만을 향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 자신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새삼스레 발견하고는, 완전히 넋이 나갈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신 모습을 직면하자

그 강력하고 황홀한 매력에 사로잡힙니다.

그 순간 즉시 산 아래서 그동안 세상을 향해 품었던 모든 열망과 그리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 자신을 보는 복, 하나님이 어떠신지를 발견하는 복은 강력한 광선 같습니다.

그래서 일단 하나님 자신을 발견하는 복의 쇠잖아요?

그러면 세상 모든 복 따위에 대한 그리움은 마음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이런저런 세상 것들이 여전히 마음에 그립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십자가를 보며,

우리의 그리움을 하나님으로만 집중할 때입니다.

 

 

 

20250918-12 화평케 함의 복, 아들로 칭하여짐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면 하나님께서 ‘얘 아무개야’ 라고 이름을 부르는 대신

‘어이, 아들!’ 이라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예수님은 이미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화평케 하셔야 하잖아요.

그런데 너무나 상반되어 보이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10:34절 이하의 말씀 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검(칼)은, 화평의 반대인 전쟁과 갈등과 반목을 상징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이 땅에 오실 때, 기껏 이제까지 잘 지내던 가족끼리도

서로 불화하고, 원수지간이 되게 하시려고, 검을 쥐어주려고 오셨답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첫 번째,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화평은,

분명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은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 하나님과 사람간의 화평은, 사람과 사람의 화평한 관계가 더 먼저 있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화평하던 가족끼리도 불화하여 원수지간이 되어야만,

하나님과의 화평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의미가 참 심술굳지요. 약4장에서는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약4:4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이미 가족 등등 여러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요. 이런 상태가 이미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어버린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관계는, 이렇게 원수임이 뻔히 드러나는

앞선 세상 관계들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그 위에 관계 하나를 더 추가하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배타성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사람은 마음으로 좋아하여 틈새 없이 밀착하는 다른 대상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내 마음으로 밀착할 정도로 친밀한 상대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보다 더 먼저 맺는 바람에,

이제는 이미 친밀해진 관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즉 불화를 일으키는 검입니다. 마10:34

 

하나님보다 더 앞선 모든 친밀한 관계는,

일단 예수님이 주신 이 ‘불화의 검’으로 모두 다 끊어내고, 소멸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가 다 끊어진 상태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과 밀착하여 꽁꽁 묶인 상태를

이루고 유지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밀착관계가 최우선으로 이루어지면,

이제 그 외에 ‘불화의 검’으로 끊어내었던 모든 다른 사람 관계는

부차적으로만 하나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다시금 재정립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화평에는 정말 지독한 아이러니가 숨겨져 있어요.

화평하려면 반드시 전쟁을 상징하는 검을 써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불화의 검입니다.

불화의 검을 정말 잔혹하리만치, 기존의 모든 사람 관계를 향하여 휘둘러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려면,

내가 먼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이 주신 불화의 검으로

하나님보다 더 먼저 친밀했던 모든 사람 관계를 끊어내고 소멸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틈새 없이 하나님과 밀착하여 화평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 관계를 중심점으로 하여, 다른 모든 사람 관계가 재정립되는 것을

실제로 나 스스로 체험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주신 이 ‘불화의 검’을 자기 자신을 위해 휘둘러 본 사람만이

한 사람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할 수 있도록 도울 수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 받은 이 불화의 검을 내가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는 겁니다.

이 불화의 검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내 몸이 있어서 맺어진 모든 관계는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게 되면, 내 마음에서는 모조리 다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이 세상 모든 관계의 밧줄로부터 자유롭게 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 승천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연합하여 천국 보호자 우편까지 따라간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이제 첫 번째 대상이 되시지요.

 

바로 이 상태가 하나님과 내가 화평을 이루는 상황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최측근이자 아들의 자리에 있게 되는,

물어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땅에 있는 몸을 중심으로 맺어지는 모든 관계는

이 하나님 관계를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재정립됩니다.

 

불화의 검, 십자가를 받아들여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일어날 일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으로 가져오신 불화의 검 십자가, 이 십자가 불화의 검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이 사람을 향해 전하는 사람,

그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이 아들, 정말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