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없는 삶을 위한 질문: “나는 왜 사는가?” (2026-05-10) Youtube
◈흔들림 없는 삶을 위한 질문 '나는 왜 사는가?' 수8:30~35 2026-05-10 교정예정
▲도입, ‘왜 사는가?’ 라는 질문과, 그 답이 중요하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이 있을 겁니다.
제가 생각할 때,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음의 세 가지라고 생각이 들어집니다. 한번 속으로 답해 보시길 바랍니다.
1)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은 무엇을 하며 삽니까?’
내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기여하는 부분을 질문하는 것일 겁니다.
보통 이 질문에 사람들은 직업으로 대답합니다. 회사에서 일합니다. 사업합니다. 공부합니다.
목회합니다. 이 첫 번째 질문은 대답하기 의외로 쉬울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 질문은 조금 더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내가 살아가는 삶의 질과 내용을 묻는 것입니다.
보통 이 질문에 사람들은 다음처럼 답합니다.
‘성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버티고 있습니다.’
혹은 ‘마지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첫 번째 질문보다 두 번째 질문이 좀 더 어렵습니다.
3) 그런데 세 번째 질문이 가장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왜 삽니까?’
삶의 이유와 목적과 방향을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대답을 하더라고요. ‘행복해지려고 삽니다.’
‘가족 때문에 삽니다.’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생각해보면 학창시절에는 보통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했던 것만 같습니다.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를 고민하며 공부하는 것이죠.
그런데 사회에 나오게 되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렇게 내가 살아가는 삶의 내용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질문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어떤 답이 가지고 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내용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하게 된다’ 한들,
‘내가 왜 살아가는가?’ 그 존재 이유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 인생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내가 왜 살아가는가?’ 이에 대한 답이 명확해야 되는 것이죠.
▲한 교사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왜 교사가 되었습니까?’
교사가 이렇게 답을 했어요. ‘제 성적으로 갈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었어요.’
그런 대답을 들으면 뭔가 좀 슬픕니다.
한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
‘그래도 이 사회에서 돈도 벌고, 존경받을 수 있는 직업이잖아요?’
‘왜 목사가 되었습니까?’
‘부모님이 가라고 해서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하느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지만, ‘왜’에 대한 문제가 명확하지 않으면,
그 삶은, 온전한 삶은 아닐 것입니다.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한 의사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어요.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 의사이신데, 그분이 빈민과 전쟁이 난 곳에
가장 먼저 들어가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저자가 그분을 만나서 묻는 것입니다. ‘아니 당신은 굉장히 유명한 의사이신데,
왜 이곳에서 이렇게 힘들게 이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것입니까?’
그 질문을 받은 의사가 잇몸이 보일만큼 활짝 웃더니만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재능을 가지고, 돈 버는데만 쓰는 것은 너무 아깝잖아요?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이곳에서 이들을 만날 때 가장 행복합니다!’
본인이 왜 살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이 ‘나는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도 해결하였고, ‘어떻게 살 것인가’도 나름대로 정리해 놓았는데,
‘왜 사는가?’가 정립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위기를 만날 때마다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은 3전 1승 2패의 전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 가운데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 가운데 들어와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전쟁을 하고 있어요.
어떻게 전쟁을 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전쟁에서는 성을 돌았고요.
두 번째 전쟁에서는 매복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왜 전쟁을 하는데요?
그 ‘왜’에 대한 문제가 정리가 되었는가요?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세 번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전쟁 스코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3전 2승 1패입니다.
여리고 성을 이겼고, 아이 성에서 한 번 졌고, 다시 한 설욕전에서 이겼어요.
3전 2승 1패가 되는 거죠.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3전 1승 2패였습니다.
여리고 성의 전투는 이긴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진 전쟁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이긴 것처럼 보였지만, 아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어요.
하나님이 분노하셨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두 번째 아이 성 전투에서 한 번 패배하게 되었죠.
그러니 첫 번째 전쟁은 엄밀하게 말하면, 이긴 것이 아니라 파승이었습니다.
손자병법을 썼던 손자는 그 책에서 파승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어요. 破勝
이때 파는 깨트릴 파입니다.
‘파승’이란 깨어진 승리, 부서진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긴 것처럼 보이는 전쟁이었는데, 결국 진 전쟁을 말하는 것이죠.
*요즘 말로 ‘상처 뿐인 승리’ :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대가로 잃은 것이 너무 많아
사실상 패배와 다름없는 결과를 뜻하는 관용구
경쟁에서 이겼는데 사람이 (자기가) 망가지고,
성공은 했는데 영혼을 잃어버리고,
부부싸움에서 이겼는데 공허하고,
원하는 것을 얻었는데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파승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뭔가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으로 보면 남는 것이 없는 전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여리고 전쟁은 파승이었어요. 진 전쟁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두 번째 전쟁에서 졌어요.
그리고 이제 그들 안에 죄악을 제거한 이후에, 아이 성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이때의 전쟁이 온전한 첫 번째 승리가 되는 것이죠.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세 번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에,
하나님께서 전쟁을 잠시 멈추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세겜으로 부르세요.
왜 하나님은 이 중요한 타이밍에, 그들의 전쟁을 멈추게 하시고 부르셨을까요?
이 외에 대한 문제를 매듭짓기 위하여, 그들을 세겜 땅으로 부르십니다.
8:30에 ‘에발 산으로 가라’는 말은, ‘세겜으로 가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래에 설명 나옴.
여러분, 이 문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무엇을 하면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에 대한 내용보다 ‘우리가 왜 사는가’에 대한 문제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그런 내용으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우리는 왜 삽니까?
그 답은.. 예배하기 위하여 살아갑니다.
수8: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이겼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발 산으로 부르셨어요.
이 에발 산은, 세겜 지역 가운데 있는 언덕 중의 하나였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세겜은 아이 성 북쪽에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요.
그 세겜이라는 곳의 단어의 뜻은 ‘어깨’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세겜 땅을 가보면, 사람의 어깨처럼 생겼어요.
한 사람이 있고, 양옆에 어깨 봉우리가 올라온 것처럼,
세겜을 가운데 두고 남쪽 봉우리는 그리심 산, 또 북쪽 봉우리는 에발 산이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에발 산에 제단을 세우라’는 말은, ‘세겜으로 가라’는 말인 거예요.
그런데 남쪽 그리심 산은 햇빛이 잘 듭니다. 그래서 나무들이 많아요. 푸른 땅입니다.
반면 북쪽 에발 산은, 태양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민둥산입니다. 식물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심 산을 ‘축복의 산’이라고 여겼고,
에발 산을 ‘저주의 산’이라고 여겼어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
전쟁을 멈추고 지금 (세겜으로 가서) 에발 산에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27장에 모세가 명한 것을, 이제 여호수아가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전쟁 중이에요.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 이겼어요. 이 이후로 벌어지는 모든 전쟁은,
한 부족과의 전쟁이 아니라, 남쪽 부족 연맹과, 북쪽 부족 연맹과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가나안 부족들이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자기들 부족 혼자 이길 수 없으니, 부족들이 합친 연합체를 만들어서,
이제부터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공공의 적이 되었어요.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지금 온전한 첫 번째 승리를 이루었어요.
승기를 잡았으니 분위기를 이어가서 계속 공격을 해 나가야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멈추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세겜에 가서 예배를 드려라’
아니 예배를 원하실 것 같으면, 아이 성에서 예배하면 안 되는 것인가요?
왜 굳이 목숨 걸고 그 땅까지 가서, 적들에게 둘러싸인 그곳에서 제단을 쌓는 것일까요?
▲왜냐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유가, 이것을 위해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들이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그 땅을 잘 몰랐지만, 믿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가나안 땅이었어요.
들어가자마자 그는 세겜 땅에 머물렀습니다. 가나안 첫 정착지가 되는 셈이죠. 창12:5~6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겜에 도착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세겜의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입니다.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2:8
하나님은 세겜에서 그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어요.
그래서 세겜 땅은 누구 땅이 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땅이 되는 것이죠.
▲여호수아는 그 하나님의 말씀(창12:7~8)을 기억하면서, 그곳에 제단을 쌓았어요.
맨 처음에 아브라함이 쌓은 제단이 세겜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전쟁을 벌입니까? 그 땅에 가기 위하여, 그 땅에서 무엇을 합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첫 번째 제단을 쌓았던 것처럼,
그들 역시 그 땅 가운데 제단을 쌓기 위하여, 이 땅으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이냐면
예배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절대 잊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예배가 무너졌다면, 그것은 ‘파승’입니다.
세상 사람 보기에 눈에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예배가 무너지면,
그 사람은 이겼으나 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온전한 첫 번째 승리를 거두자, *아이 성 전투
그들을 세겜으로 불러, 이 땅 가운데 온 목적과 이유를 다시 한번 알려주시는 것이죠.
우리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하겠지만
그 무엇을 하는 장소 가운데, 어떻게 살아가는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올려, 우리의 삶과 예배를 이어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겜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다음과 같이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내용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첫 번째, ‘그리심 산이 아니라 에발 산에 제단을 쌓아라’
8:30 ‘그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것은, 신27장에 모세가 명한 것을, 이제 여호수아가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신27:4~5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세겜에는 두 개의 언덕(산)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가운데 그리심 산이 축복의 산이고, 에발 산이 저주의 산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같으면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릴 때, 어느 산에서 예배하겠어요?
당연히 남쪽 그리심 산이죠. 북쪽 에발 산은 민둥산이에요. 저주의 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심 산이 아니라, 에발 산의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심 산과 같은 상황에서 누구나 다 예배할 수 있습니다.
복을 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다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이 ‘에발 산’ 같은 경우에. 그때도 예배할 수 있는가요? *저주의 산
내 인생이 민둥산을 맞이하게 되고, 내 인생에 그늘이 사라지게 되고,
내 인생에 고통과 아픔과 절망이 둘러싸는 그 순간에서도, 하나님만 예배할 수 있겠는가?
그런 땅에서도 ‘예배를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예배, 마음을 다한 예배, 그 예배는
내 인생 가운데 가진 것이 사라지는 그 순간,
그 땅, 그 상황 속에서 내가 온전한 예배자가 될 때,
진짜 예배자가 되는 줄 믿습니다.
또한 예배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은 그 땅,
나의 일터, 혹은 나의 가정, 혹은 나의 개인적인 삶, 공간에서 조차도
제단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삶의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을 소유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왜 살아가는 것입니까?
이 땅에 아직 쌓아야 할 제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이 땅에서 그 땅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이 땅에서 어떻게 예배하냐면,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아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8: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하나님께서 ‘에발 산에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제단을 쌓을 때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는 돌’을 가져다가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시에 가나안 민족들은 신들을 위한 우상, 제단을 쌓을 때
쇠 연장으로 다듬어서 정교하게 만들어서 제단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원하는 제단의 모양을 크고 웅장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돌을 가지고 제단을 쌓아라’ 라고 말씀하셨어요.
사람이 가공하지 않은, 인공적이지 않은, 사람의 의도가 들어간 제단의 모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돌을 가지고 제단(돌무더기)을 쌓으라 라고 말씀하셨어요.
(이것은, 신27장에 모세가 명한 것을, 이제 여호수아가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돌을 가지고, 제단을 쌓는다고 한다면, 제단을 쌓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왜냐하면 돌이 다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그 돌을 쌓아 올리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더군다나 모양이 안 좋습니다. 울퉁불퉁해요. 휘어져 있습니다.
더군다나 높게 쌓을 수가 없습니다. *제단은 ‘번제단’을 뜻함
그렇습니다. 벽돌처럼 네모 반듯하게 해야만 원하는 모양대로 높게 쌓을 수가 있는데,
자연석을 갖다가 제단을 쌓기 시작하면, 높게 쌓을 수도 없어요.
그러니 그 제단을 힘겹게 쌓은들, 볼품이 없고, 초라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연 그대로의 돌을 가지고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예배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가공하지 않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꾸미지 않은 예배, 포장하지 않은 예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쇼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림입니다.
주차장이 완비되어 있고, 화려한 조명과 음향시설이 있고, 실력있는 뮤지션이 있고,
능숙한 설교자가 있어도,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심, 순결, 정직이 없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쇼하고 있는 겁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당시 유럽교회에 형식화된 예배를 강하게 비판했어요.
그때 예배가 하나의 구경거리와 문화생활로 전락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연극 무대의 모형’ 예를 들면서 이처럼 비판했어요.
“(그 당시) 목사들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연기자다.
청중은 앉아서 구경하는 관객이다.
돈을 지불하고 자신들의 어떠한 감정적인 유익을 위하여 구경하는 관객이다.
하나님은 설교자가 말을 잘 전할 수 있도록 프롬프터 역할에 불과하다”
*프롬프터 : 원고, 대본, 가사 등을 읽을 수 있도록 돕는 장치. 대본이 눈 앞에서 올라감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그 당시의 예배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 회중을 만족시키기 위한 컨텐츠입니다.
종교적인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쇼이죠.
키에르케고르는 그 설정을 바꿔야 된다고 제안합니다.
어떻게 제안하냐면, ‘연기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이다!’
여러분 모두가 지금 객석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가 무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다함께 무대 위에 서 계세요.
목사는 누구냐면, 그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진신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에 불과합니다.
그 엄청난 연극장 가운데, 유일한 관객은 단 한 분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자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전심을 다하는 그 예배,
그 예배의 그림을 꿈꾸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앉아있는 자리가 무대입니다.
청중은 단 한 분입니다. 한 분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보고 계세요.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감정이 어떠하든지, 우리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고 계신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줄 믿습니다.
△영국에서 찬양으로 유명한 교회 가운데 ‘소울 서바이버’ 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유명한 찬양 인도자 맷 레드먼이 있습니다. Matt Redman, Soul Survivor
굉장히 유명한 찬양 리더이고, 그 교회 찬양팀이 굉장히 유명해요.
그래서 이곳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찬양을 보고 드리기 위하여 방문합니다.
이 교회에 잘 나가는 담임 목사는
자기네 교회 예배 드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느 순간 위험을 감지했어요.
‘성도들이 예배자가 아니라, 관찰자 혹은 종교 소비자로 변하다고 있구나’
이때 대단한 결단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모든 악기와 음향장비를 제거해버립니다. 그리고 선포합니다.
‘우린 이제부터 찬양팀 없이 예배합니다.’
사람들이 수근거렸어요. ‘우리 교회의 강점이 찬양인데, 찬양을 제거한다고?’
찬양팀 없이 목소리로만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떠나가요. 그 전처럼 열기가 뜨겁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에 예배드리는 모든 사람들은, 마음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예배해왔는가? 무엇을 예배해왔는가?
하나님을 예배했는가? 찬양 자체를 즐겼는가?’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찬양 인도자 맷 레드맨 잔벳 레드먼이
이때의 과정을 담아서 곡 하나를 만들죠.
우리나라 말로 번역된 곡의 제목은 ‘마음의 예배’입니다. The Heart of Worship
‘마음의 예배’ 그 첫 찬양 첫줄 가사는 다음과 같아요.
원어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주 감성이 넘치는 찬양곡이죠. 주1)
이런 예배자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저희 교회는 이런 면에 있어서, 더욱더 깨어있어야만 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느 교회 못지않은 화려한 조명과 찬양팀과 여러 시설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이런 것들을 보기 위하여 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럴수록 ‘내가 진짜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대로 서 있는가?’
그 모습을 돌아보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와 목적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왜 살아갑니까?
두 번째로, 말씀대로 살기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에발 산의 제단을 쌓아놓고 예배를 드리자,
한 가지를 더하여 말씀하셨어요.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그 제단 돌 가운데 전부 다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27장에 모세가 명한 것을, 이제 여호수아가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8: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에발 산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자,
주님께서 이제는 모세의 율법을 기록한 모든 내용을,
그 제단 돌 가운데 전부 다 기록해 놓으라는 것입니다. *카타브 write, ‘새기는’것과는 다르죠
그 당시 고대 근동사회 가운데 왕이 전쟁에서 이기면
돌에다가 그 왕을 치하하는 문장들을 써놓았어요.
하나님은 지금 제단의 돌 위에다가, 그 부분에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은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신27:2~3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모세가 말한 모세오경이 정말 많은데, 그 내용을 다 적으라는 거예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요?
여호수아가 돌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 모든 순간을 이스라엘 백성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굉장히 오래된 시간이 흘렀을 거예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지금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단순히 돌 가운데의 말씀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 가운데의, 말씀을 기록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을 심령 가운데 새겨서
이제부터는 ‘걸어다니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가운데 보여주는 ‘걸어다니는 말씀’으로 살아가라고 그들을 부르셨어요.
또한 오늘날 우리를 그와 같은 목적으로 부르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 부분을 처음부터 말씀하셨어요.
수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여호수아 1장에서 그 땅에 들어가자마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강함과 담대함은 무엇을 위해 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 율법을 지켜 우로나 자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하여’
강하고 담대함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강하고 담대한 자만이, 이 땅 가운데 말씀을 지켜낼 수 있어요. 살아낼 수 있어요.
내가 안 지키는 거라고요? 아니에요. 못 지키는 거예요.
강하고 담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오랜 시간, 돌에다가 말씀을 썼어요. 그 모든 작업이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를 더하게 하십니다.
수8: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모세가 죽기 직전에 신명기 27장에서 말한 그 내용을, 지금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때 모세가 어떤 말을 했냐면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세겜에 가서 제사를 드린 이후에
이스라엘 열두 민족을 여섯 지파씩 나눠서, 양쪽 산에 서게 하라.
그 다음에 가운데서 이 말씀 이 말씀을 낭독하라’는 것입니다. 수8:33~35
여호수아는 지금 제단을 쌓고, 제단(근처)의 돌에 말씀을 적은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심 산의 여섯, 에발 산의 여섯 지파를 나눈 다음에
두 그룹이 서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신27: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그리고 중앙에 레위인 그들이 서서, 신명기 27장의 말씀을 낭독하는 거예요.
모세가 신27장에 시킨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낭독하는 것입니다. (아마 신28장도 낭독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어요)
그 가운데 하나의 문장이 끝나면, 그때 양쪽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아멘!’
이라고 크게 외치는 거예요. 그냥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이와같은 특별한 퍼포먼스를 통하여
말씀이 그들 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이죠.
우리도 지금 똑같이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쪽이 에발 산, 기분 안 나쁘시죠?
이쪽이 그리심 산입니다.
이제 서로를 향하여 몸을 틀겠습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아멘’을 다짐하며, 우리가 어떤 공동체인가를 확인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 가운데는 레위인이 있었어요.
레위인 역할은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말씀을 선포하면, 한 구절이 끝날 때마다 여러분이 '아멘'이라고 하는 겁니다.
'부어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아멘!)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16 (아멘!)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19 (아멘!)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26 (아멘!)
이렇게 오래 동안 했습니다.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 이스라엘 전 민족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이 울려 퍼질 때마다 '아멘 아멘 아멘'을 외치는 거예요.
신명기 27장과 28장에 있는 모든 내용은 어떤 내용이냐면, 축복과 저주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하면 저주 받는다, 이렇게 하면 축복을 받는다'
그러니 그 순간에 무엇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냐면,
이 땅의 복과 저주의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복과 저주의 기준이 명확한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의 기준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저주의 기준이 명확한 사람은
이 땅에서 말하는 가짜 복에 흔들리지 않는다고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러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셔서
이와 같은 특별한 의식을 행하게끔 만드셨어요.
여러분, 복과 저주에 대한 기준이 명확한 하나님의 사람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일본 교인들이 성지 순례를 가면, 꼭 방문하는 곳 중에 하나는 무엇이냐면
'26명의 성인 순교지'라는 곳이 있어요.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가톨릭 선교사와 신도 26명이 십자가형을 당한
역사적 장소입니다. *임진왜란은 1592~1598
일본 나가사키현 니시자카 언덕에 위치해 있습니다
비록 천주교인들이 방문하는 곳이긴 하지만, 종교를 뛰어넘어서,
이들이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를 우리가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이 들어집니다.
*천주교는 '성지 순례' 문화가 있습니다. 예배당이나, 순교자들이 순교했던 곳을 방문하죠.
그 가운데 토마스 코자키 라는 14세밖에 안 되는 아이의 하나의 글이 있습니다.
1597년 일본 기독교 박해 가운데 수많은 사람이 순교했습니다.
그때 토마스 코자키가 14살이었는데, 아버지 미카엘 코자키와 함께 순교했죠. *세례명
순교를 떠나기 바로 직전에, 그가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의 글입니다.
나가사키에 가면, 그 동판이 새겨져 있는데, 조금 요약하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순교하러 가기 직전에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예요.
"어머님 미카엘(아버지)과 저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현세는 허무한 것이기에, 천국의 영원한 행복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면 어떤 것인지는 잘 인내하시고, 커다란 애덕을 실천하십시오.
내 동생들 만쇼와 필립보를 비신자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애써 주십시오.
저는 어머니를 위해 주님께 기도합니다. 저를 알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도 인사해 주십시오.
거듭 말씀드립니다. 어머니께서 지은 죄를 깊이 통회하십시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배반한 죄를 지었지만, 통회하고 보속하였기에 구원되었습니다."
죽으러 가는 14살밖에 안 되는 아이가, 어머니를 향하여 글을 남겼는데, 이런 글을 남겼어요.
제가 이 글을 보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는 복과 저주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구나.'
그러니 그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편지를 어머니에게 남기는 것이죠.
'곧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현세는 허무한 것이기에
어머니가 지은 죄를 깊이 통회하십시오.
정말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남기는 글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도, 우리의 마지막 길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권면과 고백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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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마음의 예배 The Heart of Worship
The Heart of Worship - by Matt Redman
When the music fades 음악이 사라질 때
All is stripped away 모든 것치레가 벗겨져 나갈 때
And I simply come 나는 그저 주님 앞에 나옵니다
Longing just to bring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요
Something that's of worth 뭔가 가치 있는 것을
That will bless Your heart 그것은 주님을 송축하는 진정한 찬양입니다
I'll bring You more than a song 노래 이상의 노래,
For a song in itself 왜냐면 노래 자체로는
Is not what You have required 주님 당신이 원하시지 않죠
You search much deeper within 주님은 더 깊은 것을 원하시죠
Through the way things appear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You're looking into my heart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을 보시죠
I'm coming back to the heart of worship 저는 예배자의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And it's all about You, it's all about You, Jesus 이것이 주님 당신께 드리는 예배죠
I'm sorry, Lord, for the thing I've made it 주님 제가 과거에 행한 일들로 죄송해요
When it's all about You, it's all about You, Jesus 나 이제 돌아와 주님만 예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