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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나단 왕상1:22-31 2006년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아도니야의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왕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왕의 자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누군가를 왕으로 세우신다면, 그것은 그에게 왕의 역할을 맡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인 것이지
단지 누군가를 왕이라는 자리에 앉히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도니야의 이러한 문제점이 보인다면,
우리 자신 역시 아도니야와 같은 문제 있는 인간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스스로 되고자 하는 욕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욕망의 틀에 붙들려 살아가기 때문에
남들처럼 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실망을 하는 것입니다.
옆 교회가 사람들이 늘어 가면 ‘저 교회는 저렇게 부흥되는데 왜 내 교회는 부흥되지 못하지’
라는 생각에 파묻히면서 자신의 능력을 한탄하게 되고
‘나는 왜 그런가? 기도를 안해서 그런가? 설교에 문제가 있는가? 기도원에 한번 다녀올까?’
라는 등의 온갖 잡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강단에 서면서 ‘하나님이 지금 나를 이곳에 세우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늘은 교인들이 몇 명이나 나왔는가?’를 먼저 헤아리는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목사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만 생각하고 살아가면 참으로 쉬운데,
대부분은 ‘뛰어난 목사’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목사의 역할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목사가 되느냐?’라며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사에게서 ‘성경적인 복음’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목사의 예를 들었지만 여러분 모두가 다를 바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각기 다른 이유는, 하나님이 여러분께 맡기신 각기 다른 위치,
다른 인생을 살아가시면서... 해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삶, 다양한 형편, 다양한 직업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세상에 증거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께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뭐가 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으로 인해
그 뜻을 짓밟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어떻게 성취되든 상관없이
다만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아도니야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인생은 되어진 일의 결과를 가지고 ‘잘됐다, 못됐다’라는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잘된 일로 보든 잘못된 일로 보든 상관없이
지금 주어진 환경과 형편에서 그 위치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 올바른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자라면 관심두어야 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자로 살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이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던, 그가 설사 왕이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산 자는
결국 멸망의 자식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아도니야는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아도니야를 중심으로 두 부류로 나뉘게 되는데,
한쪽은 힘을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고,
다른 한쪽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세상 힘을 따라 움직이는 자들은, 왕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약속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단지 ‘누가 더 힘이 있느냐’를 생각하기에, 그들은 아도니야의 편을 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힘이 아니라 약속을 바라보는 자들은, 아도니야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아도니야를 향한 것이 아니라, 솔로몬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나단이 밧세바로 하여금, 다윗에게 나아가
아도니야의 부당함에 대해 호소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단 역시 다윗에게 나아가 “가로되 내 주 왕께서 이르시기를
아도니야가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셨나이까
저가 오늘 내려가서 수소와 살찐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군대 장관들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청하였는데 저희가 아도니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아도니야왕 만세를
불렀나이다”고 말합니다. 1:24~25
선지자 나단이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 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도니야가 왕이 될 만한 자질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단은 왕의 자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누구에게 주어져 있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자를 좇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솔로몬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나단이 이것을 알았기에 다윗을 찾아와 하나님의 약속을 훼방하는 아도니야의 부당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나단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사람과
약속이 없는 사람으로 구분하여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이 없는 자는 그가 아무리 힘이 있고,
또 그를 따름으로서 돌아올 유익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그의 결과는 멸망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대세가 아도니야로 기울어져 자칫 잘못하면 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약속 있는 자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아래 구절을 구면, 다윗은 ‘솔로몬이 후계자’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대상22:9~10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삼하12: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위 구절은, 여러 정황상, 솔로몬이 태어날 즈음에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아기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본문에, 다윗이 노쇠한 즈음에, 밧세바가 다윗을 찾아가서, 이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왕상1:17 ‘그가 왕께 대답하되 내 주여 왕이 전에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여종에게
맹세하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거늘’
▲본문 왕상1:12절을 보면 나단이 밧세바에게
“이제 내게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아들 솔로몬의 생명을 구할 계책을 말하도록 허락하소서”
라고 말합니다.
즉 아도니야가 왕이 되면 밧세바와 솔로몬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아도니야가 사람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면서도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않는 것에서 드러난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단에게 유리한 것은, 자신도 속히 아도니야 편에 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군대장관인 요압마저 아도니야 편을 드는 상황에서
솔로몬의 편에 선다는 것은 아주 불리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편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솔로몬에게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세속적 힘이 자신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살린다는 것을 믿었기에
약속이 있는 자를 바라보며, 그에게 속한 자로 남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도 아니고 힘도 아니라 오직 약속을 바라본 것이
아도니야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나단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눈에는 누가 어리석은 자로 보입니까?
아도니야 편을 들고 그를 따른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대세가 아도니야에게 기울었는지를 알면서도
아무런 힘도 없던 솔로몬 편에 선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입니까?
만약 약속이 있는 솔로몬이 아니라 아도니야 편에 선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여겨진다면,
그러한 답을 가지고 있는 나는, 과연 어느 편에 서서 살아가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약속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늘날 약속으로 오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답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자로 사는 것만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현실은 그렇게 보이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자로 산다는 것이 좋아보이지가 않습니다. 뚜렷한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냥 막연하게만 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말하되 나단처럼 약속을 바라보며
약속이 있는 사람에게 속하려고 하기보다는
대세를 따라서 내게 유리한 길을 추구하며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나단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따라 움직였다면 솔로몬 편에 서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도 노쇠하여 아무런 기력이 없는 상황에서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요압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아도니야의 편을 드는 현실을 바라보았다면
솔로몬 편에 선다는 것은 희망이 없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은 약속의 성취를 위해 일하심을 믿는다면
눈에 보이는 현실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은 약속이 성취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나단이 알았기에
아도니야가 아닌 약속의 사람 솔로몬 편에 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약속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란 것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현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고
다만 막연하게 죽어서 천국이나 갔으면 하는 기대만 가지고 살아가는 나약한 것처럼
보일 수가 있지만, 실상은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약속을 따라 왕성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세상에서의 힘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약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을 두고 새언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인해
멸망의 자식인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새언약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약속과 연결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지
우리의 욕망과 연결되어 오신 분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에서 예수를 바라보기에 예수를 나의 욕망을 채워주는 수단으로만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예수가 성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도 자신의 유익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합니다.
약속을 바라보지 않기에 자신에게 힘을 주는 예수에게 마음이 기울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는 현실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바라보는 신자는 자신이 잘되는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현실을 소망하게 됩니다.
때문에 현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전부로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약속 없이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약속 없는 자의 마지막이 어떻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란 이런 사람입니다.
▲왕상1:29-30절을 보면 “왕이 가로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고 말합니다. *대상22:9~10 참조
다윗이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다’는 것은
지금 자신이 살아있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그동안 다윗에게 있었던 환난과 죽음의 위기라는 현실도
다윗을 어찌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다윗을
붙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온 다윗이기에 후계자 왕의 문제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행할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보이는 현실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현실에서는
쉽게 근심하고 낙심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린 지금껏 눈에 보이는 현실에 붙들려 살아온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나를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의해 지금의 여러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약속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마시고
여러분 눈에 비춰진 현실에 의해 요동하지도 마시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세상이라는 현실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을 참된 현실로 바라보며 오직 그 세상만을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여전히 세상이기에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 나단이 솔로몬의 편에 선 것이 지혜로 여겨진다면
여러분 또한 그러한 지혜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예수 편에 서서 사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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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종 강세”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잡종이 순종보다 항상 질기고 강합니다.
잡초가 농작물보다 더 강합니다.
밭을 가꾸지 않으면, 잡초가 뒤덮어버리고 농작물은 말라 죽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 kick 한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즉,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강하다는 뜻입니다.
기도하려는 마음과 행동보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하려는 생각이 더 강합니다.
믿음으로 살려는 힘보다
내 수단과 방법으로 살려는 힘이..훨씬 더 강합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이삭)을 기다리려는 자세보다
내 생각과 수단대로, 이스마엘을 낳아버리는 자세가 훨씬 더 힘이 셉니다.
아브라함만 이스마엘을 낳지 않습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이스마엘들을 낳고 있는지요.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자꾸 육신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이 믿음이라고 유지하고 있는 거죠.
※아도니야가 왕이 되지 못한 것은, 그가 첩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나요?
아도니야가 왕위를 잇지 못한 것은, 그가 후궁(학깃)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다윗의 유언과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당시 왕위는 장자 세습제가 절대적이지 않았고,
아도니야는 오히려 형제들 중 서열이 가장 높은 축에 속했습니다.
아도니야의 왕위 계승 실패 이유는, 다윗의 공식적인 후계자 지명은
다윗이 밧세바에게 맹세한 대로 솔로몬에게 있었습니다.
성경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 직접 택하시는 구조였습니다.
다윗이 솔로몬을 택한 것은, 다윗이 기도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으로부터 모종의 암시가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걸 유추하면 ‘하나님은 은혜로 택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솔로몬인 거죠.
솔로몬이 왕이 되기에는, 정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당시 왕궁에서 경멸받았으리라고 여겨지는) 밧세바의 아들이기 때문이죠.
아도니야는 다윗이 살아있을 때 스스로 왕이 되려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성경 역대기상 등 기록에 따르면 아도니야는 다윗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첫째 암논과 셋째 압살롬이 비극적으로 죽고 둘째마저 일찍 사망하면서,
아도니야는 실제로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을 '장자'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도니야는 자기 출신 성분(첩 학깃의 아들)보다는,
다윗 왕권의 정권 교체 과정에서 밀려난 것이 핵심 원인입니다.
다윗의 둘째 아들은 길르압(사무엘하 3:3 기준) 또는 다니엘(역대기상 3:1 기준)입니다.
갈멜 여인 아비가일의 소생으로, 그가 다윗의 후계자나 왕권 투쟁에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일찍 죽은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