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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눅18:1~8 2013.08.11.
신학자 칼 바르트는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이라면
‘한 손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을 보는 것만큼 현실을 잘 보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거나 재해석하라는 뜻이죠.
그런데 저는 흔히 말하는 시사에 대해 별 관심이나 흥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부터 그 빠르고도 구체적인 소식들이
삶에 도움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악영향을 주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일들은 소식 정도만 알고 넘어갈 뿐 깊이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달 미국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제 눈에 들어왔고 그게 관심이 갔습니다.
나와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닌데도 그게 제 주의를 끌었던 것은, 그 문제는 당사자들 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꼭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몰라서 그렇지 사실 같은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르고,
그 문제에서 헤어나오질 못해 불행 속에 빠져 사는 사람이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그 쉽지 않은 문제의 일부라도 해결했으면 합니다.
◑트레이본 마틴 피살 사건
지난 달 전 미국 국민의 관심을 뺐었다는 그 사건은, 2012년 2월 16일 시작됐습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 샌퍼드의 한 동네에서
조지 짐머만이란 청년과, 트레이본 마틴이란 소년 사이에이 일이 벌어지지요.
트레이본 마틴은 17세의 흑인 소년이었고,
조지 짐머만이란 청년은 29세로 아버지가 독일계요
어머니가 페루 사람인, 굳이 따지자면 라틴계 백인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살던 지역은 그간 몇 건의 강, 절도 사건이 있었고,
또 좀도둑들의 흔적도 발견됐던 동네여서,
그 지역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경비대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에 가장 앞장 섰던 사람이 조지 짐머만이었고
그의 이런 열심을 높이 산 주민들은, 그에게 자치 순찰대의 책임을 맡기게 되지요.
그는 성실하게 그 일을 해왔고, 그의 신고로 몇 건의 강 절도 사건을 막은 바 있었습니다.
원래 자치 순찰대는 무장을 하지 않지만
조지 짐머만이 그 동네의 사나운 개에게 물리고 쫓긴 적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경찰은 특별히 그에게만 총을 소지 하도록 허락해 주지요.
그날, 2012년 2월 16일 밤, 조지 짐머만이 차를 타고 순찰을 돌다가
어느 집 뒤쪽으로 걸어가는 한 소년을 발견합니다.
후드를 뒤집어 쓰고 가서였는지 수상해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를 하지요.
경찰은 곧 사람을 보낼 테니, 짐머만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통보합니다.
잠시 후에 짐머만이 다시 전화를 해서, 그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보기 위해서
차에서 내리겠다는 말을 합니다.
경찰에선 재차 차에서 내리지 말라고 했지만
그 말을 듣기도 전에 짐머만은 전화를 끊지요.
그로부터 2분 후에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짐머만은 마틴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습니다.
짐머만(자치 경찰)은 코뼈가 깨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머리 뒤 두 군데 찢긴 곳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찜머만 아래 깔려 있는 흑인 소년 마틴은, 총에 맞아 죽어 있었습니다.
물론 짐머만이 쏜 총에 죽은 거지요.
총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마틴의 가슴에 발사됐습니다.
▲경찰은 즉각 그 사건에 대해 짐머만의 정당방위를 인정합니다.
(자치 경찰 짐머만도 코뼈가 깨지고, 머리 두 군데가 찢어졌음)
짐머만을 체포할 만한 아무 근거가 없어서, 체포하지 않았다 그러지요.
이것이 신문에 보도가 되고 TV 에도 보도가 됩니다.
특별히 NBC 나 ABC에서는,
경찰에 신고한 짐머만의 녹음을 편집할 때,
이것이 인종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교묘하게 편집합니다.
그러자 갑자기 전국이 시끄러워지지요.
난리가 난 겁니다. (나중에 이 담당자와 PD는 해고 당합니다)
사건은 급격하게 흑백 간 인종문제로, 미국 전역으로 번지게 됐습니다.
곳곳에서 흑인들이 유리창을 깨고 가게로 들어가서, 소요를 일으키는 등
사건은 점점 심각해지지요.
급기야 조지 짐머만에게 개인 현상금이 걸리기도 하고,
흑인 영화감독인 ‘스파이크 리’라는 사람은자기 트위터 20만 명에게
짐머만의 플로리다 집 주소를 알려 주기도 합니다.
전국에서 이런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자
결국 경찰은 뒤늦게 여론에 떠밀려 조지 짐머만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살인죄에 대한 재판이 6월 24일 시작되고 지난 달,
그러니까 7월 12일 배심원들의 심의가 끝나, 다음날인 7월 13일 판결이 발표가 되지요.
결과는 짐머만의 정당방위가 인정이 돼서 혐의 없음, 즉 무죄로 끝나게 됩니다.
이러자 다시 미국 전체가 뒤집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흑인 사회에서는 7월 20일 토요일, 미국의 100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판결에 항의하는 시위를 계획하게 되지요.
오래 전에 LA 코리아 타운에서 있었던 폭동이, 다시 일어날 기세였습니다.
▲그렇게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시위 하루 전인,
7월 19일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하곤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20분 동안 발표합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랬습니다
「자신은 이 사건에 대해 판사나 배심원이나 검사, 변호사들이 다 마땅히 자기들의 본분을
다했기 때문에, 법정에서 내린 판결에 대해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기는 피부색이 검은 흑인 미국인으로서 미국에 있는 흑인사회에서 느끼는 공분과
심정을 표현하고 싶다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하지요.
“만약에 내가 딸이 아니고 아들을 두었다면, 17살이 됐을 때
그 아이는 트레이본과 똑같이 생겼을 것입니다.
단순히 흑인이란 이유 때문에, 그리고 후드를 머리에 쓰고 있고,
앞길이 아니라 뒷길로 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범죄자 취급을 받는 일은
피부가 검은 남자들에겐 항상 벌어지는 일입니다.
나는 상원의원이 되기 전까지도, 쇼핑 센터에서 주차를 하고 걸어서
주차장을 걸어서 쇼핑몰로 들어가기까지,
내가 지나가는 길 근처의 자동차 안에 있던 백인 여성들이
차를 걸어 잠그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미국에서 살고 있는 흑인 남자들이 매일 매일 겪는 고통입니다.“」
뭐 이런 얘기를 비롯해서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여러 가지 발언을 하지요.
그 효과 때문이었는지 그 다음 날 100개 도시에서 있었던 시위는 아주 평화롭게 끝납니다.
자신들의 뜻을 충분히 전한 시위대들은 평화롭게 해산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해, 아무도 만족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작년 2월26일 그 밤에 마틴이 총에 맞아 죽은 후,
이 일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 당사자인 마틴과 짐머만 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 형제, 친구들,
또 편집을 잘못 했다는 이유로 해고 당했던 사람들,
그 재판 과정에 참여했던 배심원들까지... 그 누구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배심원 중 한 사람은 한 언론 매체에 나와서
자신은 조지 짐머만이 윤리 도덕적으로 살인을 했다고 믿는다 그랬습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잘못된 게 없기 때문에, 유죄를 인정하긴 어려웠다 그럽니다.
그러면서 플로리다 주를 비롯한 수십 개 주에서 현재 발효되고 있는 ‘정당방위법’은
분명히 이번 같은 과잉 대응을 유발할 거라고 경고하고,
의원들에게 그 법을 뜯어고칠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한 사람도 만족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에 연루된 누구도 원한이 풀어지질 못했습니다.
당사자인 마틴은 이미 죽었고, 조지 짐머만 역시 자기는 정당방위인데도
평생을 살인자처럼 살아가야 하고, 그들의 부모 역시 평생 한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판 검사와 경찰, 배심원들도 흑인들에게 다 각인이 돼서
그들 역시 평생을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 살게 됐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 모두에게 부각된 문제가 뭐였겠습니까?
‘원한’입니다.
원한이란 뭘까요?
원한이란 내게 닥친 고통과 아픔에,
거기에 맞는 정의가 행해지지 않았다는 게 원한입니다.
지금까지 장황하게 말씀 드렸지만, 사실 이 조지 짐머만 사건은
‘원한’을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그것이 뼛속 깊이 각인된 사건이었던 겁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전문가입니다.
우리 말엔 원한과 비슷한 단어가 유독 많지요?
‘서운하다, 섭섭하다, 억울하다, 그럴 수가 있냐? 나를 뭘로 보느냐?’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원한과 동의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받아야 할 마땅하고도 정당한, 정의로운 대접을 받지 못했고
내가 불의나 불이익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도 해소되지 않았다, 이게 원한입니다.
이 사건으로 미국 흑인사회는 물론이고 아무 상관이 없는 언론과
미국의 시민들까지도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고 분개했습니다.
모두 다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즉 형태는 다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 사건으로 미국의 모든 사람들 속에 원한이 쌓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접하는 우리들 역시 듣는 소식만으로도 원한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이 숙제 같은 문제를,
조금이나마 풀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한 원한 맺힌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흔히 오늘 본문은 ‘기도를 어떻게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낼 것이냐?’ 할 때,
예로 드는 본문입니다. 과부가 매일 재판장에게 찾아와서 자기 원한을 풀어달라 그럽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유의해야 될 것은,
이 이야기는 단순히 끈질기게 굴어서라도 얻을 것을 얻어내라는 얘기가 다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론 마지막 절에 “내가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다음, 결론 같은 말씀을 하시기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러시지요. 눅18:8
이걸 보면 주님의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시는데, 그날에는
기도를 얼마나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양이냐 염소냐, 하나님 백성이냐 아니냐, 하나님의 자녀냐 아니냐,
영생을 소유했느냐 아니냐 그걸 판단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즉 오늘 말씀은, 단순히 기도의 응답 뿐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되는지,
또 죄를 다루는 원칙은 뭔지 하는 것까지 다 담고 있는 깊은 얘기라는 겁니다.
아마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원한”이란 문제를 깊이 통찰해 보면
그것까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겁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 모두 전능하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재판장은
자기 스스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 그러지요?
이 얘기는 자기 위에는 그 누구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절대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의로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과부는 이 재판장을 찾아 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도시에 자기의 원한을 풀어줄 능력과 권한이 있는 사람은
이 재판장 한 사람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그러나 조지 짐머만 사건으로 사람들 속에 생긴 원한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제일 먼저 한 말이 뭐였습니까?
자기는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플로리다 주 법을 철저히 준수한 판사 검사 변호사 배심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다 했기
때문에 자신이 대통령일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거예요.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원한이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우리 원한을 풀어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 이 땅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얼핏 생각하면,‘그게 무슨 말이냐? 힘있는 사람이 조금만 손 써도 해결될 것 아니냐’
그러시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내 원한 하나만 풀면,
다른 사람에게 또 원한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왜 하나님이 그렇게 문제를 질질 끌면서 우리들의 고통이나 상처나 원한을
그냥 두시냐, 속히 풀어 주시면 되지 않느냐 그러시겠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겪는 인생의 질곡이 뭔가 하니, 바로 이 문제입니다.
철 없는 아이로 살다가 어느 순간 뭔가를 알게 되면
가장 먼저 ‘세상은 원한 덩어리구나’ 라는 걸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건 세 살이 됐든 열 세 살이 됐든 서른이 됐든 가장 처절하게 느끼는 심정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시키고,
내가 지고 싶지 않은 짐을 지우는 게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것 때문에 인생은 힘들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
이것이 사람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분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저 사람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피해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살 의욕이 나질 않습니다.
제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부르짖게 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래? 우리 한 번 제대로 풀어볼까?
그러면서 나를 재판정에 세우시고, 네가 고백하고 있는 그 원한을 풀기 위해
일단 모든 자초지종을 알아보자 그러시면서, 나에게 원한이 생기게 했던 사건과
그에 관련된 모든 주변 인물, 모든 증거, 그리고 모든 기록들을 다 들춰내서
내 앞에 펼쳐 놓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내가 100 % 옳을까요?
그 가운데는 내가 원한을 갖게 된 것도 있겠지만
나 때문에 원한을 갖게 된 사람도 수없이 많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나 하나지만 내가 상대하는 사람은 수십, 수백 명입니다.
숫자로만도 일단 최소 수십 배 되지 않습니까?
받는 원한보다는 주는 원한이 확률적으로도 훨씬 높습니다.
보세요!
오늘 본문의 재판장도 과부가 그렇게 와서 귀찮게 구는데도 질질 끌고 있잖아요?
왜겠어요?
과부의 말이 100% 맞다면 그렇게 질질 끌었을까요?
거기엔 뭔가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중의 은혜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결론적인 재판을 미뤄주고 계시다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그래 당장 따져 보자!”하고 내 인생에 찾아 오셔서,
내가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 모든 관련된 것을 까발려 보면,
오히려 원한이 풀려지기보다는
내가 남에게 원한을 안겨 준 문제 때문에, 전혀 다른 문제가 야기될 거라는 겁니다.
이런 문제가 바로 이번에 터진 겁니다.
조지 짐머만(자경단)이 옳다고 하면, 트레이본 마틴은 너무 너무 억울합니다.
그렇다고 트레이본이 옳다고 하면, 짐머만은 또 나름대로 억울하다 그럴 겁니다.
또 무죄판결을 한 배심원들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 사람들도 너무 너무 억울하다 그럴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인생의 현주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
하나님은 내 문제와 다른 이들의 문제를 한꺼번에 모아
한꺼번에 처리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 앞의 현실만을 보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불의를 정의로 바꾸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존재이고,
그때가 되면 하나님은 제가 늘 기도하는 대로 우리 눈에서 눈물을,
우리 가슴에서 한숨을 거두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원한을 풀어주실 거라는 이 믿음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이게 예수 믿는 근거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다면, 즉 내 원한 뿐 아니라
내가 알지도 못한 순간에 뿌려 놓은 원한을 갚아주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거나, 선택하거나,
그 쪽으로 내 인생을 걸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너무 너무 비참해 집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결론이 뭐냐 하면 해결되지 않은 원한과 해결되지 않은 부정과 불의를 가지고
우리 인생은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철학과 종교는 사람들에게 보통 이렇게 가르치지요.
“그러니까 원한도 품지 말고 원수도 만들지 말고 다 그러려니 하고 살아…
짐머만이 무죄 판결 받았으면 그게 옳은 줄 알고 그렇게 살아…”
문제가 어디 있는 줄 아세요?
첫째, 트레이본 마틴이 당신 아들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못 견딥니다.
둘째, 진짜 그 말이 맞다면, 옳고 그름을 따질 것 없이 불의를 정의로,
정의를 불의로 알고 그냥 살라면, 그러면 길 가다가 기분 내키는 대로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면 그게 왜 불의입니까?
현대판 사사기 시대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다시 그렇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정의는 정의대로, 불의는 불의대로 존재합니다.
다만 문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마지막에 이 모든 정의와 불의를 저울질 하셔서
심판하실 때까지 견디라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너무 너무 고통스러워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요?
이성적으로도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선택입니다.
이런 문제를 감안 하더라도,“인생은 정의 불의 그게 다 섞여 있으니 포기하고 살아!”
이것보다는 “궁극적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불의를 정의로 마무리 하실 거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게 훨씬 더 인간다운 삶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원한을 풀어주실까요?
원한을 풀려면 원한을 갚아야 되겠지요?
트레이본 마틴이 죽었습니다.
본인은 이미 죽었으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나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주변의 친구들은 원한이 쌓였습니다.
그들이 원한을 풀기 위해 기대했던 건 뭘까요?
조지 짐머만이 처벌 받기를 원했습니다.
즉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그 원한을 누군가에게 갚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온통 뒤집어진 이유가 뭐였습니까?
특히 흑인사회가 그렇게 뒤집어진 이유가 뭐겠습니까?
트레이본 마틴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흑인 남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적인 모든 두터운 원한이, 조지 짐머만이 형벌을 받음으로서 원한을 갚을 때에
그 짐이 조금이라도 풀어질 줄 알았는데, 그게 갚아지지 않았단 말이예요.
“원한? 그것 잊어버려!”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다시 또 올라옵니다.
그래서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문제가 어디 있지요?
그 원한을 조지 짐머만에게 갚으면.. 그 가족한테는 또 원한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배심원들 집에다 돌을 던지고 유리창을 깨고 위협하면
그들에게도 또 원한이 생깁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될 게 있습니다.
심판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원한을 어떻게 풀어 주셨지요?
조지 짐머만에게도 아니고 배심원에게도 아닙니다.
전능하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한테 그 원한을 갚으셨습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와 지옥을 사하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 모든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까지도 그 의미가 확대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꼭 믿으셔야 합니다.
사람들은“다 잊고 살아! 저 말 다 맞아. 그러니 신경 끊고 살아!“
그러지만 우리는 그렇게 못 삽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처럼 끊임없이 ‘내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는 게
우리 인간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내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선택하신 길이 뭐냐?
당신의 독생자에게 그 원한을 갚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와 지옥의 형벌 뿐 만이 아니라 우리가 갚을 모든 원한을
대신 뒤집어 쓰신 채 십자가에 달리신 겁니다.
지구상에 이 원한과 고통과 인생의 처참함을 다루는 수많은
종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딱 하나 있습니다.
오바마가 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법! 나는 어쩌지 못합니다.
당신과 내가 함께 느껴 주는 것, 공감해 주는 것, 위로해 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게 인생의 모든 철학과 종교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재판장 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위로나 공감이 아니라
원한을 풀기 위해 원한을 갚아 주셨습니다.
지구상의 어떤 종교나 철학이나 가르침도, 위로하는 단계에서 그치지 않고
원한을 풀기 위해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종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전능하신 재판장 앞에 나가야 될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능한 과부의 모습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 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과부가 한 일이 뭐라구요?
번거롭게 하고 괴롭게 했습니다.
과부가 그렇게 한 이유가 뭘까요?
재판장에게 좀 더 품위있고 고상하게 굴 수는 없었을까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과부는 별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재판장을 설득할 길이 없었습니다.
한편, 재판장은 그 도시에서는 왕 같은 강력한 존재인데
왜 과부의 청을 안 들어 주었을까요?
저쪽에도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과부가 자기가 옳다 억울하다 읍소하지만,
재판장 입장에서 볼 때는 과부 혼자 옳기만 한 건 아닙니다.
저쪽 사정도 있다는 겁니다.
재판장이 아무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 해도,
과부 얘기가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면, 그 하는 말이 타당하다 그러면
왜 그 문제를 질질 끌었겠어요? 금방 처리해 주지요…
그 재판장이 볼 때도 그 과부의 사건은, 일방적으로 한 쪽 편을 들 수 없는 겁니다.
다른 쪽 얘기는 또 다릅니다.
그럴 때 이 과부가 할 수 있는 호소는 뭡니까?
“이래저래 해서, 저 원수가 틀렸고 내가 옳습니다. 내가 피해자고 저쪽이 가해잡니다”
그러면서 뭔가 증거를 입증했다 그러면, 벌써 끝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과부는 그렇게 100% 설득할 뭐가 없는 겁니다.
입증할 거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예요?
그냥 가서 귀찮게 하고 떼 쓰고 번거롭게 한 거예요.
▲한 번 과부의 입장이 돼서 생각해 보세요.
재판장에게 한 번 갈 때마다 얼마나 무시당했겠어요?
원래도 무시하는 사람인데 과부니까 그게 얼마나 더 심했겠어요?
그러니까 과부는, 재판장 집이나 사무실에 갈 때마다, 또 한 번 속으로 각오합니다.
“나는 오늘도 또 짐승취급 받을 거야. 인간 이하 대접을 받을 거고 또 무시 당할 거야.
그래도 나는 저 사람한테 가야 돼. 저 사람만이 내 원한을 해결할 능력이 있으니까…”
이게 과부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도 그렇게 나가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설득할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나갔을 때 내가 정당하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이 틀렸다고 주장한 만한
그 어떤 근거도 찾질 못하겠습니다. 나는 나의 무죄 를 주장할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철저히 무시 당할 겁니다.
재판장이 나를 무시하면 그건 불의한 재판장이지만,
하나님은 나를 철저히 무시하셔야 합니다.
저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가는 게 과부의 심정입니다.
“하나님! 나는 내 인생에 찾아온 원한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지만
사실 다 털어놓고 보면, 내가 얻은 원한보다는, 내가 안겨 준 원한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정말이지 하나님의 재판정 앞에서 내가 정당하다고, 의롭다고, 옳다고 주장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어쩌면 좋아요? 나는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찾을 수 없어요.
하나님이 나를 무시하고 심판하고 죄인으로 정죄하시고 지옥에 던지신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밖에 없어요…”
이게 과부의 심정입니다.
이걸 성경에선 뭐라고 하냐 하면 회개라고 합니다.
“그 앞에 나갈 아무 근거가 없지만 그래도 나가는 것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귀찮게 하고 번거롭게 하더라도
하나님 만이 제 원한을 해결해 주시고 구원해 주실 전능하신 재판장이기 때문에 나옵니다…”
이게 과부의 심정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어떤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열립니다.
자격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가 열린다는 겁니다.
이게 정말 가시적으로 느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우리는 그걸 잘 못 느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금방 교만해 질 것을 아시기 때문에,
피부로 느끼게 해 주시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우리들에게 은혜의 세계는 열려 왔고,
열리고 있고, 또 열릴 거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가 정당해서, 뭔가 주님이 우리에게 빚진 게 있어서 갚아주시는 게 아닙니다.
과부처럼 재판장을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까 떼쓰는 그 모습을 보고서도
주님은 자격 없지만 우리에게 은혜의 세계를 열어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구원의 길이고 그런 사람을 오늘 본문에서는
7절에 나오는 대로 ‘택하신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은 택하신 자들입니다.
택함 받은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매일 매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말씀대로 긍휼하심을 받고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다같이 히 4:15~16 말씀을 읽어 보십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근거는, 아직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와도 좋다고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 원한을 갚으시되 내 원수에게 갚은 게 아니라 예수님께 갚았다는 것,
그리고 나에 대한 내 원수의 원한 역시, 내게 갚은 게 아니라 예수님께 갚았다는 것!
조지 짐머만이 사형판결을 받아야 했는데, 누가 사형판결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받고 처형당하셨습니다.
여러 말씀을 드렸지만 이게 유일한 해답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우리들의 원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길!
그것은 ‘내 원한은 이미 갚아졌다’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 대해서도 더 이상 원수가 되지 않고,
그 누구에 대해서도 더 이상 그가 내 원한의 대상이 되지 않는 근거가 뭐라구요?
예수 그리스도가 저를 위해 죽으셨다는 겁니다.
그 사실이 매일 매일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날마다 새롭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날마다 시마다 때마다 돕는 은혜를 구해야 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넉넉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오늘 많은 말씀을 드렸지만 명확하게 해결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겁니다.
적당한 시간에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 불의한 재판장 같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 분께 담대히 나갈 담력을 오늘 얻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우리 모두 스스로 다짐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원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을 푸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도, 또 누구한테라도 이미 원한은 풀어졌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걸 믿지 못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과 영생은 선물이지만 그것은 죽은 다음입니다.
주님은 이생에서도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원한이 십자가에서 이미 풀어졌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그 뜻을 새기기 위해서 담대함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야 합니다.
주님은 여전히 능력 있으신 우리들의 영원한 재판장이십니다.
우리가 과부의 심정을 잊지 않는 한, 우리들의 인생길은 평온할 것입니다.
우리 원한은 풀어졌음을 믿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매일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한 없는 은혜의 홍수 속에 사시는 복이 저와 여러분께 늘 함께 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