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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찬송 왕상1:40-49 2006년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정한 것은, 아주 멀리 (그리스도의 부활을) 내다보는 시각을,
또는 (하나님의 나라 전체를 내다보는) 아주 큰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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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왜 꼭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시는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왕위에 세워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 왕국은 하나님의 긍휼로 지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솔로몬이어야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솔로몬은 범죄한 다윗을 용서하신 사랑의 증표로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만약 솔로몬이 아니라 다른 자가 왕위에 앉게 된다면,
그것은 다윗 왕국은 하나님의 죄용서와 관계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도니야가 아닌 솔로몬을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발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소망한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계속되는 죄 용서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이것이 다윗에게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내 위(왕좌) 에 앉을 자를
주사 나로 목도하게 하셨도다 하셨나이다”라고 찬송을 합니다. 1:48
▲사실 여러분은 ‘솔로몬이 왕이 되던, 아도니야가 왕이 되던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니냐?’라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솔로몬이든 아도니야든 이스라엘의 왕이고, 또 먼 옛날 얘기이니
지금의 내게 별 중요하지 않은 얘기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시면서 까지 솔로몬만을 고집하시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다윗의 범죄에 대한 내용인데,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을 하고 아들을 하나 낳은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윗의 아이가 정녕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삼하 12:14)
결국 아이는 하나님에 의해서 죽어가게 되고,
다윗은 아이를 위해 금식을 하면서 눈물로 간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시고 아이를 죽이십니다.
다윗의 죄로 인해 아이가 죽은 것이지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다윗의 눈물의 간절한 기도가 아이를 살리게 하는데 있어서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입니다.
눈물의 간구가 아니라, 그 무엇을 한다고 해도 아이를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다윗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왕 다윗의 죄를 용서하시려면
다윗의 기도를 들으셔서 아들도 살려주시면 안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더 크게 보여주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무조건 인간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하나님을 구축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위해서 자기 마음에 드는 신을 하나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두고 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하고자 하시면서도, 아이를 죽이시는 것은
죄 용서에 관한 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대로 행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시면서도 죄의 대가를 다윗의 아들에게서 찾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다윗의 죄 용서의 증거물로 태어난 것입니다.
솔로몬이 태어날 때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디디야,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솔로몬이야 말로
다윗에게는 죄 용서의 증거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하나님께서 아이를 죽지 않게 하시고,
그 (죽은) 아이로 하여금, 다윗의 후계자가 되게 하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죄 용서의 원칙이 모두 무너져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아이의 살아남에는 결국 다윗의 간절한 눈물의 기도가 들어가게 되고,
따라서 언약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라, 다윗의 간절한 기도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면 된다’는 말이 진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인간의 어떤 공로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가 누구인가도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찬송하는 이유는,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를 주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목도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을 찬송할 만한 일이 될까요?
찬송은 곧 기쁨과 즐거움을 뜻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찬송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로 솔로몬을 주셨고,
지금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을 목도한 것이 다윗에게는 기쁨이고 즐거움이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며 즐거움이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이 그토록 큰 기쁨이고 즐거움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 기쁨과 즐거움이 어떤 것이었는가
를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쁨과 즐거움을 알았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신자의 찬송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 노쇠하여 생존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도달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인생의 마지막에 도달한 때에,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돈이 아무리 인간에게 기쁨과 힘을 준다고 해도, 인생의 마지막에 도달한 시점에
돈이 과연 여호와를 찬송할만한 기쁨의 조건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에 도달해 있는 다윗으로 하여금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을 목도하게 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게 했다면,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에
우리가 깨닫지 못한 다윗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1:46-47절을 보면 “솔로몬이 나라 위에 앉았고 또 왕의 신복들이 와서 우리 주 다윗왕에게
축복하여 이르기를, 왕의 하나님이 솔로몬의 이름을 왕의 이름보다 아름답게 하시고
그 위를 왕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이 구절에서도 한가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왕의 신복들이 다윗을 축복을 하는데, 그 내용이
‘왕의 하나님이 솔로몬의 이름을 왕의 이름보다 아름답게 하시고
그 위位를 왕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신복들이 다윗 왕을 축복한다면, 다윗을 높이는 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름을 다윗의 이름보다
더 아름답게 하시고, 솔로몬의 위를 다윗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구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다윗을 축복하는 것입니까?
신복들의 축복의 내용은 어찌 보면 노쇠한 다윗보다는
솔로몬에게 더 잘 보이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신복들이 축복하는 말을 듣고, 하나님을 찬송을 한 것입니다.
결국 신복과 다윗 모두는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권력을 쟁취하는 차원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한 것은 권력을 차지하고자 한 권력 다툼이었을 뿐이지만
솔로몬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럼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이 왜 축복이 되며
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일까요?
다윗의 왕위는 장차 메시야에게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왕위를 이을 자로 택하신 것은
장차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진정한 왕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실 메시야가
무엇을 위해 오시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즉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강한 자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인도하심으로 죄용서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기 위함인 것이죠.
이것이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았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언약을 성취하실 것임을 내다봄으로써
하나님을 찬송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30-31절의 “(다윗)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라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내다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않는 부활을 소망을 바라본 것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부활의 언약을 하나님이 택한 자를
다윗의 위에 앉게 하시는 것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다윗 왕국의 진정한 왕으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음부에 버린 자가 되지 않을 것이고, 육신이 썩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언약을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에서 바라보았기에, 언약을 이루실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즉 다윗은 단순히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으로 축하하고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바라본 것이고,
인생의 마지막에 도달한 시점에 죄인된 자신이 음부에 버린바가 되지 않고
육신이 썩지 않는다는 언약을 바라볼 때
언약을 성취하실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신복들이 다윗을 축복할 때도 ‘솔로몬의 이름을 다윗을 이름보다 아름답게 하시고,
솔로몬의 위를 다윗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한 것 역시,
단순히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다윗보다 아름답고 크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왕위가 메시아로 이어질 것을 바라보고 한 축복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눅1:31-33절을 보면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예언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위는 단순히 권력을 의미하는 왕위가 아니라
영원한 왕이 세상에 오실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왕위가 솔로몬에게로 계승되는 것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며 찬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의 찬송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이 담겨 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구속에 참여된 자로서 구속을 이루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찬송이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된 성도들이
구속의 일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노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신자가 자신의 임의대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참여 된다는 것이 우리가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구속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됨으로써 가능한 것이
찬송인 것입니다.
따라서 찬송에는 인간의 열정이니 뜨거움이니 하는 것들이
사실상 무의미한 것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위기가 뜨겁고 노래하는 목소리가 크고 열정적
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송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말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노래는 단지 성령에 의해 알게 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담아서 나타내는 형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노래를 열정적으로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다윗의 마음에는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음부에 버림바 되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구속을 향한 감사함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긍휼과 자비에 대한
감사함과 기쁨이 충만한 신자의 심정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윤식 목사 [열왕기상 4강]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