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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장 기계적 회개의 특징

LNCK 2026. 5. 2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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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강해(01)/사사기1:1-10/‘기계적 회개의 특징

 

◈기계적 회개의 특징            삿1:1~10                 2025.06.15. [사사기강해(01)]

 

※맨 마지막에 ‘아도니베섹’에 대한 해석이 ‘신약적’이라서 녹취했습니다. 아래 삿1:6~7절을 보세요.

 

오늘부터 사사기 강의를 시작합니다.                          

사사기 하면 많은 사람들이 거의 공식과 같은 이미지를 압니다.

 

특별히 사사기가 지금 이 시대 앞에,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크다고 보고,

[사사기 강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사기 강해로 아마 2025년 하반기 주일 설교를 다 채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참혹하고 또 곤고했던 시대,

그래서 사사기에서 딱 한 문장을 집어내라면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러분은 모두 이 문장을 아마 기억할 겁니다.

그런데 사실 사사기는 어쩌면 그래서 성경에는 가장 반전이 있는 책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뭐죠? “기계적 회개의 특징”

그럼 도대체 ‘기계적 회개’라는 게 뭘까요? 그게 사사기 패턴이에요. ↙

 

사사기 때,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하나님이 이런저런 모양으로 징계를 하시죠.

 

그러면 또 살려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살려주시고,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세요.

 

그러다가 삶이 조금 편안해지면 또 죄를 지어요.

그래서 또 하나님께 징계를 받지요.

그러면 또 ‘하나님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구원해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또 살려주세요. 이게 사사기에서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이런 걸 보통 우리가 ‘기계적 회개’라고 그래요.

 

▲자 그러면 그건 교회를 좀 다닌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사기의 패턴일 텐데,

굳이 그 얘기를 이 시대에 다시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래서 반전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번 넘어지면 100번에서 한 번 더 일으키시는 하나님,

또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우리의 끔찍한 죄악보다

하나님은 더 큰 성실로, 더 큰 집념으로 우리를 추적하셔서

결국 다시 일으켜내시고야만은 하나님! (이걸 사사기에서 보게 되죠. 반전이라면 반전입니다)

참혹한 역사가운데서, 가장 희망이 담아진 책이 사실은 사사기예요.

 

그런 큰 그림을 이해하고 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로 서야 하는가에 대해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삿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었다는 말은, 두꺼운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는 얘기예요.

역사의 한 페이지가 종말을 고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가 일어나고 있어요.

 

근데 이 새로운 시대가 그다지 희망차거나 기대가 되는 시대가 아니에요.

바로 그 시간이 사사기 시간이에요. 그런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참고로, 구약에서 '가나안 인'은, 당시 가나안 땅의 '평지, 해안 쪽'에 살던 가람을 가리키고,

'아모리 인'은 반대로 '산지'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해요.

 

▲자 그러면 여호수아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에 대해서, 성경에서 좀 찾아보도록 하죠.

여호수아가 이제 백성들을 모아놓고 한 얘기예요.

 

수23:11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12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13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

 

수23:14절을 보시면 이 얘기를 이때 한 겁니다.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은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라’

 

그러니까 이 말은, 사실 여호수아의 마지막 유언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곧 죽어요. 그리고 여호수아의 시대가 끝이 납니다.

 

근데 아직 가나안 땅의 정복은 많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사사기를 시작할 때이죠.

(대도시 중심으로 점령했고, 그 성읍 주변의 땅들은 남아 있는 상태)

 

자 다음 여호수아서 24장을 좀 봅시다.

수24: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30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습니다.

그러니까 사사시대는, 여호수아가 죽는 그 즈음에 시작된 새로운 역사의 장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십 세에 별세하셨는데요.

요즘은 ‘백수하세요!’ 라는 말을 안 한대요. 백살 넘는 분들이 하도 많아가지고요.

그래서 요즘은 ‘모세수 하세요!’ 그런대요.

 

그래서 본문 사사기 1장은,

여호수아의 죽음이 아직 시대적으로 온기가 남아있는 때입니다.

 

그래서 삿1:1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그러니까 남겨진 미완의 과제를 물려받은 백성들이,

이제 가나안 정복 사업을 마저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여호수아가 죽은 지 얼마 안 되니까,

여호수아에게 명령했던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여호수아가 죽음으로 손 턴게 아니라, 계속 하겠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자기네들끼리 의논해 가지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지금 누가 먼저 올라가야 되겠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묻고 있어요.

 

아직도 여호수아의 통치의 여지는, 여기 1:1절까지는 잘 진행이 돼요.

그런데 2절을 보십시다.

 

◑삿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아주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유다가 올라갈 것을 명하십니다.

여러분, 이제 모세의 시대도 가고, 여호수아의 시대도 갔어요.

근데 이제 나머지 임무를 위해서, ‘누가 먼저 올라갈까요?’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유다가 올라가라’

 

왜 하필 유다지파 일까요? 그렇다고 유다가 장자 지파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제가 한 군데만 성경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창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 말은 야곱이 열두 아들들을 불러 앉혀놓고, 유언과 예언을 겸하여 말할 때,

유다지파에게 한 예언이에요.

 

근데 여기 보니까 ‘규’가 통치자의 지팡이죠.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않을 거래요.

그게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이제 드디어 역사의 전면에,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구속의 은혜가

어떻게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인가를,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 이 명령으로 드러내고 시작을 알리는 겁니다. 수1:2

야곱의 유언의 성취라는 거죠.

 

하나님의 유다 지파 속에서 실로가 오신다고 예언했는데, (실로는 오실 메시야를 암시하죠)

그 이야기의 성취를 드디어 시작하시는 겁니다. 1:2절에.

 

◑삿1:3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사실 하나님은 유다지파만 명시하여 올라가라고 했는데, 1:2

그의 형제인 시므온지파에게 유다지파가 요청을 한 거예요.

 

‘우리 같이 올라가서 정복하자. 이 명령을 같이 수행하자’

여기에 하나님의 일에 대한 ‘함께 함의 은혜, 연합의 은혜’를 강조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이걸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역이나 하나님의 일은, 항상 시편의 말씀처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시133:1

하나님의 일은 함께 하는 게 복이에요. 또 함께 할 줄 아는 게 은혜입니다.

 

사실 함께 하면 더 비효율적일 때가 많아요. 시간도 더 걸리고...

‘아 이거 뭐 혼자 후딱 해치우면 금방 끝날 일을, 이거 꼭 이렇게 여러 명이 나와서

같이 해야 되나?’ 교회 일은 이럴 때가 많아요.

 

그런데 교회 일은 항상 언제 ‘뜻밖의 은혜’가 경험되어지냐면,

못하는 사람, 잘하는 사람,

집이 먼 사람, 가까운 사람 할 것 없이,

모여서 같이 할 때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밥도 ‘혼밥’하지 마세요. 오늘 점심에는 꼭 누구랑 같이 드세요.

참 신비스러운 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셨어요.

몸은 지체들이 다 같이 있어야, 온전한 몸이 됩니다. 함께 해야 온전한 몸이 됩니다.

 

발은 발대로 따로 돌아다니고, 손은 손대로 따로 돌아다니면... 그걸 몸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래서 교회의 스피릿(정신) 가운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스피릿이 뭐냐 하면,

높은 자, 낮은 자, 부한 자, 가난한 자들이 다 같이 함께 할 줄 아는 교회 ... 믿습니까?

 

능력 있는 사람끼리 따로 놀고,

능력이 좀 안 되는 사람들끼리 또 따로 놀아야 되고,

이런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믿습니까?

 

그래서 김장을 할 때도, 그냥 10명이면 충분히 할 거를, 100명씩 막 불러요.

나중에 보면, 100명이 먹고 가는 게 더 많아요. 그렇지만 원래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공동체의 첫 번째 가치는, 효율이 첫 번째 가치가 아닙니다.

‘이걸 함께 했다’는 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돼야 됩니다.

 

찬양 연주할 때도, 솔로도 은혜가 되고, 사중창도 은혜가 되고, 듀엣도 은혜가 되는데,

제가 보기에는, 진짜 백미 중에 백미는 합창입니다.

찬양대원들이 각양의 음색을 가지고 하나의 목소리로 만들어서,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영광을 집중하는 이 은혜로운 풍경을, 우리가 매주 만나지 않습니까!

 

함께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점심은 절대 혼밥하지 마시고 함께 드세요.

우리 좌우로 인사합니다. “함께합시다!”

인사 한 번 더 할까요? “같이 갑시다!”

 

그것이 오늘 유다가, 시므온 지파를 ‘함께 올라가자’고 요청한 이유예요.

그럼 그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요? 

 

※유다지파가 전쟁하러 올라가는데, 시므온 지파가 동참한 이유             주1)

 

◑삿1: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였어요. 하나님께서 혁혁한 결과와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럼 그들의 군대수가 많았거나, 전략이 뛰어났거나, 사기가 유난히 충천해서 이겼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2절 하반절에 이런 놀라운 말씀이 숨어져 있습니다.

1:2b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I have delivered

 

여러분, 위 구절을 자세히 보세요. ‘넘겨주겠노라, 넘겨줄 것이다’ 라는 미래 시제가 아닙니다.

‘넘겨주었노라’ 이렇게 완료 시제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에 관련된 내용은, 항상 원래는 시제가 미래이지만, 완료형으로 써요.

그걸 ‘예언적 완료 시제’ 라고 하죠.

‘예언적 완료시제’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그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치 과거에 이미 완료된 것처럼 표현하는 수사적 기법입니다.

주로 히브리 예언서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절대적으로 성취될 것임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은 앞으로 되어질 게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미래의 일이지만, 이미 이루어진 거예요. 너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은, 이런 어마어마한 신비의 실체를 붙들고,

그 실체에 붙잡혀서 사는 거예요.

 

여호수아를 향해서 모세가 가나안 땅의 진입을 명령할 때 ‘주었노니’ 거기서도 그래요.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그 땅을 밟지도 않았는데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내가 너에게 주었노니’ 여기도 완료형으로 씁니다. 수1:3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된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I have given you

 

우리 성도들이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어마어마한 실체를 가지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표정을 늘 어둑어둑하게 다니면 안 돼요.

밝게, 용기 있게, 쫄지 말고, 담대하게! 믿습니까?

‘주었노니’ 수1:3      I have given you

‘넘겨주었노라’ 삿1:2  I have delivered

 

십자가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우리에게나 필요한 시제이지,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 시제가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빚으시고, 세상을 존재케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 실체에 붙들려 사는데, 뭐가 두려워요? 뭐가 우리가 쫄며 살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런 용기로 담대하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를 한 것은, 이미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예요. ↓

 

신7: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이런 승리의 내용,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모세가 여호수아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던 내용이에요.

 

신7: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이러한 우상척결을 하려면, 하나님이 가나한 땅에 반드시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얘기죠.

우리의 노력의 여부에 따라서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까? No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반드시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얘기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미래이지만,

완료형으로(이미 일어난 일처럼) 언제나 소개하는 겁니다.

 

◑삿1: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유다 지파가 시므온 지파와 더불어 올라가서

베섹에서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1만 명을 죽였어요.

 

5절에, 아도니 베섹은,

베섹은 지명이고, 아도니는 직책이에요.  *아도나이에서 파생된 말

그래서 ‘아도니 베섹’은 ‘베섹 지역의 군주’를 뜻해요. 아도니(lord), 베섹(지명)

영어로 번역하면 lord of Bezek 이죠.

 

◑삿1: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사실 오늘 어쩌면 설교의 가장 본론이 아도니 베섹입니다.

우리가 보통 이름으로 알고 있지만, 호칭이에요. ‘바로, 아비멜렉’ 같은.

 

근데 그 아도니 베섹을 붙잡아서 어디 어디를 잘라요?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는 게 아니라,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요.

여러분 그러면 일단 뭐가 문제가 생깁니까?

엄지손가락이 없으면, 무기를 잡을 수도 없고,

엄지발가락이 없으면, 걸을 수도 없고 뛸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잔인하게 고통을 주겠다는 의미보다는,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작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방식은 전쟁을 할 때도, ‘제네바 협정’이라 그러죠?

이미 전쟁 포로가 된 자들에게도 인간적인 대우를 해 줘야 되는게 마땅하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아도니 베섹을 붙잡아 엄지손가락, 엄지발가락을 잘랐다는 것은,

그 빠른 시기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 되는 거예요.

가나안 문화에 벌써 동화되기 시작한 거예요.

이스라엘의 문화 자체가, 자기들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나안 문화를 닮아가는 거죠.

 

삿2: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자, 여호수아가 죽자마자, 사사기 초입에서, 이들이 바로 뭐에 빠져들어가고 있습니까?

우상숭배에, 가나안 문화에, 바알에게 절하는 행태로 삶이 물들어가고 있어요.

 

우리가 보통 그런 말을 쓰죠.

‘악마를 잡으려다가, 자기가 서서히 악마가 되어간다’ 라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상대방 수장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름으로써

무력화시킨 것까지는 좋은데, 그렇게 하면서 자기들도 모르게

이스라엘의 문화가, 점점 가나안 화로 동화되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까지 가는지.. 7절을 보십시오.

 

◑삿1:7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7절 전반부는, 적의 수장인 아도니 베섹이 고백한 말입니다. 아이러니죠.

이 사람의 고백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이.. 드러나게 되죠.

아도니 베섹이 원래 그렇게 하면, (70명의 왕들을 학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죠.

 

여기서 70이라는 숫자는, 문자적 의미도 있겠지만

그 속에는 ‘충족성, 완전성, 전체성, 많음’ 등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7x10

 

그러니까 아도니 베섹이, 자기 권력이 가장 절정에 있을 때,

자기 권력으로, 그 70명의 주변 족속의 왕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죽이고 학대했다는 거죠.

자기 상 아래서, 거기서 떨어지는 음식을 주워먹도록.. 그렇게 개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저들의 신(여호와)께서 나를 벌하시는구나’

이게 이스라엘의 입에서 터져나온 고백이 아니고, 적장의 입에서 터져나온 고백입니다.

자백되어진 내용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조심해서 볼 것은, 7절 끝에 보면,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예루살렘은 장차 이스라엘 종교의 총 본산이 되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에 엄지손가락, 발가락이 잘린 아도니 베섹을 거기까지 끌고 와요.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아도니 베섹이 예루살렘에서 죽은 거예요.

 

과연 이 본문이 말하고 싶은 게 정말 뭘까요?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설교자들에게 들은 설교를 통해서

아도니 베섹에 대해 ‘아이, 못된 짓 하며 살더니, 하나님께서 공정하게 심판하셨구나’

이렇게 타자의 시선으로만 봤어요.

 

그런데 여기 아도니 베섹은, 더불어 또 나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내가 그 아도니 베섹일 수도 있어요.

나도 모르게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가나안화 되어가듯이...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죽었어야 할 사람은, 나의 모습일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내 대신 죽어주신 분이 계세요.

 

골1:21~22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내가 달려야될 그 십자가에, 우리 예수님이 대신 끌려오셔서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그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여기 본문의 아도니 베섹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또 죄악에 넘어지고.. 그래서 마귀에 공격을 받아서.. 괴로워서 회개하면,

주님이 용서해 주시면 또 넘어지고..

아주 끈질긴 우리 속에 악의 본능이 있어요.

 

여기 아도니 베섹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거기 예루살렘에서,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대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회개란 뭘까?’를 생각해 봅니다.

회개란..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실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는 걸 깨닫는 거예요.

회개란 누가 돌아와야 돼요? 하나님이 내게 돌아오셔야 돼요. (회개시켜 주셔야 돼요)

 

우리는 넘어진 그 자리에서 골백번 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 약하고 악한 본성으로 인해, 고개를 들지 못하면서

내 안에 내 죄때문에 신음이 삐져나오듯

그 고백을 우리는 눈물을 떨구고, 하나님앞에 회개를 한다는 것은

 

‘오, 하나님, 십자가의 공로 없이는.. 저는 여지가 없는 죄덩어리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떨어뜨리지 말아 주시옵소서

어쨌거나 하나님의 언약에 묶여있는 언약의 백성으로

저를 끝까지 붙잡아 주시옵소서!’

 

우리가 자력으로 회개할 능력이 없어요.

예수님이 나를 붙잡아 주셔야 돼요. 회개시켜 주셔야 돼요.

 

내가 넘어진 횟수보다, 나를 언제나 한 번 더 일으켜주시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앞에

늘 서 있어야 됩니다.

 

이 시대가 그렇고, 내 삶이 그렇습니다.

찬송가 가사에 보면 ‘주 떠나 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우리 다 일어나셔서 찬송가 446장 ‘주 음성 외에는’ 다같이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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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많으면 잘 믿지만,  환난이 없이 태평하면 타락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신앙심이 비교적 깊은 이유는, 여성이 더 많은 환난을 받았기 때문!

 

그래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와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이제 좀 살만해 지니까

그들이 우상을 따르기를 시작하고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이방인들의 손에 붙입니다. 이방인이 쳐들어와서 그들을 괴롭힙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고 회개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사들을 세워서 그들을 건져주십니다.

 

그러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살만해지니까 이들이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또 그들을 이방인 손에 붙이시고...

이러한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불행에서 타락할 수도 있지만,

행복에 겨워서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남녀가 평등한 나라가 될수록 기독교 신앙이 쇠퇴하더라'

이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 말은 여러분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남녀가 평등해지면.. 남자가 신앙을 떠나는 게 아니고, 여자가 신앙을 떠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나라의 신앙이 쇠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동안에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어느 나라든지, 교회의 2/3가 여성 임을 보고

'아 여자들은 자고로 태어났을 때부터 더 종교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나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내제적인 이유로 신앙에 더 열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외적인 (열악한)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들보다도 여자가 더 기도도 많이 하고, 눈물도 더 많이 흘리고,

더 하나님을 의지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여자들이 더 대우를 받지 못하고, 더 억울하고 억압을 받고, 분출구가 없다보니까

하나님에게 그들의 마음을 쏟아놓는 과정에서,

여자들이 더 믿음에 잘 응답한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외적인 환경이 바뀌면, 즉 완전한 남녀 평등 사회가 되면,

여자들도 남자처럼 똑같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똑같이 쉽게 타락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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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유다지파가 전쟁하러 올라가는데, 시므온 지파가 동참한 이유는,

그들이 같은 지역 내에 함께 거주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시므온 지파는 창49:7에서 아버지 야곱이 예언할 때 보면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이렇게 흩어지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시므온 지파는 후에, 430년 노예생활이 끝나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

‘유다 지파의 영토 속(가나안 남서부 지역)’에만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는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진 것이 아니라, 유다 지파 땅분배 지역 속에

흩어져 살게 되었죠. (같이 저주를 받은 레위는 이스라엘 전역에 48개 지역에 흩어져 살았죠)

 

이렇게 된 사유는,

가나안 땅 분배 당시, 유다 지파가 할당받은 영토가 인구수에 비해 너무 넓었기 때문에,

여호수아와 지도자들은, 유다 지파의 분깃 중 일부 성읍들을

시므온 지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시므온 지파는 독립된 단독 영토를 갖지 못하고

유다 지파의 영역 안에 흡수되듯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상세한 성경 기록은 여호수아 19:1~9절에 나옵니다.

 

그러니 유다 지파가 분배받은 지역에, 시므온이 같이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서로 이웃사촌이 된 것이죠.

그래서 유다 지파가 전쟁나갈 때, 시므온 지파도 초대받아서, 같이 나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