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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2장 말씀의 세계

LNCK 2026. 5. 27.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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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세계                            왕상2:5~12                    2006년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무엇보다 율법을 잘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왕상2: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너는 강하게 되어라! 그리고 남자가 되어라'란 의미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권면은 모세 사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해야만

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권면해 주신 말씀과 동일합니다(수1:6-4).

 

한편 혹자는 다윗의 이 말을 통해

당시 솔로몬의 나이가 매우어렸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사실 즉위식 이후에도 다윗은 솔로몬을 '어리고 약한 아들'로 말하기도 합니다.(대상 29:1).

 

솔로몬이 즉위할 때, 그는 몇 살이었을까요?

솔로몬이 밧세바에게 "내가 어린 아이라..."(왕상3:7절)라고 고백한 점과

이집트 공주와 혼인한 정황 등을 미루어 볼 때

대략 10대 중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대장부가 되라’는 다윗의 말이, 결코 나이의 문제만은 아니죠(삼상 4:9).

오히려 이 말은 여호와의 율법 준수의 임무를 행함에 있어, 담대하라는 뜻으로 보아야 하죠.

 

왜냐하면 모세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에게서도

'담대한 것'과 '율법 준수'는 상호 연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수1:7).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지키도록

아들 솔로몬에게 당부한 것입니다.

 

왕상2: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여기서 '지키라'는 '파수꾼이 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파수꾼이 되라는 말입니다.

 

이 같은 용어는 특별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직무 수행을 표현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죠.

(레8:35, 18:30, 민1:53, 3:7)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도, 이들처럼 신적 직무를 위임받은 여호와의 통치의 대리자로서,

여호와를 위하여 여호와의 율법의 파수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 왕에게 훈계하는 다윗은, 자신이 먼저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그대로 따라서 행하기를 힘썼던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유언하는 것을 볼 때)

굉장히 성숙한 신앙인의 유언이라면, 유언입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이런 유언이나 교훈을 하지 못할 때가 많죠...

 

'그 길로 행하여'

여기서 '길'(데레크)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의 도(道)입니다.

구체적인 일례로, 신 32:4에 의하면 하나님의 길은 공평의 길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통치할 때 '공평'을 기본 강령으로 삼아 선민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도로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여기서 '법률'(훅카)'계명'(미츠와)'율례'(미쉬파트)'증거'(에두트)

각각 개별적으로 다른 대상들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고

그것들을 구별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으나, 불가능하고 또한 불필요합니다. ★

 

오히려 이러한 표현은 모세 율법 그 전체를 강조하여 제시하려는 중언법(重言法)적인

표현인 것입니다.(4개는 90% 같은 뜻) 성경 다른 곳에서도 이처럼 비슷한 어휘가 반복되어

나란히 등장하는 예를 종종 찾아 볼 수 있죠(신5:31, 8:11, 시119편).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켜라'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즉 솔로몬은 하나님의 율법을 근간으로 하여

백성을 다스려야 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세운 법과 제도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자칫 소수의 집권층만을 위한 악법이 될 우려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거룩하고 선하므로(롬 7:12),

그 법대로 통치하는 자나 통치를 받는 자들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공의와 평강의 나라인 것입니다(계11:15).

솔로몬이 그 예시를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죠.

 

그렇게 말씀을 잘 지켜 행하면, 그 결과가 이렇다고 권면합니다. ↙

 

2:4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일찍이 나단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삼하 7:12-16)을

이제 죽음을 앞둔 다윗이 솔로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단락 출처

 

▲말씀의 세계

(아래 설교문에 ‘말씀의 세계’라는 말이 종종 나오는데,

평소에 시중에서 잘 안 쓰는 말이라서, 시중에 잘 쓰는 말로 바꾸면

‘말씀의 원리, 성경의 원리, 성경적 표준’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여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는 첫 내용은

‘하나님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위에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죽음의 세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망의 나라가 이 세상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다윗 역시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가게 되면서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있는 말씀의 세계를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유언처럼 우리 역시도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에

생명의 약속이 담겨 있는 말씀의 세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의 세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말씀=예수님

죽음을 떠나 영원한 생명에 거하는 약속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자가 바라보고 소망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세계에는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솔로몬에게 그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

 

◑다윗은 솔로몬에게, ‘요압은 말씀의 세계에는 합당치 않으므로.. 제거하라’

 

2:5~6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

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6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먼저 다윗은 요압에 대해서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2:5~6)고 유언합니다. ↑

 

요압은 다윗의 군대장관으로서 다윗과 생사고락을 함께 다윗을 도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윗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뜻대로 일을 처리한 적이 많았죠.

 

그 중에 다윗은, 요압이 아브넬아마사를 죽인 일을 들어서

요압 같은 사고방식은, 말씀의 세계에서는 제거되어야 할 것임을

아들 솔로몬에게 당부하는 것입니다.

 

아브넬은 요압의 동생인 아사헬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전쟁을 하던 아브넬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다윗에게 항복을 하자,

다윗은 아브넬(사울 측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을 환영하고 평안히 돌려보냅니다(삼하3:20)

 

그런데 요압이 이 소식을 듣자, 다윗에게 항의를 하고 아브넬을 쫓아가서

헤브론으로 데리고 와서 죽이게 됩니다. 즉 자기 동생의 복수를 한 것입니다(삼하3:30).

 

그리고 아마사는, 다윗에게 반역한 압살롬 측의 군대장관이었는데 (삼하17:25)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되고 나서,

다윗은 아마사를, 요압 대신에 군대장관으로 세우려 합니다(삼하 19:13).

 

그러자 요압은, 아마사를 제거함으로써

다윗의 군대장관으로서의 자기 지위를 공고히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1)

 

이러한 요압의 사고방식은 말씀의 세계에서는 쫓겨나야 할 것임을

아들이자 새로운 후계자인 솔로몬 왕에게,

요압을 죽일 것을 유언함으로써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의 세계에서 쫓겨나야 할 요압적 사고방식이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자기 복수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위해서 살인을 했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일까요? 그게 죽을 죄라는 것일까요? No

 

(요압이 암살한) 아브넬이나 아마사는,

다윗에게는 한때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들을 환대하고. 그들을 자신의 군대장관으로 세우려 했던 것은,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은 자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 자신이 범죄한 하나님의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긍휼과 자비로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알게 되고

범죄한 자신을 여전히 왕위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을 때,

다윗은 자신의 사명이

이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이스라엘에게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에 있음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서 아브넬과 아마사를 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다윗의 그러한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인가도 깨닫지를 못했고

오직 개인적인 복수심과 자신의 지위에 연련함으로써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훼방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압과 같은 사고방식은 말씀의 세계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율례와 법도와 계명은, 인간의 범죄를 낱낱이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범죄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켜 행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멸망의 자식을 긍휼과 자비로서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보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범죄의 결과입니다.

세상에 의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두가 죽음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에서 건짐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서 죄 용서를 입은, 하나님이 택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용서함을 받고 죽음에서 건짐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외치며 증거하는 것은

긍휼과 자비이며 용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세계이며, 교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말씀의 세계가 용납하지 않는 것은 복수이며

자신을 위해 타인의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해를 입힌 자에게 복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에 불과한 나를 용서하신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지 못한 자의 악한 행위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피를 흘리는 것 역시

원수를 위해 피 흘리신 하나님의 희생을 알지 못한 자의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압은 말씀의 세계에는 합당치 않기에 죽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요압 개인에 대한 징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세계를 굳게 지킬 것을, 솔로몬에게 당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므이도, 말씀의 세계에는 합당치 않기에 제거하라

 

그리고 시므이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을 칠 때 다윗을 저주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다시 돌아왔을 때 시므이는

“왕께 고하되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 19:19)라고 말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다윗은 시므이가 저주한 일을 용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미 용서한 시므이를 왜 죽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당시 시므이가 다윗에게 용서를 구한 것은,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므이는 다윗의 용서를 받았으면서도

용서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말씀의 세계는 용서의 은혜를 아는 자들의 세계이기에

시므이 역시 말씀의 세계에서는 합당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말씀의 세계에 합당한 것입니까?

(이 시므이에 대해서는, 다음 강의에서 더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말씀의 세계에 합당히 살았던 바르실래는 우대하라

 

다윗은 7절에서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고 말함으로써

바르실래와 같은 자가 말씀의 세계에 참여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르실래는 다윗이 어려울 때 다윗을 도왔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다윗을 도왔다고 해서,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솔로몬의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고 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을 쳤다가 다시 돌아올 때 바르실래가 다윗을 영접합니다.

그때 다윗은 바르실래에게 예루살렘으로 함께 갈 것을 제안합니다.

바르실래가 다윗을 도왔으니 바르실래의 여생 동안, 다윗이 공궤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내 나이 이제 팔십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어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삼하19:35)

는 말로 정중히 사양합니다.

 

바르실래는 다윗을 도운 자신의 공로를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바르실래의 이러한 사고방식이 말씀의 세계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씀의 세계를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말씀의 세계를 살고 계신다면, 우리에게서는 요압과 같은 사고방식은 보여질 수 없습니다.

 

오직 바르실래와 같은 사고방식만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의 세계에 참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입니다.

 

말씀의 세계는, 말 그대로 말씀으로 인해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말씀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면, 말씀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해 눈이 떠질 수밖에 없습니다.

 

원수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망에 처한 악한 우리를 건지신 긍휼과 자비하심에 대해

내 마음이 열리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처럼 긍휼과 자비하심에 마음이 열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면,

말씀의 세계에 참여된 신자로 산다면

그에게서 나타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베풀어진 긍휼과 자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는 용서함이 있을 뿐, 원한 갚음과 비판과 판단은 없습니다.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공로만을 자랑할 뿐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며 스스로 자랑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말씀의 세계가 용납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세계는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나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죽어야 할 자에 불과합니다. 나의 원수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인 나의 모습만이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지 아니하고, 원수 된 나에게 복수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모든 죄를 가리우신 긍휼과 자비에 대해 마음이 열리게 하는 것이, 말씀의 세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계에 참여된 자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분명한 것은 여러분은 비판이나 판단이 아닌, 긍휼과 자비만이 맺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예수를 말하고 은혜를 말하고 긍휼과 자비를 말할 뿐,

말씀의 세계에 참예한 자로 살아간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바르실래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이끌어 갑니다.

자신이 한 일을 이용하여 자신을 내세우거나 득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다윗에게 누가 될 것을 염려하는 것처럼,

항상 그리스도께 누(짐, 부담)가 되는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세계에는 다툼이 없고 비판이 없고 판단이 없고

자기 자랑이 없고 경쟁이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말씀의 세계가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말씀의 세계는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죽어야 할 자를 살리신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에 대한 감사함과 찬송과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말씀은 나 자신을 책망하고 회개하게 하는 것이지

타인을 책망하고 공격하는 무기로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요압적인 사고방식, 시므이적인 사고방식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르실래와 같은 사고방식만이 말씀의 세계에 참예한 자로 살아가는 것임을

늘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다스리고 간섭하며 이끌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힘과 내 뜻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말씀의 세계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서 믿음의 모습이 보인다면

그것은 말씀이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고 간섭하고 다스린 결과이기에

자기 믿음으로 간주하며 자기 자랑거리로 삼을 수도 없습니다.

말씀의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조용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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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원리를 따라 살았던 독일 물리학자

독일의 천재물리학자인 베르너 하이젠버거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약관 27세에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고 31세 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해서 다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반 나치적이고, 친유대적이었던 하이젠버거는,

나치의 탄압 속에서 살아야만 했었습니다.

 

2차대전 직전인 1939년도에, 하이젠버거는 미국 시카고 대학의 초청을 받아서,

시카고 대학에서 수개월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그때 그의 학문적 재능과 인품에 감동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미국으로 망명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미국 망명 제의를 정중하게 사양하고,

대서양을 건너서 히틀러 치하의 조국 독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를, 당시 그는 이렇게 직접 밝혔습니다.

‘독일을 엄습하고 있는 죽음의 폭풍 속에서, 몇 사람이나 살아남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서 사는 사람만 독일을 바르게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념으로 독일로 되돌아간 아이젠버거는

폰 바이체커와 함께 우라늄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히틀러로부터 원자탄을 제조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당시 우라늄 프로젝트에 관한 한,

독일이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음에도,

독일이 미국에 원자탄 제조에 뒤지게 된 것은,

하이젠버거 같은 사람이, 고의적으로 그 계발을 지연시켰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이젠버거는 단 하루라도 더 빨리 히틀러 정권이 붕괴하는 것이,

독일과 세계를 지키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원자탄 계발을 지연시켰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이젠버거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무자비한 히틀러의 광란의 폭압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자기 삶의 자리에서 구현하기 위해, 생명을 건 사람이었기에,

그는 원자탄 계발을 지연시킴으로써, 독일을 지키고 살렸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의 원자탄 재앙으로부터 유럽인도 지켜줄 수 있었습니다.

 

하이젠버거 교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자기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자신의 온 몸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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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요압이 아마사를 죽인 가장 큰 이유는

다윗 왕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권력(군대장관 자리)을 지키기 위한

질투와 야망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사무엘하 20장)에 보면,

당시 군대장관 교체 위기가 있었죠.

 

아마사는 원래 다윗에게 반역을 일으켰던 압살롬 편의 군대 사령관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수습한 후, 요압을 견제하고

유다 지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요압 대신 아마사를 군대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아마사는 요압의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반란을 일으키자,

다윗은 아마사에게 '군대를 소집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아마사의 군대 소집이 지체되자,

다윗은 요압의 동생 아비새에게 군대를 주어 출정시켰습니다.

 

요압과 아비새의 군대가 기브온에 도착했을 때, 아마사가 뒤늦게 합류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빼앗아 갈 아마사를 눈엣가시로 여긴 요압은

친근하게 안부를 묻는 척 아마사에게 다가가, 속임수로 그의 배를 찔러 살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요압은 정적이었던 아마사를 잔인하게 제거함으로써

다윗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스라엘 군대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