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10_로마서 강해(41)_성령의 증언과 확신 (롬 8:14-17)_
◈성령의 증언과 확신 롬8:14-17 2026.05.10. 로마서 강해(41)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여러분, 구원 받으셨나요?’
‘네!’
너무 이렇게 빨리 신속히 대답하시면, 제가 좀 당황이 되는데
‘구원받았느냐’를 우리는 어떤 식으로 훈련받나 하면,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그렇게 질문하면
마치 조금이라도 늦게 대답하면, 구원이 없어질 것처럼...
즉시, 빨리 ‘아멘’을 해야 될 것처럼... 그렇게 과거에 우리가 훈련 받았습니다.
근데 제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구원받았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건,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정말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 내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 게 맞나?’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불신앙이 아닙니다. 이상한 게 아니라고요.
사실 거짓 신앙은 이런 질문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무섭기 때문이죠. 두렵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런 의심이 조금이라도 내 안에 찾아들 수 있는 여지를, 우리는 만들지 않습니다.
허용하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가 진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종종 이런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내가 진짜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 거예요.
성령님께서는 이런 생각들을 불신앙으로 이끄시지 않고,
사실은 더 견고한 신앙으로 이끄십니다.
그걸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얘기하면 ‘(구원의) 확신’으로 이끌어 가세요.
신자는 이런 확신을 마땅히 가져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확신이 없이 신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에요.
확신이 없이 신자로 살아가요. 그러면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내가 진짜인가? 가짜인가?’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하나님이 날 버리셨나? 내가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던가?’
이런 생각들을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몇 주 동안 계속해서 살피고 있는 이 본문을 포함해서
로마서 5장부터 8장에 있는 말씀은 <확신>에 대한 말씀이에요.
바울은 <확신>을 심어주고 싶은 거예요.
▲근데 요즘 저는 이 ‘확신’에 대한 말씀을 몇 주 살피고 있는데,
사실 ‘한국교회가 위기다’ 이런 얘기들을 우리가 많이 하잖아요?
근데 한국교회가 위기인데, 왜 ‘위기’라고 말할까요? 교세가 감소하기 때문일까요?
또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비난받고 있는,
이런 어떤 비난의 표적이 되는 그런 문제 때문일까요? 도덕성의 위기일까요?
어떤 것이 정말 한국 교회의 ‘위기’라고 여러분들은 느끼세요?
‘위기’라는 것을 느끼시기는 하는지요?
그리고 그 위기 상황에, 우리는 상관이 없나요?
저는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위기를 ‘(구원의) 확신의 위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확신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보기가 매우 어렵다는 거죠.
교회를 다녀요. 심지어 교회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30년, 50년 교인으로 살았어요.
떠난 적이 없어요. 근데 확신이 없어요.
로마서가 쓰여지던 1세기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확신’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확신’에 대한 얘기를, 바울은 본문에서 바로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들에게도, 21세기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확신’이 필요한데, 그 이유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 내가 입으로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그들이 겪어야 하는 불이익과 손해와... 그런 것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그러면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를 마지막 날까지 내 믿음을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 나를 영접해 주실 것이고, 내게 주실 상급이 있다는 것을 아는 확신...
이런 확신이 있으면, 현재의 어려움들을 지나갈 수 있겠죠.
▲오늘 우리들에게는 그런 어려움은, 초대교회처럼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유혹’이란 큰 어려움이 있죠)
제가 생각할 때, 21세기 한국 사람들에게... 특별히 한국만은 아니겠죠.
우리 시대, 이 시대에 미국일 수도 있고,
여하튼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어려움과 불이익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인생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이 세상이 끌어당기는 힘에, 우리가 따라가는...
그 유혹을 멈출 수 있는 힘이 없어서 그래요.
예수를 믿지만, 이 세상에서 이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거예요.
우리가 대단한 부자가 돼서 손까딱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고,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고생하는 걸 엄청 무서워하고,
고난받는 거를 엄청 꺼려하고, 그저 안락하게 살기를 원해요.
좀 살아보신 분들 말고, 청년들에게 묻는다면,
여러분들에게는 안락함에 대한... 그게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요. 소박한 생각이에요.
근데 그게 굉장히 강력하다니까요.
마치 그걸 내가 어느 정도 선에서 누리지 못하면, 인생의 패자로 여겨지는 거죠.
이게 굉장히 두려워요.
조금이라도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들을,
내가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 때문에 포기할 줄을 몰라요.
그건 ‘확신’이 없기 때문이에요.
조엘비키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진리를 믿고 싶고, 천국의 방식대로 살고 싶다는 갈망이 우리 마음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스스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제가 물었잖아요.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러면 그냥 ‘아멘’ 하는 거 좋아요. 그거 뭐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근데 문제는 뭔가 하면, ‘정말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내가 다른 것들을 좀 포기할지라도, 나는 그 뜻을 따라 살고 싶어!’
이 갈망이 여러분에게 있냐고요?
이 갈망이 없다면, 여러분이 확신을 누릴 길은 없습니다.
'난 구원받기를 원해요.
죽어서 지옥 가길 원치 않고 천국 가길 원해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을 살고 싶진 않아요. 왜요?
내 뜻이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게 있으니까, 내 욕망이 있으니까!’
오늘날 우리 대부분이 이렇게 살지 않나요? 근데 어떻게 확신이 자리할 수 있겠어요?
물론 조엘 비키가 얘기한 것은, 우리가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를
얘기하는 겁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참 적어요.
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지켜주실 것이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마지막 날 내가 죽어서 죽음 앞에 섰을 때, 그리고 죽음을 지날 때,
하나님이 나를 영접해 주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내가 살아온 모든 삶에 대한 상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극히 적어요. 너무나 없어요.
그런 사람들을 만나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반갑죠.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나는 회심했다고 생각해요' ... 하는 수준이라고요.
'나는 회심했다고 생각해요' ... 그렇게 믿고 싶은 거죠.
이건 확신이 아니죠. 그러기를 바라는 거죠.
'저는 저의 하나님을 압니다. 저는 그분을 압니다. 그분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그리스도는 저의 구주이십니다. 제 인생의 주인이시고요.
저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을 삽니다!' 이게 '확신'이에요.
이 확신의 위기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살아가지만, 삶에서는 어떤 은혜의 증거들도 발견할 수 없는 채...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런데 내 삶을 정직하게 살펴보면,
'내가 진짜 믿는 사람'이라는 은혜의 증거가, 내 안에서는 별로 발견되는 게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 안에 있는 게 불편해요. 교회 안에서 진짜 자기 얘기를 하는 게 불편해요.
코이노니아도 불편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왜냐하면 은혜로 말미암은 어떤 변화도, 내 삶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채,
교회생활을 계속 하게 되면 불편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내가 남편을 따라오든지, 아내를 따라오든지, 부모님을 따라오든지,
내가 거듭나지 않은 사람으로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데, 그냥 이렇게 따라와요.
그럼 되게 불편하거든요.
그 불편함은, 하나님 앞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불편함이에요.
그러나 교회가 그런 분들을 불편하게 만들도록 (해야 됩니다.
그 상태를 그저 편안하게 느끼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분들이 교회에서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이거는 아니죠. 이거는 아니에요.
▲여러분 '구원의 확신'이라는 게 가벼운 주제가 아니라는 거를,
제가 설명하려고, 지금 이렇게 장황하게 좀 얘기를 합니다.
'확신'은 결국 이거예요.
오늘 설교를 듣고 여러분들이 '아 진짜 나에게 확신이 필요하구나.
내가 진짜 이 확신을 구해야 되겠구나' 이런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싱클레어 퍼거슨이 '확신'을 이렇게 설명하는 말이, 저는 참 좋아요.
"확신이란, 내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음을 인식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이 확신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시고, 용납하시며,
성령으로 중생시키시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하셨다는 사실과,
만물이 새롭게 되고, 우리의 칭의와 양자됨이 완성되는 날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별의별 일을 다 겪지만, '그분이 나를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내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완성할 것이다' "
이런 확신이 우리에게 있으면, 인생에 찾아오는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고,
세상이 약속하는 사소한 즐거움들에, 우리 마음을 두지 않게 될 것이고,
하늘의 소망을 품고,
모든 상황에서 복음이 주는 평안함과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청교도 목사인 토마스 브룩스가 '확신'에 대해서 쓴 되게 두꺼운 책이 있거든요.
이 책의 제목을 그는 '확신'이라고 쓰지 않았어요.
뭐라고 썼나 하면 <Heaven on Earth, 지상 천국>이라고 썼어요.
이 책 '지상천국'은.. 확신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거예요.
'확신은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이다' 왜요?
모든 고난 속에서, 뺏기지 않는 기쁨과 평안함을, 하늘의 은혜를 누리거든요.
이 '확신'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아멘'이 나와야 돼요.
여러분과 저는 '내가 이만한 사람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늘 그런 착각을 해요.
사실 어떻게 보면 괜찮은 사람이잖아요. 누가 우리 보고 뭐라고 그러겠어요.
이만하면 평균값 이상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해요. '천만에! 네가 생각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너는 나쁜 죄인이다' 라고 얘기해요.
계속해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네가 생각하는 것과, 네가 상상하는 것에 넘치도록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이 두 가지는 같이 가는 거잖아요.
이게 확신 가운데 되게 중요한 요소예요.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인 것을 알고,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아는 확신,
이게 지금 바울이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양자의 영'이에요.
이런 확신이 있으면, 신앙은 절대로 관념이 되지 않아요. 신앙은 실제가 돼요. ☞ <현실>
내 삶에서 일을 하는 거예요.
내 생각을 바꾸고요. 내 삶을 바꿔요. 내 삶의 목적을 바꿔요.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바꿔요.
이것은 우리 삶 전부에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제임스 패커의 말을 빌려서 제가 좀 인용을 할게요.
"확신은 하나님의 부성애에 대한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부성애에 대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감각을 말한다.
마치 하나님이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라고 말씀하시듯,
말씀을 통해서 한 영혼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소통하시는 것이다.
이는 선량한 부모들이 때때로 그러하듯이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서 '나는 널 사랑한단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양자의 영으로 내 속에 들어오신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들 사이에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황홀한 깨달음을 주십니다.
즉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향해서 '나는 너의 구원, 나는 너의 아버지란다, 너를 사랑한단다'
라고 말씀하시는 황홀한 순간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게 '구원의 확신'이에요.
이런 확신이..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양자의 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하시는
중요한 일이십니다.
◑확신이 아닌 것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확신이 뭔지를 알기 위해서,
뭐가 참된 확신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건지를, 몇 가지 제가 간단하게 설명 드릴게요.
확신이 아닌 것들입니다. 거짓 확신은 사상누각 같은 거죠. *모래위의 집
의지할 수 없는, 의지해서도 안 되는 증거들의 근거를 두는, 자의적인 확신입니다.
이건 곧 무너져요. 툭 치면 무너져요.
근데 내가 그걸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막고 있는 거예요. 이런 (거짓) 확신이에요.
사탄은 교묘하게 거짓 확신으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성경에서 쓰여있는 대로 미혹합니다. 그래서 거짓 복음을 듣게 하세요.
그래서 교회가 왜 중요한가요?
그것은 정말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목사가 지어내는 얘기나 이상한 신학,
예수 믿고 건강해지고 복받고 부자가 되고 이런 거 말고, 진짜 복음을 말하고 있는가?
만약 여러분들이 거짓된 복음을 계속해서 듣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거짓된 확신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단만을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속해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라고 하는 이 큰 교단 안에 그런 교회들은 적지 않아요.
그럼 여러분들은 어떻게 (내가 받은 구원을) 확인할 수 있어요?
베뢰아 사람들이 한 것처럼,
‘정말 저 목사가 하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성경을 통해 확인하는거죠.
▲거짓 확신들, 확신이 아닌 것들을 먼저 몇 가지 간단하게 말씀드릴게요.
1) 여러분이 과거에 어느 집회에 참석해서 믿기로 결단했다는 사실,
누군가의 전도를 받고 영접기도를 따라했다는 사실,
그것이 여러분들의 확신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걸 통해, 그런 일을 계기로, 진짜 구원으로 인도되는 사람도 극소수 있기는 해요. 아래 나옴)
그거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한 행위, 내가 영접기도를 했다, 내가 믿기로 결신하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렇게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 그 이후에, 여러분이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었고, 여러분의 죄성을 자각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내가 필요로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고,
그것이 여러분들의 지속적인 삶의 변화(성숙)를 만들어냈다면.. 그건 울바른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됐을 때는, 그가 영접기도 했다는 사실이나 결단했다는 사실을 의지하지 않죠.
그리스도를 의지하죠.
2) 두번째, 과거에 자신이 경험한 감정적인, 혹은 심리적인 체험에 근거를 두는 확신도
위험합니다.
‘제가 어떤 집회에 가서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또는 ‘어디선가 가서 눈 감고 찬양을 부르는데, 내 옆에 누군가가 서 계신 것을 느꼈어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근거들입니다.
왜냐면 내용이 없잖아요. 구원을 받았다는 삶의 열매가 없습니다.
‘옆에 누가 서 있었는데..’ 하는 느낌,
그게 예수님인지, 광명의 천사로 둔갑한 사탄인지 어떻게 알아요?
아니면 실제로 누가 바람을 휙 일으키며 지나간 건지...
이렇게 감정이 지속되는 동안에 주어지는 확신이 아니고요.
중요한 것은, 감정이 지나간 뒤에,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나 자신을 더 깊이 드리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죠. *삶의 열매가 있죠
3) 세 번째, 종교적인 또는 도덕적인 행위에,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내가 열심히 헌신했고 봉사했고, 이런 직분을 가지고 있고,
내가 십일조를 열심히 했고, 내가 도덕적인 행위를 이렇게 했고, 사람들을 도와줬고...
이거는 자신의 공로와, 종교적인 성취에, 자기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도 헛된 것입니다.
4) 네 번째, ‘나는 복음을 알고, 난 복음을 이해하고 있어.
나는 교리를 알고 있어, 나는 심지어 개혁주의 신학이 뭔지도 알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것이 여러분의 구원의 근거가 되지 않아요.
우리의 ‘지적인 동의’가,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뭔가 하면, 물론 신앙은 분명히 지식을 전제해요.
그리고 지식에 대한 동의도 있어야 돼요.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그 내가 아는 지식을 통해, 그리스도께 나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이에요.
5) 다섯 번째는, 내가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교회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저 같은 사람이죠.
어렸을 때부터 교회 다녔고, 유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 현재 ‘나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거죠.
6)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얘기할게요. 사역의 열매와 은사에 근거하는 거짓 확신이에요.
너무 열매가 많은 거예요.
목사나 선교사나 어떤 사역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굉장히 큰 함정이거든요.
너무 가시적인 열매가 많아요. 나만 아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다 알아줘요.
그런데 그 열매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은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탤런트,
그 사람이 그것으로 섬겨서 만들어낸 결실들,
이런 것들이 그 사람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고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마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들은 사역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주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러면 진짜 구원의 확신을 우리는 어떻게 가질 수 있나요?
여러분 이거는 정말 중요한 문제 잖아요.
여러분은 이 5월의 좋은 날씨에 야외 안 나가고, 오늘 예배당에 오셨어요.
그러면 우리는 ‘그냥 이렇게 내가 살다 보면, 하나님이 나를 모르는 척은 안 하겠지?’
이런 (불확실한) 마음으로 우리가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진짜 확신은 뭘까요? 확신을 가지고 사는 거는 정말 중요해요.
우리 인생의 그 무엇보다 중요해요. 이 구원의 확신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제18장에 ‘확신’에 대해서 얘기를 하거든요.
제가 2항만 한번 읽어드릴게요. 잘 들어보세요.
“이 확실성은 거짓된 소망에 근거를 둔, 한낱 억측과 개연성에 따른 신념이 아니다.”
여러분, 거짓 신념들, 거짓 확신은 다 이런 거예요.
‘그냥 이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을, 내가 더 붙잡고, 못 건드리게 하고, 무너지지 않게 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확신은 신념이 아니에요. 믿음에 속한 틀림없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1) 첫 번째, 구원의 약속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
2) 두 번째, 이 약속들로 말미암은 은혜의 내적 증거
3) 세 번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양자의 영,
그것은 ‘성령 하나님의 증언에 근거한다’
이렇게 세 가지예요.
-말씀의 증거,
-은혜의 내적 증거, 내 삶 속에서 은혜의 증거가 있는지 살피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성령 하나님의 증언이에요.
▲1. 우리가 ‘구원의 확신’과 관련해서 먼저 붙잡아야 되는 게,
첫 번째가 성경의 증거예요.
구원의 약속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확신의 객관적인 토대예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어요. 요1:12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에요.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에요.
하나님은 일구이언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진실하세요.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기록된 말씀을 믿어요.
그리고 나는 예수님을 믿어요.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고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수없이 많이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가야 한다는 것은 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이 말씀을 밝히 드러내서
내가 오늘 읽고 있는 말씀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거예요.
이 말씀을 통한 증거.. 이게 성경의 증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내가 전혀 읽지 않아요. 보지 않아요.
또 설교를 듣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성경을 암송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성경 공부하는 것도, 성경공부를 통해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누군지를’ 확신을 심어주세요. 성경을 통해서요.
여러분이 성경을 멀리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2. 두 번째로 <은혜의 내적 증거>예요.
이 두 번째 요소가 왜 필요할까요?
나는 분명히 성경도 열심히 읽고 있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하고... 다 한단 말이에요.
근데 문제는 뭔가 하면, 내 삶에, 또 내 영혼을 내가 이렇게 살펴보면... 증거가 없어요.
(은혜도 없고,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어요...)
어떻게 보면 무늬만 그리스도인인데, 굉장히 그 무늬가 희미하지가 않고 짙은 거예요.
주일 날은 그리스도인으로 열심히 살고,
월요일부터는 모드를 또 바꿔가지고, 이제는 이 세상 속에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자로서,
또 열심히 살아가요. 얼마든지 그렇게 두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삶에서 (기쁨, 평안, 셍명, 사랑, 인내, 화평 등의) 열매가 없는 거에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보려고 하지 않게 되죠.
왜냐하면 살펴보면 힘드니까, 불편하니까!
그리고 더 열심히 종교적 행위를 하게 될 거예요.
본문 15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거든요.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느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 하나님을 아빠라고 친밀하게 부른다는 것,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거든요. 친밀하게 기도하게 하신다는 거예요.
뭐 홍길동이에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고’
아버지께 나아갔다가는 곤장이나 맞을 것 같고...
애기들은 아빠를 좋아하잖아요.
애기들이 아빠를 미워하면, 그 아빠는 반성 많이 해야 되는 거죠.
자녀는 아빠를 좋아하죠. ‘아빠, 아빠, 아빠’ 귀에서 피나게 아빠를 부르죠.
구원받은 자녀가,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는 얘기죠.
이것만이 은혜의 내적 증거가 아니에요.
성경이 얘기하는 은혜의 내적 증거들을 몇 가지만 얘기하면
1) 죄에 대해서 진짜 슬퍼한다는 거예요.
그냥 뉘우침, 후회, ‘아, 이렇게 할걸..’ 이런 게 아니고요.
죄에 대해서 진짜 슬퍼하는 거예요. 그 회개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2)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있어요. 주님을 사랑해요.
3)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거룩하게 살고 싶은 갈망이 있어요.
이게 은혜의 내적 증거들이예요.
거듭나지 않은 사람 안에서는, 이런 거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어요.
4) 요한일서에서 사도요한은 몇 가지를 더 얘기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그래서 예수님 있는 사람을 보면 애정이 가요.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죠.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
그저 성경 읽고 기도한다 이게 아니고,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5) 세상의 정욕을 사랑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은혜의 내적 증거예요.
△근데 주의사항이 있어요.
1) 하나는 뭔가 하면, 이걸 율법주의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마치 내 행위가 0에서 10까지 스펙트럼을 만들어, 이렇게 체크를 한다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8,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7,
-거룩함을 향한 열망은 5,
-아빠라고 내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6,
뭐 이러면서 나 자신을 평가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계속 수치를 올려갈 수 있어요.
근데 만약 그렇게 되면, 이거는 나의 행위의 완성도에 따라
나의 구원과 확신이 달려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돼죠. 이게 율법주의적인 거예요.
이런 위험이 있다는 거예요.
2)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편의 위험은 뭔가 하면,
이게 이제 청교도들이 많이 했던 건데,
그 인트로스펙션이라고, 자기 자신을 내적으로 성찰하는 건데,
양파를 한번 까보세요. 까면 뭐가 나와요? 또 양파가 나오죠.
마찬가지로 까도 까도 죄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걸 병적으로 하게 되면,
‘아, 나는 역시 선한 게 내 안에 없구나, 나는 버림받은 자구나’
이렇게 갈 수도 있는 거예요.
확신이 아니라, 깊은 의심의 수렁으로 우리를 데려갈 수도 있겠죠.
이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 돼요.
▲3. (구원의 확신의) 성령의 내적 증거 *이 설교의 하이라이트
그러나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이 제시하는 세 번째 확신의 증거가 있어요.
이게 오늘 본문 16절에서 우리가 살피는 건데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이 본문을 이해하는 게 두 가지 방식이 있어요.
1) 하나는 16절에서 말씀한 것을,
앞에서 말한 ‘말씀의 증거’와 ‘은혜의 내적 증거’를 다 포함해서
‘이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야’ 라고 설명하는 거라고 이해할 수 있고,
2) 또 하나는, 그야말로 말씀의 증거가 있었고, 은혜의 내적 증거도 있었고,
세 번째로 성령이 여기 뭘 주목하나 하면 16절에 ‘친히’라고 하는 말이에요.
이건 무슨 말인가 하면 ‘직접적으로, 성령님이 직접적으로’
그런데 14절과 15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봐야 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증언한다’ 여기에 주목을 하게 되죠. ‘내 영혼과 함께 증언한다’
이 말씀을 저는, 세 번째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의 방식이라고 이해를 해요.
이렇게 이해를 하는 청교도 중에는 토마스 굿윈 이라는 분이 대표적으로 있고,
현대에는 로이드 존스, 제임스 보이스도 그래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보는 이유를, 제임스 보이스가 설명한 게 굉장히 좋은 설명이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어요.
“로마서 8:16절은 내가 앞서 언급한 증거 없이도
(말씀의 증거나 은혜의 내적 증거를 얘기합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언 같은 게 있다고 가르치는 게 분명하다.
다른 말로 하면, 누군가의 마음에서 성령을 진짜 경험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령을 경험하라?’ 이에 대한 반론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어떤 영적 체험도 그 자체로 반드시 유효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런 경험들은 모두 위조될 수도 있고, 사탄의 모조품들이 정말 그럴듯 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영적 체험에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모든 영적 체험을 무용지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또 성령을 체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종종 비성경적인 사상과 관습에 빠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모든 경험은 반드시 성경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반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한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라는 사실에 대한 유효한 증거인
직접적인 성령 체험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압도적인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혹은, 삶 가운데 언제든 하나님이 당신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임재하셨거나,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아마 그 순간 당신은 눈물을 터뜨릴 만큼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다른 여러 표지를 느끼고,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된 적이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바울사도가 말하는 성령의 증언을 좀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가 몇 가지 인물들의 사례를 좀 말씀을 드릴게요.
△먼저 아까 제가 얘기했던 청교도 중에 토마스 굿윈 입니다. 17세기 사람이에요.
에베소서 강의를 하면서, 그는 이런 얘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과 함께 걷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고, 아버지도 아들을 사랑한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멈추더니, 아들을 끌어안으며 볼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사랑을 확인해준다.
아들이 그 전에 이미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있지 않았던가?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특별한 행위가(체험이), 아들에게 얼마나 더 큰 확신과 기쁨을 주는가?”
이런 게 있다고 얘기를 해요.
그러면서 그는 자기 얘기를 합니다.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빛처럼 내 위에 임하셨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아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내 영혼에 말씀하셨다.
이것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었다. 성령께서 내 영혼에 직접 증언하신 것이었다.”
이게 로마서 8:16절이라고 굳이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여기에 3단 논법은 없어요.
‘내가 예수를 믿는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런 3단논법 같은 추론은 없어요.
이거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압도적인 성령의 증언이에요.
△청교도 존 플라벨은 같은 시대 사람인데,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말을 타고 여행하는 중이었다. 묵상에 깊이 잠기면서
나는 점점 더 거룩한 것들에 대한 감각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간과 공간에 대한 모든 의식을 잃어버렸다.
내 영혼이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올려졌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길가에 멈춰 서 있었고,
나의 몸 전체는 그 경험의 여운 속에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있고 싶지 않았다. 죽음은 내게 아무런 공포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그 복된 상태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로이드 존스는 이것이 본문 롬8:16절에서 말하는 ‘성령의 증언’이라고 말하면서,
신자가 가질 수 있는 확신의 최고의 형태라고 말합니다.
물론 모든 신자가 이것을 다 경험하진 않아요. *미래에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 말씀은, ‘이런 확신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19세기의 위대한 복음전도자 무디의 사례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무디의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시기를 구하며 끊임없이 울부짖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 시에서 ‘오 그 날이여!’
나는그것을 묘사할 수 없다.
그것은 이름을 붙이기에 너무나 거룩한 경험이었다.
바울은 14년 동안 말하지 않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삼층천의 경험
나는 단지 이것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내게 자신을 나타내셨고, 나는 그분의 사랑을 너무나 강하게 경험하여
그분께 ‘주님 손을 거두어 주십시오’ 라고 간청해야만 했다.
나는 지금 죽는다면 얼마나 감사할지...
하지만 주님은 나를 살려두셨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의 사역은 완전히 달라졌다”
△19세기 웨일즈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크리스마스 에반스의 이야기입니다.
“1802년 4월, 앵글시(Anglesey) 섬에서 카마던(Carmarthen) 으로 가던 도중
나는 길에서 기도하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
나는 오랫동안 냉랭하고 메마른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그 외딴 길에서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 나는 오래도록 씨름하며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빛이 내 위에 비취기 시작했다.
내 영혼이 다시 살아났다.
죄에 대한 자각, 은혜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난 울면서 말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좋다!’
그날 저녁 나는 강단에 올랐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열심히 준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지막 두 개만 더 말할게요.
이거 고르느라고 제가 애를 먹었어요.
△18세기 위대한 설교자인 조지 휫필드의 말입니다. *영어 발음으로는 ‘윗필드’
“어느 날 아침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성령께서 내 위에 임하셨다.
나는 그 압도적인 경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나를 가득 채웠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전에 없이 생생하게, 직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전에 몰랐던 게 아니에요. 전에도 알았다고요...
△18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감각이, 특히 하나님의 주권의 교리와 관련하여
내 영혼 안에서 서서히 자라났다. 그것은 단지 지적 확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달콤하고 즐거우며 영광스러운 것에 대한 감각이었다.
나는 종종 홀로 걸으며 하나님 안에서 묵상하고 대화하며 기뻐하였다.
기도는 마치 하늘을 향해 열린 창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그분의 영광과 온유함을 보았다.
내 영혼은 이것들로 인해 압도되었다”
제가 소개한 이 고백들은, 모두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할 수 있는 성령의 증언들입니다. 롬8:16
성령의 직접적 증언은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성령의 증언을 통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베드로가 표현한 그대로죠. 소명이 새로워질 겁니다.
내 삶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완전히 새로워질 것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전서 1:8)
이건 지적 확신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큰 산과 같은 고난을 넘어갈 힘을 얻을 겁니다.
△여기에도 유념할 사항이 있습니다.
1) 첫째로 이 경험들은 세 번째로 얘기한 것,
성령의 증언은 반드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합니다.
확신의 세 번째인, 하나님의 성령의 증언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제나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성령께서 감동하여 쓰신 말씀인데요.
말씀에서 벗어난 다른 경험을 주시지 않죠. 말씀과 모순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성령의 증언, 이 성령의 증언은
첫 번째, 두 번째를 무시할 만큼 그것보다 더 우월하지 않습니다.
강력하지만
2) 두 번째로 유념할 것은, 우리가 구하는 것은 확신이지 체험이 아닙니다.
‘아, 나도 그 체험이 있었으면 좋겠다’
체험이 아니고, 우리는 확신을 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증언은, 성령님 자신에게 우리의 관심을 모으지 않고,
성령님은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관심을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15:26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구원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 맞습니까?
여러분에게는 확신이 있습니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모두를 가리켜 얘기하는 겁니다.
(첫 번째는 성경의 증거, 두 번째는 은혜의 내적 확신, 세 번째는 성령의 내적 증거)
여러분이 확신이 있습니까?
혹시 확신 없이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지는 않나요?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증거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내일부터 그 말씀에 나아갈 때, ‘아 오늘은 규티 의무를 끝냈다’ 그러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이 말씀을 밝힌 아이에게 조명을 해 주시지 않으면,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의 아들 된 것을, 내가 들을 수 없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걸... 내가 들을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성령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에 말씀하시는 것을 사모하십시오.
그 말씀의 증거와 함께, 여러분 자신의 영혼과 삶을 살펴서
영혼의 은혜의 내적 증거들을 살피십시오, 그리고 기뻐하십시오.
3) 끝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바
직접적이고 압도적인 성령의 증언이라고 하는 이 확신도 구하십시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롬8:17절에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로서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는 자리에 기쁨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이것만입니까? 이것이 큰 동력으로, 우리에게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할 겁니다.
이것뿐입니까? 양자의 영이 우리 안에서 충만할 때, 교회가 세워지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생각이 다
-내가 세상에서 잘 살아봐야 되겠다는 생각,
-거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좀 필요하다는 생각,
그런 생각 속에 머무는 사람이 만 명이 모인들, 그것이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한 가족이라고 그랬고,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이 하나가 되기를 주님은 기도하셨는데,
그 일이 양자의 영인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이런 확신을 강력하게 주실 때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않겠습니까?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