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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의 관계는? 눅2:41~45 2007.09.02.
지난 주간에 어떤 교회의 사고 소식을 말씀 드렸었는데,
그 배에 탔던 저의 카메이트 집사님과 통화를 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사고 배에 집사님과, 그 집사님의 아이도 같이 탔었는데, 배가 뒤집히면서
자기 아이가 구조되는 것을 보고 ‘이제는 됐구나’하면서, 자기는 포기를 했었다고 합니다.
‘이제 죽는구나’하면서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선생님!살려 주세요!’ 하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이 분이 주일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자기 반 아이더랍니다.
갑자기 그 아이를 살려야 되겠다고 생각을 해서, 그 아이를 건져서 나왔답니다.
마침 그 아이의 아버지가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허우적대던 이 집사님이 갑자기 헤엄을 치더랍니다. (그 자리에서 수영을 익힌 거죠.)
그런 이야기를 접하면서 '도대체 그 집사님과 그 아이 사이가
어떤 관계이길래 그런 일이 벌어졌나?' 그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로까지 확대됐습니다...
제가 헌금기도 시간에 늘 드리는 기도 세 가지를 잘 아실 겁니다.
"우리 영혼이 잘 되는 축복, 물질의 축복" 또 하나가 뭡니까?
“어디 가도 사람 잘 만나서 그 만남 때문에 형통하는 복”
제가 그 복을 ‘관계의 축복’이라고 부릅니다.
알고 보면 우리의 복은, 관계의 축복이 전부 다입니다.. 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어디 가도 좋은 만남만 있으면, 정말 형통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관계의 축복을 받지 못하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저만큼 관계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잘 만났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저희 집이 부자였을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마다 족족 실패하셔서
늘 어머니가 우리 형제들을 먹여 살리셔야 했습니다.
모든 게 부족했고, 부모님이 늘 안 계셨기 때문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야 됐습니다.
요즘 남자들의 힘을 일컫는 말 중에3M이 있지요?
Money, Manner, Mood가 그건데
제가 가지고 있는 3M은 맨 손, 맨 몸, 맨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뭘 해서 잘못된다 해도 저의 3M은 언제나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상황을 만드신 우리 부모님을 한 번도 원망해 본 적이 없고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또 저를 교회로 인도하신 형님 한 분을 잘 만났습니다.
그분 땜에 선교 합창단엘 들어갔고 거기서 제 아내를 만났습니다.
그 형님은 목사님이 되시고 지금까지도 저를 위해 기도하시고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고 계십니다.
저는 또 제 아내를 잘 만났습니다.
정말이지 제 아내는 저에게는 과분한 사람입니다.
제 아내가 없었다면 저는 목회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패배자의 삶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제 아내는 아이들 교육도 잘 시키고 제 모든 일에 아주 바람직한 비평가가가 되어 주었습니다.
아울러 제게 하는 권유는 늘 바르고 지혜롭고 사려 깊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저는 평신도 출신 목사입니다.
뒤늦게 신학공부를 시작했을 때 그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너무나 좋은 목사님, 교수님, 친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 잘 못 만나서 낭패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만나는 분마다 저에겐 모두 위로가 됐고, 힘이 됐고, 도움이 되었던 분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주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일 하시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말씀은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관계를 통해 일하신다”라는 말로 바꿔 써도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관계 또는 사이라는 것은 그 종류가 이루 다 말 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얼굴은 알지만 그 외에는 전혀 모르는 사이가 있습니다.
또 이름 밖에 모르는 사이가 있고, 이름도 알고 하는 일도 알지만
그 이상은 모르는 관계도 있습니다.
좀 친해서 가끔 전화하거나 메일을 주고 받는 사이도 있습니다.
종종 차나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사이도 있고, 축의금이나 부조금을 낼 수 있는 사이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내 것, 네 것을 전혀 따지지 않는 관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중요한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관계는 언제나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간에 서로 뭔가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관계는 one way가 아니라 two way relationship 입니다.
관계라는 것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 둘이 함께 만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람끼리도 그렇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당신의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잘 살 수 있도록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셨고,
우리가 죄를 짓자 소망되신 독생자를 보내셔서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만 하나님을 선택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소망과 축복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 때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북군의 지도자는 링컨이었고, 남군의 지도자는 리 장군이었습니다. 주1)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구원과 소망은 하나님과의 우리 사이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거기에 따라 구원과 소망의 명암이 달라집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질문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는 지금 어떤 관계입니까?
그냥 좀 아는 사이입니까, 아니면 내 것과 네 것이 없는 죽고 못 사는 관계입니까?
아울러 또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여러분 주위 사람들 사이는 어떤 관계입니까?
돕고 희생하는 사이입니까, 아니면 이용하는 사이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이의 관계를 다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상징하듯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관계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수직관계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관계가 조화롭게 교차될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항상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생각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입니다.
롯은 자기 아버지를 여의고 그때부터 삼촌인 아브라함 손에 맡겨졌습니다.
사실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롯의 행적을 보면, 그는 본받을 만한 구석이 거의 없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별반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나이 먹어 출가하게 되자 한 밑천 떼어 줬고,
두 집 사이에 가축이 많아져서 종들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자
좋은 땅을 선택하게 해서 분가시킵니다.
한 번은, 롯이 사는 소돔땅에 네 나라 연합군이 쳐들어 와서 사람들을 붙잡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롯도 잡혀가지요?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가 길리운 사병(私兵)들을 데리고 쳐들어가서 롯을 구해 옵니다.
정말 네 나라 연합군을 상대로 개인이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렇게 무모하게 목숨 걸고 일을 벌인 것은 롯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삼촌에게 사랑 받고 보호 받았던 롯이란 인간은 어땠습니까?
창세기 어디를 봐도 롯이 삼촌을 위해 마음 쓴 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무슨 양보라든가 희생이라든가 그런 건 고사하고
하다 못해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늘 삼촌이 먼저 찾아 가도록 했습니다.
철저히 자기 밖엔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아내나 딸들도 다 롯과 그다지 다름없는 인간이 되잖아요?
롯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삼촌이라는 혈육관계가 아니라
그저 이용해 먹는 대상으로 밖에는 안 보였던 겁니다.
비슷한 얘기가 있는데 결과는 전혀 달라진 예화가 있습니다.
▲언젠가 새벽기도 시간에 말씀 드렸던 것 같은데,
독일 비스바덴 아름다운 교회의 박성덕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독일 카쎌이라는 도시에 한식당을 하시는 한인 교포 부부가
자녀 둘과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식당일이라는 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달려 있어야 되는 일이라
아이들은 늘 자기들끼리 있어야 됐습니다.
그런데 그 옆집에 한 독일인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 외로왔는지 자주 이 아이들을 불러서 밥도 먹이고, 얘기도 해 주면서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부모들도 한 시름 놓고 식당 일에 더 신경 쓸 수 있었고,
아이들은 그 할머니를 친할머니처럼 따르고 아예 주말이면 거기서 살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어떤 관계가 됐냐 하면, 아이들이 제 부모에게 야단을 맞으면
그 할머니 집으로 가서 위로를 받을 정도가 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다 치루고 그 할머니들의 자녀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변호사가 유언장을 공개했는데,
그 내용은 놀랍게도 모든 재산을 자기 자녀들이 아닌,
이 한인 남매에게 상속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재산이 뭐였냐 하면, 저택과 스쿨버스 여덟 대였다고 합니다.
대략 우리 돈으로20억쯤 되는 유산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외국인에게 상속한 겁니다.
이 아이들이 그 할머니에게 해 준 일이 뭐였습니까?
사실 도움만 받았지 해 드린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할머니 쪽에서 해 먹이고, 해 입히고, 선물한 게 얼맙니까?
그러나 아이들이 이 할머니에게 주었던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거였습니다.
그 남매는 그 할머니를 찾아 주었고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아마 할머니가 남매에게 받았던 가장 큰 선물은, 자기를 찾아주고 기다리는‘갈망’이라는
마음의 선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혹 아브라함이 롯에게 기대했던 게 있었다면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자기에게로 향한 마음!또는 삼촌을 찾는 갈망!
그게 비록 기쁜 일이 아니라 자기가 나서서 처리해야 되는 성가신 일일지라도
그런 마음으로 롯이 접근했다면 아브라함은 기쁘지 않았겠습니까?
이 독일 할머니처럼 말이지요.
후일담이지만 카쎌에서 이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우리 한국 사람들이
“어디 혼자 사는 할머니나 할아버지 없나?”그렇게 찾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요즘 동네서 만나는 노인들마다 인사를 잘 하고 다닙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12세 때, 유월절 명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처음 가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오는 길에 예수의 부모는 예수를 잃었습니다.
친족들과 함께 무리 져서 오는 줄 알았는데 그 일행 중에 예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하룻길을 내려 왔기 때문에 다시 올라가서 찾기까지는 사흘이 걸렸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딱 한 가지입니다.
예수를 잃고도 잃은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예수의 부모는 예수와 같이 있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관계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자신들은 예수를 잘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별 관계가 아닌 사이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늘에서 왔다는 것과 자기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은 전혀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데서 계속 찾아 해맨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아는 정도지, 더 깊은 관계로까지는 진전되지 못한 사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영원한 소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는 새 하늘, 새 땅을 약속 받고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아도 이론으로만 알 뿐, 여기서 그치고 마는 수가 많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관계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기 때문에
양쪽이 다 교감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주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해 주기를 원하고,
그래서 지금도 계속 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좀 전에 말씀 드린 독일 할머니와 한인 남매 사이의 관계를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독일 할머니가 남매에게 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분의 기쁨은 그 남매를 위해 뭔가를 해 주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 남매는 계속 자기들 얼굴만 보여주면 되었던 겁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할머니가 다 알아서 해 줍니다.
작지 않은 유산까지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얼굴을 하나님께 자주 보여 드리고 있습니까?
그 분과 뭔가 개인적인 관계가 맺어지고 있습니까?
관계란, 예수의 부모와 그 친족처럼 무리 대 무리가 아닙니다.
관계는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그런 것이 있습니까?
나와 하나님 사이에 단 둘만이 나눌 수 있는,
그렇게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부분이 있느냐 그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배 시간에 우리가 다같이 앉아있지만
주님과 우리 사이는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배 시간에 나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주님과 관계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관계는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그래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라도 발견했지만
여러분은 지금 어떠십니까?
물론 우리는 예수 자체를 잃을 만큼 무딘 사람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와 어느 정도 사이의 관계인가 그것조차도 생각을 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점점 더 깊어지는지 또는 소원해지고 있는지
그것조차 생각 안 하고 그냥 막연하게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늘 한 집에 있으니까 관계가 깊어지겠거니 생각하는
예수의 부모와 아무 다를 게 없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관계의 핵심은 관심과 희생입니다.
그게 없으면 관계는 결코 깊어지지 않습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 대치할 뿐입니다.
인생은 부메랑인데, 특별히 관계처럼 부메랑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자기가 쏟은 관심과 헌신만큼 그대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반대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필요할 때만 사용하고 가치가 없어졌다고 폐기처분 하는 관계를 만들면
자신도 여지없이 그 덫에 걸립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격언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선인들의 경험과 지혜의 산물입니다.
▲이 얘기를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적용하지 마십시오.
놀랍게도 주님을 그런 식으로 관계 맺는 사람이 있습니다.
필요할 때 부르고, 사용한 후에는 다시 보냅니다.
그때 주님의 심정은 얼마나 무참하겠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이 참으신 것을 보면,
참긴 했지만 얼마나 쓰리셨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야곱은 이삭에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았고,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키는데도 하나님을 들먹였습니다.
하나님은 섬길 대상이시지 이용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관계 맺는 것만큼 하나님 역시 우리를 그렇게 대하실 겁니다.
관계를 개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람 양쪽 다 입니다.
왜 이 말씀을 강조하냐 하면, 이것이 인생살이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험한 인생살이를 푸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관계란 조그만 데서 시작해서 언제나 대단원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결코 여러분들 앞에 지나가는 한 사람이라도 소홀히 대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지금 만나는 그 사람이 해답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얕보고 가볍게 대했다가 원수가 돼서 다된 밥에 코 빠뜨릴 경우도 있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주면 관계는 개선되고,
내 쪽에서 조금만 희생해도 열매는 몇 곱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서두에 저는 관계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좋은 사람만 만났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닙니다.
저도 둘 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제가 하는 일이란 게 결코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관계개선의 핵심이 관심과 희생이라고 말씀 드렸지만, 사실 희생까지 가지도 않습니다.
약간의 수고만 있어도 관계는 몇 곱절 뜨끈해져서 내게 돌아옵니다.
저는 저 아는 분들께 항상 먼저 전화하고 먼저 메일 씁니다.
만약 반대의 경우가 있으면 얼마 있다가 반드시 제가 다시 그렇게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관계라는 것이 거래로 보일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그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거래와 관계의 분깃점은 그 사람을 좋아하느냐 어떠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사람 좋아하는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잘 사귑니다.
제 아내 얘기가, 제가 가진 가장 좋은 달란트로 이 부분을 말할 정도입니다.
처음에는 예의 차원에서 연락 드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게 서너 번 계속되면 그때부터 상대방은 마음을 줍니다.
그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똑같습니다.
제가 외국에 나와 있지만 저의 외연(外延)은 시간이 갈수록 넓어지면 넓어졌지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조그만 관심과 수고가 여러분의 생애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이 좋은 만남과 좋은 관계 때문에, 제 생애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물에 빠진 자기 반 아이를 위해 목숨을 내 놓는 일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관심과 수고와 헌신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야 비로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럴 때, 자기를 위해서는 생명을 포기할 수 있지만
오히려 자기 반 아이를 위해서는 다시 삶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의 얘기가 그렇더군요.
이제는 나뭇잎 하나, 풀 한 포기도 새롭게 보이고, 용서 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더랍니다.
▲제 얘기를 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제가15년 전, 주의 종이 되려고 신학교엘 갈 즈음에 저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종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저에게서 가족과 건강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다 가져가셨습니다.
완전히 제로에서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받은 사례비가30만원이었는데, 당시 월세가15만원이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각종 공과금을 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것으로는 도저히 생활해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시절에 단 한 번도 굶은 적이 없고,
아이들 교육시키는 데도 곤란을 겪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막내 형님이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프라이드 승용차를 주고 갔는데
그 차까지 몰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 후로도 언제나 쪼달리긴 했지만,
큰 낭패를 보거나 아주 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적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가는 데 마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고,
길목 길목마다 하나님의 사람을 심어 놓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뎌졌던 이런 저런 달란트까지 다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저의15년 사역기간 동안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먹이시고 입히시고 살아가는데
불편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에 주의 길을 가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은 더 열심히 했고, 노력도 더 했지만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저는 지금에야 그 때 일을 생각하면서 깨닫는 사실이 있습니다.
뭔가 내 힘으로 해 보려고 할 때는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역자로 가기로 했을 때,
그때부터 주님은 저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것을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니, 그 차이는 바로
주님과의 관계 맺는 거리의 차이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주님과 관계 맺지 않았을 때는 제 아무리 힘써도 결과가 없었지만,
주님과 든든한 관계로 엮어지자 주님은 전 생애를 책임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비단 이것이 저만의 경우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 지면 여러분의 노력은 헛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터워지면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이제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를 다시 한 번 살펴보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그저 아는 관계입니까, 아니면 이름만 겨우 아는 관계입니까?
혹 하나님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 여러분 자신은 사이가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조금 나아가서 겨우 축의금이나 부조금을 조금 많이 낼 수 있는 관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그런 사이로 만족하지 못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 것, 네 것 따지지 않고 죽고 못 사는 관계까지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단 한 줄의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구원과 승리의 유일한 소망이신데,
그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거리에 정확하게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냐에 축복과 성공의 명암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멀면 멀수록 승리와 성공은 남의 얘기가 될 것이고,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것은 내 얘기가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인생의 실패와 성공은 나와 하나님의 거리에 정확하게 비례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찬송가 가사처럼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인생의 성패가 달려 있다면
우리는 그 거리를 좁힐 수 있도록 무던히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내 것, 네 것을 따지지 않는 관계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그 모습은 나의 이웃에게까지 연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거기에 관계란 말은 비로소 힘있는 말이 될 것입니다.
노파심에서 다시 말씀 드립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그게 단지 하루였기 때문에 사흘 만에 찾을 수 있었지,
만약 그 시간이 길어졌다면 더 고생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과 별다른 관계가 없는데도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쯤 그게 끝나야지 이 시간이 길어지면
평생 예수와는 아무 관계없이 인생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평생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가 보기엔 하나님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자신은 하나님과 사이가 좋은 줄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가까울수록 좋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다시 한 번 힘을 내셔서 기도하시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이웃까지 진실로 대하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관계의 복을 충만히 받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주1)
미국 남북 전쟁 때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북군의 지도자는 링컨이었고, 남군의 지도자는 리 장군이었습니다.
둘 다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리 장군보다는 링컨 대통령이 더 하나님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집무 중에도 기도를 많이 했던 대통령으로 유명합니다.
때때로 그의 사무실 문에는‘기도 중’이라는 팻말이 붙곤 했는데
그때는 제 아무리 바쁘고 위급한 일이 있어도 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북군의 군목으로 수고하시는 목사님들이 오셔서 함께 기도하고 환담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이“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이 우리 북군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얘기했을 때 링컨이 정색을 하면서 했다는 얘기가 뭐였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그랬답니다.
링컨이 얼마나 바르고 믿음이 좋았던 사람인가를 알 수 있지요?
사실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달라고 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