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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24장 좋은 무화과 한 광주리의 소망

LNCK 2026. 6. 3. 10:2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고난/영광의 신학

(19) 좋은 무화과 한 광주리의 소망 | 예레미야 24:1-7 | 2026.05.31 Youtube

 

◈좋은 무화과 한 광주리의 소망         렘24:1~7                     2026.05.31.

 

저는 최근에 제 마음속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중요한 고사성어 하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말인데 ‘새옹지마’ 많이 들어봤죠?

중국 고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 결을 같이 하는 성경의 말씀이 있다는 거 아세요?

그게 바로 로마서 8: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 중요한 단어가 ‘모든 것’이에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 ‘모든 것’에는 유쾌하지 못한 모든 것, 내가 경험한 불행한 모든 것,

고통과 시련의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고백할 수 있는

그런 고백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민족적으로 불행한 고난을 경험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유사한 맥락의 말씀을, 본문에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당시에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서 유다 백성 상당수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비극적 상황이었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서 포로로 끌려갑니다.

 

렘52:30절에 보면 그때 끌려간 지도자들의 숫자가 4,600명이에요.

이게 남성 지도자들만 카운트한 통계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함께 끌려간 여성들, 아이들 다 합하면 최소 1만 5천~거의 2만여 명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때 포로로 끌려감을 면하고, 이스라엘에,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던 사람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야, 우리는 정말 럭키하구나.

포로로 안 끌려갔으니까 얼마나 우리는 재수가 좋은가?

그리고 저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무화과 두 광주리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한 광주리에는 아주 싱싱하고 좋은 무화과 열매가 가득 담겨진 한 광주리,

또 한 광주리에는 아주 나쁜 무화과 열매들이 가득한 한 광주리,

이 두 개를 보여주면서, ‘예레미야야, 이 두 개의 광주리가 보이냐?’

‘네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이 바로 ‘좋은 무화과 열매’라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 기뻐하면서 좋아하면서 포로로 끌려감을 면하고 남아있었던 백성들이

바로 ‘나쁜 무화과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좀 이상한 얘기죠?

 

어째서 바벨론에 유배당하고 고난당한 이들이 ‘좋은 무화과열매’가 될 수가 있었단 말입니까?

 

◑1. 첫째, 고난 중에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을 경험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렘24: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하나님이 유대 포로들을 어떻게 한다고요?

바벨론 땅에서 그들을 잘 돌보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24:6절에서는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 중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그래서 그들은 포로로 당하는 극한 경험까지도

궁극적으로는 좋게 변화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28절하고 똑같잖아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나님의 선을 이룬다는 그 약속,

바로 그대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소위 우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그 환경, 그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혹은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있느냐?

이게 결정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처한 악한 상황이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혹은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있느냐?

가 문제인 것입니다.

 

고난 중이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면,

이런 고난은 궁극적으로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영적 유익이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시편 기자와 더불어,

저 유명한 시편에서 제일 긴 시편 119:67절의 말씀을 함께 고백할 것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아멘!

 

119:71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아멘이십니까?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살아가면서, 때로 고난을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시나?

왜 이런 고난을 면하게 하시지 않고, 나로 하여금 이 고난을 통과하게 하시느냐?’

라는 질문을 하게 되죠.

 

▲우리가 구약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친구가

풀무불 속에 던짐을 당합니다.

‘왜 풀무불 속에 던지우지 않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도울 수는 없었을까요?’

이런 질문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 또 우상승배를 거절했다는 당연한 일 때문에

그들은 불 속에 던짐을 받은 거예요.

근데 불 속에 던져진 다음에 보니까, 세 사람을 던졌는데, 불 속에 네 사람이 보였어요.

 

네 번째 사람은 누굽니까? 하나님이 불 속에 들어오신 거예요.      주1)

그리고 이 세 사람을 불 속에서 보호하시고 돌보십니다.

이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에요. 메시지가 뭡니까?

 

하나님은, 많은 경우 그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면제시켜 주시기보다도,

고난의 불을 꺼주시기보다도, 이 고난의 불을 통과할 때,

친히 불 속에 들어오시사, 우리 곁에 함께 거하시며

우리를 그 불 속에서 돌보시고 계시다는 레슨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도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 날, 십자가가 다가오던 그 순간

제자들과의 이별을 말씀하시면서

요16: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한다, 안 당한다?’

당한다 그랬어요.

제자들도, 주님을 사랑하는 지들도, 세상에서 환란을 당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너희가 세상을, 환란을 이길 수가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과 작별하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마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아멘.

그렇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고난의 면제라기보다는,

고난 중에 함께하시고 고난 중에 돌보심으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함께하심 하나님의 돌보심,

그것이 분명하고 확실하다면,

우리가 고난을 후회하거나 고난을 꼭 피해가야 할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고난의 시간도 돌아보며 감사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고난의 시간조차도 감사와 찬양의 제목이 될 수가 있지 않을까요?

 

바벨론에서 고난당한 주의 백성들이

역설적으로 좋은 무화과가 될 수 있는 축복을 경험했던 이유 첫째는,

그들이 거기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했기 때문이고...

 

◑2. 둘째는, 고난 중에 더욱 견고한 성도가 되어, 다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렘24:6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여러분, 예레미야 1장에 보시면,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당신이 쓰실 선지자로 부르시고

소명을 주세요. 그러면서 1: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1:10

 

예레미야, 내가 너를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는 물론이고,

그 주변의 많은 제국들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고...’

 

거기까지만 읽어보면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하시나?’

다시 말하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겠다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이, 여러 나라와 제국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뽑히고, 파괴되고, 파멸되고, 넘어뜨림을 당할 것이라고...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에요. 마지막이 중요해요.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여, 넘어뜨리고’ 그 다음 단어가 중요해요.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1:10

 

다시 건설하고, 다시 심게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심판을 외치는 선지자였을 뿐만 아니라,

심판을 넘어서서 그들이 다시 세워지는...그리고 다시 그들이 건설되는...

회복의 선지자로 쓰임받을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는 파괴가 아닙니다.

파멸이 아닙니다.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는 우리를 다시 세워, 다시 건설하고, 다시 회복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 성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고난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더 하나님 앞에 견고한 성도가 될 것인가?’

이걸 질문해야 돼요.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은혜를 가리켜서 ‘Perseverance, 견인’의 은혜라고 불렀어요.

다른 말로 ‘견고한 인내’의 축복!    *뭘 끌고간다는 ‘견인’이 아닙니다.

 

한번 따라서 합시다. ‘고한 내의 축복!’

 

△베드로전서 1: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사도 베드로가 편지할 당시 저 유명한 네로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에 박해가 와서 로마로부터 성도들이 다 흩어졌어요.

소아시아로, 지금의 투르키예로 다 흩어져갔어요.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박해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쓴 편지가 바로 베드로전서예요.

그런데 이 베드로전서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벧전5: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 ‘잠깐 고난’이라고 했지요. 고난은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에요. 잠깐이에요.

(이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동안) 잠깐입니다.

 

근데 잠깐 고난을 잘 견디면 어떻게?

‘너희를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하게 하신다’

그랬습니다.

 

고난을 통과하며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지고,

우리의 삶이 더욱 하나님 보시기에 견고해질 수 있다면,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과거 잠시의 시련과 고난의 시간을 통과할 수 있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것도 주님 앞에 감사와 찬양의 제목이 아니겠습니까?

 

◑3. 바벨론의 고난을 통과한 이들이, 좋은 무화과가 될 수 있었던 세 번째 이유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그들이 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렘24: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 아멘

 

자 하나님의 이름이 많죠. 근데 그 중에 대표적인 이름이 ‘여호와’ 혹은 ‘야웨’인데,

뜻이 뭐예요?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 약속에 성실하신 하나님,

시간을 초월해서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역사의 주인, 영원하신 절대자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바벨론 포로인 이스라엘이 품게 되었다는 거예요.

바벨론 포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속성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탕자가

옛날보다 더, 아버지를 깊이 알게 된 것과 같죠.

조건 없이 자기를 안아주시는 아버지, 신발을 신겨주시고, 새로운 옷을 입혀주시고,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산 내 아들이라고’ 안아주시는 그 아버지를 경험하면서,

옛날하고 다르게 아버지의 마음을 더 잘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새롭게 알게 된... 과거에 이해한 아버지가 아니라,

그분보다 훨씬 더 자비하시고, 훨씬 더 위대하신 아버지...

그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탕자처럼,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더 넓고 위대하신 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 백성은

하나님의 새로운 마음을 갖고, 넓은 마음을 갖고,

새로운 역사를 다시 써내려 가야만 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잠시 잠깐의 고난을 통과하면서

가장 크게 배워야 할 중요한 레슨이 있다면,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고난을 통과하면서 가장 잘못 고난을 통과하는 태도가 있다면,

고난 속에 마음이 좁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사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고린도교회가 그랬어요.

내가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지도자를 따라.. 고린도 교회 안에 파벌이 생겼잖아요.

그런 갈등을 경험하게 된 고린도 교인들은,

이제 하나님이 새롭게 해주시는 사명에도 소극적이 되고,

하나님의 사역에도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서 바울이 편지를 씁니다. 뭐라고요?

고후6:11~13절의 말씀입니다.

 

고후6: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너희가 마음이 스스로 좁아졌다. 이제는 마음을 넓히라.

그래야 이제 새로운 사역을, 위대한 사역을, 보다 놀라운 미션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새롭고도 넓은 하나님의 마음,

이것이 하나님이 맡겨주시는 새로운 사역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프랑스 성지순례에 갔다 왔잖아요.

갔다 와서 제일 배운 것은, 하나님의 넓은 마음, 이 마음을 잘 배웠어요.

 

프랑스 성지순례! 그러면, 어떤 사람은 ‘프랑스에 무슨 성지가 있어요?’

이렇게 '프랑스에 성지순례?' 좀 이상하게 생각하죠.

 

네 여러분, 종교개혁은 많은 사람들이 역할을 했지만,

두 가지 중.한 인물이 마르틴 루터, 또 한 사람은 존 칼빈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쟝 칼뱅 이렇게 말해요.

그 두 사람을 통해서 오늘날 개신교가 형성된 거예요.

 

근데 존 칼빈이 불란서 사람이고, 불란서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종교개혁 직후에 마르틴 루터와 칼빈을 따르면서 종교개혁의 이상에 동조했던 사람들,

그들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라고 불렀어요.

 

‘위그노’ 그들은 당시 가톨릭에 의해서 잔인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보통 박해가 아니라 잔인한 박해를 받았어요.

 

여러분, 불란서 파리에 가시면, 파리에 3대 관광지가 있죠?

그게 다 위그노 하고 관련돼 있어요.

 

파리에 가면 빼놓지 않고 누구나 반드시 100% 가는 곳이 어디에요? 루브르 박물관이에요.

그런데 루브르 박물관이, ‘성 바돌로메 축일’ 날에,

가톨릭 교회가 종소리를 울리면서, 3천명의 개신교인들을 그 뜰 안에서 학살했던 곳이에요.

루브르가 그런 곳이에요.   *당시 왕궁이 루브르

 

그리고 그 피 흘린 시체들을 내다버린 곳이 세느 강이에요.

‘당시에 그 강은 붉은 강이 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합니다.

*세느 : ‘신성한 강’ 또는 ‘부드럽게 흐르는 강’ 이란 뜻

 

그리고 강에선 건져올린 시체들을 다 파묻은 곳이 어디냐면 에펠탑이에요.

그런 눈으로 보시면 프랑스가, 파리가 새롭게 보일 거예요.

 

나머지 사람들은 다 남부로 도망갔어요. 불란서 남쪽으로.

우리는 이번에 이런 위그노의 역사적 흔적을 좇아다닌 거였죠.

 

남쪽으로 내려가서 동굴에서, 광야에서 예배를 드렸어요.

그러다가 붙잡히면 또다시 투옥당해요.

 

마리 듀랑이라는 여인은, 가톨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콩스탄스 감옥에서 38년간 감옥살이를 합니다.

‘네, 제가 가톨릭으로 돌아가요.’ 그 한마디 하면 놔주는데,

그 말을 안 했기 때문에 38년간 감옥살이을 해요.

 

마리 뒤낭, 그녀의 신앙과 삶이 지금 [강남 광야 아트센터]에서

뮤지컬 <저항하라>라는 제목으로 지금도 진행 중이에요. 10월까지 해요. 꼭 가보세요.

위그노의 신앙을 기린 뮤지컬이에요.

 

지금 그런데 지방으로 수만 명이 쫓겨다니다가, 거기서도 오래 있지 못하고

박해를 피해서 불란서를 이제 떠납니다. 어디로 가느냐?
독일로 가고, 스위스로 가고, 남아프리카로 가고, 네덜란드로 가고,

더러는 미국까지 가고... 무려 30만 명 이상의 위그노들이 유럽 각처로 흩어집니다.

 

그런데 이들이 종교개혁의 이상에 충실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직업에 충실했던 사람들이에요.

전문가들이에요. 이들 때문에 스위스의 시계산업이 발달해요.   *중산층, 신흥 부자 계층

영국의 산업 발전이 이루어지고, 미국초기 건국사회가 위그노들의 기여를 통해서 이루어져요.

프랑스 안에서는 그들이 발 디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700년대에 이런 개혁교회, 개신교회 목사의 아들, 엄마는 위그너 교인이었던

한 젊은이가 꿈을 꿉니다.

 

‘왜 저들도 하나님을 믿는데, 가톨릭도 하나님을, 개신교도 하나님을 믿는데,

꼭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데, 왜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전쟁을 선포하고,

박해해야 할까?’ 그래서 그는 새로운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가톨릭을 끌어안고, 개신교와 가톨릭과 정교회가 함께 예배하는 꿈을 꾸었어요.

그래서 프랑스의 중동부의 작은 마을 부르고뉴 라는 지방의 한 동산을 마련했어요.

그 동산의 이름이 떼제 예요. 거기다가 교회를 세웁니다. 그 교회 이름이 ‘화해의 교회’예요.

 

개신교와 가톨릭이 함께 예배하는 교회,

하나님은 그의 넓은 마음, 아름다운 마음을 축복하셨어요.

그래서 그를 통해서, 가톨릭과 개신교인들이 함께 거기서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곳이 만들어 졌습니다.

 

떼제의 동산에 가면 다른 프로그램 아무것도 없고 간단해요.

하루 3번 아침 점심 저녁, 예배를 같이 드립니다.

그외 식사준비하고, 정원 가꾸고 하는 것은, 다 참여자들이 자원봉사로 해요.

 

우리 교회 성지순례 팀도, 떼제를 방문해서

하루 점심 때 한 시간 같이 예배드리고, 점심 식사 한 번 같이 했어요.

 

거기에 수천 명이 모여요.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유럽 각처에서 몰려들어요.

유럽에, 불란서에 영성이 죽었다고요? 기독교가 죽었다고요?

프랑스에 떼제 공동체에 가보세요.

 

우리와 같이 갔던 사람들이 깜짝 놀래요.

젊은이들이 수 천 명이 몰려와서... 같이 예배드리고 교제하니까요.

 

거기서 예배는 단순해요. 떼재 찬양은.. 여러 나라에서 왔으니까

부르기 쉽도록 가사가 몇 줄 안 돼요. 간단한 찬양을 부르고,

성경봉독을 또박또박 합니다. 설교가 없어요. 성경봉독이 끝나면 종을 울려요.

그러면 침묵해요. 5분 내지 10분 가량 침묵해요.

각자 봉독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거예요. 그것이 설교예요.

 

근데 사람들이 변해요.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새기고,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그들이 전세계로 흩어져 나갑니다.

 

제가 20년 만에 다시 또 방문했는데, 20년 전에 제가 갔다 와서 너무 충격을 받고,

제가 여러분과 함께 ‘침묵 기도’를 나눴잖아요.

그 당시에 우리 교회에서 ‘침묵 기도’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떼재 찬양’은.. 우리가 지금도 부르는 떼재 찬양은 ‘우우우 주를 찬양하나이다’

또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그게 다 떼제 찬양이에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넓은 마음,

세계 유일하게 여러분 개신교와 가톨릭이 함께, 정교회까지 함께,

다같이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찬양하고 은혜받는 딱 한 곳, 떼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 이런 기적같은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종교전쟁을 겪었던 불란서가

지금 모든 면에서 관용을 강조하는 똘레랑스의 나라가 된 거죠.

영어로 Tolerance 관용!

 

바로 이런 때제를 시작한 로제 형제, 영어로 롸저 Roger예요.

이 한 사람의 비전 한 사람의 기도, 이 한 사람의 넓은 마음, 그 마음이

이런 기적 같은 동산을 만든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도 우리가 잠시의 어려움을 지나갔지만,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통해서 귀한 지도자를 모시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 있는 오늘 이 시점에서,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무화과 한 광주리에 가득한 그 소망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우리 지구촌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

 

주1)

단3:25절에 따르면, 풀무불 속에 있던 네 번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개역개정) 또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같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네 번째 존재를 일반적으로 성육신하시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

(구약 시대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로 해석합니다.

이 천사는 당연히 하나님의 전권을 갖고 파송된 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