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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6장 여호수아의 대관식

LNCK 2026. 6. 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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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25 여호수아의 대관식 2021.04.11 Youtube 

 

◈여호수아의 대관식                 슥6:9-15               2021.04.11. [스가랴 25강]   

 

오늘은 저희가 스가랴서 전반부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스가랴서 전반부는 1~6장까지 내용인데요.

스가랴가 봤던 8개의 환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8개의 환상은 하룻밤에 본 환상이에요.

스가랴가 긴 기간에 걸쳐서 본 것이 아니라, 하룻밤에 다 봤던 그런 환상입니다.

그 환상의 내용은,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성전의 회복과 

-예루살렘 성읍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다시 회복하게 하실 것이고,

또 이들이 살아갈 터전이 되는 예루살렘 성읍도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그 예언의 말씀, 또는 격려의 말씀이었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실 것이고,

또 예루살렘 성읍에 불성곽을 두르시겠다고 하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머지 환상의 내용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이를 행하실 것인가?’

 

-그래서 주의 영으로, 

-또 하나님의 은혜로,

-또 죄를 제거하심으로,

이런 방식들을 통해서

 

어쨌거나 그 주의 백성들에 대한 회복과,

또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올 것에 대한 것을 약속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자 이렇게 8가지 환상을 다 끝내고 나서,       *6:8절까지

이제 본문 6장 후반부는 *6:9~15

이 여덟 가지 환상을 다 총 결산하는, 결론 짓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본문 슥6장 후반부는 환상은 아니고요.

근데 어쨌거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셔서 스가랴에게 주셨던 예언의 말씀이긴 한데,

그 앞에 봤던 환상하고는 조금 성격이 다르죠.

 

그 내용이 6장 마지막 부분의 내용인데

오늘 이 마지막 부분(6:9~15)은, 전반부 8개 환상에 대한 총 결론입니다.

 

그런데 그 결론의 영은 뭐냐 하면,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영원한 성전과, 그가 다스릴 영원한 나라

-그래서 지금 짓고 있는 성전이 있고,

-지금 하나님이 회복하시겠다고 하는 예루살렘이 있는데,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서 종말론적으로 마지막에,

-예수께서 다시 회복시키실 성전과,

-마지막에 다시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나라, 예루살렘이라는 게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죠.

 

그래서 지금 너희가 눈에 보이는 성전을 재건하고 있고

또 조금 지나면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게 될 것인데

그것은 단순히 너희 시대에 해당하는 눈에 보이는 일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서

마지막에 메시아가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건축하실 여호와의 전,

예수께서 건축하실 성전과 예수께서 회복하시고 다스리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어떤 예표라는 것입니다.... *주제

 

더 정확히 말하면, 예표라기보다는 그것과 연결되어지는 일이라는 거예요.

그것에 참여하는 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단순히 너희 시대의 일뿐만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일이고, 영적인 일이고, 영원한 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야기는 뭐냐면, 오늘날 저희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행하고 있는 많은 일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들, 헌신하는 일들,

예배하는 일들, 교회를 세워가는 일들, 그래서 교회를 건축하기도 하고

교사로 섬기기도 하고 하여간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일들은

작게는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교회를 세워가는 그런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 본질적으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종말론적인 일에 참여하고 있는 거라는 거예요.

 

종말론적인 일이라는 것은,

예수께서 세우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께서 회복하실 영원한 성전을 세워가는 일에 직접 참여하는 일이다...

하는 그 메시지를 결론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호수아의 대관식>을 통해서,

-성전재건과

-예루살렘 성읍의 회복에 대한 여덟 가지 환상에 대한 총결론,

그것의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일에 참여하는 일이 주는 메시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의 예물을 받으라

 

슥6:9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0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받되

11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자 이 성전 재건과 또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한 환상을 모두 보고 난 스가랴에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시는데, 그 말씀은 뭐냐 하면,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이 있는데, 헬대도비야여다야였죠.

 

이 세 사람에 대한 2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 중 위에 지명된 세 사람이(6:14에는 스바냐의 아들 헨까지 4)

성전 건축을 위하여 바벨론에 남아 있는 동포들에게서 헌물을 모집해 온 듯합니다.

 

또 여기서 보면 ‘돌아오다’의 히브리어 의미를 보면,

KJV는 ‘come back' 이라고 했는데,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컴백했다는 뜻인 거죠.

 

스가랴 선지자는, 이제 그들을 찾아가서 그 헌물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주1)

그 사람들에게 은과 금을 받아서 면류관을 만들라는 거예요.

 

2) 그런데 이 세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 이야기는 1차 포로귀환 때 함께 돌아온 그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제 고레스 칙령이 내리고, 70년 만에 처음으로

‘너희가 이제 돌아가도 돼, 고국에 돌아가서 성전을 세워도 돼’ 그랬을 때,

주님께 특심한 열심이 있고, 특별히 헌신되어 있는 사람 5만명들이 헌신을 해서

5만명이 이제 1차 귀환으로 돌아와서, 성전 재건의 일을 시작하게 되죠.

 

그런데 그때 돌아오지 않았던 사람들이 바벨론에 남아있었다는 거예요.

사실은 그 사람들 숫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5만명은 아주 헌신되어 있는 특심한 열심이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90%는 돌아오지 않았죠)

 

아마 이 세 사람들은, 그들 중에 속해 있던 사람들일 거예요.

헬데와 도비야와 여다야도 1차로 돌아오지 못했던 사람 중에 속해 있던 사람입니다.

 

또 여기서 보면 ‘돌아오다’의 히브리어 의미를 보면, ‘완전히 귀국했다’는 뜻이 아니에요.

완전히 귀국한 것이 아니라 ‘잠시 방문하러 왔다’ 이런 뜻이 훨씬 더 강합니다.

혹은 1차 귀환의 후발대로 봅니다. 어쨌든 1차 귀환자는 아니었다는 거죠.

*위 두 가지 해석 중에, 이 설교는 2)의 해석을 따릅니다.

 

▲여러분, 5만 명의 특별히 헌신되어 있는 사람들이 성전을 재건하겠다고 돌아왔지만,

사실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돌아오지 못했던 사람들이 훨씬 많았는데, 아마 다들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다들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마음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부모님이 나이가 아주 많으세요.

그러면 사실 그 여행을 감당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게 몇 개월씩 걸어야 되는 여행인데...

그 여행하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실 수 있겠죠.

 

그렇다고 나이 많은 부모님을 버려두고 올 수도 없고...

유대인의 전통은 나이가 드신 부모님들을, 당연히 자식이 봉양하는 것이

그냥 당연한 일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부모님들은 버려놓고 올 수도 없고 그렇죠.

 

또 아니면, 딱 그 귀환해야 될 시점에, 건강이 안 좋았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게 혼자서 개별적으로 여행하는 게 쉽지 않은 때이기 때문에,

돌아올 때 한꺼번에 돌아왔어야지, 병으로 좀 아팠다든지,

아니면 가족 중에 누가 병든 사람이 있었다든지... 그럼 또 못 돌아왔을 수도 있고,

 

또 아니면 피치 못할 책임을 맡고 있었을 수도 있어요. *공무원 등

그래서 하던 일을 갑자기 놔두고 귀환해 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그랬을 수도 있고,

 

또 여자의 경우는, 정말 귀환하고픈 마음은 있지만, 남편이 반대했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오늘날 우리가 흔히 겪는 일들 아닙니까.

 

정말 자매 분이 이렇게 헌신하고 싶은데, 남편이 죽어도 안 된대요.

그럼 못 움직일 수도 있지요.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용기가 없었을 수도 있었어요.

‘여기 떠나서 고국에 돌아가서 또 터저 잡고 잘 살 수 있을까? 나는 못할 것 같아’

‘저 5만 명은 믿음이 대단하다’ 그러면서 그냥 용기가 없었을 수도 있어요.

 

자,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들에게는 비록 용기가 없고, 또 사정도 허락하지 않았고

그래서 1차로 포로들이 귀환할 때, 그 기회는 놓쳤어요. BC 538

 

그렇지만 여전히 뒤늦게 돌아왔던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를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싶다는 마음과 열정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그 먼 길을 걸어서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입니다.

또 이들이 드렸던 헌물을 보면 그렇게 큰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드렸는데 작은 돈은 아니었죠.

은과 금을 가지고 대제사장의 면류관을 만들 정도니까,

이렇게 작은 돈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성전재건이라는 큰 프로젝트에 비하면, 사실 그렇게 큰 비중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 안에 그냥 집어넣을 수 있는 조그만 (면류)관 하나 만드는 거니까요.

전체 성전 재건에 비하면 그렇게 큰 금액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뭐예요? 이들의 마음이에요.

비록 용기가 없고 비록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서 처음에 5만 명과 함께 귀국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정말 성전 재건의 일에 참여하고 싶은,

그 마음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작은 것이라도,

그냥 내가 드릴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작은 것이라도

정말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싶고, 정말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서,

먼 거리를 걸어서 직접 찾아왔다는 거예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이들의 헌신을 받으셨다는 거예요.

이들의 마음을 받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받으셨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귀하게 여기셔서, 대제사장의 금면류관을 만들게 하셔서,

그것을 성전 안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14

 

10절과 1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받되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6:10절과 14절에 등장하는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

바벨론 포로 귀환 직후 유대 사회의 지도자급 인물로 추정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 참 저희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돼요.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라는 거예요.

 

물론 처음에 용감하게, 정말 열정적으로 헌신해서 돌아왔던 5만 명의 헌신은 물론 귀하죠.

물론 그거 하나님이 다 기억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5만 명에 끼지 못했다고 해서,

‘너는 실패한 놈이고, 쓸모없는 놈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넌 영적인 실패자야’ 이렇게 낙인 찍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면,

우리의 연약함과 또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아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도, 참 움직일 수 없는 상황 가운데도,

건강이 허락 안 하는 상황 가운데도, 또 어떨 때는 재정적으로 궁핍한 가운데도,

 

또 우리 자매님들 같은 경우에는, 남편이 계속 반대하는 가운데도,

또 이도 저도 아니지만 그냥 선뜻 이렇게 나설 수 없는 용기가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도,

그 연약함이 있는데... 그 연약함이 있다고 해서,

여러분 그 연약함이 곧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겠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그냥 연약함일 뿐이지, 그 연약함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신하겠다는 건 아니잖아요.

그거하고는 전혀 다른 일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분해서 아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든지 하나님 앞에 좀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시고, 성전 재건 사업에, 이들을 끼워주신다는 거예요.

끼워주실 뿐만이 아니라 가장 화려한 왕관을 만드는 일에 사용하셔서,

그것을 성전 안에 두고 기념하신다는 거예요. ↙

 

6:14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2. 두 번째,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면류관을 만들어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씌우라고 말씀하십니다.

 

6:11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그런데 여기서 ‘면류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보면 ‘아타라’라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는 면류관이라는 뜻보다 ‘왕관’이라는 뜻이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왕이 썼고, 다윗 왕이 썼던 왕관이 전부 다 ‘아타라’예요.

 

그래서 표준새번역에는, ‘면류관’이라고 돼있지 않고 ‘왕관’이라고 돼있습니다. crown

그게 조금 더 정확한 번역이에요.

정확하게 얘기하면 면류관을 씌운 것이 아니라, 왕이 쓰는 왕관을 씌운 거예요.

 

그래도 우리가 '면류관'이라고 했을 때는, ‘왕관’이라고 했을 때와는 좀 다르지요.

왕관은 뭐예요? 왕이 쓰는 거라는 거예요.

면류관은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씌워주는 ‘관’이지만, 왕관은 왕에게 씌워주는 것입니다.

 

자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왕의 상징인 왕관을 씌웠다는 거예요.

그래서 본문을 ‘여호수아의 대관식’이라고 부릅니다.

대관식은 뭐예요? 왕으로 즉위할 때, 딱 이렇게 왕관 씌워주는 게 대관식이죠.

 

자 그런데 이게 조금 이상합니다.

왜냐면 원래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이지, 왕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으로 철저하게 왕과 제사장은, 엄격히 구분되어져 있습니다.

왕은 유다지파, 다윗의 자손에서만 나올 수 있도록 정해져 있고,

반면 대제사장은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에서만 나올 수 있어요.

 

여호수아는 당연히 레위 지파 사람입니다.

레위 지파 사람은 왕으로 임명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레위 지파였던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왕관을 만들어서 씌워주라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뭔가요?

그 이유가 12절, 13절에 보면 알 수 있는데요.

 

6:12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이게 무슨 말이에요?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라는 거예요.

‘싹이라 이름하는 자’는, 슥3:8절에서 이미 한번 언급을 했습니다.

 

3:8b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새싹 또는 새순, 싹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이렇게 3:8에서 하셨던 말씀을 다시 한번 인용하시면서

오실 메시야, 메시야가 올텐데, 그 메시야가 왕이면서 대제사장인 존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신다는 거예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또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리시기도 하신다는 거예요.

6: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지금 대제사장 여호수아 때 건축되고 있는 성전이 있는데,

이 눈에 보이는 성전은,

너희 시대에 너희가 바라볼 그 성전 뿐만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서, 먼 미래에 메시아가 오실 것인데,

종말에 메시아가 이 땅에 임하실 텐데, 그 메시아가 건축할 여호와의 전,

그 여호와의 전을 예표하고 있다는 거예요.   :12~13

 

그리고 앞서 얘기했지만, 단순히 예표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이 일은,

사실은 그 종말론적인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거라는 거예요.

 

사실 너희는 눈에 보이는 이 건축 프로젝트에 너희가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이해일 뿐이고,

실제로 너희가 하고 있는 일의 영적인 일은 뭔 줄 아느냐?

 

실제로 너희가 하고 있는 일은, 너희가 행하고 있는 일의 영적인 임팩트는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종말에 다시 회복하실 여호와의 전이 있는데,

 

그 여호와의 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얻으실 것이고,

그 여호와의 전에 앉아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또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실 터인데,

그 종말론적인 사건에, 너희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거라는 거예요.

그 예표로 여호수아에게 금관을 씌워서, 왕으로 대관식을 행합니다.

 

▲자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의 본질이 뭐냐는 거예요.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행하는 일, 주일에 예배드리기도 하고,

또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기도 하고,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기도 하고,

또 교회에서 건축한다 그러면 헌금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우리가 주를 위해서 힘쓰는 일들이 있는데,

 

그 일은 너희가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어떤 것들을 행하는 일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서 그 일의 궁극적인 의미는 뭐냐면

‘너희가 그 일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종말에 예수께서 오셔서 행하실

여호와의 전을 회복하시고,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고,

그 안에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영원히 통치하실 터인데,

그 일에 너희가 참여하는 일이다’ 라는 거예요.   :12~13

이 사실을 너희가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금관을 씌우면서,

마지막에 될 일을 너희가 알라.. 라는 예표로 이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우리가 행하는 일들, 오늘 우리가 주를 위해서 행하는 일들은

그 일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관계없이

그것은 크고 중요한 일이라는 거예요.

‘작은 일의 날’이라고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4:10참조

 

우리가 행하는 일들은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서

마지막에 예수께서 세우실 영원한 여호와의 전에 참여하는 일이고,

마지막에 예수께서 회복하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는 일이에요.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시는 성전의 속성

이어지는 6:12~15절은, 
그렇다면 종말에 예수께서 세우실 그 성전, 영원한 여호와의 성전은 도대체 어떤 성전인가? 
그 성전을 어떻게 세워가시는가?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속성, 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시는 성전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를 몇 가지로 말씀합니다. 

▲1. 연속성을 가지지만, 전혀 새로운 성전입니다.

6:12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여기 보면 '싹이라 이름하는 자'라고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싹'이라고 묘사했는데, 3:8
'싹'이 상징하는 것은 뭐냐면, 새로운 거예요. 

'싹'이라는 것은, 가지에서 돋아나는 순을 묘사하는 단어인데,  *새 싹
이 싹은 가지에서 돋아나기 때문에 연속성이 있습니다. 전혀 엉뚱한 게 나오는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있던 것하고는, 또 다른 어떤 새로운 거예요. 
그게 이제 '순'이라고 묘사되는, 또는 '싹'이라고 묘사되는 속성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하시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라는 가지에서 나왔지만, 
전혀 다른 새로운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고, 
또 종말에 예수께서 세우시는 성전도 그렇다는 거예요.  *종말 : 초림~재림의 시기

메시아가 오셔서 마지막에 종말에 세울 여호와의 전이 있는데, 
그 여호와의 전은 구약에서 세워졌던... 
스가랴서에서 지금 세우는 '스룹바벨 성전'하고 연속성은 있을 거예요. 
분명히 거기서부터 나온 연속성은 있는데, 그렇다고 똑같은 건 아니라는 거예요. 

뭔가 새로운 거라는 거예요. 
그 성전은, 분명히 구약에서의 성전과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세우실 성전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구약에서 얘기했던 건물은 아니에요. 

그럼 뭐예요? 신약에서 예수님이 회복하신 성전은, '사람들'이라고 얘기합니다.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종말에 세우실 성전이 이거라는 거예요. 
종말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라고 그랬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신 순간부터, 종말이 시작돼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되는 거죠. 
자 이 종말에 세워질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데, 
이 성전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너희 가운데 거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곧 성전이죠)

그래서 구약에서는 성전 건물이, 이제 성전이었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또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런 현현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렇지만 메시야가 오셔서 세울 여호와의 전이 있는데, 
그것은 싹이라는 거예요. 이전에 가지에서부터 돋아나기는 하지만 
전혀 새로운, 전혀 새롭고 다른 성전을 예수께서 건축하시는데, 
그 성전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 
그래서 그 안에 처음으로 성령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한 이후로, 
여호와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아주 드문드문 잠깐 선지자들 가운데 간헐적으로 임하시긴 하셨지만,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그런데 그 일이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일어난 거예요. 
저와 여러분 가운데 성령께서 오셔서, 거하시기 시작한 거예요. 그게 성전이라는 거예요. 

'싹'이라는 분이 오셔서 세우실 그 성전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에요. 
여호와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그렇기에 이 메시아가 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는 성전에 참여하고자 하는 자, 
성전을 건축하는 데 참여하고자 하는 자는, 어디에 참여해야 되는 거예요? 
영혼을 세우는 일에 참여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궁극적으로 성전 건축에 참여하는 일이라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인 셈이죠.

한 영혼이라도 더 여호와께 돌아오기를 원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여호와께 올바로 세워지기를 원하고, 
회복되기를 원하고, 치유되기를 원하고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할 때, 
그것이 종말론적인 성전 건축에 참여하는 일인 줄 믿습니다. 

▲2. 두 번째 특징은 뭐냐면, 싹이 돋아난대요. 

'돋아나다'라는 단어를 보면, 히브리어로 제마흐 인데, 
이 말은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의 특징을 보면, 
갑자기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굉장히 느리고, 차근차근, 천천히 일어나요. 그게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데, 
평생 하고 가신 게 뭐냐면, 12명 훈련시켜서 보내놓고 가셨잖아요. 

여러분, 인간적 입장에서 보면요. 속이 탑니다. 
'저렇게 해서 언제 온 세계를 구원하셔?'
 
온 세계를 구원하시려면, 그러면 오늘날 유튜브 하듯이, 
그냥 쫙 한꺼번에 나타나 가지고서, 이렇게 전도하고 제자 삼으시면 참 좋겠는데...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시니까, 그게 가능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안 하시고요. 아주 느리게 차근차근 정말 싹이 돋아나듯이 그렇게 하세요. 
그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에요. 싹이 자랄 때, 차근 차근 자라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차근차근 주의 일을 감당해가는 것이 아니라, 
일확천금을 누리려는 마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천천히 하나님이 하셨듯이, step by step, little by little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느 날 한 방으로, 한 탕으로... 성화를 이루려고 하고, 뭔가를 이루려고 합니다만...

어느 날 금식기도 일주일로... 그렇게 퉁치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는데,
아니에요. 주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세요. 

우리 예수님의 특징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성전을 세워가는데 
싹이 돋아나서 step by step 한 걸음씩, 천천히, 차근차근 하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래야 사람들이 다치지 않아요. 영혼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건물을 세우는 일이라면 그냥 한꺼번에 하실 거예요. 뭐 능력이 없으신 분도 아니고, 
그냥 툭 세우시면 되시는데... 그게 뭐가 어렵겠어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워가는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루아침에 하려고 하면... 사람이 깨지고 망가져요. 다쳐요. 그렇잖아요. 

우리 안에 이렇게 천천히... 이해도 되고 깨닫기도 하고,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가면서, 결국 하나님의 백성의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내가 확 변화된 다른 사람이 된다면, 내 자아가 깨지고 망가지는 거죠. 
그렇게 안 하신다는 거예요. 사람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도, '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걸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사람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해주고, 인내해주고, 
그렇게 세워갈 때, 주의 나라와 주의 집이 건강하게 세워져 갈 줄로 믿습니다. 

▲3. 셋째는, 왕과 제사장을 겸하신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다스리십니다

6: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자 예수께서 재건하시고 건축하신 성전에는, 제사장의 자리가 있대요. 
제사장의 자리만 있을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앉아서 제사장이 다스리시기도 하신대요. 
그리고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대요. *원래 유대나라는 제정일치, 제사장도 다스림

'평화의 의논'이라는 것의 원어적인 의미, 조금 더 뉘앙스를 살펴보면, 
'백성들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 계획을 세우신다' 이런 뜻이에요. 
'백성들의 영원한 평화, 샬롬을 주시기 위해서, 의논하시고 계획을 세우신다' 이런 뜻이거든요. 
자 근데 이 둘은 뭡니까? 
제사장의 자리가 있고, 왕으로서 다스리시기도 하신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성전 가운데 계신데, 두 직분을 가지고 계시다는 거예요. 

이 성전에서 다스리시기도 하시고... 왕이세요. 
온 우주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성전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왕이신데, 
동시에 제사장의 자리도 가지고 계세요. 
그래서 이 둘이 백성들의 영원한 샬롬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신다는 거예요. 

자 이것은, 신약시대의 주의 백성들이, 어떻게 샬롬을 누리는가에 대한 그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고, 샬롬을 누리게 되는데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어떻게 샬롬을 누리는가에 대한 그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이 
조화롭게 이루어졌을 때... 우리가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고, 
그 가운데 샬롬을 누린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스가랴서의 중심 메시지가 뭡니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거잖아요. 성전 중심으로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성전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결국 이 신약시대의 성전은, 그 가운데 예수님이 계신 건데, 
이 예수님이 성전을 중심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그 성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데, 
이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 안에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가? 
첫째 왕으로 계시고, 둘째 제사장으로 계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전 중심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거라는 거예요. 

그게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모습이고, 그때 우리에게 뭐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샬롬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우리의 평화를 위한 의논'이라는 거예요.  :13

그래서 이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은혜를 얘기합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시고 우리를 갑없이 구원하시는, 은혜로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반면 인 예수는 어떤 분이세요? 다스리시고 통치하는 분이세요.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가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순종해야 될 분이세요. 

그래서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뭐냐 하면, 
이 두 가지가 우리 안에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거예요. 

이 두 가지가 있을 때, 우리 안에 샬롬이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이 둘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에게 샬롬이 주어지지 않아요. 

▲4. 네 번째, 예수 그리스도가 건축하는 종말론적인 성전의 특징은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다는 거예요.

6:15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비록 스룹바벨 성전은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건축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건축하실 영원한 성전은, '먼 데 사람'  이방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멀다고 하는 것은 거리가 멀다는 뜻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먼 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항상 이방인을 지칭하는 용어예요. 

먼데 사람, 곧 이방인들이 와서 건축한다는 거예요.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일에, 
여호와의 나라를 건축하는 일에 참여할 것을 예언하고 있고, 
이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뭐예요?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는 줄 너희가 알리라' :15

이 예언이 성취되는 걸 보면, 여호와께서 스가랴를 보내셔서 
이 말씀을 전하게 한 것을 너희가 알게 되고 보게 될 거야... 이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그것을 지금 보고 있잖아요. 
종말론적인 성전, 사람들, 교회를 세워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 역사에 이방인들이 참여하고 있어요. 

이방인이 딴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예요. 
저와 여러분이 유대인이 아니잖아요. 
'먼데 사람'들인데, 이 먼데 사람들이 지금 이 성전 건축을 참여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아! 스가랴가 예언했던 것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거구나' 
'스가랴가 예언했던 일이 지금 21세기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거구나' 
여러분 참 감격스러운 일 아닙니까? 

저희는 스가랴의 예언이 2500년 전에 
그냥 유대 땅에 세워지는 (스룹바벨) 성전에 대한 예언이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서, 
스가랴가 예언한 것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다는 거예요. 

아니 우리 자신이 스가랴 예언의 성취라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이 2500년 전에 스가랴가 했던 예언의 성취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일에, 여호와 하나님의 전을 섬기는 일에,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제사장과 왕으로 섬기는 일에, 
이 종말론적인 성전을 세워가는 일에, 저와 여러분이 지금 참여하고 있잖아요. 

저와 여러분이 그 성전(교회) 가운데 참여하고 있잖아요. 
이것 자체가 '스가랴의 예언의 성취'라는 거예요. 
먼 데서 와서 성전을 재건하는 자들, 그 일의 성취에 저와 여러분이 서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조건이 있습니다.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데 이같이 되리라' :15 

그래서 이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고 참여하게 되는 이방인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에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듣고 지킨다'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 
그래서 여호와의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며, 여호와께 순종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성전, 영혼을 구원하고 세워가는 일에 
그 마음과 삶을 드리는 자... 그들이 이 예언의 성취를 보게 될 것이고, 
그 예언이 성취되는 자리에 서 있을 거라는 거예요. 
그게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500년 전에 기록되었던 이 스가랴서는 
그 당시만을 위한 글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예언의 말씀이에요. 

스가랴 때 예언했다면, 오늘은 그 성취를 보고 있고, 
또 스가랴에서 아직 성취되지 않은 말씀들이 있어요. 스가랴서 뒤로 가면 나와요. 

이제 현 시대보다도, 더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그것도 분명히 성취될 거예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2021년 저희가 이 스가랴서 말씀을 붙잡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붙잡고 
여호와의 성전을 세워가며, 그렇게 승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전 건축에 헌신한 이들이 기억되고, 기념됨

 

6:14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헬렘'은 앞에 나왔던 '헬대'하고 동일 인물입니다.  :10
자 이 위대한 성전 안에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를 기념하기 위해서 
면류관을 두라'는 거예요. 

14절에 언급된 '헨'은 바빌론 유배 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으로, 
그 이름의 히브리어 뜻은 '은혜' 또는 '호의'입니다.
그는 헬렘, 도비야, 여다야 등과 함께 성전 건축을 위해 헌신한 바벨론 귀환자 중 한 명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바벨론에서 온 이들을 맞이하고, 은과 금으로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라고 예언을 받아 명했습니다. 
이후 이 면류관은 성전 건축에 공헌한 이들(헬렘, 도비야, 여다야,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해 여호와의 성전 안에 두어졌습니다.

일부 성경 주석에서는 본문 10절에 언급된 '요시야'가 
바로 이 '헨'(스바냐의 아들)의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도 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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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하나님께서 왜 스가랴를 특별히 세 사람(혹은 네 사람- 6:14절 참조)에게 보내며
그들의 금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도록 하셨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들은, 귀환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높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예루살렘 재건 약속을 불신앙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귀정시켜 신앙으로 많은 유대인들을 바로 인도하도록 하시려고,
그들에게 스가랴를 보내어 이 일을 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의 이와 같은 상징적 행위로써 여호수아의 대제사장 직분 실행
(성전 재건)의 확실성을, 그들에게 보여주시어 그들의 신앙을 강화시키신다.

"헬대"는 주님의 세계라는 뜻이고,
"도비야"는 나의 좋은 것이 주님이라는 뜻이며,
"여다야"는 하나님이 아신다는 뜻,
"요시야"는 하나님이 지지하신다는 뜻이다.

이 이름 뜻들이 여기 스가랴를 통한 행동 계시에 협조하는 의의를 가지기도 한다.
곧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통하여 성전 재건하는 것을
이 이름들의 지시함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지지에 의하여 이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