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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장 확신과 고난

LNCK 2026. 6. 5. 10:3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고난/영광의 신학

260517_로마서 강해(42)_확신과 고난(8:17-18)_Youtube 

 

◈확신과 고난               롬8:17-18                  2026.05.17. 로마서 강해(42)  

 

◑지난 강의 복습 및 보강

 

제가 지난 주 41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시는 방식이 세 가지가 있다

고 말씀을 드렸어요.

 

1) 하나는 ‘성경의 증거’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께서 성경을 밝히 드러내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구나’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은혜의 내적 증거’라고 했죠. 내 삶을 보면서,

내 안에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한 증거들이 있는가 하는 것을 살피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는 ‘성령님께서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증언해 주시는’ 것이 있고,

이것을 제가 주로 지난 주에 말씀을 많이 드렸죠.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그런데 이 세 번째는, 우리가 굉장히 체험적인 것이라고 했어요.

맞아요. 그런데 이것을 유난히 다른 두 가지를 무시하고,

‘나는 정말 어떤 이런 체험이 필요해.. 뭔가 불도장을 찍는 것 같은 확실한 체험이 필요해’

라고 생각하고, 앞에 있는 두 가지를 다 무시한 채,

 

‘그저 나는 뭔가 성령 체험이 필요해’를 추구한다면,

그 태도는 굉장히 위험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구원의, 하나님의 자녀됨의) 확신에서 점점 멀어질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주신, 하나님께서 일상적으로 주신 그게 뭐예요?

성경이죠. 성경을 우리가 무시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라고 한다면, 그거는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사실 성경을 강조하고, 또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 삶.. 이런 것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과의 사귐, 우리가 은혜의 내적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유튜브를 보는 거는 은혜 없어도 돼요.

자동이에요. 은혜가 안 필요해요. (시사, 오락) 유튜브를 보면서 한 두 시간을 보내는 거는,

은혜가 1도 필요하지 않아요.

 

근데 하나님하고 내가 깊이 교제를, 깊든지 얕든지 하나님하고 교제하는 건 은혜가 필요해요.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단 5분도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낼 수 없습니다.

이게 은혜의 증거예요.

그래서 그런 은혜의 내적 증거들.. 이거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런 중에서 제가 (은혜의 내적 증거들) 몇 가지를 여러분에게 설명드렸습니다.

-죄에 대한 슬픔이 나에게 있는가?

 

은혜가 내 안에서 일하지 않으면, 여러분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 죄 때문에

죄가 초래하는 (징벌적) 결과를 당할까봐 내게 두려운 마음은 있을지 몰라도,

죄를 슬퍼하진 않습니다.

(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 않으면, 안 일어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고자 하는 열망도 마찬가지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거죠. 교회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라’ 그러면,

‘아니 내가 저 사람을 왜 사랑해?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하게 되는 거예요.

 

‘저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니까, 나도 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영적인 본능이다’ 라고 요한일서에서는 말씀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거를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무슨 수로 사랑하지 세상을 않을 수가 있어요?

그건 사람이 이 세상 살면서,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에요.

이런 것들(은혜의 내적 증거들)을 우리가 살피는 거는 중요해요.

 

▲이게 왜 중요하다는 얘기예요?

여러분이 교회를 100년을 다닌다 한들, 그게 여러분에게 보장하는 게 뭐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 고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고 했는데도

‘근데 난 널 도무지 모른다’고 하는 일이, 일어날 거라고 하셨잖아요. 마7:23

 

그럼 중요한 건, ‘내가 OO교회의 교인이다’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러나 정말 중요한 건, 언젠가 우리가 다 죽을 거잖아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실은 구원의 큰 의미를 너무 축소시키는 거예요.

그냥 죽어서 천국 가려고, 죽어서 내가 지옥 가고, 고생 안 하려고

성경은 그런 차원의 문제만 얘기하는 건 분명히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건, 여러분이나 저나 다 죽어요.

근데 그 시간은 우리가 언제일지 몰라요.

 

저는 저희 아버지가 65세에 돌아가셨어요. 저희 할아버지도 65세에.

약간 그러면 이제 사람이 징크스.. 이런 생각 하잖아요.

근데 저희 형이 70을 넘기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희망을 가져요.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몰라요. 또 무엇이 더 좋은 것인지도 우리는 몰라요.

그러나 우리는 다 죽어요. 그러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그 오심을 할 수 없는 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떻게, 어떤,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런 주제들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나? 친자 확인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남을 자꾸 확인하려고 그러진 마세요. ‘저 사람이 맞나?’

자기 안에 내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들을 살피는 것이 되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가 진정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근데 자꾸 성경도 무시하고, 일상 속에서 내 하나님의 은혜가 주시는 증거들도 무시한 채,

어느 날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 하시면 좋겠다’ 이렇게 하면    *영적인 체험

좀 과하게 표현하면, 그건 복권 당첨되길 기다리는 마음과 비슷한 거예요.

 

여러분은 주말마다 저 복권 맛집 있잖아요.

거기 정말 줄이 어저께도 보니까 한 30미터 되더라고요.

정말 그분들을 보면, 한 분 한 분 다양한 모든 인간이 다 거기 줄 서 있는 거거든요.

근데 이런 생각도 들죠. ‘우리 교인 만나면 민망해서 어떡하지?’

그런 생각도 약간 들기도 해요.

 

근데 이런 것도 있잖아요. ‘주님이 계시면 나에게 좀 나타나 주세요.’

그런 기도 해보신 적이 있으실 것 같아요.

근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요.

6개월~1년 정도 상당 기간 기도를 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요.

‘그래서 난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제가 종종 만나요.

 

그런데 이런 문제는, 사실 가볍게 다룰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게 사람이 힘들면, 고난이 오면 이런 기도를 하게 돼요.

믿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런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 좀 나타나 주세요’

 

그런데 이게 바른 방식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가 바른 방식으로 누군가를 만나려면,

예를 들어 중국에 사는 누군가를 만나려면,

그 사람이 오지 않는 한, 내가 중국으로 찾아가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에 대해서는 모른 척 하신다거나,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내가 진짜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알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방편들을, 정상적 방편들, 일상적 방편들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즉,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그리고 내가 그 은혜를 받은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이런 일들이 성경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신비한 일을 통해서 라기 보다는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거예요.

요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을 얘기하는 거거든요. 당시에는 구약성경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면 바리세인이나 율법사들이나 서기관들이 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에요.

전문적인 신학자들이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성경을 보는데,

이 모든 성경이 ‘나 Jesus 에 대한 얘기라고’ 주님이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주님을 발견하지 못해요.

주님이 그들 앞에 있는데, '성경을 통해서 이분이 주님이구나' 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해요.

식별하지 못해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가 성경 열심히 보는 것 같은데,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성경을 기계적으로 읽을 수 있죠. '나 오늘 분량 다 읽었다'

그리고 코이노니아 방에다가도 '완료' 뭐 이렇게 쓸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예수님은 ‘내게 오고 싶어서 네가 지금 성경으로 들어가는 거냐?’는 거예요.

 

내게 오기를 원치 않고,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이, 종교적인 삶에는 몰두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떡을 먹고 너무 좋아서 ‘예수님이 우리 왕이면 좋겠다’

요6장에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드디어 말씀을 시작하세요.

‘내가 너희한테 떡만 주려고 한 게 아니고, 진짜 생명의 말씀을 주고 싶다.

생명의 떡을 주고 싶다. 그 생명의 떡이 바로 나야!’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뭐였어요?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요6:60

 

근데 그 어렵다는 말을.. 주님이 해석을 굉장히 잘 하셨어요.

너희가 ‘어렵다’는 것은, 너희가 삼키기 힘들다는 소리구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6:61

 

▲사실 여러분 보셨습니까?

이런 말 안 하려고 그랬는데, OO가 또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OO가 얼마 전에 제가 했던 설교 두 편을 열심히 듣고 정리해서,

한 다섯 페이지 썼어요. 밴드에다 올렸잖아요. 기가 막혀요.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게,

예를 들어서 '저 김형익 목사 설교는 되게 길다’ 그렇게 생각을 하거나,

또는 ‘아 저건 너무나 어렵다.. 설교 좀 쉽게 하지’

그건 제 잘못이 일부분 있어요.

 

근데 여러분 정말 설교는 쉬워야 하고, 그냥 중간에 졸다가 들어도 은혜로워야 되고,

맥락을 다 놓쳐도 결론만 들으면 은혜로워야 되고...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을 알기를 애써야 돼요. 힘써야 돼요. 호6:3

거듭난 자녀라고 하더라도, 매일 말씀과 기도로 자기의 삶에서 은혜를 구하고,

은혜의 내적 증거들을 내가 찾고...

이렇게 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떡 먹었던 사람들이 다 떠나요. ‘어렵다’ 그러고 다 떠나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니네도 갈래?’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6:68

 

우리는 주님께 붙어있겠다는 얘기죠. 이런 태도는 정말 중요하죠.

 

◑본론 / 우리가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문제는 ‘확신과 고난’ 인데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바울이 지금 확신에 대해서 쭉 얘기를 하고 있어요.

 

(구원의) 확신, 하나님 자녀 됨의 확신이 정말 중요하다..

그걸 로마서 5장부터 8장까지,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

그리스도인 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건 너무나 중요하다...고 강조했어요.

 

그런데 이 확신을, 제가 다시 아주 기본적으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확신으로 구원 받지 않아요.

아주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참된 믿음이라면,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요.

 

그러나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믿음이지만,

사실은 확신이 있다면, 확신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죠. 즉, 믿음이 충만한 거예요.

 

그러면 어떤 난관이 오고, 어떤 고난이 오고,

우리의 인생에서 어떤 장애물을 만나도... 우리는 그게 (고난이) 쉬워지진 않겠죠.,

쉬운 고난은 없죠. 그러나 견디죠.

 

그리고 심하게는, 성경이 말하는 거는, 이럴 수도 있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고난을 기뻐할 수 있다고!

 

이게 확신이 필요한 이유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확신의 문제, 이 확신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큰 맥락이 뭔가 하면,

고난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8:16절에서, 성령의 내적 증언에 대해서 말을 하고 나서,

17절에서는 바로 고난의 문제로 들어가요.

 

롬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바로 그 직전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고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분이 좋죠.

‘아 내가 하나님의 상속자구나.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나에게 주시는 거구나’

이렇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좋아요. 8:17

 

근데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는 거에요.

나는 좋은 것(양자됨)만 받을 줄 알았는데, 좋지 않은 것(고난)도 있네요.

 

그런데 이게 18절을 보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비교할 수 없는 거라고.. 비교가 불가능한 차원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건 취사선택할 수는 없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그리고 나서 18~25절까지 “고난”이라고 하는 주제가 다루어지는데,

그리고 나서는 다시 31~ 마지막 39절까지도, 고난의 주제를 계속해서 다룹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확신’을 지금 말하려고 하는데,

고난을 말하는 것은 좀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논리 전개에 있어서, 확신을 말하려고 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나에게는 좋은 일들이 생기고 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불가능이 없다. 나에게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얻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생각을 하기 쉽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훨씬 더 확신에 도움되는 격려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확신에 이어서, 고난의 문제를 지금 다루는 거예요.

고난의 문제를 피해가는 게, 제 생각에는 유리할 것 같은데...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만약에 제가 위로를 하기로 작정을 했다면,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어떤 긍정적인 기대감을 품게 만들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좋은 말들을 하지 않겠어요?

 

‘지금 당장 고난 가운데 계신 분들은, 이 예배가 끝나는 즉시 괜찮아질 겁니다.

저를 따라 하세요. 가슴에 손을 얹으시고 그리고 저를 따라서 기도를 해보세요...’

 

(제가 어디 가서 보니까) 설교자가 회중에게, 지금 일어서서 까치발을 하래요.

까치발을 하고 서서, 양 손을 위로 쭈욱 뻗으래요.

하나님이 지금 너를 잡아주려고 하시니까, 까치발로 양 손을 뻗어서 그 손을 잡으라는 거예요.

 

눈을 감고... 그리고 몇 초 후에, '지금 주님이 당신을 붙잡아주셨다'고 그래요.

이게 과거에 일부 기독교 안에서 행해지던 일이에요.

이걸 우리는 올바른 기독교로 볼 수는 없죠. 이런 심리적 효과들, 이런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은혜 받았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신기루 같은 거짓된 위로를 줄 생각이 없어요. 당연하죠.

그래서 ‘고난’을 연이어 말씀하는 겁니다.

 

성경은 그런 위로를 주지 않아요. 그래서 때로는 아프게 들리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게 진짜 위로예요. 그 진짜 위로는 어디서 나오는 건가 하면,

확신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는 거예요.  :16

 

지금 당장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고난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고난의 환경이 없어지거나 사라지거나... 그렇게 된다고 단언하지 않아요. 그건 모르죠.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우리 각자에게, 우리 가정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지...’ 우리는 몰라요.

 

그렇지만 그 고난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고난을 이길 수 있게 만드는 게 확신이라는 거 알아요. *하나님 자녀됨의 확신

확신보다 큰 위로가 없다는 거 알아요.

그러니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리는 확신을 주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고난이라는 맥락 속에서 확신을 다루는 이유를  *하나님의 자녀됨의 확신

두 가지를 제가 말씀드릴 텐데, 

 

1. 첫 번째 이유는, 신자에게 고난은, 하나님이 날 버리셨다는 증거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적극적 증거이기 때문이에요.

 

‘고난’이 그 증거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제가 ‘영적 친자 확인’이란 제목으로, 8:14~17절을 본문으로, 이미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가르쳐 주시는, 증거해 주시는

네 가지 증거가 있다고 얘기했잖아요. 그 네 번째가 뭐예요? 고난이에요.

바로 8:17절에서 말씀하는 거죠.  *성경, 은혜의 내적 증거, 성령의 증거에 이어서 고난

 

-내가 하나님의 성경말씀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 삶을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성령께서 내게 증언하시는가?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네 번째가 고난이에요. 이 17b절을 18절과 함께 오늘 여러분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이 고난이 왜 신자에게 주어지는 걸까요?

예수 믿으면, 좋은 일만 가득해야 되지 않나요?

예수님을 믿으면 ‘고난 끝, 영광 시작!’ 이렇게 돼야 되지 않나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근거가 뭔가 하면,

17절에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로마서 5장부터 쭉 하고 있는 바

‘내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나를 연합하게 하세요.’

 

이 말은, 그리스도를 보시는 것처럼 나를 보신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우산 아래서 나를 대하시겠다는 거예요.

우산 정도로는 표현이 제대로 안 되죠. 연합하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보실 때, 예수 믿는 나를 보실 때,

나는 형편없고, 어떻게 보면 정말 어떤 때는 쓰레기 같은 인생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나에게 전가해 주시고,

나의 더러운 죄악들을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심판하셨기 때문에, 그 근거로 나를,

그리스도를 보시는 것처럼, 나를 보시겠다는 거예요. 그게 복음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나를 분리시키지 않아요.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내가 고난을 받는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그냥 고난이 아니라,

이 맥락에서 얘기하는 고난은,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고난,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을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맥락에서.

나중에 제가 적용을 하겠지만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뭡니까?

생각해보세요. 왜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하신 건 아닙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생각은 뭐예요?

고난당하고 살기 싫습니다.

뭐 대단한 걸 원하지 않아도, 좀 편하게 사는 거를 좋아합니다.

막 고생하면서 구질구질하게 사는 거는 싫습니다.

 

근데 고난이 존재하죠. 근데 하나님의 아들이 당하신 고난은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거든요. 요5:43절에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니까, 사람들이 싫어하는 거예요.

요1:11절에 뭐라고 그랬어요?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땅에 오셨어요.

자기 땅에 오셨어요. 그런데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아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거죠.

 

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요10:32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세요.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세요.

예수님께서 배고픈 자들에게 떡을 먹이세요. 기적을 행하세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래요. 예수님이 악한 일을 하셨나요?

예수님께서 무슨 못된 일을 하셨나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는 것들을 싫어해요.

 

아마 예수님이 아니고, 누군가가 그런 일을 했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다 좋아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기 때문에 싫어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이거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고후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그는 뭐라고 얘기하냐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대요.’

사도의 고난이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개인적으로 겪는 고난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쳤대요. 자기가 당한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해요.

 

이렇게 바울이 얘기하는 바가 오늘 본문에서도 얘기한 거예요.

그거를 그대로 가지고 얘기하는 거예요.

 

다른 게 아니에요. 바울사도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복음 전도자로서 이 고난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고난’을 겪으며 사는 거예요.

 

그리고 또 말합니다.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자식을 위해서 받는 괴로움도 기쁘진 않아요. 힘들어요. 그렇잖아요?

 

근데 바울은,  '너희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대요.

골로새 교인들을, 바울은 본 적이 없어요. 편지 쓰기 전에 만난 적도 없어요.

 

왜냐면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에요.

에바브라 라는 바울의 제자가 가서 세운 교회예요.

 

그들을 본 적도 없어요. 근데 ‘너희를 위해서 받는 괴로움을 내가 기뻐한대요.’ 골1:24

거짓말이라고 느끼기 십상이죠. 그리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우느라’ 골1:24b

 

왜요? 그들의 교회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영적 본능인 거예요.

 

그리고 내가 괴로움을 겪는 걸 기뻐한대요. 골1:24

이 표현은 이런 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참 영광스럽다. 나같은 존재가 뭔데 내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이런 일을 겪을 수 있을까?’

 

▲그런데 바울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사도들 모두가

이런 고난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하거든요. 저와 여러분에게도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된다는 거예요.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위13절에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얘기하죠.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의 고난이 나에게 넘쳤다’고 말했고,

베드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맥락이 똑같아요.

 

성경이 고난에 대해서 말할 때,

언제나 롬8:18절에서 말한 거처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난과 영광, 영광과 고난을 같이 얘기하고 있어요

여기 벧전4:1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의 고난’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바울이 지금 말하는 확신이 어떤 건가 하면, 이런 거예요.

 

롬8:17절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

이게 어떻게 확신으로 연결되나 하면,

내가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자리에 있어요.

고난을 내가 지금 상속받았어요.

 

그러면 영광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가 경험하듯이,

그 영광도 함께 받을 것이다.. 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난이 (자녀됨의) 확신의 증거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생각, 이런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성경을 정직하게

우리가 듣고, 이해하고, 깨닫고, 살아간다면

그러면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최소한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즉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

절대 나는 고생하고 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고생을 하고/ 안 하고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얘길 하는 겁니다.

‘고생을 좋아하라’고 제가 강요하는 게 아니고요.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으면

그거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강력한 증거가 돼요.

 

로이드존스의 말을 제가 잠깐 이용할게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됩니다. 이거 절대적인 철칙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면,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절대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이거는 설명을 좀 짧게 하려고 그러는데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먹고 사는 문제가 우리의 우선적인 문제는 아니에요.

 

‘하나님이 왜 나를 이 직장에 보내셨지? 하나님이 나를 왜 이런 사업을 하게 하시지?

하나님이 나를 왜 여기에 보내셨지?’

 

그러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그들을 섬기라고,

그게 그리스도인만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머리가 그렇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어려운 일이 왜 없겠습니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강력한 증거를 얻게 되는 거죠.

 

▲2. 사도가 ‘고난’이라는 맥락에서 신자의 확신을 말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거는 확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때가, 고난의 때이기 때문에 그래요.

 

17절에서 고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제 쭉 고난에 관한 이야기를 8장 끝절까지 이어가거든요.

 

근데 보세요. 1세기 로마 성도들이, 이 로마서를 바울이 쓸 때

로마에 있는 교인들을 생각했을 거 아니에요?

근데 그들이 어떤 상황 가운데 있었어요?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리에 있었단 말이에요.

 

당연히 바울은 그들을 위로하고 싶었죠.

근데 그 위로는 그저 싸구려 위로, 그냥 말로만 할 수 있는...

그냥 ‘제가 기도하고 있어요’ 이런 거 아니에요.

 

그들이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왜냐하면 그 확신이야말로 그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니까요!

 

그걸 알았으니까 그래서 바울은 담대하게,

고난을 받는 신자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피하지 않고 꺼내는 거예요.

 

△계시록이 다루는 것도 똑같아요.

계시록도 1세기 말에, 고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점점 깊어지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사도요한에게 하늘의 환상을 보이시고, 세상 역사의 흐름을 보이셔서,

세상 마지막까지를 보이셔서 ‘결국은 그리스도가 이기신다’는 것을,

1세기 말에 그리스도인들, 성도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고 위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이에요.

 

▲여기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이런 거죠.

고난 속에 있는 성도에게, 그럼 확신이 하는 일이 뭡니까? 확신이 어떻게 위로가 됩니까?

 

그래요. 한번 봅시다. 제가 신약성경에서만 보지 않고, 구약성경에서도 보려고 하는데,

시편 63편을 보면, 표제에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 그렇게 나와 있죠.

 

유다 광야에 있을 때는 아마 두 가지 정도 중에 하나일 거에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을 때,

-혹은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왕위에서 쫓겨나고

그가 이제 도망가는 그런 상황에서, 이 둘 중에 하나일 텐데

 

시63: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이게 1인칭이에요. 그러니까 다윗이 왕으로서 쓴 시예요.

 

그렇다면 아마 후자, 다윗이 왕으로 다스리다가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났을 때인 거죠.

정말 인간적으로 여러분 이거보다 더 큰 비애가 있을까요?

 

사랑하는 자식이,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쫓아내고...

쫓아내는 것도 부족해서 죽이려고 그러죠.

 

다윗은 싸우려면 싸울 수 있었겠죠. 그런데 아들하고 싸우기를 원하는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쫓겨납니다.

머리를 풀고 맨발로 기드론 시내를 지나서 걸어갑니다. 저주를 받으면서 걸어갑니다.

그때 쓴 시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래서 1절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시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마르고 황폐한 곳에서’.. 그는 이 시편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3절을 보십시오.

 

63: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1절과 3절을 우리는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1절에, 메마르고 황폐한 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탄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라고 말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자기가 지금 있는 곳이 메마른 광야인데,

그는 마치 엄청나게 차려진 뷔페 식당에 와가지고, 지금 잘 먹고 있다고 얘기하는 거잖아요. 내 영혼이!

이걸 어떻게 조화를 시킬 수 있어요?

이게 확신이 하는 일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것들을, 너무나 많은 구절에서 볼 수 있죠.

벧전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고난이 있어요. 그래서 근심이 늘 있다고요.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안으로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는도다’

오늘날 우리하고 비슷하죠.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형언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그들은 육안으로 본 적이 없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그런 기쁨으로 즐거워한다고 말해요.

고난과 근심 속에서, 기쁨이 공존한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사도 베드로가 지금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에 흩어진 성도들에게,

그 고난받는 현실 속에서, 그들이 기뻐한다고 말을 하는 거죠.

 

열쇠가 뭐예요? 확신이에요. 성경에 뭐라고 썼습니까?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벧전1:7절이죠. 확실함은 확신이에요.

 

‘너희 믿음의 확신’이라는 이 말은, 풀어서 말씀을 드리면

시련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증명된 믿음의 진정성이에요.

 

이런 말이죠. 고난이 있어요. 고난이 있는데

내가 믿음으로 이것을 잘 감당하고 인내하고 나아가요.

 

그러자 이걸 지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증명해 주시는 거예요.

‘아 진짜 내가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그 다음에 또 고난이 또 와요. 근데 그 고난을 통과하면 통과할수록,

고난을 지나면 지날수록, 그 믿음이 견고해지고, 확증하는 믿음의 확신으로 자리를 잡게 돼요.

이게 고난 속에서 영광스러운.. 말로 다 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는 말이에요.

 

이게 누구에게 주어진다고요? 성도들에게요.

이때 저는 이 말을 하고 싶죠. 제가 평소에 잘 안 하지만 한 번 쓸게요. “믿습니까?”

진짜 믿으시냐고요?

 

아니면 여러분들은 속으로 ‘무슨 소리야,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러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일관됩니다.

 

사도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3장, 4장, 5장에서 쭉 설명하고 나서,

 

그리고 나서 3장 4장에서 그리고 5장으로 들어오면서 처음에 한 말이 뭐예요?

5:1절로 한번 다시 가보세요.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그러므로.. '지금까지 이야기한 대로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잖아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우리 서로 말미야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이제는 대적하는 관계가 아니에요. Peace with God 하나님의 친구가 됐어요.

그리고 2절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의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2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느니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은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게 가능해요?

가능해요.

‘목사님은 경험해 보셨어요?’

‘여러분도 경험해 보세요.’

 

저는 경험해 봤어요. 경험하셔야 돼요. 이걸 아셔야 돼요.

그리스도인은 그럴 수 있어요. 어마어마한 얘기예요. 어떻게?

 

어떻게 환란 중에도 즐거워해요? 목표를 보는 거예요.

‘환란은 인내를!’

환란을 지나면서, 조금 아까 얘기한 베드로가 얘기한 바로 그걸 얘기하는 거예요.

고난을 지나면서 내 믿음이 증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그 소망은 뭐예요? 5:2절에서 말한 거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우리의 구원의 결국, 완성’을 바라보는 거예요.

 

여러분의 완성은, 죽음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인들의 완성은 죽음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완성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하게 하시는, 바로 그날의 영광이에요.

이것을 성경은 ‘영화’라고 얘기하죠. 우리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로운 몸이 되는 것입니다. glorification

 

▲그래서 구원의 목적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바울은 여기서 얘기하는 거예요.

본문 8:17절, 18절에서, 성도의 삶에서 받는 고난을 말하면서

‘그 고난에 마음을 뺏기지 말라’고 얘기를 해요.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건 고난이지만 영광을 바라보라!

왜? 그 영광은, 지금 네가 받는 고난하고는 비교가 불가능해.

그걸 보면, 견딜 수 있어!’ 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구원의 목적을 바라보는 거예요. 그건 영광이라고 얘기해요.

그래서 우리가 나중에 보겠지만,

여러분은 8:30절을 한번 보십시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거예요.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에요.

이것을 바울은 앞에서 18절에서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우리에게 나타난 영광하고 비교할 수 없다고’

 

‘지금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이 뭐든지 간에 예외가 없이’ 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사도는 현재의 고난이라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아요.

기독교는 여러분과 제가 지금 겪고 살아가는 고난을 외면하거나, 부정하거나,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지 않아요. 다 얘기해요. 현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현실을 얘기하죠. 그 또 하나의 현실이 뭐예요?

지금 받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무거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는 현실도 얘기합니다. 믿음의 현실이에요.

 

열쇠는.. 믿음의 눈으로 그 장래의 영광, 우리에게 나타날 장래의 영광을 보는 겁니다.

그 목적지를 바라보는 겁니다.

 

△이렇게 가면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던

그 기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드디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엡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제가 전에 이 ‘바울의 기도’를 가지고 설교를 했었고, 또 책으로도 이게 나왔는데 보세요.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생각하고 에베소서를 쓰면서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어요’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바울은 기도로 세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두 번째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 기업의 영광, 성도 안에 있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주실 그 영광스러움, 그 큰 영광!

 

그게 그게 바울이 지금 롬8:18절에서 말하고 있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에요.

그걸 볼 수 있으면, 오늘을 견딜 수 있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고난의 여정을 하나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

롬8:29절에 말한 것처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

고난이라는 것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빚어내세요.’

우리를 빚어가시고, 우리의 믿음을 점점점점 온전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삶에 고난이 너무 많잖아요.

그런데 고난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놓치지 말아야 되는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중요한 건 뭔가 하면, 장래의 영광을 보는 비전이에요. 그 소망이에요.

그 싸움을 해야 되는 거예요.

 

구원의 목적, 그 종국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때때로 여러분이 그렇게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때때로 그렇게 해요.

 

주님 앞에 내가 서게 되는 날을 생각해봐요.

그러면 내 행실과 내 모습으로는.. 되게 부끄러울 것 같아요.

 

근데 성경은 말하거든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존귀하게 보신다고’

그러니까 여러분이 만약에 주님 앞에 섰을 때,

마태복음 7장이나 25장에 나오는 바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라는 그 말씀을

여러분이 읽으실 때 ‘아, 진짜 나도 그런 일을 겪는 건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늘 여러분들을 불안함으로 몰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는 불안 대신에 확신을 주시기 때문이죠.

 

이 확신 가운데 ‘참 감사하다. 내가 지금도 두렵고 떨림으로 내 구원의 여정을 걸어가겠지만,

참 감사하다.. 내가 그날 주님을 만날 때...’를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의 누추함과, 지금의 나의 연약함과, 지금의 나의 고통스러움, 눈물을 씻어주신다’

 

◑적용

 

광야같은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광야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뭡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볼 때

 

1) 첫째는 여러분이 겪는 모든 고초와 고난, 어려움과 환란들을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인생의 고난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라는 말을

제가 먼저 하고 싶어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고난은 어떤 거라고 그랬어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고난이 적은 반면,

사실은 그냥 인간이라서 겪는 고난이 많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 우리 인생에는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그냥 그런 고난으로 내버려 두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이 존재해요. 그러나 제가 조금 넓게 적용을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내가 어떤 고난이든지, 고난을 받는 그 순간에도 연합이 유효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가 떨어졌다, 연합했다 떨어졌다...

마치 전기를 콘센트에 꼽았다 뺐다, 꼽았다 뺐다 하는 식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게 아니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번 연합되었고, 영원히 연합된 존재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연합은 고난의 순간에도 유효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여전히 그 때에도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 아들이고 그 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의 고난이, 하나님의 훈육의 과정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길러가시는 그 전능하고 선하신 손 안에, 우리의 인생이 있다고요.

 

우리가 그 고난을 믿음으로 감당하면, 그 고난이 뭐든지 간에 믿음으로 우리가 감당할 때,

우리는 그 연합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게 돼요.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인 거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고난이 있어요.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이에요. 왜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의 딸이니까!

 

그래서 이걸 17절에 뭐라고 그랬어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라고 그랬죠.

그리고 ‘그와 함께 영광을 받는다’고 그랬죠? ‘그와 함께 고난도 받는다’고 그랬어요.

 

여러분이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으로, 그 방향으로 만들어 가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고난이 유익하지 않습니다.

 

제가 ‘개고생’이라고 할 뻔했는데, 그건 좀 심한 말인 것 같고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이 아니라면.. 그건 유익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받으면, 고난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베드로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라는 그 표현이 참 좋아요.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 벧전4:19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받지 않는 고난이 어디 있어요?

그 고난의 종류가 뭐든 고난의 무게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그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딸들이,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의 풍성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게 바울이 하는 말이에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그래서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셔야 돼요.

‘하나님, 내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이게 기도의 초점이어야 돼요. 엡1:18

 

하나님께서는 이런 확신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약속하십니다.

이런 확신이 없으면 고난은커녕, 평안한 때에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없어요.

 

여러분 이 자리에 우리가 다 한 자리에 앉아있지만, 우리 삶의 자리가 다 달라요.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평안한 상황 가운데 지금 계시는 분들이 계시고,

언제나 그렇진 않잖아요.

또 어떤 분들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 계시는 분들이 계세요.

 

특별히 제가 여러분 가운데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라가려고 하다 보니

극심한 고난을 겪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그 고난으로 인해 놀라지 말고 요동하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그 힘든 처지에 몰두해서, 온 마음을 빼앗기지도 마십시오.

지금 이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

장차 여러분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리고 두 가지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1)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거 바울이 이제 말할 거예요. *다음 강의, 롬8장 후반

 

롬8장에 남은 곳(후반)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2) 두 번째,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도 의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의심하면 우리는 무너집니다. 사람만 바라보게 됩니다.

 

바울은...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한 다음에,

뭐라고 기도하는지 아세요? 그게 세 번째에요.

 

3) 세 번째, 그게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심을 따라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를 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엡1:19

 

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지만,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세요.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주님이 하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기도(요17장)를 시작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락방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에요.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나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너희에게 환란이 있을 거야. 그렇지만 평안해라. 평안을 누려라.

환란이 너의 평안을 뺏어갈 수 없게 해’

왜? ‘이제 내가 십자가를 질 거야, 그 일을 위해서 죽을 거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고난 중에 있다고 여기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믿음으로 일어서세요.

그리고 장차 여러분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고 소망하고

주님이 약속하신 평안을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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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콜로라도에 관광객이 몰리는 이유

얼마 전에 Ken Gire이란 저자가 쓴

‘인생의 아픔을 통해 인생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을 읽게 되었다.

 

저자는 그가 살고 있는 콜로라도 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동쪽 콜로라도는 평평한 곳이다. 땅 자체로만 보면 매끈하고 평편한 곳이다.

그런데 동쪽 콜로라도로 여행을 오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다들 서쪽 콜로라도로 간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로키산맥이 있기 때문이다.

 

웅장한 산, 신선한 바람, 투명한 호수, 눈으로 덮여 있는 산 정상,

멀리 멀리 펼쳐진 나무들과 그 위대한 경치,

이곳이야 말로 진짜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로키 산맥이 일어나기 위해서

그 지역에는 엄청난 자연의 아픔이 있었다.

 

땅 속에 있는 판이 서로 충돌하면서 수면이 솟아오르는 아픔이 있었다.

또한 엄청난 추위와 빙하가 지나가며 돌이 깎이게 되었다.

이러한 아픔들로 인해서 로키 산맥이 형성된 것이다.

 

과정만을 보면 평탄했던, 평평한 땅인 동쪽 콜로라도를 택하겠지만

결과를 보면 누구나 서슴지 않고 서쪽을 택할 것이다.

서쪽이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기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터프한 은혜로 깎으신다.

 

♣날마다 모든 민족, 열방, 방언, 족속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환상을 바라보는 성도

 

계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이미 천국에, 위 구절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겁니다. 천국은 시공을 초월한 세상이니까요.

그리고 장래에, 우리는 저 천국에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능히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서 어린양을 찬양하는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장면을, 지금, 오늘 상상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찬양하면서, 묵상하면서, 저 완성 consummation 의 날을 상상하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하고 찬양할 때,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 신앙의 목표와 지향점이, 분명해지게 되는 것이죠.

 

복음성가에도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찬양이 있죠.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함께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사랑 그 아들 주셨네, 그의 피로 우린 구원 받았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강 같이 온 땅에 흘러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구원받고 주 경배드리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X2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할머니의 기도

또 제(한 UBF 간사)가 캠퍼스에서 만난 한 형제는,

대학 2학년인데, 그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니까,

선교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것이 그의 꿈이라고 하였습니다.

 

공부도 꽤 잘하는 장학생인데, 제가 신기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왜 그런 꿈을 갖게 되었는지..’

 

그는 네 살 때 아버지가 자살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재혼하셨는데

새아버지도 문제가 있어서 금방 이혼하였습니다.

완전 저주의 가정, 풍비박산이 난 가정환경이었지요.

 

결국 그는 외할머니 손에 맡겨졌습니다.

외할머니는 새벽마다 그를 업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아이를 주님의 종으로 키워 달라고’

 

그래서 그는 일찍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오직 자신의 인생을 불태워서 주님께 드리기로 서원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가정환경이 불우해서

얼마든지 불량 청소년이 되고, 삐뚤어질 수 있는 학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운명이 변하여, 세계 선교의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저주와 미움을 불태울 수 있는데,

할머니가 자기를 등에 업고 새벽기도 하는 것을 매일 듣고 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생을 불태워서

예수님 사랑으로 세상을 녹이고자 기도하며 준비하는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된 것입니다.

고난의 환경이.. 결사적인 믿음의 자리(복)으로 인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