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세상에서 하나님 조명이다 마5:14~16 2025.09.30.
마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흔히들 높은 사람이나, 귀한 분이나, 유명한 사람을 만나서 악수라도 하며,
옆에 서서 사진이라도 같이 찍게 되면, ‘이거 정말 큰 영광입니다’ 라고 인사를 하지요.
이 말 뜻이 무엇입니까? 그런 유명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의 의식의 무대에서,
그동안 나는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기회가 주어져서, 그런 사람들을 면대면하여 만나는 순간
그동안 없던 존재였던 내가, 그 사람의 의식의 무대 위에 등장하게 됩니다.
마치 그 사람의 의식의 무대에서, 내게 잠깐이나마 조명이라도 비치는 것처럼,
그 사람이 나라는 존재를 의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광입니다’라는 뜻은,
‘나 같은 사람이, 당신 같은 훌륭한 분에게 잠시나마라도 의식되다니 참으로 감지덕지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올림픽 금메달 선수가 영광을 받음도, 전세계 사람들의 의식의 무대에서
그의 존재가 우뚝 서서 조명을 받기 때문이고,
스타 연예인에게 영광이 돌아감도, 많은 팬의 의식의 무대에서
그 연예인의 있음이 강하게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상태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사람의 의식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의식의 무대 위에서, 하나님은 흑암 속에 갇혀 계셨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마치 조명이 비추듯이, 그런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의식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어 정말 하나님이 있네’ 라고 느끼는 상태지요.
이런 상태가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조명이 비춰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조금 이상하긴 하죠.
하나님을 전혀 모르다가, 그 의식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면,
당연히 그 사람에게 영광이 느껴져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일개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이 서로 만나면,
그 인간이 영광이지, 왜 무한하신 하나님이 영광입니까? 그건 말도 안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어이 피조물인 사람아, 그동안 나를 몰랐다가, 이렇게 나의 있음을 네가 의식하게 되다니,
이거 내게 보통 영광이 아니구나..’
그만큼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들이, 당신의 살아계심을 의식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지요.
▲마5:16절 봅니다. ‘이같이 너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나의 착한 행실이, 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조명을 비추는 빛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서 말하고 행동하잖아요?
그러면 그 언행을 보면서, 사람들이 ‘어? 하나님이 계시나 보네?’ 라고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착한 행실을 하라는 겁니다.
착한 행실이 뭐지요.?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예수님 안에 내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의식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바깥으로 튕겨 나오는 것이에요.
그렇게 예수님과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연합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면,
내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천국에 올라간 상태에서,
하나님을 마주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는, 땅에서 몸이 움직이며 모든 말과 행동을 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유지될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머무는 바람에, 천국에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에 이 땅에서 하게 되는 모든 말과 행동이..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착한 행실은.. 지금 살아 계시면서,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내가 강하게 의식하면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런 착한 행실이, 왜 하나님을 비추는 조명이 될까요?
자 보세요. 내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고 행동해요.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를 (하나님을) 앞에 두고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도대체 이 사람의 말과 행동은, 보통 사람들과는 판이한데
누구를 신경 쓰고 있기에 이렇게 말하고 행동을 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지요.
이러한 궁금증이 생겨나도록...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동안에
나는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제 내가 말하고 행동할 때,
늘 내가 앞에 의식하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만날 때마다
‘이 사람은 또 자기 앞에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말하고 행동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도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의식한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덩달아서 의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지금 살아계시는 분으로 의식하지 않잖아요?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면,
적어도 그 순간에 하나님은, 내 의식의 무대 위에서는 안 계신 겁니다.
그러면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의 의식에서도, 하나님은 똑같이 안 계시게 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할 때,
내가 하나님을, 지금 살아계시는 분으로 의식하고, 하나님 눈치를 보면 됩니다.
그러면 나를 만나는 사람들도,
내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하나님을 같이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착한 행실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보이게 비추는 조명입니다.
20251002-16 표정관리 중단하고 티내며 살자
◈표정관리 중단하고 티내며 살자 마5:17 2025.10.02.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표정관리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은 물론이고, 보통 사람도 웬만해서는 살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덧붙이십니다. ‘형제를 향하여 쓸모없는 자라는 의미로 라가라 하든지,
미련한 자라고 하기만 해도, 살인한 것과 같은 범죄가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이미 살인이 벌어진 속마음을, 살인하지 않음으로써 가렸을 뿐이라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비유적으로 ‘표정관리’인 것입니다.
또 간음에 대한 말씀에서도 사정은 같지요. 마음에서는 이미 간음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면서, 간음이라는 행위를 하지 않았던 겁니다.
표정관리를 잘 한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마음으로 음욕을 품기만 해도,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표정관리로, 마음속에서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범죄를 ‘덮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아예 갈아 엎으라는 것이죠)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정말 한 시대를 닫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말씀입니다.
범죄의 성립요건이 행위의 차원에서, 속마음의 차원으로 옮겨지며 강화됩니다.
속마음에는 여전히 온갖 부패와 더러움이 가득한데,
소위 ‘율법 준수’라고 볼 수도 있는, 자기 표정관리를 한다고 해서,
의로움이나 구원을 얻을 수는 없음을 선언하신 겁니다.
물론 준법을 하면 감옥에 갈 일은 없겠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충분 조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표정관리의 대가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그들의 속마음은 온갖 썩은 시체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맞추어진 행위를 함으로써, 그 속마음의 상태를 철저히 가려버립니다.
이런 태도가 바로 율법주의요, 표정관리입니다.
산상수훈을 통해서 이렇게 우리 속마음을 더러운 채로 보존하면서,
그 더러움을 가리기 위해 표정관리에 주력하는 율법주의, 준법주의가 완전히 폐기처분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물론 숨기고 싶을 만큼 부패하고, 더럽고, 악한 속마음 상태를 숨기지 말고,
티를 내며 노출하라 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만약 그렇게 되면, 세상은 무법천지의 대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이 촉구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율법 준수’라는 표정관리를 통해서, 굳이 속마음의 상태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그 상태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즉 행위를 꾸며내려 하지 말고,
자기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티를 내며 드러내어도, 괜찮고 좋을 정도로,
내 속마음의 상태를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율법 준수가 어렵잖아요? 그런데 속마음 바꾸기는 그보다 훨씬 쉽습니다.
그런데 그냥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회개가 되어지면서,
내가 회개하기보다는, 회개가 되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속사람이 바뀌게 되지요.
변화 받은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흰 옷을 입었으니, 더럽히지 않으려고 스스로
조심하게 되는 거죠. 물론 어린 베이비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성화의 과정이 일어납니다.
이걸 한 마디로 통털어 말하면 ‘믿음’입니다.)
다만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부활-승천의) 연쇄적인 과정 속의 예수님과
내 마음이 연합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믿으면서 사는 삶은 어떨까요?
더럽고 부패한 속마음을 ‘율법 준수’라는 자기 표정관리로 가리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렇게 수시로 더러워지는 속마음의 체질을, 스스로 깨달으며,
십자가 바라보기를 중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예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의식을 유지합니다.
(*이게 내 의지로 잘 되지 않으면,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는 보혜사라서, ‘성령님 찬스’ 카드를 쓸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아예 짊어지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요?
내 속마음이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지속하여 천국에 머물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보좌의 하나님을 마주하시는 동안,
내 마음도 함께 하나님을 마주하지요.
“내 속 마음”의 환경이 땅에서 천국으로 바뀌고,
“내 속 마음”이 상대하는 대상이, 땅에 있는 피조물에서 창조주로 바뀌는 겁니다.
다만 정식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랐을 뿐인데, 속마음이 놓이는 환경에 개벽이 일어나는 거죠.
바로 이렇게 예수님 안에 머무는 바람에, 천국 환경에 놓이게 된 속 마음을,
이제는 숨기거나 가리지 말고, 고스란히 말과 행동으로 티를 내면서 살라는 것이
산상수혼의 주제입니다. 이러면 ‘표정관리’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예수님과 연합하는 바람에 천국에 올라간 속마음,
이제 그 속마음의 상태가 이 땅에서 겉으로 드러나면 어떨까요?
그렇습니다.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나는데,
미워서 죽여버려도 시원치 않을 원수를 사랑하게 되고,
누군가 오른편 뺨을 치면, 몇 배로 돌려주는 대신에 왼편도 돌려대며,
속옷을 달라하면 돌았냐고 하는 대신에, 겉옷까지도 벗어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나도 피곤하다고 하는 대신에, 십리를 같이 가는 등등
정말 희한한 행동들이 내게서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산상수훈은, 이처럼 예수님 믿어서 천국에 머물게 된 속마음이
세상에서 ‘나 지금 천국에 있어요’ 라는 티를 낼 때 나타날 수 있는 행위의 형태들을,
예를 들어 열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나는 법을 지킨다는 생각이 없거든요. 다만 속마음이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 현실 땅에서 말과 행동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말과 행동이, 모든 율법에서 벗어남이 없다는 거예요.
의도적인 표정관리가 없는데, 율법 준수가 됩니다.
내 마음이 지속하여 하나님을 마주함으로써, 모든 의로움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
내 마음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참 자유가 있지요.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은
이처럼 더욱 엄격한 율법으로 우리를 억압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하늘을 날 듯한 자유를,
그림 그리시듯 펼쳐 보이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