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6 07 주일 말씀 / 창세기 강해 (17) / 창 5:21-24 /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창5:21~24 2026.06.07. [창세기 17강]
창세기 4장과 5장은 족보 이야기입니다.
창4장에서 우리는 가인의 족보를 살펴봤습니다. 가인의 족보는 불신자의 족보입니다.
반면 창5장에서 우리는 셋의 족보를 봤습니다. 셋의 족보는 신자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이 셋의 족보에서 우리는 아주 독특하고 빛나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바로 에녹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아담부터 시작해서, 죽고 죽고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죽음의 리듬을 깬 단 한 사람이 에녹이었습니다.
에녹은 셋의 족보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에녹의 독특함은 또 있습니다.
성경이 그의 인생을 기록하는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몇 살에 자녀를 낳고, 몇 년을 지내며, 몇 살에 죽었다’ 라고 나옵니다.
한번 찾아볼까요? 아담의 패턴인데요.
창5:4~5 ‘아담은 셋을 낳은 후 8백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30세를 살고 죽었더라’
셋도 똑같습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807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12세를 살고 죽었더라’ :6~8
에노스도 똑같습니다.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815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05세를 살고 죽었더라’ :9~10
동일한 패턴이 보이시죠?
‘몇 살에 누구를 낳고, 낳은 후 몇 년을 지내며 몇 살에 죽었더라’
이것이 창세기 5장의 변함없는 공식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그런데 에녹의 차례가 오자, 성경은 갑자기 이 공식을 멈춥니다.
5:21~23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도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낳은 후 그저 몇 년을 지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뭐라고 기록합니까?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에녹만 유일하게 뭐하며 지냈는지가 나옵니다.
‘몇 년을 지냈다’ 만이 아니라.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지냈습니다.’
이처럼 에녹은 셋의 족보에서 독특한 사람입니다.
-하나는 죽음을 겪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고,
-또 하나는 몇 년을 지냈다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에녹의 삶을 진짜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5장 셋의 족보 안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앞에 나오는 4장 가인의 족보와 나란히 놓고 보아야 합니다. ↓

아담을 1대로 계산했을 때, 두 계보의 비교입니다. 가인의 계열과, 셋의 계열!
이 계보에서 뭘 봐야 되냐면, 일곱 번째 인물을 봐야 합니다.
가인의 족보, 불신자의 족보인데요.
쭉 내려가면 일곱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라멕이죠.
그런데 신자의 족보, 셋의 계보에서 일곱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 에녹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아주 치밀하고 의도적인 대조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숫자 7은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완전함과 절정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즉 가인의 7대손 라멕은,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불신자의 삶이 도달한 궁극적인 끝판왕, 그 절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불신앙의 절정이었습니다. 라멕 한 사람을 보면,
불신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4장 가인의 족보에서는 라멕을 크게 다뤘습니다.
반대로 셋의 계보의 절정은 에녹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 도달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절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에녹 한 사람을 보면, 참된 신자의 삶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동행은, 에녹이라는 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에녹이 대표하는 모든 믿는 자의 삶입니다.
에녹은 지금 저와 여러분, 곧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삶의 모범으로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에녹처럼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에녹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하나님과 동행>에 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동행’의 의미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할까요?
동행은 영어로 하면 walk with 입니다. 즉 ‘그와 함께 걸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누군가와 같이 걸어본 적 있으시죠?
함께 걸어가려면 반드시 무엇이 전제되어야 합니까? 서로 뜻이 맞아야 합니다.
가려는 방향이 맞아야 하고, 또 가는 수단도 맞아야 합니다. 속도도 맞아야 합니다.
나는 차 타고 가고 싶은데, 일행은 굳이 걸어가겠다고 고집하면... 같이 동행할 수 없습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뜻이 맞아야 인생길을 동행할 수 있습니다.
뜻이 맞지 않으면, 그 삶은 동행이 아니라, 고난의 행군입니다.
오죽하면 우스갯소리로 ‘우리 부부는 완전 로또’라고 하지 않습니까?
‘안 맞아도 그렇게 안 맞을 수 없다고’
부부사이에 뜻이 맞지 않으면, 사사건건 부딪히고 다툼이 생깁니다.
아모스 선지자도 이 영적인 원리를 아주 명확하게 짚어냅니다.
암3: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뜻이 맞아야 같이 걸을 수 있습니다. 동행은 뜻을 맞추는 것입니다.
서로의 뜻을 맞추어 나가는 평생의 과정이 동행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도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뜻이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뜻을 맞추긴 맞춰야 하는데,
누가 누구에게 맞추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내 뜻에 맞추어 주셔야 합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까?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다른 말로 ‘순종’이라고 부릅니다.
즉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그저 하나님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매 순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순종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요구되는 게 있습니다.
반드시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고집과 주장을 꺾지 않으면, 결코 상대방의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뜻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내 뜻을 내려놓는 것, 그것을 성경은 자기 부인이라고 말합니다.
날마다 내 고집과 내 생각 내 계획이 죽어야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 하나님께 순종했다’
이 말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무슨 얘기이죠?
에녹은 매일매일 자신이 죽는 경험을 했다는 뜻입니다.
매일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신약의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던 것처럼,
에녹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3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도 해석하더라고요.
‘에녹이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굳이 죽음을 다시 겪게 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래서 산 채로 천국에 데려가셨을 거라고 말하더라고요. 꽤 일리 있는 해석 아닙니까?
에녹은 그만큼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여러분은 누구와 무엇과 동행하며 사셨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손에 들린 스마트폰과 더 오랜 시간 동행하며 살지 않았습니까?
혹은 술과 동행하지는 않았습니까? 또 음란물과 동행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 내 뜻과 마음을 맞춘 채 살지는 않으셨습니까?
(*성경에 '걷는다'는 말은,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동행, 함께 걷는다는 '함께 살아간다')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동행은 단순히 주님 옆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을 꺾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주님이 가자 하시면 가고,
멈춰라 하시면, 내 급한 계획이 있어도 멈춰 서는 것... 그것이 진짜 동행입니다.
여러분, 에녹은..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삶은 대단한 업적을 이루거나, 세상에서 큰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하루의 삶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내 뜻을 꺾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
그 삶이 바로 믿음의 삶이고 동행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2. 어떻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해야 되지 않습니까?
<동행을 위한 세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1. 동행의 첫 번째 비결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는 삶입니다.
창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시점이 있습니다.
65세에 무두셀라를 낳은 후부터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
그렇다면 65세 전에는 에녹이 어떻게 살았는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지는 않으니까요.
확실한 건, 에녹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동행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터닝포인트가 임했습니다. 사람마다 터닝포인트가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갑자기 사람이 바뀔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 터닝포인트는 고난일 수 있고요. 어떤 사람에게는 실패일 수도 있고요.
어떤 사람에게는 질병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번의 예배’일 수도 있습니다.
에녹의 터닝 포인트는 65세였습니다. 그러면 왜 그가 갑자기 65세에 인생이 바뀌었을까요?
왜 그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을까요?
23절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왜 아들 므두셀라의 탄생이 터닝포인트가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이 므두셀라의 이름의 뜻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아들 이름을 이렇게 짓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에녹이, 왜 자기 아들 이름을 ‘아들이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고 지었을까요?
※므두셀라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man of the dart’
"창(무기)을 던지는 사람" 또는 "창의 사람"입니다.
‘창을 던지는 사람’은, 고대 이스라엘 부족 사회에서 마을 입구를 지키며
창을 던져 부족을 보호하던 수호자를 뜻하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창을 든 수호자가 죽으면, 그 부족도 멸망한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므두셀라’란 이름을, 그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에녹 부부가 아들을 임신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을 때가 다 됐는데, 하나님이 에녹에게 계시를 하십니다.
‘에녹아 네가 아들을 낳을 텐데, 그 아들이 태어나서 죽는 날, 이 땅은 심판을 받을 거다’
하나님이 에녹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연필을 들고, 창세기 족보 연대를 계산해 보면,
므두셀라가 죽은 해에 정확히 노아의 홍수 심판이 임했습니다.
그렇다면 므두셀라가 태어난 이후 아버지 에녹의 삶은 어땠을까요?
사랑하는 아들이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에녹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어떤 메시지를 생각했을까요? 당연히 심판의 메시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아이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고 했는데...’
그 아들의 성장은, 심판의 더 가까움이었습니다.
이 심판을 생각하자 에녹의 삶은 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명백한 증거가, 신약 성경 유다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1: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여러분,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했다’고 합니다. 유1:14
‘이 사람들’이란, 가인의 길을 따라가는, 즉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이들을 말합니다.
에녹은 당시 이들을 향해 예언했습니다. 무엇을 예언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죄악된 행위와 말을 심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만큼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며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유1:15
왜냐하면 심판의 날이 올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므두셀라로 짓고, 그날부터 무려 30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하루같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의식해야 합니다. ☞<심판>
우리 삶에도 심판이 있습니다. 히9:27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한 번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여러분 믿으십니까?
우리는 모두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심판을, 정말 의식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진짜 삶은 어렵습니다.
여러분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없다면 공부할까요. 안할까요.
사람은 테스트, 즉 나를 평가하는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면
결코 스스로를 통제하거나, 말씀 앞에 엎드리지 않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바로 내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진짜 믿음의 삶이 가능해집니다.
오늘 에녹이 300년이라는 그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유혹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뜻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나는 곧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이 분명한 시선이, 그를 영적으로 깨어있게 했고, 주님과 동행하게 한 비결입니다.
△전에 <암살>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혹시 보셨나요?
이 영화에는 이정재 배우가 연기한 염석진 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원래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의 뛰어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런데 극심한 고난을 겪으면서, 중간에 일본의 밀정으로 변절해버립니다.
그리고 동지들을 팔아넘기며, 독립운동가들에게 씻을 수 없는 큰 피해를 입힙니다.
그러다가 훗날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했지만, 뻔뻔하게도 친일파를 처벌하는
‘반민특위’ 재판마저 무사히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비열하게 살아남은 이 늙은 염석진 앞에,
과거 자기 부하였던 독립군 안옥윤이 총을 들고 나타납니다.
안옥윤 역을 전지현 배우가 맡았었는데요. 저는 그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습니다.
안옥윤이 염석진에게 묻습니다. ‘왜 동지를 팔았나?’
염석진이 이렇게 말합니다.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나?’
굉장히 중요하고 뼈아픈 이야기입니다.
해방될 것을 알았다면 변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광복의 날이 진짜 올 것을 알았다면, 그는 변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변절하고 타협했죠?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해봅시다.
왜 우리는 쉽게 세상과 타협하고 살까요?
왜 그리도 쉽게 세상 유혹에 넘어질까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하며 내 마음대로 살아갈까요?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내가 진짜 심판주 앞에 서있고, 또 장차 서게 될 그날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고, 나의 삶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
상 주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서게 될 날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이 분명히 있습니다.
반드시 서게 될 존재들입니다.
내가 진짜 심판을 받는다면, 내가 진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믿는다면,
결코 이 땅에서 내 마음대로 함부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모두가 날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입니다.
에녹과 같이 날마다 여러분의 영적인 시선을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그 마지막 날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의 두 발은, 오늘이라는 현실을 딛고 살아가지만,
우리 시선만큼은, 내 오늘의 삶을 결산하실 그 영광의 날을, 심판의 날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매 순간 하나님의 심판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의 걸음은 흔들리지 않고 깊어질 것입니다.
마침내 참된 해방이 완성되는 그날,
내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그 영광스럽고도 두려운 날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낼 때, 비로소 우리도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 동행의 비결 바로 <믿음>입니다. *첫 번째는 ‘심판을 의식하며 삶’
히브리서 11:5절에 보면 에녹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뜻입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이 ‘동행했다’를, ‘기쁘시게 했다’로 성경은 바꾸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곧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그 근본적인 비결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철저히 믿음으로 살아갔습니다.
여러분, 서로를 믿지 않고서는 결코 동행할 수 없습니다.
이따금씩 우리는 부부의 삶이 깨어지는 아픔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불신입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죠.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하고,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하면,
그 부부의 동행은 결국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길을 나설 때,
상대를 향한 믿음이 없으면, 그 동행이 얼마나 불안하고 피곤해지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휴일날 제가 가족들과 차를 타고 나들이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운전하는 저를 믿지 못하면 어떻겠습니까? 가는 내내 마음이 불안하겠죠.
사고 날까 봐 바깥의 풍경을 맘 편히 보지를 못합니다.
또 차 안에서 낄낄대며 즐거운 대화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동행이 아니라, 괴로움의 시간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믿지 못하면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어주는 사람>
△그래서 히11:4절에서 믿음으로 살아간 에녹의 이야기를 하다가,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즉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과 결코 동행할 수 없나니’
여러분 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할까요?
왜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할까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내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내 삶에 조금만 막히는 길이 나타나도 금세 불안해하며 불평합니다.
‘하나님 왜 이 길로 인도하십니까? 저쪽 길이 더 빠르고 편한데
왜 굳이 이 험한 길로 돌아가게 하십니까?’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인도를 의심하고, 내 뜻대로 핸들을 꺾으려 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진정한 동행이 아닙니다.
여러분 진정한 동행은..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동행은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더 크고 완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뜻과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가는 것, 그것이 동행입니다.
비록 당장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이해되지 않고 막막할지라도,
내 인생의 운전대를 쥐고 계신 주님께서,
지금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묵묵히 나를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에녹이 보여준 믿음의 동행입니다.
△여러분 에녹이라고 해서, 그 300년 동행의 삶이 늘 평탄하기만 했을까요?
매일이 꽃피는 봄날 같았겠습니까? 결코 아니겠죠.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골짜기를 지나야 했고,
또 거센 폭풍우를 만나 비바람을 맞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그 험한 길에서도 동행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내 삶을 이끄시는 분이 나를 가장 사랑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 눈에는, 이 길이 돌아가는 것 같고 험해보여도,
결국 주님이 나를 가장 선하고 안전한 목적지로 인도할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녹이 무려 30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한결같이 주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어라, 나를 신뢰하라’고 하십니다.
시37:3 ‘여호와를 의뢰하고 (여호와를 신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신실하신 하나님, 성실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동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동행의 비결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세상은, 우리가 믿지 못할 것들로 꽉 차 있습니다.
또 믿지 못할 사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지 않습니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믿지 못할 세상!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 되십니다. 나의 구원이십니다.
나의 피난처이시고 나의 도움이십니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갑시다.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신뢰하며 살아갑시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갑시다.
또 내일 하룻길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걸어갑시다.
때로는 내 삶의 환경이 어두울지라도 불쾌할지라도,
갑자기 닥쳐오는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가슴 아픈 고통이 내게 찾아왔다고 할지라도,
변함없이 역사의 주인 되시고, 내 인생의 주인 되시며
내 삶을 붙들어 섭리하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그래서 인생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세 번째 비결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행하면.. 어떤 그림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누군가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거나, 두 손을 꼭 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따뜻한 그림이 떠오릅니다.
놀랍게도 창세기 본문에 쓰인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이 이미지가 정확히 맞습니다.
본문에 ‘동행했다’라고 쓰인 단어는 히브리어로 할라크 입니다.
이 단어는 어렵고 불편한 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어색하고 마지못해 걷는 억지의 걸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며, 곁에 바짝 붙어서 거니는 다정한 산책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에녹은 하나님과 손을 꼭 맞잡고 걸어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와 손을 잡고 팔짱을 낀다는 것은, 어떤 사이라는 얘기입니까?
그만큼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얘기입니다.
제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언제 가장 행복한지 아십니까?
아이들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해냈을 때나,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가 아닙니다.
그냥 아이들과 함께 길을 걸어갈 때, 아이들이 제 손을 옆에서 꽉 잡아줄 때입니다.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아도, 그저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때가 진짜 제일 좋습니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죠.
물론 아내와 손을 잡고 팔짱을 낄 때도 참 행복하고 좋습니다.
이처럼 손을 잡고 팔짱을 낀다는 것은 억지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서로 사랑해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에녹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녹 역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 동행의 비결입니다.
여러분 에녹이 어떻게 그 험하고 유혹 많은 세상에서 무려 300년 동안이나
주님과 동행할 수 있었을까요? 의무감 때문이었을까요?
벌 받을까봐 두려워서 심판이 있으니까 두려워서 억지로 믿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자기 마음을 다해 정말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나는 먹고 살기 바빠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고’
‘나는 가족들을 챙겨야 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고’
‘나는 연애를 해야 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고’
‘나는 지금 공부를 해야 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고’
그러나 여러분, 오늘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산속에 들어간 게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에녹은 ‘자녀들을 낳으며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5:22
에녹이 누린 하나님과의 동행은.. 일상 속에서의 동행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면요.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능합니다.
△제가 아시다시피 결혼을 늦게 한 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결혼을 늦게 한 게,
여자들이 저를 싫어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그렇게 인기가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신대원 가기 바로 전에 고난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영적으로 크게 훈련을 시키셨는데요. 일종의 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정말 하루라도 하나님과의 진짜 만남이 없으면,
은혜를 받지 못하면, 삶의 낙이 없을 정도로...
그때는 매일 새벽과 밤에도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요.
제 삶에서 가장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을 때입니다.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거룩하지 않았었나 생각될 정도로, 하나님이 저를 열심히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신대원에 입학을 했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가 좀 그렇긴 한데요. 어느 정도냐면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서 어디를 가는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지금 내 옆에 여자친구가 앉아있다면 어떨까?’
너무 싫었습니다. 하나님과 있는 시간이 빼앗기니까요.
혼자 이렇게 버스를 타면 기도도 하고, 또 말씀도 묵상하고, 하나님도 생각하고,
또 더 거룩한 생각도 하게 되고...
그런데 옆에 자매가 있으면 그 시간과 마음이 빼앗기는 거잖아요.
그래서 신대원 3년 내내 연애 세포가 별로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연애하리라’ 그 마음으로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3년을 보냈는데요. 목사 안수도 늦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결혼을 빨리 해야겠다’ 싶어서 소개팅을 했습니다.
‘이제는 배우자를 만나야겠다...’
그런데 배우자를 만나는 기준이 뭐겠습니까?
‘이 여자를 만나면, 내가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가?, 더 사랑할 수 있는가?’
그게 절대적인 기준이었습니다.
안 그럴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만나게 된 자매분이 지금 저 뒤에 앉아있는 제 아내입니다.
아내가 이성적인 매력이 없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상하게 오해하지 마세요.
사랑해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를 만나면 같이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요. 연애를 해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두게 되더라구요.
그러다 보니까 서로가 하나님 안에서 연애를 하는 거죠.
하나님을 잠깐 옆에다 두고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연애를 하게 되더라구요.
연애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또 직장에서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가정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동행의 비결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면 세상으로 나갑니다.
교회 밖에서 하나님과의 동행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의 동행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가능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기도하십시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자 그러면 우리도 에녹같이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에녹의 동행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여러분 에녹은 365세를 살았습니다. 물론 죽음을 겪지는 않았지만 그는 365세를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3분의 1 밖에 살지를 못했습니다.
시간의 양으로 보면 굉장히 짧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의 핵심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이뤄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 삶이 믿는 자의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진짜 믿음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단순히 옆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동행을 위해서는 세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는 심판,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믿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랑,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남은 인생의 모든 여정이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걸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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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라이> 감상문 (펀 글)
며칠 전에 ‘일라이’ 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지구 오존층에 구멍이 나서 지구가 삭막하고 황량해진지
30년이 지난 후’입니다.
주인공인 덴젤 워싱턴은, 배낭 하나와 칼과 총을 가지고 어디론가 계속 걸어갑니다.
(덴젤 워싱턴은 최근에 미국 오순절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하죠)
그는 여행 도중에, 강도도 만나고 여러 명과 시비가 붙어 싸우기도 하는데,
엄청 싸움을 엄청 잘합니다.
산 속에서 몇 십 년 무술만 배운 사람처럼,
혼자서 상처도 거의 입지 않고 많은 적들을 물리칩니다.
이러한 무술 실력을 본 어떤 마을의 두목은 그의 능력을 원하지만,
그는 가야 할 곳이 있다며... 그는 그 마을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는 무술 실력 말고도 두목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한 가지 더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성경책입니다.
세상에 한 권 밖에 남겨지지 않은 성경책인데,
두목은 그 성경 말씀으로 사람들을 모아들이고, 마음대로 조종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떠나는 그를 죽이고 성경책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인공 일라이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두목의 부하가 총을 ‘땅. 땅.’ 하고 쏘는데, 총알이 ‘피융~ 피융~’ 하며 가방만 스칩니다.
그러고 나서 한 바탕 총격적인 있었는데,
일라이 혼자 수 십 명을 죽이고 그곳을 떠납니다.
그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깁니다.
여자 동행도 한 명 생기는데, 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이야기를 하다가
‘왜 서쪽으로 가는지...’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라이는 ‘성경도 모르고 종교도 없는 그녀’에게
자신의 소명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그는 지구의 구멍이 난 이후에 이곳저곳을 방랑하다가,
어느 날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 목소리는 ‘성경책을 가지고 서쪽으로 가거라.’ 하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는 그 목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임을 확신하고,
성경책을 가방에 넣고 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보호해주시리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의 상황만 보면, 그의 직업이 대충 뭐였을 거라고 생각되십니까?
저는 그의 직업이 무술 관장이거나 성직자이거나 경찰이나 군인이었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싸움을 잘하고,
자신의 소명에 대한 강한 확신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직업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동행하던 여인이 그의 가방을 뒤지다가 우연히 그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가방을 보게 되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K마트 직원 일라이...’
그는 평범한 마트 직원이었지만,
영화에서는 거의 불사신처럼 나옵니다.
싸움도 잘하고 총알도 피해 갑니다.
또 배에 총을 맞고도 금방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인류의 유산을 보관하고 보급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하는 크고 위대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그가 그렇게 큰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였고, 일을 이루어주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큰일을 이루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것은
똑똑하고 힘이 세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하고 보통인 사람들, 또는 나약하고 없는 사람들도
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떨 때 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살고,
일을 이루어 주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