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시리즈10. 두 개의 식탁, 어느 식탁에 참여하시겠습니까? (2026-05-29) Youtube
◈두 개의 식탁, 어느 식탁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창43:1~14 2026-05-29 [요셉시리즈10]
1931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93세의 노파가 방을 뛰쳐나오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동생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호텔 직원들은 경악했어요.
왜냐하면 이 여인은 24년 동안 한 번도 호텔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24년 동안 돈을 싸들고 호텔 스위트 룸으로 들어가서, 집 밖을 나오지 않았던 겁니다.
24년 만에 나왔는데 ‘내 동생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라고 외쳤어요.
결국 동생은 병원으로 옮겨져, 병원에서 죽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아이다 우드입니다.
아이다 우드는 뉴욕의 정치가이자 언론사주였던 남편이 죽은 이후에
1907년 경제 대공황이 오자,
자기 재산을 다 잃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공포심에
모든 돈을 현금으로 다 찾아서, 그 돈을 가지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1907년, 우드는 은행 계좌를 닫아 거의 100만 달러(2024년 기준 약 2,450만 달러)를
인출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친척들과 변호사들이 자기 재산을 다 빼앗아 갈까봐 염려했기 때문이죠.
24년 동안 동생과 함께 그 호텔 스위트룸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겁니다.
하녀들이 그 방에 청소하러 들어오는 것도 막았습니다. 주1) 아이다 우드
그 호텔 방 안에는 쓰레기가 쌓여있었고, 살아가는 모든 음식은
오직 빵 조각과 베이컨, 달걀 등의 최소량의 음식만 먹으면서 견뎌왔습니다.
그리고 거지와 같은 몰골로 인생을 마무리했어요.
그녀가 죽은 이후에 그 호텔방을 검사해 보니까
침대 속, 신발 속, 낡은 상자 속에서 수 백만 달러 이상의,
현재 가치로 말하면 수 십억에 달하는 현금 다발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보석도 한가득 나왔어요. 드레스 안감에 지폐를 꿰매놓은 옷들이 여러 벌 나왔습니다.
(우리 나라도 50년 전에, 현금을 보관할 때 내복 안에 꿰매어 보관하던 시절이 있었죠)
신발 상자를 열어보았다니만, 그 신발 속에도 100 달러 지폐가 가득 있었어요.
충분히 그렇게 살지 않아도 더 평안하고 행복한 삶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들어놓은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 속에 갇혀서
불행하게 인생을 마무리 지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모습은, 재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로 가면 더욱더 심해집니다.
과거의 잘못된 관계 속에서 경험했던 무시, 폭언, 정서적 학대...
그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아픔이었죠.
그런데 그 과거에 잘못된 상처와 아픔 속에 갇혀서,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겪었던 아픔을 그대로 느끼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도 관계를 맺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
폭력적인 연인, 지배적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안정감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그래서 딸이 아버지를 그렇게 싫어했는데,
결혼하고 보니까 딸이 아버지 같은 남편을 선택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가 어머니의 삶을 그렇게 증오했는데, 나중에 살아가는 자기 모습을 보니까,
어머니와 똑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건강한 사람과, 건강한 인생에 대해서 낯설게 여겨지고,
본인이 겪었던 과거의 학대와 불안과 공포가 더욱더 자연스러워져서
그와 같은 패턴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봅니다.
예전에 제 친구가 해병대를 나왔는데,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했어요.
밤에 매일 맞지 않으면 잠이 안 왔답니다. ‘제발 좀 때려주십시오’
‘오늘을 왜 안 때릴까?’ 매일 맞던 사람이 안 맞으니까, 더욱더 불안한 거예요.
요즘 군대는 그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영적인 영역으로 넘어오면 더욱더 심각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 살았어요. 출애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어요.
그런데 광야를 통과했던 모든 이스라엘 1세대 사람들은, 노예의 근성을 벗지 못했습니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우리가 애굽에 있는 것이 더 좋았겠다. 애굽으로 돌아가자’라며
그들은 외쳤어요. 과거 그들의 애굽에서의 삶이 결코 행복하지가 않았습니다.
학대를 받고, 노동을 한 대가로 주어지는 얼마의 음식을 가지고, 근근히 살아갔어요.
그런데 그들 가운데 자유가 주어지고, 자유를 향한 땅으로 걸어가는 그 모든 순간 가운데,
어려움이 다가오자, 자유를 위한 승리를 얻기보다는,
예전처럼 노예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것이죠. 위에서 언급한 예들처럼.
성도도 그럴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자녀 됨의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종처럼 살아가는 거예요.
탕자의 형이 그랬습니다. 탕자의 형은 한 번도 집 밖을 나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집 안에서 종으로 살아갔습니다. 아버지가 답답해서 말을 하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으니 이 집의 모든 것이 네 것이다,’
그런데 형은, 아버지 집에 있는데,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두려움, 아픔, 상처의 굴레 속에 우리가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세요.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았겠죠.
하지만 과거에 벌어진 일 속에 우리의 인생이 갇혀서, 현재를 누리지 못하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향한 풍성한 잔치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잔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차려놓은 식탁, 그 밥상을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차려주시기 원하는 그 잔치의 식탁 속으로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본문 전체의 말씀은 <두 개의 식탁> 이야기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식탁은 창43장 초반에 나오는 ‘야곱이 차려놓은 텅 비어있는 식탁’입니다.
두 번째 식탁은 창43장 마지막에 나오는 ‘요셉이 준비해놓은 풍성한 식탁’입니다.
여러분은 야곱의 밥상 위에서 식사하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풍성히 차려진 요셉의 식탁 위에서 식사하기를 원하세요?
여러분,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식탁을 원하지만,
야곱의 식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풍성한 것을 예비해 두셨는데, 그곳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거예요.
지난 날을 겪었던 과거의 상처와 아픔이 발목을 붙잡고 있어서,
거기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곱 안에 그와 같은 고통이 있었어요.
▲야곱의 인생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냐면, 상실의 이슈였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상실과 관련된 일들이 번번이 벌어졌어요.
야곱의 생애를 보면 야곱이, 정서적으로 의지했던 모든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1) 형 에서의 칼날을 피해서 도망칠 때, 너무나 사랑했던 어머니 리브가,
‘곧 다시 만나자’ 라고 말하며 헤어졌지만,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라반의 집에 떠나 있는 동안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2) 20년간 종처럼 일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돌아오던 길 가운데,
너무나 사랑했던 라헬이 돌아오는 길 가운데, 아이(베냐민)를 낳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3) 라헬을 꼭 닮아서 너무나 잘생기고 예뻤던 요셉,
그는 어느 날 보니까, 짐승들에게 의해서 찢겨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4)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서 애굽의 식량을 구하라고 한 시므온은 *둘째 아들
애굽 감옥에 갇혀있는데, 그가 죽었는지 한 동안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본문 창43장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막내 베냐민을 내어놓으라고 말을 하고 있어요.
베냐민을 내어놓으면, 그 아이를 데리고 애굽에 가서, 양식을 다시 한번 구해오겠다는 겁니다.
근데 여러분 보시길 바랍니다. 야곱이 아들 베냐민을 애굽에 보낼 수 있을까요?
보낼 수가 없어요.
야곱은 그 안에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보내면 못 돌아온다’ 라는 트라우마가 있었던 거죠.
본문을 읽는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이 참 답답하다. 왜 이러냐?’ 라는 마음이 들지만,
야곱을 조금 이해해 주세요.
누군가의 안에 있는 그 상처는, 우리가 함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주어진 그 아픔은, 그 사람만이 알고 있어요.
야곱은 정말 큰 아픔 가운데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 가운데 끊임없이 내려왔던
그 ‘상실의 문제’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 방법이 기근이었어요. 기근을 통하여 야곱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움직이는 거예요.
기근을 통하여...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만나는 초청장으로 기근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인생 가운데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기근이 다가오거든,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초청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야곱에게서 성취되다
창세기 42장 말씀 보면 이렇게 구성이 되었는데
1절, 2절, 4절, 5절, 38절을 보면
그 가운데 ‘야곱’이란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42:1 ‘그때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42:2 ‘야곱이 또 이르되’
42: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보내지 아니하...’
42: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42:38 ‘야곱이 이르되’
여러분 창세기 42장은, 기근이 찾아와서 아들들의 애굽에 1차로 보내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그 기근이 찾아왔을 때, 야곱이란 이름을 계속 언급하다가
의도적으로 성경은 42:5절에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변경되었지만, *얍복강 씨름
변경된 이후에 모든 순간에 ‘이스라엘’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야곱의 인생 가운데 특별하게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적 역사를 일으킬 때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성경에 쓰셨어요.
그러나 지금 42:5절에, 아들들을 양식을 사러 보내는 이 장면 가운데
‘이스라엘’ 이라고 쓰신 이유는 무엇이냐면,
지금 이 순간에 그의 이름을 바꾸신 하나님께서는,
‘속이는 자 야곱’에서 → ‘하나님과 겨루어 싸워 이겼다’라는 뜻의 이스라엘을 쓰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기근’이라는 상황 가운데,
야곱을 이스라엘로 다시 한번 만들어 가시겠다라고 하는 의지를 담아
그의 이름을 이렇게 이스라엘로 기록해 놓고 있는 거예요.
▲지금부터 하나님이 기근을 통하여, 야곱의 가문 가운데 작정하신 구속사의 대장정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일들을 야곱을 통하여 이루시는 거예요.
창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세기 15장에 아브라함은 상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자손이 많아지게 될 건데,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될 것이다’
근데 여러분 이 말씀은, 야곱이 태어나기 220년 전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자녀가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녀들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클처럼 많아질 거야’
라고 말씀하신 이후에, 그런데 ‘네 자녀가 이방에서 객이 될 거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220년 이후에, 야곱의 인생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야곱 가정이,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일을 통해 성취됩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창세기 15장에서,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니, 자녀가 하나가 없는데 내 자손들이 그렇게 많아져서 이 방에 들어가 객이 된다고?’
‘또한 400년 동안 노예로 살아간다고? 그리고 다시 출애굽을 하게 된다고?’
이 모든 하나님의 이야기를,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이해 못했을 거예요.
사람은 자기 수준을 벗어나는 큰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면 들어도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돼요. 아브라함도 이해가 되지가 않았을 거예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냥 믿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던 창세기 15장의 이 사건을,
지금 220년이 지나 창세기 43장에서, 야곱의 인생을 통하여 지금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방에 객이 되게 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이냐면.. 기근이었어요.
기근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일들을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신32:11~12절을 우리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새끼 독수리들이, 그 보금자리가 너무 푹신푹신하면, 둥지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미가 새끼로 하여금 날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면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한다’이죠.
하나님의 때로는 우리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실 때가 있어요.
그 공간을 혼란스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싸인입니까?
더 큰 무대로 인도하시길 원하는, 하나님의 싸인인 줄 믿습니다.
독수리가 태어난 것은, 평생 둥지 속에서 살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잖아요.
그 둥지를 벗어나야, 자기에게 날개가 있으며,
자기 삶의 존재는 둥지 속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창공을 날라고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깨닫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이냐면,
때로는 우리의 삶의 둥지를 어지럽게 만드신다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내가 알지 못하는 고통과 어려움이 다가왔거든,
이 말씀을 정말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나를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신다.
내 인생을 향한 더 큰 세계가 있다. 나는 더 아름답고 풍성한 식탁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는다’
그런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아브라함만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그에게 하신 말씀은..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주 야곱까지 이어져,
그 후손이 이방에 객이 되는 400년 세월... 그 이상의 영원한 세월을 내다보시고
아브라함에게 사명과 꿈을 주셨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주시는 그 약속은, 우리 당대로 끝나는 것도 있지만,
우리 당대를 넘어가는 약속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을 수 있기를 축복해요.
요즘 드라마는 보통 16부작이면 끝이 나더라고요.
근데 옛날에 <용의 눈물> 기억하세요? 159부작입니다. 대단하죠.
<태조 왕건>은 200부작입니다.
<전원일기>는 1,088부작, 1980년도에 시작해서 2002년도에 끝났어요. 22년 동안 했습니다.
그 드라마 안에서 3세대가 등장해요. 대단합니다.
최불암 그 때로부터 시작해서 3대까지 내려갔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향한 대본은, 적어도 <전원일기> 급입니다.
당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이루실 일들은,
적어도 3세대를 지나서... 아니,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고백할 때마다 ‘3세대’로 고백했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한 세대 안에 갇히지 않는, 그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우리와 함께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그 약속이, *창15장
본문 창세기 43장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중입니다.
가뭄 중에, 기근 중에.. 야곱의 식탁을 넘어가 요셉의 식탁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부분을,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생의 식탁이, 하나님이 예배하신 자리로 옮겨가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그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 첫 번째, 회피의 자리를 떠나, <직면의 자리>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창43:1~2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여러분, 창43:1절에서 기근을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기근이 심하고’에서, ‘심하고’ 라는 단어는 카베드라는 단어인데요.
‘굉장히 무겁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근이 굉장히 무거운 기근이다라는 말이에요.
창세기 42장에도 기근이 왔어요.
그래서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서 식량을 가져오게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기근보다, 지금 기근이 더 무서워요. 시일이 지나니까 그렇겠죠.
여러분 기근에도 종류가 있잖아요. ‘죽겠네 죽겠네’ 하지만 죽겠네도 단계가 있습니다.
‘돈이 없다 돈이 없다’ 하지만 그 없는 것에도 단계가 있잖아요.
여러분, ‘배고프다 배고프다’ 하지만, 단계가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본문 창43장에 등장하는 이 기근은, 진짜 죽을 위기에 있는 겁니다.
누가 봐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아내, 자녀들, 종들이 모두 다 그냥 죽어버려요.
가축이 남아 있겠지만, 그래도 곡식이 있어야 빵을 만들어 먹잖아요.
여러분 그런데 야곱은 거느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큰 집안에 기근이 오잖아요.
정말 한꺼번에 무너져버립니다. 개인이 죽는 것이 아니라, 그가 거느리는 사람들이
적어도 70명 정도 되었는데요.
그 가운데 기근이 왔다... 이거는 상상할 수 없는 기근이, 그 집안 가운데 온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 가서 식량을 구해왔어요. 그런데 그 식량이 지금 다 떨어졌습니다.
더 이상 먹을 게 없어요. 그 식량을 먹는 동안에 시간이 꽤 많이 흘러갔습니다.
야곱은 점점 비참해져 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비참해져 가고 있는데,
아버지의 체면을 다 내려놓고, 아들들에게 또 말을 하는 거예요.
43:2b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여러분 이 말을 할 때, 야곱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얼마나 무너졌을까요?
또 (2차로) 애굽에 가서 양식을 조금 사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런 말을 할 때입니까?
지금 둘째 아들 시므온이 애굽 감옥에 갇혀 있어요.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만 그를 구해 줄 수 있다고 말을 했는데,
더군다나 아들들의 자루 속에서 가지고 갔던 돈다발이 그대로 나왔습니다.
그러니 아들들 열 명 전체가, 애굽 사람 입장에서는 도둑놈들인 겁니다.
그 도둑놈들이, 지금 가져간 곡식을 다 먹었고, 양식이 떨어졌어요.
그리고 양심도 없지... 다시 애굽에 내려가서 곡식을 사오라고 말을 합니다.
아니 아버지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름이 이스라엘인데, 더군다나 베냐민을 내주면서, 양식을 사서 오라고 하면 말이 되는데,
베냐민도 보내주지 않으면서, 아들들을 다시 한번 애굽으로 보내는 거예요.
그 9명의 아들들을 말입니다. 그러면 그건 무슨 말이죠? 가서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잖아도 가자마자 누명을 써서, 정탐꾼들이라고, 시므온이 가둬져 있고,
나머지가 베냐민을 데려오는 조건부로 풀어줬는데,
가던 길에 곡식자루에서 모든 돈 뭉치가 나왔고,
그러면 당장 지금이라도 그 돈 뭉치를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이거 뭔가 잘못된 거라고, 착오가 있었다고' 해명을 해야 되는데,
그런 절차도 없이, 그냥 앉아서 곡식을 다 먹어버렸어요. 곡식이 떨어졌습니다.
염치도 없이 또 곡식을 사오라고 등 떠미는 것입니다.
지금 이 가정 가운데 끊임없는 문제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이 가정 가운데 문제가 끊이지 않습니다.
'아니 왜 야곱의 가정은 문제가 끊이지 않을까요?
왜 계속해서 이런 문제들이 터지는 것입니까?'
요셉은 팔려가고, 시므온은 갇히고, 양식은 떨어지고,
기근이 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이 집안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죠? 재수가 없는 가정이라서 그런가요?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뻔히 보이는 문제가 있습니다. 직면을 해야 돼요.
그런데 야곱은 직면하지 않는 거예요. 뻔히 보이는 문제가 있는데,
직면하지 않으면, 그 문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는 곪아서, 우리 인생 전체를 무너뜨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작에 애굽에 갔어야 됐습니다. 진작에 베냐민을 데리고 갔어야 됐어요.
해명을 했어야 됐어요. 그러면 진작에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곡식을 또 사 와도 문제가 없겠죠.
그런데 야곱은, 스스로 직면하지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인생 가운데, '내가 아는 내 문제'가 있다면 직면하십시오.
그 문제를 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벌어지는 문제 대부분은, 제때에 제대로 다루지 않아서 키운 것들이 많아요.
제때에 제대로 다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문제를 직면하기를 원하세요.
야곱 가정은 직면하지 못했어요. 모두가 다 내면의 상처가 있었어요.
문제를 직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원망합니다.
43:4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답답한 유다가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주세요!'
'아버지가 베냐민을 안 내놓으시니까, 지금 우리가 가지 못하는 것 아니겠어요?
아버지, 너무하십니다. 왜 베냐민을 그렇게 감싸고 도는 것입니까?
시므온이 감옥에 갇혀 힘들어하고 있는데, 왜 그러는 겁니까?'
이에 야곱도 지지 않아요. 이렇게 말을 합니다.
43:6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러분, 본문의 이 장면은, 그 가정에 문제가 닥쳤는데,
진짜 문제의 본질은 차마 이야기 하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원망만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가 또 말합니다.
43:7b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무슨 말이에요? '요셉 총리가 아우를 데려오라고 말할 줄, 우리가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그냥 원망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해서, (그 핵심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과거의 문제에 대해서, 그냥 서로 원망만 하고 있는 거예요.
가정안에 어떤 문제가 벌어졌을 때, 가장 시간을 낭비하는 방법은 무엇이냐면,
서로 그냥 원망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일을 원망한다고 우리의 인생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없잖아요.
▲그 순간에 유다는 직면하기 시작합니다.
43:9 '내가 그(베냐민)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유다는 지금 이 순간에, 장자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 집안의 장자는 르우벤인데, 그는 장자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집안의 장자권이 유다에게 넘어가죠.
그런데 유다는 그 장자권을 얻기 전부터, 바로 이 순간에서부터
그는 장자의 덕과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 문제를 직면하여, 지금 아버지께 나아가고 있는 거예요.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내가 베냐민을 위해서 담보가 되겠습니다.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나를 믿고 보내주세요' 라고
지금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께 말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유다는 원래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집안을 포기하고 집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어요. *창38장
아이 셋을 낳았습니다. 첫째 아들, 둘째 아들이 죄를 지어서 죽었어요.
그 와중에 며느리 다말에게, 셋째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거짓말이었습니다.
무책임한 시아버지였어요. 더군다나 성적인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여,
길가에 서 있는 여인과 동침합니다. 돈을 주고 동침해야 되는데 마침 돈도 없었어요.
대단하지 않나요? 돈이 없으면 그냥 길을 가든지...
외상으로 성적관계 맺은 다음에, 외상 값을 갚으려 했더니만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눈 감고 그냥 입을 닦아버립니다.
어느 순간에 며느리가 배가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며느리 다말을 불태워 죽이려고 합니다. 정말 이상한 아버지잖아요.
다말이 지니고 있던 도장과 끈을 보여줬더니만, 문제를 직면하였더니만, 깨닫게 되었어요.
'내가 문제였구나.. 내 며느리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구나...'
그는 직면을 통하여, 유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다말에게서 쌍둥이를 낳았어요. 둘째가 베레스인데
이 아이가 정말 자기의 아버지 야곱과 완전히 똑같은 것이죠.
아니 야곱보다 더한 놈이 나왔습니다.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는데,
자기가 낳았던 쌍둥이 둘째 아이 베레스는, 형이 손을 내밀었거든요.
산파가 그 아기 손에 홍색 실을 매어주었습니다. 표식을 만들어 준 거죠.
그런데 베레스가 그 형을 잡아당겨서 다시 밀어넣고, 자기가 나와버립니다.
(머리는 베레스가 먼저 나왔지만, 홍색 실은 세라가 매었으므로, 세라가 형이 됨) 38:28
그 순간에 유다가, 이 쌍둥이를 낳는 장면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죠.
'나는 지긋지긋한 아버지의 품을 떠나기를 원했지만.. 떠날 수가 없구나.
내 자녀들의 인생 가운데, 아버지의 역사가 재현되고 있구나...'
유다는.. 자기의 문제를 깨닫게 되고,
유다는 다시 아버지 야곱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으로 돌아간 유다가, 그간에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아버지 야곱에게 말했겠죠.
갑자기 생긴 쌍둥이들.. 아들인지 손주인지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애매한
그 쌍둥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아버지 야곱에게 했겠죠.
그런 유다가 아버지를 몰아세웁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제가 담보가 되겠습니다.
저 알지 않습니까? 저도 자녀가 죽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도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대신에 쌍둥이를 낳았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어요.
다시 집에 돌아왔잖아요. 저를 바라봐 주시고, 한 번만 저를 믿어주세요.'
다른 자녀가 아닌 유다가 말하니까, 아버지는 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 네가 나를 닮았구나.. 내 마음을 알겠구나..'
그 순간에 야곱의 마음이 돌아서게 되요.
여러분, 유다의 아픔이, 야곱이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어요.
누군가의 상처가, 누군가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어떤 것도 낭비하지 않으세요.
우리 안에 벌어진 상처, 아픔, 눈물 그거 다 쓸데없는 것 아닙니다.
누군가는 분명 우리의 그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문제를 피하지 마십시오. 뻔히 보이는 우리 가정의 문제,
뻔히 보이는 내 문제, 뻔히 보이는 우리 부부간의 문제,
뻔히 보이는 우리 인생의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하나님 말씀 앞에 직면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루시기 원하시는 방법대로, 풀어나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 두 번째,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무엇이냐면,
<집착의 자리를 떠나 맡김의 자리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집착의 자리를 떠나서 맡김의 자리로 가라는 거예요.
야곱은 드디어 자녀들을 보내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변하나요? 야곱은 또 옛날의 습성이 나왔어요.
43:11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이와 같은 것들은 가나안 지역에서 귀하게 나는 특산물이었어요.
그것을 가지고 가라는 거예요. 뭐하고 있는 겁니까? 선물(뇌물)을 주라는 거죠.
이게 한 번 크게 성공한 적이 있었습니다. 언제였습니까?
얍복강 나루터에서 형 예서를 만날 때, 그때 그 앞에 모든 선물을 다 보냈어요.
여차하면 도망치겠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대열의 맨 뒤에 있다가... 찾아오신 천사를 만났잖아요.
그 방법을 지금도 쓰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유향나무는 오늘날 피스타치오를 말합니다.
지금은 흔하지만, 이 당시는 굉장히 귀한 거였어요.
간복숭아는 아몬드를 말해요.
피스타치오, 아몬드.. 다 견과류죠.
이게 되게 몸에 좋은 거라서, 요즘도 사람들이 견과류로 수입해서 먹고 있죠.
(지금도 이집트에서는 피스타치오, 아몬드가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인터넷에)
그러니 '애굽사람들이 평소에 못 먹을 만한 거를 골라가지고 가져가라' 라고
지금 자녀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베냐민도 내려놓습니다.
43:13~14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드디어 야곱이 베냐민을 내려놓습니다.
42장의 기근이 올 때는, 베냐민을 내려놓지 않았어요. 견딜 수 있을만한 기근이었거든요.
그런데 43장의 기근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기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냐민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하나님은, 극한 환경을 통해서,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만드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빨리 내려놓을 수 있기를 축복해요. 내려놓지 않으면 고생만 길어집니다.
내려놓을 때까지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엄청난 기근을 통하여,
야곱이 마지막까지 내려놓지 못했던 그 대상인 베냐민을 내려놓게 만드셨어요.
그리고 야곱은 말합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내가 정말 잃겠다는 마음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온전히 맡깁니다' 라는 표현을,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베냐민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어맡긴 거예요.
▲그래서 그는 이 순간에, 하나님의 독특한 이름을 하나 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부르고 있냐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에게 은혜를 베푸사'
라고 말을 하고 있어요. :14
'전능하신 하나님' ... 엘 샤다이 입니다.
지금 이 야곱이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이름 가운데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지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기 위로 믿음의 모든 선조들은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만났어요.
아브라함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창17:1~2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99세 때에, 정말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정말 다 사라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표현하셨냐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엘 샤다이 이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은,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나아가는 길 가운데도 나타나셨습니다.
창28: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야곱이 집을 떠나 밧단 아람으로 도피하는 길 가운데,
아버지 이삭이 이 야곱을 축복할 때, 누구의 이름으로 축복하냐면
'전능하신 하나님 - 엘 샤다이'의 이름으로 축복했어요. 28:3
그리고 이 축복의 말씀을 붙잡고, 라반의 집에 가서 열심히 일한 다음에 돌아오는 길에서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데, 그 하나님이 엘샤다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창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지금 본문 창43장에서, 이 엄청난 기근 속에 베냐민을 내어주면서,
다시 한번 야곱은 잊혀져 있었던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있는 거예요. 43:14
극심한 가뭄 속에서, 그의 믿음의 싹이, 다시 한번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간에,
그 모든 문제를 '엘 샤다이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앞으로 가져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전능'이라는 말 가운데, 우리 인생에 어떤 문제가 담겨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전능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가요. 그게 문제가 될 수 있을까요?
그분이 전능하신대요.
여러분, 우리 인생 가운데 근심, 걱정, 두려움, 염려 그 어떤 것이 왔다면,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봐야만 합니다.
'나는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 엘샤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감히 '전능'이라는 그 말 앞에,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가,
문제가 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에 문제가 문제되는 것은, 그 답을 모르니까 문제가 문제인 거예요.
답을 알면 시험 시간은 놀이가 됩니다.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시겠지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시험 시간마다 두려웠는데... 공부 잘하는 사람은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시험 때 너무 재미있고, 게임 같고, 점수 잘 나와서 칭찬받고...
시험이 시험되는 것은, 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답을 안다면 시험은 놀이가 되죠.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에, 그렇게 아빠인 저를 찾아와서, 문제를 내달라고 자주 졸라댔어요.
'아빠, 문제 내달라고' ... 아이들이 문제를 맞히고 싶다는 거죠.
그럼 제가 어떤 문제를 낼까요?
아이들이 맞추기 쉬운 거를 냅니다.
'1 더하기 1은 얼마지? 야, 이거 어려울 텐데...'
그러다가 아이들이 정답을 맞추면 '와! 대단하다' 하고 제가 놀라는 시늉을 합니다.
사실 그게 뭐 대단해요? 아이들은 그 순간, 자기들이 천재인 줄 압니다.
그래서 문제를 계속 내달래요. 저는 계속 쉬운 걸 냅니다. 아이가 맞출 수 있는 것만!
그 순간에 아이는 뭘 느끼는 거죠? '시험이 놀이구나!'
답을 알면, 시험은 게임이 되고, 놀이가 됩니다.
그렇지만 답을 모르면 답답해집니다.
이 예화를 우리에게 가져와서 적용을 하자면,
우리가 시험을 만날 때, 우린 답을 모를 수 있어요. 그런데 그분은 전능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답을 알 만한,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만 골라서 주시는 거예요. 고전10:13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선조들의 인생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야곱 이후에 이어지는 유다의 인생을 가만히 보세요.
그들의 인생 가운데 가장 큰 문제들은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의 선조들이잖아요.
엄청난 믿음의 영웅들, 엄청난 사람들.....
그들의 인생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죠? 자녀 문제였어요.
아브라함의 인생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자녀 이삭이었어요.
이삭이 없어도 문제였고, 낳아도 문제였어요.
그 낳은 자녀를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전체는, 자녀와 관련된 씨름의 인생이었어요.
이삭은 어떠했습니까? 마찬가지예요. 쌍둥이를 낳았어요.
그런데 그 쌍둥이가 서로 계속 싸워대요.
결국 야곱은 속여서 도망치고, 에서는 그 땅 이방 여인과 결혼해버립니다.
그 이후에 모든 이삭의 인생은 정말 힘들었어요.
계속 자녀 문제였어요.
여러분 야곱은 어땠습니까? 열두 자녀를 낳았어요.
내려갈수록 많이 낳는데, 그만큼 자녀로 인한 고통은 심해집니다.
자녀들끼리 싸움이 벌어져요. 가장 사랑한 아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야곱의 인생 역시, 모든 인생의 과정 가운데 '자녀 문제'가 있었어요.
그 이후에 실질적 장자권 행사했던 유다는 어땠습니까? 역시 자녀 문제였죠.
먼저 키운 두 자녀가 죽었어요. 대신에 쌍둥이를 낳았어요.
그러니 보십시오. '믿음의 영웅들' 그들의 인생을 가만히 보면,
그들의 삶의 진짜 중요한 삶의 문제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세계 평화.. 이런 거였습니까? 그런 거 아니었어요. 다 뭐였어요?
자녀 문제, 가정 문제, 부부간의 문제... 다 그거였다고요.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데 있어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도구가 결국 가정문제입니다.
엄청나게 큰 어떤 것,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일상을 24시간 살아가는 그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 가정 안에서, 내가 어떻게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는가가,
결국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 가정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5월이 가정의 달이잖아요. 오늘 마지막 금요일에,
다시 한 번 우리 가정 안에 문제가 있다면,
내려놓지 못한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어요.
야곱은, 사실 베냐민을 지킨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베냐민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지키는 거였어요.
자기 안에는 상처, 불안, 두려움, 염려,
그 아들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극심한 공포...
베냐민을 놓지 못하는 것은, 자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함이었어요.
결국 그것 때문에 가족 전체가 굶어죽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그 베냐민을 내려놓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죽은 줄 알았던 요셉까지 얻게 됩니다.
진작에 내려놓았으면 더 빨리 만났을 거예요.
내려놓지 못하니까... 그렇게 사랑했던 요셉을, 노년이 되어서 만나는 겁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칠 때, 어떻게 하죠?
자전거에 아이를 태우고, 부모가 뒤에서 붙잡습니다. 그리고 달려갑니다.
그렇게 천천히 배우다가, 어느 순간 자전거를 붙잡았던 손을 놓잖아요.
그럼 아이는 아빠가 잡아주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자기 혼자 달리고 있는 거죠.
근데 만약에 아버지가 안 놔요. 엄마가 안 놔요.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아이가 타다가 넘어져요. 그게 더 위험해요.
자녀를 지킨다고요? 내 힘으로? 그게 더 위험해요.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믿음의 선조 4대까지 이어지면서, 모든 조상들이 자녀를 내려놓는 시험을 다 받았어요.
내려놓을 때까지 시험하셨습니다.
부모 여러분, 자녀를 내려놓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자녀된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시되, 의존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꿈과 비전을 가지고, 비상하는 자녀들 되기를 축복합니다.
생각해보면 야곱은, 먼 훗날에 ‘내가 진작에 내려놓을걸 진작에 베냐민을 보낼 걸.
내가 괜히 버텨서 우리 가족 고생만 시키고 그렇게 사랑하는 요셉을 늦게 봤구나’
라고 후회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역사하실 때,
우리 역시 그렇게 지난 우리의 모습을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진작에 내려놓을걸... 그거 내려놓아도 살 수 있었는데...
그거 안 가져도 내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데...
그거 움켜쥔다고 내가 더 행복한 것도 아니었는데... 진작에 내려놓을 걸’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3. 세 번째, <상처의 자리를 떠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라> 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을 찾아갑니다. 너무 두려운 순간이었어요.
‘곡식 자루 속에 들어있었던 돈.. 그거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너무 두려웠는데,
그들을 감옥과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연회장으로 끌고 갑니다.
그게 더 두려워요.
43:16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형들은 자기들을 감옥으로 갈 줄 알았는데, 요셉은 그들을 연회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왜 이러지? 왜 이렇게 잘해주지?’ 얼마나 두려울까요?
죄를 지은 사람은, 잘 대우해줘도 두렵습니다.
자기 안에 죄가 있으니까 자유함이 없어요.
요셉이 걸어오는 형제들을 보았어요.
‘보고’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라아’라는 단어인데 :16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유심히 바라보다 라는 뜻입니다.
즉 보니까 동생 베냐민이 걸어오고 있는 거예요. 22년 전에 헤어질 때는 어린 동생이었는데
어느덧 어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하고, 복잡했을까요?
베냐민을 보는 순간, 그 감정이 얼마나 솟구쳤을까요? 그런데 형들은 너무 두려웠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너무 두려워서 묻지도 않았는데,
형들은 먼저 지난번 돈 이야기를 꺼냅니다.
‘우리가 훔쳐가지 않았는데 자루 속에 돈이 있었습니다. 우린 절대로 그러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을 하기 시작하자, 요셉의 청지기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43:23~25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여기 보니까 요셉의 청지기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 속에 넣어 주신 것이다’
어떤 싸인일까요?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라고, 계속해서 이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을 풀어줍니다. 그들에게 주어졌던 ‘요셉이 낸 시험’을 통과한 거예요.
그것은 무엇이냐면, 22년 전에 은 20개를 얻겠다고 자기를 팔아버린 형제들을 시험했습니다.
‘과연 22년 전에 돈으로 형제를 팔아버린 형들이
이 거액의 돈을 가지고 형제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오겠는가?’
그런데 그들은 그 돈을 다시 들고 찾아왔어요.
요셉은 그 순간에 ‘형들이 변했구나’ 하는 것을 느꼈던 것이죠.
그리고 시므온을 풀어줍니다.
시므온 역시 감옥 안에 있으면서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형제들이 과연 애굽으로 올지, 안 올지’ 기약이 없습니다.
아마 자기는 여기서 죽는다라고 생각했겠죠. 그 순간에 누구를 생각했을까요?
‘요셉, 내가 요셉을 구덩이에 가뒀는데, 살려달라고 해도 살려주지 않았는데,
애굽에 팔아버렸는데 걔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처럼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마음에,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봤을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들이 끝난 이후에 요셉은, 그들과 함께 식사 자리 가운데 앉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형제들이 요셉에게 한 번 더 절을 해요.
43: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요셉이 등장하자 그 자리에 형제들이 일어나서 전체가 절을 합니다.
여기 보면, 몇 명이 절을 했다고요? 이 장면에서 형제 몇 명이 절을 하는 것입니까?
11명입니다.
그런데 앞장에 42장에 형제들이 와서 요셉에게 절을 한 번 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몇 명이 절을 했죠? 10명이 절을 했어요. 베냐민이 오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 순간은, 창37장에서 꾸었던 꿈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순간이 아니었어요.
그 순간에 별 몇 개가 절을 했죠? 11개가 절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43:26에 11명의 형제들이 요셉을 향하여 절을 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꿈의 성취를 요셉은 보고 있는 거죠. 감격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때의 꿈의 성취가 이 현장에서 이뤄지고 있구나’
그 순간에 유독 요셉은 베냐민을 바라볼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43: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요셉이 말을 합니다.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느라’
이 말을 할 때 요셉이 어떻게 말을 했을까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먹울먹하기 직전에 말을 했을 거예요.
여기 쓰여있는 ‘은혜’라는 단어가 ‘라함’인데,
‘어머니의 자궁, 태’ 이런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까 단순한 어떤 은혜가 아니라, 어머니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품고 있었던
그 애틋한 사랑과 열정, 뜨거움을 담아서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의 일반적인 단어는 헷세드예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그 헷세드는 강조점이 ‘언약’에 있어요. ‘언약에 기초한 은혜, 사랑’
그런데 이 ‘라함’은 은혜인데,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속에 있는 그 은혜를 말합니다.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거죠? 베냐민과 요셉은 어머니가 두 사람이 같잖아요.
그 어머니 라헬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 가운데 그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를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한 다음에 요셉은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43: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북받치죠. 감정을 참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요셉은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원하노라’
이 말을 이렇게 편하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거기까지만 말하고, 뛰쳐나가는 거죠.
말을 어떻게 끝까지 할 수가 있어요?
지금 동생 보고, 하나님의 그 은혜를 떠올리는데 말이죠.
지금 이 순간에,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은혜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단순히 동생을 봤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은혜는.. 하나님의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인데,
이 순간에 11명의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고 있고,
과거의 그 꿈이 이루어지고, 이 험악한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다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게 해서 회복시켜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 순간에 ‘지난 날의 모든 배신, 아픔, 잊혀짐, 모든 괴로움,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있었구나... 이 순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구나...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 마음 때문에 지금 이 말을 하다가 말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내 상처보다 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 고통보다 크세요.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지은 죄보다 크세요.
그분의 품 안에서, 그분의 은혜 안에서 회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셉은 지금 그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자기 정체를 들킬 뻔했어요.
갑자기 도망쳐서 엉엉 울다가, 다시 돌아와서 정색을 하고,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식사를 합니다.
43:32~34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요셉의 식탁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기근 중이에요. 굶어 죽을 뻔 했습니다.
먹을 게 없었어요. 그런데 여기 와보니까, 요셉이 차린 식탁은 너무나 풍성했어요.
상을 차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어떻게 차리냐면, 자신과 형제들의 밥상을, 분리해서 차렸어요.
왜냐하면 지금 형제들은 요셉을 애굽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과 한 식탁에서 밥을 먹지 않아요.
부정하다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요셉이 일부러 밥상을 따로 차린 거예요. 이상한 일이 벌어지죠.
그런데 형제들을 앉히는데 어떻게 앉혔다고요? 나이 순을 따라 앉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이죠. 정확하게.
형제들은 ‘아니 어떻게 알았을까? 순서대로’ 너무 두려운 거죠.
그 자리에 앉아요. 그런데 베냐민에게는 다섯 배를 줍니다. 요셉의 식탁은 풍성해요.
그렇다고 형들에게 조금 줬습니까? 그게 아니에요.
형들도 배꼽이 나올 만큼 다 먹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베냐민에게는 더 많이 줬어요. 그만큼 풍성한 식탁이
요셉의 식탁 가운데 마련이 되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식탁의 모습, 형제들이 순서를 따라 앉아 풍성히 먹는 모습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냐면,
가정 가운데 형제간의 무너진 질서가 잡혔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들은 언제 이런 밥상을 경험했을까요? 아마 한 번도 없었을 거예요.
한 상에 둘러앉아 행복하게 밥을 먹었던 기억이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 순간에 기근 중에 하나님의 초청장을 받고 애굽으로 건너오자,
예비되는 식탁 가운데 동참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그 식탁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차려놓은 거친 식탁 앞에서, 과거의 상처와 아픔과 쓴 눈물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그 풍성한 식탁 앞으로 나아올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해요.
회피하지 마십시오 직면하세요.
내가 집착한 것을,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다 내려놓으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 그 라함의 은혜, 그 따뜻한, 그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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