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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 조각글 모음

LNCK 2026. 6. 11. 13:22

◈ <긍휼> 조각글 모음    - 작업 중-              <긍휼> 관련글

 

◑1. 동생 베냐민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본 요셉 총리

 

야곱의 아들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의 요셉을 찾아갑니다. 너무 두려운 순간이었어요.

‘곡식 자루 속에 들어있었던 돈.. 그거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너무 두려웠는데,

그들을 감옥과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연회장으로 끌고 갑니다.

그게 더 두려워요.

 

43:16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감옥으로 갈 줄 알았는데, 요셉은 연회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왜 이러지? 왜 이렇게 잘해주지?’ 얼마나 두려울까요?

 

죄를 지은 사람은, 잘 대우해줘도 두렵습니다.

자기 안에 죄가 있으니까 자유함이 없어요.

 

요셉이 걸어오는 형제들을 보았어요.

‘보고’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라아’라는 단어인데 :16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유심히 바라보다 라는 뜻입니다.

 

즉 보니까 동생 베냐민이 걸어오고 있는 거예요. 22년 전에 헤어질 때는 어린 동생이었는데

어느덧 청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하고, 복잡했을까요?

베냐민을 보는 순간, 그 감정이 얼마나 솟구쳤을까요?

43: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요셉이 등장하자 그 자리에 형제들이 일어나서 전체가 절을 합니다.

여기 보면, 몇 명이 절을 했다고요? 이 장면에서 형제 몇 명이 절을 하는 것입니까?

11명입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은, 창37장에서 꾸었던 꿈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순간이 아니었어요.

그 순간에 별 몇 개가 절을 했죠? 11개가 절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43:26 11명의 형제들이 요셉을 향하여 절을 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꿈의 성취를 요셉은 보고 있는 거죠. 감격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때의 꿈의 성취가 이 현장에서 이뤄지고 있구나’

그 순간에 유독 요셉은 베냐민을 바라볼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43: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요셉이 말을 합니다.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느라’

이 말을 할 때 요셉이 어떻게 말을 했을까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먹울먹하기 직전에 말을 했을 거예요.

 

여기 쓰여있는 ‘은혜’라는 단어가 ‘라함’인데,   *'레켐'으로도 발음하죠.

‘어머니의 자궁, 태’ 이런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까 단순한 어떤 은혜가 아니라, 어머니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품고 있었던

그 애틋한 사랑과 열정, 뜨거움을 담아서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의 일반적인 단어는 헤세드예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그 헤세드는 강조점이 ‘언약’에 있어요. ‘언약에 기초한 은혜, 사랑’

 

그런데 이 ‘라함’은 은혜인데,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속에 있는 그 은혜를 말합니다.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거죠? 베냐민과 요셉은 어머니가 두 사람이 같잖아요.

 

그 어머니 라헬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 가운데 그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를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한 다음에 요셉은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43: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북받치죠. 감정을 참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요셉은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원하노라’

이 말을 이렇게 편하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거기까지만 말하고, 뛰쳐나가는 거죠.

말을 어떻게 끝까지 할 수가 있어요?

 

지금 동생 보고, 하나님의 그 은혜를 떠올리는데 말이죠.

지금 이 순간에,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은혜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단순히 동생을 봤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은혜는.. 하나님의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인데,

이 순간에 11명의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고 있고,

과거의 그 꿈이 이루어지고, 이 험악한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다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게 해서 회복시켜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 순간에 ‘지난 날의 모든 배신, 아픔, 잊혀짐, 모든 괴로움,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있었구나... 이 순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구나...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 마음 때문에 지금 이 말을 하다가 말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내 상처보다 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 고통보다 크세요.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지은 죄보다 크세요.

그분의 품 안에서, 그분의 은혜 안에서 회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셉은 지금 그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자기 정체를 들킬 뻔했어요.

갑자기 도망쳐서 엉엉 울다가, 다시 돌아와서 정색을 하고,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형들과 같이 식사를 합니다.

 

43:32~34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2.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기도로 구한 바울

 

△그래서 바울은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부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함께 있기를’ 기도합니다. 딤전1:2

그 얘기는 ‘하나님, 이 아들과 함께해 주십시오’ 이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근데 사도바울이 원래 13개 서신 중에 ‘은혜와 평강’만 얘기합니다. 원래 긍휼은 없어요.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만 긍휼이 들어가요.

 

은혜는 자격이 없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뜻하죠.

평강은 존재적인 불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인생에,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절대적인 평안이죠.

 

‘은혜와 평강’ 이 순서가 한 번도 뒤집어진 적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조건 없는 한량 없는 은혜가 체험되어야만, 평강이 찾아오게 된다는 거예요.

 

‘나는 왜 이렇게 인생이 늘 불안불안할까?’

여러분 그것은 은혜 체험을 하면,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주일 예배 한번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평상시에 말씀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찬양을 많이 들으세요. 찬양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공예배와, 개인 예배, 기도에, 은혜가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1:2

자 그런데 유독 디모데에게는 ‘긍휼’을 하나 더 붙였어요. 이유가 뭘까요?

불쌍하니까! 걔는 생각만 해도 불쌍하거든요.

 

근데 이게 상상을 해보세요. 불쌍한 상황이 아닙니다.

당시에 사도바울이 다니면서 정말 수십 개의 초대교회를 세웠는데,

그 초대교회들 중에서도 가장 큰 대형교회가 에베소교회예요.

 

그 에베소교회에 담임 목사를 하고 있는 디모데가 불쌍한 거예요.

그가 위장병을 앓으면서, 마음이 위축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그 아들같은 디모데가,

너무 걱정이 되는 거예요.

 

▲저희가 이번에 이집트 성지순례 때도, 최초의 수도자, 은둔자이자 수도자,

‘사막교부’라고 이야기하는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을 갔어요.

중세에 수도원들이 많았잖아요.

 

여러분 수도사들이 하루 종일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한 기도가 뭔지 아세요?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Lord, have mercy on me!’입니다.

‘주여, 제게 하나님의 긍휼을,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have pity on me!’

이 기도를 하루에 200번씩, 300번씩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강한 척을 한 등 무슨 유익이 있겠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야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긍휼이라는 것은 여기서 구원의 언약에 기초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 하나님 베풀어주시는 자비인 거예요.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

 

그러니까 사도바올이 디모델을 놓고 이렇게 기도하는 거죠.

‘하나님 이 아들(디모데)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일 뿐만 아니라

평생을 복음사역에 헌신한 하나님의 사람 아닙니까? 이 아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 기도를 하는 거예요.

 

 

◑3. 바벨론 포로 귀환민을 향한 하나님의 감정은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입니다.

 

1: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불쌍히 여김' .. 히브리어로 '라함' mercy

'우리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어떻게 하시냐면, 이 긍휼하심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신대요.

긍휼하심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신대요.

 

2021년에, 여러분 저희가 가장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 아닙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를 지지하시는 그 하나님의 페이버, 임재,

그것이 지금 재난의 때, 리셋의 때,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갈망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해,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오는 어떤 열쇠라는 거죠.

 

그래서 제게는 이 ‘긍휼’처럼 제 마음을 울리는 단어가 없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긍휼’이라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단어인 것 같아요.

긍휼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감정을 가장 잘 대표하는 감정인 것 같아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하면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이지라는 거예요.

 

왜 긍휼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을 나타내는가 하면,

긍휼은 상대방의 어떠함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내면에서 올라오는 감정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 그랬을 때는,

우리 안에 어떤 가치가 있고, 뭔가에 의한 유익할 만한 게 있고,

‘뭔가 딜을 해서 내가 이렇게 해주면, 쟤가 나한테 뭐를 주겠지’  그런 것과는 관계 없는 거예요.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의 어떠함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그냥 내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정이에요.

 

‘하나님이 긍휼하시다’ 그랬을 때는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올라오시는 무조건적인 어떤 감정이지,

우리의 어떠함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가장 잘 나타내는 속성인 것 같아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거든요. 우리에 대한 어떤 반응으로 리액션으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긍휼)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부분들도 있어요. 진노나 이런 것은, 우리가 보인 것에 대한 하나님의 리액션이죠.

그렇지만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어떠함 때문에 나오는 리액션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때문에 올라오시는 감정이세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스스로 계시는 분,

그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어떠하심 때문에 올라오는 것이 긍휼이에요.

 

그래서 긍휼만큼 하나님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은 없어요.

우리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 스스로에게서 나오시는 감정이세요.

내재된 감정이세요.

 

그래서 저는 긍휼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묘사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어떠함과는 관계없는...

 

그래서 이것 (긍휼)이 여러분 결국 우리가 비빌 언덕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비빌 수 있는 언덕이 이거잖아요.

 

깊게 기도하다 보면, 여러분,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내가 무슨 낯짝으로 하나님한테 지금 기도하고 있지?’ 그럴 때...

‘내가 무슨 염치로 이걸 구하지? 왜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셔야 되지?’

깊게 기도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어느 순간 약간 제정신이 들어서 보면

‘하나님이 왜 이 기도에 응답해 주셔야 되지?’ 이유가 없어요. 정말 이유가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한테 그렇다고 대단한 걸 드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이렇게 예쁜 짓만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예쁜 짓보다 못된 짓 할 때가 더 많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요? 이유는 하나예요.

긍휼하시기 때문에, 긍휼이 여기시는 것 때문에 응답하십니다.

 

‘와 그래서 그 긍휼하심에 기대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거구나’

‘그 긍휼하심에 기대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거구나’ 할렐루야!

 

▲그래서 성경은, 이 긍휼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눅18:10절에 보면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두 사람의 기도가 다르죠.

이 기도의 내용을 한번 살펴봅시다.

 

눅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반응은 뭐냐면, 위의 세리처럼 긍휼하심을 의지하는 거예요.

 

오늘 설교를 처음 시작할 때, 우리가 그 말을 했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율법이 아니라,

우리의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감정에 올바로 반응하는 거라고 그랬죠.

 

하나님의 감정에 올바로 반응하지 않으면, 온전한 관계가 맺어질 수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라고 하는 감정에, 어떻게 올바로 반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하는 거예요. 그게 올바른 반응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교해보면, 여러분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요.

사실은 바리새인이 훨씬 더 나았어요. 세리는 토색했고요.

‘토색’이라고 하는 말은 빼앗고, 착취했다는 거예요.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그에 비해서 정말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겼던 아주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세리의 손을 들어주시고, 바리새인의 손을 내리셨을까요?

이유는 하나예요. 잘못 반응한 거예요.

하나님의 감정에 대해서 잘못 반응한 거예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인지 모르겠고, 아무리 철저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관계의 측면에서 봤을 땐, 하나님 앞에 잘못 반응한 거예요.

 

바리새인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갔냐 하면, ‘자기 의’를 가지고 나갑니다.

‘나는 이런 것도 했고요. 나는 저런 것도 했고요. 나는 이런 것도 했어요.’

 

여러분, 하나님께 긍휼의 마음이 있을 때, 올바른 반응은, 우리가 그 긍휼에 의지하는 겁니다.

나의 의를 가지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틀리지 않으세요.

 

우리에게 긍휼을 가지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내세울 게 없다는 뜻이잖아요.

우리가 내세울 게 있으면 하나님이 왜 긍휼의 마음을 품으시겠어요?

‘불쌍히 여기셨다’라고 하는 것은, ‘쟤는 가지고 나올 게 하나도 없구나..

쟤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구나.. 쟤는 내 앞에 가지고 올 게 하나도 없구나..’

그러니까 불쌍히 여기신 거죠.

 

그렇다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셨다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내밀 카드가 없다는 뜻입니다. 자격이, 공로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올바른 우리의 반응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주 앞에 나아옵니다.’

그러고 그냥 엎드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해서 내가 주 앞에 나아갑니다.’ 그것이 올바른 반응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2021년 한 해는, 이 하나님의 긍휼이 더욱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재편과 리셋의 때에, 과연 무엇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겠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우리가 이 ‘재편의 해 post covid’를 대체할 만한 다른 전략은 없다고 믿습니다.

긍휼이 저의 유일한 전략입니다. 긍휼이 저의 유일한 전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올 한 해를 성공적으로 헤쳐나갈 다른 계획이나 다른 전략이 있으십니까? 저는 없어요.

뭐가 일어날지도 모르겠고, 어떤 광풍이 몰아칠지도 모르는데, 미래를 알 수가 없는데,

무슨 전략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 유일한 전략은 뭐냐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저의 유일한 전략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나를 긍휼히 여겨주지 않으시면, 다른 방법이 없나이다...’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의지하고 기도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따뜻하게, 불쌍히,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과 감정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돌아오겠다’ 하고 말씀해 주십니다.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

 

슥1: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솔로몬이 왕자들 중에 왕위를 계승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려는 섭리

 

다른 왕자들을 제쳐놓고, 하나님은 왜 꼭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시는가요?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왕위에 세워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 왕국은 하나님의 긍휼로 지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솔로몬이어야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솔로몬은 범죄한 다윗을 용서하신 사랑의 증표로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만약 솔로몬이 아니라 다른 자가 왕위에 앉게 된다면,

그것은 다윗 왕국은 하나님의 죄용서(긍휼)와 관계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도니야가 아닌 솔로몬을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발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소망한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계속되는 죄 용서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이것이 다윗에게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내 위(왕좌) 에 앉을 자를

주사 나로 목도하게 하셨도다 하셨나이다”라고 찬송을 합니다. 왕상1:48

 

 

◑5. 솔로몬의 아기 재판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는 재판

그저 솔로몬의 지혜를 나타내는 재판이, 그 진의가 아니라요.

 

다시 말해서, 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닌 것은, 지혜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죠.

 

아들이 죽을 것을 불쌍히 여기는 어미의 마음, 그것은 곧 긍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지혜가 없을 때는, 거짓말하는 여인을 가려내는 것만 보이지만,

하나님의 지혜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면,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어미의 긍휼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솔로몬의 재판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불쌍히 여기시기 긍휼이 이스라엘을 살렸음을 보여주는 재판인 것입니다.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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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