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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하고 나아가니라 막14:26, 시114:1~2 2007.04.08.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장면은, 성경에 종종 나오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찬송하셨다는 장면은, 신약성경에 어디에 나올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셨다는 기록은
신약성경의 복음서 두 곳에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병행구절이므로, 사실은 신약성경의 한 곳에 유일하게 나타납니다.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
감람산으로 나가시기 직전에 찬송을 부르셨습니다.
마26: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막14: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본문
이때 부르신 찬송은 유월절 식사 후 전통적으로 부르던 시편 113편~118편(할렐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에 “저희가 찬미하며”라고 했는데.
이 ‘저희’는 물론 예수님과 제자들을 함께 지칭하는 대명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제창을 하셨다는 뜻이 되는데,
그 어떤 해석가는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본문에 나오는 ‘찬미하다’라는 동사를
'recite' 즉 ‘낭송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동안 기도는 자주 하셨지만, 노래를 부르신 적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는데,
아마도 그 해석가는, 예수님께서 노래를 부르신다는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점잖게 보이는 예수님의 이미지를 훼손시킨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휘메오’라는 헬라어 동사를 그렇게 ‘낭송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너무나 무리이며 사실 억지에 가깝습니다.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to sing' 즉 ‘노래하다’는 뜻의 단어인 것입니다.
▲단어 뜻만 그럴 뿐 아니라 유대인의 유월절 관습을 보아도
이것은 분명 찬미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예식을 지키면서 시편에서
소위 ‘할렐송’이라 불리는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할렐’이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할렐루야’의 첫 단어로서
바로 ‘찬양’이라는 뜻의 말인데,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사 도중에는 ‘할렐송’의 전반부인 시편 113편과 114편을 불렀고,
식사가 끝날 무렵에 네 번째 잔을 들면서 마지막 순서로
그 ‘할렐송’의 후반부인 시편 115 ~ 118편의 찬양을 함께 불렀습니다.
(이 시편들의 서두나 끝에는 ‘할렐루야’라는 말이 한 번씩 나옵니다.
안 나오는 시편도 있지만요)
실제로 유대인들은 유월절 잔치 도중 이 찬송들을 부를 때
그냥 목소리로만 하지 아니하고 악기 반주를 사용하거나
아예 악단, 오늘날로 치자면 작은 오케스트라를 동원해서 부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저희가 찬미했다’는 것은
바로 이 유월절 잔치를 마칠 때 부르는 할렐송이었음이 분명하며,
물론 제자들뿐 아니라 예수님도 같이 부르셨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께서도 평소에 기도만 드리신 것이 아니라
찬송 역시 부르셨던 것이 분명한데,
특히 이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셨다는 사실은 또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면서 그 할렐송을 함께 부르는 시간은
우리 예수님에게는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다락방을 떠나시면 피땀의 기도를 드리신 겟세마네와
멸시와 모욕을 당하신 빌라도의 법정에 이어서
무엇보다도 그 고난의 극치인 골고다로 이어지는 걸음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노래가 나왔겠습니까?
아무리 평소에 콧노래 부르기 좋아하던 사람이라 해도
그처럼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질 바로 그 시점에
자기 입에서 찬미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 주님은 바로 그런 때에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즐거운 찬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과연 어떤 찬송을 부르셨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할렐송의 후반부, 즉 유월절 만찬이 끝나는 시점에 불렀던
시편 115편부터 118편의 노래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찬양과 감사를 돌리고
환난 중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라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113:1, 3
라고, 우리 주님께서도 여호와께서는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 어떤 경우에도 오직 찬양을 받으셔야만 하실 하나님이심을 노래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114:1~2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114:8
라고, 우리 주님께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크신 구원의 은총에
최고의 감사를 드리시며 찬미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노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116:3~4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116:7~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라고, 우리 주님께서도 지금 곧 닥치게 될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끝까지 성부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시며, 평안히 의지하는 믿음을 노래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예수님께서 부르셨던 찬미는
하나님께서 그 유월절에 제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이제 곧 주님께서 통과하셔야 할 상황에 딱 들어맞는 찬송이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를 향하여 가시면서도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신 그 주님은
얼마나 여유롭고 평화스러운 모습이겠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두고도 그렇게 노래하셨다면,
오늘 그 주님의 부활 승리를 맞이하는 이 기쁜 시간,
어찌 우리에게 찬미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예수님께서는 그 찬송을 solo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합창하셨습니다.
세상 가요도 그렇지만 찬송 역시
여러 성도들이 함께 부를 때 훨씬 더 큰 영적 감흥과 힘이 솟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밤에 우리 할렐루야 찬양대가 부르는 이 영감의 찬미를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 심령으로 화답함으로써,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찬미하면서 누렸던 그 기쁨을 이 시간 꼭 같이 느끼시고
바로 그 찬양의 은혜를 이 자리에서 꼭 같이 나누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예수님은 찬송을 어떻게 하셨을까? 출처
[우병만의 신앙칼럼]
성경을 읽어 보면서 보는 관점이 찬양의 관점에서는 잘 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찬송을 부르셨을까? 라고 질문을 해본다면 과연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 우리들의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하나님이시면서 낮은 자의 위치로 인간을 구원하고자 내려오신 예수님이
생활 가운데 찬양은 과연 어떠하셨는가를 안다는 것은
교회 음악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예수님이 찬송을 부르셨는가?’ 의 질문에 대답은
당연히 늘 찬미하셨던 분이다.
특히 예수님은 시편을 많이 부르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가운데 상당히 많은 시편 말씀이 인용하셨으며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서도 추측될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마21:16).라고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은 시편을 읽으셨음을 알 수 있고,
시편 독서는 그 당시 신앙 관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 기도로 직고를 하실 때, 시편을 많이 인용하셨다.
시8:2, 시118:22-23, 시118:26, 시110, 시6:4, 시 41:9, 시22:1, 시31:5
예수님께서 어느 범위까지 시편을 노래로 하셨는지 관해서는
성경에 예를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노래를 부르시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막14:26절이다.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여기에서의 ‘저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고
이들은 방금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찬송을 부르고 있는 모습이다.
주석가들은 여기서 부른 노래는 시편 115장에서 118장으로 추정 해석하곤 한다.
그 이유는 유월절 음식을 다 먹은 후에는 할렐(Hallel) 시편들의 두 번째 부분인
이 시편들을 부르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시편은, 예수님의 찬양의 주제였고 찬양의 모습이었음을
명백히 말 할 수 있다.
시편은 그 당시 회당의 예배 의식에 사용되었는데,
현재로 말하면 찬송가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예수님은 분명 어느 곳에서든지,
자신의 기도에서도,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바리세인들을 향하여 강한 메시지를 전할 때에도,
시편을 통하여 찬송, 찬미를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예배드릴 때에도 시편을 사용하셨겠지만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점은
제자들과의 생활 가운데 찬미 하셨다는 것이다.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니라’ 라는 부분은
예배 의식의 순으로 보기 보다는, 생활의 일부의 모습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의식 중의 찬양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생활의 일부로,
생활 가운데 찬양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 사실은 깊은 의미를 일깨워 준다.
이러한 생활 찬양은 바울과 실라의 옥중 찬양을 보면 더욱 알 수 있다.(행16:25)
신약 성경에서는 예배적 성격의 찬양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교회 음악, 예배음악의 규범 될 수 있는 에베소서 5:19절과 골로새서 3:16절에 보면,
여기 나오는 ‘찬양, 찬송’은
예배 의식 중의 찬양이기 보다, 공동체 내에서 생활 속의 찬양을 의미하고 있고,
어떤 예배적 틀 속에서 의미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여기에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고... 찬양하고”의 구절은
꼭 예배의 용어로서가 아니라,
생활 가운데에 행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해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찬미 하는 것,
그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고, 제자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초대교회 때부터, 성도들은 늘 어느 곳에 있든지 시편으로, 입술로, 마음으로
여호와를 생각하며 그를 인정하고 높였고,
그것이 진정 영적 찬양이며 신령한 노래가 아닐까 싶다.
어떤 분들은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라 한다. 한나 처럼(삼상 2:1) 말이다.
기도는 예배 의식 속에서만 속해 있는 것이라고 누가 경계를 지을 수 있을까?
찬양도 마찬가지이다.
기도가 찬양이고 찬양이 기도이며,
예배가 생활이고 생활이 예배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무엇인가 구분해야 한다는 양면성을 주장 하지만
어떻게 보면 구분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 ‘예배의 음악’, ‘기도의 음악’, ‘생활의 음악’ 등으로
꼭 분리하여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편리상일 뿐이지 별 다른 의미는 없다.
중요한 것은 찬양, 기도, 생활은 모두 동적이라는 것이며
완벽성을 가진 것이라기보다 부족하지만, 늘 하나님을 향하는 진실 된 마음이라는 것이다.
공동체적 종교 행위보다 늘 일대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깊은 교제의 신앙관 그것을 찾을 때 역동적인 신앙 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시편을 많이 이용하셨는데, 그 시편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 내용이 기도이며, 그 내용이 생활이며, 그 내용이 찬양이다.
간절함과 애절함의 고백들이 가사의 문법화, 음악적 체계화 되어
많은 이들이 즐겨 부르는 회중 찬양이 되고, 신앙의 공감대가 형성 되어
예수님을 이어 현재까지 신앙의 유산처럼 전해져 오고,
지금도 많이 부르는 찬미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자.
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볼 때,
예배 때 무슨 노래를 불렸느냐 보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먹으며 힘든 이민 생활에서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차를 몰고 출근 할 때 나의 생각과 입술에서 흥얼거리며 나오는 시편이, 찬양이
더욱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세상은 오늘날에도 (세상) '찬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즐거움은 자발적으로 찬양으로 흘러갑니다.
우리는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하였지만,
사실 세상은 찬양의 소리로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연인들은, 자기 연인을 서로 찬양하며,
독자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를 찬양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은, 오늘 먹은 점심이 맛 있었다고 찬양합니다.
사람들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를 매일 찬양하며,
즉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가 마치 무슨 셀럽의 홍보대사인 것처럼,
그 셀럽을 칭찬, 자랑, 흠모, 감탄하며.. 찬양하기를 마지 않습니다.
십대, 이십대 청소년들은, 그 셀럽의 대형 사진을, 자기 방에 걸어놓기도 합니다.
초등학생들은, BTS 같은 사람들의 사진이 찍힌 책받침, 필통 등을 자랑합니다.
또 국민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을 찬양합니다.
요즘 시위 문화의 확산으로, 엄청난 정당이나 정치인 찬양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날씨, 음식, 배우, 대학교, 아이들, 꽃, 산, 진귀한 우표, 귀한 종자의 준마,
때로는 정치가와 학자들에 대한 찬양의 소리 등, 세상에는 찬양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으뜸 되게 존귀하신 데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찬양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찬양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쉴새 없이 자기 아이를 자랑하며,
노인들의 ‘손주 자랑’은.. 거의 병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자랑이나 찬양은.. 우리 삶 속에 일상화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유독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만은
그렇게 찬양하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평소에, 즐거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아직 우리의 신앙이 어리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신앙성숙을 꾀하고,
내 신앙 수준이 더 높은 경지로, 단 계단 더 성숙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 첫 걸음을, 찬양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핸드폰에 저장 기능이 있습니다.
다른 거 많이 저장하지 말고,
유튜브에 있는 수많은 찬양곡들 중에,
자기가 따라부르기 좋아하고, 자기가 종종 흥얼거리는 찬송들을
따로 모아서, 선별해서, 언제든지 꺼내 부를 수 있도록.. 저장해 두는 것입니다.
만약 그게 안 되어 있으면, 찬양에는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