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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성령의 법 롬8:1~9 2005.05.15.
▲지난 2005년 4월 28일 저와 몇 신학교 교수님들과 목사님들이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습니다.
그것은 중국 당국이 지금 (2005) 종교문제로 많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사이비종교 이단들이 점점 만연해 가고있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너무너무 고심하던 나머지, 당국에서 연구원을 만들기도 하고,
연구실을 만들고, 또 이것 때문에 특별한 조처를 할려고 애를 쓰는중에
저희에게 요청을 해서 ‘건너와서 종교문제를 좀 같이 세미나를 했으면 좋겠다.’
그 주제는 뭐냐하면 다시말하면 ‘종교란 뭐냐?’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어떻게하면 이단과 사이비와 참 종교를 구분할 수 있을까?’
이걸 분리 생각해야 하는데, 이분들이 분리할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이단사이비종교와 참된 종교를 구분하는...
그러기위해서는 ‘참 종교가 뭐냐?’ 하는 것도 알아야 할것입니다.
자 이런문제로 같이 진지하게 사흘동안 토론을 하고 세미나를 했는데
이걸 총주도하는 책임자되는 분이 이름이 특별해요. 당회장입니다. 당씨거든요.
당위장인데 처음엔 이상했어요. 아무튼 당위장이란 분인데
그분이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한국에 와봤어요.
미리... 한국에 와서 다 돌아보았거든요. 그중에 예수소망교회에 왔었어요.
그랬는데 이분이 자기 왔던 경험을 여러사람들 앞에서 저를 소개하는 중에
아주 진지하게 말씀을 하는거예요. 아주 참 시쳇말로 감동먹었어요.
왜냐하면 이분이 생전 처음, 일생 처음 교회라는 곳을 온거예요.
물론 동시통역을 하지마는, 통역이 뭐 그렇게 완전한건 아니죠.
어쨌든 그분 얘기는 들어와서 본인 얘기가 그래요.
‘기분이 시원해지고요 아주 신비로운 느낌과 정신이 맑아지고 하는,
그런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경험했대요.’
예배를 마친다음에 특별한 일이 이루어졌어요. 본인으로서는 심각한거예요.
그게뭐냐하면 50년간 피워오던 담배를 끊었어요. 담배 냄새가 싹 싫어지는거예요.
그 순간부터... 그래서 자기가 이걸 끊을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못 끊었는데,
하루에 세갑씩 피웠대요. ‘아 이 담배를 깨끗이 끊었다고...’
아 그리고 고맙다고, 악수하자고... 너무너무 감격해 하는 거예요.
아 그 신비로운 거라고... 담배가 싹 싫어지는데...
다시는 담배를 안 피우게 되었다 하는 얘깁니다.
▲오늘 성령강림절 설교는 이것으로 다 끝났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얘기가 더 어디 있습니까?
이게 교회예요 이것이 성령의 역사예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이게 성령의 역사예요.
너무 따지려고 들지말고, 너무 분석하려고 하지 마세요.
분석이나 비판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납득했다고 해서, 또 그 납득이 전부가 아니에요.
그거 아무것도 아네요. 자 여러분 보세요. 알면 뭘해요? 실천할 수있어요?
결심하면 뭘해요? 사흘도 못가는 거...
결국은 우리 마음을, 성령이 포로로 잡ㅇ해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이 역사가 신비로운 것이예요. 그것이 성령의 역사예요.
▲카나다 빅토리아 대학교수인 K. R. Bradley 라는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의 저서는 너무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Slave and Master in Roman Empire 로마제국의 노예와 주인> 이라는 책입니다.
옛날 로마제국은 인구의 1/3이 노예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로마에 가면, 그 많은 옛날 그 건물들,
2000년전에 있었던 굉장한 것들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역사적인 유물을 보는데, 그러나 한편 생각을 돌려보세요. 노예 문화입니다.
전부 노예가 만든겁니다. 엄격히 말하면 자유민이 만든게 아닙니다. 노예가 만든 겁니다.
저거 만드느랴고 얼마나 많은 노예가 죽어갔는지 모릅니다. 그 숫자를 셀수가 없습니다.
이게 종래의 문화입니다. 종래의 역사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노예가 뭐냐?’ 이거죠.
당시에 노예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요? 동물취급 받았으니까요.
노예에게 말을 못하게 했습니다. 왜? 귀찮으니까...
듣기만 하고 말을 못합니다. 말을 안 하다보니.. 못하게 되고, 벙어리가 되어버렸어요.
그냥 무무무무 이러는 거예요. 그렇게 됐어요. 철저하게 동물화 했어요.
물론 방에서 자는게 아네요. 외양간에서 자고 신발이 없어요. 이게 인간입니까?
이렇게 해서 뭐 그 긴 얘기할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당시엔 노예란 사람이 아네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도 말했어요.
‘노예와 당나귀의 공통점이 있다. 둘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구요.
‘당나귀와 노예와 차이가 하나 있어요. 그것은 당나귀는 말을 못 알아듣고,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노예는 완전히 동물취급, 가축취급을 받으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나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그는 본래 노예냐?’
물론 노예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노예예요. 노예 집안에서 노예로 태어난 노예가 있지만,
이보다 심각한 것은, 전쟁에 패할 때 포로가 되면.. 노예가 되는거예요.
또는 여기저기서 전쟁을 하고, 사람을 잡아와서 노예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백성들에게 노예를 배급을 줬어요. 이게 노예예요.
그 외에, 때로는 돈을 갚지 못할 때, 빚 대신에 자식이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본래적인 노예도 있지만,
자유인이던 사람이 노예가 된거죠.
▲옛날에 드라마가 한번 오랫동안 있었죠? 쿤타킨테...
이름이 이상해서 기억이 나는데, 쿤타킨데라는 것이 뭡니까?
그 사람은 노예가 아네요. 아프리카 자기 나라에서는 귀족이예요.
그런데 붙들려와서 졸지에 하루 아침에 노예가 됐어요. 그 자존심이 오죽 상하겠습니까?
이게 꺾여지면서 노예화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 그 드라마의 총주제였습니다.
여러 분 이 멀쩡한 사람이 노예가 된다? 자 어떨 것 같습니까?
쇠사슬에 묶어서, 쇠사슬을 달고 다녀요.
그리고 잘못하면 채찍을 내리치면서, 체형을 당하면서,
그렇게 차차 노예 신분에 익숙해 갑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길들면, 이제 쇠사슬을 풀어놓습니다.
또 좀더 길들면 어떤때는 내버려둬도 자동적으로 노예가 됩니다.
저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언젠가 한번 산책을 하면서
저녁 노을에 골프장 근처에 갔는데, 머리가 하얗게 쉰 할아버지가 캐디를 해서,
골프채를 매고 지금 한 20살 쯤 되어보이는 아가씨를 뒤따라다니며
그 무거운 골프채를 메고 ‘예스 맴, 예스 맴’ 하고 따라다니는걸 보았어요.
너무 신기해서 교수님들에게 물어봤어요. ‘저게 뭔 소리냐고..?’
‘노예 해방된 지가 100년이 됐는 데도, 자자손손 그 사람들은
자기가 노예인줄 생각하고, 지금도 그 집에서 충성을 다한다고요...
노예로 살아가는거예요. 노예처럼 살아가는 거예요.’
(서구에는 ‘하녀 문화’가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녀’되기를 원하는 면도 있어요.
과거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전통적인 하녀 문화는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현대 유럽에는 '가사도우미 Cleaners/Housekeepers'나
'개인 비서 Personal Assistants'의 형태로 그 명맥이 실용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녀 Maid 라는 말은 안 쓰지만, 아직도 복장 등은 그대로 내려오고 있죠)
사람대접을 해 줘도, 자기는 노예가 더 좋대요. 그렇게 사는 거예요.
철저하게 노예화된 인간... 생각해보세요. 길들여진 노예...
(그런데 그 큰 저택에서, 자기는 아무런 경제적 부담 없이
월급 받고 사는 것이 좋아서... 그게 좋다는 사람들도 있는 거죠)
◑자 오늘날에는, 노예제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보이지 않게 노예제도가 있습니다. 스스로 노예로 묶이는 것입니다.
자 잘못된 <문화의 노예>가 됐죠.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됐죠.
잘못된 <습관의 노예>가 되었어요.
이렇게 철저하게 노예가 되고 보면,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도 몰라요. 불편함도 없어요.
이 사람이 비참한 거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비참한거 아니겠습니까?
좀 미안한 얘기지만, 요새와서는 아내한테 잘 길들여진 남자들이 있더만요.
참 내 생각 같아선... 부끄러워 할 것도 같은데... 아 부끄러움도 몰라요.
당연히 그러해야될 것처럼 시중드는 것 보면... 참 이게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됐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주 잘 길들여졌어요. 아주... 이거 어쩌다 이렇게 됩니까?
그러면 자기도 불편함을 모릅니다. <가정의 노예>입니다.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의 <폴리테이아 (국가)>라는 책에서, 그는 삶의 형식을 말합니다.
1) 사람은 첫째 욕망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
쾌락과 욕망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런 인간
2) 둘째는 이익적 삶, 이익 지향적 삶이예요. 뭐 많이 가지는거...
집도 가지고 땅도 가지고 뭐 가지는거 그게 소원이예요.
뭐든지 많이 가질려고 몸부림치면서 그렇게 한평생 사는 그런사람...
3) 또 정치적인 삶이 있다고 합니다.
뭐 명예와 정치와 권력 거기에 노예가 되서 정신을 못차리는 사람도 있고
4) 네 번째 인간다운 사람 하나가 있다.
그것은 관조적인 삶이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 질적인 생을 추구하고 지혜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
그리고 그의 정신이 자유한사람 좌우간 물리적이건 물질적이건 환경이야 어쨌든간에
그 정신이 아주 자유한 가운데 마치 세상을 이렇게 내려다보면서
관조하며 명상하며 자유를 즐길 수 있는 사람... 이 사람만이 진정한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느 수준에 있습니까? 노예상태에 있지는 않습니까?
‘분노의 노예, 미움과 원망의 노예, 두려움의 노예, 의심의 노예...’
▲오늘 본문에서는 이 노예상태를 고발합니다.
죄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전권적 역사가 아니면 누구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의 속박에서...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입니다. 죄를 또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말한사람마다 또 거짓말합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좋지 않은 얘깁니다마는, 오래전에 제가 어느 때 형무소에 가서 전도를 한일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한테 세례받은 사람이 나왔어요.
출소해서 제게 찾아와서 얘길하는데, 자기 소개로 그래요. 자기가 7범이래요. 전과7범...
그래 내가 ‘아니 감옥이라는 데는 한 번만 가면 되지, 뭐하러 일곱 번씩이나 갔나?’
그렇게 물어봤더니요.
본인이 그래요. ‘다시는 죄 안짓겠다’ 생각을 했대요.
아 그리고 전철을 탔는데, 이렇게 보니까 남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돈이 다 보인대요.
저 핸드백에 들어있는거, 저 주머니에 들어있는 게 환하게 보인대요.
그걸 안 봐야 하는데, 그걸 이렇게 쳐다보다 보면, 어느 사이에 자기 손이 쓱 나간대요.
자기도 그래서는 안 될줄 압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또 그래서 7범이 됐다는거예요.
자기도모르게... 이게 문제라니까요.
내가 나를 제재할 수가 없어요. ‘죄를 짓는자마다 죄의 종이다. 죄의 노예다. 자유가 없다.’
그런고로 이 자유는 하나님의 주셔야 됩니다.
성령의 역사로, 성령에 의한 해방으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성령충만의 법으로요!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 첫절에 있지 않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정죄함이 없느니라.’ 롬8:1
하나님이 풀어주고 하나님이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하실 때에, 우리는 의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유인으로... 다시 시작을 하게 됩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8:2
▲자 그러면 문제가 있습니다. 이 귀중한 사실을 믿음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죄가 뭐냐하면, 용서를 믿지 않는거예요.
용서했다는데, 자기는 안 믿는 거예요.
용서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보배로운 마음이예요.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데,
그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권을 믿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믿고, 십자가 안에서 내 모든 죄를 사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수용하는, 받아들이는 마음...
그게 믿어지는 마음...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의 법이 너희를 자유케했다’ 그랬습니다. 8:2
질서의 두가지... 율법적인 질서와 성령의 질서,
‘율법이라는 법’과, ‘성령의 법, 자유의 법’이 있다.
노예의 법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의 법이 있어요.
두 법을 말합니다.
롬8:16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다.
여기에 성령받은 사람의 새로운 세계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걸 잊지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두 가지 걱정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 그건 안됩니다.
우리는 천국 갈 사람들이니까 그 걱정하면 안되죠.
두 번째 그것은 바로 내가 저주받을까 하는 걱정,
이 죄에 대한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까 하는 이런 저주의식, 형벌의식은 절대 안 됩니다.
왜요? 하나님의 자녀니까... 우리는 노예가 아녜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미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고난을 당해도, 이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시련이예요.
성숙으로 인도하고, 뭔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은사라는걸
잊지말아야 되요.
▲자 보세요. 내가 자녀라고 한다면
아버지가 무슨 말을하던, 어머니가 무슨 잔소리를 하던, 이건 다 나를 위한 거예요.
내가 괴로우라고 하는 거 아네요. 내가 고통 당하라고 주는게 아네요.
전부가 다 나를 위해서 주시는 거예요.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우리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성령이 계속 계속 내 속에서 확증해 주시는거예요. 8:16
내가 어떤 때 병들어도 성령은 말씀합니다. ‘이건 하나님의 사랑이요.’
내가 실패해도 성령은 말씀합니다. ‘이건 내가 너를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비상조치다.’ 여러분 이걸 잊지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하십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의 부인이 있었는데, 어떤 때 기자들이 부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부인께서는 아인슈타인 박사의 물리학 이론을 아십니까?’
그러니까 그 부인은 화닥닥 놀라면서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합니까?
다만, 딱 한가지 아는 거는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내 남편이라는거... 이것만 알면 됩니다.
그 이상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나 멋진 대답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요것만 알면 됩니다.
‘그 분은 나를 사랑하신다!’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세요. 머리만 복잡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는 하나님의 딸입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성령이 계속 증거해 주십니다.
그 속에서,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성령이 우리의 생활을 거룩하게 이끌어주십니다.
오늘 8:9절에서 보니까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우리와 함께계셔서, 신비롭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의 길을 가도록 인도해주십니다. 놀라운겁니다. 신비롭게 변합니다.
입맛도 변합니다. 취미도 변합니다. 생각도 변합니다. 의지도 달라집니다.
이 변화를 느끼면 간증하며 즐기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예요.
때로 우리는 스스로 결심한다고 합니다만 그건 아네요.
하나님의 성령이, 나의 내면을 점점 더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가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어떤 목사님들 축도하시는데, 그 내용중에 제가 좋아안하는게 있어요.
그건 왜냐하면 아마 제가 조직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까다롭게 따지는거 같습니다마는
그러나 축복하면서 ‘예수믿는 사람으로 바르게 살기로 결단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있기를...’
결단이 은혜입니까? 결단은 내 마음이예요. 결단은 신앙이 아네요.
뭐 결단, 결심... 여러분 지금까지 했는데 뭐 되는게 있어요? 아니올시다.
이건 꼭 잊지말아야 합니다.
신비롭게 내 결심과도 관계없이,
내 생각과 의지와 감성이 돌아가면서 성령에 이끌리어 삽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 성령안에서 희생하며 오히려 기뻐하며 삽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것을 우선으로 하면서, 자기 의지적 결단이 필요한 것이지,
아예 의지적 결단이 필요없다는 뜻은 아님.
다만 자기 의지적 결단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
▲또한 마지막으로는 성령은 증거하게 해주십니다.
성령에 고용되어, 성령에 붙들리어,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게 은사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동물은 육체의 욕망에 이끌리어 삽니다.
인간은 지성과 자기가 세운 문화에 끌려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이끌리어 삽니다.
성령이 감동해 주는대로, 성령이 깨닫게해 주시는대로, 성령에 이끌리어 살 때
성령에 완전히 붙들려 살 때, 거기에 온전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온전한 자유... 그리스도안에 성령안에 그 놀라운 은사속에
내 삶의 가치와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성령의 충만함이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