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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다 깬 청년 행20:7-12 2005.08.28.
▲졸다가 기차를 놓쳤습니다.
제가 재작년 겨울, 클라겐푸르트 교회에 예배드리러 갔다가,
거기서 곧바로 독일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직접 가는 차편이 없었기 때문에 기차를 몇 번 갈아타야만 했는데,
두 번째 갈아타는 역에 도착하니까, 다음 기차는 한 시간 반 후에나 있었습니다.
시간은 자정을 훨씬 넘고 있었지만, 기차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잠을 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중의 하나가,
졸다가 일을 그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게 있어서, 졸다가 차를 놓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역은 조그만 시골 역이었는데, 저 밖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책을 읽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해서, 밴취에 앉아 잠깐 눈을 감고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눈을 떠서 시계를 봤더니,
그 사이에 제가 깜빡 졸았는지 기차 시간이 2분이 지나버렸더라고요.
너무 놀래서 후다닥 뛰어나가 보니까, 이미 기차는 떠나고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참 황당했습니다.
평소에 제가 그렇게 이해할 수 없었고 경멸하기까지 했던
그 일을 제 스스로 저지른 겁니다.
그래서 그 이름 모를 역에서 6시간이나 기다려서, 다음 기차를 타고 간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일을 당하고 참 많이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크게 배운 게 있습니다. 뭐냐 하면,
"그런 일은 나한테는 있을 수 없어. 그건 다른 사람에게나 일어 날 수 있는 일이야"
그렇게 장담할 일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는 거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한 청년의 졸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입니다.
유명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 번쯤은 다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울러 이 말씀의 결론이 '생리적인 졸음 뿐 아니라 영적인 졸음을 더 경계하라'라는
쪽으로 흐르리라는 것도 짐작하실 겁니다.
하지만 때때로 말씀 가운데는 중간 중간의 이야기가 결론만큼 중요한 것도 있습니다.
오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바라기는 오늘만큼은 결과보다도, 과정에 더 귀를 기울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말씀 드린대로 이 일은 우리 모두에게도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 중에, ‘원인이 됐던 일들을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도 은혜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설교를 들으시면서, 뭐가 가장 큰 관심거리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뭐니뭐니해도 설교의 길이에 대해서 참 관심이 많을 것입니다.
전에 제가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은
우리 교단에서는 알아 주는 설교가셨습니다.
단순 명료하면서도, 깊이가 있어서 거의 모든 목사님들로부터 출중한 설교가라고 인정을
받았던 목사님이셨는데, 그 분은 에누리없이 딱20분을 하셨습니다.
좀 길다 하더라도 25분을 넘기지 않았던 그런 분이었습니다.
한 번은 주일예배에, 교단 총무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시게 됐는데,
내용은 지금 생각이 잘 안 나지만, 아무튼 길이는 꽤 길었습니다.
제가 그 때 2층에서 예배를 드렸었는데,
25분이 지나가니까 회중들이 조금씩 자세들이 흐트러지고,
30분이 넘어가니까 움직임이 제 눈에 감지될 만큼 커지고,
45분이 지나가니까 회중 전체가 술렁이면서, 얼굴에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가자... 교인들 모두 화가 난 표정들이었습니다.
설교는 1시간 25분만에 끝나고, 예배가 마쳐졌는데,
그 날 예배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성가대에서 두세 건의 말다툼이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들 사이에서도 역시 그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식당에서 배식하는 분들은 별 것 아닌 일에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차장에서도 평소에는 없던 경적 소리가, 꽤 여러 번 울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여간 그 날은 교회 전체가 신경과민 증세에 걸린 것 같았습니다.
설교자는 준비한 말씀을 해야 합니다.
중간에 말씀을 잊었거나, 준비한 말씀이 다 되면, 설교단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간혹, 설교 중에는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혀 계속되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 설교가 그런 말씀이냐, 아니냐?'는 설교자와 청중이 다같이 알게 됩니다.
▲성경에는 짧지만, 너무나 완벽하고 충격적이고 핵심을 찌르는 설교가 있습니다.
바로 행2:14-40절에 있는 베드로의 첫 설교가 그런 말씀인데,
기껏 해봐야 5분을 넘지 않습니다. *원래는 길었는데, 사도행전에 요약해서 기록했겠지요.
그런데 그 날 그 말씀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은 제자의 수가
3천 명이나 됐다고 했습니다.
그 짧은 설교 가운데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과
구약 전체를 아우르는 말씀들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가히 설교의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본문에 사도 바울이 한 설교는, 성경 중에서 매우 긴 설교였습니다.
7, 9, 11절 말씀을 각각 읽어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을 보면, '바울이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그랬고,
9절엔,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그랬고,
11절을 보면 '떡을 떼어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대충 따져봐도 이 설교는 최소한 6~10시간 정도 길이의 설교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 얘기의 주인공인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다 떨어진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본문의 바울은 어떤 설교였습니까?
보통 설교가 아니라, 여러 정황상 드로아에서의 고별 설교였습니다.
언제 다시 이 드로아에 다시 올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사도 바울의 이번 전도여행은, 마지막 3차 전도여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행20장은, 바울이 교인들과 서로 목을 껴안고 우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전하는 사도 바울이나 듣는 드로아 교인들이나 다같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등불을 환하게 켜 놓고 거의 초저녁부터 새벽녘까지 설교를 계속했던 겁니다.
아마도 은혜가 넘치고, 영혼의 갈증을 없애줬던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이 이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있었습니다.
청년 유두고였습니다.
물론 그는 졸다 떨어져서 죽었지만 사도 바울의 기도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아마도 이 일로, 그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예배를 드리면서 조는 일은 다시는 없었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여러분에게 감사할 일이 있는데,
어느 교회든 말씀 시간에 조는 교인들이 하나 둘씩은 꼭 있는데,
지난 5년 동안 여러분 중에 그렇게 조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저는 청년 유두고의 낙상(落傷)을 보면서, 여러분들과 두 가지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우리교회는, 교인 연령대가, 거의가 이 유두고 같은 청년들입니다. *유학생들
또 나이는 좀 들었어도, 모두가 청년같은 마음을 가지고 젊게 사시는 분들만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졸음과 낙상과 죽음을 이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첫째로, 유두고는 창문에 걸터앉았다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당시의 예배는 주로 가정의 다락방에서 모였는데,
다락방이란, 1층 주거 공간 위에 다락을 만들어서 여러 용도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유두고가 있었던 윗다락(:8)은, 다락방 위의 또 다른 다락방이었습니다.
그리 넓지는 않지만, 또 하나의 작은 공간으로, 3층에 해당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의 갑작스런 방문에 임시로 빌린 장소였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사람들은 앉을 자리가 없도록 많이 모였습니다.
유두고가 왜 그렇게 위험한 장소에 앉아 있다가 떨어졌는지는,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어쨌든 그 자리는 앉아서는 안 될 자리였습니다.
유두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그의 이름을 보면서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스트리아도 성을 보면, 그 가문이 어떤 직업 출신인지를 알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슈나이더 (Schuneider)는 재단사이고, 뮐러(Mueller)는 방앗간 집안 입니다.
영국 가수 중에 'Carpenters' 그룹이 있었는데, 그 가문은 목수출신이었던 것 같고
또 스미스(Smith)라는 이름은, 대장장이 가문 출신입니다. 베이커는 빵집이고요.
이런 것처럼 이름을 보면 그가 뭘 했던 사람인지 알 수가 있는데,
당시 이 '유두고'란 이름은 노예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두고는 노예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행운, 운이 좋은' 이란 뜻인데, 이름의 뜻은 좋지만,
당시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노예나 하층민에게 흔히 붙여지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유두고가, 그렇게 귀중한 시간에 졸았던 것도 좀 이해가 갑니다.
당시 노예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짐승처럼 일을 했습니다.
아마 유두고도 그렇게 일을 했겠지요.
그러다가 밤늦게야 시간을 얻어서, 그 자리에 나온 걸 겁니다.
나오긴 했는데, 늦게 왔으니, 자리도 좋은 자리를 얻지 못하고
창문에 걸터앉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나마 그가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지
웬만한 사람같으면 그 위험한 자리에 앉는 것은 엄두도 못냈을 겁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위험한 자리는, 항상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그 자리를 피했어야 합니다.
그가 앉아있던 다락방의 창문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 곳은 바깥 풍경과 집안을 함께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즉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지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곳이라는 겁니다.
설교를 듣다가 지루하면, 밖을 보면서 누가 오고 누가 가나,
날씨는 어떠며, 별은 어느 만큼 떴나 등등 온갖 잡생각을 할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즉 양다리를 걸쳤던 겁니다.
말씀도 듣고, 세상도 봤던 것이지요.
그런 경우 대체로 결과가 어떻던가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유두고의 경우, 세상도 제대로 못보고 말씀도 제대로 못 듣다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사도바울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아마 완전히 죽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신이 자주 찾는 곳과 그의 삶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나아가서 자주 찾는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서, 운명은 결정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여러분이 요즘 가장 많이 찾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교회입니까, 침대 속입니까?
컴퓨터 앞입니까, 피아노 앞입니까?
기도하는 자리입니까, 즐기는 자리입니까?
일터입니까, 쾌락의 장소입니까?
집중하는 곳입니까?양다리 걸치는 곳입니까?
그게 어디든 여러분이 자주 찾는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서
여러분들의 삶은 확연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고 보면 맹자의 어머니는 대단히 지혜로운 어머니였습니다.
좀 희생을 치루더라도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자리로 옮긴다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일이죠.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얼마든지 이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유두고가 아래로 떨어진 것도, 사정을 알고 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자기의 실수로 일어난 일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리를 잘 잡아야 합니다.
위험이 있고 유혹이 있는 자리는 피해야 합니다.
목욕하는 여자가 보이는 다윗의 왕궁 옥상같은 자리나
보디발 아내가 유혹했던 은밀한 실내는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는 당당히 맞설 자리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는 따로 있습니다.
▲3년간의 시베리아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건재하게 살아 돌아온 한 소련사람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 비밀경찰에 잡혀서 수용소에 넘겨졌을 때는, 자기 또래의 남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그 러나 돌아올 때는 자기 혼자만 남아 있었답니다.
모두들 다 갱 속에 파묻혔거나, 그렇지 않으면 괴로운 삶에 지쳐, 모두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뭐였냐?
그것은 그가 일했던 자리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그가 처음 수용소에 갔을 때, 그는 찬송도 부를 수 없었고, 성경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밤낮 없이 이 노동, 저 노동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남들은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자리로 옮겨지게 됐는데,
바로 배설물을 처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은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같은 동료 죄수들은 물론이고, 감시하는 수용소의 군인들까지
얼씬도 안 했다고 합니다.
그 곳에서 일을 하면서, 그는 맘껏 찬양을 부를 수 있었고, 맘껏 말씀을 읽고 기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그 곳이 천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죄수들은 죽어나가도, 그는3년 동안 그 수용소 생활을 버티면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요즘 가장 많이 찾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바라건데 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리에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이 좀 나빠도 그 곳이 하나님을 더 열심히 찾을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자리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양쪽을 다 볼 수 있는 자리는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위험한 자리입니다.
유두고가 앉았던 자리는 시원하고 전망이 좋은 자리였습니다.
또 젊고 용기있는 사람들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만 추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사망의 길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두고가 앉은 자리는 분명히 자만과 우월감의 자리입니다.
나는 똑똑하고 젊기 때문에, 다소 위험이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창틀에 앉았던 거죠.
그러나 그 자리는 분명히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나는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을 착안해 냈고, 다른 사람과는 달리 똑똑하고 잘났다는
교만함이 그를 죽게 한 것입니다.
유명한 시편1:1의 말씀을 다 기억하실 겁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삶의 자리가 죄인의 길이 아니고, 오만한 자리가 아닌 사람이 복 있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복 있는 자리에서 생활하십니까?
허세와 자기과시, 우월감 등등 이런 자리에 빠지면 이내 떨어지고 말 것이고,
교만과 아집과 방종에 떨어지면..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신앙의 자리는 우월감과 자만의 자리가 아닙니다.
얕은꾀를 내는 자리가 아닙니다.
자신에 대하여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그리고 울고 깨닫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삶의 자리를 바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내 믿음의 자리를 점검해 보고 만일 그 자리가 믿음에서 이탈한 자리라면
속히 자리를 바꾸십시오.
늘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늘 주만 바라보는 주바라기의 자리에 있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 번째로 오늘 이 유두고는 졸아서는 안 될 현장에서 졸았습니다.
졸음은 생리적인 현상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자리는 보통 자리가 아닙니다.
이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언제 또 다시 하나님 말씀을 들을지 기약이 없습니다.
정말 절대 절명의 갈급함으로 말씀을 들어야 할 때였습니다.
요즘도 중국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첫 번째로 내거는 요구조건을 반드시
들어줘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뭐냐하면 내용은 상관이 없으니
무조건 길게만 해달라는 거랍니다. *2005년 설교
아마 저같은 사람은 중국 교회에서 설교하려면 굉장히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오늘 이 드로아 교회의 상황은 지금의 중국보다 더 갈급했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요즘 식으로 말하면 철야집회를 한 것입니다.
철야를 하기 위해선 보통 대단한 준비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마음을 단단히 여미고, 말씀에 집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미리 기도를 쌓아야만 합니다.
아마도 드로아 교인들 중에 한 사람도 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 설교자가 누굽니까?
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모두들 그 귀한 말씀을 들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었을 것입니다.
그의 입에서 떨어지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정말 정신없이 받아먹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콩나물 시루와 같습니다.
듣는 대로 새 나가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물은 곧장 다 빠져나가는 것 같지만 콩나물은 자랍니다.
우리가 한 번 말씀을 듣게 되면, 수천 단어, 수백 문장을 듣는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면 성령께서 그 말씀을 우리 기억의 한 켠에 고이 저장
해 놓았다가 그 말씀이 적용되어야 할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는 반드시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마디도 놓치지 말고 다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억 용량은 1000기가 2000기가 정도가 아닙니다.
무한대입니다.
얼마든지 저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절대로 졸아서는 안 될 자리에서 유두고는 졸았던 겁니다.
항상 졸음은 그 후유증을 몰고 옵니다.
▲우리나라의 교통사고의 원인 중에 으뜸은 졸음 운전이라고 합니다.
운전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조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고작 2, 3초입니다.
그러나 그 2, 3초 사이에 모든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언젠가 연극 연출가 선배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극 중에 배우가 잠깐 조는 역할이 있었나본데, 약20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장면에서 배우가 괜히 시간을 끌더랍니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30초 가량 지났는데도, 영 깰 기미가 안 보이더라는 겁니다.
거기서 조금 더 지났더니 청중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청중 한 사람이
그 배우가 침을 흘리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 진짜 조나 봐!"그랬답니다.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킥킥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배우들과 스탭들은 초죽음이 됐다고 합니다.
원래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무대 앞에는 반드시 프롬프터가 있는데,
하필 그 사람도 그 시간에 화장실을 갔었다고 합니다.
급기야 무대 감독이 청중들에게도 들릴 만큼 "야!뭐하는 거야, 일어나!" 그랬대요.
그리고 나서 연극이 계속 이어졌는데, 그 배우는 깨어나서도 한 동안 대사를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날 공연은 어떻게 됐겠습니까?
졸음은 잠깐이지만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유두고는 졸다가 죽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몸이 피곤해서 조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운전할 때라든가 연주할 때 같이 절대로 졸아서는 안될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에도 졸아서는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청년의 때입니다.
다윗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때가20대였습니다.
사무엘도 20대 때, 이미 대선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인류의 대부분의 위인들도, 20대 청년의 때에 큰 일을 이루었습니다.
베토벤 모차르트를 보십시오.
존 칼빈은27세 때 불후의 명저라고 하는 <기독교 강요> 다섯 권을 썼습니다.
대 수학자나 과학자들의 정리는 거의가 20대, 30대 때의 업적입니다.
철학자들 대부분도 청년의 때에 그들 사상의 근간을 이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 청년의 때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졸면 안됩니다.
여러분 청년의 때는 너무나 빨리 지나갑니다.
깨어서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더 열심히 기도해야 삽니다.
더 집중해야 여러분의 미래는 열리고, 더 세밀하게 준비해야
여러분은 밝은30대, 40대, 50대를 누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더 열심히 깨어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애타는 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여러분이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마귀는 여러분을 집어삼키려고 할 것입니다.
요나가 배 밑창에서 깊은 잠에 들었다가 당했던 일을 기억하십시오.
삼손은 여인의 무릎에서 졸다가 망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제자들 역시 졸다가 주님을 떠나는 일이 왔습니다.
영혼의 졸음에서 꾸벅거리지 말고 이 시간 모두 잠에서 깨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유두고라는 청년을 통해서 왜 그가 앉아서는 안 될 자리에 있었는지,
또 왜 졸아서는 안 될 자리에서 졸았는지를 보고 그 결과까지를 살펴봤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성경의 상황은 거의가 현재의 내 상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두고와 같은 청년이고, 위험한 창틀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정말 졸아서는 안 될 자리에서 졸고 있는 사람입니다.
◑3. 다시 살아난 유두고로 인해, 사람들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행20: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그러나 오늘 마지막 말씀에 다시 살아 난 유두고 때문에
사람들이 적쟎이 위로를 받은 것처럼,
여러분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위로를 받고 다시 소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침 이슬같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알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뛰쳐나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법궤를 메고, 가장 먼저 요단 강물을 밟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실제 유두고 때문에 일어난 일은 어떤 거였습니까?
만약에 사도 바울이 다시 살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가 떨어지게 되니까 말씀이 중단됐습니다.
모두에게 심한 걱정을 끼치게 됐습니다.
살아나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고사하고, 선교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오늘 이 짧은 기사를 통해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은 그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것은 모두의 일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지체들과 무엇보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위험한 자리에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자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또한 졸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잠도 깨울 뿐 아니라 영혼의 졸음까지 깨우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는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아리아를 부르고 있고 카덴짜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다 자기 혼자서 해 내야 할 것들입니다
지금의 연주를 제대로 못해내면 여러분의 미래는
여러분들이 흔히 쓰는 말로"말짱 황"입니다.
이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다시 한 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청년의 때 몇 해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어디다가 여러분의 둥지를 틀겠습니까?
이 귀한 청년의 때에 여러분의 자리를 어디에 마련하겠습니까?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났다"는 고라 자손의 시가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84:10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사오니" 시84:10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졸지 말고 새벽기도 나오세요.
위험한 자리에 있지 말고 금요기도회에 나오세요.
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 자신 밖에 없는데도 스스로를 돕지 않습니까?
구해야 주실텐데 구하는 일까지 어떻게 하나님더러 하라고 하십니까?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히려 방해거리가 된 유두고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자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됐고,
다시 구원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다 그런, 졸다가 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분명히 아십시다!
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고, 은혜의 자리와 위험한 자리의 분깃점에 서 있습니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은혜의 자리에 있기로 작정하면, 여러분의 꿈은 활짝 영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있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비젼은 무한대로 커져도 이루질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주신 주님께서 직접 그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축복이 여러분 생애 내내 있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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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 죽은 유두고를 살리고 나서, 바울이 앗소로 걸어간 이유
'우리는 (드로아에서)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드로아에서 앗소로)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행20:13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약 32km나 되는 거리인데
앞서 밤새 철야 강론을 한 바울이(유두고 사건, 행 20:11)
일행을 먼저 보내고 왜 혼자서 육로로 걸어가는 길을 택했을까?
당시 육로를 도보로 간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예상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그 길을 택했을까?
바울이 쇠약하여 배 멀미를 하기에 육로를 택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바울이 철야 강론을 한 것이나, 본서 27장의 항해 장면을 보면
바울이 바다를 기피할 정도로 쇠약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한 물론 지리상으로 해양 항로로 가면
육로보다 길이 멀고 여러 항구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바울이 빠른 길을 택하였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사람들은 힘들게 걷기 보다는 가급적 편한 배편을 선호한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혼자 도보로 걸어갔을까?
이것은 바울의 사역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사역의 모델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해야할 부분이다.
앞서 드로아에서의 유두고 사건을 연상해 보자.(행 20:6~11)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 바울이 얼마나 위대하게 보였겠는가?
9절에, 의사 누가가 유두고가 죽었다고 검시했다.
유두고는 잠시 기절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죽었다.
소문이 꼬리를 물고 내일이면 사람들이 막 몰려올 것인데
바울은 먼저 동역자들을 배를 태워 앗소로 보내고
자신은 거기를 떠나 도보로 앗소까지 32Km를 걸어갔다.
우리는 바울의 사역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기적을 베푸시고 표적을 베푸신 예수님
인기를 끌 때마다 대중을 피해 어디론가사라지신다.
그리고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새벽 미명에 한 적한 곳에 찾아가 기도하셨다.
즉 홀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사역을 감당하고 나면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질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다. 도리어 허탈하고 텅 비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사람의 칭찬과 위로로 채우려고 하지만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사람의 위로로 채워지는 않는 부분이 있다.
예수님도 바울도 바로 하나님의 위로로 채우려고 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사역하고 나면 사람들의 칭찬이나 위로를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하기 전에도 기도해야겠지만, 일 한 후에도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고수와 하수의 차이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
신형엔진 사도바울의 열정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것 같다.
사람의 위로보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를 더 원하는 바울이기에
바울에게는 지칠 줄 모르는 남다른 열정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자리를 분명히 지킨 크리스천 직장인 간증
1990년대 초였습니다. 미국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국내 대기업에 스카우트된 한 엔지니어가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해외에서 공부하고 나서,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에 들어오면 여기저기에서 스카우트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분은 본래 예수님을 안 믿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학 생활을 하다 보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듭니까?
그래서 한인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치도 받고, 한국 사람들도 만날 수 있으니까.. 많은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 이 분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그리고 제자훈련까지 잘 받습니다.
그리고 나서 귀국을 하게 된 거죠.
귀국해서도 직장에서 자신의 신앙을 숨기지 않고요.
사명 가운데 자기의 직무에 최선을 다해서 감당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성공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회사의 임원들을 포함해서 직원들이 총출동했다고 합니다.
고사를 지내면 돼지머리를 앞에서 뒀거든요.
이사로부터 임원들까지, 일반 직원들까지 다 그 앞에 엎드려서
그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그 프로젝트의 성공을 빌었습니다.
드디어 이분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이분이 신앙 양심상, 도저히 돼지 머리 앞에 절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얘기를 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서, 절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현장의 분위기가 어떻게 됐을까요? 예, 싸해졌습니다.
무르익었던 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갑자기 얼어붙었습니다.
가까이 있던 김부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분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얘기합니다.
‘분위기 망치지 말고 빨리 절해, 지금 장난해? 너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절하라고 압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현장에 있던 이사가
불쾌한 심정으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사실로 올라오라고 하는 호출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신앙 때문에 그렇게 했지만, 당장 앞이 깜깜한 거죠.
이사 앞에서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정말 막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이사실로 올라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여니까, 이사가 호통을 쳤습니다.
‘자네 지금 뭐하는 거야? 이 프로젝트가 우리 회사에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잘못되기라도 하면, 망치기로 하면.. 자네가 책임이라도 질 거야?’ 하고 호통을 치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데 순간 이분의 입에서, 자기도 깜짝 놀랄 만한 명 대사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사님, 아무리 중요한 프로젝트라도요, 우리 회사의 운명을
이 돼지 머리한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어요. 그러다가 이사가 막 웃는 거죠.
기가 막히기도 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들었으니까...
근데 생각해보니까 말이 맞는 거죠. ‘그거 말 되네.. 그거 일리가 있네.. 그래 알았어’
‘그럼 자네는, 자네가 믿는 예수한테 기도해!’ 그러면서 뒤돌아서 이사실을 나오는데요.
뒤에서 이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아까 자네 옆에서 옆구리를 쿡쿡 찔렸던 그 김부장 말이야,
어느 교회에 다니는 집사라고 하던데...’
여러분, 회사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 믿는 사람이 그 한 사람뿐이었을까요?
이분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이사실을 나오는데,
그때 문득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
눅12:11~12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