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6 21 / 창세기 강해 (19) / 창6:9-22 / 노아의 방주 Youtube
◈노아의 방주 창6:9~22 2026.06.21. [창세기 19강]
오늘 본문은 유명한 내용입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입니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또 다른 시작이 나오는데,
최초의 조선공이 나옵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배를 만든 목적은 관광을 위한 유람선이 아니었습니다.
고기를 잡기 위한 어선도 아니었습니다. 무역을 위한 상선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단 하나,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가올 심판을 면하고 생명을 구하기 위한 생명선, 구원선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온 땅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구원의 그림이 바로 방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방주를 살펴볼 텐데요.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9절인데요.
창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에 대한 세 가지 소개가 나옵니다.
첫 번째, 의인이었다.
두 번째, 완전한 자였다.
세 번째, 하나님과 동행했다.
‘노아는 의인이었고 완전한 자였다’
그러면 노아는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다는 건가요?
노아는 우리같이 죄인이 아니었다는 건가요?
우리와는 태생부터 다른 완벽한 인간이었단 말인가요? 결코 아니겠죠.
노아도 타락한 아담의 후손입니다. 당연히 죄성이 있고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노아가 의인이고, 완전했던 이유는 8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8절이 먼저고, 그 다음이 9절입니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 은혜의 결과 노아는 의인이고, 완전한 자였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우리도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통해 살펴봤었는데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그 완벽하신 의가,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집니다.
교리적인 용어로는 ‘의의 전가’라고 하는데요.
‘내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옷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의인이라고 여겨주십니다.
‘너는 죄가 없다. 너는 의인이다. 완전한 자다’ 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철저한 은혜의 결과입니다. 오늘
노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노아 역시 장차 오실 메시야, 창3:15절에 약속된 여자의 후손을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노아를 의인이라 칭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의인이 된 것이나, 저와 여러분이 의인이 된 것이나 똑같습니다.
6:9절에 ‘노아’ 대신, OOO 하고 내 이름을 넣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OOO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전가된 의‘의 측면에서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노아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동일합니다.
둘 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확인해 볼게요.
히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의의 상속자', 즉 의인으로 칭함을 받았습니다.
무엇으로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주1)
믿음을 따르는 노아도, 우리와 같이 믿음으로, '의의 상속자', 즉 의인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아들들이 창6:10절에 나옵니다.
셈, 함, 야벳 세 아들도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뒤에 17절에 보면, 노아의 아내와 며느리들도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노아와 가족들 총 8명만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 뭘 준비하게 하셨냐면, 방주를 예비하게 하십니다.
방주가 다 만들어진 후에는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방주로 들어가라'
바꾸어 말하면 ’구원으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방주는 구원의 모형입니다.
구원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하고 선명한 모형이 방주입니다.
방주 안에.. 그 모든 구원의 진리가, 그림 언어로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방주를 알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구원하셨구나'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이 이런 것이구나‘를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방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방주에 다섯 가지 특징이 있는데요.
이 5가지 특징을 통해. 우리가 받은 구원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첫 번째, 방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다시 말해 방주에 대한 아이디어, 또 방주에 대한 설계, 방주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은
노아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이디어였습니다.
물론 배는 노아가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스스로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르쳐 주셔서 만들었습니다.
배의 크기와 재료, 만드는 방법까지 다 알려주셨습니다.
만들기는 노아가 만들었지만, 설계와 구조는 다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made by Noah, designed by God 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노아가 어느 날 하늘을 쳐다보다가
'조만간 큰 비가 오겠구나 내가 살 길을 찾아야겠다’ 하고
스스로 연구해서 배를 만들었습니까? 아니죠.
노아는 홍수가 올 것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당시에 비가 내린 적이 한 번도 없었죠.
심판도 몰랐고,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도 몰랐고,
방주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먼저 알려주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감추어져 있던 것을 하나님의 작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열어서 보여주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길을 잃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처음 가보는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해는 저물어가고 휴대폰도 터지지 않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전혀 모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더 열심히 걷는 것입니까? 더 빨리 뛰는 것입니까?
아니죠.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은 길을 아는 사람의 안내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방향이 틀리면,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열심은 중요하지만, 길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열심히 살면,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행도 쌓고, 수행도 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문제가, 노력 부족이 아니라, 길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우리는, 하나님께 가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디가 생명의 길인지, 어디가 멸망의 길인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알려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구원의 길을 알려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세상의 모든 종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방향이 아래에서 위로 향합니다.
인간이 신을 찾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 길을 찾기 위해 스스로 도를 닦고,
선행을 쌓고, 고행을 하면서, 구원의 사다리를 만들어 하늘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자력 종교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은,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철저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옵니다.
구원의 길은 땅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늘 하나님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또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먼저 길(계시)을 보여주십니다. 심판을 알려주시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노아에게 방주를 알려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방주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고 믿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남들보다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종교심이 뛰어나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방주’를 보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자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방주를 알려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방주가 보여주는 첫 번째 구원의 진리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2. 방주의 두 번째 특성은, 방주는 안전한 처소입니다.
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과거 개역엔 '잣나무'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이 고페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잣나무로 번역을 했는데요. 어떤 곳에서는 참나무라고 번역합니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나무였을 것 같습니다. 주2)
▲중요한 건 그 뒤에 나오는 역청입니다. 고페로 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그 안에 여러 칸을 만든 다음, 방주 안팎으로 역청을 칠하라고 하셨습니다.
역청은 생소할 수 있는데요. 타르입니다.
도로에 까는 아스팔트나 초강력 방수 페인트와 유사한 물질입니다.
이 역청의 기능은 접착 및 방수 기능입니다. 물을 막아줍니다.
나무로 배를 만들면 아무리 정교하게 깎고 조립해도
나무와 나무 사이에 미세한 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 틈을 막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밖에서 물이 새어 들어오겠죠. 그러면 배는 무거워져 가라앉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배 안쪽과 바깥쪽에 역청을 빈틈없이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건물 옥상이나 지하실에 물이 새지 않도록 방수 페인트를 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물이 단 한 방울도 스며들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차단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가 막힌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역청을 ‘코페르’라고 부릅니다.
‘고페르’ 나무와 발음이 비슷하지만, 다른 단어입니다.
이 ‘코페르’(역청)라는 단어는, 카파르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그 뜻은 바로 ‘덮는다, 속죄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출30:10절에 보면 ‘속죄’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죄를 덮다, 죄를 속하다’ 즉 방주에 역청을 칠한다는 것은,
단순히 배에 물이 새지 않게 땜질을 한다는 의미 이상입니다.
석청은, 영적으로, ‘우리 죄를 완벽하게 덮어 버린다’는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죠.
여러분, 방주 밖은 지금 무서운 심판의 홍수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멸망하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자, 그런데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가족들은 어떻습니까?
머리털 하나, 발끝 하나 젖지 않았습니다.
‘역청(덮음)’이 그 끔찍한 죽음의 물을 완벽하게 튕겨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역청이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솔직히 우리의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조각난 나무 판자처럼 연약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늘 죄악의 틈, 실수의 틈, 넘어짐의 틈이 생깁니다.
마귀는 수시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너는 자격이 없다, 너는 가짜다’ 라며
우리를 정죄와 심판의 물속으로 빠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우리 영혼의 틈새마다
우리 삶의 안팎으로 겹겹이 발라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가장 강력한 영적 방수제가 되어서
마귀의 정죄나 율법의 심판이 내 안으로 단 한 방울도 스며들지 못하게
완벽히 막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안에 들어온 우리의 구원은
100%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파도가 쳐서 배가 이리저리 흔들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멀미가 날 만큼 고난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깊은 영적인 침체를 겪을 만한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덮여있는 하는 여러분의 영혼은, 결코 침몰하지 않습니다.
나의 연약함보다 나를 덮고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훨씬 더 크고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단 한 방울의 심판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이 완전하고 안전한 구원 안에 있는 자가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또 이 역청과 함께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칸’입니다.
하나님은 방주 안에 칸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칸을 막아서 여러 개의 작은 방들을 만들게 하십니다.
아마도 수백 개 이상, 어쩌면 천 개 이상이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는 천여 개의 객실이 있는 호텔과 같았습니다.
그러면 왜 칸들을 만들었을까요? 방주 안에 있는 각종 짐승들을 위한 공간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만 아니라, 짐승들도 방주에 태웠습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각 종류마다 암수 한 쌍씩 방주 안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방주가 물에 떠다니며 출렁출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짐승들이 놀라서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압사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이 한쪽으로 쏠리지 못하게, 방을 만들어 보호했습니다.
그런데 ‘칸들’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도 주목해야 합니다. *‘칸’의 복수
히브리어로 ‘키님’이라는 단어인데요.
히브리어로 켄님은 무슨 뜻이냐면, 정확히 번역하면 방이 아니라 ‘둥지’라는 뜻입니다.
방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영어성경에 rooms(방들)이라고 번역했으나, 히브리어의 뜻은 ‘둥지들’입니다. nests
여러분 왜 방이 아니라 ‘둥지’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둥지는 어떠한 곳입니까? 새끼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 방주 안의 칸들은, 단순한 방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안전하게 품고 보호하시는 구원의 둥지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방주 안에서 노아와 가족들은 보호를 받았습니다. 심판의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도요.
예수님 안에 안전함이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여러분, 이 방주가 얼마나 안전한지 아십니까?
바로 밑에 15절에 보면 방주의 크기가 나옵니다.
그 길이는 300규빗, 너비는 50규빗, 높이는 30규빗입니다.
한 규빗이 45CM입니다. 45CM로 계산해 보면,
방주의 길이가 300규빗인데 환산하면 135M입니다. 축구장 1.5배의 길이입니다.
높이 30규빗은 13.5미터인데요. 아파트 4층, 5층 높이입니다.
너비 50규빗은 약 22.5미터입니다. 왕복 6차선 도로의 폭입니다.
굉장히 큰 규모의 배였던 거죠.
비율로 보면 6:1:0.6 입니다.
왜 이 비율까지 얘기하냐면, 이 비율을 가지고 한국에서 실제로 실험을 해 봤습니다.
1993년에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해양연구소에서,
이 방주의 비율대로, 그대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 축소 모형으로,
이 비율 그대로 배를 만들어서 실험을 했습니다.
인공파도를 막 일으켜가지고, 얼마나 배가 잘 버티는지 측정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30미터 파도에도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30미터 이상 되는 파도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큰 파도에도 배가 뒤집히지 않고, 안전하게 떠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노아가 어떻게 이런 배를 설계할 수 있었겠어요?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계시로 만든 거죠. 하나님의 지혜로 설계된 배라는 거죠.
그래서 방주 안에 있는 노아와 가족들은 다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뒤에서 확인하겠는데, 7:1절에 보면 하나님이 방주를 다 만들게 하신 후에
‘이제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다음에 8:18~19절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방주에 들어갔던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이, 다 그대로 보존되어 나옵니다.
심판이 끝날 때까지 하나도 잃어버림 없이 다 보존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한 사람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결코 잃어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10:28~29절 말씀인데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아멘.
제가 개인적으로 너무나도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누구도 주님의 손에서 저와 여러분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한 사람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지적 동의 제외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다고요.
구원을 받았다가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요.’
여러분 그렇다면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받았다, 잃어버렸다 하면’ 너무나 불안하겠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구원은 보존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안전합니다.
결코 잃어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내 영혼 평안해’라는 찬양을 불렀는데요. *413장
이 찬송가의 작사자 호레이쇼 스패포드는 자기 가족들이 대서양 바다에서 조난을 당하여,
모두가 죽음을 맞는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안전함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대서양 증기선 사고로, 네 딸을 한 꺼번에 잃었지만, 그들과 자기 영혼이 구원받고 안전함을
확신하면서 지은 찬송가입니다.
그때 이 찬양을 작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아직도 내 영혼은 평안하다, 내 영혼은 안전하다,
인생의 폭풍은 계속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영혼의 안전함’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방주는 안전한 처소입니다.
◑3. 방주의 세 번째 특징, 방주의 문은 단 하나입니다.
6: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여러분 방주는 상중하 3층으로 된 거대한 배였습니다.
아마도 무거운 코끼리나 하마는 1층에 두고요. 가벼운 새들은 3층에 두었겠죠.
그런데 여러분 그 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문이라는 말입니다. the door
이 큰 배에 들어가는 문은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그림인데요. 보시면 방주 옆으로 문이 하나 나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큰 배에는 사방의 문을 여러 개 내야,
타기도 쉽고 내리기도 쉽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문을 딱 하나만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떤 의미일까요? 구원의 문도 오직 하나라는 뜻입니다.
요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원어로 보면 여기 문 앞에 정관사 더가 붙어 있습니다.
방주에 있던 바로 그 문,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구원의 문은 없습니다.
행4:12절도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주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십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굳이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착하게 살고 수양을 쌓으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타협 없이 선언합니다. '구원의 문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여
열어놓으신 그 문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여러분 노아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노아시대에 가장 중요한 일은
'방주 안에 있는가, 방주 밖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그들에게 심판과 구원이 결정되었습니다.
방주 밖에서 착한 일을 한 사람도 다 죽었습니다.
방주 밖에서 열심히 살았던 사람도 다 죽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방주 밖에 있는가? 방주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곳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장소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읽어보면 바울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이 단어를 계속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살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참된 구원이십니다.
그분만이 절망 속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멸망을 피할 수 있는 오직 단 하나의 '구원의 문'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직 유일한 구원의 문 하나밖에 없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누리기 바랍니다.
◑4. 네 번째 방주의 특징, 방주는 위를 향한 구조입니다.
6: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창을 어디에 내라고 하십니까? 위에 내라고 하십니다.
방주 맨 위에서부터, 한 규빗 되는 곳에 창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보통 우리가 아는 배들은 창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배 옆면 옆 벽에 나 있습니다.
그래야 바깥 풍경도 보고, 방향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달랐습니다. 창이 옆에 없었습니다. 창이 맨 위쪽에 나 있었습니다.
이게 모형인데요. 방주 맨 위에 보시면, 조그맣게 이렇게 창이 이렇게 나 있습니다.
옆이 아니라 위에 나 있습니다. 굉장히 독특한 구조이죠.
원전에 a window 라고 단수를 쓰고 있는데,
성경 창세기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에는 지붕에서 한 규빗(약 50cm) 아래에
방주 전체를 두르는 긴 형태의 채광창(또는 환기구)이 하나만 있었다고 봅니다.
여러 개의 작은 창문이 아니라
방주 전체를 둘러싸는 단 하나의 연속된 창(구멍)으로 해석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만드셨을까요? 만약 창이 옆에 있었다면,
벽에 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노아 가족들은 거대한 파도를 계속 보았을 겁니다.
또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세상을 보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 파도를, 또 홍수에 휩쓸리는 심판의 광경을, 참혹한 광경을
보지 못하게 하십니다. 어디만 보게 하셨냐면, 위만 바라보도록, 하늘만 바라보도록
창을 위에 내셨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옆을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위를 바라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구원받은 자의 시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방향은 옆이 아니라, 위를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관심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성도의 시선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 고정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인간이라는 언어 자체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고요.
우리는 위의 것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입니다.
헬라어로 인간을 뜻하는 '안드로포스(Anthropos)'의 어원적 의미는
아나(ἀνά): '위로'를 뜻하는 전치사
프로소폰(πρόσωπον): '얼굴(face)'을 뜻하는 명사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골3: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시선이 바뀌는 것입니다.
땅이 아니라, 옆이 아니라, 위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 오늘도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부활하신 예수님,
만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다시 오실 예수님 그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을 바라보면 무엇이 보입니까? 염려와 한숨 뿐입니다.
걱정과 불안 고민과 낙심 절망뿐입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에 창문이 옆으로나 있어서,
날마다 세상만 쳐다보고 산다면 땅만 쳐다보고 산다면
우리는 내게 몰아치는 크고 작은 문제의 파도 앞에서, 매일 좌절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거칠고 험한 세상 한복판에서도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요동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참된 평안과 소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저 위의 주님께서, 나를 덮치려는 이 모든 파도를 다스리시고
잠잠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한 주간을 살아갈 텐데요.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시다.
크고 작은 인생의 파도가 밀려올 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시다. 위의 것을 찾읍시다.
그분에게 우리의 시선이 고정될 때, 우리는 가장 충만하고 평안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방주의 창은 위를 향한 구조였습니다.
◑5. 다섯 번째 방주의 특징은, 방주에는 방향키와 돛이 없습니다.
여러분, 일반적인 배에는 반드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키 rudder 입니다.
키는 우리가 야고보서 설교 때 살펴본 적이 있는데요. 배의 방향을 조정하는 장치입니다.
자동차로 치면 스티어링 휠과 같습니다.
운전대 없는 자동차를 탈 수 없듯이, 방향타가 없는 배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돛입니다. 돛은 바람을 받아 배를 움직이게 하는 장치입니다.
자, 그런데 본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하나님은 노아에게 돛이나 방향타를 어떻게 만들라고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방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테바'입니다.
이 테바가 또 한 번 나오는데, 출애굽기에 모세의 어머니가 아기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고,
나일강에 띄우지 않습니까? 그 갈대 '상자'가 히브리어로 테바입니다.
그러니까 테바라는 단어는 '배'라는 뜻이 아니라, 그냥 네모난 '상자'라는 뜻입니다.

이게 방주의 모형인데요. 보통 배들은 유선형 아닙니까?
그러나 방주는 그냥 네모난 상자처럼 생겼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면 노아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방주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방향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속도를 조절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노아라면 얼마나 두렵고 답답했겠습니까?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오면, 선장은 본능적으로 파도를 뚫고 나가기 위해
방향타를 힘껏 꺾어야 합니다. 또 암초가 보이면 돛을 돌려 피해가야 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흔들리며 흔들리는 대로,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가만히 '상자' 안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방주를 만드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하죠.
방주의 방향은 노아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기 때문입니다.
방주는 노아가 운전하는 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배였습니다.
노아의 역할은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도 놀라운 구원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인생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스스로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방주 안으로 믿음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후에도, 여전히 키(방향타)를 잡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합니다. 내 계획대로 가려고 합니다. 내 생각대로 가려고 합니다.
내 인생을 내가 맘대로 조정하려고 합니다. 내가 방향을 결정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타락한 사람은, 내 인생의 운전대를 내가 쥐고 싶어합니다.
내 인생을 내가 통제할 때 가장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를 졌습니다.
5년 뒤 또 10년 뒤의 커리어를 계획하고, 자녀들의 대학과 진로를 세팅하고,
노후 자금이라는 돛을 달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내 인생의 배를 조종해 가려 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내가 키를 조종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키를 맡기는 삶입니다.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의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며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도 수많은 폭풍이 찾아옵니다. 어떤 때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원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던 노아를 기억해 보십시오 노아는 방향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노아는 목적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노아는 언제 홍수가 끝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주관하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방주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라랏산에 도착했습니다.
노아가 잘 조종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길을 알지 못합니다.
내일 일도 알지 못합니다. 10년 후는 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태우신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평화는, 내가 키를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키를 잡고 계시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폴 투르니에가 쓴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요약합니다.
'우리 삶의 방향타를 진심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분께 내 삶의 방향을 의탁하며
내가 혼자서 삶의 방향을 정할 능력이 없음을,
또한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을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방향을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여러분, 참 멋있는 고백 아닙니까?
여러분, 내 손에 쥔 키가 있다면, 내려놓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노아의 방주를 살펴봤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단순한 배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구원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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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노아가 받은 믿음으로 의인으로 인정됨, 이건 '칭의'구원이죠.
그런데 '칭의'가 구원의 여정의 시작이지, 완성은 아니다.. 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구원은 '칭의'로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칭의, 의화 받은 사람은,
그의 삶에 변화, 성화로의 과정, 믿음의 성숙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유교식으로, 억지로 자기 의지로 성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심령의 변화를 받아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과 같은 내면의 질적 변화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성화와 영적 성숙을 추구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성화의 증거가 없으면, 자기가 받은 구원을 재고해 봐야 된다...
이것이 폴 워셔 목사의 주장입니다.
칭의는 받았다는데, 성화의 증거가 없는 크리스천이 너무 많다는 거죠.
주2) 곧고 굵은 나무였다는 거죠. 히브리어 성경에 ‘고페르’로 나오죠.
그래서 영어성경들은, 그대로 음역해서 gopher(고페르) 라고 썼고,
개역개정도 그대로 음역해서 ‘고페르 나무’라고 했습니다.
과거 개역성경은 ‘잣나무’로 번역했었죠. 영어 발음은 ‘고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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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시간에, 구원의 주님을 만납니다.
내가 풍랑 속을 지날 때, 예수님(방주)에 올라타야 되는데..
종종 그 때는, 고난과 고뇌와 환난의 시간에.. 그런 은혜가 임합니다.
복음이.. 정말 나에게, 구원의 복음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 아닌 누구에게는 구원이 발생하는 복음이지만
나에게는 전혀 구원이 발생하지 않고 지나쳐가는 소리일 뿐이지요.
저에게도 20대 중반까지는 복음이 전혀 구원의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술 지상주의적이었던 제 20대 초반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같은 책이 저를 사로잡았고,
도스토예프스키, 괴테, D. H 로렌스 같은 소설가들이
그때그때 새로운 물줄기를 싱싱하게 저에게 대 주었습니다.
사상, 종교 면에서도
저는 (성경보다) 세속의 철학자들의 책을 더 많이 읽었고
노자 류의 책을 더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복음이 정녕 ‘구원의 복음’이 되게 된 것은
고뇌의 젊은 시절 그 중에서도, 절망의 3년을 거치면서입니다.
제가 추구하던 것들이 제 욕심만큼 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완전한 인간을 꿈꾸던 제가 군대 생활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불가능하고 나에게는 어림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저는 군 생활 3년을 절망 상태에서 보내고 제대를 하였습니다.
제대하고도 한 동안 그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그때 복음은 저에게 구원의 복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불이 꺼졌을 때, 하늘의 별이 빛을 내듯
세상에 대한 희망도
나에 대한 희망도 모두 사라졌을 때..
그 어두운 심연에서 하나님의 빛이 복음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세상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이때가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시작되는 때요
나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이때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시작되는 때인 것입니다.
복음의 제자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때가 있습니다.
밤새도록 풍랑과 싸워 기진맥진해 있을 새벽녘,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은 그 새벽녘,
예수님은 꼭 이때 나타나십니다.
왜 더 일찍 나타나시지 않고, 이렇게 새벽녘에야 나타나시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한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을 때,
있는 힘을 다 쏟아 기진맥진, 더 이상 아무 힘도 없을 때,
이때가 갈망의 때요, 영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시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의 하나님의 개입을 체험하고도 3년여가 흘렀지만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을 때
그래서 “내 마음의 어둠을 밝혀주소서.”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을 때
복음을 듣게 됩니다.
이 복음은 이때 처음이 아니라 전에도 많이 듣던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 복음이 구원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의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거룩한 프란치스코는
즉시 하나님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 ”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혹시 겪고 있을지도 모를
그 절망의, 캄캄한 암흑의 시간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광명의 주님을 만날 시간, 야곱의 얍복강의 체험이 곧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감격과 노래
2010년에, 칠레 북부 광산에서 33명이 살아 구조되었던 기적이 있었다.
칠레 광부들, 오랜 날들이 지나고, 마침내 구조되어, 한 사람씩 밖으로 나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구조되는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저는, 과거에 제가 칠레 선교사시절에, 그 지역에 가서 설교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더 남다른 감회를 갖고서, 그 구조장면을 TV를 통해 지켜보았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성경을 들고, 구출되어 올라왔는데, 그가 그 그룹의 영적 지도자였다.
그들이 모두 지상으로 올라왔다. 다 구출되었다.
제가 거기 가 봐서 아는데, 그곳은 모두 사막 지역이다.
보통 사람을 거기에 데려다 놓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황량한 곳이다.
그런데 지하 갱도에 오래 동안 갇혀 있다가,
그들이 올라와서 밟은 그 사막 땅은.. 그들에게 절대로 사막이 아니었다.
소망의 땅이었다.
그들은 그 땅을 밟으면서 ‘야~ 드디어 살았구나!’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그전에 가졌던 불평과 근심은 하나도 없었다.
살아남은 자의 기쁨과 감격이 그들에게 충만했다.
집으로 가서 그들은 잔치하고, 가족들과 얼싸안고 즐거워했다.
여러분, 이것이 '살아남은 자의 감격'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구원의 감격이다. 살아남은 감격이다. 노아의 감격이다.
우리는 사망가운데 구원받은, 보혈의 공로로 살아남은 자이다.
옛날에만 구원을 받은 게 아니라, 지금도/오늘도 계속 구원을 받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구원을 받을 것이다.
모든 상황가운데 우리를 지키시고, 건져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될 줄 믿는다.
노아가 홍수 후에 살아남은 그 감격,
칠레 광부들이 구출된 그 감격,
그 감격보다 더 큰 감격이.. 영벌에서 구출된 나의 구원의 감격이다.
이 감격이 날마다 우리에게, 감사와 감격으로 흘러 넘치게 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