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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9장 바울의 큰 근심

LNCK 2026. 7. 31. 09:1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애국<광복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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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큰 근심                        롬9:1~8                        2007.02.25.

 

고대 그리스에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비유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마치 올림픽 경기장에 나가 있는 것 같다."

 

그 옛날에도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유래되어서 지금도 올림픽을 하는 것입니다.

2,500년 전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1) 경기장에 나가 보면, 온 힘을 다해서 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을 받기도 하고, 못 받기도 합니다.

온 힘과 능력을 다해서 목숨을 걸고 '이제 죽어도 그만이다' 하는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서 뛰는 선수들입니다.

 

2) 또한 올림픽 경기장에는 오로지 관중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며 돈을 벌려고 하는

장사치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경기와는 무관합니다.

그저 관중들을 상대로 얼마의 돈을 벌기 위해서 그렇게 분주하게 떠드는 장사치들입니다.

 

3) 또 하나는 선수들에게 갈채를 보내면서 흥분하며 그 경기 자체를 즐기는 관객들입니다.

 

4) 네 번째, 누가 이기든지, 지든지 별 상관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저 무관심하게

그냥 구경하는 겁니다. 철학자는 "당신은 어느 쪽이요?"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지금 애국심에 빗대어 예를 든 것, 애국심에 대해, 이런 유형들이 있다는 거죠.

 

▲여러분, 생각 없는 동물보다 생각하는 갈대가 좋습니다.

고민 없는 동물보다는 고민하는 인간이 좋습니다.

 

고민한다... 참 괴롭습니다만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이 실존입니다.

어쩌면 그 고민 자체 속에 인간의 의미도, 행복도, 가치도 있는 것입니다.

 

고민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고민, 먼저는 아주 이기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가 잘 되고, 자기가 먹고, 자기만 잘 살고,

그저 자기만을 위주로 하는 자기중심적 고민입니다.

 

2) 그런가 하면 자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떤 희생도 상관치 않는 타인을 위한 고민이 있습니다.

 

3) 내가 사랑하는 그분의 행복과 기쁨만을 위한 고민입니다.

 

4) 또 하나는 과거에 대한 고민입니다.

지난날의 잘못한 것이 마치 전과자의 등에 붙은 라벨처럼 일생을 둔 후회의 고민입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되는데, 그때 내가 참았어야 되는데...

일생을 두고 후회를 하지만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과거인데요.

 

그 과거가 계속 내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그런가하면 미래를 생각하며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래서 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붙들려있는 고민입니다.

 

▲또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보면, 물질의 고민이 있어요.

‘어떻게 하면 더 가질까? 어떻게 하면 더 벌까? 어떻게 하면 이 재산을 지킬 수 있을까?’

 

돈 때문에 울고, 돈 때문에 사는, 물질 때문에 몸과 마음과 정성과 운명까지 다 바쳐버리는

그런 아주 유물론적 인간의 고민입니다.

 

반면 그건 상관이 없고, 언제나 신령한 세계만을 생각하는 고민도 있습니다.

물질은 잃었으나, 지혜를 얻는 것이고,

때로는 건강은 잃었으나, 믿음은 얻은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세계, 신령한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그 좋은 쪽으로 긍정적인 쪽으로 받아들이는 고민입니다.

 

또 하나는 미래와 영원한 생명을 위한 고민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나니까 이게 근심이 됩니다.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이것이 근심이 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사도 바울은 원하는 바가 너무 강해서

이 원하는 소원에 집중하고 몰입하다 보니까 그것이 근심이 됐습니다.

 

◑바울의 민족 사랑

 

바울의 민족애를 드러내는 몇 가지 단어가, 오늘 본문 속에 나옵니다.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1) 첫째, "큰 근심" 롬9:1

큰 근심이 무엇입니까? 너무 커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아주 크고 위대한 근심에 눌려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둘째,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자나 깨나 여행을 하나 무엇을 하나 언제든지 그치지 않습니다.

 

여러분, 혹 기도하실 때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오늘은 이런 이유에서 이런 기도해야겠다고 하다가도,

기도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다른 기도를 하고 있어요.

 

또 기도하다보면, 또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요.

그야말로 꿈에도 소원이라서, 항상 그쪽으로 기도를 합니다.

생각을 해도 밥을 먹어도, 잠을 잘 때도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헤어날 수 없는 그런 강한 소원 그것이 근심입니다.

 

3) 마지막으로 좀 더 강한 표현의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질지라도"입니다. 9:3

대단한 얘기입니다. 정말 놀라운 표현입니다.

 

로마서 8:38절 이하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절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부터 나는 끊을 수 없는 관계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을 수 없다.

그 사랑의 강도를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저, 우리 쉽게 생각합시다.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떨어질지라도' 그 말입니다.

내가 이 때문에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원하는 바라.

그게 뭡니까?

 

내 몸이 희생하고, 마음이 희생하고, 일생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고,

내 영이 지옥으로 떨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다...

그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내 민족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바라.’

그 소원이 얼마나 강력한지 소원을 이렇게 3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

 

롬9:2 (1절에 포함됨)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의 근심, 그 속성은 대단한 것입니다. 민족애가 나타납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입니다. 정치적으로 주권을 빼앗긴 민족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끈질기게 예수님 앞에 묻는 게 있습니다.

"언제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까요?"

 

사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목적이 거기에 있었던 것 같아요.

심지어는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실망을 했다가 부활하신 다음에 또 따라가서 말합니다.

"나라가 임하실 때가 이때입니까?"

 

철저하게 민족의 회복, 주권의 회복, 나라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애타게 온 제자들이 소원했습니다.

 

바울도 이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애국입니까?

 

간디(Mahatma Gandhi)의 ‘망국론’이라는 유명한 이론이 있죠. 아마 많이 들었을 겁니다.

정말 훌륭한 교훈입니다.

 

「원칙 없는 정치, 그게 망하는 거다.

도덕성 없는 상업, 이게 망조다.

노동 없는 부, 이것이 무너지는 거다.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 없는 쾌락,

희생 없는 종교,

이런 것들이 있으면 나라는 망한다.」

 

이렇게 나가면, 어느 민족도 망하는 거라고, 간디는 일찍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정치적 근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정치적인 근심, 간절한 소원을 신앙적으로 승화시킵니다. *주제

 

그래서 나라를 찾고 주권을 찾고 정치적으로 자유를 얻어 독립하려는

조급한 마음을 접어두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에게도 돌아오길 바랍니다.

정치적 회복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복음화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그의 소원입니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애절히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회복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을 그는 소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남북이 언제 통일되나요?" *정치적 통일

그게 바쁜 (급한) 것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원은 ‘언제 북한에도 마음대로 예수 믿을 수 있는 때가 올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런 신령한 신앙적 애국심을 우리가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롬9장으로부터 11장까지 보면,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신학 이론이며 신앙 고백이며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고백입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9장부터 11장까지 쭉 읽어 내려가면 바울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했고,

얼마나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했는지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어느 때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미안한 말이지만, 사도 바울이 아주 불쌍해요.

‘얼마나 그렇게 간절히 소원했으면 이런 식으로까지 말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제가 <로마서 강해>라는 책을 두 번 썼습니다.

그러면서 이 9장, 10장, 11장을 읽고, 또 읽어나가면서

바울의 그 절절한 뜨거운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내 마음에 전이되어

내 마음에서 함께 같은 감정으로 동일하게 느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뜨거운 마음이 내 마음에 전이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고백이 있습니다.

‘종말론적으로, 그리고 먼 역사의 끝에는 반드시 이스라엘의 회복이 있을 것이다.’

그 약속을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소위 구체적 종말론을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때는 전쟁이 있고, 지진이 있고, 재난이 있고, 복음이 전파되고...

 

그러나 흔히 구체적인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징조가 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날,

주님이 댜시 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해 주는 것이 로마서입니다. 바울의 신앙 고백입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성경 이해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생각만 하고, 이렇게 고백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실로 이 큰 근심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이방 사람을 위해서 세움 받은 사람입니다. 그걸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받아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노라." 의 확실한 고백입니다.

 

갈라디아 1장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마을에 가든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아 들어 갑니다.

회당에 찾아 들어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 가더라도 회당만 있으면

거기에 들어가서 안식일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합니다.

 

그렇게 하면 믿고 회개하고 감사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 일부에서는 또 바울을 핍박합니다. 끈질기게 핍박합니다.

다른 마을로, 다른 노선으로 가더라도, 바울을 따라와서 핍박을 합니다.

조직적으로 핍박을 합니다. 계획적으로 핍박을 합니다.

바울을 반유대주의자로 몰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이렇게 집요하게 바울을 핍박했고, 바울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번번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습니다.

 

또 회당에 들어갔어요. 또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체포가 됩니다. 행22장

그리고 이대로 감옥 문을 나갔다가는 맞아 죽거나, 계획적으로 살해될 것을 알고는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을 알고, 애쓰고 애쓰다가 할 수 없이

손을 들고 로마 황제의 법정으로 항소합니다.

 

‘내가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겠노라고’ 그래서 로마로 가는 겁니다.

로마에 감옥에 들어가서도 감옥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가택연금

 

그리고 전 세계를 향하여 신비로운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역사를 이룹니다.

그렇게도 핍박을 받으며 끈질기게 이스라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애국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깊은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애국심, 그것을 선교적 열정으로 바꾸었습니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전도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함으로 그 의미를 승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해석하며 신학적으로 고민하고 나아가서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로부터 핍박을 받으면서도 이스라엘을 사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됨을 자랑합니다. 아니, 이스라엘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애국이란 사랑하는 것이요.

사랑은 자랑하는 것입니다.한국 사람됨을 자랑하는 것,

이 나라의 백성됨을 자랑하는 것 말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적용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한경직 목사님이 100세 가까웠을 때, 살아계실 때에 이야기입니다.

종종 몸이 좋지 않아서 미국에 가서 요양을 하신 일도 있었습니다만

돌아오실 때마다 제가 찾아뵈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그 쪽에 가면 공기도 좋고 여건도 좋은데, 왜 이쪽으로 돌아오셨습니까?"

 

한 목사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무슨 소리야? 죽을 때는 여기서 죽어야지.

내가 미국에서 죽으면 되나?" 농담처럼 말했지만, 의미가 있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그저 좀 몸이 아파서 미국에 있는 딸네 집에 가서 휴양할 수가 있겠지만,

잘 알아서 하세요. 죽을 때는 여기 와서 죽어야 됩니다.

거기서 한국 바라보며 죽어서는 안 됩니다. 그걸 아셔야 되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백성을 사랑하고

이 나라의 백성됨을 자랑하는 것이 애국이에요. 자랑하는 것이 애국입니다.

 

▲애국에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3.1운동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

 

1) 하나는, 일제에 항거해서 싸우는 겁니다.

일본 사람들을 상대로 싸운 전투적인 애국심입니다.

 

2) 또 하나는 잘 안되니까 탄식을 해버려요. 절망하고 타락을 해 버립니다.

바로 그 때에 타락한 그 타락성이 오늘까지 오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한국의 술 문화예요. 도대체 이렇게 술을 마시는 민족은 없어요.

술도 음식인데 적당히 먹어야지. 까짓것 죽어라. 이거 뭡니까?

‘나라를 잃어버렸는데 살아서 뭘 하랴? 이 풍진 세상에...’ 뭐 이러면서 부어라 마셔라.

그 애국심으로 술을 먹었다니까요.

 

애국하는 마음으로 술 먹다가(퍼 마시다가) 지금 망가진 거예요.

자기 딴에는 그게 애국심이었어요.

 

3) 또 하나는 반항을 해서 폭도가 돼버립니다. 이건 아주 문제입니다.

테레사 J. 스튜어트라고 하는 분의 「길은 걸으면서 만들어진다」라고 하는 재미있는 책이

있는데, 그 속에서 ‘현대인은 자신을 볼 수 없는 불행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인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는 불행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욕망 때문에 질투에 매여서 자신을 볼 수가 없고,

자기 기만 때문에 자기를 볼 수가 없고,

그리고 분노 때문에 자신을 못 본다」고 합니다.

 

여러분, 분노하면 자기 자신을 못보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게 돼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나라를 잃었다고 분노했어요. 분노가 지나치니까, 자기 자신이 망가지고 말아요.

아무것도 제대로 직시해서 볼 수가 없게 돼버리고 말아요.

 

4) 애국심 가운데 바른 애국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안창호 선생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부르짖은 것입니다.

 

「애국하느냐? 정직하라,

나라를 사랑하느냐? 부지런하라.

공부하라, 아는 것이 힘이다.

무식해서 나라가 이렇게 됐느니라.

그런고로 이제라도 늦었지만 공부하라. 공부가 애국이다.」

 

이런 운동이 일어났어요.

참으로 아름다운 애국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하고 계몽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선교하고 전도하면서

「선교가 애국이다,

나라를 사랑하면 선교하라,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렇게 승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1919.04.30일자 미국 기독교 연합회에, 동양문제 위원회가 내놓은 보고서가 남아있습니다.

그 보고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교인만이 참혹한 식민지 정책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부류의 한국인이올시다.」

 

3.1운동 만세는 온 민족이 불렀습니다마는, 끝까지 만세를 부른 것은 기독교인이요.

감옥에 들어가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건 다 기독교인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애국은 신앙심이었고, 순국은 순교로 승화됩니다.

이것이 3.1운동의 정신이요.

 

한국 교회가 이만큼 부흥된 것은, 사실 알고 보면, 3.1운동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선교에 있어서 사실 가장 무서운 걸림돌이 민족주의입니다.

교회는 3.1운동 속에서 협소한 민족주의 민족운동의 틀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나라를 사랑하면 예수 믿어야 되고,

예수 믿으면 나라를 사랑하고

애국심과 하나님 사랑이,

순국과 순교가 동의어가 됩니다.

 

 

▲옛 얘기니까 한번 생각해 봐야겠죠.

1905년에 발행된 「찬미가」라고 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 찬송은 근대에 만든 것이고, 그것은 옛날 찬송가예요.

그 찬송가는 1장이 '황제폐하 송가'입니다.

 

황제 폐하를 찬송하는 것이 1장이고, 14장이 '애국가'입니다.

그리고 10장이 '애국송'입니다.

이렇게 석 장이 철저하게 민족주의적인 내용으로 찬송가로 편곡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종종 <찬송가 편집위원회>에 말해서,

‘찬송가 속에 애국가를 넣으라’고 말합니다만, 말해도 잘 안 되네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신앙의 조상들은, 찬송가 속에 애국가가 14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마다, 때마다 이 찬송가를 불렀어요.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래서 이 전통이 내려와서, 오늘날 삼일절이나 광복절 전후로 주일 날이면,

예배를 마칠 때, 애국가를 부르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런 애국가는 세계에 없어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에요.

여러분, 이 애국 운동이 신앙 운동으로 신앙의 열정이 선교열로 승화된 그 역사를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마음에 간직하고

다시 출발하는 역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민족을 특별히 사랑해 주셔서 복음을 전해주시고

복음 안에서 애국하며 복음 안에서 나라를 찾으며

복음 안에서 시련을 이기며 오늘에 이르게 하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어서 속히 이 민족이 복음화되고 저 북한 땅도 복음 안에서 열리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게 하셔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선교열로 승화되어

구체적으로 이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