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유배 생활의 반전 | 예레미야 29:4-7 | 2026.06.28 | Youtube
◈유배 생활의 반전 렘29:4~7 2026.06.28. [예레미야23강]
오늘 설교 본문은 예레미야 29장입니다.
설교의 주제는 “유배 생활의 반전”입니다.
당시 남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바벨론 포로 유배는
결코 최선의 삶의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유배는, 하나님의 징계로서 허용된
최선이 아닌 차선의 삶의 마당이었다면,
이제 그들은 ‘포로된 그 땅 바벨론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이 내용을 적용시켜 말하자면,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인생의 ‘타락’은 결코 최선의 상황은 아닙니다.
인류의 범죄가 초래한, 어쩔 수 없는 차선의 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차선의 ‘타락’이라는 현실을 수용하면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죄인으로서,
그러나 아직도 포기할 수 없는 우리들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런 우리의 정체성을 ‘이중적 정체성’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루터의 표현을 빌면, ‘우리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걸 영어로 말하자면 simultaneously a righteous and a sinner
'성도는 동시에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자, 그럼 ‘의인이면서 죄인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질문입니다.
본래 마르틴 루턴은 종교개혁자의 삶을 살기 이전에, 가톨릭의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수도원의 여러 계율을 성실하게 지키며,
종교적 노력을 통해서, 자기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의를 얻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정기적으로 금식했고, 기도했고, 성경을 연구했고,
또 고해성사를 반복하면서 노력했지만,
자기 마음에 자리 잡은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성경에서 롬1:17절의 말씀을 접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가 의인이라고? 그리스도인이 의인이라고?
근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믿음은 무엇일까?’
루터는 이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다가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 믿음으로서만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
소위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의 개혁적 진리, 복음의 진리를 그는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도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나는,
내 마음속에 죄성을 가지고 있고,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죄의 유혹을 던지고 있는데,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은혜로 예수를 믿고 의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나를 유혹하는 이 세상 앞에서, 죄악의 현실을 바라보며,
나는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내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죄성,
내 안에 여전히 나를 붙들고 있는 부패한 육신의 성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딜레마, 이러한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을,
오늘 예레미야서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얻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유배 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살이의 모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이 세상과 더불어 싸워야 하는데,
‘이 세상의 임금은 사탄 마귀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요한복음 12장과 14장에서,
‘이 세상 신, 이 세상 임금, 사탄 마귀의 지배 아래, 영향 아래에서 너희들은 살고 있다’
이렇게 두 번 말씀하셨죠.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왕의 압제 아래 살게 된 것처럼,
너희는 이 세상 임금의 지배 아래 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는 거예요. 너희들을 돕겠다’는 것입니다.
자, 렘29장 본문을 통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에게,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어떻게 유배자의 삶을 살 것인가를 교훈하고 계십니다.
그 해답은 놀랍게도 “유배 생활의 반전”이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세 가지 중요한 레슨이 있어요.
자, 유다인들이 유배지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요?
오늘 우리에게는 ‘성도가 이 세상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1. 첫째 유배자가 아닌 거주자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렘29:4~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한마디로 말하면 ‘잠깐만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살지 말라’는 거예요.
거기 바벨론에 ‘거주자처럼 거류민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 많이 부르던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가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혹시 생각나십니까? 주1)
옛날 복음성가 노래예요.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이 복음성가는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한 노래예요.
우리가 이 세상이 사실 내 집은 아니죠.
어느 날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궁극적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우리는 정들 수 없는 세상, 정들지 말아야 할 세상,
그러니까 이 세상을 적당히 살아도 괜찮을까요?
어차피 우리는 지나가는 세상이니까!
만약 그렇게 되면.. 이 땅,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도피주의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 오늘의 본문은 유배지에서, 비록 그들이 나그네처럼 산다고 할지라도,
나그네처럼 살아서는 안 되고,
거주자처럼, 혹은 거류민처럼 집을 정식으로 짓고,
텃밭을 만들고,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그 열매를 먹고 살라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이, 우리가 영원히 거할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허용하신 삶의 마당이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진지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 땅에서 영원을 살 것처럼, 이 땅에서도 성실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도
기여하는 삶, 이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이 되도록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중요한 진리입니다.
우리와 세상의 관계, 그리스도인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관계를,
요17장에서 정확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두 가지 극단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 첫째, 요17장,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의 장에서
‘너희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속화된 삶을 살면 안 되겠죠.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니까요.
자 그러면, 성도가 세상의 삶을 적당히 살아도 될까요?
또 그건 아니에요.
2) 왜냐면 이어지는 요17:18절의 말씀을 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지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거예요.
할 일이 있어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미션이 있어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도피주의적으로 이 땅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사명을 가지고, 미션을 가지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과의 관계에서 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서구권에 있는 사람들이 영어로 이렇게 표현해요.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라는 것입니다.
옆에 사람에게 말해보세요.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았어요. 사명이 있기 때문에!
따라서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세상에서도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보다도, 이 세상에서의 삶을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더 진지하게, 날마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크리스찬 영성가들은 ‘일상의 영성’이라고 말을 해왔습니다.
‘일상의 영성’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주일날 예배할 때에만,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주께 하듯, 신실하게 삶을 살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영성은 Everyday spirituality
또는 Spirituality of everyday life 라고 표현합니다.
◑2. 두 번째 레슨은,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하라는 것입니다.
렘29:6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그러니까 너희도 적극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너희 아들도 딸도, 결혼하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위 얻고 며느리 얻고
이렇게 정상적 가정생활을 살라는 것이에요.
사실 이 명령은, 바벨론에 포로로 간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주신 말씀은 아니에요.
언제 이 말씀을 처음 주셨을까요?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류를 창조하시고 처음 주셨던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우리가 이 명령을 가리켜 보통 문화명령 cultural mandate 이라고 말합니다. ↙
창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게 바로 ‘문화 명령’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에 살든,
바벨론에 살든, 이스라엘에 살든, 대한민국에 살든,
우리 모두에게 예외 없이 주어지는 중요한 명령이 ‘문화 명령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이 특심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성경의 명령 중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이 뭘까요?
우리는 서슴지 않고 그것은 ‘전도의 명령’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전도 명령은 가장 중요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통해, 새 언약을 통해, 전도 명령이 주어지기에 앞서서, *지상명령
구약, 옛 언약에 처음부터 하나님이 주신 먼저 주신 명령은 ‘문화 명령이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잘 돌보며, 아들, 딸 낳고 살아가는 삶,
그것도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사명이라는 것이에요. 전도 못지않게!
그러니까 우리에게 맡겨주신 세상을, 가정을 잘 돌보면서,
동시에 우리는 복음전도의 사명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업을 통해, 우리의 학문을 통해, 우리의 경제활동을 통해, 예술활동을 통해,
우리는 이 두 가지 명령, 즉 문화명령과 전도명령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화명령을 실천해야 할 첫 번째 삶의 자리는 바로 우리의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완성으로 태어난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창조의 마지막 여섯째 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그들을 부부로 연합하게 하시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
그래서 가정이 태어났어요. 창조의 절정에서 가정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첫 번째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문화활동이 출발하는 출발점인 것입니다.
따라서 건강한 가정에, 건강한 문화를 기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상적이고 건강한 가정이 형성되는 곳에서,
우리는 건강한 사회를 또한 기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30년 동안은 ‘가정에서 성실하게 사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아버지 요셉,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목수의 삶을 30년 동안 성실하게 사셨습니다.
그 30년 동안 예수님이 꾸준히 인간으로서 성장해간 삶의 궤적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특별히 눅2:40절은, 어린이 예수의 성장 과정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머물러 있더라’
눅2:52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이 성장하실 때 네 가지 영역에서 성장하셨어요.
육체적으로 키가 자라셨어요.
정신적으로 지혜가 계속 발전하셨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받으셨어요.
사회적 영역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영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자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장을 가리켜 ‘전인적 성장을 하셨다 Holistic Growth’,
‘전인적으로 성장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성장해야 옳겠죠.
따라서 세상에 사는 동안, 아니 우리가 바벨론의 포로로 사는 동안에도,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누리고 계신가요?’
자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우리와 세상의 관계 속에서,
성도인 우리가 살아야 할 삶,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3. 세 번째는, ‘유배지의 평화를 만들며 살라’는 것입니다.
렘29: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그런데 바벨론의 평화를 위해서 너희가 포로로 갔지만 ‘바벨론 망해라’ 그렇게 하지 말고,
‘바벨론의 평화를 위해서도 기도하라’
근데 그들이 예루살렘에 살 때도, 주님은 이런 기도 제목을 주셨어요.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라’
시122: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평화를 원하시고,
바벨론의 평화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평화의 하나님이세요.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샬롬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백성들이, 평화를 위해서 일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평화를 위해.. 기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세요.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가득했지만,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셨잖아요.
비록 의인 10명을 찾지 못해서,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아브라함을 통해, 롯의 가족이 구출을 받았잖아요. 구원을 받았어요.
느헤미야가 외국에 포로로 끌려가 출세해서 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조국을 잊지 못합니다.
조국, 예루살렘이 황폐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의 응답으로
마침내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에 총독으로 보내시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게 하시고, 예루살렘을 주의 법도로 다스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예루살렘을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성경에 보면 니느웨는 악한 도시였어요. 죄악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도시에 심판을 작정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을 작정하고도, 요나 라는 선지자를 부르십니다.
요나가 그 도시에 가서 말씀을 전하자, 백성들이 회개해요.
그러자 하나님도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심판하려던 계획 대신에
니느웨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지난 주일에 6.25 전쟁 이야기를 드렸습니다만,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쳐들어 내려왔을 때, 낙동강까지 내려왔어요.
대구와 부산 등, 낙동강 아래만 빼놓고는, 한반도 전체가 적의 수중에 거의 떨어졌어요.
대구 근처(낙동강 방어전선)이 가장 큰 격전지 중 하나였습니다.
그때 부산은 남아있는 마지막 도시였습니다. 부산이 마지막 임시 수도가 되었잖아요.
그때 부산으로,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
그 중에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다 부산으로 피난갔어요. 그리스도인들도 많았어요.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부산에 피난가서, 부산에 유서 깊은 초량교회가 있습니다.
초량교회에 모여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시작합니다.
6월달에 6.25가 났죠.
2달 후인 8월 말에 초량교회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집중적인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때 초량교회 담임 목사님이 한상동 목사님이셨어요.
8월 말일부터, 두 주간 동안 집중적 기도를 선포하십니다.
그때 한상동 담임 목사님은 물론, 전국 여러 곳에서 온 기독교 지도자들,
박형룡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여러 목사님들이 서로 기도회를 돌아가며 인도하세요.
이 기도회가 진행된 동안에, 초량교회 교인들은
정성을 다해서 기도회를 섬기고, 식사를 제공하고,
그때 이 기도회에 부산에 내려온 이승만 대통령도 한번 참석을 하십니다.
그들은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의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합니다.
해방 후 하나 되지 못한 교회 분열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신 차리지 못한 그들의 과오를 회개합니다.
두 주간 동안 열심히 기도했어요. 이 때가 8월 말이예요.
그리고 9월이 되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이 기도회가 아직 계속되고 있었지만,
두 주간의 집중적인 기도회가 끝날 무렵, 놀라운 소식 하나가 들어옵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어요. 09.15.
그 기도회와 무관한 사실일까요? No
▲여러분 금년도 우리 교회가 이제 계속해서 단기 선교를 나가서
어떤 도시를 섬기기도 하고,
또 금년은 우리가 특별히 삼척, 동해에 가서, 그 지역 일대를 섬길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서, 저도 과테말라로 떠납니다.
과테말라에서 선교사님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위로하고,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축제를 베풀고 섬기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과테말라에 재미나는 일이 있었어요.
1970년 이전에 과테말라 한 지역 산 아래에, 알모롱가라는 지역이 있어요.
지금은 많이 변했다고 해요. 제가 이번에 과테말라에 직접 가서 확인해 볼 겁니다.
복음으로 과연 얼마큼 도시가 변했는지...
알모롱가는 원래 2만 명쯤 사는 도시였어요.
그런데 마시몽 이라는 죽음의 신을 섬기던 지역이에요.
이 도시가 그리고 알콜 중독, 마약 중독이 심했고, 가정폭력이 난무했고
그래서 조그만 지역에 감옥을 4개를 만들어도 모자랄 정도로, 감옥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에 마리아노 리스카우체 라는 목사님 한 분이 Mariano Riscajche
도시에 대한 심한 부담감을 느끼고,
몇 사람과 함께 엎드려 그 도시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알모롱가의 변화를 위해, 도시의 변혁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동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도시를 덮고 있던 영적인 어둠이 서서히 물러갑니다. 도시의 평화가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폭력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알코올 중독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그러자 범죄가 없어지고, 감옥이 텅텅 비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4개의 감옥을, 문화센터로 다 변모시켰어요.
주민의 90%가 크리스찬이 되었어요. 복음화가 이루어지고,
황무지 같은 농토에서는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어요.
알모롱가는 일약 평화와 번영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에게, 우리나라에, 우리 마을에, 우리 도시에, 이런 기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너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도시의 평화를 위해, 도시의 깨어남을 위해, 도시의 변화를 위해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아멘! 그분의 놀라운 일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여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도하십시다.
함께 같이 기도할 때 여러분, '우리 가정 이대로 가면 안 된다' 하시는 분은,
여러분 가정을 위해 다시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을 이래서 안 된다' 하시는 분은,
마을을 위해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부담을 느끼시는 분은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먼저 나를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 가정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 마을, 우리 도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 한 번 부르고, 통성으로 같이 기도합니다.
..................................
주1) 영어 가사로는 이랬죠.
This world is not my home, I'm just a-passing through
My treasures are laid up, Somewhere beyond the blue
The angels beckon me From heaven's open door
And I can't feel at home in this world any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