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시리즈12. 하나님은 눈물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2026-06-26) Youtube
◈하나님은 눈물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창45:1~4 2026.06.26. [요셉 시리즈12]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인간관계 속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보통 가족끼리 모이면 맨날 하는 대화가
전부 다 과거 이야기일 때가 굉장히 많이 있어요.
과거에 함께 겪었던 동일한 사건을, 명절때 모일 때마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일 기억나?’ 라고 시작해서, 매번 똑같이 말했던 그 이야기를
마치 처음 말하는 것처럼, 처음 듣는 것처럼, 배꼽 잡고 웃으며 말했던 그런 경험 있지요?
생각해 보면 매년마다 모여서 똑같은 이야기 나누는데, 뭐가 그렇게 재밌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공동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가 하나된 공동체임을 서로 느끼게 되는 것이죠.
며칠 전에, 제가 과거에 함께 사역했던 목사님들을 만났어요.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반나절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까,
작년에 나눴던 똑같은 이야기를 또 나눠었더라고요.
그러니까 몇 년마다 모여가지고,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참 소비적인 대화입니다.
그런데 그 대화를 통하여 ‘우리가 과거의 같은 기억을 함께 공유했구나’
‘그 시간을 함께 통과했구나’ 라는 그 마음과 함께,
우리가 하나된 공동체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과거의 기억은, 과거의 기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억 가운데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긍정적인 기억보다 부정적인 기억은, 우리의 삶을 더욱더 크게 묶습니다.
학대, 배신, 폭력의 경험, 상처, 사고, 아픔의 기억들은.. 한 사람의 인생을 묶어버려요.
그래서 그 사건이 이미 끝난 사건이고, 먼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그 경험이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어서,
마치 지금 내가 그와 같은 상황 속에 있는 것처럼, 현재 벌어진 일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
‘기억’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정성 편향”이라는 것이 있어요.
사람은 긍정적인 기억보다, 부정적인 기억을 더욱더 오래 품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내 인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그때 경험을 지금 생생하게 지금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겁니다.
▲기억의 관점에서 봤을 때, 요셉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요셉이 형들과 누렸던 기억들은, 어떤 기억일까요?
요셉이 형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그 기억은, 어떤 기억일까요?
아마도 요셉은 평범한 가정에서 느꼈던 그와 같은 기억은, 별로 없었을 것만 같습니다.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장난치고 함께 뛰어놀고 곤충을 잡고,
모닥불을 펴놓고 함께 대화 나눴던 그런 기억들이
요셉이 형제들과 요셉 안에 공유된 기억일까요? maybe no
아무리 긍정적으로 말씀을 묵상해봐도, 제가 판단할 땐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요셉은 태어나 보니까 외할아버지 집, 라반의 집이었는데 *요셉의 어린시절
태어나 보니까, 자기 빼놓고 형제 전부가, 어머니가 다 다른 겁니다.
긴장관계 속에서 성장을 했을 거예요.
더군다나 아버지 야곱도, 라반의 집에서 눈치 보면서 종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 형제들의 어린 시절은, 거의 노예나 다름이 없었을 것만 같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하란을 탈출할 때, 외할아버지 라반이 죽이겠다고 쫓아온다고 합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 라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고향 땅을 도착하기 직전에는, 말로만 들었던 무서운 큰아버지 에서가 죽이겠다고
군사를 끌고 온다고 합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한 땅에 도착하였는데 세겜에서 누나 디나가 강간당해요.
이 디나는 요셉 바로 위에 있는 누님이었어요.
그러니까 나이 차이가 가장 나지 않은 디나와, 얼마나 가까웠을까요?
요셉의 형들이 디나의 복수를 하겠다고,
시므온과 레위가 나가서 세겜 사람 전체를 학살해버립니다.
큰형 르우벤이 아버지 첩인 빌하와 동침합니다. 집안 분위기가 정말 말이 아닙니다.
요셉이 어릴 적 형제들과 경험했던 함께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라는 것은,
이런 기억들 뿐이에요. 말하고 싶지 않은 기억, 상처뿐인 기억,
더군다나 요셉이 형들과 어린 시절 경험했던 마지막 기억은 무엇일까요?
자기를 팔아버리려 했던 형들에 대한 모습입니다.
자기 옷을 찢어버리고 구덩이에 던져버린... 그 기억이 마지막 기억이에요.
자기는 구덩이 속에서 ‘여기서 죽는다고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는데,
형들은 그 위에서 ‘죽이자, 아니야 죽이지 말고 팔아버리자, 얼마에 팔아버릴까?’
자기를 팔기 위해서 몸값을 흥정했던 그 기억이, 요셉이 형들을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입니다.
자기가 애걸복걸하며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은 20개(노예의 몸값)를 가지고 눈을 감아버렸던 그 형들의 얼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와 같은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형들과, 애굽의 총리 관저에서 마주쳤을 때,
요셉의 마음은 또한 어떠했을까요?
▲여러분 우리는 지금도 상처받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내 마음에 상처를 준 그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그 순간에는,
우리가 자동적으로 몸을 피하는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좋겠지만, 교회 안에도 서로 상처들을 많이 받으시더라고요.
은혜롭게 교회에 나오시다가도, 저 앞에서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그분을 만나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몸을 돌려 다른 데로 가버립니다.
그분이 2부 예배에 나오시면, 나는 3부 예배로 가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상처를 떠올리기 원치 않기 때문에, 그 대상을 피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복음의 능력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복음은 우리 인생 가운데 벌어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복음 안에서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하게끔 도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과거의 기억을 삭제하는 분이 아니라, 그 기억을 건져내어 구속하세요.
그 기억 속에서 죽음을 향하여 치닫던 모든 생각을 건져올려
이제는 그 기억에도 불구하고 생명으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우리의 모든 과거 경험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죠.
복음 안에서 해석되어진 과거는, 미래로 가는 밑거름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처럼 말을 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아멘
그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그 사람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간에,
어떤 기억 속에 함몰되어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복음 안에서, 예수 안에서,
과거의 경험과 상관없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한국교회가 너무나 사랑하는 송명희 시인은
태어날 때 의사의 실수로 뇌를 다쳐서, 중증 뇌성마비 장애를 안게 되었어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7살까지 누워만 있었어요.
혼자서는 밥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그녀는 의료사고의 피해자였고, 그건 완벽한 저주와도 같았습니다.
그렇게 어느날 자살을 결심했던 16살, 어느날 극적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났어요.
그 예수님 안에서 자기가 새롭게 빚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자신의 일그러진 몸을 바라보며 비관했던 시각이 완전히 바뀌어,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합니다.
몸을 비틀거리며 맨몸으로 펜을 잡고, 한 자 한 자 써내려갈 때,
쓰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하나님을 향한 시들을 쓰기 시작해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많은 시들을 남겼잖아요. 그 가운데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이것이 과거의 기억 아니겠어요?
이와 같은 과거의 기억 속에 살아간다면, 어떻게 미래를 꿈꿀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자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그 다음에 놀라운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공평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공평하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
외모부터 움직임이 다른데, 언어가 다른데, 인생이 다른데,
어떻게 공평하다고 고백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면,
그 고백이 은혜 가운데 흘러나오게 되는 줄 믿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뒤틀린 몸을 가지고, 한국교회의 뒤틀어진 심령을 깨우며,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시대적 사명을 지금도 감당하고 있어요.
그러니 복음은 우리에게 말을 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정체성을 세워나갈 때,
과거에 실패한 기억에서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치유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나가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예수 안에 있는 나의 상처,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와 같은 내용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어요.
요셉이, 끔찍했던 과거의 형제들과 맺었던 그 모든 기억이,
주의 은혜로 완전히 풀리게 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오늘 본문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집니다.
◑은잔의 시험
오늘 본문 창세기 45장은 요셉의 인생 가운데 클라이막스에요.
요셉의 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 창세기 45장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과거의 모든 상처의 기억이 치유되어지고,
새로운 관점으로 우리 인생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꿈꿀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창세기 43장에서 요셉은
드디어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과 만나게 됩니다. 22년 만에 만남이었어요.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빨리 뛰어가서 끌어안고 ‘내가 네 형 요셉이야! 놀랬지? 나 살아있어!’
그 말을 얼마나 전하고 싶었을까요? 요셉은 그 감정을 꾹꾹 누릅니다.
마지막까지 형들이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을 행합니다. ‘은잔 시험’이었어요.
즐겁게 만찬을 누리고 있는 동안에,
형들의 그 자루 속에 다시 한번 돈을 집어넣고, 베냐민의 자루 속에는 은잔을 함께 집어넣죠.
‘마지막 은잔 시험을 통과하는가, 못 하는가?’를 보기 위함이었어요.
요셉을 팔 때 사용했던 은이, 다시 한번 등장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라헬의 첫 번째 아들이었던 요셉을, 은 20개에 팔아버렸는데,
지금 라헬의 또 다른 아들인 베냐민의 자루 속에 은잔이 나온다면,
형들은 과연 이 순간에 베냐민을 지킬 것인가? 예전처럼 동생을 버릴 것인가?
그 시험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들은 지금까지 오는 과정 속에서 완전히 변화되었어요.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1) 첫 번째, 형들은 자신들의 옷을 찢었습니다.
22년 전에는 요셉의 옷을 찢어버리고 알몸으로 그를 팔아버렸는데,
지금 이 순간에 베냐민의 자루 속에 은잔이 나왔는데,
베냐민의 옷을 찢어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옷을 찢었어요.
그들의 모습이 변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그들 모두가 함께 애굽으로 내려옵니다. 베냐민만 보내지 않았어요.
그들의 옷은 전부 다 찢겨져 있습니다.
찢어진 그 모습 그대로 애굽으로 내려오고 있는 거예요.
내려가는 동안에 누구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전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면, 말하기 바빴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전부 다 침묵해요.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들 간에 어떤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느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 세 번째, 이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들은 바라보기 시작해요.
44:16b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유다가 말을 하는데, 이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하기 시작하죠.
유다는 변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이렇게 갑자기 하나님을 언급하고,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있는 죄들을 발견하셨다’ 라고 고백하고 있어요.
그가 말하는 죄라는 것은, 은잔을 훔쳤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22년 전에 동생을 은을 받고 팔았던 그 사건을 떠올리며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그들의 삶 가운데 개입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변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들을 어떻게 다루실까를 주목하고,
그 사건 속으로 그냥 깊숙이 나아가는 거예요.
4) 네 번째, 이들은 형제 하나를, 자신들 전체와 같이 생각했어요.
이것이 요셉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는데, 16절 하반절을 보면,
‘잘못을 저질렀던 베냐민 한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전체가 노예가 되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베냐민 역시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죠.
그런데 ‘우리 전체가 다같이 노예가 되겠습니다.’
여러분 이들은 베냐민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이 열한 형제가 유일하게 한마음이 된 장면이에요.
유일하게 하나 된 장면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하나 될 수가 없는 형제들입니다. 늘 경쟁 속에서 살았어요.
어머니가 달랐습니다. 경쟁을 해야만 그 가정 가운데서,
어느 정도 자기 위치를 보장받을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막내 동생 베냐민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 다섯번째, 유다는 자신이 베냐민의 죄를 대속하겠다고 고백해요.
44: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유다가 정말 놀라운 고백을 요셉에게 하고 있는데,
유다는 22년 전에 요셉을 팔아버리자고 제안했던 사람이었어요.
그런 그가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냐면 ‘베냐민을 버리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베냐민을 위해서 노예가 되겠다’고 자원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아버지가 애틋하게 사랑하는 아이니 제발 풀어주세요’
라고 간청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 등장한 누군가가 누군가의 죄를 대속하겠다고 말한, 첫 번째 장면이 되는 것이죠.
요셉의 마지막 은잔의 시험이 통과되는 현장이었어요.
이미 찢겨진 옷으로 (형들이 자기 옷을 찢었음) 자기 앞에 서 있는 형들을 볼 때부터
요셉의 마음은 들끓어 올랐을 것입니다. ‘형들이 변화되었구나’
◑요셉이 자기가 동생 요셉임을 드러냄
그 다음에 하는 모든 말들을 통해서 요셉은 그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45: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형들의 이처럼 다섯 단계 속에서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요셉은
그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종들은 다 나가’를 외친 다음에
갑자기 형들 앞에서 ‘내가 요셉입니다’ 라고 외치는 거예요.
그 전에 얼마나 놀랐을까요? 요셉이 소리를 질러서!
형들이 아마 간이 떨어졌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2절에 보니까 이렇게 반응합니다.
45: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갑자기 소리칩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말을 합니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마 가발을 벗었을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형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어, 네가 요셉이냐?’ 막 이랬을까요? 아니잖아요.
지금 분위기가 그런 분위기가 아니잖아요.
조금 전까지 누명을 씌워서 죽이려고 했는데,
총리가 갑자기 막 울더니만, 갑자기 자기가 요셉이라고 말을 합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그런데 그 순간에 갑자기, 갑자기 자기가 요셉이라고 말하는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울어버립니다. 엉엉하고 울어버리는 거예요.
그 소리가 애굽 궁까지 들렸다고 말을 합니다. 45:2
요셉이 우는 동안 형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아마 대자로 엎드려서 ‘살려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외치지 않았을까요?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한두 살도 아닌 다 큰 어른이 엉엉하며 울고 있는 거예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애굽 궁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이 울음은 어떤 울음입니까? 22년간 눌러놓았던 그 안의 감정이 폭발하는 눈물이었어요.
과거에 버림받았던 상처의 기억들, 과거에 두려웠던 그 순간들,
구덩이에 떨어졌을 때의 그 두려움들, 애굽으로 팔려갔을 때의 그 수치, 분노, 배신감, 좌절,
미래에 대한 소망이 끊어진 듯한... 내 인생은 끝났다라는 절망감,
그 감정들을 꾹꾹 눌러 살아왔는데,
이 순간에 지금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있는 겁니다.
더군다나 지금 요셉의 모습은 완전히 애굽사람이거든요.
형제들은 그를 요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브낫바네아 애굽의 총리의 이름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요셉은 그 순간에 ‘나는 요셉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엉엉 울고 있어요.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죠. ‘그는 지금 애굽총리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의 내면에는 채색옷을 입고 있던 한 어린아이가 웅크리고 있었구나..’
그 역시 사람입니다. 과거에 받았던 상처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부터, 요셉의 마음 역시 온전한 치유소로 다가갑니다.
이 앞전까지는 이성으로 꾹꾹 눌렀어요.
내가 계획을 세워 형들을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 5단계 전략으로
그들의 죄를 밝히 드러내요.
‘어떻게 하겠다’라는 계획을 갖고 왔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감정이 튀어올라, 자기를 지금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서
요셉의 인생을 “눈물을 중심으로”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셉의 인생 가운데 눈물은 굉장히 중요해요.
얼마만큼 중요하냐면, 요셉의 인생 가운데 꿈 많이 등장하는데,
꿈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것이 눈물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인생은 눈물이 아니면 해석이 되어지지 않아요.
여러분 그런데 눈, 눈물은 무엇입니까?
우리 흔히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군가의 눈을, 우리가 지긋이 오랫동안 바라보기가 참 두려워요.
여러분 그렇게 하실 수 있어요? 집에서 부부끼리는 그렇게 하십니까?
누군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그 사람이 눈을 통하여
내 마음 중심의 생각과 마음을 읽혀버릴 것 같아서...
우린 1분이 뭡니까? 10초도 누군가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해요.
성경도 보면 ‘눈은 몸의 등불이다’ 라고 표현해 놓았습니다.
성경에서 ‘눈이 띄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이 고침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깨달음, 영적으로 밝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눈이 감겼다가 떠지고,
엠마오의 제자들의 눈이 떠지고,
엘리사의 종의 눈이 떠졌을 때,
그냥 눈이 떠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눈은 영적인 깨달음을 상징해요.
그 곳에서 나오는 눈물은, 특별히 성경에서 눈물이 쓰여졌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눈물이 나왔다는 말이 아니라,
영혼의 언어, 가장 진실된 고백이 나왔다는 것에 대한 표현이 눈물이 됩니다.
여러분 그래서요. 뭐든지 정말 진실된 경험에는, 전부 다 눈물이 나와요.
너무 기뻐도 눈물이 나요. 너무 감사해도 눈물이 나요.
너무 열받아도 눈물이 나요. 너무 억울해도 눈물이 나요.
그러니까 ‘눈물이 나왔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이거 진짜다 하품한 거 말고요.
‘눈물이 나왔으면 이건 진짜다’ 라는 상징이 되는 거죠. 주1)
눈과 눈물은 그런 거예요. 가장 나다운 것이 눈입니다.
그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는 것은, 내 안에 가장 진실된 경험을 지금 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눈물을 통하여
우리 안에 우리 눈에 붙어있는 욕망, 거짓, 미움, 상처, 아픔을 닦아내기를 원하세요.
▲또한 주님은 우리 안에 흐르는 그 눈물을 그냥 보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다가와서 닦아주세요.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에서 우리 인생 마지막에 벌어질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했을 때, ‘모든 눈물’은 어떤 눈물입니까?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눈물, 그 아픔의 눈물 쓰린 상처의 기억의 눈물,
단절의 눈물, 외로움의 눈물, ‘그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니...’
‘닦다’라는 이 말은요.
그냥 닦는 것이 아니라 ‘흔적까지 지워버리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주님은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그냥 바라만 보지 않습니다.
닦아주시기 위하여 ‘다가오세요. 그냥 멀리서 닦아줄까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안아주실 거예요. 안아주고, 그 눈물 다 흘릴 때쯤에
자신의 소매로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알고 있다고.. 너 안에 있는 모든 상처, 아픔, 기억, 내가 다 지워주겠다고...’
주님은 그런 분이시죠.
오늘 이 밤에 우리가 그 눈물과, 그 눈물이 닦임을 받는
그런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셉은 지금 그런 경험을 하고 있어요.
형제들을 바라보는 동안에, 그 안에 긴장됐던 모든 마음을 풀어놓고
그 안에 있었던 두려움에 떨었던 ‘어린애’가 튀어나와 지금 엉엉 울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요셉은 지금까지 우리가 45장까지 오면서 몇 번 울었어요.
기억나세요?
요셉이 몇 번 울었는데, 창세기 전체를 볼 때, 요셉은 몇 번 정도 울었을까요?
요셉은 성경에 나와 있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 많이 울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 형들도 울었겠죠.
그런데 성경에는 요셉의 울음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기록해 놓았어요.
제가 한번 세어보니까, 몇 번 울었냐면 일곱 번 웁니다.
여러분이 일단 놀랐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가 나오면 일단 놀라고 시작하셔야 됩니다.
‘우와! 뭔가 있구나’ 성경에 7이라는 숫자는 그냥 숫자가 아니에요.
의도적인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이 담긴 숫자가 7이라는 숫자예요.
그러므로 요셉의 인생을 푸는 키워드는 ‘눈물’에 있어요.
일곱 번의 눈물의 의미를 살펴보면,
‘요셉의 인생에 계획된 삶은 이거였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죠.
그 일곱 번의 눈물을 한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의 일곱번의 눈물
1) 첫 번째 눈물은 <형들이 죄를 깨달았을 때> 그가 울었어요.
창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앞에서 결박하고’
42장에서 처음 울게 되는데, 이때 배경은 어떤 배경이냐면
이 형제들이 요셉이 히브리말을 모르는 줄 알고, 자기끼리 막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과거에 저지르던 죄악을 끄집어내서 말해요.
자신들 안에 벌어진 삶의 문제에 대해서, 죄를 처음 인식하는 순간이었어요.
이때 요셉은 갑자기 그들을 떠나서 울고, 다시 그들에게 다가와 말하기 시작합니다.
2) 두 번째 눈물은 <동생 베냐민을 봤을 때> 웁니다.
창43:30 ‘요셉이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그렇죠.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아우를 처음 봤을 때
가슴에 북받쳐 오르니까, 울 곳을 찾아 운 다음에 다시 나왔어요.
3) 세 번째 눈물은 <은잔 시험을 통과한 이후에>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의 말씀인데요.
45: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그렇죠.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울었던 엄청나게 큰 울음, 그것이 세 번째 울음이고요.
4) 네 번째 눈물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45장에서 두 번 울어요.
45: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처음에는 아우 베냐민의 목을 끌어안고 한 번 울고요.
그 다음에 형제들과 입맞추면서 또 한 번 울게 됩니다.
5) 다섯 번째 눈물은 <드디어 아버지를 보고> 울어요.
46:29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얼마나 눈물이 났을까요? 사랑하는 그 아버지를 만난 겁니다.
22년 만에 만났는데, 그 동안 너무나 많이 늙으셨어요. 달려가서 한동안 끌어안고 웁니다.
6) 여섯 번째 눈물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 죽음 앞에서 울어요.
50: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요셉이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7) 그리고 마지막 눈물은, 그 아버지 장례식 끝자락에서... 형들이 두려워했어요.
형들이 요셉 자기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울어요. 요셉이 가슴 아파서 한 번 더 웁니다.
50: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들은 두려웠어요.
‘이제 요셉이 본색을 드러내서, 우리를 이곳에서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라는 두려움에
휩쌓였어요. 그래서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을까요?
아직도 형들은 그 안에 옛날 과거의 기억에서 온전히 자유하지 못한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의 그 모습 앞에서,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려요.
여기까지 나와있는 7번의 눈물이,
성경 가운데 ‘요셉이 눈물을 흘렸다’ 라고 기록한 내용들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가 나왔다면, 그것은 굉장히 대단한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일곱 가지가 그냥 쓰여진 것이 아니라, 히브리 문학의 굉장히 독특한 기법으로
쓰여졌는데, 그것은 무엇이냐면 ‘교차 대구 구조’라는 것입니다.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고요. 일곱 가지 가운데 정중앙에 있는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서,
맨 첫 번째 눈물과, 맨 마지막 눈물이 짝을 이루고
두 번째 눈물과, 끝에서 두 번째 눈물이 또 짝을 이루어,
점점 가운데로 몰려가는 구조로 기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 문학의 굉장히 독특한 표현 기법이고요.
그 가운데 가장 가운데 있는 부분이 핵심이다 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이렇게 풀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처럼 구성해 놓은 거예요.
A가 첫 번째 눈물이고요.
A'가 일곱 번째 눈물인데, A와 A'가 짝을 이루고,
B와 B'가 짝을 이루고
C와 C'가 짝을 이루어
마침내 정 중앙인 D로 향하는데
D를 핵심으로 두고, 위아래가 겹쳐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와 A'는 어떤 눈물이냐면, 죄와 용서의 눈물이에요.
A: 42장에서 형들은 과거의 죄를 떠올렸을 때, 요셉이 눈물을 흘렸어요.
A': 그리고 50장에서 형들은 다시 자신의 죄를 떠올리면서,
요셉이 우리를 심판할 수 있을 것 같은 죄의식이 올라왔을 때,
요셉이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눈물과 마지막 눈물의 근원은, 무엇 때문에 운 겁니까?
죄 때문에 운 거예요. 주제가 같습니다.
B와 B'는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만남 속에서 벌어지는 눈물이었어요.
B : 살아있는 베냐민을 보았을 때 울었어요.
B' :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날 때 운 겁니다.
그러니까 B의 눈물은 만남의 눈물이고, B'의 눈물은 이별의 눈물이죠.
B의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고, B'의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에요.
C : 요셉이 형들에게 자기 자신을 밝힐 때 드러낸 눈물입니다. ‘제가 요셉입니다’하며 엉엉..
C' : 아버지를 만났을 때 '제가 요셉입니다’ 하며 아버지에게 자기 정체성을 밝혔을 때 엉엉..
그러니까 C와 C'는 자기를 밝힐 때 흘렸던 눈물입니다.
가장 중요한 D의 눈물은 무엇이냐면, 여기서 두 번 울게 돼요.
화해의 눈물이에요.
첫 번째는 베냐민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요.
그 다음에는 형제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니 이 D의 눈물을 중심으로 해서
전후에 있는 각각 세 가지씩의 눈물이
서로 짝을 이루어 정교하게 구성을 해 놓은 겁니다.
의도적으로 이렇게 보라고 성경이 기록해 놓은 거예요. D를 제일 강조하는 거죠.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눈물은 어떤 눈물이라고요?
D에 있는 베냐민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던 것,
형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던 그 화해의 눈물이,
요셉의 눈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지식을 토대로, 요셉의 눈물의 의미를 두 가지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첫 번째, 요셉의 눈물은, 예수님의 눈물의 예표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핵심은, 눈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어요.
여러분 요셉의 이야기 그러면, 우리가 꿈 관련된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꿈의 성취, 하나님의 인도하심... 많이 얘기하는데
실은 그 꿈보다 중요한 것이 눈물이에요.
물론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꿈의 자리에 올랐을 때, 요셉이 펼치는 영향력이 더욱더 중요합니다.
그냥 한 나라의 총리가 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어요?
그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꿈을 이루었을 때, 요셉이 어떤 일을 할 거냐가 더더욱 중요한데,
요셉이 그 꿈의 자리에 올랐을 때 하는 역할은 무엇이냐면... 회복이에요. 화해예요. 용서예요.
하나됨이에요.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요셉이 총리가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이 총리가 되어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죠.
여러분, 요셉의 눈물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요셉이 일곱 번 울었거든요.
그런데 요셉이 울었던 모든 상황은 화해의 눈물이었어요. 치유의 눈물이었고요.
회복의 눈물이었어요. 또한 요셉은요. 고난당할 때 울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일 당할 때 울지 않았어요. 그가 구덩이에 갇힐 때 울지 않았어요.
노예로 팔려갈 때 울지 않았어요. 감옥에 있을 때 울지 않았어요.
배신당할 때 울지 않았어요. 요셉의 눈물 전체는
요셉이 형들과 화해하는 가운데 흘렸던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해요.
그래서 요셉의 눈물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이냐면
화해의 인생, 회복의 인생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상처 때문에 울고, 억울해서 울고, 괴로워서 우는 인생에서 →
회복과 하나됨, 그 치유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인생으로
우리가 살아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요셉의 눈물은 누구를 떠올리게 만드냐면, 예수님의 눈물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요셉의 눈물은 예수님이 흘리실 눈물에 대한 전주곡이 돼요.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거하셨을 때 세 번 우셨습니다. 주2)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기 바로 직전에 눈물을 흘리며 우셨어요.
예수님께서 흘렸던 모든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냐면,
자기를 팔 자를 향하여 팔림 받을 자가 흘리는 눈물이었어요.
그 눈물은 또 누구의 눈물입니까? 요셉의 눈물이에요.
요셉이 흘렸던 모든 눈물은 어떤 눈물이죠?
팔림을 받은 자가 자기를 판 자들을 향한 눈물이 요셉의 눈물인 것이죠.
그래서 요셉의 눈물은, 단지 한 사람의 눈물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요셉의 눈물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흘리시는 그 눈물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요셉을 지금 그림자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주님을 팔아버렸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눈물을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해 주셨어요.
마찬가지로 요셉의 형들이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몰랐을 때에, 요셉이 그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기다려줌으로
지금 화해의 장 안으로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형제들을 품었듯,
주님께서 눈물 흘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품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메시지가
요셉의 눈물 가운데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이죠.
여러분, 주님은 우리 모두를 품기 위하여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강요하지는 않으세요. 마치 요셉이 자신의 집을 활짝 열어놓고
형들과 아버지가 올 때까지 기다려준 것처럼,
요셉이 애굽 땅으로 강제로 끌고 오지 않았어요.
문을 열어두고 올 때까지 기다려주었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 문을 열어두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올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예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그동안의 과거 가운데 가지고 있었던 모든 기억들, 상처, 아픔
그 모든 것이 치유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셉의 눈물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의 눈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2. 두 번째, 요셉의 눈물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냐면,
이 눈물은 열방을 향한 구원의 선포가 됩니다.
이 눈물은 열방을 향한 구원의 선포가 돼요.
45: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여러분 핵심은요. 요셉의 눈물이 바로의 궁중까지 들렸다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왜 그렇게 기록해 놓았을까요?
요셉의 목청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해 놓았을까요?
여러분 아무리 크게 울어도, 어떻게 건물을 통과하여
요셉이 있는 총리 집무실과, 왕이 있는 왕궁까지 얼마나 멀겠어요?
거기까지 소리가 들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목청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서, 제가 제 사무실은 9층에 있는데,
제가 9층 사무실에서 엉엉 울고 있는데, 그 울음소리가 근처 공원 대나무 숲까지 들릴까요?
그런데 만약에 누군가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9층에 주경훈 목사가 울었더니, 그 울음소리가 대숲까지 들리더라’ 라고 기록해 놓았다면,
그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군대 간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그 자식의 군대까지 들리더라’
그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이, 그 군대까지 덮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거잖아요.
지금 ‘요셉의 눈물소리가 바로의 궁중까지 들리더라’는 이 말은, 어떤 의미냐면
요셉의 눈물은 회복의 눈물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려야 할 그 눈물의 전주곡이 되는 눈물인데,
‘그 눈물 소리가 바로의 궁까지 들렸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회복과 치유의 메아리가, 애굽의 궁 중심까지 울려 퍼지더라...
그 말을 지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세계 선교를 향한 그분의 뜨거운 심장의 소리를, 지금 이렇게 기록해 놓은 거예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요셉의 가족을 통하여 열방의 구원을 꿈꾸고 계십니다.
(요셉이, 또한 야곱의 가족 70인이, 애굽에 내려간 것도, 열방의 구원을 위한 포석입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시는 그 눈물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고요.
그분은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계세요. 누구를 위한 눈물일까요?
그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 그들의 과거에 지은 죄 속에서 허덕이며 죽어가는 모든 자들을
향한 탄식의 눈물을 지금 흘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눈물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는 무엇이냐면
단순히 한 개인의 눈물이 아니라, 한 가정의 눈물이 아니라,
이 눈물 속에서 열방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지금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주님의 눈물 때문에, 그 사랑으로 인하여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적용 /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눈물로 인하여 구원받은 자들로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계속해서 그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 눈물이 있다면, 여전히 교회는 이 땅의 소망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교회를 염려합니다.
본질을 잃었다고, 세상이 우리를 염려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교회가 이 땅의 유일한 소망인 줄 믿습니다.
조건이 있어요. 요셉의 이 눈물이 교회 안에 가득하다면
예수님의 그 눈물이 우리 가운데 가득하다면
여전히 교회는 이 땅의 소망이 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셨다라면 흘렸어야 할 그 모든 눈물을
우리가 대신 뜨거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 울음소리가 이 열방을 덮는 것이죠.
그래서 냉대와 적대와 폭력과 불신과 파괴적인 소리가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초청과 화해와 복음과 치유와 구원의 눈물의 소리가 가득한
그 울음소리를 낼 수 있는 그 공간이,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그 눈물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최근에 우셨습니까? 어떤 일로 눈물을 흘리셨어요?
눈물은 진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진짜 기쁘면 울고요. 진짜 슬퍼도 울고요.
진짜 감사해도 울고요. 진짜 열받더라도 분해서 웁니다.
무엇을 위한 눈물을 흘렸습니까?
요셉의 이 눈물, 예수님의 이 눈물, 이 눈물을 우리 가운데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우리는 그 눈물을 회복해야만 돼요.
내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데 눈물이 나지 않아요? 가슴을 때리십시오.
억지라도 우는 척을 하셔야 됩니다.
내 주변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향한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그 눈물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번 한 주간 동안에 오륜 미션 위크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단기 선교사를 파송하는 날이었어요.
저는 오륜교회의 성도가 받는 모든 땅마다
이 눈물의 소리가 함께 흘러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애굽을 구원시키기 위한 놀라운 계획 가운데
요셉의 가정을 그리로 이주시켜 놓으신 그 하나님의 마음,
그 마음 붙잡고 우리가 주님 오실 그날까지 그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유기성 목사님 책을 보니까 이런 구절이 기록이 되어져 있더라고요.
한 성도가 새신자 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어요.
세례를 받고 나서 목사님께서 물어봤답니다.
‘교회에 와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새가족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더라고요.
한참 고민하더니만 ‘눈물을 배웠습니다.’
이전에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배웠다는 거예요.
회개의 눈물, 구원의 눈물, 감격의 눈물, 치유의 눈물, 생명의 눈물
우리껀데 다시 한번 그 눈물을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주1)
현대 행위예술의 대모격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2010년도에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전설적인 퍼포먼스를 진행했어요.
그 퍼포먼스의 내용은 제목은 무엇이냐면 “예술가가 지금 여기에 있다” 입니다.
이 퍼포먼스는 너무나 단순해서요.
아브라모비치가 미술관 한 가운데 의자 두 개와 테이블을 놔둡니다.
그리고 한쪽에서 앉아있고, 반대편에 누구든지 와서 앉을 수 있도록 해둔 겁니다.
누구든지 와서 앉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뭐하는 거냐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않고,
반대편에 앉아있는 사람의 눈을 가만히 응시합니다. 행위예술을 하는 겁니다.
하루에 7시간, 3개월 동안, 앉아있는 7시간 동안,
물도 먹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냥 그대로 앉아있고,
테이블에 마주한 의자에 앉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바뀌는 거예요.
그들이 앉아있고 싶은 만큼 앉아있고 나가면,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앉는 겁니다.
총 1,500명의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어요.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분 남짓 눈을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마주보는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오열이 터지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가슴을 치면서 우는 거예요.
남녀노소, 인종을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눈빛 앞에서 무장해제가 되는 것이죠.
736시간 동안 벌어지는 퍼포먼스 동안에, 그 자리에 몰려든 사람들은
뉴욕 시민보다 더 많은 850만 명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관람객
그리고 그 눈을 함께 마주쳤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을 해요.
‘우리는 평소에 평가받고 비교당하고 판단받으며 살아왔는데,
그녀와 눈빛이 마주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평가하지 않고, 조언하지 않고,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순간에 내 존재 안에 갇혀 있었던 외로움, 죄책감, 상실, 후회, 두려움
그것들과 마주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 나를 토닥이는 경험, 안기는 경험,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멀리 뉴욕까지 갈 필요 없습니다.
우리 한 번 해보겠습니다. 옆에 있는 분 바라보시고요. 한 1분간 쳐다보겠습니다.
째려보는 거 말고요. 네 굉장히 난처한데요.
각자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한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싸우지 마시고요.
주2)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거하셨을 때 세 번 우셨습니다.
그 세 번 우셨던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면
-첫 번째,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감정적으로 슬퍼서 운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 죽어야 할 모든 자들을 향하여서 우신 거예요.
이들을 살려야 되는데... 진짜 생명을 모르고 울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서 안타까워서
우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요. 예루살렘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셨어요.
곧 있으면 멸망할 메시아를 바라보지 못하고 죽을 사람들을 향하여서 우셨어요.
-세 번째,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기 바로 직전에 눈물을 흘리며 우셨어요.
예수님께서 흘렸던 모든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냐면,
자기를 팔 자를 향하여 팔림 받을 자가 흘리는 눈물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