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니 5] 믿음의 원리 (롬1:17절)┃2026.4.10 Youtube
◈믿음의 원리 롬1:17, 요3:27, 삼하12:15~26 2026.04.10.[데스티니5]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아멘
데스티니의 다섯 번째 시간인데요. 오늘은 “믿음의 원리”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성경은 뭐라고 그랬냐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인’은 누구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죠.
믿는 사람을 얘기하죠. 믿는 사람은 뭐로 산다는 거예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데스티니를 이루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지 않는데, 데스티니가 이루어질 일은 없죠.
그러니까 데스티니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뭐라는 거예요? 믿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좀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믿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가지는, ‘도전하는 측면’이 있고요.
-또 다른 측면은, ‘기다리고 인내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두 종류의 믿음은 뿌리는 같은 것이고, 본질은 같은 것이지만,
두 가지 다른 표현으로 나타난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것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도전하는
그런 믿음의 측면이 있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분이 일하실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믿음의 적극적인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두 번째는 믿음의 소극적인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적극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골리앗의 원리’를 하면서 살펴봤고요.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믿음의 두 번째 측면’
어떻게 보면 좀 소극적이지만, 그 본질은 뭐냐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거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내 힘과 내 열심을 가지고 뭔가 계속 일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인내하는 이 믿음의 두 번째 측면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 가지 대지로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1.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첫 번째는 침례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믿음인데요.
요3:2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자 짧은 한절이지만, 이 한 절은 요한의 믿음이 무엇이고,
요한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요한은 뭐라 그랬냐면, ‘하나님이 주신 것만 받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것만 내 거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은 것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것은 나에게 주는 축복이 아니다.. 하는 것이
요한의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뢰하는데, 어떻게 신뢰하냐면, ‘하나님은 나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셔,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셔!’ 그것을 신뢰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나에게 베스트를 주시는 분이야!’
하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잘못 믿는 것이 있는데, 성경과 상관없는 진리인데
그것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거예요.
그 말씀은 뭐냐면 ‘내가 열심히 하면, 나를 하늘도 돕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지성이면 감천이다’ 이런 말들이 다
‘내가 열심히 성실하게 하면, 뭔가 좋은 결과가 나올 거야’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 속에 담겨있는 신학은 뭐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는 상관없이,
사람의 열심으로 열매를 맺고, 사람의 노력으로 성공한다’는 거예요. No!
'내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도 나를 무조건 도와주신다'는 거죠.
▲그런데 이 침례 요한의 스토리를 보면, 정반대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돕는 자를 망하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열심히 사역하는 요한의 사역을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이 화가 났죠.
예수께서 침례를 주시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요한의 제자들이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침례 요한은 뭐하는 사람이에요? 침례 사역하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요단강 침례터에서 계속 침례를 주고 있었는데,
‘이 바닥에도 상도라는 게 있지...’ 똑같은 걸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똑같이 침례 주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제자들이 화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하려면 좀 딴 걸 하시지.. 능력도 많으신 양반이, 할 거면 치유 사역을 하시든,
말씀 사역을 하시든, 다른 걸 좀 하시지... 똑같이 침례 사역을 하시면 어쩌자는 거예요?’
그것도 요한의 사역지와 멀지 않은 곳에서, 똑같은 사역을 하십니다.
그러다 보니까 요한의 제자들이 낙심이 되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찾아와서 뭐라 그래요? ‘사람들이 다 저 사람 Jesus 한테 갑니다'
'우리에게 오던 사람들도 다 지금 예수한테 가고요. 우리 사역은 이제 망했습니다.’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죠.
△우리도 살다 보면, 이런 원망이 생길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조금만 도와주시면 될 것 같은데, 안 도와주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안 도와주시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꾸 방해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런 때가 있죠.
특별히 나쁜 짓하거나 죄 짓거나 하지도 않는데,
뭐 죄짓고 나쁜 짓 하는 거야, 하나님께서 도움의 손길을 막으시겠죠.
뭐 내가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죄짓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주를 위해 열심히 뭔가 좀 해보려고 하는데, 성실히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주님이 나를 안 도와주시는 겁니다. (이때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한 때죠)
또 어떨 때는 사역하면서도 그럴 때가 있거든요. 사역이 뭐예요?
주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하겠다는 건데, 이게 뭐 내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겠다는 건데... 이때 나를 안 도와주시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안 도와주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뭔가 하나님께서 자꾸 이렇게 방해하시는 것 같은...
그런 서운함이 들 때가 있어요.
‘이건 분명히 되는 거야.. 안 될 수가 없어.. 그날 비만 안 오면 돼..’
그런데 꼭 그날 비가 와요.
‘주여 이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안 되면 기적입니다.’
그런데 ‘안 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요.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처럼.. 어떨 땐 하나님께서 나를 방해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 있지 않으세요?
마치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런 경험들을 적지 않게 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경험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절대 협조 안 해주시는 경험!
사도 바울은 뭐라고 했냐면, 이런 경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자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에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얼마나 안 도와줬으면 이렇게 고백하겠어요?
사도 바울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같이 대하셨다’는 거예요.
아니 사도이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 일을 하겠다고
뭐 자기 모든 거 다 버리고 주님 나라를 위해서 뛰는데,
그럼 팍팍 좀 밀어주시면 좋은데...
그런 게 아니고 마치 죽이기로 작정하신 사람처럼...
그게 뭐에요?
하나님이 나를 ‘죽어라, 너 죽어라’ 하고 패셨다는 거죠.
‘우리는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뭐예요?
정말 안 도와주시는.. 그런 자리에 두셨다.. 이런 거죠.
얼마나 하나님께서 시기적절하게 비협조하셨는지,
‘마치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 같았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침례 요한의 상황도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 비로소 침례 요한의 믿음이 뭔지가 드러납니다.
그의 믿음은 뭐냐면 요3:27절 말씀입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아멘! 이것이 침례 요한의 믿음이었다는 거예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큼만 받으라’는 거예요. 그것에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 이상을 넘어가려고 하면
그건 과욕이고, 그건 죄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만큼이 우리에게 베스트입니다.
이 믿음, 이것이 침례의 요한이 보여주고 있는 믿음입니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면 감사하고 거기까지만 하려는 거예요.
감사하고 거기까지만 하라는 거예요. 오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까지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깊게 들어가려고 하면, 결국 뭐가 나오냐 하면 원망이 나와요.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 딱 멈추면 감사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거기서 더 가려고 하잖아요.
그러면 반드시 뭐가 따라오냐 하면, 원망이 따라오게 됩니다.
‘저 놈이 그렇게 하는 바람에 내가 이렇게 됐어’
요한도 여러분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어요.
‘아니 내가 그를 그렇게 높여주고 지지해 줬는데, 나랑 똑같은 침례 사역을 해?
딴 거 하면 되잖아?’ 하고 충분히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데서 멈추지 않고, 내 힘과 열정으로 더 가려고 하면,
결국 어디로 연결되냐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로 연결돼요.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여러분 하나님의 완전하신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그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이게 믿음입니다!
‘여기까지가 나에게 주신 기업이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나에게 어떻게 보이든,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하든,
이게 베스트입니다. 이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아멘이십니까?
오는 주일에도 우리가 ‘자유’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금요철야 설교
히브리적인 자유와, 헬라적인 자유에 대해서 살펴볼 텐데
사실 이 신약성경은, 무슨 기초 위에 쓰여졌냐면,
구약은 전부 다 히브리적인 기초 위에 쓰여집니다.
그런데 신약은 신약을 기록한 사람들이, 어쨌거나 헬라문화권에서 태어나 살았던 사람들이죠.
비록 유대인들이긴 하지만, 헬라 문화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신약으로 넘어오게 되면, 히브리적인 개념과 헬라적인 개념이 두 가지가 다 융합해서
신약 성경에 녹아듭니다. 그래서 구약하고는 굉장히 분위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날 ‘자유’에 대해서, 그런 측면들을 살펴볼 텐데,
믿음도 그래요. 믿음도 여러분, 히브리적인 믿음은 뭐냐 하면, 사람에 대한 신뢰예요.
‘내가 너를 믿어!’ 할 때, 이 (신뢰적) 믿음이 있잖아요. 이게 히브리적인 믿음입니다.
히브리적인 것은, 굉장히 사람 중심이고, 인격 중심이에요.
그런데 헬라적인 것은 뭐냐면, 비인격적이고, 어떤 사물에 대한 거예요.
그러니까 헬라적인 믿음은 뭐냐면, 그렇게 될 것을 믿는 거예요.
그렇게 될 것을 믿는 거예요. '이건 분명히 이렇게 될 거야' 하는 이런 믿음이,
헬라적인 믿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이, 다분히 헬라적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전부 다 들어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그랬잖아요.
이것은 다분히 헬라적인 성격이 들어있는 거죠. 이것도 맞아요. 믿음입니다.
믿음이 아닌 건 아닌데,
그런데 조금 더 본질적인 것은, 왜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니까!’ 그래서 그렇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조금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뭐예요? 하나님께 대한 신뢰죠.
그러니까 믿음의 본질은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예요.
‘그분이 무엇을 하시는지 간에 실수가 없으셔!
그분이 무엇을 하시든지 간에, 항상 나에게는 제일 좋은 걸 주셔!’
이 신뢰를 믿음이라 그러는 거예요.
이 신뢰를 믿음이라 그러는 것이고
‘믿습니다. 그대로 될 것입니다’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믿음의 결과지요.
‘하나님이 그러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하실 거야’
이건 어떤 결과적인 면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 첫 번째 것(신뢰)을 무시하고,
두 번째 결과적인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결국엔 우리 믿음이 파산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게 돼요.
왜냐면, 내가 기대했는데, (어떤 결과를) 믿었는데... 그대로 안 될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했는데, 결과가 안 될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믿음은 뭐지?’ 이렇게 혼란스러워지죠.
왜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기초가 약하니까, 흔들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더 본질적인 측면은 뭐냐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나에게 베스트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항상 제일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이게 본질적 믿음인 줄 믿습니다.
▲자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선 line, limit 이 있어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 그 선까지가 나에게 베스트예요.
나는 무조건 많은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다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더 넘어가면 우리에게 득보다 실이 더 많다'는 것을 아신다는 거예요.
딱 눈앞에 놓인 것만 놓고 보면, 내 생각이 더 좋아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긴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그 경험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거든요.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현재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 영원까지를 함께 보시고,
거기서 제일 좋은 게 뭔지를 허락하시는 분이세요. 여기에 대한 신뢰가 있으셔야 돼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뭐예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지만, 나는 제한적이고 내 앞길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대한 인정이 있을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기까지' 라는 선을 넘지 마시고, 자족하기를 배우십시오
이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4:11~12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이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하기를 배우는 것’, 이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당연히 알아서 제일 좋은 것을 주시겠지...’ 이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조바심 내지 마십시오.
그게 내 몫이라면 반드시 주십니다. 도망다녀도 주시고요. 쫓아와서 주세요.
쫓아와서 떠먹여 주십니다. 아멘!
그러니까 ‘혹시 놓치면 어떡하지?’ 이런 거 염려하지 마시라는 거예요.
조바심 내지 마시고 안심하십시오.
우리가 조바심 내야 되는 건 뭐냐 하면,
‘내가 죄의 유혹에 넘어지진 않는가, 죄 때문에 실족하지는 않는가?’
이걸 조바심 내셔야지,
‘하나님이 안 해주시면 어떡하지?’ 이건 조바심 낼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우리가 엉뚱한 곳에 조바심을 내고 있어요. ‘하나님은 이거 꼭 해주세요.’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걸 주기를 원하세요.
이거 꼭 믿으셔야 돼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항상 베스트다. 제일 좋은 거다!’ 아멘!
여러분 그냥 릴렉스 하십시오. 하나님은 시의적절하게 주십니다. 도망가도 주고요.
내가 저기 바닥 끝에 가더라도 쫓아와서 주세요.
△제가 존경하는 한 선교사님이 계신데, 그분은 누가 후원하겠다고, 돈 말씀만 꺼내면
계속 말 주제를 다른 데로 돌리세요. 평생 그렇게 사셨어요.
누가 ‘제가 이번에 후원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날씨 좋네요.’ 하고 계속 말씀을 돌리세요.
그래서 왜 그러셨냐고 물어봤더니 ‘하나님이 주시는 거면 말을 돌려도 주실 거고,
하나님이 주시는 게 아니면 받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죠?
하나님이 주시기로 작정하신 거면,
내가 말을 돌리고 안 받겠다 그러고, 내가 도망다녀도 주실 거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면, 덥석 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평생을 말을 돌리면서 사셨는데, 평생 한 번도 부족함이 없었고요.
제가 그분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그분의 첫 번째 은사는 뭐냐면
후원받는 은사라는 걸 알았어요. 와 정말 후원을 많이 받았어요.
정말 근데 평생 돈에 대해서는 한 번도 누구한테 말씀해본 적도 없고,
준다 그래도 계속 도망다니고 그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부족함 없이 풍성하게 하나님이 채우셨어요.
그러므로 여러분, 조바심 내지 마십시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지키십니다. 졸지도 않으시고 지키십니다.
시편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시121:3~4
그래서 이 자족하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뭘 누리냐면 안식을 누리게 돼요.
선을 넘어가려는 나의 욕심은, 우리 영혼의 안식을 빼앗아갑니다. 염려와 불안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침례 요한에게 주신 바 그 믿음이 있을 때, 우리 영혼은 평안합니다. 요3: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렇죠. 하나님이 주신 것까지만! 그 이상은 노 땡큐!
혹시 누가 줘도 안 받아야 됩니다. (괜히 고위직 수락했다가, 큰 고생하는 분들 있죠)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영혼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혹시 선을 넘어가셨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멈추십시오.
아무리 열심히 모으고 성취해도, 그건 내게 아니에요.
사람은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믿으십시오.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숨을 크게 한번 쉬고, 의자에 편히 앉으셔서 릴렉스 하십시오.
주께서 일하십니다. 주께서 일하십니다. 아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세요.’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요. 주무시지도 않으세요.
결국 제일 좋은 걸 주세요. 아멘! 이게 믿음입니다.
◑2. 믿음의 두 번째는 <과거를 잊고 미래를 기대하는> 거예요.
히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의 사람은, 여러분, 과거를 붙잡고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실수가 없으신 분이심을 믿기 때문에, 과거는 잊어버립니다.
그럼 뭘 붙잡죠? 미래를 잡는 거예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 잡고 사는 사람이 있고요.
현재 붙잡고 사는 사람이 있고요.
미래를 붙잡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1) 과거를 붙잡고 산다는 건 뭐냐면, 과거의 기억에 잡혀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기억은 그렇게 긍정적인 기억들이 아닙니다.
주로 실패, 후회, 원한 뭐 그런 거예요. *부정성 편향 Negativity Bias
‘그때 그 일만 없었으면... 그때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 그놈이 나한테 이렇게 하지만 않았으면...’ 이런 안 좋은 기억을 붙들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를 붙잡고 사는 사람은, 내면이 그렇게 기쁘지 않습니다.
별로 기쁘지 않고요. 항상 우울하고 항상 분노가 있고 그랬습니다.
과거를 붙잡고 사는 사람은 참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그래서 어쩌라고요?
그냥 지나갔는데, 이미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가서 바꾸시겠어요?
어쩌시겠어요? 이거는 붙잡고 살아봐야 아무 쓸데가 없는 일이거든요. 이건 믿음이 아닙니다.
2) 두 번째, 현재를 붙잡고 사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현재 내 감정만 좋으면 오케이인 사람이에요. 대책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는 행복할지 모르는데, 주변에 있는 사람이 굉장히 힘듭니다.
3) 세 번째, 미래를 붙잡고 사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내 과거는 어땠든지 간에 잊어버리는 거예요.
왜요?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셔! 그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 과거에 내게 허락하신 일은
뭔가 이유가 있으실 거야!’
그 이유는 뭐예요? ‘미래에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야!’
이게 이제 미래를 붙잡고 사는 믿음이에요.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하나님이 섭리로 허락하신 거야’
그러니까 잊어버리고 ‘미래에는 하나님이 좋은 일을 하실 거야’ 이걸 믿는 거예요.
이게 믿음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나간 일은 빨리 잊어버리십시오.. 이 땅의 일은 어차피 지나갑니다.
이거에 매이면 믿음에서 실족하게 됩니다.
또 현재의 감정이나 즐거움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이것에 집착하면 믿음을 타협하게 됩니다. 앞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내일이 있습니다. 아멘!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요. 정말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미래를 잡고 붙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이 설교를 처음으로 준비하면서, 설교의 와꾸를 이렇게 짰어요.
저는 먼저 할 때 와꾸부터 짜거든요. *박스, 구조
그래서 ‘과거의 사람, 현재의 사람, 미래의 사람
성경에서 한 명씩 샘플을 뽑아서, 그거를 기초로 설교를 해야 되겠다’
그리고 와꾸를 짰는데, 성경을 아무리 뒤져도, 과거의 사람을 한 명도 찾을 수가 없었고요.
성경을 아무리 뒤져도,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현재의 사람 한 명도 찾을 수 없었고요.
정말 성경을 샅샅이 뒤져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미래를 붙잡고
사는 사람이더라고요. 그게 성경을 샅샅이 뒤져본 제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람은 다 미래를 붙잡고 사는 사람이에요.
과거에 매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요셉만 봐도 그렇습니다. 요셉은 형들로 인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한 인생을 삽니다.
아마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진작 미쳤을 겁니다.
그런데 요셉의 인생을 보면, 이런 과거의 억울함에 대한 얘기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셉 이야기 읽어보세요. 형들이나 가족에 대한 원망이 한 번도 한 줄도 등장하지 않아요.
오히려 총리가 되어서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형들을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아멘! 창45:5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거예요. 아멘!
요셉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요셉의 기억을 구속 redeem 합니다.
원망이 아니라 감사로!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부정적인 기억들이 있어요. 부정적인 경험들이 있습니다.
이 기억과 경험들은 구속받아야 됩니다. ‘기억을 구속한다’라는 게 이런 거예요.
어떤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럼 그 사건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고 억울함을 입어요.
그러면 우리 기억 속에 어떻게 저장이 되냐면, 일어났던 사건과 감정이 하나의 짝이 돼서
저장이 됩니다. 그게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그 기억이 올라올 때마다 뭐가 올라와요?
거기 붙어있는 감정이 같이 따라 올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기억이 올라올 때마다, 분노가 올라오고,
그 기억이 올라올 때마다, 억울함이 올라오고...
그러면서 우리 내면을 망가뜨리는 거예요.
그런 기억은요. 바꾸셔야 돼요. 기억을 구속하셔야 되는데,
그럼 이제 사람들이, 아니 그럼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바꿉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기억을 구속한다고 하는 건 뭐냐 하면,
그 기억에 붙어있는 감정을 바꾸는 거예요. *그 일 자체를 바꾸는 게 아니라요.
기억에 붙어있는 억울함이라는 감정, 분노라는 감정... 이것들을 바꾸는 거예요.
이것을 어떻게 바꾸냐면, 해석이 달라지면 감정이 바뀌어요.
뭔가 사건이 벌어졌어요. 예를 들어서 형들이 요셉을 팔았어요.
그러면 그것에 대한 해석은 뭐예요? ‘형들은 나쁜 놈, 형들은 나쁜 O새끼' 뭐 이런 거잖아요.
이게 그거에 대한 해석이에요.
아니 요셉이 여러분, 이 정도 언어가 아니고, 이거보다 훨씬 과격한 언어를 썼을 겁니다.
자기 인생이 다 망가졌는데, 여러분 별 쌍욕을 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죠. 그게 이제 요셉의 해석이에요. ’나는 억울하다, 형들은 나쁜 놈이다‘
그러니까 감정이 뭐예요? 억울함, 분노 이게 이제 저장이 되는 거죠.
구속은 뭐냐면 ’형들은 나쁜 놈이다‘하면서, 그 사건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사건이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바꾸겠어요?
일어난 걸 안 일어났다고 할 수도 없고, 안 일어난 걸 일어났다고 할 수도 없고...
이건 불가능이죠. 사건은 그대로 있는데, 이 두 번째 걸 바꾸는 거예요.
해석을 바꾸는 거예요. 요셉은 해석을 어떻게 바꿨어요?
’하나님이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렇게 해석이 바뀌는 거예요.
이게 이제 이 해석이 바뀌는 게 뭐냐 하면, 믿음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나에게 항상 좋은 것만 주셔! 항상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셔!’
이 믿음이 있을 때, 해석이 바뀔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해석을 바뀌는 것이 뭐라고요?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 믿음이 딱 작용하니까 ‘아 이건 형들이 나를 억울하게 해서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민족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신 거구나’
이렇게 해석이 바뀌니까, 감정은 뭐가 따라와요? 감사가 따라오는 거죠.
이게 기억에 대한 구속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부정적인 경험들과, 부정적인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게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요. 그게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고,
그게 우리의 내면을 계속 파괴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이 기억들은, 하나하나 구속받아야 돼요. 뭘로? 믿음으로!
그리고 그 기억을 구속하시는 분이 사실은 하나님이세요. 성령님이세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그 기억에 대한 하나님의 조망을 보여주셔야 돼요.
그러니까 요셉이 팔렸단 말이에요. 그럼 이것만 보고 있으면 해답이 안 나와요.
이것만 보고 있으면, 내 안에 분노밖에 없어요.
그런데 위에서부터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거예요.
‘아니야, 그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네 삶 가운데 너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행한 일이야’ 성령께서 이거를 조명해 주실 때,
그 조명하심에 아멘! 하고 믿음으로 화답하는 순간, 기억의 구속이 일어나죠.
이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야 됩니다.
그랬을 때 우리 안에 있는 이 부정적인 감정들, 우리 안에 있는 분노, 억울함, 또는 불안함,
염려, 그게 기쁨, 감사, 평강 그렇게 바뀌는 거예요.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은 실수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이걸 믿는 거예요.
나의 인생에도 실수하실 수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완전합니다.
이게 믿음이고, 이 믿음이 우리의 과거의 기억을 구속할 줄 믿습니다.
▲다윗도 그렇습니다. 사무엘 12장에 보면 다윗이 말합니다.
밧세바와 불륜으로 낳은 아이가 병에 걸리죠.
다윗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아이를 치셨다고 기록합니다.
삼하12:21~23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다윗은 여러분, 철저하게 미래만 붙잡고 산 사람이에요. 그렇죠?
아이가 살았을 때는 혹시 하나님이 고쳐주실 미래를 기대하고, 금식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이가 죽죠. 그러자 신하들이 걱정해서 ‘아기가 살았을 때도 저러셨는데,
이제 죽었다는 소식을 어떻게 전하냐?’
그런데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난 다윗은,
그냥 멀쩡하게 왕궁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하들이 의아해서 물어보죠. ‘왕이시여 괜찮으십니까?’
그랬더니 다윗의 대답이 이거죠.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금식한다고 죽은 아이가 돌아오겠느냐?’ 과거는 과거로 돌리라는 거예요.
이게 다윗의 믿음입니다.
다윗이 여러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는데, 2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삼하12: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여호와 앞에 들어가 하나님을 경배했대요. 뭐예요?
하나님의 주권 앞에 무릎을 꿇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비록 내 마음은 어렵고 힘들지만,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이게 예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배는 뭐냐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게 예배잖아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게 예배인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거예요.
‘비록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내 마음은 슬프고 낙심되고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이게 다윗의 믿음이에요.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게 다윗의 믿음이에요.
다윗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믿음이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미래에는 더 좋은 일을 행하실 거야’ 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24절, 2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삼하12:24~25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래서 정말로 다윗의 믿음처럼, 하나님께서 그에게 솔로몬을 주셔서 축복하십니다.
과거를 담는 사람은, 우울함과 슬픔뿐이지만,
미래를 담는 사람에게는, 솔로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더 좋은 일을 하실 거야'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은 항상 나를 축복하셔!' 이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아멘!
▲우리 하나님은 항상 나를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그 사실을 믿으십니까? 저는 믿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항상 저보기에 만족스럽고 항상 사람들이 '와 축복이네' 이런 거 아니에요.
어떨 땐 힘든 일도 있고, 어떨 땐 저주처럼 보이는 일들도 있고,
낙심되는 일들도 있고, 해결 안 되는 일들도 있고... 다 있어요.
그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타락한 세상을 사는데 다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라는 건 뭐냐면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야' 이게 믿음인 거예요.
이게 믿음입니다. 아멘이십니까?
‘하나님은 항상 날 축복하시는 분이셔!
단 한 번도 하나님은 저주하지 않으셔! 단 한 번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셔!
하나님은 내 인생 가운데 항상 축복하는 분이셔!’
이 믿음이 있을 때, 비록 오늘은 아이가 죽었지만,
내일은 솔로몬을 안게 되는 거예요. 이게 믿음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더 좋은 일을 행하실 거예요. 과거의 기억은 잊으십시오.
△우리에게도 다윗처럼 ‘죽은 아이의 기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입시에서 실패하기도 하고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도 하고 뭐...
나의 죄로 인한 비극일 수도 있고, 하여간 뭔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힘들고 어렵고 낙심하고 뭐 그런 게 있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거 빨리 잊으십시오. 그 기억 붙잡고 있으면 아무것도 나올 거 없어요.
그 기억 붙잡고 있으면 아무것도 나올 게 없어요.
다윗의 믿음이 뭐예요? 아이가 딱 죽으니까 바로 잊어버리는 거예요.
사람이 그렇게 일이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래도 그렇게 시도하셔야 돼요.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아휴, 하나님은 어련히 알아서 하셨겠어?’
‘만약 그때 그렇게 안 하셨으면, 나중에 엄청 더 어려워졌을 거야’
‘뭔지는 모르지만, 나 완전히 망했을 거야...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신 거야’
그렇게 하시고, 믿음으로 그 다음 스텝을 밟으셔야 돼요.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실 거야, 좋은 거 주실 거야, 솔로몬을 주실 거야!’ 아멘!
▲요셉과 다윗은 여러분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당한 억울함이었고, 사실 다윗은 자기 죄였어요.
자기 죄 때문에 그런 거죠.
그런데 참 놀라운 건 뭐냐 하면, 요셉이든 다윗이든 똑같았다는 거예요.
그 말씀은, 과거에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나의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든,
아니면 내가 억울하게 당한 거든 상관없다는 거예요.
그냥 그냥 믿음으로 ‘하나님이 내게 좋은 거 주셨을 거야’
나의 죄 때문에 문제가 꼬일 수도 있습니다. 맞아요.
내 죄 때문에 원치 않은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다윗도 죄 때문에 아이가 죽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면,
그 죄까지도 어떻게든지 축복으로 바꾸시려고 애쓰시는 분이시라는 거예요.
이게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고 사랑인 줄 믿습니다.
다윗을 보면 ‘내 죄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아이는 죽었지만,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는 분이셔!’
그래서 하나님으 솔로몬을 다시 주시잖아요.
이분이 우리 하나님이세요.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세요?
우리를 축복하기 원하시는 분이세요. 이거 믿으셔야 됩니다. 이거 믿으셔야 돼요. 아멘!
우리 하나님은, 까탈스럽게 우리를 이렇게 노려보고 계시다가,
내가 하나 잘못하면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이런 분이 아니세요.
제발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까탈스럽게 보고 있다가
내가 잘하는 거는 ‘당연히 그래야지’ 하시다가,
내가 하나 딱 잘못하면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하고 혼 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혹시 그렇지 않으세요?
특별히 모태신앙으로 자란 사람들은, 그런 성향이 더 강하더라고요.
아니요. 하나님은 정반대십니다. 정반대세요.
우리에게 수만 가지 죄가 있어도, 딱 하나 잘하는 거 있으면,
‘봐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하고 축복하시는 분이시고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 인생이 꼬일 수 있어요.
그러면 그 꼬이는 것까지도 어떻게든지 바꿔서 축복하시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세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시고,
제가 지난 40년 동안 경험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세요.
저의 모든 실수와 저의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그 실수까지도 어떻게든지 축복으로 바꾸시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멘이십니까?
그러면 여러분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미래를 붙잡으십시오.
이것도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의지적으로 과거를 잊어버리고 미래를 잡으세요.
과거? 과거 붙잡고 있어봐야 어쩌시겠어요?
이미 지나간 일을 어쩌겠습니까? 우리의 영혼만 병들 뿐입니다.
‘그건 이미 지나갔어.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거야!’ 이걸 믿으셔야 돼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거야 이걸 믿으셔야 돼요.
지나간 일들은... 그것이 요셉의 원통함이든, 다윗의 죄든,
하여간 지나갔고,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실 거야!’
‘비록 다윗의 죄 때문에 비극이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실 거야!’ 이게 믿음입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많은 경우, 우리가 죄로 인해서 뭔가가 어려워지고 꼬이잖아요.
그러면 나의 죄... 죄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거보다 더 큰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생겨요.
그건 어떻게 보면 하나님 쪽의 문제가 아니라, 내 쪽의 문제입니다.
계속 내가 죄를 지으면 미안하잖아요.
계속 죄를 지으면 미안한 마음, 죄책감, 계속 반복해서 죄 짓는 내 모습을
나도 용서가 안 되는데, 과연 하나님은 이걸 용서하실까? 그게 확신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게 아까 말씀했던 그것이요.
이렇게 보시다가 죄 있으면 딱딱 지적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듭니다.
아니요. 그건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세요.
우리의 어떠한 죄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반복되는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다윗은 밧세바와 불륜으로 이 아이를 낳았고,
그게 아예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다윗을 축복하시잖아요.
여전히 하나님은 다윗이라면 깜빡 죽으시잖아요.
여전히 하나님은 다윗에게 솔로몬을 주시잖아요.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세요.
이걸 믿음이라 그러는 거예요.
‘나의 모든 연약함과 나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는 분이셔!’ 이게 믿음인 거예요.
이 믿음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 이 믿음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
내가 완벽할 때만 나를 축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건 여러분, 교만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교만!
왜 교만이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완벽하겠어요?
내가 하나님의 기준만큼 살 수 있다.. 라고 착각하는 거란 말이에요.
아니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기준만큼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숨 쉬는 게 죄잖아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죄잖아요?
이 주제 파악이 안 되니까,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호흡하는 것 자체가 죄이고, 우리 안에서 뭐 선한 게 나오겠어요?
이 주제 파악이 될 때.. 그러니까 은혜죠.
내가 잘해서 하나님 축복하시는 거면, 그게 딜이지, 그게 무슨 은혜예요?
내가 아무것도 하나님 옆에 내세울 게 없는데, 하나님이 하시니까, 은혜인 거잖아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죄인이고,
이 타락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뼛속까지 들어와 있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오히려 은혜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의 모든 연약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시는 분이시고,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기뻐하는 분이시고,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지지하는 분이세요.
이게 뭐예요? 믿음이에요. 이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세 번째 믿음의 특징은 '버티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잖아요. 그러면 하늘에서는 그것이 이미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땅에서 응답되기까지는 시차가 있습니다. 이게 영적인 원리예요.
기도응답에는 딜레이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하세요. 반드시 응답하세요.
다니엘서 9~10장에 보면 다니엘이 기도했더니 천사가 이제 찾아오죠.
그러면서 가브리엘 천사가 뭐라 그랬냐면
‘다니엘아, 네가 기도한 그날 하늘에서 이미 응답받았는데,
내가 일로 오는 중에 바사 왕이 나를 방해해서... 응답이 딜레이 되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말씀죠.
그래서 천사장 미가엘이 와서 도와주는 바람에 간신히 왔다 그러면서 단10:13
21일이 지체됐다고 말씀하죠.
시간이 없어서 구절을 안 찾겠지만, 다니엘서 9~10장 나중에 각자 찾아보십시오.
그 말씀은 뭐예요? 기도하는 순간에 응답이 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이 땅으로 전달되기까지는 21일을 걸렸다는 거예요.
자 그러니까 영적인 원리는 뭐냐면, 기도하면 하늘에서는 바로 응답이 됩니다.
근데 그게 언제 땅에서 보여지게 되는지는 몰라요.
오늘 당장 될 수도 있고, 일주일 지나서 될 수도 있고, 21일 지나서 될 수도 있고,
10년 이따 될 수도 있고...
어떤 건 우리 세대에 안되고, 자녀 세대에 될 수도 있고...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이 딜레이 되는 시간 동안 요구되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면 믿음이라는 거예요.
‘반드시 하나님이 행하셔!’
그렇지만 때와 상황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어요.
그렇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셔!’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는 거예요.
자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은 뭐예요? 버티는 거예요. 언제까지?
하나님의 응답이 이루어질 때까지!
앞서 말씀했지만 믿음에 두 가지 종류의 믿음이 있다고 했죠.
그렇게 될 것을 믿는 것은, 헬라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건 히브리적 믿음이죠.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들으셔!’
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은 어린 나이에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갑니다.
BC 605년이었는데, 다니엘은 그 인생이 굉장히 기구했던 사람입니다. *1차포로
‘포로로 잡혀가서도 바벨론 왕궁에서 자랐으니까 화려했겠지..’ 생각하지만,
‘아마 다니엘은 환관이었을 거다’ 하는 것이 많은 신학자들의 해석입니다. 정확하진 않아요.
그런데 신학자들이 많이들 그렇게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의 가족에 대한 말씀이 아무데도 안 나오고,
그 당시 상황들을 보면, 보통 이제 적국에서 포로들을 잡아오잖아요.
그럼 포로들 중에 똑똑하고 쓸만한 애들을 뽑아서, 이렇게 환관으로 옆에 뒀습니다.
왜냐하면 똑똑하니까 써먹을려고,
근데 얘가 자기 가족을 갖고 그러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못하게 하려고, 환관을 만들어버리는 거죠.
‘그게 그 당시 문화였기 때문에 아마 그랬을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보면, 꽤 불행한 인생이었습니다.
다니엘의 가장 큰 기도 제목이 있었다면, 그것은 민족의 해방이죠.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다시 성전을 세우고...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것이 다니엘의 가장 큰 기도 제목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9장에 보면, 다니엘이 금식하며 기도하죠.
그런데 다니엘의 기도를 보면, 참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게 있는데,
그것은 끈질기게 기도했다는 거예요.
어린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때가 주전 605년이었는데, 아마 다니엘이 10대 때였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단2장에 보면 기회가 옵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요. 그 꿈을 풀어주게 됩니다.
이때가 다니엘이 20대인데요. 이때도 다니엘은 계속 기도합니다.
단3장에 보면 위기가 찾아옵니다. 금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하고
그의 세 친구들이 풀무불에 들어가죠. 이때가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30대 되었을 때입니다.
이때도 다니엘과 친구들은 여전히 기도합니다.
단4장에 오면 느부갓네살왕의 두 번째 꿈을 해석해 주는데, 이때 다니엘이 40대입니다.
이때도 다니엘은 하루 3번씩 기도하는 것을 계속합니다.
다니엘서 7장, 8장에 오면 다니엘이 을레 강변에서 주의 천사들을 만나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60대입니다. 그리고 이때도 다니엘은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을 계속합니다.
6장에 오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칙령을 알고도 하루 세 번씩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아서
사자굴에 들어가죠. 이때 다니엘이 몇 살이었냐면 70에서 80을 바라볼 때인데,
이때도 다니엘은 성전을 향해서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다니엘서 9장 포로 귀환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다니엘의 나이가 약 90세입니다. 약 90세인데 이때도 다니엘은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90이 넘었을 때 드디어 그의 기도가 응답을 받습니다.
고레스 칙령이 떨어지죠. 이게 다니엘의 마지막 장이죠.
고레스 칙령이 떨어져서 포로에서 해방되어서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다니엘의 나이가 90입니다. (다니엘이 고령인지, 또 국사가 바빠서 인지
포로귀환 때, 다니엘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자 보세요. 여러분 10대의 뜻을 정해서 3번씩 기도하기 시작하는 이 기도가,
20대, 30대에도 멈추지 않고, 40대에도 멈추지 않고, 50대에도 멈추지 않고,
60대, 70대, 80대, 90대까지 계속됩니다.
다니엘은 여러분, 80년 동안 멈추지 않고 기도합니다. 이게 뭐냐면 믿음이라는 거예요.
언제 응답되는가?
다니엘이 10대 때 기도했던 것이 80년 뒤에 응답됐어요. 이 딜레이가 있다는 거예요.
시차가 있다는 거예요.
왜요? 때와 시간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거거든요.
언제 응답하는지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거예요.
어쩌면 다니엘 대에 응답 안 될 수도 있고요.
10년 있다가 응답될 수도 있고... 그건 하나님이 정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이에 해야 되는 게 뭐냐면, 버티는 거예요. 버티는 거!
‘하나님은 반드시 행하셔, 반드시 행하셔!’
그래서 그 신뢰를,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놓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도하는 거 이게 믿음인 줄 믿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약1:6~7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 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를 성경이 뭐라고 한 거예요?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 더 의심하지 말래요.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라는 건데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이겠어요? 응답받을 때까지 신뢰하는 믿음,
응답받을 때까지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기도 제목들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여러 가지 기도 제목들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우리 안에는 어떤 마음이 있냐면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하셨으면..’ 하는 기대가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안 되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내 믿음이 흔들려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아니 여러분, 그렇게 하면 응답받을 수 없다는 거예요.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은 뭐냐면, 때와 시간을 하나님의 주권에 위탁하는 거예요.
언제 응답하실지는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난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다니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하는 신뢰를 80년을 가져갔어요.
80년을 끊이지 않고!
10대 때 기도했으면 ‘20대면 하나님 응답하시겠지’
20대 때 응답이 안 옵니다. ‘30대면 응답하시겠지’
풀무불에 들어갑니다. ‘50대면 응답하시겠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60대면 응답하시겠지, 70대면 응답하시겠지’
사자굴에 들어갑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다니엘은 응답하실 거라는 기대를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어요.
(결국 다니엘의 십대 때 기도가 응답되어,
주전 605년에 포로가 되어 잡혀왔는데,
70년이 지나서, 주전 537년 경에, 바벨론 1차포로귀환이 일어납니다.
이때 그는, 80대 후반, 너무 노쇠해서, 귀환하지 못하죠)
▲마치는 말
하나님이 정확한 때에 응답하십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도 기도하는 제목들이 있으실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속히 응답되기를 다 원하실 거예요. 그렇죠?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기도하는 게 속히 응답됐으면 좋겠고,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됐으면 좋겠고... 제 안에도 그 마음이 있어요.
그러나 진짜 믿음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거예요.
내 생각보다 뛰어나신 분, 나보다 지혜로우신 분,
동시에 실수가 없으시고 신실하신 분,
우리가 기도한 것을 단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분,
우리를 축복하시는 분,
그것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하나님을 신뢰하며 버틸 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아멘이십니까? 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일어나서 같이 기도합시다.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겁니다.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겁니다.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이 내 기대와 다를지라도
또 기도가 속히 응답되는 것 같지 않을지라도
또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을지라도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롬1:17, 합2:4
우리 같이 좀 기도하실 때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분명히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실수없으시고 완전하심을 신뢰함으로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신 것을 믿습니다.
때와 시간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응답하시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