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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3장 그때의 감격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LNCK 2026. 7. 3. 11:1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단기선교>     ▣ 사랑

하나님 나라 3 : 그때의 감격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3:1-3 2026.06.21 Youtube

 

◈그때의 감격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호3:1-3         2026.06.21.[하나님 나라 3]

 

하나님의 나라를 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이루어지는 그곳에,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평강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자, 이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기로 결단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원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최우선적으로 기대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중요한 질문이기에,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질문 앞에 헌신 또는 섬김을 떠올리시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섬김과 헌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죠.

다만 하나님이 헌신과 섬김을, 최우선적으로 원하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많은 것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이루어나가시는 것을 보고

감사하고 감격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가는 삶을,

곧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삶'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감격이 사라져 버린 오늘날의 기독교

자,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 여러분에게 아주 간단한 질문을 드려볼게요.

마음속으로 솔직하게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격했던 적이 마지막으로 언제였습니까?'

 

분명히 예외는 있습니다. 그러나 참 많은 경우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감사와 감격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그날,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감격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세월은 흘러 지나가고,

교회 생활을 한 지 10년, 30년, 50년이 더 지난 오늘날에

우리의 삶에서 감사와 감격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때의 감격은 도대체 어디로 다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오늘날 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서도 그저 무덤덤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사라져버린 감격을 어떻게 되찾아올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호세아서 3장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우리에게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조명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점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입니다.

 

이 관점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의 삶에 살아 역사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대로

하루하루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감격에 사로잡힌 바 되어 살아가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먼저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문 :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 관점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왜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을, 구원의 은혜를, 감격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답 : 그 첫 번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운을 띄워 놓고, 이제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청년의 시절로 한번 돌아가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직 결혼하기 전인데, 어느 날 하나님의 명확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가서 매춘부와 결혼하거라’ 정말 황당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말이 되나요?

세상에 매춘부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호세아의 삶에서는,

이것이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의 삶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호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명령하시죠.

자, 그의 아내였던 고멜이 직업상 매춘부였는지는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호1:2절에 나오는 ‘음란한 여인’이라는 표현은,

대부분의 경우 매춘부에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겠죠.

그녀가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한 삶을 살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매춘부와 같은 여인과,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시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을까요? 그들이 거룩한 나라였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강대국이었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신7:7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는지를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요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7: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던 이유는, 가장 작고 연약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을 자격이 가장 없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런 나라를 선택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죠.

 

마찬가지로 아무 자격 없는 고멜을 선택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자, 호세아도 처음부터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지는 않았겠죠.

그러나 고멜을 자기의 아내로 맞아들인 후로는,

호세아는 그녀만을 바라보고, 그녀만을 사랑했습니다.

 

그런 남편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여,

아내 고멜도 호세아만을 바라보고 사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만은,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시선과 마음은 계속해서 다른 남자들에게로 향합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녀는 집을 나가서,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버립니다.

다른 남자와 새살림을 차린 겁니다.

만일에 이런 일이 여러분의 삶에 일어났다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지 않겠습니까? 분노와 배신감에 치가 떨릴 것입니다.

 

▲자,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한번 호세아의 삶에 임합니다.

(하나님은 꼭 절묘한 타이밍에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는 침묵을 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치 않을 때는 꼭 말씀을 하십니다.)

 

자,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과연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호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전하신,

그리고 사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이, 지금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셨죠.

자격 없는 그들을 선택하사 한결같이, 그들을 사랑해 주시고, 그들만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들 이스라엘도 하나님만 섬겼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은,

그들은 그런 어마어마한 은혜를 받고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합니다.

끊임없이 우상 숭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영적인 간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륜 행위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실 수가 없어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그들을 한결같이 바라보심으로써,

‘내가 그들을 용서하고 품을 터이니, 너도 가서 네 아내를 사랑하거라’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자 이제 호세아가 가서 그 집 나간 아내를 찾아옵니다. 값을 치르게 되죠.

이상하지 않나요?

내가 내 아내를 다시 찾아오는데, 도대체 무슨 값을 치러야 됩니까?

 

자 오늘 본문 말씀에서, 호세아가 치렀던 가격이 정확하게 얼마인지를 알면,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호세아가 치른 가격이 얼마였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호3: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보리 한 호멜반’은, 은 15세겔의 가치를 가집니다.

자 그렇다면 호세아가 지불했던 총액이 얼마이죠? 은 30개입니다.

은 30 세겔을 주고 그 아내를 찾아왔다라는 겁니다.

 

은 30 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출21장에 보면, 그것은 그 당시에 여종, 한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마도 고멜이 다른 남자와 새 살림을 차렸는데,

그 남자가 매춘부와 같은 고멜을 진심으로 사랑했을까요? No

그냥 순간적인 쾌락만을 원했겠죠.

 

결국엔 그 남자는, 이 여인을 이용하고 배신해 버립니다.(팔아버립니다)

결국 그녀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는 가서, 그 노예의 몸값을 치르고, 다시 찾아오는 겁니다.

 

▲자, 그런데 그렇게 음행을 한, 그렇게 불륜 행위를 벌인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시는지가 호2장에서 아주 절묘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호2:19~20절에 보면 ‘내가 너에게 장가 든다’ 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는데요.

여기서 사용된 ‘아라쉬’라고 하는 히브리어가 참으로 훌륭합니다. 흥미롭습니다.

 

자, 여러분도 한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인데,

그들이 결혼했어요. 그런데 이 여인이 집을 박차고 떠나서 다른 남자와 새살림을 꾸렸습니다.

 

그런데 노예로 전락한 그녀가, 다시 몸값을 치르고 와서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재혼이겠죠.

그런데 이 히브리어 아라쉬라는 단어를 보면, ‘재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깨끗한 결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혼보다 초혼에 훨씬 가까운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바라보신다는 겁니까?

마치 아무런 잘못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그 어떤 죄도 지어지 않은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어떤 음행이나 불륜도 없이, 순결하고 정결한 처녀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맞아주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이 한번 고멜의 입장이 되어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매춘부입니다. 그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나를 혐오했어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커녕,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없고, 당연히 결혼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나를 감싸 안아주었어요.

그렇게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호세아는 한결같이 나만 바라보고, 나만 사랑했어요.

근데 내가 그 사랑을 배신했습니다.

집에서 뛰쳐나가서 다른 남자와 새살림을 꾸렸어요.

 

그런데 그 남자한테 이용당하고 배신당해서, 이제 나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 인생이 끝이로구나’ 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호세아가 다시 찾아와요.

나의 몸값을 지불하고, 나에게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합니다.

‘여보,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가요.’

 

여러분이 만약 고멜이었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고멜이었다면, 그 순간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만을 뚝뚝 흘리겠죠.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너무 미안하고, 두 번째는 너무 감사하기 때문이겠죠.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이렇게 크고 놀랍다라는 것이죠.

 

▲자, 그런데 왜 우리의 삶에, 감사도 감격도 다 사라져버렸을까요?

자, 묻겠습니다. 한번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오늘 설교의 첫 번째 메시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라는 메시지를

여러분이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었는데요.

그 메시지를 들었을 때 정말 그게 무한 감동이요, 감격으로 다가오셨던 분

이 자리에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아마도 없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것은요.

우리에게는 더 이상 감격스럽게 다가오지 않고,

아주 진부한 표현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되는 ‘이 고멜이 나를 상징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다만 그것은 아주 머나먼 과거의 나였다’라는 겁니다.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에

내가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크고 놀라웠죠.

그때는 나도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렸어요.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런 그런데 그로부터 10년, 30년, 50년이 더 지나간 오늘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메시지는, 전혀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진부한 표현밖에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삶의 감사와 감격이 메말라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고멜이,

과거의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성경을 잘못 읽으신 겁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고멜의 모습이 현재, 오늘, 지금 나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해 주셨죠.

그날 이후로 이제 이스라엘은 거룩한 삶을 살았나요?

아니요. 구원받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우상 숭배를 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계속해서 음행하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불륜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죠.

딱 그것이 우리의 삶 아닌가요?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는 어마어마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믿은 후로, 우리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신부답게 살아갔나요?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겁니다.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요.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우상 숭배를 일삼았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잘 알고 계시죠?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나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는 것,

한마디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드는 그 모든 것! 그게 우상이에요.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우리의 마음에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수도 없이 많은 우상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예배자로 서있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받은 백성이 되어

감히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그분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멜처럼

하나님이 여전히 한결같이 우리만 바라보고, 우리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고멜의 모습이,

단순히 나의 과거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오늘, 지금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오늘도, 그리고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한결같은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십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오늘도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함께 조명을 해보았는데요.

 

◑2. 이번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서> 함께 말씀을 조명해볼까요?

 

문 : 우리의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때,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감격하며 살 수 있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답 :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운을 띄워 놓고, 이제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해 볼게요)

 

▲자,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호세아가 고멜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하죠?

 

호3: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세아가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이죠?

‘여보, 내가 전부를 내어걸고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사랑할게요.

그러니 당신도 나만 바라보고 나만 사랑하세요.’

 

언젠가 예수님도 우리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신 적이 있죠.

요10: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노라’

즉 예수님은 목숨 걸고, 전부를 내어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마태복음 22장에서, 사람들이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셨죠.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이제는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 마22장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크고 첫째 되는 계명’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동안 교회 생활을 어느 정도 하셨다면

수도 없이 많이 이 말씀을 읽어보셨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에게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할게요. 솔직하게 답해 주세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러분이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정말 기쁘셨던 적이 있으신가요?

 

‘내가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구나. 우와 기쁘다!’ 이런 생각 해보신적 있으세요?

아마 거의 없거나, 아예 없을 겁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기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시는구나,

하나님을 그냥 적당히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 걸고 사랑해야 되는구나.

이거 큰일 났는데?’ 이게 우리에겐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복음 수업] 마지막 날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죠?

이 메시지는 우리가 부담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메시지가 아니라,

기쁨과 감동으로 받아야 되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설명드렸죠?

 

우리가 잘 생각해 보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과격한 메시지라서,

세상 그 누구에게도 우리가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나랑 가장 친한 친구나, 지인에게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나의 자녀에게도, 또는 나를 낳아주신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에요.

 

아무리 부모님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평생 나만 바라보고 나만 사랑하라고 하겠습니까?’

근데 잘 생각해보면, 전 세계에서 이 말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상이

딱 한 명 있기는 있습니다. 누구라고 말씀드렸죠? 제 아내예요.

 

제 아내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여보, 내가 전부를 내고 당신만 사랑할게요.

그러니 당신도 나만 바라보고 나만 사랑해 주세요!’

 

(이런 요청은, 하나님이 나를 아내로 여겨주신다는 뜻이죠.

이것이 바로 호세아-고멜의 관계가 보여주는 메시지이죠!)

 

이젠 말이 되죠. 왜 그럴까요?

부부는 언약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서로만 바라보고, 전심을 다해 사랑하기로 약속한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22장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전부를 내어 걸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의도한 바가 무엇인가요? 이것은 하나님의 프로포즈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청혼입니다. 우리를 거룩한 신부로 삼아주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를 거룩한 신부로 맞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은혜입니다. *부부관계이기 때문에

 

오늘날 참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은혜라고 생각해요.

근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헌신이고 희생이며 섬김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은혜이고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건 더 큰 은혜입니다.

 

▲이 메시지가 별로 피부에 안 와 닿으시죠?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저를 잘 따라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어렸을 때 중남미 과테말라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아직 십대 소년일 때, 우리 교회 선교팀과 함께

과테말라 빈민촌을 찾아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지 골목’으로 유명한 데가 있는데요.

골목골목마다 노숙자들이 차고도 넘쳐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작은 팀이었기 때문에, 그 모든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할 수는 없었고,

한 골목의 한 섹션을 선택해서, 거기서 사역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느 골목으로 가면 좋을까?’를 생각하면서 쭉 걷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한 골목에 딱 들어섰을 때, 정말 어마어마한 악취가 진동하는 겁니다.

딱 봤더니,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앉아있는 노숙자를, 우리는 보게 되었습니다.

그 배설물 위에 앉아서, 그는 무엇인가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딱 보는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확신이 무엇일까요?

‘다른 데는 몰라도, 이 골목 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되겠구나’

 

그 누구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눈빛에서 눈빛으로 혼연일체가 되어버렸습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우리는 그 골목에서 재빠른 걸음으로 다시 도망 나오기 시작했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그 골목에서 멀어지고 있었는데요.

 

바로 그 순간, 그때 조금 늦게 도착하신 분이 한 분 계셨거든요.

그분은 이제 뒤에서부터 오잖아요. 그분이 막 달려오면서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팀장님, 우리가 오늘 복음을 꼭 전해줘야 되는 대상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그 팀장님의 손을 잡고 막 어디론가 이끄셨는데,

그분이 우리를 이끄신 그곳은 과연 어디였을까요?

그 배설물 위에 앉아있는 대상입니다. 그 노숙자에게로 우리를 인도하는 겁니다.

 

그때 팀장님의 표정이 어떻게 일그러졌는지를.. 저는 참 잘 보았습니다.

그렇게 우리 전도팀을 이끄신 분은 초신자였어요.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분이었어요.

 

보통 예수님을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분이, 가장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차마 그 초신자 분에게,

‘아휴, 이 골목만은 피합시다’ 라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 그분이 실망할까봐,

적어도 신앙의 선배들이, 신앙의 후배에게, 본은 보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결코 원하지 않았는데, 등떠밀려서 억지로 마지못해 그 노숙자 앞에 섰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항상 찬양으로 시작이 되었는데요.

찬양을 부르는데 너무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뭐가 신경이 쓰였을까요?

 

그 오물이 점점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 같은 거예요.

‘어? 이거 밟으면 안 되는데?’ 그 생각을 하니까, 찬양이 집중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더 찬양의 가사에 집중하며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찬양이 계속 진행이 되는데, 갑자기 저의 눈시울이,

그리고 모든 팀원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노숙자의 모습을 통해서, 저의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처음 찾아오셨을 때, 내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이게 나의 모습이로구나’

 

배설물보다 더 더러운 죄의 구렁텅이에서,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죄인인지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어?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그렇게 추악한 죄인인 저를,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무조건적으로 품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내가 예수님을 믿어,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니, 눈물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우리 모두가 그 오물을 밟고 넘어가서,

다같이 그 노숙자를 품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펑펑 울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제가 생생하게 기억나는... 선교 현장의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자 그런데 만약에 말입니다. 이 이야기에 후속편이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서 문을 열어보니, 그때 그 노숙자가 나를 찾아온 겁니다.

그때와 똑같은 모습이에요.

 

온몸에 오물이 묻어있고, 악취가 진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아무도 나의 곁에 머물러주고 싶지 않아 했을 때,

당신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었고,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과 은혜에 제가 너무 감격해서,

이제는 제가 여러분과 결혼하여, 평생을 여러분을 섬겨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와 결혼해주세요.’

 

만약 그 노숙자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여러분은 기쁘시겠습니까?

그 헌신의 고백이, 여러분에게 감동으로 다가오겠습니까?

 

아니죠. 황당하실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한 번 정도 가서 은혜를 베풀어 줄 수는 있어요.

내가 심지어는 그 사람을 사랑으로 한 번 품어줄 수는 있습니다. 그건 괜찮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나와 결혼을 하여, 평생을 나와 함께 산다고..?

그건 안 돼요! 왜 안 되죠?

차마 우리가 말은 못하겠으나, 우리의 솔직한 심정을 적나라하게 그대로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나와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불편한 진실 아닌가요?

 

그런데 적어도 그 노숙자와 나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예요.

인간들 사이에서, 누가 높은들 얼마나 높으며, 낮은들 얼마나 낮겠습니까?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죄인이기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에는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차원이 달라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영화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 되시며, 주관자 되시고, 절대자 되시는 분입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린 너무나 작고, 보잘것 없으며, 비천하고, 미천하며, 추악한 죄인입니다.

존재론적으로는 우리는 허공에 떠돌아다니는 먼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훅~ 불어버리시면 날아가 버릴 수밖에 없는,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게 비천하고 미천하며 더럽고 추악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신부가 되어서, 하나님을 평생 사랑하며 살겠노라라고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되겠습니까?

 

그럼 우리의 고백이, 하나님께 감동이 될 거라고 정말 생각하시나요?

하나님 입장에선 황당하겠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는 있어요.

근데 감히 우리가 하나님의 신부가 되겠다고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주셨어요.

그리고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사, 우리에게 신부가 되어 달라고 청혼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일생일대 가장 큰 축복이고, 가장 큰 은혜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 주신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나 같은 죄인이 감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바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부를 내어 걸고 목숨 바쳐 너를 사랑하노라.

그러니 이젠 너도 나만 바라보고 나만 사랑하지 않겠니?’

 

이 하나님의 초청에, 우리는 이제 어떻게 반응해야 될까요?

우리가 그 은혜 앞에 뭐라고 말해야 되겠습니까?

 

나를 사랑하시는, 그리고 나를 사랑의 관계로 초청하시는 그 압도적인 은혜 앞에

우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고, 그저 감사하고 감격할 뿐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므로, 오늘도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살아가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합니다. 우리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