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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5장 헌신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LNCK 2026. 7. 3. 16:5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교회론

헌신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딤전 5:9-16) 2026.06.28.  Youtube 

 

◈헌신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딤전5:9~16               2026.06.28.

 

지난 주는 “약한 자에게 복이 있나디”, 이번주는 “헌신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디모데전서 강의 13번째입니다.

 

◑딤전5: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초대교회에서 공식적인 과부로,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자격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몇 세 이상이요?   '60세 이상'

아마도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하고, 재혼 가능성이 없는 사람으로 정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조건은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

그래서 앞부분에 교회의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서는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표현이

두 번 나왔었어요. 딤전3:2, 12

 

이번에는 정반대로 ‘한 남편의 아내’입니다.

그러면 평생에 결혼을 딱 한 번만 한, 재혼을 한 사람은 해당이 안 된다는 얘기냐?

그 얘기가 아니고요. ‘한 남편의 아내’라는 표현은,

결혼 생활에 충실했던 사람에 대한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교회가 ‘과부 명부’에 올릴 사람들을 신중하게 선정한 이유는,

그들에게 재정을 지원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단순한 지원 대상이 아니라,

오늘날의 권사님들처럼 일종의 직분자, 사역자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제가 ‘한 남편의 아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요.

현대인들은 조급증에 시달리며 인생을 살고 있지 않나요?

 

여러분 스마트폰 약정기간이 2년이잖아요.

그러니까 2년마다 스마트폰을 계속 바꾸시는 분들이 있죠.

 

또 MZ세대들은 직장도 조금만 조건이 좋으면, 거기로 또 옮기고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배우자도 마음에 안 들면 바꾸고 싶어하고,

요즘, 너무 ‘짧은 호흡’으로 인생을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런 선택들은, 물론 자신을 위한 선택이기는 한데,

자신의 내적 지구력을 떨어뜨리는 선택이 된다는 생각은,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 인생의 본질에 있어서는, 가변성보다는 지속성이 중요하다 라는 거죠.

‘내가 이것만 바꾸면, 내 인생이 편해지지 않을까?’

‘내가 이것만 바꾸면, 내 인생이 덜 고생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결혼도 옵션이 된 시대지만, 이혼도 옵션이 됐고,

하여튼 간에 옵션이 없는 삶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굉장히 답답해합니다.

내가 뭔가를 주도적으로, 내가 편한 대로 선택하고 싶은 거죠.

 

▲그러나 인생의 본질인 가정과 신앙에 관해서는,

더 많은 옵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은 헌신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평생에, 하나님 한 분께 헌신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결혼하신 분들은, 여러분의 배우자에게 헌신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행복은 해피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헌신해서 오는 것입니다.

 

문명의 이기나 문화적 양식은 다양하게 누리셔도 좋은데,

일심단편 오직 한 길을 가야 될 때가 있는 거예요.

 

평생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예배와 찬양,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땐, 단순한 삶이지만, 깊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거죠.

 

또 한 남편, 한 아내에게 헌신하며 사는 건,

좋으면 좋은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그 길을 계속 가시기를 권면합니다.

 

고통과 행복의 이중주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이거(고통)를 지나가지 않으면, 사실은 사랑의 본질적 의미를 깨닫기는 어렵게 돼 있어요.

그런 지속성이 있는 삶이 크리스찬 사역자, 헌신자에게 요구된다라는 거예요. *본문에 과부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과부’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 오늘날은 권사님에 해당되니까,

크리스찬 헌신자들에게 요구되는 4가지 선행의 덕목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제가 이걸 집중적으로 얘기하려고 하는데요.

 

▲1. 첫 번째는 ‘자녀를 양육하며’

크리스찬 헌신자들에게 다른 그 무엇도 아닌 1순위의 선행 덕목이 ‘자녀양육’이라는 것이죠.

이거는 우리 모두가 주목할 만하죠.

 

그럼 크리스찬 자녀들에게는, 1순위의 선행덕목이 뭐였을까요?

‘부모 공경’이었죠.

 

그러니까 이번에는 크리스찬 부모들에게는, 1순위의 선행이 자녀양육이에요.

우리는 자녀양육이, 요즘 시대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사람이 하는 거라는,

약간의 패배의식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이걸 (자녀양육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사랑하시듯이,

우리가 우리의 닮은 꼴인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마땅히 요구하시는 겁니다.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래서 하나는, 자녀들의 정서적 안정감,

또 하나는 ‘말씀으로 양육해야 된다’

 

그러니까 아버지들은, ‘돈 벌어서 내가 학비 대주고 생활비 대주지 않았냐?

난 내 할 일을 다 했다?’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또 엄마들은 ‘좋은 학원 보내주고, 좋은 학교 들어가게 해주고, 그러면 내 사명 다 했다’

그게 아닌 거예요.

 

여러분 크리스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거구나’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시켜주는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지혜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훌륭한 목회자 디모데 뒤에는, 그에게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고,

눈물로 기도해 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가 있었던 거잖아요.

 

자매님들이 교회를 사랑방처럼 생각하고, 자주 모이시고,

요즘 ‘헤이븐 커피’가 잘 돼서 대표로서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물론 저는 아무런 사례를 안 받지만,

그런데 자매님들이 이렇게 교회에 열심히 모이시는 건 좋지만,

언제나 가정이 최우선의 사역지라는 걸 잊지 마셔야 돼요.

 

요즘 또 신세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주 데려오지 마라. 손주 못 봐준다’

이렇게 완전히 선을 그어버리시는 분들이 있는데,

여러분 무조건적인, 무제한적인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 사랑과 축복이

손주들에게는 어마어마한 블레싱이거든요.

 

이거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자녀들과, 아닌 자녀들은

이 내면의 자신감과 충만함이 달라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 자녀를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대답을 안 하시지만, 마음속으로 대답을 하신 걸로 알고 진도 나가겠습니다.

 

▲2. 두 번째 선행의 덕목은, 나그네 영접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문화는, 중근동의 보편적 문화입니다.

 

왜냐하면 치안이 불안하고 환경이 열악하던 시대에,

나그네가 길을 잃고 도움을 받지 못하면, 생존이 위태로울 때가 많았어요.

 

그러니까 중근동에 사는 사람들은, 그대로부터 나그네는 ‘무조건 거둬서 도와준다’

(*중동에는 ‘나그네 환대 문화’가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죠.

최근까지도 지방에는, 호텔 등 숙박시설도 적었고..

그래서 누가 객지에서 오면, 집에서 재워주는게 당연했어요)

이거는 자기도 똑같은 상황이 되면, 누군가가 그렇게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첫 번째가 '자녀 양육' 이게 아주 기본적인 덕목이라면,

두 번째, 2순위가 ‘나그네 영접’이 된 이유가 뭘까요?

 

또 이 초대교회 당시를 생각해보면,

여기서 나그네는 대부분이 도시에서 도시로 지역에서 지역으로 떠돌아다니는

순회전도자나, 순회사역자들이었어요.

 

그러면 여러분 신약성경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순회 전도자로 사역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예요? 네 사도 바울과 그의 전도팀이죠.

 

사도 바울이 도시마다 다닐 때 영접해준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정말 평탄하게 복음사역을 했던 거죠.

 

행16:14~15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그러니까 사복음서에는, 마르다가 거의 굉장히 주도적인 알파걸로 나오는데,

사도행전에는, 루디아도 그런 타입이죠.

 

여성 가장으로서 큰 사업을 했고, 그리고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우리 집에 무조건 거해야 된다’ 이렇게 강권해서 바울 일행을 머물게 합니다.

 

루디아라는 여성을 통해서, 사도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다니는 곳마다 재정이 힘들어도,

텐트 메이킹, 그러니까 자기가 밤에 텐트 만드는 일을 해서 자급자족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서신서를 쭉 보면, 딱 두 번, 개별 교회의 재정 지원을 받은 적이 있어요.

 

바로 빌립보 교회죠.

빌4장을 보면, 빌립보 교회로부터 두 번이나 도움을 받았어요. 빌4:15~16

(빌4장에 ‘루디아’ 이름이 안 나오지만, 루디아가 주도해서 도왔을 것으로 추정하죠)

 

본문에 나오는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단어는 원어상 한 단어는 ‘영접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영접은 뭐를 의미하는 거냐면,

순회 전도자를 자기 가정에 모시고, 숙박과 식사를 비롯한 모든 것을 섬기는 것을 의미해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섬겼던 거죠.

 

△제가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서, 물론 한국교회만은 아닐텐데,

좋은 목회자를 청빙하려고 하는 모습이, 때로는 우려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왜냐면 마치 목회자를 교회 영적 리더로 세운다기보다는...

그런 거 있잖아요. (기업에서) CEO, 최고 경영자를 하이어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고용된 경영자’ 정도로, 목회자를 생각하는 경향이,

한국교회에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영 실적이 안 좋거나, 교회가 부흥이 잘 안 되면,

혹은 최고 주주단과 관계가 안 좋으면, 즉 장로님들하고 관계가 안 좋으면,

그러면 쫓아내고 새로운 경영자를 세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교회들은 너무 안타깝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딱 써놓고 나서 생각난 분이 있는데,

전에 어느 지역에서, 그 장로님이 다니시던 교회에서,

목회자가 성도들을 대부분 데리고 나가서, 새로 개척을 했다는 거예요.

 

장로님은 너무 마음이 어려우시고, 안타까운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1516교회 C4C에서 교회개척운동을 하니까,

‘목회자를 한 명 파송해 주십시오’ 요청도 하시고, 그리고 하루는 저를 초대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그냥 대화를 하기 원했는데, 굳이 식사자리에 초대를 하셔서 제가 갔어요.

그래서 그 장로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본인이 건물주로서, 그 건물 안에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를 고용해서 부리고 싶어 하시는 분이더라고요. 하이어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명확하게 말씀드렸어요.

‘목회는 목회자가 영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니까 그 전에 목회자도 도망간 겁니다.

저는 목회자를 못 보내드리겠습니다!’

제가 식사를 거의 안 하고, 그냥 나왔어요.

밥을 먹으면 밥값을 해야 되잖아요.(부담된 거죠)

 

여러분 오늘날, 그냥 목회자들을 교회에서 하이어했다가,

맘에 안 들면 쫓아내고 또 다시 하이어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요...

 

목회자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성도들은 그런 목회자를 신뢰할 수 있는,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시기를 축복합니다.

 

△1516교회와 C4C는 앞으로 도시마다 저희가 여름에 ‘도시정탐 사역’하는데

도시마다 교회를 세우려고 하잖아요.   *C4C : "교회를 위한 교회(Church 4 Church)"

 

그래서 정말 루디아 같은 헌신자들이 필요한 거예요.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죠.

 

그래서 저는 도시를 집회나 어떤 사역에 있어서 방문할 때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도시에서 루디아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고넬료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런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갈 줄로 믿습니다.

 

▲3. 세 번째 덕목은 ‘섬김’입니다.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씻기며)’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것은 고대 중근동의 보편적인 풍습이었죠.

 

포장도로가 많지 않았고, 또 샌들을 신고다니다 보니까,

사람들이 조금만 길을 가고 외출을 하면, 다 발에 먼지가 쌓이고 더러워졌거든요.

 

실제로 성도들을 초대해서 발을 씻어주기도 하고,

또한 성도들의 인생에 켜켜이 쌓여있는 슬픔과 아픔의 눈물을 씻어주고,

인생의 수치와 고통, 그리고 그 인생의 분노와 절망... 이런 걸 씻어주는 거예요.

 

신앙적으로 방황하고, 고민이 많고, 그런 사람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롬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사도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도 복음적인 삶을 권면하는

거의 첫 번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제 토요일부터 상반기 공동체 종강예배 시작을 했는데요.

순마다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나누고, 그것을 통해서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

그런 간증들을 들으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내적 치유가 여러분의 인생에도 여러분의 가정에도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치유의 사건은 언제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말씀이 내 삶을 터치하고, 성령께서 내 영혼을 터치하실 때,

상처와 거짓으로부터 해방받는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치유가 일어나면, 첫 번째 나타나는 현상이 있어요. 그 현상이 뭐죠?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그전에는 말을 못했는가요?

아니요, 말을 다 잘 하는데, 자기 상처를 얘기할 때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요.

 

제가 어렸을 때 우울감과 상처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이거가 치유가 안 됐을 때는,

말을 하려고 하면 목이 메어요. 몸이 떨려요. 막 땀이 나요.

눈물이 나기도 하고... 말을 하는 게 너무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치유가 되고 나니까, 이걸 말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내가 도저히 꺼내기도 힘든 고통스러운 이 기억과 상처들이,

간증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심한 우울증이 있었다는 것,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는 것,

이게 평생의 간증이 되는 거예요.

 

△저는 교회 예배 오시는 분들 가운데, 여전히 인간관계에 대한 상처가 있으시고,

교회 공동체에 대한 아픔이 있으신 분들...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의 심령을 터치하고 계시다면,

이제는 교회 공동체로 들어오시면 좋겠어요.

왜냐면 하나님의 치유하심의 완성은, 사람들과의 나눔을 통해서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여러분이 이 나눔의 공동체 가운데, 정말 순마다 그런 간증들이 굉장히 많아서

저는 이곳에 여러분이 들어오셔서, 새가족반에도 오시고, 순에도 들어오셔서

나눔 가운데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 안에 이렇게 진심으로 다른 성도들의 발을 씻겨주고, 눈물을 씻겨주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 분들을 만나면 완전히 천국을 경험하는 겁니다.

 

바나바가 그런 사람이었는데,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갔는데, 교회가 부흥하게 된 이유를 계속 보여주세요.

부흥하게 된 이유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를 맨 처음 얘기하지 않고,

뭐를 1번으로 얘기했어요? ‘착한 사람’ ↑

 

사이프러스(구브로) 섬에 있는 유산으로 받은 자신의 부동산, 전재산을

가난한 성도들에게 나눠줬던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이 사람이 닉네임 자체가 ‘권면과 위로의 아들’이라는 그런 닉네임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여러분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여성도도 한 명 거론을 해보면,

행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다비다는, 가난한 여성도들을 위해서 옷을 직접 만들어서 지어 입히고

그렇게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많아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해서, 죽은 다비다를 살려내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시죠.

 

여러분 다비다와 같은 사람들, 또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진짜 지상에서 천상을 경험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죠.

 

▲4. 네 번째 덕목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환난당한 사람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피해자’입니다.

 

자연재해가 되었든, 사회적인 재난이 되었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 ‘구제’라는 단어가 한 단어이긴 하지만,

이 의미를 명시적으로 설명해보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준다고요?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거예요.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해 줄 수도 있죠. 격려해 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밥 한 끼를 먹이고,

또 어려운 사람에게 내 옷을 하나 벗어서 입혀주고, 이렇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거예요.

 

△제가 며칠 전에도 한 분의 간증을 들었는데

새벽 기도 끝나고 기도를 한참 하시다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엘리베이터에 한 젊은 자매가, 아니 그렇게 새벽예배를 드리고 가는 사람인데도

얼굴이 너무 초췌하고 힘들어 보이더래요.

 

그래서 위로의 말을 한마디 했더니, 그냥 바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더래요.

권사님이 안아주니까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힘을 얻었다고’ 하면서 가셨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성도 간에, ‘정말 그 사람의 필요를 실제적으로 도와주려고 하는가?’

이번 학기 마가의 다락방, 이번 주로 마지막인데요.

 

첫날 제가 ‘대전신대 화장실을 고쳐드려야겠다’ 말씀을 드렸어요.

내년에 리조이스 캠프를 확장하면서, 중부권의 핵심 도시가 어디예요? 대전이죠.

 

대전의 대전신대 청소년들을 모아서 캠프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대전신대를 가보니까, 강당 건물에 저희가 다 고칠 수는 없지만,

하여튼간에 저희 학생들이 가서 사용할 공간도, 옛날식 화장실들이 많은 거예요.

 

요즘 친구들은 ‘나이키’라고 그러더라고요. *과거의 수세식 변기

왜 나이키냐고 그랬더니, ‘자세가 나이키지 않습니까?’ 나이키래요.

 

그래서 1층과 2층과 5층을, 청소년 친화적인 화장실로 바꿀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근데 이 얘기를 했더니, 정말 많은 분들이 실제적인 도움을 주신 거예요.

 

‘제가 그 화장실 고치는데 헌금하게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뜻을 모아서, 지금 견적을 내고 있는 중인데, 잘 진행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어려운 사람이 있을 때 ‘그냥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마음뿐이 아니라, 기도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가요?

 

△행10: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고넬료는 이방인 백부장이었어요. 로마군 장교였는데,

고넬료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의 기도만 들으신 게 아니라, 그의 구제를 기억하셨어요.

 

이 사람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어려운 유대인들, 어려운 주위 사람들을 구제한 거예요.

 

하나님이 그거를 기억하셔서, 베드로가 얼마나 바쁜 사도였습니까?

그런데 바쁜 베드로 사도를 거기 가이사랴까지 보내서,

그의 온 집안을 구원하는 은혜를 체험시켜주세요.

 

그래서 저는 이번에 이 고넬료의 인생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나의 시선이 함께 머물고,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곳에 나의 눈물이 함께 흐르고,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곳에 내 손길이 닿는 인생’을 산다면,

하나님 절대로 그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를 체험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을 가장 기뻐하시잖아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거니까요.

 

△예수님도 말씀하셨죠.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여러분에게 보답할 (돌려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거예요.

그건 어떻게 보면 자기에게 투자하는 거잖아요.

 

그러나 보답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5:11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그러면 재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남은 인생을 결혼하지 않고, 오롯이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게 사명자로, 거의 나실인처럼 이렇게 서약한 사람들이 중도 포기를 하는 케이스를

얘기한 거예요. 그래서 심각하게 얘기를 한 겁니다. ‘정죄를 받느니라’

 

오늘날 교회로 놓고 보면 임시직이 있고 항존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직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평생을 살겠습니다’ 이런 결단을 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런 결단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직분자 서약 포기

저는 여러분이 평생의 예배자로 헌신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헌신의 고백을, 평생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5:13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제가 남녀 차이에 대해서는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우리 형제님들은 표현력이 부족한 게 단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반석처럼 든든하고, 일관성이 있는 장점이 있으시죠.

또 형제님들은 말을 잘 안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자매님들은.. 애정과 관심이 많고 표현력이 풍부해서 좋은데

때로는 하지 말아야 될 말, 쓸데없는 말, 이런 말이 많아지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맞나요?

 

그래서 오늘 본문의 권면처럼, 정말 한 영혼에 대한 진정성 있는 관심인가?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인가? 라는 거예요.

 

누군가의 아픔, 속 깊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일처럼 안타깝게 여기면서 밤을 새며 기도해 주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을 만나면 너무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단순한 호기심으로 ‘저 사람은 어떤 인생일까?’

호기심으로 그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캐고, 다른 사람들과 뒷담화를 하면서,

가십거리로 전락시키는 사람들이 있어요. 조심하셔야 돼요.

 

▲제가 [보라통독 Q&A 편] 지금 집필하고 있는데요. 한 분이 그런 질문을 했거든요.

‘아니 함이 아버지 부끄러운 얘기 한 번 했다고, 그렇게 저주를 받아야 되나요?’

 

근데 함이 한 번만 그랬을까요?

여러분 이렇게 두루 돌아다니면서, 남의 험담하고 뒷얘기하고... 이게 한 번만 할까요?

 

성경엔 한 번만 기록했지만, 그건 함이 습관적이었다는 것을 뜻하거든요.

아버지가 포도주를 마시고 이제 수치스러운 모습을 가족들에게 떠벌리면서

조롱거리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나서 그와 그의 후손들이 영원히 저주를 받게 됩니다.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가 맞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언어의 순기능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언어의 역기능을 사용하게 되면, 이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으로... 선을 넘어야 되지만, (형제에게 깊이 관심을 가져야 되지만)

그러나 헌신의 마음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으로 선을 넘는 것이라면,

진짜 이거 선 넘는 거예요.

 

저를 한번 따라해보시겠어요? ‘사랑은 선을 넘는 것입니다!’

제가 성향상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선을 넘어서 누가 내 영역에 들어오는 것도 싫고,

제가 남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런데 이제 목회는 선을 넘어야 되거든요.

6월 초에 저희가 [예배교회 컨퍼런스]를 했고

또 6월 내내 ‘마가의 다락방’ 했고

7, 8월에는 ‘도시정탐 사역’하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공동체 교인들 가운데, 이런 얘기가 나온다는 얘기가 저한테 들리더라고요.

‘나는 예배드리러 왔는데.. 나는 회복하러 왔는데..

자꾸 목사님 이거 저거 하라고 시킨다’ 목사가 선을 넘는다는 거죠.

‘우리를 좀 가만히 놔둬라’ 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제 예배를 함께 드리시다 보면 느끼실 텐데,

저는 은근히 계속 압박하거든요.

그래서 저희 목회자들에게 ‘저희 목회의 특징은 압박 목회다’ *‘압박 축구’에 빗대어

 

우리가 여러분 주도권, 선한 일의 주도권을 가지려면,

그래서 제가 이제 계속 ‘선한 일을 하시라’고 끊임없이 은근히 압박을 하거든요.

 

선을 넘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선 넘지 않으면, 여러분도 불편할 거 없고,

저도 불편할 거 없어요. 굉장히 깔끔할 겁니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인 역동성을 갖기 어려울 겁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다 선을 넘는 거예요.

선한 일을 하려고 하잖아요. 선을 넘어야 돼요.

누구 도와주려 하잖아요. 선을 넘어야 돼요.

 

제가 이제 [보라통독]을 매 학기 할 때, 수백 명이 수강을 해도,

항상 매주 질의응답을 받거든요. 그런데 질문을 하시는데, 사건이 좀 부정적일 수는 있죠.

그래서 부정적으로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한 학기 내내 부정적으로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럼 제가 매번 신실하게 답변을 해드려요. ‘참아야 하느니라’

그리고 좋은 마음으로,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답변을 해드려요.

 

그런데 한 7번, 8번, 7주, 8주 이렇게 지나면,

본인도 ‘아 내가 이런 (부정적) 관점의 패턴이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대부분 변화되는데... 한 4년 전입니다. 누군지 저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런데 그 학기에 두 분이 끝날 때까지, 삐딱하게 계속 질문하더라고요.

그분의 삶과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답변에 써서 이제 보냈어요.

 

그랬더니 학기가 다 끝났는데, 수강생 한 분이

‘아니 내가 성경에 대해 질문했으면, 성경에 대한 답변만 해라.

왜 내 삶에 대해서 코멘트를 하냐?’ 그렇게 답이 왔더라고요.

선을 넘지 말라는 거죠.

 

여러분, 제가 성경에 대한 답변만 하면, 저도 편해요.

그러나 그 사람의 내면이 치유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궁금증이 풀릴까요? 안 풀리게 돼 있거든요.

 

하나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 억울한 마음, 하나님께 상처받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하겠어요?

이거 바꿀 방법이 없잖아요.

 

저를 한번 따라해보세요. ‘교회는 선을 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선을 넘는 공동체입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 순예배 때 앉아서,

내 인생에 슬펐던 얘기, 힘들었던 얘기, 지금 내가 가장 고민하는 얘기...

그런 거 왜 꺼내나요? 자기 가족에게도 못하는 얘기들을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서 순예배 드리고 나서, 부부가 오면서 ‘당신 그랬어?’

이런 얘기를 난생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진정성이 있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치유를,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하는 줄로 믿습니다.

 

선을 넘을 때 단순히 호기심으로 내‘가 저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가십거리로 만들려고’

그런 차원으로 선을 넘는다면, 이건 진짜 선을 넘는 잘못된 행동이죠.

 

그러나 방어기제 때문에, 상처 때문에, 자신의 선(한계) 안에 갇혀서 살아가는 분들을 보면

저는 너무너무 안타까워요. 여러분 십자가의 사건,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사건 자체가.. 선을 넘으신 사건이잖아요.

 

영원으로부터 시간으로,

영원히 찬란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죄악과 저주의 땅에 선을 넘어서 다가오지 않으셨다면,

지금 우리는 예배를 드릴 수도 없고, 구원을 갈망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저를 한번 따라해보세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이 두 가지가 신앙의 완성인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선을 넘어야 가능해지는 거예요.

 

인간이 감히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겠어요?

여러분 내 인생도 다 케어를 못하는 사람이면,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섬기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거예요.

진정성을 가지고, 헌신의 마음을 갖고 선을 넘으라는 거예요.

 

근데 제가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마지막으로 깨닫는 거는

여러분 그런데 대표적으로 교회 안에, 어떤 그룹에게 이 얘기를 했어요?

과부에게, 홀로 된 사람, 혼자 교회 나오는 사람,

 

가족이, 일가 친척이 다 나오는 게 아니라,

혼자 교회 나오잖아요. 그러면 굉장히 위축되게 돼 있어요.

 

그러나 자신의 선 안에 갇혀있지 말라는 거예요.

당신은 축복의 통로로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체험한 사람이니까

그 은혜가 당신을 통해 흘러가야 된다.. 절대로 자신의 성 안에 갇혀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축복의 말을 해주고, 정말 진심으로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해주고,

사랑을 베풀어주고, 커피 한 잔도 사주고...

내가 쓸 것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여러분 이 나눔을 선을 넘는 나눔을 해보세요.

그러면 천국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