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딤전 5:3-8 2026.06.21. Youtube
◈약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딤전5:3-8 2026.06.21.
디모데전서 강의 12번째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교회 안의 성도들 간의 관계,
또 신앙과 인생의 본질에 대한 부분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딤전5:3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모세 5경에서도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로서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그들의 신앙 공동체가 직접 돌봐야 되는 대상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에도 연결이 돼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경우에도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을 사도행전 6장에 상당히 중요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 시대에 남자들의 평균 수명은 짧았고,
여성들은 남자들의 노동력 없이는 1차 산업시대에 생계유지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1부예배 이 설교를 마치고 한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께서
‘왜 과부 얘기만 하냐? 홀아비 얘기는 안 하냐?’ 이렇게 질문을 하셨어요.
제가 이렇게 그 당시를 생각해보니까, 일단 로마 제국시대에 로마 시민들의 경우에는
여러분 이제 가장에게 모든 가족의 전권이 주어졌어요.
‘가장에겐 거의 무제한의 전권이 주어졌다’ 이렇게 표현을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돈을 벌어와도, 아버지 재산이었어요. 별로 충격을 안 받으시는데,
자녀들조차도 그 가족의 구성원들이 전부 아버지의 소유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도 연세가 많으신 분들, ‘끝까지 돈을 갖고 있어야 괄시를 안 당한다’
이런 얘기 하시는데, 가장이 재산권을 갖고 있었고, 홀로 되신 아버지의 경우에도
대가족 제도 안에서 이 자식들을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는 수장 역할을 했기 때문에
홀로 되신 아버지들은 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여성들의 문제였던 겁니다. 자 그러면 오늘날 교회는 과부를 존대하는가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을 하다가 홀로 되신 분들이 있잖아요.
또 이런 분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있는가라는 거예요.
▲제가 밴쿠버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밴쿠버에서 이렇게 목회를 하다가
한 가지를 관찰하게 됐어요. 그건 뭐냐면 부모님이 함께 살고 있는 이민자 가정이 있잖아요.
이민자 가정의 청소년이나 청년 자녀들을 교회 어른들이 대할 때는
상당히 존중을 해주시더라고요.
그런데 혼자 유학을 와 있는 청소년이나 청년들의 경우에는
교회 어른들이 좀 쉽게 만만하게 대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됐어요.
저는 관찰자 유형이기 때문에요.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고 정치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을 대할 때도
그냥 그 사람만 대하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 배후에 있는 모든 인간관계를 다 보면서
그 사람을 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 배후에 보호자도 없고 배우자도 없다’
그럼 관계적인 방어라인이 전혀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알고
가볍게 생각을 하거나, 때로는 심지어 공격적으로 대하기도 하는 게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뭐 어떻게 보면 굉장히 그런 면에서는 안타까운 거죠.
여러분 근데, 이제 세상은 이런 방식을 취한다 할지라도, 교회가 이러면 돼야 안 돼죠.
이러면 안 되는데, 교회가 더 심할 때도 있더라고요.
▲그러면 우리 교회는 과부를 존대하는가?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누굴까요?
이거를 좀 생각을 해봤습니다.
두 부류를 얘기하겠는데, 첫 번째는 남편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자매 성도님들이에요.
남편이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
아내도 함께 존중을 받고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이것이 혼자 교회를 다니시는 자매님들이,
‘내 남편도 함께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좋겠다’ 이렇게 마음에 소망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자기가 혼자 다니고 있기 때문에, 홀대를 당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그런 경험이 없으면 감사한 거고요.
교회는 부부가 함께 신앙생활 하기를 장려하지만,
홀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분도 또한 격려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에서 ‘싱글 맘’들에 해당되는 분들을 좀 찾아봤어요.
여러 경우가 있는데, 시간 관계상 두 분만 소개하겠습니다.
1) 예수님이 12살에 성전에 올라가셨었는데, 그때 예수님의 부친이 등장하고,
그 이후에는 부친이 등장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죠.
그 요셉이 그 후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만 등장하지요.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대부분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자 그럼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장남인 예수님과 또 그 외 아들들이 또 많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아들들을 홀로 기도와 애정과 헌신으로 키워낸 싱글맘이었어요.
신약성경의 대표적인 싱글맘이었습니다.
2) 빌립보 교회를 세운 여인이 루디아입니다.
그런데 루디아를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남편 이름이 등장하지 않아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남편 아굴라 이름이 등장하잖아요.
그런데 루디아는 대가족이었어요. 그녀가 세례를 받을 때
그녀의 '온 집(집안 식구)'이 함께 세례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행16:15
이는 혈연 중심의 대가족이라기보다
당시 로마 시대의 확장된 가구(가족, 종, 직원 등) 개념에 더 가깝지만, 어쨌든 대가족이었죠.
그러니까 이 여인은 싱글인데, 남편이 일찍 죽었든지
아니면 남편과 어떻게 결별을 했든지, 아니면 남편이 존재감이 없었던지...
그런데 대가족 household 을 이끌고, 열심히 사업을 하던 싱글 여성으로서
아주 훌륭한 신앙의 여인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교회 안에 이런 상황(과부, 싱글맘)에 있는 분들을,
우리가 중요하게 소중하게 대해야 됩니다.
▲또 부모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차세대 성도들과 청년 성도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면,
주일학교 선생님들도 아무래도 그 청년을, 그 아이를 한 번 더 쳐다보게 되고,
또 이야기 나누고, 또 안부도 묻고, 칭찬도 해주게 돼 있어요.
그런데 혼자 나오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주일 아침에 애를 안 깨워줄 거예요.
그러니까 주일 예배를 종종 빠지기도 하고,
여름 캠프가 온다고 해서 부모가 ‘너 캠프 가야지’ 이렇게 권장해주지 않잖아요.
부모가 ‘교회 캠프는 가지 말고, 그냥 가족여행 가면 되지’
그러니까 캠프도 자주 오지 않아요.. 선생님들 눈에도 잘 안 띕니다.
그러니까 아이들도 교회를 혼자 다니기 때문에, 홀대를 받을 가능성이
교회 안에서 생각보다 큰 겁니다.
물론 교회는 가족이 함께 신앙생활 하기를 권면하지만,
홀로 다니는 자녀들을 우리가 잘 돌봐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히려 그들의 영적인 부모 역할을 해줘야 되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두 명의 인물을 더 생각해보면,
여러분 다윗은 부모에게 일찍부터 버림을 받아서 빈들에서 목동생활을 할 때,
예배자로 헌신했잖아요. 그리고 정말 하나님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 세우게 됩니다.
다니엘도 10대 청소년일 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어요.
근데 바벨론에 끌려가서 ‘내가 신앙적 결단을 해야지’ 그때 부모랑 상담했나요?
아니요. 부모라는 방패막이 전혀 없었어요. 그냥 소년들만 모여있었습니다.
그때 홀로 믿음의 결단을 하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굉장히 중요한 정치 지도자,
영적 지도자가 된 겁니다.
여러분 우리 다음 세대 가운데, 이런 인물들이 나올 줄로 믿습니다.
2026년 저희 교회 표어 한번 읽어볼까요? ‘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
그래서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 소중합니다!’
우리 각자가 인생 여정, 신앙 여정 가운데, 상처와 눈물이 있고
또 기대감과 소망함이 있어서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번 여름에 지역 공동체에서는 도시정탐사역을 하시게 될 거에요.
우리가 지금 [생명의 삶] 요나서, 순예배도 [요나서]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니느웨란 도시에 대해서 가지신 긍휼의 마음을, 요나가 공감하지 못했잖아요.
여러분 도시를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차세대 캠프를 통해서, 또 청년부 아웃리치와 여름사역을 통해서,
한 영혼 한 영혼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내는, 은혜의 감격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5: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과부는 물론 사회적으로 돌봄의 대상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집의 자녀나 손자들이 있다면, ‘교회에서 돌봐주겠지’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가족이 먼저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을 돌봐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진정 받으실 만한 신앙이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이런 어려운 가운데 있는 교회의 노인을 섬기고 돌보는 것은, 선한 일이죠.
그러나 교회 공동체가 나서기 이전에, 가족 공동체가 먼저 나서는 것이 합당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가 누군가를 도와줄 때는, 건강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요.
가령 이런 것이죠. 아이들이 여럿 있는 싱글맘이 경제활동도 해야 되고,
아이들도 다 공부시켜야 되고 돌봐야 된다... 이거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다 책임을 져야 될까요?
이 경우에는 그 싱글맘을 돌볼 수 있는 부모 형제나 가족이 있다면,
가족이 먼저 나서도록 하는 것이 맞죠.
그런데 만약에 그것도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러면,
이 싱글맘이 자신의 시간 스케줄 안에서 적합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여러 모로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돼요.
또한 저희가 앞으로 C4C(교회개척팀)에서 장학사업을 하려고 준비 중인데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청소년이나 청년들, 재정지원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좀 더 긍정적으로 발전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한다면,
학생의 경우에는 본인이 더 열심히 공부해서,
스스로 성적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자신의 인생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 있는...
그런 친구로 키워내는 게 필요하겠고,
또 취준생이라면 적합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면,
진정한 도움은, 도움에 익숙해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거예요.
‘물고기를 계속 공급해 줄 거냐, 아니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거냐?’
그런데 이제 교회에서, 긍휼의 마음이 많으신 분들은
‘일단 막 자기 있는 거 털어서 주는’ 것부터 하거든요.
그런데 이게 안 좋게 부정적으로 패턴화되면,
오히려 그 사람이 스스로 일어나지 (자립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플로잉 flowing 이라는 거, 굉장히 성경적인 것이고 긍정적인 거예요. 할렐루야.
저는 상당히 일찍부터 그냥 플로잉을 제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그게 뭐가 됐든, 뭐 먹는 게 됐든, 뭐 입는 게 됐든, 물질이 됐든,
그거를 더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제가 그냥 주는 거예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나누었어요.
저는 여러분이 이런 플로잉의 삶을,
여러분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거는 굉장히 좋은 거예요. 다만 플로잉을 할 때 지혜롭게 하셔야 된다는 거죠.
저는 여러분이 가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이 교회 안에서 잘 회복될 수 있기를,
건강한 인생으로, 건강한 가정으로 세워지기를 축복합니다.
또 여러분이 성실하게 일해서, 마음도 풍요로워지고, 삶도 풍요로워져서,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런데 누군가를 도울 때, 내 만족감을 위해서 돕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정말 건강하게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진짜 도와주는 거예요.
그런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제가 위 본문을 묵상하는데,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이 표현이 어제 눈에 띄더라고요.
제가 아무리 읽어봐도 좀 이상한 거예요.
여러분 ‘과부’라는 상황 자체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러면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이 구절을 바꾸어서 말하면
‘참 과부로서 외롭지 않은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안 둔다’ 이렇게도 보이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과부라는 상황 자체가 외로운 상황이거든요.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면, 인생에서 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사람들은,
이 외로움이라는 인생의 여백을, 하나님의 임재로 채울 기회로 삼느냐?
아니면 세상 향락, 세상 일락으로 채우는 기회로 삼을 것이냐?
이것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예요.
근데 제가 사실 오늘 본문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일주일 동안 고민했어요.
근데 오늘 본문 5:3~8절 내내 ‘과부’ 얘기하고,
다음 주에 살펴볼 본문 5:9~12절도 ‘과부’ 얘기해요.
그래서 제가 일주일 내내 ‘아니 본문이 과부 얘긴데
이걸 성도들 전체에게 어떻게 적용해서 얘기를 하지?’
▲근데 5절 말씀 중에 ‘외로운 자’에, 제 시선이 멈추게 되었어요.
‘외로운 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부분은 모든 현대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하나님 말씀이구나’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홀로 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제 자녀들 생각해보면, 엄마 아빠가 잠시만 보이지 않아도,
꺼이꺼이 울던 그 어린아이들, 그 ‘분리불안증’에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십대 청소년이 되는 순간,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만의 세계에 들어가서,
‘나의 정체성이란 무엇이냐고?’ 이거 찾느라고 외로운 시간을 갖잖아요.
또 어찌 보면, 가장 친구들을 좋아하고, 가장 이성에 관심이 많을 청년의 나이조차도,
오늘날에는 자아실현이라는... 그 언덕에 서기 위해서,
자신을 굉장히 좁은 트랙 위에 세워놓고 전진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게 뭐지? 진짜 나는 인생을 뭘 하며 살아야 되지?
나는 결혼이라는 걸 해야 될까 말아야 될까?’
도대체 인생에 아무것도 갈피가 잡히지 않는, 그런 외로운 1인 가구 청년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면 중장년이 되신 분들은, 이런 외로움의 문제가 다 해결이 될까요?
보니까, 이게 해결이 안 되더라고요.
여러분 한 사람을 미친듯이 사랑해서 결혼하셨잖아요.
‘내가 저 사람하고 같이 살면 좋겠다’ 이래서 결혼했는데, 중년이 되고 보니,
지금 그 사람 옆에 있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떻게 이렇게 외로울 수가 있지?’
‘이렇게 인생은 철저하게 혼자구나’ 이거를 깨닫는 게 인생이잖아요.
그러다가 부부간의 서로 관계가 어려워져서 사별을 하든 이별을 하든,
결국엔 서로가 갈라서게 된다든지 아니면,
자녀들과도 관계가 어려워져서 관계가 멀어진다든지,
그러면 그야말로 그 인생은 빈들에 홀로 서 있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마는 거예요.
(십대부터 청년, 중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가 다 외롭다는 거죠)
외로운 현대인들이여! 여러분은 그 외로움을 과연 인정하고 있는가요?
아니면 ‘아니야 내 인생은 외로울 수 없어!’
이렇게 외로움 자체를 자꾸 부정하면서 살려고 하는가요?
그러면 이 외로움이라는 게 인생의 어떻게 보면, 긍정적 요소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인생의 본질적인 요소인데,
이거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원망하거든요.
‘어떻게 내 부모가, 내가 어릴 적에도 나를 이렇게 냉대하더니,
내가 나이가 들었어도 나를 여전히 냉대할까?’
‘아니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는 내 남편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내 아내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나?’
‘내가 자식들을 위해서 모든 걸 다 쏟아부었는데, 어떻게 자녀들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여러분, 인생의 본질을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인생은 홀로서기입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인생을 살다 보면, 더 깊이 더 처절하게 깨닫는 것은
‘아 인생은 홀로서기구나!’
다만 그 빈 여백의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이냐가 중요하다는 거에요.
▲인생의 외로움을 통해서, 더욱 신앙에 귀의하는 계기로 삼자
우리가 ‘다윗의 장막’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잖아요.
우리가 다윗을 생각하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예배자’라는 생각만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럼 도대체 그가 평생에 하나님을 그렇게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게 된 이유가 뭐냐고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그가 평생을 고아처럼 외로운 인생이었기 때문이죠.
물론 모두가 외롭다고 해서, 그들이 다 하나님을 찾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다윗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부모도 그를 버렸고, 형제들도 그를 미워했고,
첫 번째 멘토로 등장했던 사울왕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가장 신뢰했던 의형제 요나단과는 평생을 다른 트랙에서 살게 됐고,
첫 번째 아내 미갈과도 관계가 틀어졌고,
자신의 충신들이 나중에는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자식들도 아들들도 자기를 버리죠. 철저하게 하나님이 그를 외롭게 만드신 거예요.
그러면 세상에 외로운 사람이 다윗만 있겠는가? 다윗만이 아니죠.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은, 그 외로움의 인생의 공간을 다른 걸로 채우며 사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그 외로움의 모든 공간들을, 하나님으로 채우며 산 거예요.
다윗의 시편으로 추정되는 시편인데,
시편 여러분 댁에 가서 한번 전편을 읽어보세요. 14절만 같이 읽겠습니다.
시10: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그런데 이 시편에 보면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한다’
어떤 자가 의지한다고요? 앞뒤의 내용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외롭다고 다 주를 의지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악인들은 온갖 자기랑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끌어다가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산다는 거예요.
‘그러나 나는 왕일지라도 장수일지라도, 세상에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사람을 의지해서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외로운 한 사람으로 서서
외로운 예배자로 서서 주만을 의지합니다.
고아와 같이 주만 의지하는 나를 하나님이 왜 안 도와주시겠습니까?’
이 고백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외로움을 여러 가지로 해결하잖아요.
친구들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향락을 일삼아 보기도 하고,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의 외로운 삶의 그 여백에 SNS로 채우고,
넷플릭스 영화, 드라마로 채우고, 유튜브 영상으로 채우고, 요즘 사람들만 그럴까요?
제가 좀 생각을 해봤더니 옛날 외로운 어르신들은
모여서 같이 화투치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그렇게 시간을 죽이면서 사셨잖아요.
뭐 시대적인 양상만 바뀐거지, 인생의 외로움을 대하는 태도는 똑같은 거예요.
‘외로운 자여, 그대는 인생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가?
인생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가?
다른 것으로.. 소망을 두고 채우려고 하는가?’
▲현대인들은 우울증보다 더 심각한 게 조울증이라는 거잖아요.
인생은 기본적으로 우울한 거예요. 이걸 받아들이셔야 돼요.
제가 과거에 우울기질로서 한마디 드리는 말씀은,
인생은 기본적으로 우울한 거예요.
그 우울한 것을 매우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엔터테인먼트와 온갖 각종 자극적인 걸로 끌어올리니까
조증으로 조증에서 우울증으로 뚝 떨어지면서,
사람이 감당이 안 돼서 떠나는 거예요.
여러분 자연 상태 그대로를 보세요.
여러분이 7, 8월에 이제 뭐 바캉스로, 들로 산으로 해변으로 가잖아요.
근데 거기 가서 무슨 특별한 이벤트나 액티비티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자연에서 일주일, 한 달 살아보세요.
심심하기 그지없고, 이렇게 울적하고 적적하고 외롭고 힘들 수가 없어요.
네, 자연상태 그대로, 그 빈 공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처음 책을 쓰려고 했을 때,
작가 생활을 하는 성도님이 저에게 장소를 추천해 주셔서, 제가 무주에 간 적이 있어요.
여러분 무주구천동이라고 들어보셨죠? 우리나라 최고의 청정지역 중에 하나죠.
1급수의 맑은 물과 맑은 공기, 밤이면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그곳에서 한 달 동안 아무도 안 만나고, 혼자 성경 보고, 혼자 기도하고, 혼자 책 썼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 거를 너무나 좋아하고,
혼자 책 보고, 책 쓰는 거는 더 좋아합니다.
그런데도 와 그렇게 한 달로 지내보니까... 너무 외롭더라고요. 너무 울적하더라고요.
‘그 시간을 근데 내가 무엇으로 채우느냐’의 문제인 거예요.
여러분 도시에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가족을 돌보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건
다 좋은 겁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정직하게 자기 진단을 해보라는 거죠.
오늘 본문의 6절을 다시 한 번 보면,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여러분이 인생을 열심히 살기는 하는데, 그 열심히 산 그 이면에
결국에 여러분 자녀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
그러고서는 보상으로 주는 게 전부 엔터테인먼트거든요.
어른들도 다 마찬가지예요. 돈 아니면 엔터테인먼트예요.
그러니까 열심히 산 당신의 인생이 결국에 채우는 게 뭐냐는 거죠.
‘과연 나는 영적으로 살아있으나, 죽어있지는 않은가?’
여러분 만약에 내가 이런 상태라면,
정직하게 여러분의 외로움을 직면하고 인정하셔야 돼요.
‘아 인생은 외로운 것이구나’
그리고 ‘그 외로움은 하나님의 현존 아니고는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라는 거’
이것도 인정을 하셔야 돼요.
이걸 다른 걸로 자꾸 채우려고 하잖아요. 그러면 빈 공간만 계속 넓어져요.
그래서 그 공허함과 그 허무함을 채울 길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의 외로움의 여백을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5:7~8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사도 바울이 이제 ‘어려운 그룹의 사람들 도와줘야 된다’
이런 실천적인 문제를 얘기한 건데,
아니 그거 제대로 하지 않으면 ‘믿음을 배반한 것이고 세상 불신자보다 악한 것이다’
뭐 이렇게까지 강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근데 왜냐면 그게 신앙이기 때문이에요. 참된 신앙을 표현하는 길인 거죠.
그러면 그 당시의 세상은 어떠했을까요? 세상은 다른 결의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로마법에서는 한 집안의 가장에게, 아버지에게
신생아의 생사여탈권이 있었어요. 재산권만 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신생아가 태어나면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거냐,
아니면 이 아이를 버릴 거냐,
심지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이 아이를 노예로 팔아버릴 거냐?
이런 것도 아버지가 결정했어요.
자 그러면 정반대로 또 다른 가정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그룹,
동양에서는 ‘늙은 부모를 산에 버리고 오는 관습이 있었다’ 이런 얘기 들어보셨죠?
우리나라에 ‘고려장’이 있었다는 낭설이 있었는데,
이건 역사학자들이 잘못된 이야기라는 거 다 이미 밝혔습니다. 우리나라엔 고려장이 없었어요.
중국 문헌도 고대 문헌들을 찾으면 중국에도 없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본에는 있었어요. 그래서 ‘오바스테’ 라는 관습이 실제로 있었고,
그 실제 있는 관습을 영화로 만들어서, 또 세상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왜 일본만 그랬을까?
제가 지금 그 얘기를 강조하고 싶지는 않은데,
생존의 문제가 삼국 중에 일본이 제일 심각했다고 생각됩니다.
식량이 너무 부족하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거죠. 사실 만큼 살았다는 겁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고, 성경적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자 어찌되었든 간에 지금 이 본문의 말씀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얘기하는 거예요.
스스로 사람 답게 살 수 없는 어린아이나
나이가 많은 외로운 사람들이 있는 거죠.
그들을 우리가 돌봐주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라고
사도 바울이 강력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오늘 설교를 제가 좀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은 사회적인 약자를 굉장히 귀하게 여기시고
강자 못지않게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우리에게 돌보라고 명하십니다.
제가 이제 설교원고를 쓰면서, 저는 번역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 무슨 단어를 선택하느냐’가 상당히 저에게 신경이 쓰이거든요.
근데 제가 설교문 내내, 앞에 부분부터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이
제 머리에 계속 떠오르는데, 제가 계속 거부하면서 썼어요.
근데 마지막 순간에 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표현을 쓰면서,
왜 내가 설교문 내내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하고 제 자신을 돌이켜 보니까, 이유가 두 가지에요.
1) 첫 번째는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약자가 강자가 되는
하나님의 반전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을 저도 체험했고 여러분도 체험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스스로를 약자로 규정하고 한정짓는 인생을, 너무너무 안타까워하시거든요.
그 표현을 여러분의 인생의 라벨로 붙이고 살지 마시라는 거예요.
2) 두 번째는 또 하나, 우리 모두가 절대자이신 그분 앞에서
다 한없이 연약한 존재들이잖아요. (그래서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을 안 쓴 거예요)
어떤 사람만 약자고 어떤 사람은 강자고,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자들이에요. 이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약자는, 또 다른 약자를 돕게 돼 있어요.
이것이 은혜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비결인 것이죠.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염없이 연약하고, 죄 많고, 비루하고, 누추한 존재여서
하나님의 건지심과 은혜를 받았는데,
그런 우리들이 모여서 은혜의 공동체를 만들지 않고,
세상 강자의 논리를 교회 안에 끌어들인다면... 그게 교회냐는 거예요.
그 교회는 소망이 없는 거죠.
▲그런데 이 시대에 지금 한국 사회를 보면 볼수록, 지금 교육계가 굉장히 심각하잖아요.
우리의 일터도 심각하고요. 우리 동네에서 마트에만 가도
‘내가 돈 몇 푼 주고 물건을 산다는 이유로, 갑질 역할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여러분 지난 5년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초중고 교사가 무려 107명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제 한 가지 기사를 보면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소방관이나 경찰이나 이런 사람들, 이런 공무원들은 순직 인정이 거의 80, 90%예요.
근데 교사는 10%, 20%도 안 돼요. ‘왜 교사는 순직인정이 안 되는가?’
그러면 학교의 교육환경이라든지 아니면, 학부모라든지 아이가 문제가 있었다라는 걸
인정해야 이 순직인정이 고려가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본인이 떠안고 그냥 가는 거예요.
만약에 제가 여기 계신 학부모님들 대부분 학교 선생님들에게 민원 안 넣으시죠?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에게 선생님들 학교 선생님들에게
내 아이를 위해서 ‘강자의 논리로 접근하지 마시라’ 저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복적으로 민원을 넣거나, 민원 한 번이 나는 한 번이지만,
학부모가 돌아가면서 한 명씩 민원을 넣잖아요.
한 반에 학생이 30명인데, 교사가 한 주에 민원을 30회 받으면, 여러분 해보세요.
직장에서 거래처에 일주일에 30번 민원 받아보세요.
‘그럼 왜 부모가 그러는 걸까?’ 제가 그 심리를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그건 뭐냐면, 절대 강자의 논리가 아닙니다.
‘내 자녀가 약자가 되는 것이 두려운’ 거예요.
내 자녀가 억울해지고, 내 자녀가 손해를 보고, 내 자녀가 피해를 보는 게 두려운 거예요.
용납할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이 무엇이냐고요?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약한 자를 일으키시고,
약한 자를 회복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는 거잖아요.
내 자녀가 그런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이 중간에 개입하면, 자녀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기회를 빼앗는 거예요.
물론 뭐 때로는 개입해야 될 만한 큰 사안도 있겠죠.
그러나 여러분, 은혜와 약함의 상관관계는
내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깨닫는 사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체험되는 줄로 믿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나는 강하다, 나는 넉넉하다, 나는 잘났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체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나라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반전의 나라인 줄로 믿습니다.
▲제가 저희 큰 아들을 밴쿠버에서 데리고 올 때,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왔거든요.
거기서는 초등학교 2학년을 마쳤지만, 여기서는 9월이었기 때문에
2학년 2학기로 공립학교에 들여보냈어요.
저는 그 정도로 적응을 못할 줄은 몰랐어요.
일단은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 나이가 좀 있으신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애들이 감당이 안 됐는지, 긴 줄자를 들고 다니면서,
말 안 듣는 애들을, 긴 자로 등짝 스매싱을 했대요.
캐나다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애가 일단 거기에 경악을 했고,
두 번째는 이제 우리 애가 책을 좋아하니까,
어떤 여자애가 쉬는 시간에 책을 보고 있길래
‘넌 무슨 책을 읽니?’ 하고 물어봤는데
2학년짜리 여자애가 고개를 돌려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쏟아부었대요.
저희 아내가 저한테 그랬거든요.
‘우리 집 애들이 TV도 안 보고, 게임도 안 하는데,
드라마를 본 적도 없고, 예능 프로그램을 본 적도 없는데,
한교에 가서 친구들하고 대화가 되겠냐?’ 이런 걱정을 했거든요.
한국 애들이 갖고 있는 거친 언어, 어휘에 휘둘려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보케뷸러리를 쏟아놓는 거예요.
그 학급에 애들이야, 뭐 1학기 동안 이미 서로 친해져 있는 상태니까,
우리 애가 의도치 않은 왕따였던 거죠.
그러다 보니까 또 안 좋은 애들한테 휘말리고,
초등학교 2학년이 안 좋아 봤자 얼마나 안 좋겠냐 생각하시겠지만,
하여튼간에 안 좋은 애들이 또 관심을 보여주니까, 거기 이제 휩쓸려가게 되더라고요.
그 시간이 부모인 저에게는 참 힘들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일단 ‘이 아이가 홀로 그 시간을 뚫고 나가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가 선생님을 찾아가지 않았어요.
친구들을 찾아가거나, 친구의 부모님을 찾아가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아내를 안심시키면서 몇 가지를 얘기했는데
한 가지는 ‘남자애는 운동 열심히 잘하면, 친구들 사귀는 거 어렵지 않다’
또 한 가지는 ‘책을 좋아하니까, 책 많이 보고 공부하면, 친구들에게 무시당하지는 않는다’
제가 두 가지 얘기했고,
그리고 제 마음 가운데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한 건,
‘하나님 이 인생의 힘든 시간, 이 연약한 시간에,
우리 첫째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이끄신다는 걸 체험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도, 여러분 자녀들의 인생도
약할 때 강함되시는 하나님, 가난할 때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막다른 골목에서 나를 일으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