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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장 피조세계의 탄식과 소망

LNCK 2026. 7. 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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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4_로마서 강해(44)_피조세계의 탄식과 소망(롬 8:18-22)_Youtube  

 

◈피조세계의 탄식과 소망     롬8:18-22        2026.06.14. [로마서 44강]   

 

※사변적이라서 다소 딱딱하지만, 이런 내용도 필요해서 녹취했습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자녀는 장차 영광을 상속하게 될 거다 하나님의 상속자다’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8:17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상속할 걸 어떻게 알아요?’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라고 얘기를 합니다. ↑

우리의 믿음 때문에 고통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상속자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씀하죠.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신자가 영원히 누릴 영광이 보장되었다’는 것, 하나가 있고, 
-‘이 구원이 이르게 될 장래의 영광이 있는데, 
 그거는 고난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고난이 오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뭐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다고 얘기를 하는 거죠. 

이 고난을 통해서, 그 (영광의) 자리로 가게 된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근데 여기 이제 두 개가 있잖아요.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  
이 두 개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둘 다 현실이에요. 둘 다 실제예요.

그래서 문제는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현재의 고난이.. 내가 지금 죽을 것 같은 고난 속에 있을지라도, 
‘그 큰 고난과 하나님이 장래의 나에게 주실 영광은 비교가 안 된다’고 말씀 해요. 

▲그러면 여러분,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이라는 두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균형감 있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겠어요? 

그건 두 가지 방식이 있어요. 

1) 하나는 가장 일반적인 접근인데요. 
신자의 인생의 관점에서 이것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현재의 고난 속에서, 장래의 영광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만약에 여러분이, ‘현재의 고난’밖에 없으면, ‘장래의 영광’이 보이는 게 없으면,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내가 그리스도인인가? 내 안에 성령이 계시나?’ 질문해 봐야 돼요. 

고난이 물론 너무 힘들 때는, 고난이 나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것 같이 
나를 그런 자리로 몰아갈 때가 있어요. 
그러나 또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에게는 소망이 있단 말이에요. 

‘우리는 소망 안에서 구원을 얻었으니라’라고 조금 아래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8:24

이거 되게 중요한 말씀이죠. 

그런데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다. 상속자다’ 그렇게 말씀했어요. 
우리는 상속자의 소망 안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아직 상속이 완전히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근데 그 '고쳐 쓸 수 없는 유언장'이 주어진 건 알아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는 거죠. 
상속의 집행은 아직 기다려야 되지만, 그러면 그 유언장이 뭐예요? 
말하자면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게’ 유언장이에요.  

성령을 주셔서.. 로마서 5:5절에서 뭐라고 얘기를 하죠?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고 말씀해요. 
'성령'이라는 증거가 생긴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내가 알아요, 느껴요, 경험해요. 
이거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감당해요. 

이게 이제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현재의 고난'이 있지만, 
죽으면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되겠죠. 그거는 분명해요. 

근데 이게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누리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해야 될 또 하나가 뭔가 하면, 더 큰 그림으로 보는 거예요.

 

2) 거대한 구속 역사 속에서,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나의 삶에서 내가 삶과 죽음이라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 가운데 행하시는 

거대한 구속 역사 속에서 그것(장래 영광)을 바라보는 관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말세를 살아간다’고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말세는 언젠가요? 
성경에서 얘기하는 말세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예요. 

그럼 이 말세가 끝나는 것은, 내 죽음이 아니에요. 
말세가 끝나는 것은, 우리 각자가 죽는 시간이 아니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시간이에요. 

그러면 성경은 이걸 뭐라고 표현하냐면, 신약성경에서는 복음서도 그렇고, 서신서도 그렇고 
이걸 ‘이 세상오는 세상’이라고 표현을 해요.    주1)


그러면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도, 이 관점에서 생각해야 돼요. 
말하자면 내가 죽으면 어떻게 돼요? 죽으면 내 몸은 묻히거나 화장되거나 할 것이에요.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건 아니죠. 부활 때 우리가 완성되겠죠.    주2)

 

그것을 영화 glorification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근데 그날은 아직은 아니에요. 그러면 그날은 언제 오나요? '오는 세상'에서요. 
'오는 세상'이 언제 시작되나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요. 
그러니까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장래의 영광 이해하는 면도 있어요. 

 

△이거를 제가 이렇게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군인이 뭘 기다릴까요? 제대 날짜를 기다리잖아요. 

근데 이런 군인이 있을진 잘 모르겠어요. 
정말 이 땅에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지고, 남과 북뿐만 아니라 
정말 이 세상에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지고, 더 이상 총칼을 들지 않아도 되고, 
군비 확장을 하지 않아도 되고, 군인이 필요 없는.. 완전히 전쟁이 끝나는 날, 
그런 날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군인이 있다고 생각해 보는 거예요.
성도가 장래의 영광을 기다리는 게, 이런 군인의 자세와 비슷하다는 거죠.

 
바울도 빌1:23절에서 뭐라고 그랬어요?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소망을 가진 이것이 너무나 좋은나..’ 그랬잖아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진 않겠지만, 
종종 그리고 진짜 그것을 사모해요. 

그것(장래의 영광을 소망하는 것)을 성경은 ‘잘못이다’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만 일관한다면, '비현실적 신앙이다' 라고 비판을 받기는 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를 기도하며, 기대하는 신앙

그러나 신자의 소망은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야 됩니다. 
그거는 정말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 그리고 말씀하신 게 뭐예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마6:10


근데 우리가 그 기도를,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더 좋은 연봉을 주시고’ 이거를 주로 기도하잖아요. 
‘나하고 지금 문제가 있는 그 사람을 주님이 다스려주시고’, 
그런 기도를 우선적으로 한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요? 
그런데 우리는 ‘나라가 임하옵시고’ 이런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마6:9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것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 세상을 덮게 되는 그날!  합2:14
그런 날이 속히 이르기를 바라는 소망! 

그러나 여전히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세요’ 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죠. 
이 두 가지는 주기도문 속에 같이 들어있어요. 한 호흡 안에 있는 기도예요. 

신자 개인의 삶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라는 더 큰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관점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너무 자기 삶에만 몰두해서 살아가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건강하지는 않은 거에요. 
자기 삶에만 몰두하게 되면... 되게 고통스러워요. 

그러나 이 두 번째 관점을 가지게 되면, 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훨씬 더 여유로워집니다.

▲성경의 마지막 기도도 '나라가 임하시오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게 성경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계22:20


이게 성경의 마지막 기도라는 사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마땅히 드려야 하는 기도가,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기도는... 물론 개인의 소소한 삶의 기도제목들을 포함하죠.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온 세상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큰 일을,
성도가 품고 갈 것을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매사의 삶에 있어서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식을 견지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 하나님에게로, 
그리고 내 인생에 나의 초점이 모두 맞춰져 있다가, 
→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 일로, 신자는 그 범주를 확장해 나가는 거예요. 

나, 내 가족, 내 직장 일, 내 교회, 내 사업, 내 학교, 전부 '나와 관련된 일'이잖아요. 
너무나 많은 우리의 생각들이, 거기에 한정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가'에서 많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그것을 하지 말라가 아니에요. 거기서부터 우리 기도와 관심이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으로 점점 확장해 나가는 것, 
이게 중요하다는 거죠. 

우리가 자기의 삶과 죽음의 관점에서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에요. 그러나 더 큰 맥락이 있다는 것을 놓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누리는 확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여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살아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지금 온 세상 안에서 행하시는 일, 그리고 행하실 일'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데, 
자칫 잘못하면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앙과 기도에 머물게 되고요. 
그렇게 되면 그게 기복신앙으로 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향한 간절함을, 
내 안에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 완성되는 것, 그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지만, 

동시에 그 간절함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더 큰 갈망으로 자라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상적이라는 거예요.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온 시간이 다 다르겠지만,
여러분들은 얼만큼, 내가 하나님 안에서 자라가고 있나요? 

아니면 예수를 믿었는데도 여전히 나는 '내 인생, 작은 우리 가족, 나 자신' 밖에 보지 못하는.. 
'내 사업 또는 내 교회, 내 친구..' 
그런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을 기도할 수 있겠어요? 

◑피조 세계의 탄식과 소망 (구속을 기다림)

 

제가 이런 설명을 드리는 이유가 있어요.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을 고려하는 게 
신자에게 중요하기 때문인데, 
특별히 오늘 본문이 그런 우주적인 맥락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에요. 

사도는 신자의 삶을 포함하되, 
그 범위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전체로 확장해서, 지금 설명하고 있어요.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피조세계가 지금 고통을 겪으면서 탄식을 한다'는 말씀이 나와요. 
피조세계의 탄식이 있죠. 이 시대에 겪는 고통이에요. 

바울사도는 자기가 말하는 '현재의 고난'은 
'사람만 겪는 게 아니야, 너네만 힘든 게 아니야'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지금 온 세상의 피조세계가 다 고통을 당하고 있어!' 
우리가 이제 환경운동 하시는 분들이 그런 표현도 쓰죠. 
'지금 막 숲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바다가 오염되고 있습니다...' 

▲근데 어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지금 바울은 확신을 심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위로를 하고 싶은 건데, 
갑자기 왜 우리가 별 관심도 없는 '자연 세계, 피조 세계'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겁니까?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본문 22절은 환경운동 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본문이거든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바울은 '내가 얻은 구원이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거야' 하는 
확신을 주려고 이 본문을 써 내려가고 하는데, 
'네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살아갈지라도, 이 구원은 흔들릴 수 없어' 이걸 가르치려 하는데,

왜 갑자기 뜬금없이 자연세계의 얘기를 하는 겁니까?  

생각을 해보면, 로마서 5~8장은, 특별히 믿는 도리의 확신을 주고 싶은 것이 그 목적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혹은 제가 만약에 어떤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기도하세요. 하나님 당신을 사랑하고 계시거든요' 
이렇게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 속에만 몰두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얼만큼 힘이 있는 확신으로 우리를 데려갈까요? 

지금 의심과, 두려움.. 이런 것들에 그가 붙잡혀 있을 때, 
어떻게 '그냥 기도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이런 말들이, 그에게 확신을 과연 줄까요?

바울은 사실 하나님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싶어해요. 
그리고 그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인지, 
우리의 상상과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분인지, 

온 우주 만물이 그분의 통치 아래 있는지, 
우리가 겪고 살아가는 삶의 모든 환경, 
특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환경들조차 
하나님의 전능하신 다스림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예요

이거 되게 중요하죠. 이 관점이, 롬8장을 지나 9장, 10장, 11장 마지막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이게 배경으로 깔려있는 거예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섭리로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거를 알면, 

'너의 아버지가 누군지를 알면 괜찮아질 거야' 이런 얘기예요. 
'하나님의 행할 수 있는 큰 일을 봐봐'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너희 구원 쯤은 문제 없어!)

이게 우리의 구원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의 구원이 영원히 확정적이고, 절대 변경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맺는 개인적인 관계도 중요하지만,
물론 그 속에서도 하나님이 확신을 주세요. 

그러나 우주 만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크신 그 하나님을 보라는 거예요. 
그때 자기의 구원을 더욱 확신하게 되는 거죠.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쉽게 생각하면 여러분들을 괴롭히고 있는 직장 상사가 있어요. 

근데 내가 그냥 하나님꼐 기도하면서, '주님 저 사람을 어떻게 좀 해주세요'  
막 이렇게 시편의 저주시들을 읽으면서, 이렇게 기도할 수도 있잖아요. 

근데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 '저 사람 위에 하나님이 계시지... 
그럼 저 사람이 저렇게 나를 괴롭게 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유는, 
내가 모르겠지만, 뭔가 나에게 유익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아는 것, 이게 되게 중요한 것이죠. 
우리의 모든 상황에서 다 그래요.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자, 통치자이시고 
온 세상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다스리는 왕이시다'... 이 얘기를 바울은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바울사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서, 
지금 말을 하고 있는데, 
8:19~22절에 보면, 모두 4절이잖아요. 

이 4절에 각각 한 번씩 '피조물'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4번이나 나와요. 
이것은 강조하는 거죠.  주3)
그러면 우리가 보는 그냥 자연 세계예요. 
근데 이 자연 세계가 탄식을 하고 있고, 고통을 겪고 있대요.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게 피조물을 의인화한 거죠. 
19절에 보면, '피조물이 고대하고 있다' 의인화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고대한다'는 거는 간절히 기다린다는 거잖아요. 
엘리야가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저 수평선 위에서 뭔가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간절히 바라보는 
그런 자세로 피조물들이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피조물들은 탄식하고 고통하면서 기다리는 게 있다'고 바울은 말하는 거죠. 
여기 사실 피조물들의 '의인화'는, 성경에서는 아주 익숙한 거죠.   

 

시96:11절에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이 외치고' 
이런 비슷한 표현들 참 많이 나오잖아요. 

감정이 없지만, 그러나 그 피조물들조차 
인간과 함께 고난 가운데 있고, 영광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해요. 
고대하고 있다고 말씀해요. 

▲본문 19절에서 고대하고 있는 게 뭔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거다' 
근데 이 '고대하는 것'을 보기 전에, 먼저 '현재의 고난'을 보자고요. 

'현재의 고난'이 뭐예요. 20절을 보세요.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에요. 
'허무'라는 단어는, 전도서에서 무지하게 많이 나온 바로 그 단어예요. 

물론 구약성경은 히브리어고, 이거는 헬라어지만.. 같은 의미예요. 
'허무한 것에 굴복하고 있다'고 그러는데, 이게 사실은 수동태거든요. 
그러니까 '굴복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또 자기가 원해서 굴복하는 것도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가 또 원해서 죄를 짓잖아요. 
그런데 피조물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그래요. 
20절에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리고 21절을 보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 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죠. 
그러니까 보세요. 이 자연 세계가 얼마나... 
나무가 자라서 나뭇잎이 생겨, 나뭇잎이 떨어져서 썩고 부패하고, 
또 이런 과정들을 자연은 피할 수가 없는 거죠. 

우리는 이런 자연의 끝없는 썩어짐의 순환 속에서도, '자연은 참 아름답다'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읽어보세요. 우리가 또 자연을 보러 야외로 떠나기도 하잖아요. 

근데 자연을 보면 뭔가 좋잖아요. 하늘만 봐도 좋잖아요. 
'근데 이건 일그러진 자연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솜씨를, 존재를 드러내지만 일그러진 자연이다'라고 얘기해요. 

언제 일그러졌나요? 
이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했는데 
'굴복하게 하시는 이'가 누군가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피조물을 굴복하게 하셨나요? 
창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아담에게 이르시되...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이 범죄를 하고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만 이어지고 끝난 게 아니라고,
아담이 범죄하고 아담만 타락한 게 아니라, 사람만 타락한 게 아니라, 
자연도 타락했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바울은, 이 사건을 떠올리면서 지금 이 본문을 쓰고 있는 겁니다. 
'썩어짐의 종노릇 하게 됐다' .. 즉 '자연이 부패의 속박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이게 22절에서 말하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
이라는 말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이죠. 

그럼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19

'피조세계가 고대하는 게 있다'고 했는데, 

피조세계에 소망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뭔가요? 

자연세계, 이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나요? 
19절에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 피조물도 구속됩니다.      *재림 때

 

위에서, 피조물이 타락하게 된 것은, 아담이 타락해서 그 여파로 타락하게 된 건데  창3:17

이제 그 피조물들이 구속(회복)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성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

그 여파로 피조물들도 구속(회복)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

 

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님의 아들들'은 '참된 성도들'을 뜻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은 뭘 말하는 걸까요? 

똑같은 표현들이 이 본문 맥락안에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21절을 보시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지며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언제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의 그날에'  8:21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 
이게 19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표현이에요. 

뿐만 아니라 18절에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이것도 다 같은 표현이에요. 
그러면 이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얘기하는 건데, 

19절을 보면,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다' .. 뭐 천사가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에요. 

▲지금 여러분과 제가,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우리를 식별하지 않아요.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 순간 갑자기 우리의 얼굴에 광채가 생기고, 
사람들이 우리를 감히 쳐다볼 수 없는 그런 얼굴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장래에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고 표현했을 때,   *재림 때
그때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나는 존재로 온 세상 앞에 
하나님이 그날에 그들을 영광스럽게 나타내실 것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걸 자랑할 거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 표현이에요. 

이게 21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게 되는 것' 
그게 뭐예요? 상속이 집행되는 것이고, 
우리의 영혼이 몸의 부활과 함께, 영화로운 구원이 완성되는 날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요? 왜 피조세계가 그날을 기다립니까? 
그때 자신들도 허무한데, 의미 없는 이 되풀이되는 이 닫혀진 세계 속에서 
썩어짐이 반복되는 이 세계 속에서 그들도 해방될 것입니다.  
즉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21

우리는 상상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어요. 
우리의 부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저주가 풀리는 것이죠. 
이 자연계의 땅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그 저주가 풀리는 것이죠. 

△제가 딱 생각난 게 뭔가 하면,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 나오는 그 장면이에요. 

하얀 마녀가 나니아 세계를 다스리는 동안, 그 땅은 끝나지 않는 겨울에 갇혀 있어요. 
언제나 겨울이에요. 겨울이고, 겨울이고... 겨울이 계속 이어져요. 
크리스마스가 결코 오지 않는 세계예요. 

죽음 같은 정지, 봄의 약속이 영원토록 유예되어 있는 상태, 멈춰버린 시간이에요. 
눈과 얼음이 모든 것을 덮었어요. 눈과 얼음 밑에 생명이 숨죽이고 있지만... 
표면은 겨울인 거예요. 

생명이 없는 게 아니에요. 눈과 얼음 밑에 생명들이 숨죽이고 있어요. 
이거는 결박된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거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당하고 썩어짐의 종노릇에 매어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인 거죠.

근데 사자 아슬란(예수님 비유)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마녀의 권세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나니아의 세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신호가, 마녀가 결코 오지 못하게 했던, '절대 못 와!' 했던 크리스마스가 왔어요. 
얼음이 녹기 시작합니다. 멈춰있던 시냇물이 흐르기 시작해요. 
눈 밑에서 풀과 꽃이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새들이 갑자기 노래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나무에 잎사귀가 돋기 시작합니다. 마녀의 썰매가 더 이상 눈 위를 달리지 못하게, 
얼음 위를 달리지 못하게 되는 장면이... 
죽음의 통치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싸인입니다. 

겨울의 결박이 풀리는 그 순간에, 봄, 생명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이게 보세요. 모든 회복은 사자 아슬란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해방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분 안에서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와 연결된다는 것이죠. 
이걸 되게 잘 보여주는 이야기예요. 

▲근데 우리가 C S 루이스까지 가지 않아도 돼요.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이걸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했으니까요. 

한번 여러분, 제가 읽어드릴 테니까, 이 말씀을 들으면서  눈을 감고 상상을 해보세요.

사11:6~9 '그때의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하이에나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은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놀라운 놀라운 세계죠. 자연이 고대하는 게 바로 이거죠. 
이사야는 이런 얘기를 많이 썼습니다. 

사35:1~2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이런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예수님도 이 날을 친히 말씀하셨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마19:28절인데 '내가 진실로 너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게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날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러워 나타나게 되는 날이에요. 
주님이 말씀하신 날이에요. 뭐라고 그러셨어요? 세상이 새롭게 돼요. 


△세상이 새롭게 된다고 사도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을 때 이렇게 설교합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행3:21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만물의 회복이 일어날 것이라고 얘기를 해요. 
근데 베드로는 동시에, 그의 서신 베드로후서에서 이런 말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말이에요.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랬는데 킹제임스 버전은 어떻게 번역을 했나 하면 '불타서 다 없어질 것이라'고 했어요. 
'the earth also and the works that are therein shall be burned up' KJV

그러면 이거는 '아 온 세상이 소멸돼서 없어지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잖아요. 
근데 사실은 이 말씀을 제대로 읽는 것은 뭔가 하면, 갱신 renewal 으로 읽는 거예요. 
새롭게 하시는 거예요. 소멸이 아니라!              

여러분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애벌레가 죽고 나비가 나타났어' 
'애벌레가 나비로 새로워졌다'는 얘기를 하는 거죠.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어요. '올챙이가 없어지고 개구리가 나타났어' 
올챙이가 어디 갔을까요? 개구리가 된 거죠. 

△계시록 21:5절을 보면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니까 피조세계가 정결하게 되고,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고, 
만물이 회복되고, 세상이 새롭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피조세계는, 그거를 지금 소망하고 있는 거예요. 
언제 그런 날이 온다고요?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요. 

그날 하나님의 아들들이 온 세상 앞에,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막 이마에 왕 자를 딱 하나씩 새겨주셔서 
왕중왕이 계시고, 우리는 왕이고 
그렇게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게 되는... 이게 사실은 잘 안 믿어져요. 

▲지금 옆에 있는 분을 한번 보십시오.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도저히 안 일어날 것 같아요. '설마 이분에게 왕 직이 주어진다고?'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타내시겠다고 말씀하세요. 나타내시면 어떻게 된다고요? 

피조물, 자연이 살아나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광스러운 자유를 얻게 되는 날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날을 학수고대하고 기다린다고 얘기해요. 

사울사도는 22절에서 이렇게 말했잖아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 겪는다' 

우리가 살아가고 바라보는, 고통받는 피조세계의 모습을, 바울은 이렇게 묘사를 한 거예요. 
그런데 헬라어로 우리가 이 구절을 읽으면, 
이게 막 굉장히 절망적이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게 읽을 수가 없게 돼 있어요. 

이게 절망적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얘기가 아니에요. 
왜냐면 22절에서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 이 표현 때문에 그래요. 

여기서 '고통'이란 단어는 '해산의 수고, 산고'를 의미하는 단어예요.  *수노디노
그러면 저는 남자라서 안 겪어봤지만, 
'해산의 수고'는 내 뱃속에 있던 아이를 볼 그 기쁨을 생각하며 견디는 고통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현재의 고난'이, '장래의 영광'을 출산하고 있는 고통이라고 
바울은 지금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영광 중에 재림하시고,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들로 
온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드러나게 될 때, 
자연세계가 해방될 것이고, 갱신 renewal 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찬 자연을 우리는 보게 될 거예요. 
그 창조주의 영광을, 자연의 모든 것이, 찬란하게 그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저는 삐딱한 건 아닌데, 이런 구절을 보면, 
우리는 쥐나 뱀이나 바퀴벌레를 보면 이렇게 꺼려하잖아요. 
그 피조물들도, 내가 싫어하는 바퀴벌레, 뱀도, 또 어떤 혐오하는 동물이나 벌레도
다 영광스럽게 변할 것을 상상하면.. 이게 상상이 잘 안 돼죠.

다시 한번 옆에 있는 분을 보세요. 상상이 좀 되셔야 되요.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매일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렇게 하신 세상, 그 온전한 모습을, 우리는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시104편에 보면 천사들이 막 노래해요.   시104:1~35 
하나님이 뭘 하나 창조하시면 '와!'  
욥기에도 그런 표현이 나와요. '우와!' 

우리는 그런 세계를 아직 본 적이 없어요.
우리가 보는 자연 세계는, 비록 타락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와 그 솜씨를 드러내고 있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정말 숨막히도록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그런 자연을, 
우리는 아직 다 보지 못했다고요. 

저주 아래 신음하는 세상의 희미한 영광만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자연세계가 회복될 때, 우리는 숨막히는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요. 

우리는 그 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세계를 바라보면서, 
영원토록 차오르는 기쁨과, 터질 듯한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을 얘기하는 걸 보면, 이게 기독교 신앙이면, 
우리는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간다' 이런 식의 개인주의적 신앙.. 이게 설 자리가 없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이게 심지어 피조세계까지도 하나님의... 
신학자들은 이거를 Regeneration of nature 이라는 말을 써요. '자연의 중생' 

사람만 중생하는 게 아니라, 자연도 중생한다는 거죠. 새로워진다는 얘기예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19절에서 얘기해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그리고 21절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된다고' 
뿐만 아니라 '자연세계와 함께 우리가 그 영광을 누리게 될 거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현재의 고난'과 '장래에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시편 기자가 이 날을 이렇게 노래했어요. 
시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31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온 우주와 함께, 우리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영원토록 이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겁니다. 

바울사도는 '피조물도 고대하는 그날을 너희도 고대하고 기다리라'고 도전하는 겁니다. 8:19
기도하겠습니다.

 

전후 피조 세계(독일)을 살린 마샬 플랜

1947년 당시 미국 국무장관 조지 C. 마샬이 제창했는데,

2차대전으로 초토화된 유럽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계획이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2차대전 적대국이었던 독일을 경제적으로 강력하게

지원하는 계획을 담고 있었다.

마샬 플랜은 실천에 옮겨졌고, 독일에는 라인 강의 기적이 일어났다.

 

라인 강의 기적은 독일 수상 아데나워의 작품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하지만,

그러나 마샬 플랜이 없었더라면, ‘라인 강의 기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독일은 친미 국가로 바뀌어졌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와 형제처럼 지내는 국가가 되었다.

 

조지 C. 마샬은 유럽 경제 부흥과 유럽 평화에 기여한 큰 공로로

1953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마샬 플랜의 위대성은, 1차대전과 비교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1차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과 런던 회담을 거치면서

해외에 있던 모든 식민지를 빼앗겼고, 자국영토의 1/7도 빼앗겼다.

무엇보다 1,320억 마르크의 천문학적인 전쟁배상금을 물도록 결정되었다.

 

이 액수는 당시 독일 전 국민들이 죽을 때 까지 갚아도 못 갚는 큰 돈이었다.

1,320억 마르크를 부담해야 한다는 결정 속에 담긴 뜻은

- 다시는 독일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독일을 영원토록 짓밟고자 하는 영국과 프랑스인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 1,320억 마르크의 천문학적 전쟁배상금이었다.

 

비록 전범국, 패전국이었지만,

독일 국민들은 그 배상금 속에 담긴 메시지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 프랑스 사람들을 향한 증오심이 온 국민 가슴에 불붙고 있었다.

 

바로 이때 나치와 히틀러가 등장했다. 그래서

‘1,320억 마르크 중에 단 한 푼도 갚을 수 없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자

온 독일 국민들은 감격하며 환호했다.

 

그 결과, 나치와 히틀러는 빨리 국가를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시켜

비극의 2차대전을 일으켰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를 점령했다.

다급해진 프랑스 비시 정부(Vichy:地名)는 남쪽으로 도주했다.

더 급해지자, 비시 정부는 독일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자 독일은, 1차대전이 끝나고 치욕의 조약을 맺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독일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던 바로 그 자리에서,

프랑스 비시 정부 대표를 꿇어 앉혀 놓고,

그들에게 또 다른 치욕의 조약을 강요했다.

 

이것이 나타내는 역사적 교훈은 무엇인가?

-원수 갚은 것은 반드시 원수 갚는 것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난 뒤, 마샬은 전범국이요 패전국인 독일에

전쟁배상금을 물리지 않고, 그 독일 백성들을 살려주기로 결심했다.

도리어 경제적으로 강력하게 지원하는 사랑을 베풀었다.

그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 라인 강의 기적이었다.

 

그 때부터 독일은 친미국가로 바뀌어졌다. 독일 국민들의 가슴속에,

미국, 프랑스, 영국 사람들을 향한 증오심은 사라졌다. 오히려

독일은 2차대전 도발의 역사를 반성하는 모범적인 나라로 바뀌어졌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마 5:43~44.

이 말씀이 마샬의 마음속에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샬이 만물(독일)의 회복을 도모했고, 

그게 성공했다는 거죠.

 

피조물이 아파하는 그곳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안전지대에는, 무풍지대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습니다.

 

혹시 와서 보아라.”라는 예수님의 감동이 내게 있다면,

그것은 아픔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아픔을 보고, 아픔을 함께하고, 아픔을 치유하라!”라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픔이 있는 곳에 있건만, 우리의 몸은 마냥 편하기만 원합니다.

가서 보는 것 보다.. 그냥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

앉아 있는 것 보다.. 누워 있는 것이,

또 그냥 누워 있는 것 보다.. 잠자는 것이 더욱 편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편한 것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육체적 편함의 마지막은.. 무의미한 죽음입니다.

 

우리는 몸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늘 편안함을 떠날 줄 알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매일'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쾌락의 온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는 그릇이며

의의 일을 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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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라고 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생각하기가 쉽잖아요. 
그렇지만 이것의 원래 의미는 이런 거예요. ‘시대예요. 시대!’

‘이 세상’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this age ‘이 시대’
‘오는 세상’.. 다가오는 시대가 있어요. the age to come '오는 시대’


그러면 ‘오는 시대’가 있다는 거죠. 그게 뭐예요?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시대가 끝나고, ‘오는 세상’이 시작이 된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주2)

중간상태 Intermediate state를 믿는 관점에서 볼 때는 그렇죠.

그런데 참고로, 중간상태를 인정하지 않는 신학 부류도 있습니다.  

 

주3)  그런데 이 '피조물'이 뭘 가리키는 걸까요? 우리도 여기 포함되나요?

천사도 포함되나요?

여기에 대해서 존 머리 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피조물에서 제외되는 존재들이 있다.'


1) 첫째, 천사들.. 천사들이 여기 들어가겠어요? No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다고 했는데, 
썩어질 것에 종노릇하고 있고, 허무한데 굴복당하고 있다고 그랬는데, 

천사들은 안 들어가죠.
그렇기 때문에 천사도 피조물인데, 여기 '피조물'에서는 제외되죠. 


2) 사탄과 귀신들은 어떻게 될까요? 
사탄과 귀신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절대로 기대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외됩니다. 

 

3) 여기에 우리 크리스천들도 여기 포함되나요?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냥 자연 세계의 피조물만 뜻해요.


8:21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느니라'  그러면, 
같은 구절에서 피조물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금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잖아요.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기 '피조물'에 포함되지 않아요. 

3) 그리고 비신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비신자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지 않을 테니까, 포함되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여기 '피조물'에 해당하는 것은, 
그게 생물이든지 무생물이든지 상관없이 비이성적인 피조물들 전체를 얘기하는 것이라고 
존 머리는 설명하는데, '피조물'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는 그냥 자연 세계예요. 
근데 이 자연 세계가 탄식을 하고 있고, 고통을 겪고 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