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믿음론 <존재론적인 전도>
2026 07 05 주일 말씀 / 창세기 강해 (20) / 창세기 7:1-24 / 노아의 삶, 믿음을 말하다
◈노아의 삶, 믿음을 말하다 창7:1-24, 히11:7 2026.07.05. [창세기 20강]
오늘 본문은 창세기 7장입니다. 6장에서 우리는 노아의 방주를 살펴봤습니다.
오늘 창7장에서는 마침내 무서운 홍수 심판이 시작됩니다.
이 홍수 이야기가 창8장, 9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6장부터 시작해서 9장까지 무려 4장에 걸쳐 노아의 홍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어마어마한 창조 이야기는, 1장과 2장, 두 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무려 4장이나 할애해서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천 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창세기에서,
노아 홍수의 비중이 얼마나 상당한지를 보게 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꼭 전하고 싶으신 메시지가 많다는 뜻이겠죠.
실제로 노아 홍수라고 해서, 홍수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홍수 앞에 방주 이야기도 있고,
또 노아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또 그 홍수 뒤에 무지개의 약속까지... 수많은 영적인 메시지들이 있습니다.
앞에 6장에서는 방주를 통해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봤습니다.
예배 후에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우리가 알았던 것은 노아의 방주라는 이름뿐이었다.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았다’고
말하더라고요. 방주가 의미하는 ‘구원’에 이어,
오늘은 이 홍수 사건이 담고 있는 또 다른 메시지인 ‘믿음’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은 노아의 삶을 통해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을 통해 믿음의 본질을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의 네 가지 특징>인데요. 하나씩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의 본질 첫 번째 믿음은 이해되지 않아도,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6장, 7장을 주의깊게 읽어보시면,
하나의 패턴, 즉 반복되는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6: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심판을 알려주시고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22절은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노아는 순종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7장도 똑같습니다.
7:1절에서 하나님이 또 말씀하십니다.
‘너와 내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그래서 방주로 들어갔고요.
그러자 5절은 또 이렇게 기록합니다.
7: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대로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중간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없고요.
하나님의 명령이 쭉 나오고, 노아는 즉시 순종합니다. 위에서 3번이나 살펴보았죠.
하나님이 또 말씀하시면 노아는 또 다 준행합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홍수 사건을 다루는 이 긴 넉 장의 기록 속에서,
노아의 대사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창6장을 보면 하나님이 방주의 재료, 크기, 태워야 할 짐승의 종류, 먹을 양식까지
어마어마한 명령들을 쏟아내십니다.
우리 같으면 입이 간질간질해서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 방주가 너무 큰 것 같은데요. 짐승을 너무 많이 태우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제 생각에는 3층보다는 2층 구조가 훨씬 효율적일 것 같은데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 이유도 묻고, 내 의견을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노아의 대사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노아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순종했다는 반응만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여러분, 성경이 무엇을 강조하는 걸까요?
바로 노아의 순종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그런데 이 노아의 순종이 참된 믿음의 본질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의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평생 비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해가 안 되는 거죠.
곧 있으면 우리나라는 장마인데요. 일기예보를 들으면 이해가 됩니다.
‘아 장마가 오겠구나’
노아 시대에는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비 자체가, 아예 그 전에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니 비 한 방울 본 적이 없는데, 온 세상을 뒤덮는 홍수라뇨?’
노아는 그 '일기예보'가 쉽게 이해되지 않았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노아의 머리 위 하늘은 어땠습니까?
먹구름이 짙게 깔리고 천둥, 번개가 치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비가 올 징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땅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오늘 본문 1절입니다.
7:1절에서 하나님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10절을 보면요. 홍수는 언제 시작됩니까? 7일 후입니다.
여러분 비행기를 일주일 전에 타는 사람이 있습니까?
가는 날에 맞춰서 타는 것이 상식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홍수가 에내리기 7일 전에, 노아에게 먼저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7일 전이면 먹구름이 짙게 가렸을까요? 전혀 아니겠죠.
그랬다면 사람들도 방주로 몰려들었겠죠. 하늘은 여전히 맑았습니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었습니다. *동요 가사
하나님의 명령은 노아의 상식으로도 경험으로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 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120일이 아니라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홍수 시작 7일 전에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노아는요. 이해돼서 순종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내 머리로 납득이 되고, 앞뒤의 상황이 이해가 되어야 행동하려고 합니다.
먼저 계산기부터 두드리죠. ‘십일조를 드리면 이번 달 생활이 빠듯해질 텐데’
‘저 사람을 용서하면 내가 손해보는 것 아닌가?’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우선하면, 경쟁에서 밀리는 것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계산이 맞는지부터 따집니다. 눈앞에 현실을 봅니다.
그러나 노아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순종했습니다.
비록 내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내 경험으로는 납득할 수 없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맑은 하늘이라는 현실에도 맞지 않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묵묵히 120년간 나무를 다음었고,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에, 방주 안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히브리서 11:7절은 이런 노아의 믿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믿음은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노아의 눈에는 맑은 하늘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하늘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선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을 바라보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행동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행동하고 계십니까? 무엇을 보고 움직이고 계십니까?
믿음은 먹구름이 보여야 우산을 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비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맑은 하늘 아래에서도 우산을 펴는 것입니다.
내 상식과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 삶의 행동을 온전히 맞춰내는 것입니다.
말씀이 현실보다 더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도, 이 노아의 믿음의 패턴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는 삶...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삶을 보고 계십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신앙의 말을 했는가’ 보다,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는지’ 보다,
얼마나 말씀대로 살았는가를 보십니다.
여러분, 내가 순종한 만큼이, 딱 내 믿음의 수준입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는 삶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에도, 노아처럼 이런 한 줄이 기록되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 순종의 기록이 저와 여러분의 삶의 기록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둘째, 믿음은 세상의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가 살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습니까? 창세기 6: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어지는 11절과 12절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6:11~12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여러분 이 말씀을 읽어보면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부패하였다’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만큼 타락했다는 거죠.
또 ‘온 땅, 모든, 가득하다’는 표현도 계속 나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죄가 몇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 전체에 문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창6:2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6:2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기준으로 배우자를 택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택했습니다.
그들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이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모든 여자를’입니다. 6:2
이 말은요. 숫자의 제한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내 능력만 되면, 내 힘만 허락되면, 아내를 여러 명 두고 쾌락을 즐기는 것,
그것이 그 시대의 트렌드이자, 성공의 상징이었습니다. 세상의 다수가 그렇게 살았다는 거죠.
사람들은 서로를 보며 말했을 겁니다.
‘아휴,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뭐.. 남들도 다 그렇게 결혼하는데 뭐...
남들도 다 여러 명의 아내를 두고 즐기며 사는데 뭐 어때?
요즘 다 그렇게 살던데 뭐...’ 세상의 다수가 다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노아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7:7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7:13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여러분 노아는요. 아내가 몇 명이었습니까? 아내가 단 한 명이었습니다.
며느리는 세 명이었습니다. 아들들도 각각 한 명의 아내만 두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족 수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가정이 세상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세상은 다수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그리고 이 거룩한 가정을 지켜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조롱을 받았겠습니까?
‘노아 저 사람 참 답답한 양반이네, 요즘 세상에 누가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말씀대로 사나?
융통성 있게 남들 하는 대로 좀 맞추며 살지!’
이렇게 세상 사람들 다수는, 노아를 미련하다고 손가락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이야기의 결론이 어떻게 끝납니까?
결국 구원의 방주에 올라탄 사람은, 절대 다수의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가장 바보 같아 보였던 사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던 노아의 가족 8명 뿐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진리는 결코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세상 사람 천명, 만명이 맞다고 우겨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시면,
여러분 아닌 겁니다.
온 세상이 틀렸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고 하면,
여러분 오직 그것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옳다고 말씀하시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병들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다수의 목소리를 선택할 때입니다. 다수의 목소리에 타협할 때입니다.
우리 신앙도 병들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다수의 길을 따라갈 때입니다.
△얼마 전 제가 제 자신을 보며 깜짝 놀란 일이 하나 있습니다.
몇 달 전쯤에 우리 막내가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그런데 하필 주일을 코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걱정하며 ‘주일 전에 빨리 나아야 할 텐데’ 하고 염려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순간 제 속에서, 저도 모르게 이런 마음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애가 아프며 주일날 교회에 빠져야지..’
뭐 여러분, 제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주일날, 교회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제 기억으론 그렇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안양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신혼집이 용산이었는데요.
그때 첫째를 데리고 주일마다 용산에서 안양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태어난 50일째 되는 날부터, 주일날 같이 교회를 데리고 갔습니다.
아이가 진짜 심하게 울었던 날도 있었습니다.
차 안에서 우는데요. 교회에 가서도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주일마다 진짜 전쟁이었습니다.
그때는 주일날 젖병도 7개나 싸가지고 다녔습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다 예배를 드리니까요. 그런데도 빠짐없이 주일날 데리고 다녔습니다.
‘아파도 일단 예배는 드려야지...’ 라는 마음으로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게 맞는 거니까요.
저도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었고요.
그런데 몇 달 전에, 저도 모르게 그 말이 속에서 그냥 아무 저항 없이 나오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주일 날 교회에 못 가겠네’ 제 생각으로요. 너무 놀랐습니다. 저도 영향을 받은 거죠.
물론 입 밖으로는 발설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속에서 그런 생각이 쑥 아무런 저항 없이 올라오는데,
제가 ‘아차!’하고 정신을 차린 거죠.
▲여러분 이게 참 무섭더라고요. 세상은 소리치지 않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기준을 바꾸어 놓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를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그만큼 세상의 영향, 다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노아의 시대와 다를 바 없이 타락한 시대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가득했던 성적인 타락, 가정의 붕괴... 오늘날도 세상 다수의 흐름입니다.
청년들 사이에서 혼전순결을 말하면, 이제는 외계인 취급을 받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뭐 어떠냐?’고 묻습니다. 뭐가 큰일이냐고 묻습니다.
또 자녀를 키우는 부분에 있어서도, 다수의 길을 따라갑니다.
자녀를 키울 때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학벌과 성공이 먼저가 되기 쉽습니다.
주일 예배보다 학원이 먼저이고, 예배보다 성적이 먼저가 되는 분위기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해서 다수의 영향을 받습니다.
또 직장에서나 그 밖에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노아는 어떻게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을까요?
그 대답이 히11:7절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의 믿음을 또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여러분 노아는 왜 세상을 따라가지 않았을까요?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혼자 방주를 지었을까요?
왜 혼자 한 아내를 두고 살았을까요?
왜 자기 아들들도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가르쳤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무서워 벌벌 떠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 삶에서 하나님을 가장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시선을 오직 하나님께 두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노아의 시선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모두 한 방향으로 걸어갈 때도,
혼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묵묵히 걸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께 시선을 두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으며 살아야 합니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늘 물으며 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같이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직장에서, 또 가정에서, 또 사업장에서, 또 자녀를 키우는 자리에서,
또 돈을 사용하는 자리에서... 그때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남들은 어떻게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여러분 믿음은요. 전자의 질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후자의 질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도 살아갈 때, 늘 질문을 던져봅시다.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그래서 세상의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셋째, 믿음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드디어 방주가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방주를 다 만들었다고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거대한 방주 안에 엄청난 수의 동물들이 들어와야 했습니다.
창6: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상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자 그런데 7장으로 넘어오면 숫자가 살짝 바뀝니다.
7:2~3절에,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유독 정결한 짐승을 훨씬 더 많이 태우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홍수가 끝난 뒤인 8:20절에 나옵니다.
8:20절에 ‘노아가 여호와께 재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바로 예배(제사) 때문이었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필요했기 때문에
더 많이 태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수많은 동물들을 도대체 어떻게 방주에 태우느냐는 것입니다.
사자도 호랑이도 코끼리도 기린도, 저 높이 나는 새들도, 방주에 다 들어와야 합니다.
여러분이 노아라면 어떠셨겠습니까? 아마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 많은 동물을 제가 어떻게 다 모읍니까?
사자는 어떻게 끌고 오고, 새들은 어떻게 잡아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에게 동물들을 다 잡아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6: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네게로 나아오리니’ .. 노아가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어주십니다.
7:8~9절도 말씀합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15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반복합니다.
창7:15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다 ‘노아에게 나아와’ 입니다. 여러분 누가 동물들을 데리고 왔습니까?
노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방주를 채우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하되,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꾸 하나님이 하실 일까지, 내가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걱정합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그래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여러분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 데는 땀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동물을 모으는 일로는 밤잠을 설치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양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자녀의 미래는 하나님만이 책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의 미래까지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불안한 거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사업하는 분들도 마찬가지겠죠. 성실히 일하고 정직하게 거래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거래처를 붙여 주시는 분도,
길을 열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회사를 다녀도 그렇겠죠. 열심히 준비하고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나 취업과 승진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병원에 가고 약을 먹고 치료받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생명과 건강을 붙드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동물들이 언제 올지, 어떻게 올지, 왜 안 오는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내게로 나아오리라'고 말씀하셨으니, 노아는 그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방주 안으로 들어간 후, 본문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7:16b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여러분, 방주의 문을 닫은 사람은요. 노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부터 노아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겨졌다는 뜻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방주에는 키도 없고, 돛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방향을 조정할 수도 없고, 풍랑을 피할 수도 없고, 속도를 조절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온전히 방주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이란 얘기입니까?
믿음이란, 내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이끄시던지 어디로 이끄시던지
하나님이 내 삶을 완벽하게 이끄셔서
주의 뜻대로 결국에는 구원의 항구로 인도해 내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내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붙잡고 걱정하는 것 가운데,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은 없습니까?
자녀의 미래, 사업의 결과, 건강의 회복, 우리 교회의 문제, 또 가정의 아픔,
혹시 하나님이 하실 일까지 내가 붙들고 씨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내 힘으로 통제하려는 헛된 수고를 내려놓기 바랍니다.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기 바랍니다.
노아는 망치는 들었지만, 동물들을 일일이 방주로 들여보내는 일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노아는 방주는 만들었지만, 방주의 문은 하나님이 닫으셨습니다.
노아는 방주에는 탔지만, 조종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거룩한 위탁입니다.
그 하나님께 내 인생의 문제를 맡길 때,
노아의 방주를 끝까지 지키셨던 하나님의 손이
오늘날 우리의 삶도 끝까지 붙드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4. 넷째, 믿음은 <삶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히11:7절은 노아의 믿음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여기서 눈에 띄는 말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노아는 언제 세상을 정죄했을까요?
물론 노아는 입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벧후2:5절은 노아를 ‘의를 전파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노아는 다가온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했다는 거죠.
노아는 방주만 지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도 함께 전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노아의 삶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했다’고 말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라는 것은,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지은 삶을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노아가 믿음으로 살아간 그 삶 자체가, 세상을 정죄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불신앙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냈다는 뜻입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짓는 삶 세상이 비웃어도
말씀대로 사는 삶, 홍수가 내리기도 전에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삶,
노아의 그 삶이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돌아오십시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120년 동안 거대한 방주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창7: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노아가 6백세 되던 해, 2월 17일 날 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깊음의 샘들과 하늘의 창문이 열렸다고 하는데요.
이 물들은 창1:7절에서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실 때, 위 아래로 나누어 두셨던 물입니다.
궁창은 아주 쉽게 얘기하면 하늘(빈 공간)인데요.
하나님은 하늘 위에 물을 두시고, 또 땅 아래에 물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터진 거죠.
하늘 위에 물은 비로,
또 땅 속에 있던 물, 지하수는 펑펑 솟아올랐습니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7:12
여기 비는 히브리어로 게솀이라는 단어인데요.
보통 비가 아니라 폭우를 뜻합니다. 엄청난 폭우가 40일 동안 계속 쏟아졌던 거죠.
그리고 17절부터 보면, 이 물은 점점 불어올라 방주가 마침내 물 위에 떠올랐습니다.
이 물은 더 많아져 온 세상의 높은 산들이 다 잠길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20절을 보면 ‘물이 불어서 15규빗이나 오르매 산들이 잠겼다’고 말합니다.
15규빗은 약 7~8미터인데요. 제일 높은 산 꼭대기보다
약 7미터, 8미터 더 위로 물이 가득 찼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 기간에 땅 위에 있는 모든 생물은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물은 150일 동안 땅을 뒤덮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비가 쏟아지고 방주가 땅에서 두둥실 떠오르는 바로 그 순간,
그때 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노아가 옳았구나.. 아니 노아가 믿었던 하나님이 살아계셨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겁니다.
노아의 삶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원망보다 감사하는 사람을 보면,
손해를 보면서도 정직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용서하기 어려운데도 용서하는 사람을 보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주일을 구별하고 예배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보면,
기도해도 당장 응답이 없어 보이는데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을 보면,
세상은 당장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믿는구나’
우리의 삶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오늘 노아의 삶은 특별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형통하고 성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20년 동안 조롱을 받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부름받은 삶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여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아처럼 믿음으로 산다면, 그 삶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에는 물로 심판을 하셨지만, 마지막 심판의 때 하나님은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저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만한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입을 막으실 것입니다. 무엇으로 막으실까요? *롬3:19참조
바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막으실 것입니다.
‘노아를 보아라 그리고 내 말씀을 붙들고 끝까지 살아간 누구를 보아라’
‘OO교회의 누구를 보아라'
세상의 조롱에도 믿음을 지켰던 우리의 삶이 눈물로 순종했던 우리의 삶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말씀을 선택했던 우리의 삶이
고난과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예배하며 살았던 우리의 삶이
그들에게 분명한 하나님의 증거로 제시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으로 사는 하루하루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비록 꽃처럼 향기나는 우리의 삶은 아닐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
오늘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세상에 증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7절은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죠.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했다’고 말합니다.
노아가 세상을 정죄한 것은 큰 소리 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이 세상의 불신앙을 드러냈고,
그의 삶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날마다 증거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간 한 사람의 삶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여러분 노아는 방주를 통해 하나님을 증명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방주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매일의 삶이 있습니다. 오늘도 예배를 우선하는 삶,
오늘도 유혹을 뿌리치고 말씀대로 걸어가는 순종의 삶,
오늘도 하나님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
그 삶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세상에 보여주는 방주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