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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5장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LNCK 2026. 7. 11. 14:45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리더쉽, 목회자

20260705ㅣ다시, 예수의 이름으로(베드로전서 51 - 11)Youtube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벧전5:1~11               2026.07.05.   

오늘 베드로전서 강해 마지막 시간입니다. 벧전5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

벧전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사도 베드로는 '나는'으로 시작해서  해서 3가지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함께 장로된 자, 그리스도 고난의 증인,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

누군가 말을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서'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만큼 힘을 주어서 하고 싶은 중요한 말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로서 말하는데...' 그러면 자녀들이 귀담아 듣죠. 
어느 학교 교장선생님이 교사들에게 연설하면서 
말미에 '저도 평생을 교직에 담았던 사람으로서' 라고 말한다면, 
교장님이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나 보다' 하고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할 것입니다.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하는 말씀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는 말들이 쭉 이어집니다. 

이 말이 한글로 보면,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원어로 보면 강조점이 명확합니다. 

원어가 힘드니까 아쉬운 대로 영어로 본다면,
2절에 '셰퍼드'라고 하는 동사가 딱 맨 앞에 나옵니다. 

한글에서는 '양무리를 치되' 라고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인데, 
원어로 보면 맨 앞에 강력한 동사가 나와서 '치십시오 양무리를' 어순으로 나오죠.

기차가 쭉 이어지면, 맨 앞에 전체를 이끌고 가는 기관차와 같이 
힘있게 벧전5장 전체를 이끌고 가는 명령어가 '치라'라는 말입니다. 

한국어 '치라'가 약간 어색할 수도 있는데,
영어 성경들을 보면 'Shepherd (치라), Feed (먹이라), Take care of (돌보라)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번역이 가장 우리에게 맞는 것 같습니다. Take care of 돌보라.

다시 보시면, 다른 성경에는 Care for the flock 이라고 되어 있고요.  :2 '치되'
Watch over 이 말은 역시 '보살피라' 는 말인데, 
2절의 개역성경에 번역이 잘 안 되어 있죠. 개역엔 '하여'라고 번역했죠.

'돌봄'이라는 말을 우리 교회에서 참 많이 사용하는데, 
사실은 성경 전체적으로 돌봄이라는 말이 굉장히 강조되어 있고, 
자주 나와 있고 핵심적인 메시지인데, 
성경 번역에도 신학에도 잘 반영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될 부분입니다. 

베드로전서 말씀도 마찬가지로 돌봄의 명령입니다. 
'육적, 정신적, 영적, 정서적, 전인적 돌봄을 하라'는 말입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돌보라' 이 말씀은,
베드로의 개인적인 인생에 대단히 깊이 각인되어 있는 말씀이지요. 

베드로는 젊을 때 예수님 따라 나섰습니다. 
열심히 따라가다가 맨 마지막에 좌절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갔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어린 소녀 앞에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 후에 다시 고기 잡으러 가버렸죠.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물어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이 아십니다' 대답할 때에,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연거푸 똑같이 '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 라고 당부하십니다. 

그 당부를, 그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회복시켜 주시면서 
세 번이나 똑같이 진지하게 물어보시고 하시는 당부를, 
베드로가 남은 생애에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돌보라' 이 말은
베드로의 인생을 달려오게 한 오직 한 가지 가치였습니다.   요21장

그 이후로 '돌보라' 이 말은, 베드로의 인생을 달려오게 한 오직 한 가지 가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한 가지 사명을 위해서 일평생 전심전력했고, 
그리고 자기 인생의 마지막에 자기 후배 목자들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라고 말씀합니다.  5:2

▲'함께 장로된 자'
여기서 '장로'는 오늘날 제도와 많이 다르지만, 1차적으로 목회자를 말합니다. 
신약성경의 '장로'는 대부분 목회자에 가깝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오랜 전통에서 '장로'는 모두 성직자, 사제, 목회자에 해당하는 말이었습니다. 
야고보서 마지막에도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하라'라는 
말은 1차적으로 목회자에게 기도받으라는 말이죠. 

그렇지만 '평신도 장로'도 포함하는 것이, 개신교의 정신입니다. 
'평신도도 교회의 장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레디컬한, 
급진적인 개혁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입니다. 

사실 성경은, 더 레디컬하게 '모든 사람이 이런 역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제사장 역할, 목자 역할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사랑방 목자들도 '목자'라고 하잖아요. 
대단히 영광스러운 칭호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요10장에 보면,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시죠. 
맨 마지막에 요21장 와서 부활 후에야 '내 양을 치라'라고 베드로를 목자로 세워주십니다. 

로마 가톨릭은 이 권위의 의지에서, 교황제도를 만들었죠. 
'양 떼의 목자로 세우신' 이 임명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는, 
우리가 다 명심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목자장이시고, 베드로와 주의 종들이 목자이고, 
장로도, 사랑방 목자들까지 전부 다 '목자'입니다. 
그래서 '목자장'이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양들을 돌보는 '작은 목자들'인 것입니다. 

◑마귀가 갖고 놀기 좋은 사람

동시에 우리 모두는 목사들까지 다 '양'입니다. 
그 모든 양들에게 주시는 강력한 권면은 8절입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우는 사자같이 두루다니며 삼킬자를 찾는다' 
여러분, '우는 사자 마귀 출몰지역' 그런게 있을까요? 

제가 얼마 전에 아내와 함께 이 근처 산길을 산책하다가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아서 좀 많이 걷고 싶었는데 
가는 길에 중간에 플랜카드가 있는 거예요. '멧돼지 출몰지역!' 

그거 보고 아내가 얼어붙어서 '우리 그냥 집에 돌아가요' 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자는 어디에 출몰해요? 마귀는 어디에 출몰합니까?
 
'두루다니며' 이 말은, 특별한 곳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겁니다. 
어디나 툭툭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어느 집이든, 어느 골목이든, 어느 학교든, 직장이든, 
완벽하게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거룩하고 가장 경건해야 될 시간, 그 장소에도
우리는 딴 생각하고, 마음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출몰 지역은 따로 없는데, 
'마귀가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마귀가 만만하게 보고 공격하는 사람, 
마귀가 갖고 놀기 좋은 사람은, 

1. 첫째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사자는 초원에서 무리 전체를 정면으로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잘못하면 사자들도 버팔로 떼나 얼룩말 떼에게 밟혀 죽기도 합니다. 
아무렇게나 덤벼들지 않고 신중하게 관찰하죠. 

사자가 노리는 것은, 언제나 무리에서 뒤쳐져 있거나 좀 떨어져 나온 양, 한눈 파는 양들이죠. 
그래서 많은 얼룩말들이, 이렇게 어린 새끼는 무리 안에 넣고 보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얼룩말도 서로가 방패가 되어주지만, 
혼자 떨어진 순간부터 맹수의 세력의 표적이 된다는 거죠. 

여러분, 마귀의 전략은 언제나 정면승부 아닙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랬잖아요. 

마귀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믿음의 공동체, 기도하는 공동체와 정면승부하면,
이 마귀는 100전 100패에요. 
그래서 마귀는 언제나 뒤에서 옵니다. 고립되어 있는 사람을 노리는 거에요. 
그를 먹잇감으로 삼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붙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나는 놈 위에 붙어가는 놈이 있다'고 하죠.

새가 날개짓을 하며 구만리를 가도, 모기가 그 위에 딱 붙어있으면, 멀리 갈 수 있는 거예요. 
먼저 예수님께 붙어있는 게 제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있는 게, 어떻게 하는 건가..' 잘 모를 때가 있지 않습니까? 
당장 할 수 있고 가장 쉬운 방법, 확실한 방법은, 공동체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배에 나오는 거예요. 사랑방에 참여하는 거예요. 
힘들 때마다 서로 기도 제목 나누고... 그게 양 무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생활은 함께 해야 되는 거예요. 
특별히 여러분, 어렵고 힘든 일 있을 때 숨기지 마십시오. 
사랑방에서 나누고, 힘들면 목자에게... 
그것도 힘들면 목사님들에게 개인적으로 와서 기도 부탁하는 게 꼭 필요합니다. 

벧전5: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여러분, 오늘 말씀에 '장로들아 주장하지 말라 군림하지 말라' 
'젊은이들아 제발 좀 겸손해라' 당부하는 거는, 
공동체 생활이 그만큼 힘들다는 겁니다. 갈등이 있다는 겁니다. 어려움이 있다는 거예요. 

교회는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의 모임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는 거예요. 
벗어날 때 고립될 때에, 우리가 마귀의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마귀가 갖고 놀기 좋은 사람 두 번째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3절에 보면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라'라고 할 때 
'카타퀴리유오'라는 말인데, 
이것은 퀴리오스, '주님의 자리에 앉지 말라'라는 말입니다. 

교회 리더들이 특히 목사나 장로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교만이죠. 
다른 성도들, 새신자들, 젊은 사람들에게는 어떤가? 

벧전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라' 여기서 문장이 끊겨야 됩니다. 
그 다음에 all of you, clothe yourselves with humility '겸손으로 옷을 입어라' 

겸손하지 않으면, 옷 입지 않고 그냥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랍니다. 
자신의 그 누추함, 비루함, 감추고 싶은 자아를... 그대로 다 드러낸다는 겁니다. 
그게 교만이죠. 

여러분 세상에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한 사람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적절한 옷을 입지 않으면, 
자신의 부끄러움,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모습들이 그대로 다 드러납니다. 

그리고 얼룩지고 상처가 나기도 하는 거예요. 
여러분 감자탕 먹으러 가서 뼈 뜯을 때, 앞에 앞치마 입잖아요. 그렇죠? 
안 입으면 옷에 얼룩지죠. 

일할 때 장갑 안 끼면, 나무 다루다가 가시에 손이 박히죠. 

여러분, 세상 살면서 '마음에 상처받았다'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그 상처의 상당수는요. 장갑 안 껴서 그렇습니다. 
적절한 작업복을 안 입고 작업해서 그런 겁니다. 

여러분, 사람이 '겸손의 옷'을 입는다면, 상처받을 일이 확연하게 줄어들 것입니다. 
전기 만질 때 '절연 장갑' 껴야 되잖아요. 안 끼고 하다가 감전되어 넘어가요. 

여러분, 코로나 때 기억하십니까? 그 방호복. 
그 더운 날씨에 방호복 입고 돌아다니면 얼마나 답답해요? 

여러분 겸손하게 사는 것은 답답한 거예요. 힘든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을 벗으면, 훨씬 더 심각한 공격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겸손하게 묵묵하게 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겸손의 옷'을 꼭 입고다녀야 됩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아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게, 그리스도의 겸손을 입는 것입니다. 

3. 마귀가 만만하게 보는 사람 세 번째는,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여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willingly 하라' 5:2

여러분 사역의 동기, 인정받고 싶은 마음, 박수 받고, 다른 사람들보다 돋보이고 싶은 마음, 
목회자로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그거를 지금 말씀하는 거죠. 

우리가 여러분 경쟁해서 이기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사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거는 오래 못 갑니다. 곧 지치죠. 여러분, 다 해보셨잖아요. 

내가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뭘 하다 보면요. 
어느 순간인가 섭섭한 마음이 찾아와요. 

교회 사역이..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축하해줄 때도 있지만, 오해할 때도 있고요. 
오히려 무시할 때도 있고요. 억울할 때가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누가 이런 말을 했어요. 
'귀신 중에서 가장 독하고, 한 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도 않는 귀신이 섭섭 귀신이래요.' 

섭섭한 마음 한번 들기 시작하면, 다 하기 싫고, 다 꼴뵈기 싫어져요. 
여러분 '섭섭 귀신'이 혹시 찾아오면, 
'너 왜 왔나?' 그러지 마시고요. 
나의 섬김의 동기를 점검해 봐야 됩니다

'내가 왜 이거 하냐? 내가 왜 하나님 섬기냐? 내가 왜 교회 일을 하냐?' 
그렇죠. 순수한 동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순수해질 수 있을까요? 

◑순수한 동기로 섬기면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삶으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가 참 좋아하는 찬양인데, 
베드로전서 전체의 주제가라 할 수 있을 만큼, 집약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의 부와 세상의 명예, 세상의 자랑, 모두 내려놓고 
날 구한 십자가, 날 씻긴 보혈, 주의 은혜를 깊이 생각합니다." 

여러분, 참 좋은데요. 저는 이 찬송 부를 때마다, 가끔씩 이렇게 걸릴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 자랑 모두 내려놓고' 라고 시작하기 때문에, 이게 부담이 돼요. 
마치 체한 것처럼 제 목에서 걸려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여전히 내 영광, 내 자랑, 그거 못 넘어서는데, 아직 못 놓고 있는데, 
지금도 많은 분들이 내 사업, 내 주식, 이게 다 너무 소중한데 
찬송은 '모두 내려놓고' 이러면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내 안에 옳지 못한 더러운 동기가 발견될 때 어떻게 합니까? 
'내 자랑, 비교의식, 남보다 앞서고 싶은 마음...' 

여러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도, 그 숭고한 사랑도 더럽혀질 수 있습니다. 
비교의식으로.. 그렇죠? 
다른 가정보다 잘나가고 싶은 마음.. 
혹은 내 열등감을 자녀의 성공으로 메우고 싶은 마음.. 들이 있잖아요.

어떻게하면 우리의 동기가 순수해질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에게도, 그가 참 열심히 섬겼는데 
늘 신경 쓰이는 동료가 있었습니다. *요한

여러분 주위에, 직장에도 이런 친구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보다 어린데 더 똑똑해요. 예수님도 그를 더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나는 막 헤매는데, 저기서 여유있게 일 다 하고 웃고 있어요. 
'쟤 뭐야?' 그러면 나는 되게 기분나빠요.

요21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미래에 너는 순교할 거다' 
그 때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아십니까? 

'너는 장차 순교할 거다' 그러면 '아멘 감사합니다' 하든지, 
아니면 '힘들겠는데요' 하든지...

그때 베드로가 엉뚱하게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면,
'너는 순교할 거다' 이렇게 자신의 미래의 중요한 사역을 말씀하는데도요. 

'쟤는요? 쟤도 순교하나요?' 
'내가 순교하는 거 오케이,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쟤는 예수님이 총애해서 순교도 안 하고 그러면, 내가 기분 나쁘지...' 
여러분 이게 인간의 비교의식이고, 열등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유명한 말이 있어요. 
'순교는 해도, 기분 나쁜 것은 못 참아!' 

하나님께 모든 시간 다 드리고, 심지어 전 재산 다 바쳐도...
기분 나쁜 거는 못 참아 해요. 우리는 참기 어렵습니다.

어떡하죠? 어떻게 그 비교의식, 자기중심적 생각을 버릴 수 있나요? 
여러분 비교의식, 질투, 물욕, 정욕, 성적인 욕망, 불같은 욕망이 찾아오면요. 
싸우지 마십시오. 베드로전서 3:21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벧전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아멘 

여기서 '육체'는, 피지컬 바디가 아니고, sinful nature 우리의 죄된 본성, 
나 자신의 죄성을 말하는 겁니다. 

내 안에 있는 더러운 것, 잘못된 동기가 있는데요. 
그 안에는 그것을 예수님이 딱 잘라서 깨끗하게 단번에 하시는 게 아니고요. 
'하나님을 향해서 선한 양심이 찾아간다'는 거에요. 

여러분, 어떤 욕심이든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다,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 하고 
자신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하나님을 찾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선한 양심이 뭔가요? 
하나님께 조율이 된 마음, A heart attuned to God 입니다. 벧전3:16, 21

'내 양을 치라'고 베드로에게 당부하셨을 때에, 예수님은 무엇을 물어보셨습니까? 
'베드로씨, 목자에 지원하셨네요. 양치는데 경험 있습니까? 체력은 튼튼하신가요?' 

그게 아니죠. 
단 하나의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맡기마' 

여러분, 사람이 사역을 하다보면,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역이든 마음이 복잡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거 왜 하나?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역자가 다 이런 경험을 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역하는데, 나를 바치셨는데, 나는 헌신하고 봉사하는데...' 
고난이 다가오고, 오해받고, 억울하게 될 때에, 
여러분, 그때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주님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편하자고 사역하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박수 받자고 사역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맡기시면서, 하나만 물으십니다.  

우리의 능력을 묻지 않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의 동기는 사랑으로만 순수해질 수 있습니다.  


이러면 사람에게 바로 가르친다고, 책망한다고,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한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사랑이 부어져야 사람이 바뀌는 거예요. 

그리고 잘못된 사랑은, 올바른 사랑으로만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돈이 아니라, 이익이 아니라, 내 명예가 아니라... 

여러분, 우리 모두 사역하는 동기가, 이익이 아니고, 사랑이길 축복합니다. 
우리가 열심 내는 이유가, 내가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이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헌신하는 이유가, 나의 성취감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길 축원합니다. 

우리 사랑방 목자들, 교회학교 선생님들, 사역이 쉽지 않으시죠? 
힘들 때마다 주님 음성을 기억해 보십시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런 음성을 주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위한 사랑만이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동기! 

 

'우리가 내려놓기, 비우기' 이런 말을 많이 하지만,
여러분 욕심을 내려놓고, 열등감을 내려놓고, 정욕을 내려놓고, 
불안을 극복하는 거...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기 빈컵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공기가 가득 찼어요. 
컵에 담긴 공기를 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여러분, 빈 컵에 있는 공기를 빼내려면 대단히 힘듭니다.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어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물을 부으면 부은 만큼 공기는 나가는 거예요. 
물이 가득하면 공기는 다 나가고 없는 거예요. 

'가득하다'라는 말을, 성경에서는 '충만하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먼저 다 비워놓고 '예수님 오세요' 그게 아니라, 

내 걱정과 염려 욕심이 있는 그대로, 그 상태에서, 예수님으로 충만하면, 
그 걱정이 밀려날 줄 믿습니다. 열등감이 잊혀질 줄 믿습니다. 
욕심이 점점 작아지고, 예수로 더욱더 충만하게 될 줄 믿습니다. *공기가 빠져나가듯이요

  

비교가 아니라,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랑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녀를 키울 때도 온전한 사랑으로 우리가 키울 수 있는 거예요. 

◑'베드로의 이름'이 아닌, 오직 '예수의 이름'만이 세상의 소망

그 허물많은 베드로, 촐랑거리던 베드로가 
자기 자랑을 내려놓고 예수 사랑으로 자원함으로 사역하니까, 권위가 생겼습니다. 
베드로전서가 그 권위의 상징이자 표현이죠. 

근데 여러분, 그 권위가 점점점점 올라가고 강해졌습니다. 
후에 로마의 교회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 그래서
베드로를 초대 주교로 모셨습니다. 

그때 로마가 세계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후예들이 
최고 잘난 주교, 교황이 되었습니다. 로마 교회 출신들이요.

(쉽게 말하면, 서울 출신 목회자가 한국의 전국을 대표하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중세 때 훌륭한 주교들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중세 기독교 전체를 모든 주교들을 폄하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중세 말에 와서 교회의 타락이 극에 달했죠. 
가슴 아픈 것은, 그들이 '베드로의 이름으로' 타락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나그네된 교회'에 편지했는데, 
후의 교회는, 세상의 중심에서 군림했습니다. 

베드로는 '겸손으로 옷 입으라' 그랬는데, 
그의 후예라는 사람들은 '황금색 옷'을 입고 교만해졌습니다. 

베드로는 '군림하지 말라' 그랬는데  5:3
교회는 베드로의 이름으로 권력(교권)을 남용했습니다. 

베드로는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말라' 그랬는데, 5:2
교회는 성 베드로 성당 짓는다고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으로! 

여러분 아십니까? 베드로는 '베드로(교황)의 이름'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베드로 그 자체는 실패한 이름이고, 부끄러운 이름이에요. 
마가복음, 요한복음에 분명히 나와 있어요. 

미안하지만 '교회의 이름'도 이미 실패한 이름입니다. 
역사 속에 교회가 지은 죄, 잘못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만이 세상의 소망인 줄 믿습니다. 
다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베드로(교권주의자)의 이름이 아니라, 교회의 이름이 아니라요!

갈릴리에서 온 나그네 예수, 예수의 이름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그 예수의 이름으로, 나그네 교회로 돌아가야 됩니다. 교회가 겸손해지는 거죠.  마8:20

4:17절에 깜짝 놀랄만한 말씀이 나옵니다.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처음 이 말씀을 들으면 혼란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먼저 받아야 된다'는 거죠. 

어떤 교인은 '목사님, 교회 다녀도 심판받나요? 우리 다 이미 구원받은 거 아닌가요?'
 
중세 말의 그 타락했던 교회를 생각해보면,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들어와 있다고, 교적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고, 
내가 목사라고, 장로라고, 교황이라고 심판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4:17절을 쓴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헌금을 많이 했어요. 집을 팔아서 갖다 바쳤습니다.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그래서 심판받았습니다. 어디에서 심판 받았어요? 
교회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그때 교회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이 베드로잖아요. 
'그때 모든 사람들이 다 두려워했다' 그랬습니다. 행5:11

베드로는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심판의 엄정함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교회에 몸이 들어와 있다고 해서... 여러분, 안전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타락이 있을 수 있고, 마귀의 유혹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만의 죄예요. 교만의 죄에 깨어있어야 됩니다. 

▲베드로전서의 맥락을 다시 요약하면, 프리 크리샌덤에서 교회는 나그네였습니다. 
*전기 기독교 사회 pre-Christendom

크리스탠덤 Christendom, 기독교세상, 중세 왕국이 되면서..

교회가 사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한 일도 많았지만, 교회가 그 본질을 떠나서 교만해졌습니다. 

그 결과, 다시 현대사회에서 주변으로 밀려나서, 교회가 다시 나그네가 됐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포스트 크리샌덤'이라고 말합니다. post-Christendom  

한편으로는 마음 아픈 일이지만요. 다시 생각하면요. 
'이제야 교회가 그 교만에서 벗어나서, 다시 나그네가 된 예수님, 
나그네 교회로서 정말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상태가 됐구나'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행3:6
외칠 수 있는, 세상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 다시 주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의지하지 않고, 나의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로 옷 입고, 그 겸손으로 옷 입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 땅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로 충만할 때, 
우리를 괴롭히던 모든 것, 그 정욕, 비교의식, 열등감, 그 교만, 
모두 다 뒤로 물러가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5:10절, 본문의 결론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첫 번째, 우리는 부족하지만, 상처가 많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고,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흔들리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굳건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세 번째,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네 번째, 이 변화많은 세상에서도, 우리의 터를 견고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 은혜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래서 온전한 삶을 주님께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