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률은 한턱내는 삶의 방식 마7:12 2025.10.23.
마태복음 7:12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황금률 The golden rule 은 쉽게 말하면 "한턱내는 삶의 방식"입니다. *주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을 우리는 황금률이라고 일컫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유사 황금률들이 곳곳에 있음을 압니다.
예를 들어 공자님께서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 하셨고,
또한 유대의 유명한 랍비인 힐렐도 ‘남이 너희에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을
너희도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학자들은, 황금률과 이런 ‘유사 황금률’들 사이에 차이를 발견합니다.
황금률은 ‘남을 대접하라’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계명이지만,
유사 황금률들은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 라든지,
‘남이 너희에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을, 너희도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라는 등
주로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말한 점이 다르다는 겁니다.
여러분, 기껏 이 점이 다른 겁니까? 이렇게 보니까
황금률 대로 삶을 사는 사람이, 오늘날 많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12절의 황금률을 사람들이 인용할 때부터, 문제가 문제가 발생합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렇게 인용하니까 황금률의 의미가 훼손되는 겁니다.
‘어 이상하다, 말씀 그대로 인용했는데 왜 그러느냐?’ 라고 반문하실 겁니다.
이렇게 인용하면 절대로 안 되지요. 반드시 그 앞에 “그러므로”가 포함이 돼야만 한다는
거예요. *헬. 운 oun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처럼 오늘 12절의 황금률은 반드시 앞에 나오는 11절 말씀과의 연관성 안에서만
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그러므로'라는 단어는, 황금률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왜 마땅한 삶의 방식인지
그 이유를 담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뒤에 마7:7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으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하나님을)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7:11
‘좋은 것(하나님, 성령님 눅11:13)으로 아버지께 받을 것이니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오 선지자니라’ (구약성경의 요약이니라) 이렇게 맥락이 흘러가는 겁니다.
▲자 이제 황금률과 유사 황금률들의 차이가 무엇이지요?
유사 황금률들은 사람과 사람의 상호관계를 전제합니다.
그러나 황금률은 사람과, 하나님과, 또 다른 사람의 삼각관계를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먼저 하나님과 묶여있는 상태가 되어야 하지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대접을 받으려 하다가도 스스로 돌이킵니다.
‘그래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이 사람에게서 무슨 좋은 것 얻기를 기대한다는 말인가?
내게는 지금도 나를 보고 계시는 하늘아버지가 계시지 않나?
내게 하나님을 주시고, 또 내게 좋은 것은 모두 필요를 따라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지...
이 세상에 사는 피조물인 사람이 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나와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를 더 먼저 앞서서 확인하고 기억하지요.
나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진 자입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있음을 실제로 내가 실감합니다.
게다가 그 하나님이 또한 실제로 내게 필요를 따라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건 정말 굉장한 경축사건 아닙니까?
내게는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일어날 수 없지요.
나는 하나님을 소유했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졌습니다.
세상에! 말할 수 없는 큰 부자가 된 셈이지요!
▲이처럼 정말 굉장한 경축사건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무엇을 합니까?
이제 그 경사스러움에 겨워 누구든지 만나는 대로
자기 돈 써가면서 한턱 내지 못해 안달합니다.
그렇습니다. 황금률은 이처럼 한턱내는 삶의 방식입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실제 내 아버지로 실감하면서
좋은 것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주시는 대로 받으면 되니까요!
이 기가 막힌 인생이 된 것을 스스로 경축하는 삶의 방식이 황금률입니다.
이런 경사스러움을 가져다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 아니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연합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부활승천해서 지금 천국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잖아요.
그러노라면 마음 안에 있는 공백을 좋은 것으로 채우고자 할 때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서,
갖게 되는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어서
마음이 예수님 안에 갇히다시피 하여 하늘로 따라간 뒤에
다른 대상은 없어서, 할 수 없어서라도 하나님 자신만을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그러노라면 점점 더 하나님의 좋으심이 많이 실감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좋으심에 대한 실감이 커지는 정도에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진 상태가
얼마나 큰 경축사건인지도 같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 자신을 아버지로 가진 경사스러움을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도 누리고 즐길 정도가 되면
반드시 나타나는 증거가 있다는 거예요.
누구를 만나든지 한턱 내고 싶어 안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여유로워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볼 때,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경사스러움에 겨워 한턱 내지 못해 안달하는 삶의 방식을
예수님은 ‘황금률’로 표현하신 겁니다.
이처럼 황금률은 윤리적으로 높은 차원의 기준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덕분에 실제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진 사실에 대한 실감을 키우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경축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이해하고 있는 '황금률'과 똑같습니다만, 뭐가 다른가 하면,
그 '동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저 보통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소유하고, 천국을 가진 부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관대함으로 사람들을 대하면,
사람들도 그렇게 나에게 대해줄 것이다.. 라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