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는 그늘이 없습니다 | 주일예배설교 | 2026-06-21
◈가시나무는 그늘이 없습니다 삿8:22-27 2026-06-21
“가시나무에는 그늘이 없습니다” 라는 제목을 가지고
사사기 8장과 9장 전체를 볼텐데, 저희가 읽을 말씀은 삿8:22~27절까지입니다.
우리가 ‘죄’라는 용어를 들으면, ‘나쁜 짓 한다’ 이런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성경에서 ‘죄’라는 것은, 주로 우상숭배를 뜻합니다.
우리는 우상숭배를 ‘죄 중의 하나’로 여길 때가 많죠.
나쁜 짓도 있고, 이런 죄, 저런 죄, 하나님을 안 섬기고 절에 가는 죄...
이런 식으로 자꾸 우리가 생각을 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이 있어야 될 자리,
하나님이 있으라고 한 자리를, 우리가 떠난 거예요. 무언가로 대체해버린’ 겁니다.
내 마음 속 왕좌에 하나님이 계셔야 되는데, 여기애 돈이 들어가 있어요. 그게 우상이에요.
그게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우상이 자리 잡고 있으면, 그 현상으로.. 여러 가지 죄악들이 나타나는 거죠.
우상숭배가 곧 죄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 우상이라는 것이, 크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표면적인 우상입니다.
-또 하나는 근원적인 우상인데, 진짜로 무서운 건 근원적 우상이에요.
왜냐면 이건 안 보입니다. 숨겨져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늘 감추려고 합니다.
1) 표면적 우상
예를 들어서, 가장 이 성경 안에서 억울한 게 뭘까요?
생각해 보면, 돈이 좀 억울할 것 같아요.
만약 돈이 인격성이 있다면, 엄청 억울해할 것 같아요.
왜냐면 막 마태복음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마라.
돈을 사랑하지 마라’ 그런데 돈은 원래 가치 중립적인 거거든요.
‘난 죄가 없어..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너희가 우상으로 사랑했잖아?’
이게 항변할 것 같거든요. 돈은 특성상 매우 중립적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버느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성격이 규정이 되니까,
이게 탐심의 도구로 이렇게 표현이 되지요.
여러분이 돈이 우상이라고 해서, 돈을 찢어 버리면.. 우상이 없어져요? 그런 거 아니잖아요.
지금 표면적 우상을 살피는 중인데, 돈이 표면적 우상 가운데 하나이에요.
2) 근원적 우상
근원적 우상은 이런 겁니다.
‘내가 왜 이렇게 돈에 집착을 하지?’
‘내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와 있어야 되는데, 왜 자꾸 돈, 돈, 돈 하지?’
이게 근원적 우상이에요.
근원적 우상의 형태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한 4가지 정도가 됩니다.
-첫 번째가, 안정이에요. ‘안정 security 이라는 우상’
미래가 불안한데 하나님이 ‘내가 여호와 이레가 되어줄게, 너의 인생을 지켜봐 줄게’
그걸로는 불안해요. 그 불안감이 돈을 붙잡게 되는 겁니다.
이 돈이 있으면, 통장에 찍혀있으면, 내가 보험도 들고 있으면,
이게 날 지켜줄 것 같은데... 하는 안정감 security 의 우상이라는 게 숨은 우상입니다.
-두 번째가, 인정 recognition 이라는 우상
'내가 별 볼 일 없는 인생인데, 뭐 가진 거리도 좀 있어야지...
남들 쉽게 못 들고 다니는 명품이라도 좀 들고 다녀야,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안 대하지..‘
이런 거예요. 명품 빽 들고나녀야 되니까, 돈이 있어야 되잖아요.
‘인정 받고 싶은 욕구’가 숨은 우상이 돼서, 돈을 계속 탐하게 되는 거예요.
-세 번째, 통제 욕구도 있어요. control
사람들을 갑질하고, 내 발 아래 두려고 하고, 뭐든지 내 뜻대로 하려고 하고,
이게 가진 자의 어떤 특권 아닙니까?
‘아 돈이 있어야지... 그래야 내가 사람들을 막 통제할 수 있구나’
-네 번째, 이거랑 연결되는 게 권력 power 이에요. 권력 욕심!
그러니까 우리는 대부분 ‘숨은 우상’이라는 게,
인정받고 싶거나, 안전하고 싶거나, 통제하고 싶거나, 권력을 휘두르고 싶을 때, *근원적
‘돈’을 추구하는 모양으로 나오게 되는 거거든요. *표면적 우상
여러분, 이 근원적 숨은 우상을, 내 속에서 끄집어내서 회개해야 돼요.
돈을 찢는다고 우상이 사라지는 게 아니고,
이 숨은 우상들을.. 진정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으로 대체해야 되는 거죠.
‘하나님만이 나의 힘 power 이시다. 하나님이 여호와 이레로 내 인생을 이끄신다. security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인정 recognition 하셨으므로,
십자가의 대가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므로, 나는 나 스스로를 더 이상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럴 때, 그 우상을 버릴 수 있는 거죠.
여러분, 세상에는 능력주의가 득세합니다. 유능하고 일을 잘 처리해내는 사람이 인정받죠.
그러나 교회는 능력주의가 있으면 안 된다니까요.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 구원받은 게 아니니까요. Ability, competent, capable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요?
오늘 말씀드리는 이 기드온에 대한 얘기가, 이 “숨은 우상”에 대한 얘기예요.
기드온이.. 자기 속에 우상이 있는데,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에게 우상이 있는 게, 표면적으로 드러나 보이진 않습니다.
그게 무서운 거라는 거죠!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인 거죠!
하나님 기드온을 사용하셔서, 미디안의 13만5천 명을, 3백명을 데리고 이기게 하셨는데,
그 이후를 보니까... 이 기드온 안에 있었던 “숨은 우상”이 모든 것을 망치더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도 똑같아요.
기드온을 손가락질 할 게 아니고, 내 안에 포장되고, 위장되고, 숨겨진 우상을 끄집어내려면,
하나님이 내 마음 속 보좌에 들어오셔야지,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내가 감추면 감출수록... 그 문제는 더욱더 노골적인 죄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우리가 살펴봄을 통해서, 우상과 결별하고,
하나님을 붙잡는 은혜가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삿8장과 9장은 긴 내용인데, 세 가지로 좀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1. 첫 번째, <숨겨진 우상이 왜 무서운가 하면, 남들에게 좋은 신앙처럼 보여지게> 해요.
숨겨진 우상이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걸 감추고 포장하는 데 능하기 때문에,
반대로 좋은 신앙인처럼 보여지게 해요.
우리를 회개로 이끌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꽤 많이 괜찮은 줄 알아요.
3백명으로 어떻게 미디안 13만5천명을 이깁니까? 이건 기적이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신 거예요.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니까, 사사기 8:22절을 보세요.
그때 미디안에게 승리하고, 미디안의 수많은 전리품들을 탈취한 이후에 얼마나 좋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뭐라고 그래요?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람들 눈에 안 보이는 거죠.
사사기의 반복되는 패턴이 뭐였습니까?
구원하고 나서.. 그 은혜를 망각하고 또 보이는 사람을 의존하는 거예요.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그 다음에 요청을 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려 주십시오’ 삿8:22
이건 단순한 기드온에 대한 감사 인사가 아닙니다. 뭘 요구하는 겁니까?
왕조가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시고, 당신의 아들도 왕이 되고, 당신의 손자까지..
자자손손이 왕의 가문, 왕조를 세우셔서,
기드온 왕조만 있으면, 우리 이스라엘이 아주 평화로울 수 있을 것 같으니,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이에요.
▲그런데 기도온이 아주 훌륭한 대답을 합니다.
삿8: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기드온은 자신의 권력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런 말로 싹 감추어 버립니다.
‘아휴,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않을 거야..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않을 거야..
오직 여호와만 너희를 다스리실 것이야...’ 말이 얼마나 훌륭해요?
표면적으로는 ‘나는 왕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왕이세요!’
아주 대답을 잘했어요.
그런데 성경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질 않아요.
‘나는 왕이 아니야’ 라고 말한 다음에
‘근데 내가 부탁이 있어.. 너희가 미디안한테 탈취한 것들 있잖아?
그 금 귀고리들을 나한테 좀 모아 줘!’
그랬더니 백성들이 가져다 줬어요.
줄 때 여러분이라면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아요?
기드온한데 주면서 고마우니까 주었겠죠.
‘우리가 미디안에 압제에서 살아났으니까 탈취한 거 좀 나눠줘도 아깝지 않지..’
그래서 기드온이 개인적으로 그것을 얼마든지 가져도 되는데,
그가 너무나 훌륭한 일을 해요.
8:27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기드온은 모은 금으로 에봇을 하나 만들었어요.
에봇은 당시 제사장들의 예복 중 하나인데,
주요 용도는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판결 도구로 사용하거나 *우림과 둠밈
12지파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보의 목적을 띱니다. *가슴에 12보석
사람들이 금 귀걸이를 모아주면서
'저 인간이 이렇게 착복하고 자기만 잘 살 줄 알았더니, 에봇을 만들었네?'
'역시 우리 기드온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야!' 하고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27
결과가 좋아요, 안 좋아요? 안 좋았어요.
기드온은 지금 자기의 숨겨진 우상을 포장한 거예요.
원래 왕이 되고 싶었거든요. 인정받고 싶었거든요. 권력을 잡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말로는 '나는 왕이 아니야. 오직 하나님만 우리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분이야'
하며 막 손사래를 쳤지만,
그 마음에 숨은 우상, 권력에 대한 우상, 인정에 대한 우상... 그것이 튀어나온 게 에봇입니다.
에봇은 원래 금실과 여러 가지 직물들을 조합해서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금실로만 만들었어요. 에봇은 이미 실로라는 데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그 에봇을 입고, 실로에서 예배 드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거예요.
그런데 기드온은 이 금으로 만든, 어찌 보면 사람의 눈에는
그 실로에 있는 에봇보다 훨씬 더 귀해 보이는 이 옷을,
자기가 사는 곳인 오브라에 두는 거예요.
그럼 사람들이 실로로 갈까요? 오브라로 올까요?
오브라로 오는 거예요. 왜요?
'야, 실로에 있는 거는 다른 직물로 섞어서 만들었는데,
기드온이 만든 오브라에 있는 에봇은, 금실로만 짰대!'
'게다가 기드온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잖아?
오브라 쪽으로 가야 더 영험해,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더 있어!
여기가 하나님이 더 세게 역사하셔!'
기드온이 결국 자기 왕국 만든 거라니까요.
자기가 제사장이고, 자기가 왕이라니까요.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나한테 오라고 얘기하는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는 거예요.
그리고 뭘 섬겼다고요? '에봇을 음란하게 위했다(섬겼다)'고 했습니다. :27
성경에서 음란하다는 게 뭡니까? 하나님을 떠났다는 얘기예요.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놀랍지 않아요? 하나님을 위한 에봇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거죠.
▲기드온의 에봇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상이 하나님과는 반대되는 거라고 생각하죠? 우리 밖에 있는 거라고 생각하죠?
No! 진짜 우상은 우리 안에 있다니까요.
신앙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안에, 나의 숨겨진 우상이 덧입혀지면,
그게 바로 음란하게 섬기는 우상이 되는 겁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마음에 품기 시작하면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살인하죠.
직접적인 살인은 아니었지만, 가장 위험한 전장터에 자기에게 가장 충성스러웠던
우리아 장군을 밀어넣어서 죽게 만든다고요. 그걸 교사하고, 지시했죠. *敎唆 : 부추김
그리고 나서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와서 왕비로 삼죠.
그 일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욕했을까요, 칭찬했을까요?
다 박수쳤다고요. '정말 훌륭한 왕이다!
아니 자기의 부하장수의 아내까지도 책임져주는 왕이구나!' 라고 다 칭찬했다고요.
하나님을 위하는 척! 신앙적인 척! 괜찮은 척! 했지만,
사실 이 우리아와 밧세바의 사건 안에는, 다윗의 숨겨진 탐욕이 있었던 거죠.
밧세바를 얻기 위해서 우리아를 죽인 거잖아요...
여러분 이게 우리에게 주는 경고예요.
우린 우상을 자꾸 밖에서 찾는데, 진짜 우상은 우리 안에 숨어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부흥사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열정만큼 부패하기 쉬운 게 없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열심히 하면.. 다 박수 쳐주죠.
교회 안에서 일꾼 되는 거, 무슨 어떤 직위를 갖는 거,
부장집사 되고, 안수집사 되고, 장로 되고...
정말 하나님께 헌신해서 이기도 하지만,
여러분 마음의 중심이 없이도, 얼마든지 다른 동기로 여기서 완장 찰 수 있다니까요.
교회는 열심히 하는 사람을 너무 좋아해요. 봉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너무 좋아해요.
성실한 사람을 너무 좋아해요.
왜 최선을 다하고, 왜 열심히 하고, 왜 성실한지... 그 동기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또 그건 표면적으로 보이지도 않으니까요.
교회에서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면, 그 사람을 무조건 써요.
그 사람 안의 동기와, 그 사람 안에 있는 숨은 우상을 들춰내질 않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뭔가 열심히 하잖아요? 그럼 여러분도 스스로 속는 거예요.
'내가 이 정도면 괜찮지.. 이렇게 하면 내가 신앙심이 있는 거잖아!'
'내 안에 있는 숨겨진 우상이 무슨 소용이 있어? 그거 알아서 뭐해?
내가 지금 열심히 하고 있잖아? 교회를 위하고 있잖아, 하나님을 위하고 있잖아?
그럼 되는 거지...'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것 때문에 망한다니까요.
열정 때문에 부패한다라는 뜻은.. 열정이 식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 열정이 여러분 속의 숨겨진 우상을, 더욱 알아채지 못하게 한다는 얘기입니다.
계속 나를 괜찮다라고 덧씌운다는 얘기예요. 포장한다는 얘기예요.
여러분, 무작정 열심 내지 마세요.
오히려 그 열심을.. 여러분의 숨겨진 우상을 파내는 데 쓰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을 살리는 길이고, 여러분의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고,
여러분의 가정을 살리는 길입니다..
▲기드온은 머리로는 알았어요. 말로는 신앙적이었어요.
에봇을 만드는 신앙적인 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고 싶었어요.
기드온조차도 이게 문제가 될 줄 몰랐을 거예요.
자기도 아마 처음에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했을 겁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수많은 일 중에
그 동기를 점검하지 않아서
우상처럼 여겨지는 일들을 열심히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여러분, 오늘 기드온을 비난하고 정죄하려는 설교가 아닙니다.
'나에게도 숨겨진 우상을 끄집어내라. 그 우상의 자리에서 나오라!'
내 안에 숨겨진 우상을 발견하고 내쫓고,
내 인생에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라는 온전한 고백이 있기를, 하나님은 바라시는 거죠.
오늘 숨겨진 우상으로 덧입혀지고, 포장하고, 마치 괜찮은 척... 안 해도 됩니다.
교회는 죄사함 받는 곳이에요. 죄 안 짓기 대회 하는 거 아닙니다.
기독교는 죄 안 짓는 종교가 아닙니다.
여타 종교도 여러분 불교, 유교, 천도교 뭐 다 가보세요.
죄지라고 종용하는 종교가 있어요? 없어요. 다 '죄짓지 마 그래야 복받아' 말합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
그리고 그 죄를 사하시는 은혜 앞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 공동체는, 막 가면 쓰고, 포장하며
내가 괜찮은 존재인 걸 증명하는 공동체가 아니고,
죄사함의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2. 두 번째, <숨겨진 우상은 결국 심각한 죄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이야기가, 기드온 한 사람 망하는 스토리로 끝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드온의 숨겨진 탐욕이, 그대로 방치가 되니까,
이게 기드온에게도 문제지만, 그 가문에 문제가 생겨요.
먼저 기드온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8:30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31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
기드온은 자녀가(아들이) 70명이었고, 또 세겜에도 가서 첩을 뒀는데,
그 첩의 아들의 이름은 아비멜렉이었어요.
자 그럼 우리는 이걸 읽으면서 기가 막히죠.
'와 어떻게 저렇게 아내가 많아.. 음란해...' 이런 관점으로 보는 게 전부가 아니고,
이 얘기의 핵심은 '아내를 많이 두었다'고 그랬죠.
당시 사회 속에서 '아내를 많이 두는' 일을 가장 많이 한 게.. 왕입니다.
(그러니 왕이 안 되겠다고 했던 기드온이, 사실은 왕 행세를 한 겁니다)
왕은 정치적 네트워크가 필요하기 때문에, 여타 주변 나라들과 계속 자녀를 결혼시키든지,
본인이 직접 결혼하든지... 결혼을 많이 하고, 아내를 많이 둡니다.
그게 권력이고, 그 나라를 지키는 일이고,
그래야 전쟁이 났을 때 서로 협력해서 외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아내를 많이 뒀다'는 얘기는, 다시 말하면 '내가 왕이다!' 라는 얘기예요.
게다가 기드온은 세겜까지 가서 첩을 뒀는데, :31
그 첩으로부터 낳은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으로 지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왕(멜렉)이다' 그런 뜻이에요.
기드온이 말은 뭐라고 했어요?
'나는 왕이 아니야!' 했는데,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뭐라고 지었다고요? 아비멜렉 - "나의 아버지는 왕이야"
기드온의 마음이 그대로, 그 아들의 이름에 투영되어 나온 겁니다.
기드온은 스스로 누구처럼 여겼다? 자기를 왕처럼 여긴 거예요.
▲여러분, 이런 배경에서 아비멜렉이 괴물처럼 등장합니다.
그가 자기 형제 70명을 다 죽여요. 그리고 자기가 왕이 됩니다.
이 일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죠.
아버지 기드온이 손으로는 손사래치며 ‘나는 왕이 아닙니다’ 했지만,
실제로는 왕같은 삶을 살았었고,
그 왕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 휘하에 자녀들은 왕자처럼 살아갔으며,
왕자처럼 살아가던 그들 중에 한 명인 아비멜렉은
‘내가 왕자구나.. 그럼 이제 내가 왕이 돼야지!’ 라고 권력을 꿈꾸면서
자기의 형제들을 한꺼번에 처단하는 거예요.
이 일이 왜 일어납니까?
기드온이 그 자기 안에 숨은 우상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권력이 권력을 만들어낸 겁니다.
자기가 왕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왕을 이을 아들을 만들어냈고,
나머지 70명은 다 죽은 거예요.
9:2절을 보면 아비멜렉이 자기는 세겜 출신이잖아요. 오브라 출신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세겜 땅으로 찾아가요.
9: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여룹바알’은 기드온을 뜻하는데, 이 이름의 뜻은 좋아요.
‘바알과 맞서 싸우다’ 이런 뜻입니다.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아들 70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자기가)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의 골육임을 기억하라’
세겜 사람들이 지금 힘을 모으려고 하는데
‘야, 내가 너희 세겜 왕이 되면 아파트 지어준다니까...
내가 왕이 되면 거기 지하철 뚫어준다니까...
내가 왕이 되면 거기 쇼핑몰 지어준다니까...
여기 구건축 다 재건축으로 해줄게’
세겜 사람들이 ‘오 그래? 그러면 너 찍어야지’
그래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만들어 준 거예요.
▲여기에 정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까?
공동의 선이 있습니까? 없어요.
‘내가 네 골육임을 기억해! 우리 같은 출신이잖아?’
우리 자신을 각자 다 돌아보셔야 돼요. ‘우리의 결정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
아비 멜렉은 정확히 아는 거예요.
‘이득을 주자. 세겜에 이득을 주면, 나는 왕이 될 수 있어!’
세김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지하철이 생긴다고? 우리 동네에 아파트가 생긴다고?
우리 재건축하고 재개발이 된다고 쇼핑몰이 생긴다고? 우리 아파트값이 올라간다고?
오케이, 아비멜렉, 너는 우리 왕이야!’ 라고 하고,
9:4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우리 요한계시록 공부할 때 봤죠? 종말에는 돈과 권력이 하나가 돼요.
‘음녀’가, 배도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갖 세상 것들로 사치하면서
두 짐승, 말 위에 타잖아요. 그 말이 권력이잖아요.
권력과 돈은... 합쳐지게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세셈 사람들이 은 70개를 그에게 줬더니,
아비멜렉이 그 돈을 받아가지고 후원을 받아서 뭘 합니까?
그것으로 사람을 사는데,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을 사는 거예요.
‘방탕하다’라는 것은 윤리적 도덕적 의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고요.
‘경박하다’라는 뜻은 하나님의 뜻이건 아니건, 돈만 되면 무조건 일한다는 얘기예요.
돈을 후원받고서, 경박하고 천박하고 방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지금 아비멜렉 주변엔 다 누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거예요.
9:5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끔찍한 존속살인입니다. ‘왕자의 난’이죠.
이게 아비멜렉의 죄냐고요? 이 죄의 뿌리, 근원을 찾아가면
기드온 안에 숨겨진 그 권력의 우상, 인정의 우상이 발현이 돼서 나온 게
자기 아들 아비멜렉이라니까요.
정말로 하나님이 왕이시고, 하나님이 통치해달라고 하고, 금귀걸이를 아예 안 모았어야죠.
에봇을 아예 안 만들었어야죠. 괜찮은 척 안 했어야죠.
신앙이 있는 척 안 했어야죠. 사람 안 모았어야죠. 그럼 이런 일이 안 벌어지죠.
자녀 교육할 때 ‘너 왕 아니야.. 정신 차려!’
‘나를 통해서 미디안 13만5천명을 이겼지만, 아빠는 왕이 아니야?’
그래서 아들을 ‘아비멜렉’이란 이름을 안 지었어야죠.
▲신앙의 언어로, 신앙의 모습으로 포장된 욕망만큼, 위험한 게 없습니다.
왜냐? 여러분들이 신앙을 포장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 회개를 안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이렇게 힘들어지고, 교회가 왜 이렇게 얕아지는가요?
보면 회개가 없어요.
교회는 죄사함 받는 곳이에요. 회개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자랑하고.. 잘난 체하고.. 완장 차는 곳이 아닌데... 이상한 조직이 돼가요.
자꾸 이거 수료하면 뭐가 되고, 뭐 모범적인 리더가 필요하고,
본이 되는 사람이 필요하고... 제발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본이 못 돼요.
여러분이 저에게 윤리적, 도덕적으로 수준 높은 어떤 무언가를 원하지만...
물론 제가 열심히 할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여러분의 본은 아니에요.
저처럼 살지 마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저처럼 살지 마세요.
대신에 예수님을 따라가세요.
저를 만약에 따라 하신다면, 제가 몸부림치며 복음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
그것만 보시면 돼요.
사도바울도 ‘나를 본받으라’ 했을 때,
자기 인생을 따라오라는 게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이 본을 따라오라는 것 아닙니까?
우리 다 예수 따라가는 사람들이에요. 예수 바라봐야 되는 겁니다.
회개해야 돼요.
제 설교를 듣고, 우리 성도들이 자꾸 ‘매주 찔린다’는 얘기하시는데, 그게 맞는 겁니다.
찔려야죠. 숨은 우상을 끄집어내야죠.
여러분들이 포장하고, 위선하고, 페르소나-가면 쓰고 있는 거, 다 뜯어버려야죠.
그게 사는 길인데요. 그게 우리는 교회가 사는 길이고, 여러분 가정과 일터가 사는 길인데요.
그거 숨겨져 있으면, 이런 아비멜렉 같은 괴물이 나오는데요...
▲눅7장에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식사자리로 초대를 합니다.
아마도 바리새인은 종교적이고 율법적이고 자기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대단한 랍비시고 선지자인데
나 정도 되면 독대에서 마주해서 밥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여 초대했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죄인들을 식사자리로 초대 안 합니다.
정결법에 근거하여서 죄가 오염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늘 손 씻고 들어오고, 죄인들하고 식사자리에 마주 앉질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불렀다는 것은 ‘서로 괜찮은 사람끼리 밥 같이 먹자’ 이런 거예요.
그런데 그 자리에 불청객이 옵니다. 그 동네에서는 이 여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다 알아요.
‘저 여자는 죄인이야’ 아마도 창기였겠죠. 동네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누구나 다 아는 죄인이,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 여인 자기를 바라보는 눈길이 어땠을까요? 얼마나 따가웠을까요?
그거를 불구하고 들어와서 예수님의 발 위에 향유 옥합을 붓고
머리카락으로 쓸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죠.
그때 같이 밥을 먹던 바리새인 시몬이 정죄를 합니다. 두 사람을 다 정죄를 해요.
첫 번째, 그 여인을 정죄합니다. ‘저 여인은 쓰레기 같은 인간인데
우리 집에 들어오면 안 되는 인간인데, 우리 집을 더럽힌 인간이야’ 라고 여인을 정죄하고요.
두 번째는 예수님을 정죄합니다. ‘어? 불결한 죄인이 자기 몸을 만지면 오염되는데...
정결법을 위반하는 건데...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저 여인이 죄인이라는 거 다 알 텐데,
왜 자기의 몸을 손 대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지? 예수님은 지금 잘못하고 있네?’
종교적인 포장이 씌워지잖아요.
‘예수님, 똑바로 하세요. 죄인을 멀리 하셔야죠!’ 이게 무서운 거거든요.
그때 예수님이 그 바리새인 시몬을 포기하지 않고 레슨 훈육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눅7:40
눅7: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시몬이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받은 자니이다’
마치 기드온처럼, 말로는 정답을 얘기해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제가 지금 질문 드려볼게요. 오늘 우리가 많이 모여서 예배드립니다.
‘이 중에서 누가 가장 하나님을 사랑할까요? 누가 가장 주님을 사랑할까요?’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자기가 사함받은 양임을 압니다.
기도 제일 많이 하고, 성경 제일 많이 본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그것도 죄사함의 은혜 아래서 가능한 일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배할 수 있어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해서, 하나님 만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시는 그 보혈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에요.
이 은혜의 크기를 아는 만큼 사랑하는 겁니다.
바리새인은, 이 시몬은 지금 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종교적 열심을 내는 거 아니에요?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진 않아요.
그 안에 숨겨진 우상을 포장하고 있단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의 지금 삶을 돌아보세요.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을 돌아보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할 때,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회개하고 있습니까? 그 여인처럼, 그 여인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눈물이 다 말하는 것이거든요.
여러분 눈에 눈물이 회복되고 있습니까?
내 숨은 우상 때문에 아파하고 있고, 이 천박한 삶 때문에 아파하고 있고,
나를 수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을 흘리고 있냐고요?
그게 신앙이에요.
하나님은, 정답을 말하는 입술을 원하시는 게 아니고,
여전히 죄를 품고 살아가는 자기를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구하며
늘 겸손하게 나오는 성도들을 원하시는 것이죠.
자기 안의 우상을 들여다보고, 그것과 깊이 싸우면서,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 저는 주님의 보혈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라고 눈물을 흘리며 나아가는, 향유 옥합을 깬 여인과 같은 신앙으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3. 세 번째, 오늘 설교 제목이죠. <가시나무에는 그늘이 없어요!>
아비멜렉이 70명의 형제를 죽일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형제가 있습니다. 요담이에요.
그 요담이, 아비멜렉의 고향인 세겜 땅에 가서 세겜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해요. 무슨 비유냐? 나무 비유입니다.
1) 나무들이 첫 번째로, 감람나무한테 가서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 돼달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때 이 감람나무가 뭐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아니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내 기름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겠느냐? 나는 너희의 왕이 될 수 없다.’
2) 그러니까 이 나무들이 또 누구한테 가느냐 하면 무화과나무 한테 갑니다.
무화과 나무도 ‘나는 왕이 될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내 단 것을 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지, 내가 왜 왕이 돼? 나는 왕 안 될 거야!’
3) 그랬더니만 나무들이 이번에 포도나무에게 갑니다. 포도나무도 똑같이 거절을 해요.
뭐라고 얘기를 합니까?
‘아니 하나님과 사람을 아름답게 할 새 포도주를 나는 빚어야 돼,
나는 포도열매를 내야 되는 나무인데, 내가 왜 왕이 돼?’ 라고 거절을 하죠.
여러분 잘 보셔야 돼요.
감남나무는 올리브유 기름을 냅니다.
무화과는 단 무화과 열매를 냅니다.
포도는 그 포도의 과실을 내고, 또 그걸가지고 새 술을 담급니다.
그런 책 보셨어요? 꽃들은 다투지 않는다고요.
꽃은 안 다퉈요. 뭐 발도 없고, 손도 없어서 어디 가서 경쟁하고 비교도 안 하겠지만,
옆에 꽃이 이쁘다고 ‘하나님, 왜 저는 이렇게 (못 나게) 지으셨나요?’ 그러지 않습니다.
꽃은 옆의 꽃을 미워 안 해요. 그냥 아름다운 거에요. 그대로 좋은 거에요.
감람나무는 그 감남나무에 기름을 짤 때..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무화과나무는 단 무화과 열매를 낼 때..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포도나무는 새 술을 담글 때.. 가장 아름다운 겁니다.
감람나무가 왕이 되어서 포도나무에게 ‘야 너도 기름 짜!’ 못 짜요.
무화과 나무가 포도나무를 지배하면서 ‘야 너 이제 이렇게 포도송이만 내지 말고,
너도 무화과 나무 열매를 내!’ 못내는 거죠. 나무는 그 자리에 있는 거예요.
▲가끔 이제 성도님들이 저한테 이렇게 얘기를 해요.
‘목사님, 생활 속에서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게 뭡니까?’
‘우리 교회는 뭐 이렇게 봉사할 것도 없고, 좀 이렇게 뭘 하고 싶은데...
자꾸 안 된다고 하고...’
네 여러분, 각자가 다 감람나무도 계시고, 무화과나무도 계시고, 포도나무도 계시잖아요.
여기 감람나무는 기름만 짜시면 돼요. 포도열매에 관심 갖지 마세요.
무화과 나무시면, 그냥 무화과열매 맺으시면 되고요.
포도나무는 포도송이를 가지고 향기로운 새 술을 담그시면 되는 겁니다.
저는 안타까운 게... 자꾸 우리의 삶, 그러니까 교회를 떠난 일반 생활을 얘기하겠죠.
그 삶이라는 게, 저한테는 그것도 동의가 안 되지만,
삶이 따로 있고, 교회 안에서 사역이 따로 있고,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밖에 나가서 먼 나라 가서 하는 선교가 따로 있고...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다 구분해 놓으니까 힘들죠.
우리의 삶이 곧 예배고 사역이며 그것이 선교입니다.
감람나무에서 기름을 짜는 게 여러분의 삶이고, 그게 하나님을 위한 예배이고,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선교란 말입니다.
루터가 유명한 예화를 남겼어요.
아마 루터가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했나 봅니다.
이발하면, 이발도 하고 면도도 하고 그러죠. 아마도 면도할 때 물어봤나 봐요.
‘아, 루터 선생님, 저도 루터 선생님처럼 신앙생활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됩니까?’
라고 하니까, 루터가 아마 면도하는 중에 물어보니까 (약간 긴장하면서)
‘야, 지금 면도나 똑바로 해, 뭐 물어보지 말고!’
지금 면도나 똑바로 하라고.. 아마 이런 맥락에서 대답했나봐요.
‘이발사 양반! 이발하거나 면도할 때는, 하나님을 묵상하지 마세요.
사람 목숨이 달려 있는데, 면도칼 삐끗하면 피나는 건데...
자꾸 그런 거 질문하지 말고, 면도나 잘 하세요. 이발을 잘하세요!’
그런 예와도 있죠.
어느 청소부가 ‘나도 성직을 갖고 싶다. 나도 성직자가 되고 싶다’ 하니까,
그 말을 듣고서 어느 분이
‘자신의 앞마당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게 성직입니다!’ 똑같은 얘기예요.
다 왜 자꾸 자기는 감람나무인데, 딴 나무 신경 쓰세요?
▲그렇게 ‘옆 나무 신경 쓰는 나무’가 이제 등장합니다. 그게 바로 가시나무예요.
9:14~15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9:15
가시나무에 그늘이 어디 있어요? 비쩍말라가지고... 이게 허세라니까요. 이게 과장이라니까요.
팔레스틴 광야에는, 이런 가시나무를 종종 볼 수 있죠.
그런데 가시나무는, 자기가 ‘그늘’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숨은 우상이죠.
그 ‘그늘’이 바로 권력이죠. 인정 욕구죠. 통제 욕구죠.
근데 가시나무는 별 볼 일 없어요. 열매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니 ‘에라 모르겠다. 이참에 통제나 하자. 왕이나 되자.’
그러면서 ‘내 그늘 아래 피하래요.’
‘그렇게 안 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내려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다’ 9:15
그렇죠. 이게 가시나무의 본성이죠. 가시나무의 가장 좋은 쓸모는 뭡니까?
뗄감 되는 거예요. 뗄 감으로 쓰임 받으면 되는데,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것 아닙니까?
물고기는 물을 잘 모른답니다. 너무 당연하니까... 물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자꾸 어디에 마음을 써요? ‘물 밖에는 뭐가 있을까? 물 밖에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래서 물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거예요. 그러면 죽죠.
여러분, 우리에게 세워진 경계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 세계를 품으라’고 우리한테 말씀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재원과 자원과 능력과 은사와 단란트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감남나무란 말이에요. 포도나무란 말이에요. 무화과나무란 말입니다.
가시나무도 때로는 뗄감으로 써야 될 용도가 있겠죠. 가시나무란 얘기예요.
그러면 자기 역할을 감당해야지 ‘내 그늘로 와’ 해서
나무들이 가시나무 옆에 가면.. 찔리는 거죠. 아픈 거죠. 그렇게 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교회 공동체에서 똑같습니다. 우리가 왜 가시나무를 왕으로 세우겠습니까?
급한 마음에 뭐라도 지푸라기도 붙잡고 싶으니까... 불안하니까...
가시나무라도 옆에서 나를 좀 지지해주면 좀 안정될 것 같으니까...
그렇게 내 안에 숨은 우상이 발현되어서... 가시나무라도 또 붙잡는 거거든요.
교회 공동체도 늘 조심하기를 여러분 권면드립니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누가 이 교회를 섬기는 사람입니까?
라고 할 때 제발 가시나무를 선택하지 않는 지혜로운 성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무슨 본이 있어요? 사람 바라보면 늘 큰 코 다칩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얘기하죠. ‘하나님만 왕으로 섬겨라’
▲사사시대의 마지막 사자가 사무엘입니다.
하나님은 아마도, 쭉 하나님이 왕으로 계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 때, 구원하는 사사들을 세우셔서
이 역사를 이끌기 원하셨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 마지막 사무엘 사사 시대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주변 나라의 왕처럼 이스라엘에도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강력히 요구를 합니다.
(결국 가시나무가 왕이 된 거죠)
삼상8: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이 흔쾌하게 왕을 세워주신 게 아닙니다.
‘너희가 진짜 인간을 왕으로 섬겨봐야, 그제서야 정신 차리지...
도저히 안 되겠다..’ 하는 마음으로 주셨을 겁니다.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사사 사무엘을 버린 게 아니고 누구를 버렸다?
‘하나님을 버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도록 하려 함이라’ 삼상8:7
여러분 안에 숨은 우상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끝까지 이 우상이 여러분에게 왕노릇합니다.
그리고 늘 잘못된 결정하고, 잘못된 사람을 의지하고,
가시나무 옆에 가서 계속 찔리면서도 그 가시나무를 놓지 못하고,
그 숨은 우상에 의해서 끌려다니는 거예요.
▲제가 몇 해 전에 추천서 썼던 책이 하나 있습니다. <불가사리와 거미>
아마 다른 제목으로 출간이 됐을 텐데,
그 책에 보면 불가사리의 리더십과, 거미의 리더십 두 가지가 나와요.
거미도 막 거미줄을 많이 치잖아요. 근데 그게 중앙 분산형 아닙니까?
그거 여러분 거미줄 없애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거미 모가지를 딱 따면 됩니다.
그 얘기하는 거예요. 거미는 목이 떨어지면 죽죠? 거미줄도 다 죽습니다.
중앙 집권화된 리더십은, 그 중앙의 리더가 사라지면 모두가 사라지게 돼 있어요.
인간 중에 누가 그 조직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 만한 리더가 있습니까?
그런 조직은.. 리더의 죽음(퇴장)과 함께 끝나는 거예요.
근데 불가사리는 머리가 없습니다. 리더가 없어요.
저는 우리는 교회가 ‘불가사리 교회’가 됐으면 좋겠거든요.
인간이 머리노릇 안 하고, 이미 머리가 있잖아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
그분이 주인이시고, 우린 몸이 되어, 유기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불가사리의 특징은 또 뭡니까? 잘라져도 다시 세포분열을 해서, 다시 불가사리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는 움직이는 교회가 되고, 작은 예수가 되는 게’
우리의 소명 아닙니까? 작은 예수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게 소명 아닙니까?
내 삶의 일터가, 학교가, 또 가정이.. 사역지고, 선교지고, 다 일상의 선교사들 아닙니까!
그게 돼야 돼요.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가시나무에는 그늘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숨은 우상이 만들어낸 왕 그 왕은, 여러분들에게 쉼을 주지 못해요.
오늘 이 설교는 교훈 설교가 아닙니다.
‘야, 기드온같이 말과 신앙을 일치시키자’ 이런 교훈설교가 아니고요.
‘아비멜렉처럼 권력욕을 갖지 말자’라는 그런 설교도 아닙니다.
이 설교의 핵심은... ‘진짜 왕이 우리에게 계신다’
사사는, 인간 리더는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기드온이 살아있더라도,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성경은 늘 ‘우리에게는 더 나은 사사가 있다. 더 나은 지도자가 있다. 완전한 왕이 계시다.
그 왕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쪽으로 우리를 늘 향하도록 만들어요.
아비멜렉은 가시나무였습니다. 가까이 가면 찌르죠.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의 가시에 찔려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분이거든요.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가시나무엔 그늘이 없지만, 가시에 찔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인생의 그늘이 되어 우리에게 쉼을 주시죠.
예수가 왕이라면 왜 경쟁해야 합니까? 예수가 왕인데 우리가 왜 다투어야 합니까?
예수가 왕인데 왜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해야 합니까?
예수가 왕이신데 왜 우리가 ‘나는 혼자 있다’ 라고 낙망해야 됩니까?
내 안에 숨은 우상이 있고, 내가 늘 가시나무를 의지할 때,
우리에게 오는 것은 상처하고 아픔뿐입니다.
그러나 더 나은 사사가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삼고,
그 그늘 아래 거할 때만, 우리는 안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 우리의 그늘이 되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교회가 사람을 왕으로 놓고 섬기려 하는..
그 숨은 우상과 싸워나가며,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