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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암9:11~12, 행15:15~18, 아5:6 2006.12.03.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 지식 : 성막과 법궤의 분리 보관
법궤와 성막이 분리된 것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아벡 전투’에 가지고 나가서, 블레셋에 빼앗긴 때부터 였습니다.
(나중에 솔로몬 성전이 완공된 뒤에, 다시 예전처럼 합쳐집니다.)
이후 성막은 실로 ➔ 놉 ➔ 기브온으로 이동했고, *기브온 산당 지역
언약궤는 벳세메스 ➔ 기럇여아림(20년) ➔ 오벧에돔의 집(석달) ➔ 다윗의 장막(40년)
➔ 예루살렘 성전 완공 후에, 거기 지성소에 안치되되었죠.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피할 때, 놉의 제사장을 찾아가서,
성소에서 물려낸 빵을 제공받아 먹었던 것을 볼 때,
놉에 제사장들과, 성막이 있은 것을 알 수 있죠. *이때 법궤는 기럇여아림에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된 후(7년 6개월간 통치),
법궤는 기럇여아림(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후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은 뒤,
법궤를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다윗 성)으로 직접 모셔왔습니다.
이때 언약궤 운반 시도 중 웃사의 죽음(웃사 사건)이 발생하여,
법궤는 인근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간 머물렀던 적도 있었죠.
이때 '다윗 성'에 언약궤가 들어왔을 때,
다윗이 몸이 보이도록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춘 일이 있었고,
이때 언약궤를 다윗 성에 보존하면서 '다윗의 장막'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루 종일 계속 여호와를 찬양하는 장막
...........................................
여러분 모두에게도 추억의 집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외양(外樣)이야 어떻든, 어떤 추억이 있다면, 비록 허물어졌더라도
그곳은 마음의 집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디에 그런 집이 있습니까?
오늘 제가 집 얘기를 하는 것은, 집 생각을 하다가 오늘의 말씀을 드리게 됐기 때문입니다.
집이라고 하면 집 그 자체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니지요?
가정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저녁, 아모스서를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읽어보게 됐는데
이 아모스서는 길어야 25분 정도면 다 읽을 수 있는 아주 짧은 성경입니다.
쭉 읽어나가다가 마지막 장 바로 오늘 본문에 와서 *암9:11~12
갑자기 읽기를 멈추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역시 이 본문도 '집' 얘기였습니다.
‘다윗의 무너진 천막’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다른 말로 바꾸면 바로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집을 다시 지금의 말로 바꾸면 뭐가 되겠습니까?
교회입니다.
제가 지난 주3박4일 동안 혼자 있었던 것도 다른 게 아니라
교회문제를 생각하려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성경을 읽는 중에 교회를 상징하는 천막 이야기가 나오고
거기에 사도행전이 관주되어 있어서 봤더니
거기에도 똑 같은 내용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었습니다. *행15:15~18 (암9:11~12 인용)
▲가끔씩 하나님은 우리에게 번뜩이는 영감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감이란 것도 무슨 대단한 모습으로 오는 게 아니라
평범하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어느 믿음이 좋았던 수학자는 몇 년 동안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다가, 어느 날
교회 스테인드그라스의 정8각형을 보고, 실마리를 얻어 문제를 풀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 역시 오늘의 이 '장막 이야기'가 평범하게 찾아 왔지만, 우연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집 이야기가 나오자, 제 머리 속에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집'은 분명 하나님의 집이고,
그 하나님의 집은 모세에게 일러서 만들라고 하신 성막입니다.
성막에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소중한 법궤–언약궤-가 있고,
그 궤를 생각하니 전쟁터에 나간 법궤가 생각나고, 법궤를 빼앗았던 블레셋이 혼쭐나는 얘기며,
벧세메스로 가는 소 이야기와
또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웃사 사건 등
그렇게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산책을 하다가, 그 작은 동네서 숙소를 잃어버리고
사람들에게 물어서 찾은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호수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빠져있었는데, 갑자기 몇 개의 중요한 단서가 잡히면서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습니다. 잊어먹기 전에 차에서 컴퓨터를 꺼내와야 됐습니다.
마침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고 있었는데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더군요.
문제가 세 가지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첫째는, 다른 훌륭한 하나님의 집이 많았는데 왜 하필 '다윗의 천막 집'인가? *다윗의 장막
둘째는, 그 문제의 해답과 지금의 교회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지금 교회는 괜찮은가?
셋째,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다른 교회 말고 우리 교회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되는가?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유의깊게 살펴야 합니다.
오늘 아모스서에 나오는 말씀이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말씀은 둘 다 같은 내용이지만
사도행전의 말씀이 더 명확하게 되어 있는데, 이렇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원래 출처의는 암9:11~12절이고,
당시 아모스 시대가 그 배경임을, 여러분은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패망 직전에, 하나님이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행15:16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요.
키워드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옛 유적을 복원하는 일이 성행하고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같은 종류라면, 당 시대에 가장 잘 만들어진 것을 모델로 삼는 게 보통일 것입니다.
그게 집이 됐든, 절이 됐든, 조형물이 됐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시대, 북이스라엘 패망 직전, 또는 사도행전 시대
당신이 거처하셨던 집(교회)을 복원하고 싶어하시면서,
그 모델을 엉뚱한 데서 삼으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모델이 다름 아닌 '다윗의 무너진 장막 (다윗의 장막)' 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성막이나,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에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성소를 처음 준비시키셨습니다.
그게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이라고도 하고, 회막이라고 하고, 장막이라고도 하고, 주1) '성막'과 '회막'
나중엔 이것이 발전해서, 솔로몬 때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름이야 어떻든 그 곳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친히 거하시는 장소로서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왕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려는 공사를 하려면,
가장 최초에 당신께서 아주 섬세하게 지시하셔서 만들게 하신
'모세의 성막'을 본받으면 가장 훌륭한 집일 것입니다.
아니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솔로몬의 성전을 본따 복원하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째서 '다윗의 무너신 장막을 다시 지어 일으키고 싶다'고 하셨는가요?
암9:11~12
'다윗의 장막'이 만들어진 과정은, 이 설교의 맨 위에 '서론'겪으로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건 언약궤의 '임시 거처'였기 때문에, 댕그라니 '장막' 하나 뿐이었을 것입니다.
백향목과 화려한 건축 자재로 지어진 솔로몬 성전이나, 규격화된 모세의 성막과는 달리,
그 장막은, 언약궤만 안치하기 위해 만든 다윗 성(시온 산)에 세워진 소박한 텐트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모세의 성막'은, 기브온 산당에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실로, 놉에 있었죠.
실로 ➔ 놉 ➔ 기브온
'모세의 성막'은 그래도 최소한의 성소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뜰이 있었고, 성소가 있었고,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어야만, 제대로 된 성막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장막'은 어떻게 되어 있었느냐?
뜰도 없고, 성소도 없었습니다.
지성소 안에 두는 법궤만을 모시고, 대충 비나 바람만 피하도록 만든, 말 그대로 천막이죠.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른 집이 아니라 '다윗의 장막(집)'을 다시 세우고 싶어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그 이유가 뭐였을까요? *주 논지
왜 하나님은 그 허름한 집에 향수를 느끼셨을까요?
▲한 마디로 다윗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그 무엇인가를 사로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씀드리면, 그는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를 알아차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확실하고도 엄청난 자산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그의 열정이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끝없이 갈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임하시고 계심을 계속 따라가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라 https://rfcdrfcd.tistory.com/15978688
지금 여러분은 아직 이 말씀의 무게를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의 중요한 테마를 한 마디 짚고 넘어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당신께 드려지는 어떤 영적인 의식(儀式)이 아니라 영적인 갈망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 갈망을 가진 예배자를 찾으러 다니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역사 이래, 그 일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애쓰고,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까지 그 일에 성공한 사람이 다윗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열정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집'을 좋아하셨습니다.
집(교회)이라고 다 같은 집은 아닙니다.
바로 그 갈망과 열정과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겉모습은 비록 다 쓰러져 가는 천막집이라도
거기 거하기를 좋아했던 것이고, 그랬기에 그 퇴락한 집에 깊은 향수를 느끼시면서
다시 그 집을 일으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행15: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암9:11~12,
오늘날 교회는 웬일인지
우리 하나님이 건물에 감동받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성도와 목회자들은 어떻게든 좋은 위치에다
크고 아름다운 교회 건물을 지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교회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 진정한 예배에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화려한 궁정을 원하시는게 아니라 열정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화려한 솔로몬의 성전 봉헌을 두고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 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며
이 전이 높을 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왕상9:6~8)
또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 온 제자들이 헤롯 성전의 그 웅장한 모습을 보고 놀라자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눅21:6)
그 말씀대로 솔로몬 성전이나 헤롯 성전은 지금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겨지지 않고 다 무너져
지상에서 영원히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건물보다도 우리 인간과의 만남을 간절히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의식이나 법도를 넘어서 우리와의 순수한 만남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현대 교회가, 또 우리가 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 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그 분에 대한 열망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그것은 지금 교회의 문이 잠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계3:20)
주님은 교회의 문 앞에 서서 다윗처럼 성령의 임재를 위해 장소를 예비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부드러운 노크 소리를 듣고 문을 열 사람과 교회와 도시를 찾으십니다.
구약과 신약 전편을 통해서 우리 주님은 문 앞에서 노크하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가서에서도 주님은 당신의 집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연인인, 교회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아5:2)
지금 당신의 머리에는 밤이슬이 가득한데도 자기 연인인 교회는 문을 열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집이 잠겨 있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이 열쇠를 자기 연인에게 주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날 겁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노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6;19)
주님의 임재에 대한 열쇠는 바로 우리에게 쥐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 문을 열고 지옥 문을 닫을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분명히 열쇠는 우리 손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주 아주 놀라운 현실을 분명히 목도하고 있습니다.
천국 문이 사람들의 전통으로 굳게 닫혀져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포기하시지 않고 당신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우리는 솔로몬의 신부와 똑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엇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아5:3)
하나님과 약혼한 연인이요, 신부인 교회는 너무나 안일해져 있는 겁니다.
교회는 귀찮기 때문에 문 열기를 거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자니 그 대가가 너무 커 보이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지니까 주님이 내 마음 문을 두드리셔도
마음은 냉랭하고 걸음은 느려져서 마지 못해 가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안타깝게도 노크 소리는 멈추고 맙니다.
우리가 놀랄 때가 바로 그때입니다.
우리는 깜짝 놀라서 솔로몬의 게으른 신부처럼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문을 열지요.
하지만 남은 것은 그 분이 서 계셨던 자리에서 피어나는 향기 뿐입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아5:6)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들의 슬픈 영적 상황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느긋해져 있습니다.
교회들은 영적 불임(不妊)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에 대한 대가 지불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의 대표적인 게 예배인데
그 예배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큰 대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는 지금,
왕없이 왕궁에서 사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첫 사랑에 대한 열정과 갈망을 회복한다면,
왕이신 주님이 궁전에 나타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날 교회는 그 노크 소리만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그 노크 소리에 투덜거리기만 합니다.
“아니요. 지금은 안됩니다. 지금 일어나기엔 너무나 편안히 누워있는 걸요?
좀 기다리시면 안되겠습니까?지금 두통이 좀 있어서요.
하여간 저는 벌써 신발도 벗었고 발도 씻었잖아요. 지금 꼭 문을 열어야 합니까? “
제가 지금 현대 교회의 상황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는 걸까요?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지난4500년 동안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몹시 찾고 있다는 게 과장이겠습니까?
제 얘기가 아니라서 실감은 덜 나겠지만, 제 친구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친구가 몇 주간 동안 외국으로 출장을 다녀왔답니다.
그런데 저하고는 달리 그 친구는 아이들에게 아주 자상해서 어디 다녀오면
맨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가족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꼭 준비를 한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물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엔가 아이들에게서
섭섭함을 느끼게 되더라는 겁니다.
출장을 다녀 오면서 자기 집 벨을 누르면 아이들이 우당탕탕 뛰어 나오는데
‘아빠 다녀 오셨어요’인사 한 다음에는 곧 바로 아빠의 손을 본다는 겁니다.
얼굴이 아니라 손을 보고 선물 비슷한 게 있으면
낚아채듯이 가지고 자기들 방으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친구가 말하기를, “이 녀석들이 언제가부터
내 얼굴을 보는 것보다 내 손 보는 걸 더 좋아하더라구!”그래요.
아마 그 친구의 마음은 아이들이 아빠의 얼굴만 보고도
그것으로 만족하기를 바란 것 같습니다.
뭐든지 알맹이가 중요합니다.
교회도 역시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알맹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하나님께서 지금 이 예배하는 자리에 확실히 계시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누가 들어오든지 그것을 느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임재하심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그 영광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열정적이고 얼마나 그분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보여드림으로써만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길을 좀 더 멀리 돌아가야만 합니다.
오늘 나머지 시간은 그 얘기에 다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윗의 장막'을 보고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천막으로 된 집이지만 그 집은 겉보기와는 달리 보통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 집은 기럇여아림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에 와서야 완성되었습니다.
오는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어떻해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되가져오고자 했을 때, 그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금으로 도금된 그 상자에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언약궤 사이에 있었던 두 그룹의 펼친 날개 사이에 있었던 불꽃에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기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교제, 그것을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또는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가 가는 곳에는 어디나 승리와 능력과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갈망으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정예부대 삼만을 동원해서 호위했지만,
그러나 그 첫 시도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나곤 타작 마당에서 궤를 실은 소가 뛰고 그 궤를 잡았던 웃사가 그만 저주를 받아
죽고 만 것입니다.
그 실패의 원인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법궤는 반드시 사람이 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번 째 시도 때 다윗은 그 운반을 소가 끄는 수레가 하도록 둔 것입니다.
물론70년 동안이나 법궤를 관리해 왔던 아효와 웃사의 권위에 눌린 이유도 있지만,
여러 정황을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법궤는 길이가114cm에 가로 세로가68. 4cm입니다.
궤 뚜껑은 금으로 만들어졌고, 뚜껑 위에는 정금으로 만들어진 두 그룹이 얹혀져 있었습니다.
또한 궤의 네 귀퉁이에 금고리를 달고 고리에 도금한 채를 연결해서 운반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물질중의 하나입니다.
궤 자체야 그리 크지 않지만 여러 부분이 금으로 되어 있는 그 상자의 그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러므로 16km나 되는 여정을 소가 끄는 수레로 옮기려고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수레에 실어서 소들이 끌고 가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영광이라는, 또는 부흥이라는 험난한 여정에서 고생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짐 지우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행렬 가운데서 노래하고 춤추기만을 원합니다.
이런 덜 익은 부흥 축제들은 잘 나가는 것 같다가 마침내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하나님의 충돌에 부딪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이제 그만 해라!너희가 나를 생각없이, 예의 없이 대하는 짓을 그만 해라.
아무 수고도 없이 나를 어느 지점까지 데려가기를 원하느냐!
그러나 정말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임하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될 것이다.
나의 영광을 너희의 불완전하고 인간적인 프로그램과 방법들과 의식들에 담으려고 하지 마라.
제발 너희 수레를 취하든지 나의 궤를 취하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해라!”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적인 방식에 질려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더러 그것을 알도록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궤를 흔드신 것입니다.
웃사는 궤를 그냥 둬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흔드신 것을 사람이 붙잡기를 원치 않으신 겁니다.
▲다윗이 두번 째로 그 궤를 운반하기로 했을 때는 하나님의 지침을 주의 깊게 따랐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직접 그 일을 하기를 원하셨으므로 레위인을 시켜서 그 궤를 옮깁니다.
그리고 레위인이 여섯 걸음을 뗄 때마다 소 한마리를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섯 걸음 당 제사 한 번! 여러분 상상이 가십니까?
레위인들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레위인들은16km나 되는 거리를 가는 동안,
그 무거운 언약궤를 그들의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 행렬 전체가 얼마나 행로가 더뎠고 지쳤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어떻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땀을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땀은 하나님께나 이 땅에서나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땀은 가치를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땀을 흘리는 예배를 바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예배는 땀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게을러지면, 하나님의 임재를 운반하면서도
땀 흘리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옆에서 따라가며‘하나님의 영광’을 운반하는 흥분에 가득차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기 오시기까지 여러분은 어떤 땀을 흘리셨습니까?
기도의 땀입니까?연습의 땀입니까?
아니면 대중기도 부담의 땀입니까?
십일조 또는 헌금의 땀을 흘리셨습니까?
마침내 다윗이 레위인들과 예배자들과 함께 그 먼 길을 도보로 이동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 지 우리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감격과 기쁨 또한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윗은 그렇게 아이처럼 춤추며 좋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그의 아내 미갈은 다윗을 책망했고 업신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말하지요.
“이 모두가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다. 주가 나를 나되게 하셨는데 춤추며
기뻐하는 게 옳지 않느냐.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어놀지 못할 게 뭐가 있느냐?“
그러면서 오히려 미갈을 책망합니다.
그로부터 미갈은 다시는 다윗을 만나지 못하고 평생 불임여성으로 살 수 밖에 없어던 것입니다.
그 미갈 같이 영적으로 아무 것도 낳지 못하는 게 지금 나 자신, 또는 우리 교회는 아닌지요?
▲마침내 녹초가 된 레위인들이 다윗이 만든 임시 장막에 도착했습니다. *‘다윗의 장막’
그 후에 다윗과 레위인들 사이에 있을 법한 얘기는 이런 것입니다.
먼저 다윗이 말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언젠가는 더 좋은 처소를 마련하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이곳에서 예배하려고 합니다. ”
그러자 제사장들은 지친 어깨 위에서 궤를 내려놓으면서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둘 씩 떠나려고 하자 다윗은 그들을 멈춰 세웁니다.
“아니요. 지금 떠나면 안됩니다!”
“아니라뇨?다윗 왕이시여!우리는 지금 언약궤를 메고 수십km를 걸어왔습니다.
게다가 수천 마리의 짐승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제 된 거 아닌가요?
게다가 여기는 휘장도 없고 지성소도 없쟎습니까?” *지금 성막은 기브온 산당에 있음
그러자 다윗이 말하지요?
“아니요. 내가 여러분 레위인들의 순서를 다시 정한 것은 실로에서처럼
여기서도 언약궤를 이렇게 방치해 두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에봇을 다시 입으시오.
비파와 수금을 다시 잡으시오. 몇 명은 가서 점심을 먹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레위인들이 묻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를 위해 여기 남아있는 것입니까?
왕이시여. 우리의 연주를 듣기 원하십니까?”
“아니. 아니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청중이십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하십니다”
▲오늘 두서없는 말씀은 여기가 끝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을 한 줄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갈망을 갖자’는 것입니다.
그 분의 임재를 느끼는 것을 유일한 기쁨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와 예배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 그 분 얼굴 보는 것을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아울러 전 예배와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물으십니다.
“어디 나만 구하는 사람 없나?내 얼굴 보기만 원하는 사람은 없나?”
그렇다면 우리의 교회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교회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회라도 그 일을 다시 시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는 교회, 오직 예배 중에 하나님만의 영광을 구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최우선으로 삼는다면, 우리 교회는 진정 교회다운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방법이 뭐겠습니까?
주일이 돌아오기 까지 그6일 동안 레위인들이 법궤를 메고 들어오는
그 땀을 흘려야 되지 않겠어요?
또한 지난 주에 우리가 나누었던 말씀처럼 상한 심령을 가지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를 위하기로 맘먹으면 일은
훨씬 더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일이 다 끝난 줄 알았던 레위인에게
또 다시 어려운 임무가 주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드린대로 다윗의 장막엔 사람과 하나님을 나누는 휘장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레위인들이 휘장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 역시 모두가 다 그 휘장 역할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주는 그 일을 우리의 몸으로써 해내야 합니다.
24시간 동안 예배자로서 그 하나님의 임재가 계속되도록 그 장막을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은, 지금 우리로서는 몇 가지 밖에 없습니다.
가진 거라고는 돈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그 돈을 다 드려야 합니다.
또 가진 거라곤 시간 밖에 없습니다. 그 시간을 드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시간으로 구제하고 봉사하고 찾아가고 길거리에서 찬양하는 겁니다.
또한 재능 밖에 없습니다.
그 재능을 하나님께 바치면 안 되겠습니까?
간증하고 연주하는 일을 계속 하십시오,
외롭고 힘든 영혼들의 마음을 만져 주십시오!
그래서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진정한 교회,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다시 세우고 싶은 다윗의 집처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복을 받기보다, 복 주시는 그 분을 더 갈망하십시다!
부흥보다 부흥을 주시는 그 분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내 마음의 평화보다 그 분의 임재하심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를 공급하시는 그분의 손보다 그 분의 얼굴을 우리는 더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기도 제목 역시 ‘주여!이 시간 우리에게 임재하옵소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옵소서!오직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게 하옵소서’
그것이 되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일어나는 역사를 압니다.
단30분의 임재 하심으로 살인자 사울은 순교자 바울로 변했습니다.
그 일이 분명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과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와 우리 도시 위에 지금부터 곧바로 있어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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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과 회막
"회막 Tent of meeting" 이라는 표현은 구약성서, 특히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만나실 장소의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보통 '회막'은 모세의 성막을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막이 세워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임시 모임 텐트(회막)에서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출33: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출33장 상황은, 아직 성막이 완성되기 이전 상황이죠.
성막은 출40장에서 완성되죠.
회막은, 금송아지 숭배 사건 직후,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들과 같이 계시기 싫어하셔서
진 바깥에 만든 것이었습니다. 출33:7
나중에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는, 그 성막은 항상 진 한 가운데 위치했죠.
모세는 텐트를 들고 야영지 밖에 좀 떨어진 곳에 쳤으며,
하나님은 그곳을 '회막 Tent of Meeting'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회막 안으로 들어가면 구름 기둥이 내려와 입구에 머물렀고,
주님께서 거기서 모세와 대화하셨죠. (출33:7, 9).
구름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죠.
모세가 진영 밖에 모임의 천막을 설치한 사실은
백성들이 시내에서 금송아지를 만들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음을 강조합니다(출33:3).
성막이 세워진 후 모세는, 임시 천막(회막)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이때부터는 '모임의 천막'이라는 용어가 성막에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는 회막이 성막과 같은 용어로 사용되었죠.
그래서 우리는 회막과 성막이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회막이 세워질 처음 시기에는, 이와 같이 진 바깥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르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